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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다가 군침을 흘리기는 처음이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나도! 회먹고 싶어!"를 외치며 허기짐을 느꼈다. 거기다 보너스는 인생의 맛도 함께 느낄 수 있달까.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바다 한가운데 서 있는 듯, 바다 근처 어느 마을에 살고 있는 듯 행복해졌다. 그런, 생생하고 잔잔한 느낌은 나를 마음 따뜻하게 했다.
사람들은 때론 힘들면 여행을 떠나곤 한다. 마음이 허기져서, 상처받아 슬퍼서, 인생이 피곤해져서 떠나곤 한다. 마음이 공허할 때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다가 아닐까 한다. 겨울바다를 보고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사람도 있고, 끝이 없는 바다 앞에 서면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된다는 사람도 있다. 바다는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거기다 더해 많은 것들을 준다.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는 바다는 과한 욕심을 내지 않으면,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한다. 그 베품 앞에서 우리는 또 겸허해지곤 한다.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에는 수많은 어류들이 등장한다. 작가 한상훈 씨는 안 잡아본 물고기가 없을 정도다. 그 요리법도 꽤뚫고 있어 맛깔나게 설명한다. 게다가 삶이 담긴 에피소드도 엿볼 수 있다. 각각 소재에 얽힌 사연은 마음을 잔잔하게 하고 코끝마저 찡하게 한다. 찡하게 짠하달까?
갈치, 삼치, 모자반, 숭어, 문어, 고등어, 군소, 볼락, 홍합, 노래미, 병어, 날치, 김, 농어, 붕장어, 고둥, 거북손, 미역, 참돔, 소라, 돌돔, 학꽁치, 감성돔, 성게, 우럭, 검복, 톳, 가자미, 해삼, 마지막으로 인어까지 읽다가 배부를 이야기가 가득이다.
한상훈 작가는 '생계형 낚시'를 한다. 생계형 낚시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물물교환을 하고 이웃에게 그냥 주기도 하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낚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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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팔지는 않지만 생계형 아닌 것은 또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종종 주기도 하고 그리고 뭘 받으니까 물물 교환이다. 할머니에게 주면 마늘과 파, 고추를 주신다. 친구에게 주면 술을 사거나 또 다른 고기를 준다. 육지에 보내주면 돼지고기가 오기도 한다.
그러니까 옛날형 낚시인 것이다. 공동체가 살아 있을 때 주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예전에는 고기잡이 다녀온 사람은 으레 이웃에게 나눠주곤 했다. "반찬이나 하소" 툭 던져주기도 하고 미안해서 안 받으려는 사람에게는 슬그머니 놓고 휭, 사라지던 모습 흔했다. 가난과 풍요를 분별없이 공유하는 것, 그게 공동체이다. - 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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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낚시 철학, 삶의 철학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래서 그의 낚시가 더 좋아졌다.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그의 재미있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슬며시 웃음이 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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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고등어를 어떻게 회로 먹어요?"라고 주로 반응했다. 살아서도 썩는다는 말을 듣기 때문이다. 요즘은 제주도 직송 고등어회가 왕왕 텔레비전에 나온다. 때문에 '아직 한 번도 못 먹어봤다'는 대답이 대부분이다. 들어보니, 역시나 비싸다. 하긴 비행기 타고 간 게 값쌀 리가 있겠는가. 한 번도 못 먹어봤다는 말은 한 번도 못가봤다는 말보다 더 불쌍하다. 못 사먹는다면 방법은 하나. 낚아 먹으면 된다 - 78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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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명쾌한 결론인지. 아직 한 번도 못 먹어봤다는 말은 한 번도 못가봤다는 말보다 더 불쌍하다니. 비싸다고 불평불만 말고 바다로 나와 낚아 먹는 쉬운 방법이 있다니. 후훗. 자급자족하지 않고 소비하려는 현대인들에게 명치를 걷어차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에 맞물려 또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밤바다라 볼락 낚시를 나갔을 때, 두런 두런 대화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낚시도 하고, 사람 사는 이야기도 훔쳐듣고 그것은 또 바다 위에서 얻은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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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안 좋을 때는 사업을 안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내가 말했잖냐"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잖소."
"먹고살기만 하면 뭐가 문제겠냐. 너무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게 문제지."
보아하니 형제가 밤낚시를 하러 온 모양이다. 육지에서 실패를 본 동생이 고향에 온 거라는 것은 안 봐도 뻔하다.
"형님 돈은 어떻게 해서든 벌충해놓을 테니 걱정 마시오."
"......"
"못 갚으면 어디 가서 콱 죽어버릴라요."
"너는 사업도 너무 서두르다가 말아먹더니 죽는다는 말도 꼭 그렇게 하는 구나." - 104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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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바다에 나간 이들 중 사연 없는 이가 어디있을까? 사람 사는 곳에 바다가 있고, 바다와 함께 사람이 산다. 바다에 나와 삶을 털어내는 형제의 모습. 눈을 감으면 그려진다. 그 깊은 바다에 형제와 함께 서 있는 듯, 그리고 볼락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떻게 먹는 게 맛있는지, 어떻게 하면 잘 잡을 수 있을지 말이다. 사람 맛에서, 생선의 맛으로 넘어간다. 이런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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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는 물었을 때와 물지 않았을 때, 두 가지의 인간이 만들어진다. 낚아내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백지장처럼 하얗게 기억이 없다. 생각은 사라지고 몸만 작용을 하는 것이다. 오로지, 도망치려는 물고기와 잡아올리려는 사람 사이 힘의 기우뚱한 균형, 줄이 터지기 직전까지만 허용하며 녀석을 지치게 하는 긴장의 순간들만 이어진다. 낚시에 빠진 동료작가 한 명은 이 순간을 오르가슴과 같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툭.
채비가 터졌다. 세상에 줄 끊어진 낚싯대처럼 허무한 게 또 있을까. 낚시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몸에서 피가 쭈욱 빠져나가고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을. 집안이 망하는 것보다 더 크고 깊은 절망을. - 174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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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바다낚시를 해봤다. 대어를 낚은 것도 아니고 자잘한 물고기들이 배좀 채워보겠다고 낚싯대를 문 것이다. 툭 끊어지는 경험, 굉장히 허무하다. 하지만 다 잡은 고기를 놓치는 허망함과 같을까? 생계형 낚시꾼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겠지만, 그가 써놓은 감정이 어쩐지 잘 느껴진다. 아마도 글 사이사이 낚시를 넘어 바다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이것은 보통일이 아니라는 그의 속삭임이 마음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어무이 아버지에게 문어를 잡숫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문어와 씨름한 아이, 새끼를 나은 고양이에게 노래미를 넣은 미역국을 끓여줬더니만 미역부터 쭉쭉 뽑아먹더라는 이야기, 시장에서 복국을 팔던 아줌마 이야기, 섬마을에 시집와 친정도 못가본 여인들의 이야기.
이 책은 어류들이 팔딱인다. 회를 뜨고, 탕을 끓이고, 얼리고, 지지고 볶고. 하지만 그보다 더한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살아있는 이야기. 팔딱거리며 뛰는 물고기들보다 더 팔딱이는 사람 사는 이야기 말이다. 싱싱한 바다 안의 생물들, 싱싱한 바다 밖의 사람들.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마음도 따뜻해지고 즐거워진다. 그리고 군침이 돈다. 살아야 겠다는 군침, 먹어야 겠다는 군침, 잘 살아야 겠다는 군침 같은 것들 말이다. 그것은 이 책이 주는 선물이며, 행복이다. 읽어보시라. 이 군침도는 이야기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