뺄셈


엄마는 뺄셈 문제를
풀 때마다 머릿속이
헝클어져서 하기가
싫다고 말한다

그나마 덧셈은
잘한다 뺄셈의
뇌세포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나 보다

기억의 뺄셈으로
세상을 뜬 남편의
생일을 말하지
못해도 아이고,
가버린 사람 생일
뭐하러 생각해
그렇게 눙친다

기억이 인간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인간이 아닌가

엄마는 했던 말을
또하고 또하고
또한다 언젠가
그렇게 또할 수
있는 말조차
잊어버릴 것이다

오늘 엄마는
손가락으로
뺄셈하는 법을
새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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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시


난해한 시를
쓰면 성의가 있고
뽀대가 난다고
믿는 거냐

읽기 쉬운
무해한 시는
일기장에나
쓰라고 말하는
구정물 같은
오만과 편견

삶에 밀착하지
않는 공허한
유리알의 서사를
아름답다 말하는
네 손가락이나
다듬어봐

답답하면 네가
쓰든지 써야지
별 수 있니

일상의 언어를
경멸하며
한국 문학의
미래를 논하는
무해한 달팽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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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일 아침


빨강 티셔츠에
빨강 바지의
중년 여자는
자신의 표심을
입증한다

팔순의 할머니는
투표소가 어디냐고
묻는다 가만가만
걸음을 떼며

라일락 꽃가지
방정맞게 흔들며
건너편에서 오는
여편네 꺾은
봄을 전시한다

까마귀 한 마리
넙데데한 날개를
휘두르며 머리위로

분노의 흉조
세상이 뒤바뀌지는
않겠지 그래도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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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을 썰다


냉장고에서 한 달
묵은 당근을
꺼낸다 대가리에
조금 싹이 난 것
빼고는 당근은
아주 멀쩡하다

흰색 플라스틱
도마는 옅은
주홍 물이 드는데
어라,
얘 바람들었어

가운데 심지가
숭숭 뚫린 당근을
보며 생각한다
바람난 배우자와
산다면

내다 버릴까
아니야, 어차피
카레에 들어가면
당근은 그냥
당근일 뿐
가스불에 뭉근히
시간이 약이지

길고 반듯하게
썰어서 샐러드
통에 담아둔
바람든 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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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에 대한 경외


화장실의 비누 받침 아래
곰팡이가 아주 가느다란
실뱀처럼 감겨 있었다
엊그제 화장실 청소를
했는데 노안이 온 눈은
그 푸른 뱀을 놓쳐버렸다

락스물에다 담그고
20분을 기다린다 그리고
거친 검은색 솔로 북북
문지른다 녀석의 보드라운
피부는 물크러지며
비명이 터진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어

저녁에 손을 씻다가
조심스럽게 비누 받침을
뒤집어서 확인해 본다
살았니 죽었니

바늘귀 같은
검은 점 하나 가만히
숨을 내쉰다
후우,

눈에 보이는 너의
세계가 전부인 듯
살지 마라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있었고
영원의 시간을
살아갈 테니

천천히 미끄러지며
물방울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곰팡이에 대한
무한한 경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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