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춘(早春)〉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인물이 아닌 시간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른 봄에서 여름에 이르는 시간이 그것인데 영화 속의 인물들은 마치 그 시간의 흐름을 증거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는 영화 내내 그러한 증언들을 듣게 된다. 한번 예를 들어 보자.
영화 초반부에 남자 주인공 스기야마는 오랜만에 도쿄 본사에 올라온 자신의 상사를 집에서 묵게 한다. 손님의 이부자리를 마련한 부인에게 그는 묻는다.
“밤에 추울지도 모르는데 이불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닌가?”
아직 쌀쌀한 기운이 밤에 남아있는 그 때가 바로 이른 봄이다. 영화는 제목이 말해주는 이른 봄이라는 그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렇듯 초봄에서 시작된 시간적 배경은 계속해서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제시되는데 스기야마의 친구인 미우라에게 이르면 초여름으로 변화한다.
미우라는 스기야마의 회사 동기로 병을 얻어 누워있는 처지이다. 거의 거동을 못하고 투병생활에 지친 미우라에게 스기야마의 방문은 너무나도 반갑고 고마울 따름이다. 투병생활의 외로움을 토로하면서 미우라는 말한다.
“내가 병을 얻어 누워있게된게 벌써 백일째군. 그새 봄에서 초여름이 되었네 그려.”
이제 시간은 초여름에서 성하(盛夏)로 이르게 되는데, 그 때는 바로 영화의 끝부분에 해당한다. 샐러리맨 생활에 대한 회의와 부인과의 불화를 떠안고 지방의 공장으로 전근온 그에게 사무실의 동료는 무더위에 대해 말하며 그에게 묻는다.
“도쿄도 여기처럼 더울까? 여긴 산으로 둘러싸여 열기가 빠져나갈 곳이 없어서 더 덥게 느껴져.”
이러한 대사들 외에도 시간은 여러 다른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영화 내내 제시된다. 그렇다면 왜 인물들은 계절에 대한 이러한 단서들을 마구 흘려대는 것일까? 과연 〈조춘(早春)〉에서 계절은 어느 정도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우리는 거기에 부여된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즈가 말하는 계절이란 일차적으로는 시간적인 변화를 포함하고 있는 물리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춘(早春)〉의 인물들이 말하는 시간들은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오즈는 여기에 좀 더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 또한 인물의 대사를 통해 제시된다. 우리는 그것을 스기야마와 상사 오노데라의 대화 속에서 볼 수 있다.
부인을 남겨두고 홀로 전근지로 떠나온 스기야마는 자신의 괴로운 심사를 상사에게 털어놓는다. 마치 다정한 부자(父子)처럼 두 사람은 강물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데 그들 주변으로 조정 연습을 하는 젊은이들의 배가 지나간다. 그것을 보고 오노데라는 말한다.
“저들이야말로 인생의 봄이군.”
사실 인생의 봄을 살고 있는 것은 주인공 스기야마에게도 해당된다. 이제 막 서른의 초입에 들어선 그는 자신의 삶에 산적한 문제들과 직면하는 어려움을 겪는데, 그러한 갈등과 고통이야말로 〈조춘(早春)〉의 주요한 테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스기야마는 매일 반복되는 회사생활에서 회의를 느끼고 별다른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그러던 그는 같이 전철로 출퇴근하면서 알게된 여성과 급속도로 가깝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부인과의 관계는 급기야 별거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오래전에 병으로 아들을 잃은 상실감과, 거대 조직을 떠받치는 일개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샐러리맨으로서의 비애가 그로 하여금 좀처럼 삶에 천착하지 못하고 떠다니게 만들었던 것이다.
영화 〈조춘(早春)〉에서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끊임없이 제시되는 계절, 즉 시간의 의미는 눈에 포착되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영화가 진행되어갈수록 관객은 눈에 보이는 즉자적인 의미로서의 계절과, 그와 동시에 인생의 한 시기, 즉 상처와 고통 속에서 혼란을 겪으며 부유하는 삼십대 초반의 남자의 내면과 조우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오즈는 항상성(恒常性)에 따르고 있는 자연의 시간과 그 법칙을 조화의 이상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계절은 마치 자신이 오고 가야할 때를 아는 존재처럼 여겨진다. 사람들은 계절이 자연 속에 머물다 가는 궤적을 명확히 추적해낼 수 있다. 그러나 남자 주인공의 내면은 얽힌 실타래와 같아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혼란과 고통을 야기시킨다.
결국 〈조춘(早春)〉에서 오즈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조화로운 시간, 자연에로의 회귀이다. 이것은 이 영화의 처음과 끝장면을 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기차가 지나가는 장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역시 시골 마을을 지나가는 기차와 그것이 지나간 뒤의 산을 잠시 동안 보여준다. 기차는 얼핏 보기에 기계적이고 인위적인 산물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고 출발한다는 사실은 자연의 법칙과 유사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는 부부는 창 밖 너머 멀리 지나가는 기차를 함께 바라본다. 그리고 그 기차가 지나간 곳에는 산이 그들의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든든하게 서있다. 이제 한 남자의 내면에 일렁이던 고통과 상실의 감정은 잔잔해질 것이며, 그것은 그가 견뎌온 시간에 의해 마침내 선물처럼 주어졌다.
이렇듯 오즈에게 있어 시간은 상처입은 것과 잃어버린 것의 재건과 복귀를 의미한다. 영화 〈조춘(早春)〉에는 계절과 자연에 대비되는 한 남자의 흔들리는 내면의 부조화가 포착되어있다. 이것은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결국 치유와 회복으로의 여정을 가져오게 만드는 동인(動因)으로 작동하게 되고, 우리가 영화의 끝부분에서 목격하는 것도 화합과 평화의 대단원인 셈이다. 하지만 〈조춘(早春)〉에서 그러한 성숙과 변화, 조화와 통합의 시간에 이르게 되는 이는 스기야마 뿐만은 아니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주인공 스기야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의 주변 인물들을 부수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즈에게 있어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시간이며, 그러한 이유로 영화 속 각각의 인물들은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동등한 중요성을 획득한다고 할 수 있다.
아이를 잃은 후 겉도는 남편의 마음을 잡지 못해 속앓이를 하는 부인 마사코, 자신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달래기 위한 상대로 늘 유부남을 택하고 스스로를 상처 속에 가두는 스기야마의 애인, 시집간 딸의 결혼 생활에 노심초사하며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사코의 어머니, 30년을 다닌 직장에서의 퇴직을 앞두고 생겨난 걱정과 근심을 술로 달래는 술집의 손님,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마에 시달리다 젊은 날에 생을 마감하는 스기야마의 동료 미우라, 한직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삶의 여유와 즐거움을 발견하고 그 지혜를 스기야마에게 일러주는 상사 오노데라와 같은 인물이 그러하다.
이렇듯 점점이 흩어지고 열려진 개개의 시간들은 극의 흐름에 따라 하나의 아상블라주(assemblage)를 형성한다. 개별적으로는 작고 알아보기 어려운 조각들이 한데 어우러져 인식 가능한 덩어리, 즉 3차원적 형상을 획득하게 된다. 오즈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삶 안에 내재된 다양한 문제적 국면들에 대해 보여주면서, 그것을 작동하게 만드는 반복적이고 동일한 기제를 성찰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인간과 세계를 넘어 우주라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사유에까지 맞닿는 지점을 보여준다.
〈조춘(早春)〉은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오즈가 만들어낸 시간의 아상블라주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보기에 인생은 그렇게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며, 그렇게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화를 깨뜨리는 인간의 무질서 때문이다. 무질서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어리석음과 욕심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과 대비되는 항으로서 시간은 존재한다.
오즈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바로 그러한 시간에 대한 찬미를 아낌없이 바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갈등과 고통, 혼란과 무질서적 상황들에 처한 자신의 영화 속 인물들에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오즈가 보기에 그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시간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춘(早春)〉의 인물들은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고 구원받는다. 남편의 외도를 용서하지 못하고 집을 나간 부인은 결국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남편은 그런 부인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금 부인과 함께 하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기억들은 이제 과거로 흘러가 버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스기야마는 부인에게 작은 시골 마을에서의 3년을 견딜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부인은 답한다.
“3년이란 시간도 금새 흘러가버릴 거에요.”
오즈는 그들의 미래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더라도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살아낼 것임을, 시간은 이제까지 그래왔듯 그들 삶의 유일하고 힘 있는 증인이 되어줄 것이라고 일러주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