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피


  "아휴, 이걸 어떻게 꺼내고 정리하지?"

  미선은 조금의 틈도 없는 냉동실을 심란한 표정으로 들여다보았다. 이제 3월이 되면 곰피(쇠미역) 철이 끝난다. 이때 곰피를 사서 냉동실에 넣어두면,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서 먹을 수 있다. 문제는 냉동실이었다. 냉동실에는 이런저런 먹을 것들이 들어차 있었다. 미선은 냉동한 베이글과 기정떡을 꺼내었다. 그런 건 김치냉장고로 옮겨서 좀 빨리 먹으면 될 것 같았다. 빵과 떡을 치우고 나니, 냉동실에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곰피 2kg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었다.

  작년에 주문한 곳에서는 사지 않기로 했다. 곰피가 너무 잘고 볼품없었다. 그냥 물미역같이 흐느적거리는 것이 영 별로였다. 미선은 다른 판매처의 곰피 상품평을 주의깊게 읽었다. 사진을 올린 리뷰를 보고서, 주문할 곳을 정했다. 미선이 주문한 곰피는 정확히 이틀 후에 현관문 앞에 놓여있었다. 스티로폼 박스를 열자, 얼음팩 하나가 푸른 비닐봉지 위에 얌전히 포개어져 있었다. 곰피가 크고 깨끗했다. 올해 곰피는 잘 주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있자, 그 블로그 이름이 뭐였지?"

  미선은 가끔 찾아보는 요리 블로거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숙희였나? 그래, 숙희의 요리 블로그였던 것 같다. 구글 검색창에 '숙희 요리 레시피'라고 검색어를 입력했다. 블로그가 바로 뜬다. 숙희 씨가 예전에 곰피 장아찌 레시피를 올렸을까? 있었다.

  '봄을 깨우는 곰피 장아찌 레시피 알려드려요'

  미선이 찾은 곰피 장아찌 레시피는 2023년도 것이었다. 미선은 메모지에다 레시피를 대충 휘갈겨 썼다. 그렇게 레시피를 적어놓고는 블로그를 한번 쓱, 둘러보았다. 숙희 씨는 요즘도 계속 레시피를 올리고 있나 궁금해졌다. 블로그의 공지는 2025년 11월에 멈춰있었다.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모든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난여름부터 암 투병 중입니다. 예기치 않게 암을 발견하게 되었고, 지금은 항암치료를 열심히 받고 있어요. 힘이 들지만, 그래도 가끔씩 요리 레시피를 올리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미선은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숙희 씨가 써놓은 자신의 병기(病期)는 4기였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구나. 요리 블로그 소개글의 숙희 씨는 이제 40대 중반이 되었고, 두 명의 쌍둥이 아들이 있었다. 블로그의 방명록에는 숙희 씨를 응원하는 댓글들이 주르륵 달려있었다.

  미선은 끓는 물에 살짝 데친 곰피가 파릇파릇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보았다. 저 곰피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겨울에 나올 것이다. 미선은 자신이 곰피 미역으로 언제까지 장아찌를 만들어 먹을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았다. 잘 가늠이 되질 않았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달린 일이지 않은가.     

  그날 오후, 미선은 공책을 하나 사려고 집을 나섰다. 나가는 길에 아파트 화단의 매화나무를 잠깐 들여다 보았다. 그 나무가 피워내는 꽃은 그다지 볼품이 없었다. 그럼에도 미선은 봄이면 그 매화꽃을 기다렸다. 이 아파트의 화단에는 매화나무가 드물었다. 나무에는 올망졸망한 꽃눈들이 잔뜩 달려있었다. 아마도 다음 주쯤이겠네, 꽃이 피는 것은. 새로 산 공책의 표지는 연두색이었다. 미선은 빳빳한 표지를 손바닥으로 눌러서 쫙 폈다. 그리고 공책의 첫 페이지에 곰피 장아찌 레시피를 또박또박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 숙희 씨의 레시피는 그렇게 적어서 보관해야만 할 것 같았다. 곰피의 푸르른 물색이 공책을 조금씩 물들이고 있었다. 




*******

알리는 글


3월과 4월에는 15일과 30일에 글을 올립니다. 다음 글은 3월 15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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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喪)

 
  "여기 모든 게 다 싫다고. 늙은것들, 다 추접스럽고 싫어."
  "아휴, 어머니. 옆에서 다 듣겠어요."
  "들으라지, 들으면 뭐 어때서?"

  설날, 방문객들로 붐비는 요양원 응접실에서 인희의 시어머니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내뱉듯 그렇게 말했다. 인희의 시어머니는 화장실에서 넘어져 고관절 골절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수술 이후 거동이 여의칠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서 지낸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다.

  "엄마, 힘든 건 잘 알겠어. 그래도 좀 적응을 하셔야지. 어떻게든 걸을 수 있다면 다시 집으로 가실 수 있어요. 그러니 여기서 재활도 열심히 하시고."
  "너도 여기서 밤낮으로 똥오줌 냄새 맡으면서 지내봐라. 밥이 넘어가질 않아, 밥이. 여기 노인들 거의가 다 기저귀 차고 있다고. 나 원 참. 더러워서."
 
  남편은 테이블 아래로 인희의 발을 툭, 쳤다. 어서 일어나서 가자는 뜻이었다. 인희는 울분에 찬 시어머니를 그래도 어떻게든 좀 다독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자식인 남편이 저러고 있었다. 남편의 심정도 이해가 가지 않은 건 아니었다. 명절 연휴에 쉬고 싶은 것도 참아가며 차를 몰고 세 시간을 꾸역꾸역 운전해서 왔다. 시어머니의 하소연은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끽끽거리는 소리를 냈다. 인희도, 남편도 그 불협화음을 듣는 것이 괴로웠다.

  "언제 또 올 거냐?"
  "어떻게 또 시간을 내봐야죠."

  남편은 마지못해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희는 자신도 남편을 따라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웬지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시어머니의 눈이 붉어지면서 눈물이 고인 것 같았다.

  "아이구, 우리 어머니. 울지 마시고요. 조금만 좀 참고 지내보세요."
  "너희들이라고 나중에 이런 데 안 올 줄 아냐? 괘씸한 것들."

  인희는 악담에 가까운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도, 화가 나기보다는 짠한 마음이 들었다. 시어머니 말대로 자신과 남편도 언젠가 지금의 시어머니의 자리에서 아들 문호를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게 될 터였다. 25년쯤 될까? 인희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78살인 시어머니의 나이가 되었을 때의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뭔가 생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설 연휴가 끝나고 인희는 미뤄두었던 일을 하기로 했다. 안경을 맞추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세 번째 안경을 맞추러 가던 길이었다. 안경점 가는 길목에 있는 치킨집 문 앞에 검정색 천이 드리워져 있었다.

  '喪중이라 가게 쉽니다'

  예전에는 저런 휘장의 글씨를 가끔은 볼 기회가 있었다. 인희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喪' 자가 생경스럽기도 하고 뜨악하기도 했다. 그냥 개인적인 사정으로 가게를 쉰다고 하면 되지 않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영 싫었다. 인희는 자신의 친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는 죽음을 떠올리게 만드는 무언가를 아주 싫어했다. 장례식장이라든가, 흰 국화, 운구차 같은 것들. 재작년이었던가, 인희는 산책길에 어느 아파트에서 흰 천으로 둘둘 말아진 무언가가 들것에 실려 나가는 것을 보았다. 시신인 것 같았다. 저렇게 집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일도 있나 보군. 인희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 광경을 보았다면 기함하고도 남았겠다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인희 자신도 집으로 돌아와서는 현관에 소금을 조금 뿌렸다.

  "전번에 맞춘 안경으로는 스마트폰은 잘 보이는데, 컴퓨터 글씨가 잘 안 보여요. 원거리 안경을 쓰면 좀 눈이 아프고요."
  "그래서 제가 선택을 하셔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죠. 스마트폰인지 컴퓨터인지. 누진 다초점 안경이 아니면, 안경 두세 개 정도 두고 쓰셔야 합니다."

  늙음은 돈이 드는 일이다. 더럽게도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1년 사이에 그렇게 인희는 세 개의 안경을 가지게 되었다. 고도근시에 난시까지 심하게 있어서 대충 싸구려 렌즈로 맞출 수도 없었다. 합해서 백만 원을 훌쩍 넘기는 돈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어쩔 수 없다고. 인희는 안경원 문을 나서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횡단보도의 빨간불이 초록색으로 바뀌길 기다리는데, 저 멀리서 아까 본 검정색의 휘장이 펄럭였다.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쓰인 '상(喪)' 자의 두 개의 입구(口) 자가 흐느끼며 우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인희는 시어머니의 붉은 눈이 초록색으로 바뀌는 신호등과 함께 아스라이 사라지는 것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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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차(雙和茶)


  "아침에 일어났더니, 뭐가 '톡'하고 빠지는 거야. 하얀 거. 그래서 손으로 가만가만 만져봤더니, 이가 빠진 거야. 나사 같은 거 만져지고."
  "임플란트 한 거 빠졌나 봐요. 할머니, 그거 다음에 삼촌한테 가서 다시 하면 돼요."
  "에휴, 미안해서 그걸 또 어떻게. 지금 이를 두 개 또 심고 있는데."
  "괜찮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은영은 할머니와의 전화 통화를 끝냈다. 진이 할머니는 어머니의 외가 쪽 친척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이제 아흔 살이 되었다. 최근에 넘어지면서 앞니 2개가 부러졌다. 삼촌이 치과의사라서 할머니의 치아를 치료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오늘 예전에 했던 치아가 또 하나 떨어졌다는 것이다. 늙어서 자꾸 자식들에게 몸 아픈 이야기만 하고... 할머니는 그런 말을 하면서 미안해했다.

  아흔 살에도 틀니를 하지 않고 임플란트를 하는구나. 음식을 자신의 치아로 씹는다는 건 참 중요한 거니까. 아들이 치과의사니까 할머니는 치과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삼촌은 은영의 사랑니를 하나 빼주었고, 두 개의 치아를 신경치료 했다. 아, 레진 하나 때운 것도 있지. 은영이 학생 시절일 때라 삼촌은 은영에게서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만약에 이제 삼촌한테 가서 임플란트를 하면, 삼촌은 진료비를 얼마나 받을 것인가? 은영은 잠시 그 생각을 했다. 돈 없는 예술가인 것을 좀 감안해 주지 않을까? 어쩌면 그런 것이 불편해서 삼촌의 치과에 가지 않은지 오래된 것인지도 모른다.

  치아가 톡, 하고 빠지는 아흔 살의 어느날 아침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늙어가는 것은 어느날 예고없이 치고 들어오는 약간은 센 펀치 같은 것이다. 처음에는 얼얼하지만, 같은 강도의 주먹이 연달아 날아들면 그럭저럭 견딜 만해진다. 잇몸은 인정사정없이 내려가고, 머리카락은 계속 빠진다. 비오틴을 먹으면 머리카락이 덜 빠질까? 아니요, 선생님. 피부과에 가서 탈모약을 처방받는 것이 낫습니다. chat gpt는 부드럽지만 이상하게 단호한 어투로 말한다.

  "글쎄, 파스도 너무 비싸. 전번에 민우에게 파스 좀 싸게 사 오라 했더니 빈손으로 터터덜 오지 뭐냐."

  할머니, 삼촌은 치과에서 환자 보느라 바빠. 파스 사 올 시간이 어딨어? 은영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삼촌은 좋은 사람이지만 그저 무심한 사람이기도 하다. 은영은 오래전에 삼촌이 자신의 사랑니를 힘들게 빼준 것을 떠올렸다. 약국에 갔다가 할머니에게 보낼 파스를 샀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갔다가 쌍화차가 세일하는 것을 보았다. 쌍화차 분말과 견과류 고명이 따로 나누어져 있는 고급 쌍화차. 세일을 해도 비싼 제품이었는데도 은영은 샀다. 어쩌면 달달한 설탕의 맛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대개의 전통차는 달다. 올겨울에 이 회사의 율무차를 사서 맛있게 먹었다. 그러니 이 쌍화차를 사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다. 집에 와서 쌍화차를 타서 먹어본다. 적당한 선을 살짝 넘어버린 단맛, 그리고 싸구려 한약 냄새가 풍기는 얄팍한 맛. 은영은 자신이 쌍화차를 좋아할 나이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에 기뻤다. 기뻤다기보다는 안도했다. 진이 할머니는 이 쌍화차를 분명히 좋아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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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시집 탐구생활 2부 링크

https://blog.aladin.co.kr/sirius7/17044189




3부     탐구생활(探究生活) 



자서전(自敍傳)


자본주의 시대의 시인


시인(詩人) 


마지막 공모전(公募展) 


고시(考試)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 


연금술사(鍊金術師) 


안약(眼藥) 


심플한 삶


빈집


기일(忌日) 


시인(詩人)의 아들


새벽


탐구생활(探究生活) 


족보(族譜) 


형광등


미지(未知)의


시집(詩集)











자서전(自敍傳) 



재미없는 인생이야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래

진실과 거짓의 그 중간 어디쯤

무언가를 써야 하지

솔직하게 쓰자는 마음가짐은 무익해


문이 열린 차의 조수석

노인은 입을 벌리고 단잠에 빠져 있어

건너편에는 분홍색 옷을 입은 꼬마

엄마를 향해 웃으며 달려가


봄의 마지막 날

포플러 나무의 휘어지는 손짓

자서전의 가운데 페이지를 가리킨다




















자본주의 시대의 시인


배가 고파서 헌혈을 하러 갔더니
도서상품권과 72색 색연필을 주더군
다정한 말을 기대했는데
언제나 얼어붙은 따귀를 맞았지

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하나 살까
시집(詩集)을 한 권 샀어
썩어가는 두부로 써 내려간 시
죽어버린 뇌는 그렇다 하더군

가래 낀 목소리로 잘 팔리는 시를 읽어
단맛이 줄줄 흐르는 자본주의의 시
스테비아 토마토의 맛이 나는 것 같아

배고픔을 없애기 위해
72색 색연필의 케이스를 열어
보라색 색연필을 씹어먹지
왜 보라색인지 당신은 묻겠지
그건 당신의 삶이 보라색이 아니기 때문에




























시인(詩人) 



삼거리의 시장에서 나무 판대기에 노끈을 꿰어 목에 건다


시 한 편에 3천 원

주력 분야는 불행에 관한 시

사랑시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시를 5편 사면 1편은 덤으로 드립니다


쇠고기를 사 먹으려면 몇 편을 내다 팔아야 하나

시든 채소를 염소처럼 뜯는다


염소는 가끔 하늘을 보면서 운다

오래전 염소에게는 꿈이 있었는데

돌산의 가장 높은 곳에 빠르게 올라가는 것

독수리에게 등짝을 물어뜯기는 동안

돌산이 5개로 늘어나 버렸다


오늘 아침에는 꺼멓게 죽은 뿔 하나가 떨어졌다

한 개의 뿔로 어찌 살아갈까를 생각하다가

나머지 하나도 부러뜨리기로 결심한다

뿔을 갈아내어 마시고는

중단한 달리기 실험을 계속한다



























마지막 공모전(公募展) 



수상자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걸 모르는 바보들이 그림을 그린다


심사위원이 말한다


너의 그림이 떨어진 이유는

유기성(有機性)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매일매일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번번이 떨어진다


30년 후,

늙은 낙선자의 전시회가 열린다

캔버스에는 부서진 치아들이 반짝인다

특별한 금색의 기원은 낙선자만이 알고 있다

그림이 마음에 든 누군가가

그림을 100원에 샀다































고시(考試) 



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이걸 해야하나 생각한다


비 오는 밤에 모기향을 피운다

비가 와도 날아다니는 모기는 있겠지

쓴맛이 나는 내 피를 내어줄 생각은 없다


엊그제는 책상 밑에서

죽어있는 바퀴벌레를 발견했다

10년 만에 보는 바퀴벌레였다

이곳에 먹을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절망으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TV 화면, 소림사의 11살 소년이 말한다

나는 5살에 소림사에 들어왔어요

소년은 소림사를 온몸으로 들이켰다 


창문을 열면 붉은 시멘트가 보이는

이 고시원의 정체성은 고시(考試)이다

나의 손바닥은 고시로 물들었다


창틀에 끼어있는 단풍나무의 씨앗은

퇴거(退去)라고 외친다

천천히 씨앗을 씹어서 삼킨다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 



처음엔 뭐든 게 다 잘될 줄 알았지


잘 써지는 날에는 컴퓨터 자판이 솟구쳐 오르고

안 써지는 날에는 방바닥이 꺼지면서 죽고 싶어

눈을 떠보니 레일이 내 머리 위에 있더군

멈춰 선 롤러코스터


착한 아이처럼 밥을 먹고는

롤러코스터의 끄트머리에서

아무것도 쓰지 않는 벌레의 삶

그저 나뭇잎을 먹고 초록을 토해낼 뿐이지


롤러코스터가 천천히 움직인다

아무래도 내려야겠어

한 움큼의 피를 흙바닥에 쏟아놓고는

유서(遺書)를 쓸 나이는 아니지


스물둘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연금술사(鍊金術師) 



멀리서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

새로운 물질은 붉은색이라고 한다

실패와 불운이 천천히 휘발되면서

나의 실험실 문짝을 누렇게 만들었다


쌀독 바닥에는 직박구리가 산다

삐쩍 마른 이 새는 새끼를 두 마리 낳았다

나는 가끔 뚜껑을 닫아놓는다

배고픈 새가 내 머리를 쪼아먹기 때문에


한 뼘의 정원에는 의심의 풀이 자란다

갈색 두통(頭痛)이 담긴 물뿌리개를 들고

조금씩, 죽지 않을 정도로 뿌려준다

적당히, 평범하게 살길 바라면서


싸구려 홍차에 설탕 세 스푼을 넣는다

시커먼 냄새가 나는 신문을 펼친다

실험실에서 죽은 남자의 사인(死因)은

굶주림이 아니라 공포로 판명되었다


눈가가 짓무른 커다란 개는

울지 않으려고 짖는다

나는 삐걱거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쌀독을 들여다 본다

어미가 잠시 나간 틈

새끼 새의 부등깃 다섯 개를 뽑는다


플라스크에는 푸른색의 물이 끓는다

부등깃을 가느다란 주둥이에 밀어넣는다

익숙하고도 지겨운 음률

희미한 황금의 노래가 들린다




















안약(眼藥) 



누런색의 안약을 넣는다

눈은 매일 조금씩 쪼그라들고 있다

눈이 멀어지면

누런 양말의 흰색이 왜 돌아오지 않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당신의 눈은 멀어


나는 아픈 눈을 찡긋하며 웃는다

외눈박이 의사는 무례를 내뱉고는


이번 안약은 붉은색이야


당신처럼 외눈박이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두 눈이 다 멀어버리는 게 낫지

눈에서 피가 똑똑 떨어진다

손가락에 피를 묻혀서 시를 쓴다






























심플한 삶 



부자들은 진짜 심플하게 살아요


부자 삼촌을 둔 여자가 말했다


복잡한 삶의 악덕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선택에 대한 온갖 경우의 수를 상상한다

통 속에서 쪼그라드는 가난한 뇌가 웃는다 








































빈집 



빈집에 사람이 들끓는다

볼 것도 없는데 왜 오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낡은 욕조는 죽지 않을 만큼 피를 흘리고

누렇게 뜨고 갈라진 벽지는 용케도 붙어있지


나는 떠날 거야

귀퉁이가 거칠게 닳은 가구들에게 인사를


분명히 현관문을 잠궜는데

어찌 알고서 사람들이 왔을까


마루에는 나의 내장들이

기다랗게 놓여 있다

불타는 내장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

낯선 얼굴의 구경꾼들































기일(忌日) 



새책을 읽는데 후두둑, 종이들이 떨어진다

읽지 않은 페이지, 나는 바닥의 종이들을

그러모으고는 스카치테이프와 가위를

들고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다 

이걸 붙여서 읽을 것인지, 이 책은 어차피 버릴 책이다

그냥 한번 보고 버릴 책, 그리고 잊힐


새벽 3시 반쯤이었다 

아버지는 잠이 들었다 

밤은 고요하고 추웠으며 구불거리며 흘러갔다

할머니가 그랬듯 나의 발은 언제나 시렸다 

맨발로 누웠다가 양말을 신고 잠을 청해 본다



































시인(詩人)의 아들 



H는 시인의 아들이었다 

나는 H의 아버지가 쓴 시들을 읽다가 궁금한 것이 있었다


H야, 그 시에 나오는 아이는 너를 뜻하는 게 맞아?

그건 나도 잘 몰라요 아버지만 아는 거겠죠


느물거리는 말투로 H는 대답했다


시인은 내가 졸업할 때 축사를 했었다


예술을 하려는 여러분!

절벽에서 뛰어내리십시오

그런 패기가 있어야지만 살아남습니다


오늘은 문득 H 생각이 났다 

H가 무엇을 하면서 먹고 사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절벽 위에 서 있다































새벽 



하얀 팝콘이 가득 찬 종이봉투를 받았다 


새벽에 회사 직원이 죽었어

이제 마흔 좀 넘겼는데, 심정지래 


아침부터 흐리더니 비가 퍼붓는다

나는 새벽의 꿈이 무슨 뜻인지 Chat GPT에게 물어본다 

팝콘은 부풀면서 터지니까 뭔가 좋은 소식이 들릴지도요 

흰색은 희망의 색이기도 하구요 


검은색의 죽음이 파근파근하게 걸어오면서 웃는다




































탐구생활(探究生活) 



개학 전날, 탐구생활을 편다

개 혓바닥과 닮은 분홍의 책

방학은 방바닥에 눌어붙어있다


쉬운 문제도 있고 어려운 문제도 있다

복잡한 것을 쉽게 적는 법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너무나 늦어버린 오후

찢어진 잠자리 날개가 방충망에 걸려있다

잠자리의 모가지가 뎅겅거리며

14층 창문에서 추락한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날개를 떼어내어

탐구생활의 23페이지에 붙인다


밤이 깊어 가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나가버리는 전등불

어제 마셨던 오렌지주스 캔에다

제사 때 쓰고 남은 양초를 꽂는다

심지가 다 탈 때까지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불에 그을린 얼굴의 꿈을 꾸었다




























족보(族譜) 



아버지가 물려주신 족보를 들여다 본다


고려 말에 중국에서 건너온 조상님들은

조선 초에 나름대로 성공한 일가를 이루었다

괜찮은 벼슬을 했고, 한양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갑자기 집안이 한양을 떠나 궁벽한 시골로 낙향한다

왜란이 일어나기도 한참 전의 일이었다


몰락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조상님들에게 한양은 돌아갈 수 없는 먼 곳이었다

구한말, 고조할아버지는 서당의 훈장이었다


할아버지는 사범학교를 나와서 학교 선생이 되었다

그러다 한국 전쟁이 터졌고, 난리통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뼈가 갈리도록 북한을 증오했다


아버지는 월급쟁이로 힘겹게 살았다

평생 소설을 쓰고 싶어했으나,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12권의 족보, 맨 마지막 권

가느다란 선의 끄트머리에 내 이름이 있다

흐린 글씨의 내 직업은 대학생이다

동생들은 아버지처럼 무언가를 팔러 다닌다


족보를 덮는다

내 혈관에 흐르는 어떤 오래된 기운을 감지한다

여느 때처럼 좌판에 글을 늘어놓는다



 


















형광등 



형광등은 2028년에 퇴출될 예정이다

그는 형광등의 집에 산다

마루의 등이 고장났고

큰방의 등도 죽음이 임박했다


작은방의 등을 큰방에 달아줄 계획이다

작은방은 창고가 된다

부엌의 형광등은 전기톱 소리를 낸다

그는 2년째 저녁 요리를 포기하고 굶는다

그의 체중은 현재 47킬로그램이다


효율이 떨어지는 것들은 제거되어 마땅하다

모두가 검은 입으로 추하게 외친다

그는 가치 있는 것을 남기지 못했다

눈꺼풀을 부드럽게 닫아줄 따뜻한 손과 같은


오래전 그는 무덤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그는 밤의 마루에서 더듬더듬 무덤을 짓는다
































미지(未知)의 시 



방바닥을 천천히 긁는다

멸종된 공룡의 뼈가 만져진다

시커먼 세월의 때가 낀 지층 속

화려한 깃털은 보이지 않는다


너는 한때 크게 울었고

땅이 울리도록 달렸으며

보드라운 새끼들을 품었었지


언젠가 내가 죽어서 누울 관을 생각한다

미지의 뼈를 가만히 만져보다가 

서둘러 묻어버렸다




















시집(詩集)


이 숲은 언제나 공사 중이다
임도(林道)를 만들기 위해 파헤쳐진 곳
내가 작년에 심은 나무들은
모두 불에 타 죽었다

나의 나무는 어디에 있는가

새카만 흙 사이로 어린 고사리가 올라왔다
동그랗게 돌돌 말린 줄기를 똑똑 끊는다
50그루의 묘목을 심을 작은 구덩이를 팠다
언젠가 너희들은 말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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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미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거야. 그 수세미가 도대체 어디로 갔냐는 거지. 내가 그걸 찾으려고 25층 아파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었어."
  "엄마가 어디 딴 데다 두거나, 떨어뜨리거나 그런 거 아냐?"
  "아니래도. 청소 도구 바구니가 있어. 빨간색. 파견 업체에서 거기에 세제랑 수세미, 이런저런 도구들 함께 넣어서 줬다고. 그걸 1층 우편함 아래에다 두고 잠깐 밖에 쓰레기 버리러 갔거든. 와보니까 수세미가 없어. 그거 하얀색. 매직 블럭 있잖아. 때 잘 닦이는 거. 새것이라고."
  "엄마. 그거 누가 가져갔으면, CCTV 보면 알 수 있거든. 우편함 앞이니까 거기 출입구라서 잘 보일 거야. 관리사무소에 가서 얘기해 보세요."
  "에휴, 그런 걸 뭘 말해. 괜히 분란만 일으킬지도 모르는데. 내가 조심하지 뭐."

  홍 여사는 참으로 수세미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족히 30억이 넘는 강남의 아파트에서 정말로 누군가 수세미를 훔쳐갔을까? 아픈 영감의 약값이라도 벌어보겠다고 청소일을 시작한지 이제 겨우 일주일째였다. 그런데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새것으로 받은 청소 물품을 잃어버린 것이 아주 찝찝하고 기분이 나빴다. 분명히 내부인의 소행이었다. 하지만, 잘 사는 사람들이 사는 이 아파트에서 기껏해야 돈 천 원 하는 매직 블럭 수세미를 훔쳐갔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모르지. 부자라도 도벽(盜癖)이 있을 수 있으니까. 홍 여사는 집으로 가는 길에 천 원 마트에 들려서 매직 블럭을 하나 샀다. 쓰지 않아도 될 돈 천 원이 나갔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리고 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여사님, 내가 여사님이 우리 어머니 같아서 충고 좀 할게요.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나아요. 여기서는 그저 조용히 있는 게 답이에요.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웬만하면 눈에 띄지 않게, 그래요. 유령처럼 왔다갔다하는 거죠. 지금 여사님 이야기는 입주민을 도둑으로 생각하고 하는 말이잖아요. 그 수세미가 얼마라고 했죠? 내가 잡비 지출로 해서 천 원 내어드리죠. 어떤 면에서는 여사님이 물건 간수 잘하지 못한 잘못도 있는 거에요."

  관리사무소의 경리가 딱딱거리는 말투로 홍 여사에게 말했다. 홍 여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CCTV를 확인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경리 주임에게 물어보았다. 그 말을 들은 경리의 얼굴이 일순 차갑게 싹 바뀌었다. 홍 여사는 이내 곧 자신이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 천 원 가져가세요. 다음에 이런 일 또 있으면, 이렇게는 못해요. 청소 도구 관리는 전적으로 여사님 책임입니다."

  홍 여사는 쭈뼛거리면서 경리가 책상 모서리로 밀어낸 천 원짜리 지폐를 주머니에 넣었다. 돈 천 원이 그렇게나 더럽고 굴욕적으로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여사님이라는 호칭도 웃기는 말이었다. 진짜 부잣집의 여사님은 이런 곳에서 천 원을 아쉬워하며 주머니에 쑤셔 넣지는 않을 터였다. 홍 여사는 낡은 수세미처럼 쭈글쭈글한 표정으로 미화원 휴게실로 돌아왔다. 홍 여사의 얼굴을 보고 동료 박 여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홍 여사는 매직 블럭 수세미를 잃어버린 일을 짧게 이야기했다.

  "홍 여사 말을 들으니 딱 그 생각이 나네. 내가 본 이야기를 해줄게. 지난주 화요일 아침에 관리사무소 회의실을 청소하러 갔었더랬지. 그런데 관리사무소 앞에 경찰차가 와있어. 대체 뭔 일인가, 우리같이 늙은 사람은 경찰차만 봐도 뭔가 심장이 오그라들고 그러잖아. 그래서 조심조심하면서 회의실 있는 2층 계단을 올라가는데, 아휴, 난리도 아냐."
  "난리라니,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어?"
  "아이고, 큰일은 큰일이지. 내가 회의실로 가려면, 관리사무소 사무실을 지나가야 하잖아. 경찰 두 명하고, 머리 허연 영감하고 큰소리로 싸우더만. 소장은 그냥 막대기처럼 멀뚱히 서있고. 열린 사무실문 뒤편에서 가만히 서서 뭔일인가 들어봤거든."
  "그래, 그래서?" 

  홍 여사는 좀 전에 수세미 때문에 기분 나빴던 일은 싹 잊어버리고는 박 여사의 말에 집중했다.

  "여기 아파트 오다 보면 코엑스라는 데 있잖아. 커다란 행사 같은 거 자주 하거든. 경찰 말로는 그 영감이 거기를 자주 돌아다니면서 기념품 같은 걸 훔쳤다는 거야. CCTV에 다 찍혔다고 하면서."
  "이 부자 동네 사는 영감이 정말로 그걸 훔쳤을까?"
  "아휴, 그 영감 뻔뻔하게도 오히려 더 악을 쓰는 거야. 나 정도면 가져갈 만해서 가져갔다, 그러던데. 너희들이 뭔데 나한테 도둑이니 뭐니 하냐고 하면서. 얼마나 당당한지 몰라. 자기 아들이 국정원 다닌다, 너희들 싹 다 잡아넣을 거야, 이러는데 그건 진짜인가 몰라."
 
  홍 여사는 박 여사의 말을 듣고, 수세미를 훔쳐간 사람도 그 영감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겠거니 싶었다. 이런 거 하나쯤은 내가 가져가도 괜찮다. 난 이곳에 사니까. 그것을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홍 여사는 그 뻔뻔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날 저녁, 홍 여사는 오늘 관리사무소에서 있었던 일을 전화로 딸에게 늘어놓았다.

  "내가 엄마한테 괜한 말을 해서는..."
  "아니다.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니? 내가 진짜로 물건을 실수로 어디다 떨어뜨린 것도 아니고, 훔쳐간 인간이 나쁜 거지. 그런 말조차 못하고 살면 그건 그거대로 얼마나 분하냐."
  "그래, 엄마. 이제 수세미 생각은 그만해. 엄마만 기분 나쁘고 속상하잖아."
 
  다음 날, 홍 여사는 으슬으슬한 감기 기운을 느끼며 일어났다. 일을 나가기 전에 동네 약국에 들러서 쌍화탕 한 병을 샀다. 천 원이었다. 축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아파트에 나와보니, 엘리베이터 옆에는 아무렇게나 내버린 흰색 마스크와 담배꽁초가 보였다. 우편함 아래는 갈색의 가래침이 눌어붙어있었다.

  "더러운 것들."

  홍 여사는 나지막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청소 도구함에서 새 수세미를 꺼내어 눌어붙은 가래침을 박박 문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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