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삼은 먹어도 되나요?"
의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질문이 그것이라고 한다. 나는 의사가 쓴 수필집을 읽다가 그 부분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진료를 봐야 할 환자는 밀려있는데, 기껏해야 건강기능식품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시간을 빼앗다니. 의사 입장에서는 꽤나 짜증스러운 질문인 모양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그렇다. 그 질문이 환자가 정말로 의사한테 하지 말아야 할 무의미한 질문인가? 일전에 안과 진료를 받는데 그런 비슷한 질문을 한 환자를 보았다. 진료실 문이 열린 상태여서 의사와 환자가 나누는 대화가 대기실까지 다 들렸다.
"환자분, 잘 들으세요. 백내장은 영양제 먹는다고 해결이 안 된단 말입니다."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환자는 아마 루테인이나 뭐 그런 영양제 이야기를 하면서 의사에게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 안과 의사는 기본적으로 환자를 응대하는 태도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질문을 할 수도 있지. 뭘 그렇게 큰 소리로 무안을 주는 걸까, 대기실에서 그 대화를 듣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왜 대부분의 의사는 환자가 말을 좀 길게 하거나, 질문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일까? 비단 홍삼이나 영양제 질문 같은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나는 지난여름부터 몸이 좋지 않아서 종합병원에 다니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약을 처방받기 위해 의사를 만난다. 그런데, 이 의사 선생도 뭔가 내 말이 길어지면 초조한 기색을 내비친다. 그럴 때 이 의사가 주로 하는 행동은 자신의 머리를 감싸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신호로 받아들인다. 아,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얼른 진료실을 나가야겠구나.
특별히 내 주치의가 불친절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그 선생은 자신이 보기에 환자가 불필요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듯 하다. 그렇다고 내가 진료실에서 말을 길게 하지도 않는다. 나는 병원 가기 전에 미리 할 말을 정리해서 타이머 켜놓고 연습한다.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은 딱 5분으로 정해놓고 말이다. 그 의사 덕분에, 이제 나는 진료실에서 아주 간결하게 정리해서 이야기하는 기술을 터득하게 된 것도 같다.
유튜브에서 그런 동영상을 보았다. '대형병원에서 의사 진료를 잘 받는 방법'이라는 동영상에는 서울 대학 병원 의사가 나와서 그 비법을 알려준다. 10분 남짓한 그 짧은 동영상은 환자들이 진료실에서 지켜야 할 매뉴얼 북 같은 인상을 준다. 대형병원에서 의사가 환자 1명에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대략 5분 정도이며, 그 이상을 쓰려면 의료 수가를 올려야 한다고 그 의사는 강조한다. 그러니까 저렴한 의료 수가만큼 의사가 환자한테 쓸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 현실에서 환자는 진료실에서 자신에게 배분된 그 '5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 진료받을 때는, 증상을 객관적 수치로 구체적으로 진술할 것. 예를 들면 언제부터 아팠는지, 통증의 정도는 어느 정도인지, 그 양상은 어떠한지 의사에게 말한다. 의사는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환자가 받을 검사를 지시한다. 이 때 환자는 자신이 받는 검사가 무엇인지 확인한다. 그렇게 해서 치료가 진행중일 때, 추가적으로 처방되는 약이나 검사가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는 환자가 의사에게 다른 대안은 없는지 물어볼 수 있다.
'아니, 이 양반은 철저히 의사인 자기 입장에서만 말하는구먼. 이건 뭐 환자가 의사한테 다 맞춰줘야 하네.'
누군가 그 동영상에 그런 댓글을 달아놓았다. 그 댓글을 읽고 나도 모르게 큭,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환자분들 잘 들으세요. 진료실에서는 의사한테 딱 필요한 말만 하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의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종이에다 쫙 질문 써서 물어보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홍삼 먹어도 되나요, 그딴 질문은 하지 마시고요. 내가 그 동영상을 아주 거칠게 해석해 본다면 그러하다. 몸이 아파서 의사를 찾아가는 건데, 환자 노릇 하기도 참 더럽게 힘드네...
진료실에서 의사 붙잡고 자기 몸 아픈 이야기를 한없이 늘어놓는 환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환자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끊어내는 것도 의사의 진료 비법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환자는 자신의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또한 많은 의사가 성토하는 현재의 의료 수가 체계에서, 의사가 진료 시간 잡아먹는 환자를 '극혐'한다는 것도 이젠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버렸다. 그 사실을 모르는 환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자, 그러면 다음 예약은 3개월 뒤로 하겠습니다. 환자분, 더 물어보실 것은 없나요?"
열린 안과 진료실 문 사이로 의사의 말소리가 들린다. 환자가 무슨 말을 하자, 의사는 다시 한번 세극등 현미경을 들여다보았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사의 말과 함께 중년 남자 환자의 진료가 끝났다. 그 의사 선생은 올해 내가 만난 의사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다.
이제 삼십 대 중반의 젊은 그 의사는 의사가 지녀야 할 가장 좋은 덕성(德性)을 지니고 있었다. 그건 환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재능이다. 안과 의사로서 눈을 잘 보는 것은 기본이다. 이 선생이라면 '루테인 먹어도 되나요?' 같은 질문에도 웃으면서 말해줄 것 같다. 환자가 의사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그 직업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내포되어 있다. 올해 내가 만난 여러 의사 가운데,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걸맞은 좋은 의사는 그 안과 의사 단 한 사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