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고(1966)'의 프랑코 네로가 1976년에 찍은 '케오마(Keoma, 서부의 불청객)'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 '케오마'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데, 그 이름은 원주민어로 '자유'라는 뜻이다.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독특한 주술적 장치, 원주민 혼혈의 북군 출신의 주인공, 악당으로 설정된 남부군 등이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찾다가 DVD를 구매한 이의 평을 읽었는데, 이런 글이 있었다.


  "진짜로 돈과 시간만 낭비한 작품입니다."


  그 글을 쓴 이는 어느 블로그에서 좋다는 평을 읽고 구매했다가, 지뢰작을 고른 셈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영화 '장고'를 이 글을 읽고나서 보려는 이들도 그런 비슷한 평을 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가장 큰 요인은 영화의 화면 자체가 전반적으로 많이 '후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촬영 당시의 절대적인 광량()의 부족 때문이다. 영화는 대부분 춥고 흐린 날씨의 환경에서 촬영이 되었는데, 이 부분이 후반 현상 작업에서 문제가 되었다. 음영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촬영분을 다시 찍거나 할만한 제작비도, 여건도 되지 못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영화에서 멕시코 국경 수비대의 금을 탈취한 다음에 창고에 쏟아서 보관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에서 금이 아스팔트 포장재로 보일 정도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화면의 어두움과 주요 배경이 되는 마을 세트장의 진창길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어내는 측면도 있다. 대부분의 서부극이 모래가 날리는, 햇빛이 쏟아지는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 달리, '장고'는 웅덩이가 흥건한 진창길, 음울한 잿빛 하늘이 이 화면을 채운다. 프랑코 네로가 분한 장고는 밧줄에 묶은 관을 그 진창길을 질질 끌고가며 등장한다.  


  북군 출신의 장고는 자신의 아내를 죽인 남부군 잭슨 소령에 원한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그는 잭슨 소령의 잔당과 KKK(Ku Klux Klan)단원들을 기관총으로 그야말로 '쓸어버린다'. 스파게티 웨스턴의 이러한 설정은 미국 서부극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면이다. 마치 뭐랄까, 어떤 강고한 결의마저 느껴진다.


  "당신들이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우리가 대신 보여주마."


  수정주의 웨스턴의 걸작이라고 하는 존 포드의 '수색자(1956)' 이후로, 미국 할리우드의 서부극에는 원주민들을 악마화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나서 자기 성찰의 기운이 감지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부군을 '악의 축'으로 내세우지는 못했다. 존 포드의 1959년 작 '기병대'는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남군이 북군에 격파당하는 결말인데 당시의 처참한 흥행실패가 그 점을 보여준다. 미국의 관객들, 특히 남부 주민들에게 그런 영화는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남북 전쟁이 끝나고, 노예들은 해방되었지만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 온 것은 아니었다. 여전한 인종차별과 백인우월주의의 유령이 남부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것은 1960년대의 흑인 인권운동, 최근의 BLM(Black Lives Matter)운동으로까지 이어진다. 장고는 자신이 끌고 다니는 관 속에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에, '장고'라는 사내가 누워있다고 말한다. 그는 영화 내내 관 속에 자신을 넣어야한다고도 말한다. 그 말은 아내의 복수와 함께 이전의 자신의 삶도 의미한다. 더불어 그 관 속에 들어가야할 것은 그가 살아온 시대의 모든 악습과 치부일지도 모른다. 원주민 학살과 노예제, 뿌리 깊은 인종차별의 오래된 역사, 그 모든 것이 영화에 등장하는 '더러운 진창길' 위에 깔려있다.


  트럼프와 바이든의 대선 후보 토론에서도 언급된 '프라우드 보이스(Proud Boys)'는 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극우단체로 트럼프의 호위무사를 자처한다. 그들이 총기로 무장하고 공권력에 맞서는 나라, 그것이 오늘날의 미국이다. 프라우드 보이스의 단원들에게 백인 우월주의는 수치가 아니라 신념이며 지켜야할 중요한 가치이다. 이미 오래전에 폐기되었어야할 구시대적 악습이 미국을 분열시키며 흔들고 있다. 멕시코 양민들을 사격 연습대상으로 삼는 인종 차별주의자 잭슨 대령과 그 잔당들, KKK단원들을 장고는 결국 궤멸시키며 자신의 복수를 완성하지만, 그가 자신이 끌고 다녔던 관 같은 어둡고 슬픈 과거로부터 진정으로 벗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관에 넣어서 영원히 매장했어야할 악인들의 신념은 악령처럼 오늘날의 미국을 떠돈다.


  아마도 타란티노의 흥미를 끌었던 지점도 그 부분일 것이다. 그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로 1966년에 만들어진 영화 '장고'를 다시 소환한다. 어쩌면 그 영화는 영화적 시효가 다했어야할 주인공에게 숨을 다시 불어넣을 만큼 미국의 오랜 악습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감독 세르지오 코르부치가 창조한 '장고'라는 인물은 오래전에 자신의 복수를 끝냈다. 그가 끌고 다니던 관은 무엇이든 삼켜버리는 '유사(砂)'속에 가라앉았으며, 신기에 가까운 사격솜씨를 보여주던 두 손은 짓이겨져서 못쓰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해야할 바를 끝내고 더러운 진창길과 묘지가 있는 마을을 떠나갔다. 장고에게 또 다시 관을 끌게 만들어 우리 시대로 소환하는 일은 비극이 될 것이다.


  장고 역의 프랑코 네로는 23살의 나이에 이 영화를 찍고 세계적인 스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영어로 더빙된 이 영화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제대로 찍지 못해 어두운 화면, 제작사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택한 진흙으로 범벅된 질척거리는 세트장, 더빙 때문에 몰입이 안되는 인물들의 대사, 그 모든 것이 '옥의 티'일 수 있다. 그러나 헐리우드 시스템에서 만들어진 서부극이 결코 보여줄 수 없는 '진정성'과 '신념'이 영화 '장고'에 있다. 이 영화를 보는 일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며, 영화를 통해 54년 전에 장고가 걸어갔던 그 고통스럽고 더러운 진창길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주인공 '장고'의 이름은 대본을 쓴 감독 세르지오 코르부치와 그의 동생 브루노가 집시 출신의 세계적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dt)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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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CSI 라스베가스'를 보는데, 재미난 부분이 있었다. 범인을 다 검거하고 나서, 브래스 경감과 스톡스 요원이 대화를 나눈다. 범인들이 저지른 일들이 'Jumping the shark' 같아, 라고 말을 주고 받자, 스톡스 요원도 수긍한다. 그러나 그걸 들은 그리섬 반장은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jumping the shark, 이 말뜻을 정말 모르는 거야?"


  그리섬 반장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지만, 브래스 경감과 스톡스 요원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가버린다. 어쩌면 이제 쓰고자 하는 글은 그 'Jumping the shark' 같은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다른 과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입학하기 전에 학교 강당에서 열렸다는 굿 공연에 대해 들었다. 굿을 주관한 만신(오랜 경력의 큰 무당을 일컫는 말)이 굿을 끝내고 그 학과 관계자들에게 했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아, 굿하는데 귀신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놀랐지 뭐요. 구석 구석 자리 잡고 앉아서 보는데, 그것도 다 무복()입은 옛날 귀신들이야. 이렇게 귀신많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어찌 공부하나 싶고, 걱정이 됩디다. 이런 데서 공부하면 애들이 많이 아프고 힘들어요. 보통 기가 센 애들 아니면 견디질 못해."


  어느 수업 시간에 예전에 학교에서 살풀이 굿 공연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런 뒷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면서 만신이 덧붙인 이야기도 전했다.


  "학생들 가운데는 귀신 보는 애들도 있을 거요. 그러면 놀라지 말고 기도를 하라 그래요. 귀신한테 여기 있지 말고 좋은 데 가라고, 기도해주겠다고 그러면 괜찮아요."


  나는 흥미진진한 그 이야기를 듣고 그냥 웃어넘겼다. 학교 옆에 무덤이 있으니 그럴 법도 하네,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다니던 학교의 아이들 생각하면 만신의 말도 맞겠다 싶었다. 보통의, 평균적인 삶의 행로를 가길 원하던 아이들은 대개 그 학교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두었다. 통계의 정규분포 곡선에서 가운데가 아닌 양쪽 끝에 자리한 아이들의 집합체 같았다고나 할까, 학교 밖에서라면 만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사람들을 모아놓은 것 같았다. 아마 다른 아이들이 보기에는 나도 그러했을 것이다. 


  몸이 아픈 아이들이 많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모두들 마음속 고민들은 많고 나름의 괴로움을 떠안고 살았을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은 '빛 좋은 개살구' 같다. 그걸 배워도 무슨 자격증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취업이 보장되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 세계에서 빛나는 사람은 빙산의 맨 위쪽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차가운 얼음물 밑에 잠겨서 보이지도 않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니 들어온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나가는 애들도 많았고, 더러는 점집 찾아가서 이 공부 계속 해야하냐며 물었다는 우스갯소리도 했다.


  어쨌든 만신의 그 말은 귀신 많은 학교에서 어떻게든 잘 다녀야겠네,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는 했다. 한편으로는 성질 나쁜 아이들과 부딪히더라도, 그래, 너나 되니까 이 학교에서 견디는 거겠지,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내가 학교에서 가장 많이 머무르고, 그나마 편하게 여겼던 곳은 지하 시사실이었다. 공강 시간이나 일찍 강의가 끝난 날은 자료실에서 영화 대출해서 그곳에서 보는 때가 많았다. 방학 때는 학교에 아침 10시쯤 나와서 오후 6시까지 영화를 보다 갔다. 방학 때조차 마치 출퇴근 하는 직장인처럼 살았던 것 같다. 하는 일이 돈을 버는 일이 아닌 영화 보는 일이었지만.


  아마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그 즈음이었을 것 같다. 자료실에서 영화 대출해서 지하 시사실 모퉁이를 돌아서 가는데, 내 앞으로 뭔가 확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형상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뭔가가 느껴지기는 했는데 아주 서늘한 기운이었다. 물론 그 지하의 공간 자체가 늘 서늘하고 추운 곳이기는 했지만, 내가 느낀 기운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약간의 오싹함을 느끼게 하는 그런 것이라고 해두자.


  그 짧은 순간, 나를 보고 휙 스쳐갔던 그 뭔가는 푸르스름한 빛을 띄었다. 나는 귀신이란 것은 믿지도 않았고,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건 뭔가 다른 것이구나, 싶은 직감이 들었다. 어떤 에너지나 파장으로 느껴졌다는 것이 맞을 것도 같다. 그런데 그건 무서운 느낌이 아니라 슬픔과 외로움의 감정으로 느껴졌다.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좋은 곳으로 가렴. 내가 기도해줄게."


  나도 모르게 혼자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만신의 말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고나니 조금은 놀란 마음이 한결 차분해진 느낌이었다. 그 일 이후로 지하 시사실을 찾는 것이 꺼려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사실에서 영화 볼 때, 항상 전등을 켜두었다.


  'Jumping the shark'는 1970년대에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TV시리즈 'Happy Days'에서 유래된 말이다. 처음에는 무척 인기를 끌었던 이 시트콤은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소재고갈과 떨어지는 시청률에 고전했다. 급기야 해변에서 상어를 뛰어넘는 수상스키 장면을 넣는 무리수도 나왔다. 그 이후로 이 숙어는 '무리한 설정, 뜬금없는 이야기로 관심을 끄는' 이라는 관용어가 되었다.


  느닷없이 '귀신 이야기'라니, 나름 좋은 글을 기대한 블로그 방문자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글이 될까 싶기도 하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는 귀신 글, 'Jumping the shark'가 되겠지만, 언젠가는 꼭 써보고 싶었던 글이었다. 푸른 이마의 그 귀신을 본 이후로는 그와 비슷한 어떤 것도 본 적이 없다. 지하 시사실이 있었던 본관의 건물은 학교가 신축 건물로 이전하면서 철거되었다. 그래도 나는 영화와 많은 시간을 보냈던 그 본관 건물에 더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귀신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정겨운 공간으로 아직까지도 내 기억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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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SI 마이애미 시리즈의 어느 회차였던가, 호라시오 케인 반장이 아이를 내팽겨쳐두고 범죄에 가담한 여자에게 건조한 어투로 내뱉는 대사가 있었다.


  "You make me sick."


  우리말로 번역하면 '당신이란 여자는 참 역겹군' 내지는, '당신 같은 여자를 보는 건 괴롭군' 정도쯤 될까. 영화 '황야는 통곡한다(1967)'에도 이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 돈 호세는 집시 여인 카르멘을 만나면서 인생이 '꼬였다'. 그 정도가 보통이 아니다. 직업군인인 그는 계급이 강등되었고, 상관을 살해한 일로 쫓기고 있는 중이다. 이 여자는 그에게 같이 도망치자며 도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범죄조직에 가담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다. 그 제안을 들은 돈 호세가 카르멘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자막은 이렇게 뜬다.


  "당신은 날 아프게 해."


  돈 호세는 카르멘을 미치도록,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며, 도덕이나 윤리 관념은 아예 갖고 있지 않는 여자다. 끊임없이 그를 인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선택을 하도록 충동질하며, 오로지 고통과 불안만을 선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여자에게 호세는 '당신은 견딜 수 없이 역겨워', 라고 했을까, 아니면 '당신은 날 아프게 해.'라고 했을까. 이건 오역일까? 나는 외화 번역가가 실수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쩌면 이 장면에서는 'You make me sick'을 글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 맞았을 것 같다.


  '돈 호세'와 '카르멘'이라니,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가? 이 영화는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소설 '카르멘'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 '장고(1966)'의 대성공으로 뜬 프랑코 네로를 주연으로 앞세운 이 영화는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 거기에다 '금괴 탈취'라는 사건을 넣어서 서부극으로서의 면모도 보여준다. 한마디로 프랑코 네로를 알뜰히(!) 써먹는다.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영화의 제목은 '황야는 통곡한다'이다.


  돈 호세로 나온 프랑코 네로는 이탈리아, 카르멘 역의 티나 오몽은 프랑스, 카르멘의 남편 역으로 나온 클라우스 킨스키는 독일 출신이다. 이 다국적 배우들을 묶는 것은 영어 대사이다. 원어민들이 아니니까 억양이나 발음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대본 작가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생각을 영화 내내 하게 된다. 직업 군인인 돈 호세를 제외하고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집시, 포주, 산적, 화전민 같은 하층민들인데, 그들이 쓰는 언어가 고급스러울 필요는 없다. 단순하고 명료한 단어 선택으로 이루어진 대사들은 배우들 입장에서도 부담을 줄여주었을 것이다.


  이탈리아 제작사들은 이런 다국적 배우들을 데려다가 주로 스페인 남부의 풍광을 배경으로 '스파게티 웨스턴'을 찍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이다. 꽤 잘 팔렸다. 프랑코 네로는 '장고'의 대성공으로 이어진 일련의 영화 경력으로 세계적인 배우로 발돋움했다. 그랬던 그도 좀 지쳤던 모양이다. 그가 가발까지 쓰고 나온 독특한 서부극 '케오마(서부의 불청객, 1976)'에서는 무성의한, 정형화된 연기를 보여준다. 그런 그가 '황야는 통곡한다'에서 보여주는 빛나는, 열정적인 모습과는 딴판이다.


  카르멘 역으로 나온 티나 오몽의 연기는 압권이다. 이 프랑스 여배우는 마치 카르멘의 현신같다. 제멋대로이며, 남자들을 미치게 만드는 미모를 지녔으며, 결코 한 남자에게 정착하지 않고, 언제든 자유롭게 떠난다. '팜므 파탈'이니 하는 말로 이 여자를 규정하는 것은 모욕에 가깝다. 카르멘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할 뿐이며, 여자는 그 누구의 삶에 간섭하거나 불행으로 억지로 끌고 가지 않는다. 돈 호세의 선택들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탈취한 금괴를 가지고 신세계로 떠나는 배를 탈 수도 있었지만, 돈 호세는 투우사에게 정신이 팔린 카르멘을 다시 찾아간다. 같이 떠나자며 붙잡는 동료 산적에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겠다고 한다. 카르멘에게 미쳐버린 그에게 자신이 가야할 길은 카르멘 밖에 없었다.


  "아, 이 불쌍한 남자를 대체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한탄이 쏟아진다. 결국 사랑에 미친 이 남자는 자신도,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도 파멸로 이끈다. 이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에 황야도 '통곡'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독특한 로맨스/웨스턴 영화를 보고나서, 오페라 '카르멘'이 궁금해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오페라는 초연 때의 대실패로 작곡가 조르주 비제를 커다란 상심에 빠지게 만들었다. 비제는 그런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시골의 한적한 별장으로 요양을 떠났다. 그리고 3개월 후, 서른 일곱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별세한다. 위대한 천재 작곡가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그의 사후에 이 오페라는 전설이 되었다.


  아직 오페라 '카르멘'을 만나지 못한 이들이라면 아그네스 발차와 호세 카레라스가 열연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공연으로 감상하길 바란다. 아그네스 발차의 카르멘을 뛰어넘는 카르멘은 어쩌면 내 생애에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스 출신의 메조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는 카르멘 그 자체를 보여준다.


  사랑에 미쳐버린 이의 그 슬픈 끝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결코 길들일 수 없는 한 마리 자유로운 새를 가지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돈 호세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프랑코 네로는 그 가여운 숙명을 짊어져야 했던 한 남자의 내면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 '황야는 통곡한다'의 원제목은 'Man, Pride and Vengeanc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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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첼(pretzel)'이라는 과자가 있다. 원래는 독일에서 유래한 패스추리 빵의 한 종류인데, 미국으로 건너가서 과자로 재탄생했다. 매듭 모양의 과자로 표면에 뿌리는 굵은 소금이 특징이다. 아들 부시 대통령이 이 과자 먹다가 목에 걸려서 크게 고생했다는 일화도 있다. 아무튼 이 과자의 특징은 나름 중독성이 있다는 것인데, 그 짠맛과 단단한 식감에 매료되면 프레첼을 끊을 수가 없게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레첼 과자 브랜드는 미국 S사의 프레첼이었다. 주로 소포장 용량으로 나오는 제품을 구입해서 먹곤 했다. 그 독특한 식감과 짠맛은 잊을 만하면 생각이 났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단단한 과자가 치아에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먹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얼마전, 마트에 갔다가 미국 과자를 하나 사왔는데 땅콩 버터가 든 프레첼이었다. 땅콩 버터가 소로 들어서 뭔가 특이한 맛이겠거니 생각은 했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과자에 뿌려진 소금이었다. 짜도 너무 너무 짰다. 조그만 칩 같이 생긴 과자 서너개를 먹고 나면 더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과자는 마치 장식품처럼 큰 유리병에 담겨져 식탁에 보름째 놓여 있다. 종종 새로운 과자의 맛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이다.


  어린시절부터 나는 과자를 무척 좋아했다. 명절이나 제사 때에 친척 어른들이 집에 꼭 사들고 오는 알록달록한 포장지의 종합선물세트는 가장 좋아하는 선물이었다. 상자를 열면 각양각색의 과자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나눌 것인지가 문제였다. 극성맞은 나와 둘째 사이에서 막내는 자신이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들을 받았는데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그 착한 막내 동생은 아직도 과자를 끊지 못하는 나를 위해 맛있거나 새로 나온 과자가 있으면 사서 보내준다. 


  'B-29'라는 이름의 과자는 1980년대 초를 풍미했던 과자였다. 그 독특한 카레 맛은 나름 인기가 있었다. 1991년에 단종되었다가 그 맛을 잊지 못한 사람들의 재발매 요구로 2009년에 나왔으나, 3년만에 단종되었다. 다시 나온 그 과자를 먹어 보았더니, 그 맛은 내가 예전에 먹었던 '그 맛'이 아니었다. 뭐랄까, 가루 날리는 약간 싸구려 카레 맛이 그 과자 맛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새로 나온 과자는 세련된, 순한 카레 맛이었다. 88올림픽 때 선수촌 식당에서 있었던 일화가 떠올랐다. 인도 선수들이 카레 음식을 먹어 보고 이게 무슨 음식이냐고 물었다는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신문에 실렸다. 재발매된 B-29는 예전의 그 맛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본질을 잃은 맛'이었을 것이다.


  '아폴로' 과자도 기억이 난다. 작은 빨대 안에는 단맛의 카라멜 같은 것이 들어있었는데, 나는 포도맛을 좋아했다. 아마도 그 단맛은 내 치아의 크라운과 금 인레이 보철물에 작게나마 일조했을 것이다. 당시에도 먹으면서 '아, 이건 무서운 단맛이다' 싶어서 그렇게 많이 먹지는 못했다. 그런가 하면, 학창 시절에는 '치토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옥수수분을 재료로 한 그런 계열의 과자로는 '썬칩'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정말로 과자없이 못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서 그 어떤 과자 보다도 잊을 수 없는, 최고의 맛으로 남아있는 과자는 '딱따구리'라는 과자다. 1980년대 초반 가격이 50원이었는데, 나는 피아노 학원 가는 길에 꼭 이 과자 두 봉지를 사서 먹으면서 가곤 했다. 내가 살았던 3단지 아파트에서 피아노 학원이 있는 4단지 상가로 가려면, 작은 언덕길을 넘어야 했다. 과자를 다 먹을 무렵에는 피아노 학원에 다다랐다. 나는 그 과자를 먹으며 걷는 그 길이 무척이나 행복했었다.


  백원 크기의, 윤곽선에는 작은 홈들이 파여있는 그 과자의 맛을 표현하라면 쉽지가 않다. 그것은 '중용의 맛'이었다. 짜지도, 달지도 않았고, 느끼한 맛도 아니었다. 질리지 않는 은근한 맛이었는데, 나는 이제까지 먹어본 그 어떤 과자에서도 그 맛을 다시 느낄 수는 없었다. '쌀로별'이라는 과자가 아마도 그 형태나 맛에서 좀 근접했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다. 그 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과자가 80년대 중반에 단종되어서 다시 나오지 않는 것이 아쉬울 법하다. 내가 추측하기로는 딱따구리 만화와 관련된 저작권 문제가 걸려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딱따구리'와 함께 했던 그 아파트에서 2년을 보낸 후 우리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내 유년의 삶은 유랑극단 같았다. 국민학교 시절에만 무려 5번의 이사를 다녔다. 어느 도시에서는 6개월을 머물기도 했다. 주로 아버지의 직장 발령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집안 사정도 있었다. 정주(定住)하지 못하는 삶. 이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부모님을 이해했지만, 나에게는 그 시절의 기억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나에게 그 아파트는 마치 고향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을 떠난 후, 다시 그곳을 찾은 적이 없다. 언제나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던 그 아파트는 몇년 전, 재건축을 위해 철거되었다. 나는 댐 건설로 고향이 수몰된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딱따구리'를 먹으며 행복을 느끼며 걸었던 그 작은 언덕길은 그 과자를 나에게 '고향의 맛'으로 각인시켰다. 


  '모든 견고한 것은 공기 속에서 사라지고...'. 아주 오래전 읽었던 칼 맑스의 '공산당 선언' 가운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이제는 그 작은 책자의 내용의 무엇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그 글귀에는 인생의 자명한 진리가 담겨져 있었고, 또 그 표현도 문학적이라 좋아했던 것 같다. 영문본에는 '녹아버리고(melt)'라는 단어로 되어있지만, 나는 '사라지고'를 쓰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풍화'의 의미를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번에 녹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결국은 삭아져 가루가 되고 그 형체를 알 수 없게 되는 것. 나의 고향도, 그 고향의 맛도 이제는 사라졌다.


  대형 마트의 과자 코너를 돌아다니다 보면, 나는 아직도 그 '딱따구리'를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어떤 과자도 그 맛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조미료가 적당히 든, 유탕처리 식품에 불과한 50원짜리 그 과자는 그렇게 지나간 그 모든 것,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좋은 추억의 집합체로 내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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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저녁, 뉴스를 보다가 20대 택배 노동자 사망 소식을 들었다. 내용을 더 들을 수가 없어서 TV를 그냥 껐다. 그런 소식은 여러번 듣게 되어도 익숙해지지 않으며, 마음이 아픈 것도 무뎌지지 않는다.


  오래전, MBC 무한 도전의 어느 회차에서 박명수가 새벽 버스에 탑승했던 장면이 있었다. 마침 버스에는 고등학생이 타고 있었는데, 박명수에게 응원의 말을 부탁했었다. 


  "지금 공부 열심히 안하면,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한다."


  박명수는 나름의 통찰력 있는 말솜씨 덕분에 따로 '박명수 어록'까지 만들어져서 인터넷에서 떠돌아 다닌다. 나는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하는 직업이라... 택배 기사들을 볼 때마다 그 말이 떠올랐다.


  택배 기사들은 직영의 경우를 제외한 대다수가 자신이 소유한 배송 차량을 가지고 택배 회사와 계약한 '개인 사업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자영업자로 인식하기 보다는 '택배 노동자'로 본다. 엄청난 노동 강도에 비해서 그들의 실질 수입이 크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택배 노동자 과로사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지난 7월에는 노동계와 시민 단체가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대책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8월까지 올해 들어서만 공식적으로 확인된 과로로 인한 사망자 수는 5명이다. 택배 노동자들의 과중한 업무의 핵심은 '분류 작업'이라고 하는 과정이다.


  '분류 작업'이 이루어지는 열악한 작업 환경과 과중한 업무 강도는 과로로 이어진다. 그래서 대책위원회는 그 과정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대략적으로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1)분류 작업의 자동화 시스템 도입, 2) 대체 인력의 채용. 2가지 모두 돈이 든다. 자금 여력이 있는 기업은 1번을 택했다. 택배사 가운데 오직 한곳만이 이 방법을 택했고, 나머지 중소 택배회사들은 원가 상승을 이유로 난색을 표시한다. 임시방편으로 분류 작업 과정에 대체 인력을 더 투입하고 있다고 들었다.


  어제 뉴스에 나온 20대 노동자 사망 사건의 경우, 유가족과 대책위원회 측이 '과로사'라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사측은 과로사는 사실과 다르다며 반박하고 있다. 사측의 주장은 이렇다. 사망한 노동자 A씨는 '택배 노동자'가 아닌 '택배 지원업무 일용직'이며, 그 업무는 과도한 업무와 거리가 먼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택배 지원업무'란 택배 포장에 필요한 노끈과 박스 등을 나르는 일을 의미한다.


  유가족과 대책위원회 측은 A씨가 물류 센터에서 1년 반을 일해왔으며, 그 기간 동안 75kg의 체중이 60kg이 되었으며, 야간 작업시 5만보를 찍을 정도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다고 말한다. 2년의 근무 기간을 채우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견뎠다는 유가족의 증언도 있었다.


  당진 용광로 추락 사고로 사망한 청년의 10주기가 지난 9월이었다. 이십대 청년이 작업장의 허술한 난간에서 떨어져 비극적으로 사망한 그 사건 이후로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 기사 댓글에 달린 '그 쇳물 쓰지 마라'는 제목의 추모시는 노래로도 나왔다. 청년의 뼈 일부만 수습하고 남은 '그 쇳물'은 구형의 상징물이 되어 철강회사 뒷편 녹지에 보관되어 있다. 


  우리는 그러한 죽음을 기억할 유형, 무형의 상징물을 얼마나 더 보아야 할까? 자본주의는 그 탄생부터 이윤을 위해 달리는 폭주기관차와도 같았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가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괴물이 되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있어야 한다. 법과 제도, 상식과 합의가 제대로 작동하기만 한다면 노동 현장의 가슴 아픈 죽음은 막을 수 있다. 누군가의 생명과 안전의 희생으로 굴러가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며, 오히려 그 사회는 소수자, 약자, 하층민에 대한 야만성과 폭력이 내재된 사회일 것이다. 


  어제, 그 뉴스를 듣고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잠들기 전 기도에서 청년의 명복을 비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쓴다. 일상과 영화 같은 소소한 글을 쓰는, 방문자 수도 얼마 되지 않는 블로그이지만, 이 곳에 오는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그 청년의 죽음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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