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이게 다 뭐예요?"
  "제사 지낼 거."
  "인테리어 박씨네?"
  "야, 인테리어 박씨가 뭐냐. 이제는 새아버지로 인정 좀 해주면 안 되냐?"
  "난 못해요."

  양손에 장 본 것을 잔뜩 들고 온 엄마를 보니, 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남의 집 제사를 지낸다고 왜 저 난리인가? 인테리어 박은 엄마의 남자친구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제는 남편에 근접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엄마는 3년째 그 아저씨의 부모 제사를 지내고 있다.

  "네가 인정을 하든 못하든, 어쨌든 그 아저씨하고 엄마는 같이 살 거야. 그리고 올해는 너도 그 제사에 참석해야 해."
  "엄마, 지금 그 말 진짜야? 내가 미쳤어? 내가 왜 박 씨 집 제사에 가? 엄마, 어디 좀 이상한 거 아냐?"
  "빌어먹을 자식. 네가 지금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냐?"
  "아니, 엄마 말이 웃기잖아. 나는 김민수야. 김 씨 집 자손이라고. 그런데 박 씨 집 제사에 가라고 하니까 그런 거 아냐."
  "그건 네 입장이고. 어쨌든 올해 제사는 너도 지내."
  "어쨌든 난 안 갈 거니까, 엄마가 알아서 해."

  그렇게 말하고는 나는 내 방에 들어와 버렸다. 아무리 남자한테 정신이 팔려도 그렇지. 남의 집 제사 지내주는 것도 모자라, 자기 자식한테 그 집 제사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엄마의 논리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저런 엄마하고 내가 얼마나 더 살아야 할까? 이제 고등학교 1학년, 앞으로 3년을 버틸 수 있을까? 나에게 '독립'이라는 말은 서슬 퍼런 일제시대를 살던 우리 조상님들이 느꼈던 막막함과 맞닿아 있다. 대학은 갈 수나 있을까? 아니, 갔다고 해도 졸업을 할까? 스무 살이 되었다고 무조건 집을 나와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너, 나하고 좀 얘기나 하자."

  스마트폰 테트리스 게임의 블록들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내고 있을 때, 인테리어 박이 내 방문을 열었다.

  "아저씨, 노크 좀 하시죠?"
  "가족끼리 무슨 노크냐. 아무튼 좀 나와 봐."
  "싫어요. 그냥 여기서 말해요."
  "어휴, 쟤가 버릇이 없어서 저래."

  부엌에서 장 본 것을 정리하던 엄마가 참견하는 소리를 했다. 나는 박씨 아저씨보다도 저렇게 말하는 엄마가 더 얄밉고 짜증스러웠다.
 
  "이번 제사는 가족의 화합 차원에서도 중요하니까, 너도 참석해야 한다. 알았지?"
  "무슨 가족이요? 아저씨 가족은 인호잖아요. 뭐 보니까, 엄마는 곧 가족이 될 거 같고. 난 빼주시죠?"
  "아니, 이 자식이."
  "나가요. 나가라구요."

  내가 화가 치밀어서 고함을 지르자, 박씨 아저씨는 못 이기는 척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저 남자가 싫다. 너무나도 싫다. 나한테서 엄마를 뺏어간 것으로도 모자라서, 자기가 내 아버지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고 있다. 나는 저 남자의 경박스러움과 뻔뻔스러움에 침을 뱉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만다. 저 사람의 재수 없는 상판대기와 성질머리를 똑 닮은 아이가 인호이다. 나와 동갑인 그 자식과 나는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것도 같은 반이다. 부모는 이혼했고, 새아버지가 될 남자의 아들과 같은 학교, 같은 반에 다니다니. 이건 뭔가 꼬여도 단단히 꼬여버린 인생이다.

  엄마가 나한테 아저씨네 제사에 참석하라고 하는 소리를 보니, 아마도 이제는 진짜 같이 살 모양인가 보다. 하긴, 지금도 같이 살고 있기는 하다. 박씨 아저씨와 인호는 1층에, 엄마와 나는 2층에 산다. 이 2층 양옥은 박씨 아저씨의 집이다. 그러니까 나와 엄마는 엄밀히 말하자면, 박씨 아저씨에게 얹혀살고 있다. 뭐랄까, 나에게 있어 박씨 아저씨, 인테리어 박은 엄마의 남자 친구이며 집주인인 셈이다. 엄마는 이제 세입자 노릇 그만하고 진짜 안방마님이 될 심산인 것이다. 안방마님이라고 하니까, 인테리어 박이 돈푼깨나 있는 사람처럼 들릴 수도 있다. 동네에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인테리어 박이 알짜배기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인테리어 박은 오래전에 파주의 비닐하우스 농지를 사뒀는데, 거기에 아파트가 곧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나는 맨날 후줄근한 점퍼나 걸치고 다니는 그가 그런 큰돈을 만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자기 입으로 떠벌리고 다닌 허풍이겠지.     

  "너, 우리집 제사에 오지 마라."

  내가 밤늦게 마당에서 줄넘기하고 있을 때, 재수 없는 인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구. 야, 나도 박씨 집 귀신이 먹다 남길 음식에는 관심 없다."
  "자식, 말하는 본새하고는. 가만 보면 말이지, 넌 사람 열받게 하는 재주가 있어."
  "야, 누가 할 소리. 너야말로 네 아빠 닮아서 사람 긁는 게 취미 아니냐?"
  "어이, 동생. 말 좀 조심하지. 이제 내 아빠가 동생 아빠도 될 건데."
  "웃기고 있네."

  나는 인호 녀석의 속 긁는 말에 태연해지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서 곧 줄넘기를 멈추고 말았다.

  "아, 달도 밝다. 동생, 운동 더 하다 들어가라고. 이 형님은 이제 자야겠다."

  나는 저런 녀석한테 동생 운운하는 소리를 듣게 만든 엄마가 새삼 원망스러워졌다.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와서 문을 여니,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저녁 내내 제사 음식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이제서야 대충 일이 끝난 모양이었다.

  "저녁 내내 뺀질거리면서, 부엌일이나 좀 도와주지 않고."
  "내가 말했잖아요. 난 김씨 집안 자손이라고. 엄마나 박씨 집안 일 열심히 하세요."
  "야, 너는 자식이 되어가지고 엄마 좀 위해주면 안 되냐!" 

  비아냥거리는 내 말을 듣고는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그러는 엄마는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대머리에다 키도 작은 박씨 아저씨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그래? 그 파주에 있다는 금싸라기 땅 때문에? 정말 돈 때문에 그런 거야?"
  "넌 그게 네 엄마한테 할 소리냐? 그런 돈 되는 땅 있으면 자기 자식 주지, 아무리 좋아도 날 주겠냐? 너는 사람이 살면서 의지할 데가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러니까 엄마, 인테리어 박이 엄마가 의지할 만한 뭔가 대단한 게 있는 양반이냐고. 인물이 좋아? 지금 확인된 재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낡은 2층 양옥집, 동네에 있는 인테리어 가게. 그게 전부잖아."
  "인물 좋은 건 네 아빠 하나로 족해. 적어도 인호 아빠는 나하고 너, 밥은 굶기지 않을 거다. 남자는 모름지기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 거야."

  나는 엄마의 그 말에 새삼스럽게 기억 속의 아빠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아빠 얼굴을 못 본 지도 벌써 5년째다. 아빠가 부산의 어느 변두리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소리를 듣기는 들었다. 같이 사는 여자가 있다던가, 어쩌면 나에게는 이미 배다른 동생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나에게 아빠라는 존재는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 남편으로서도 아빠로서도 낙제점이었던 사람. 그리고 앞으로도 볼 생각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이 나에게 물려준 것은 큰 키와 번듯한 외모뿐이다.

  "그런데 엄마, 그 밥을 안 굶긴다는 인테리어 박이 왜 엄마가 아파트 청소 나가는 것은 안 말려? 엄마는 지금도 청소일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네가 철딱서니 없는 거야. 어쨌든 내가 너 대학은 보내야 할 거 아니냐? 그런 돈을 인호 아빠한테 달라고 하냔 말이지. 넌 내가 낳은 자식이고, 네가 대학가는 건 내 책임이야."
  "엄마, 난 그딴 대학 안 가도 괜찮아. 그러니 제발 나한테 박씨네 제사에 참석하라느니, 그런 말 좀 하지 마. 난 그 집 사람들, 너무나 싫으니까."
  "그럼, 당장 이 집에서 나가서 네 힘으로 밥 먹고 살든가. 네가 걸치고 있는 옷이며 신발은 누가 사준 거냐? 그리고 네가 살고 있는 이 집의 주인이 누구냐? 좀 대가리를 굴려 보라고. 어떻게든 살살 비위 맞추면서 네가 살아갈 방도를 생각해야지."

  나는 엄마의 그 말에 화가 나서, 손에 든 줄넘기를 현관문 앞에다 팽개치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인테리어 박과 인호가 싫은 것은 내 감정의 문제일 뿐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이다. 17살인 내가 스스로 독립할 방도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인테리어 박에게 '아저씨'라는 호칭 대신에 '새아빠'라든지, 아니면 '아버지'라고 부르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굴욕적이다. 거기에다 인테리어 박의 아들 인호 녀석은 또 어떤가? 그 자식은 느물거리는 말투로 사람의 속을 벅벅 긁어댄다. 그런 녀석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것은 견딜 수가 없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서는 한편으로 하나의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과연 가족이란 게 뭘까? 어떤 면에서 지난 3년 동안 이 낡은 이층집에서 보낸 시간들은 인테리어 박과 인호를 생판 남으로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상한 가족이군.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고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이, 김민수. 요새 잘 지내냐? 내가 어제 화장실 낙서에서 재밌는 거 읽었다. 너 윤슬이랑 사귄다며?"
  "네가 그렇게 믿고 싶으면 믿어라."
  "아, 이 자식은 뻗대는 것도 멋있단 말이야. 저러니, 여자애들이 맨날 따라다니지."
  "나도 그 낙서 봤어."
 
  내가 '멀대'라고 부르는 저 재수 없는 녀석은 이산호다. 유도부에 들어갔다는 것만 내세우며, 괜히 거들먹거리는 한심한 놈에 지나지 않는다. 저런 자식 옆에서 발바닥 비비는 파리처럼 인호가 붙어있었다.

  "이산호 넌, 박인호하고 사귀냐? 너희 둘이 맨날 붙어 다니던데."
  "너, 말조심해라. 아침부터 열받게 하지 말고."
  "그러니 너무 붙어 다니지 말라고."
  "야, 산호야. 네가 참아라. 저게 겉멋이 들어 그래."
 
  나는 멀대 자식보다 그 옆에서 빌빌거리는 인호의 상판대기를 보는 것이 더 싫고 역겨웠다. 왜 저 녀석은 저러고 살까? 저런 모자란 놈 옆에 있으면 더 바보처럼 보인다는 걸 모르나? 근데 윤슬과 내가 사귄다는 말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나는 윤슬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짧은 숏커트 머리에 늘 생콩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아이에게 나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런데 왜? 한 달 전쯤인가? 운동장에서 윤슬이 달리다가 넘어졌을 때, 내가 일으켜 세워준 적은 있지.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별로 기억나는 일이 없다.

  "있다 1층에 내려와라. 너도 제사에 참석하는 거야."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엄마는 제사 음식을 2층에서 1층으로 막 나르던 참이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눈 딱 감고 제사에 참석할 것인가? 아니면, 엄마가 난리를 치든 말든 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버틸까? 어떤 면에서 엄마에게 이 제사는 박씨 집안 사람이 되는 공식적인 절차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그래서 나더러 제사에 참석해 자기 얼굴이라도 세워주라는 것이다. 왜 박 씨 집안 제사에 김 씨 자손인 나의 참석이 구태여 필요한지는 납득할 수 없지만, 내가 짐작하기로는 그러했다. 나는 복잡한 머릿속 생각을 털어내려고 줄넘기를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하여간, 우리 동생은 체력 단련에는 진심이야. 얼굴도 잘생겨, 운동도 잘해."
 
  내가 한참 줄넘기를 하고 있을 때, 인호가 어느새 다가와 이죽거리며 말했다.

  "박씨 집안 아드님, 이제 조상님 오실 텐데 제사 준비나 잘하시죠."
  "뭐 제사 준비는 댁의 어머님이 잘하고 있고요. 그나저나 너 윤슬이하고 사귀는 거 맞아?"

  나는 아침에 들은 그 이름을 또 들으니,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윤슬이한테 별 관심도 없어. 왜 자꾸 걔 이름을 꺼내는 거야?"
  "이 자식 봐라. 너 걔가 너 좋아하는 거 몰라? 뻔뻔하게 모르는 척을 하고 있네."

  멀대 녀석이 봤다는 화장실의 낙서가 그래서 나온 건가? 나는 인호의 그 말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너, 혹시 네가 걔를 좋아하는 거 아니냐? 윤슬이를 인호 네가 좋아하는 거 맞지?"
  "내가 그런 선머슴 같은 애를 왜 좋아해? 걔는 예쁘지도 않다고."

  인호는 성질이 났는지 소리를 빽 질렀다.

  "그건 그렇지. 그렇다고 예쁜 애가 너를 좋아할 리는 없지."
  "너는 얼굴만 번지르르하게 생긴 게 나중에 여자들 등이나 처먹을 관상이야. 이 재수 없는 놈아."
  "진짜 윤슬이를 좋아하는 게 맞네."

  나는 신이 나서 더 짖궃게 인호를 놀려댔다.

  "김민수, 너 말이야. 네가 기억해야 할 게 있는데, 너하고 네 엄마는 우리집에 얹혀살고 있어. 내가 모를 줄 알아? 네 엄마가 우리 아빠 돈 보고 저러는 거."
  "이 새끼가 진짜..."

  나는 줄넘기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인호의 멱살을 잡았다. 체구가 작은 인호는 팔랑거리는 바람개비처럼 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아빠, 민수 자식이 날 죽이려 들어!"

  인호의 악다구니에 곧 인테리어 박과 엄마가 놀라서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대체 뭐 하는 짓들이야!"

  나는 인테리어 박의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큰소리에 놀라서 멍하니 서 있었다. 인테리어 박의 옆에 있던 엄마는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민수, 넌 2층으로 올라가라. 오늘 저녁은 내 눈에 띄지 말어."

  인테리어 박은 바닥에 널브러진 인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 나서는 다친 곳이 없는지 인호의 얼굴과 몸을 살펴보았다. 저런 머저리한테도 아빠가 있다. 그런데 왜 지금 내 곁에는 아빠가 없는가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왔다. 무엇보다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터벅터벅 2층 계단을 올라갔다.

  "딱, 딱, 딱."

  2층에서도 1층 제사상에서 두들기는 젓가락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박 씨 집 귀신들이 김 씨 집 며느리가 차린 음식을 배터지게 먹겠군. 내 심사는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었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아서, 그냥 내가 좋아하는 테트리스 게임을 계속할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1층 마당에서 지방(紙榜)을 태우는지, 매캐한 연기가 창틈으로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그때였다.

  "김민수, 자냐?"

  방문 밖으로 인호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 너 볼 일 없다."
  "아까는 내가 좀 심했어."
  "듣기 싫다고. 가라고."

  나는 짜증이 치밀어서 소리를 질렀다.

  "그래, 갈게, 간다고. 근데 말이야. 난 너도 아줌마도 싫지는 않아. 뭐랄까, 가족 같거든."
  "가족 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 넌 박 씨고, 난 김 씨야.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나는 문밖의 인호를 내쫓지도 못하고 그렇게 말을 주고받았다.

  "너 같이 잘생긴 동생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진 않지."
  "하여간, 말하는 거 하고는."
  "나, 간다."

  그렇게 인호가 내려가고 나서도 내 귓가에서는 '가족'이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키가 작고 대머리인 새아버지, 나보다 생일이 한 달 빠른 비실비실한 의붓형, 그리고 엄마.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이 이상한 가족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겨울 소슬바람이 후드득, 낙엽을 쓸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조금씩 조금씩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젬마에게


  젬마, 내가 일하는 원목실의 창문으로 커다란 벚나무가 보여요. 그 벚나무의 잎들이 노랑과 주황으로 변하는 것을 보니, 문득 '마지막 잎새' 생각이 나더군요. 그래요,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 말이에요. 늙고 보잘것없는 화가 베어만은 자신의 마지막 걸작을 완성하고 죽지요. 그가 그린 담벼락의 잎사귀 하나를 보고, 중병을 앓던 젊은 아가씨는 삶의 희망을 되찾고요. 어쩌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사도직도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병원에 입원한 아픈 환자들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만들어주는 일.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내 능력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아요.

  내가 원목실 소임을 맡기 전에는, 해남에 있는 수녀원 농장에서 농사짓는 사도직을 했어요. 농사일이란 게, 해보니까 참 재밌어요. 물론 힘들지요. 그런데 그 일이 내 적성하고 참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지 뭐예요. 씨를 뿌리고 열심히 풀도 매요. 그렇게 가꾸다 보면 어느새 수확하는 거예요. 토실토실하게 자란 예쁜 고구마들이며, 속이 꽉 찬 배추들 보면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요. 그렇게 수확한 것들을 수녀원 공동체에 나누어서 보낼 때는 마치 먼 곳에 자식 보내는 심정이 되기도 하고. 그런 말이 좀 우습게 들리나요? 하지만 나는 농사일하면서 참 행복했어요.

  그런 농사일에 비하면, 이곳 병원에서의 사도직은 좀 힘들고 지칠 때가 많아요. 아픈 사람들은 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니까, 잘 들어줘야지요. 환자들은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그래요. 그게 싫고 귀찮다기보다는... 내가 그분들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괴롭더라고요. 젬마한테 내가 어떻게 작은 힘이라도 되어줄지 생각해 보았어요. 그게 무엇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늙은 화가 베어만이 마지막 잎새를 그리듯 이런 편지라도 쓰고 싶었답니다.

  젬마가 무단으로 외출해서 하루 동안 연락이 안 되었었잖아요. 그때, 내가 정말 걱정 많이 했어요. 혹시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젬마의 언니한테 내 휴대전화 번호를 남기면서 늦게라도 좋으니, 젬마 소식을 알려달라고 했었지요. 밤 10시에 언니가 젬마를 찾았다고 연락했을 때, 그제야 마음이 놓이더군요. 부모님을 모신 추모 공원이 꽤 먼 곳이었는데, 그 아픈 몸으로 어떻게 젬마가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젬마가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을 거예요.

  젬마하고 같은 병실에 있었던 로사 자매 기억나요? 50대 중반으로 체격이 꽤 큰 아주머니 환자요. 그 자매는 난소낭종으로 난소와 자궁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어요. 나중에 들으니, 낭종의 무게가 무려 7kg이나 되어서 수술팀이 다들 놀랐다고 해요. 그런 큰 수술을 받았는데도, 로사 자매는 아주 쾌활했어요. 이제 그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일도 없고, 오히려 가볍게 살 수 있다고 하면서요. 로사 자매는 동대문 시장에서 이불 장사를 30년 넘게 했어요. 결혼도 안 하고 홀어머니에 세 명의 동생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자기 돌볼 틈도 없었다고 해요. 어느 날부터 자꾸 배가 나오고 속이 불편해서, 소화기내과를 갔대요. 거기에서 내시경을 해보고는 문제가 없어서, 의사가 부인과 진료를 받아보라 했다는군요. 그러고 나서야 그게 난소낭종인 걸 알게 된 것이지요. 낭종이 커지기 전에 일찍 발견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이 들지요. 그래도 그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그 자매의 의연함이랄지, 어쩌면 그것은 나이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어요.

  로사 자매와는 달리, 어떤 의미에서 젬마에게는 스물넷의 젊음이 고통으로 다가오겠지요. 젬마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나에게 그렇게 물었었지요.
 
  "수녀님, 여자로서 제 인생은 이제 끝난 거죠? 정말 그렇죠?"

  초췌한 얼굴로 나에게 묻는 젬마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더군요. 내가 그 어떤 말로 위로를 한다고 해도, 젬마에게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젬마의 그 질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어요.

  젬마, 내 이야기를 좀 할까요? 나에게는 아주 착하고 예쁜 조카가 있었어요. '있었다'라고 말하는 건, 그 아이, 지수가 이제는 세상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지수는 혈액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떴어요. 지수의 나이 여덟 살 때에요. 그때가 나의 인생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때였지 싶어요. 그 어린아이의 죽음이 나의 신앙과 삶을 온통 뒤흔들었으니까요. 왜 아무 죄도 없는 그 아이가 죽어야만 했을까요? 나는 하느님께 왜, 라는 질문을 던지고 또 던졌어요. 도저히 지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니까요. 왜 그런 일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일어나야 했는지, 왜 그 아이가 그토록 고통받다가 죽어야 했는지, 어떻게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거든요.

  그 가느다란 팔에 혈관을 찾지 못해서 여러 번 주삿바늘을 찌를 때, 지수가 비명을 지르던 모습이 아직도 떠올라요. 동생이 그러더군요. 저걸 보느니, 아이가 그냥 얼른 가버렸으면 한다고요. 그리고 마침내 지수가 눈을 감았을 때, 우리 가족은 슬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했어요. 지수가 더이상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지수가 가장 두려워했던 건... 다시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일이었어요. 지수의 하나뿐인 소원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결국 그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지요. 나는 젬마의 퇴원을 보면서, 젬마가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를 생각했어요. 젬마, 젬마는 집에 가서 어떤 일을 가장 먼저 하고 싶은가요? 어쩌면 한 달 동안 쓰지 못한 책상의 먼지를 닦아낼 수도 있고, 이제 계절이 바뀌니까 옷장의 옷들을 살펴볼 수도 있겠네요. 나는 무엇보다 젬마가 식탁에 앉아서 따뜻한 홍차를 마시면 좋겠어요. 

  젬마, 젬마가 나에게 물었던 그 질문에 대해 이제는 내가 답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자로서의 삶, 그러니까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엄마로서의 삶은 사라진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젬마에게 여전히 펼쳐진 길이 있어요. 한 인간으로서의 길 말이에요. 그 길 위의 삶이 어떤 것인지 젬마는 아직 모르잖아요. 그러니 한번 걸어가 보는 거예요.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그 길을 젬마가 잘 걸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것을 위해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돕고 싶어요.

  주치의 선생님에게 들으니, 다행히도 주변 장기로 암세포가 전이되지 않았다고 해요. 만약에 전이가 되었으면, 힘든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그걸 안하게 되었으니까요. 병원에 다니면서, 계속 정기적으로 추적 관찰하면 괜찮을 거라고 하면서요. 지금은 큰 수술을 받고 힘든 상태니까, 모쪼록 몸조리 잘하면서 지내는 것이 중요해요. 앞날의 일을 생각하는 건 잠시 미뤄두고요.

  병원에 오게 되면 원목실의 나를 찾아주어요. 어쩌면 젬마는 나를 다시 만나려고 하지 않을 것도 같아요. 원목실에서 5년을 있어 보니 알겠더군요. 병원에서 힘든 투병 생활을 했던 환자들이나 그 가족들은 병원을 시련의 장소로 기억한다는 사실을요. 마치 전쟁터의 병사가 자신이 치열하게 싸웠던 그곳을 찾는 것을 꺼리듯, 병원이 불안과 공포의 장소로 각인되는 것이지요. 호스피스 병동에서 남편의 임종을 본 아주머니가 나중에 나에게 그런 말을 내게 하더군요. 이 병원의 모든 것이 끔찍하게 싫다고요. 그래서 병원도, 이곳에 있는 수녀님도 다시는 찾지 않게 될 것 같다고 말이지요.

  젬마, 나를 다시 찾지 않아도 괜찮아요. 다만, 내가 젬마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지금 젬마에게 일어난 일을 '왜'라고 물으면서 구태여 그 답을 찾지는 않았으면 해요. 나도 지금까지 지수의 죽음에 대한 이유는 찾지 못했으니까요.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도 일어났을 뿐이다. 왜 나는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결국 그런 생각에 이르자, 하느님을 원망했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더군요. 여전히 고통의 하늘은 열려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살아야 할 날들이 남아있어요. 젬마가 언젠가 나를 다시 만났을 때, 젬마의 살아온 그날들을 이야기해 주면 좋겠어요.

                                              사랑을 담아, 베로니카 수녀 드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랜턴(lantern)


  "어서 오세요."
  "아줌마, 말보로 하이브리드 좀 줘 봐."
  "잠시만 기다리세요."

  경미는 담배 진열대에 서면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외워야 할 담배의 종류가 너무 많았다. 손님들이 찾는 담배가 제각각인데, 그걸 정확하고 빠르게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만있자, 말보로 하이브리드는 어디 있는 거지? 그게 멘솔 들어간 거니까, 여기쯤 있을 것 같은데...

  "이 아줌마는 항상 느려. 그래 가지고 뭔 장사를 해?"
  "아유, 죄송합니다. 이게 맨날 헷갈리네요. 아, 찾았다. 여기 있습니다."
  "좀 빠릿빠릿하게 일 좀 하쇼."
  "네, 네, 알겠습니다."

  40대 중반의 키가 작고 퉁퉁한 남자 손님은 경미에게 그렇게 핀잔을 주고는 편의점 문을 나섰다. 역시 사람을 대하는 일은 쉽지 않구나. 경미는 나즈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남는 낮시간의 부업으로 찾은 것이 편의점 아르바이트였다. 동네 편의점 창문에 붙어있는 구인 광고를 보고, 편의점에 그냥 한번 들어가 본 것이 시작이었다.

  경미가 면접을 본 편의점의 점주는 대기업에서 퇴직한 50대 초반의 중년 남자였다. 그는 경미의 생글생글한 웃음이 좋아 보인다면서, 그 자리에서 채용을 결정했다. 경미는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편의점 일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지만, 경미는 사장과 야간 알바생에게서 여러 가지를 빠르게 배워나갔다. 주부로만 살아온 경미 자신도 정말이지 놀랄 지경이었다. 자신에게 그토록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업무 매뉴얼이 다소 복잡하기도 했지만, 한번 익히고 나니 나름의 요령도 생겼다. 무엇보다 편의점이 오피스텔이 위치한 상업지구라, 번거로운 어린 학생이나 노인 손님이 거의 없었다. 어떨 때는 좀 시간이 남아돌아서, 책이라도 가져와서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신 여사, 오늘 매상은 좀 어때?"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요. 그냥 평일 수준으로 나왔어요."

  경미는 사장이 자신을 부르는 '여사(女史)'라는 호칭을 들으면, 좀 우습기도 하고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사장은 매너가 좋은 사람으로 경미에게 말을 함부로 놓지도 않았고, 경미가 실수를 해도 큰소리로 질책하는 일도 없었다. 일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사장은 나름 괜찮은 고용주였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쉽게 안착할 수 있었던 것도 저런 사장의 태도 덕분이기도 했다.

  "사장님, 신제품 프로모션으로 나온 것들이 있어요. 크림빵하고, 즉석 카르보나라, 물만두, 이렇게 세 개요. 이거 챙겨드릴까요?"
  "난 크림빵 하나 가져갈 테니, 나머지는 신 여사 집에 가져가서 애들 간식으로 줘요."

  사장은 크림빵 하나만 얌전하게 가져갔다. 원래대로라면 저런 신제품들은 사장이 다 가져가든가, 매대에 진열하게 되어있다. 그런데도 사장은 그런 것들이 나오면, 너그럽게 아량을 베풀어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져가게 했다.

  경미는 야간 알바생에게 인수인계하면서 자신이 가져가기로 한 즉석 카르보나라 제품을 건네주었다. 서른 살의 야간 알바생은 늦깎이 대학생으로 학비를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알바생이 간식을 챙겨준 경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경미는 새로 나온 물만두는 어떤 맛일지 궁금해하며 집으로 향했다.

  "이거, 편의점에서 얻어온 거야?"
 
  저녁 식탁에 물만두를 쪄서 내온 것을 보고 남편이 물었다.

  "우리 사장님, 참 관대해. 신제품 프로모션이 세 개 있었거든. 크림빵, 카르보나라, 물만두. 크림빵만 가져가고 나한테 나머지 가져가서 애들 간식 주라는 거야."
  "당신은 간식 줄 애도 없으면서 어쩌다 그런 거짓말을 하게 된 거야?"
  "글쎄, 그냥 아이가 있는 주부로 행세하는 게 내가 더 편할 것 같아서."
  "그럼, 당신 아이들은 몇 살, 몇 살인데?"

  남편이 짖궂은 표정을 지으며 경미에게 물었다.

  "몇 살로 할까? 몇 살로 하면 좋겠어, 여보?"
  "중학생 정도로 하지 뭐. 내가 마흔다섯이고 당신이 마흔셋이니까, 얼추 중학생 학부모 나이잖아."
  "중학생은 좀 골치가 아파. 나는 사장님한테 초등학교 4학년하고 6학년인 아들이 둘 있다고 했거든."
   
  남편은 경미의 말을 듣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초등생 아들 둘이 더 심란하지. 당신은 도대체 그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어떻게 다 하고 편의점 알바를 한다는 거야?"
  "애들은 지들끼리 놔두면 더 잘 알아서 크는 거 아닐까?"
  "그런가? 우린 사실 아무것도 모르잖아."

  남편의 그 말을 들으니, 저녁 식탁의 음식이 벌써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이 식탁은 더 번잡스럽고 시끄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부의 식탁은 언제나 정갈했고 조용했다. 경미는 그런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까 보니까, 당신 택배가 하나 왔던데. 그거 뭐야?"
  "응. 랜턴. 캠핑할 때 쓰는 거."
  "근데, 랜턴은 저번에도 샀잖아."
  "이건 색깔이 다른 거라구."

  남편은 그 말을 하며 멋쩍게 웃었다.

  "난 좀 이해가 안 되네. 당신은 캠핑을 가본 적도 없잖아. 왜 그렇게 캠핑용품을 사 모으는 거야? 창고 좀 봐봐. 죄다 당신 캠핑용품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포트메리온 그릇 사다 모으지 않아?"
  "그건 그런데..."

  경미는 자신의 말을 되받아치는 남편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미는 포트메리온 그릇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하나둘씩 사모으기 시작한 것이 작은 방 벽면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100년 후에 고고학자가 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파보면 말이지. 포트메리온과 닭 뼈만 나올지도 몰라. 집집마다 포트메리온 그릇 하나씩은 다 있고, 치킨에 환장한 민족이니까."

  그렇게 눙치면서 남편은 식어버린 물만두를 하나 집어 들었다.

  "이거 맛은 괜찮은데. 담백하고, 고기가 씹히는 것도 좋고. 잘 팔리겠는걸."

  경미는 남편이 먹고 있는 물만두를 간식으로 줄 아이들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았다. 그 아이들이 있다면 남편과 자신이 더 행복했을지, 아니면 더 괴로워졌을지 궁금해졌다. 생기지 않는 아이를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경주의 이름난 한의원에서 지은 첩약을 먹으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해서, 남편과 경주에 다녀온 것이 2년 전이었다. 그 이후로 이 부부는 더는 아이를 갖는 걸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그 사실을 두 사람은 받아들였다.

  "내일부터 2주 동안은 많이 늦을 거야. 완성된 선박을 검사해야하는데, 고객사에서 시한을 무척 촉박하게 준 거야. 어쩔 수 없이 야간작업도 해야 할 것 같고."
  "아무튼 조심해서 해요. 무리하지 말고."

  경미의 남편은 조선소 QM(Quality Management) 팀의 차장이다. 그곳에서는 건조된 선박을 검사하고 고객사에 인계하는 전과정을 감독한다. 남편이 사무실보다는 주로 현장에서 일하는지라, 경미는 남편이 다치거나 무슨 사고를 당하지는 않을까 늘 신경이 쓰였다. 이번에는 야간작업도 해야 한다고 하니, 남편의 일이 그저 빨리 순탄하게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만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출근하고 경미도 편의점에 갈 준비를 했다. 경미는 포트메리온 벨 머그컵에 믹스커피를 한 잔 탔다. 이상하게도 이 컵에는 믹스커피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컵에 그려진 분홍색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경미는 이 컵의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궁색하지 않은 살림에도 자신이 편의점에서 일하는 이유가 바로 포트메리온 그릇을 사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새로 나온 그릇 세트를 사려면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경미는 흠집이 나지 않는 수세미로 컵을 닦았다. 물을 틀어서 컵을 헹구는데, 순간 손이 컵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컵은 개수대 안쪽에 부딪히면서 손잡이가 깨졌다.

  "아이고, 아침부터 참 재수가 없네."

  경미는 이 벨 머그컵이 6개짜리 세트라는 걸 떠올렸다. 이 벚꽃 무늬만 따로 사는 일은 어려웠다. 판매처의 대부분은 벨 머그의 무늬를 랜덤으로 보내주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6개짜리 세트를 또 살 수도 없었다. 그건 낭비다. 아무리 포트메리온을 좋아해도 그런 돈을 쓰기는 싫었다. 경미는 벚꽃 무늬 머그컵을 포기하기로 했다. 어쨌든 손을 다치치 않았으니 다행이야. 깨진 머그컵을 신문지에다 주섬주섬 주워 담으며 경미는 혼자 중얼거렸다.

  11시는 편의점의 물품이 입고되는 시간이었다. 배송 기사에게서 인계받은 물품을 확인하고, 배열하느라 11시부터 12시까지 경미는 무척 바빴다. 오늘은 특히 음료 제품이 많아서, 그걸 나르는 것도 꽤 힘들었다. 물건을 다 정리하고, 경미가 소비 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을 하나 뜯어서 먹은 시각은 1시 반이었다. 돈을 번다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구나. 경미는 세탁할 때 남편의 옷에서 나오는 가는 쇳가루를 떠올렸다. 아무리 작업복을 입고 보호 장비를 갖추어도 선박에서 나오는 이런저런 이물질과 유독물질을 남편은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노후를 위해 꾸준히 저축하고 연금을 붓고 있지만, 남편이 언제까지 직장에 다닐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경미는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지금의 편의점 일을 더 열심히 하겠다고 새삼스레 다짐했다.    

  "말보로 하이브리드."
 
  가끔 그 담배를 사 가는 40대 중반의 남자 손님이었다. 남자는 머리를 빡빡 밀어버려서, 경미는 그 손님에게 '빡빡머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네. 여기 있습니다."
  "아줌마, 이제 좀 말귀를 알아먹는구먼."
  "손님 덕분에 열심히 담배 종류 공부했습니다."

  '빡빡머리'가 흡족한 표정으로 담뱃값을 결제하고 편의점 문을 나섰다. 처음에 그런 험한 인상의 사람을 대할 때면 경미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으나, 요즘은 나름의 여유도 생겼다. 계산대 아래에는 바로 경찰 지구대와 연결되는 무선 비상벨 버튼이 있어서, 안심이 되는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편의점이 있는 위치가 번화한 상점가가 아니라서, 손님들 대부분은 그곳 오피스텔 거주민이거나 인근 사무실의 직원들이었다. 경미는 인품이 괜찮은 사장도 그렇고, 편의점을 찾는 손님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들 덕분에 경미는 돈을 버는 일을 통해 세상의 여러 단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커피와 간식을 찾는 사무실 직원들 한 무리가 우르르 계산을 끝내고 가버리자, 편의점은 다시 한산해졌다. 입고된 상품도 다 정리해서 진열해 놓았겠다, 소비기한 지난 폐기 식품도 확인해서 모아두었겠다, 경미에게 쉴 수 있는 약간의 자투리 시간이 생겼다. 그럴 때면 경미는 새로운 포트메리온 그릇들이 있나 스마트폰으로 들여다보곤 했다.

  "아, 이건 좀 비싸다. 접시 하나에 5만 원이면, 세트는 돈이 얼마나 드는 거야?"

  경미는 보랏빛의 예쁘장한 꽃들 사이로 노랑색과 하늘색의 나비가 날아다니는 둥근 접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포트메리온의 무늬는 가만 보면 거의 비슷해 보였다. 정해진 잎사귀 패턴이며 꽃과 나비도 그렇게 특출난 것이 없는 듯했다. 그럼에도 경미는 포트메리온 그릇들의 문양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치 자신이 그 꽃들과 나비가 있는 어떤 한가로운 오솔길을 거닐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이 좋기는 했지만, 문제는 가격이었다. 누군가 그랬던가? 주부들 취미의 끝판왕은 그릇이라고. 자신은 포트메리온 정도에 빠져있지만, 그보다 더더욱 비싼 외산 명품 그릇들은 많았다. 경미는 사람들이 무언가에 빠지게 되는 계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그 시작은 백화점에서 본 포트메리온의 유아용 식기에서부터였을 것이다. 앙증맞은 크기의 밥공기며 귀여운 무늬의 수저 세트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경미는 자신에게는 그 식기 세트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 대신에 그것을 본 그날, 경미는 2인용 커피잔 세트를 샀다. 분홍색의 벚꽃 무늬가 있는 커피잔 세트였다. 경미의 포트메리온 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경미가 황금빛 띠무늬의 접시 세트를 사려면 자신이 받게 될 월급에서 얼마를 써야 하는지 헤아려 보았다. 6개의 접시에다 앞접시까지 더하면, 남는 돈이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 그릇들이 예뻐도 그건 무리였다. 경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집에다 포트메리온 박물관을 차릴 것도 아니고, 어느 시점에서는 이 분수에 넘치는 취미를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때가 오지는 않은 것 같았다.

  "신 여사, 오늘 매상은 괜찮은가? 매장에 다른 별일은 없고?"
  "네, 낮에 사무실 손님들 덕분에 평일보다 조금 더 나왔어요. 사장님, 그런데 폐기 식품들은 어떻게 할까요?"
  "이제 그런 건 그만 묻지 그래. 신 여사하고 창민 군하고 필요한 만큼 나눠 가지도록 해요."
 
  소비기한이 지난 폐기 식품들도 알바생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편의점의 모든 물건은 사장의 것이었으므로, 당연하게도 폐기 식품을 처분하는 일에도 사장의 허락이 필요했다. 말만 소비기한이 지난 음식이지, 먹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떤 편의점에서는 점주가 그 폐기 식품들도 대부분 가져가서 알바생들의 원성을 듣는다는 말도 있었다. 그런 곳에 비하면, 경미나 야간 알바생에게 이 편의점은 일하기 괜찮은 곳이었다. 경미는 오늘 나온 빵과 요구르트, 과자를 나름 공평하게 나누었다. 그리고 그것을 야간 알바생에게 인수인계할 때 건넸다. 나이 든 복학생은 경미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가볍게 목례를 했다. 어떤 면에서 그런 나눔은 같이 일하는 처지의 사람들이 느끼는 연대감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편의점을 나오면서, 경미는 문득 프랑스의 자연주의 화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그림을 떠올렸다. 끊임없이 허리를 숙여서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의 이삭을 줍는 세 명의 여인. 경미에게 그 그림의 들판은 편의점이었고, 자기 손에 들린 폐기 식품 봉지는 이삭이었다. 경미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경미는 식탁에 앉아 그 비닐봉지에 든 빵을 하나 꺼냈다. 옥수수 크림빵이었다. 옅은 노란색의 옥수수 크림이 든 빵 맛은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남편은 오늘도 늦을 예정이었다. 고객사에서 요청한 선박의 인수 시한이 빠듯했으므로, 남편의 선박 점검 업무는 야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어제도 남편은 새벽 1시가 넘어 집에 들어왔다. 경미는 남편이 과로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그 시간까지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오늘도 경미는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이건 좀 느끼하네."

  기대했던 옥수수 크림빵의 맛은 좀 실망스러웠다. 경미는 더이상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 남은 크림빵을 음식물 쓰레기통에다 버렸다. 가져온 요구르트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딱히 설거지할 그릇도 없었으므로, 경미는 약간의 피로를 느끼며 다소 멍한 상태로 식탁에 앉아있었다. 문득 새벽에 꾼 꿈 생각이 났다. 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났다.

  "경미야, 고구마 좀 삶아라."

  가끔 꿈에 아버지가 보이는 때가 있었다. 그런 경우, 뭔가 근심거리가 생기거나 자신의 몸이 아프거나 하는 일이 생겼다. 그러므로 경미는 아버지가 나온 꿈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말을 건넸다. 언젠가 친구와 재미 삼아 점집에 가보았을 때, 경미는 무당에게 그것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꿈에서 망자(亡者)가 보이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에요. 대개 조상님들은 자손을 지켜주고 싶어서 그렇게 나타나지요. 망자는 말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꿈에서 뭔가 말을 한다, 그러면 그건 좀 골치가 아파요. 그럴 땐 안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아요."

  경미는 무당의 그 말이 떠올랐다. 오늘, 편의점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몸살 기운이 느껴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냥 평온한 하루였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고구마를 삶아달라는 말을 했을까? 아버지의 말대로 정말로 고구마를 삶아서 식탁에다 한 그릇 놓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경미는 며칠 전에 사놓은 밤고구마 상자를 열고는 고구마 세 개를 꺼냈다. 손으로 황토가 덕지덕지 묻은 고구마를 박박 씻었다. 그리고 고구마의 양 끝을 과도로 조금씩 잘라내었다. 전기밥솥에 고구마를 넣고 물을 반 컵 정도 부었다. 소금도 조금 넣었다. 빠른 취사 버튼을 누르고, 식탁에 앉아서 가만히 기다렸다. 15분 뒤에 밥솥의 추가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었고, 마침내 고구마가 다 삶아졌다. 경미는 그 고구마들을 꺼내어서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식탁에다 놓았다. 그러고 나니 무언가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요새 밤늦게 자서 피곤했던 것일까? 식탁에 엎드려서 잠이 들었던 경미는 휴대전화 울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식탁 건너편 벽에 걸린 시계가 가리킨 시각은 9시 45분이었다. 전화에 뜬 건 남편의 전화번호였다. 무슨 일이지? 경미는 황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 김 차장님 사모님 되세요? 저는 차장님과 같이 일하고 있는 박경수 대리입니다. 지금 응급실인데요. 야간작업 중에 사고가 좀 있었습니다. 지금 응급실인데, 여기가 어디냐 하면..."

  경미는 너무 놀라서 휴대전화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결국 일이 이렇게 터지고 말았구나, 경미는 새삼스럽게 꿈에 보인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졌다. 도대체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다리에 힘이 빠져서 식탁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휴대전화에서는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는 상대편의 말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경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전화기를 주워들었다. 남편이 실려 간 곳은 시 외곽의 종합병원 응급실이었다. 외투를 찾아 대충 걸치고, 나갈 채비를 했다. 현관으로 나가려던 경미의 눈에 식탁 위의 고구마가 눈에 띄었다. 경미는 자신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서 그 고구마들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

  경미는 수술실 앞에서 5시간을 기다렸다. 수술실을 나온 의사가 경미에게 수술은 잘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서는 자리를 떴다. 그래도 뭔가 고비는 넘긴 모양이었다. 회복실로 간 남편이 일반 병실로 온 것은 그날 오후였다. 남편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팔과 다리는 미라처럼 깁스를 잔뜩 감고 있었다.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으면 보통은 사망하거나, 하반신 마비가 되어버려요. 그런데 환자분은 골절로만 끝났으니, 이건 뭐 조상님이 도우셨다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내가 의사 생활 20년 동안 이런 경우는 딱 한 번 봤어요. 이제 두 번째가 되겠네요. 돌아오는 명절에 조상님 차례상은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세요."

  회진을 돌던 의사는 넉살이 좋게 말을 건네며 경미를 안심시켰다. 남편은 5미터 높이의 난간에서 추락했다. 원래는 2인 1조로 점검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일정이 빡빡해서 혼자 점검 작업을 하다가 그런 사고가 난 것이다. 어느 정도 회복하려면 6개월 정도 재활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깟 6개월 정도의 시간은 목숨을 건지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의사가 가고 난 뒤, 경미는 남편의 메말라 터진 입술에 입술보호제를 조심스럽게 발라주었다. 그제야 아버지 드시라고 삶았던 고구마 생각이 났다. 부모자식의 끈이란 것이 그렇게 저승에서도 이어지는구나 싶어서 경미는 목이 메었다.

  경미의 남편이 다시 회사에 복직한 것은 3개월이 흐른 뒤였다. 재활하는 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회사의 요청도 있고 더이상 재활에만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남편은 발목에 핀을 박아넣어 조금 다리를 끌면서 걸어 다녔다. 먹고 산다는 것이 뭔지, 제대로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회사에 나가는 남편을 경미는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남편이 일찍 퇴근한 늦가을 어느 금요일 저녁, 경미는 남편에게 아파트 공원으로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말했다.

  "커피나 한잔해요. 내가 보온병하고 커피잔 챙길 테니."
  "당신, 그 포트메리온 커피잔 구경이나 하지."
  "그렇지 않아도 신상 커피잔을 대령해 놓았습니다."

  경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남편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 평범한 일상이 이제는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경미는 끓인 물을 보온병에 담고, 새로 산 커피잔을 두툼한 가방에다 담았다. 늦가을 밤바람이 생각보다 차가웠다. 두툼한 겨울 외투를 걸친 두 사람은 벤치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이 커피잔, 너무 큰데?"
  "그렇지? 상품평에다 누군가 이거 커피잔이 아니라 수프 컵이라고 불평을 해놓았는데, 그걸 그냥 흘려 읽었지 뭐야."
  "고양이가 헤엄도 칠 수 있을 것 같아."
  "뭔 고양이야? 그냥 참새 정도는 되겠네."

  경미와 남편은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았다.

  "나, 사실 당신에게 숨기는 일이 하나 있어."

  경미는 남편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서 걱정이 되었다. 혹시 어디 밖에다 살림을 차려서 애가 있다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경미는 자신이 다니던 단골 기름집에 생긴 비극이 떠올랐다. 주인 남자가 아내 몰래 살림을 차려서 아들 둘을 낳은 것이 7년 만에 들통이 났다. 그 일로 충격을 받은 기름집 여자는 목숨을 끊었고, 시집을 간 딸도 엄마의 뒤를 따랐다. 기름집은 얼마 안 가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경미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이 나한테 또 샀다고 말한 랜턴 말이야. 당신 몰래 내가 회사에 사다놓은 게 다섯 개나 더 있어."

  경미는 안도했다. 그런 랜턴이라면 열 개를 사도 괜찮다.

  "나도 당신한테 말 안 한 게 있거든. 포트메리온 세트 하나가 막내동생 집에 있어."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비밀을 고백했다. 밤바람이 좀 세게 불자, 부부는 집으로 돌아왔다. 경미는 남편에게 랜턴의 불을 한번 켜보라고 말했다.
 
  "이게 말이지, 독일제 명품 랜턴이야. 12가지 색이 있거든. 이건 연둣빛인데, 불을 붙이면 이 테두리가 이렇게 형광 연두색으로 빛나."

  경미는 남편이 식탁에 켜놓은 랜턴의 불빛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제 더이상 자신에게는 포트메리온 그릇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기자기한 꽃들과 나비가 어우러진 그 포근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자신의 식탁에 고요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음 초단편은 내일 올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약 일주일 동안은 글을 올리지 못할 수도 있어요. 방문하는 독자분들은 참고하길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산


  "삼촌, 저 지금 응급실이에요."
  "심각한 건 아니지? 삼촌 지금 회의 중이라 갈 수가 없어."
  "네, 알겠어요."
 
  영무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들렸다. 또 손목을 그었구나. 영무는 좀 잊을 만하면 자해를 하곤 했다. 상훈은 영무의 그런 행동에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휴대폰에 찍힌 영무의 전화번호를 보고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영무에게 그것은 하나의 의식(儀式) 같았다. 영무는 기분이 좋지 않으면 손목을 긋고는, 혼자서 택시를 타고 응급실에 갔다. 그리고 치료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개는 그렇게 심각한 자해는 아니었다. 석 달 전에는 손목의 상처가 꽤 깊어서 10바늘 정도를 꿰맸다. 그때는 상훈도 안 되겠다 싶어서, 영무를 정신의학과 병동에 입원시켰다. 2주 후에 영무는 퇴원했다. 그러고 나서는 괜찮은가 했는데, 다시 또 손목을 그은 것이다.

  "그러니까 성산 공원에 걸을 플래카드의 문구는 이렇게 합시다. '너구리와 같은 유해조수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다들 이 문구로 하는 것에 찬성하지요?"

  상훈이 회의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을 때, 김 주사가 가래 낀 목소리로 공원관리과 직원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글쎄요. '너구리와 같은'이라는 문구는 뭔가 불분명하게 들리는데요. '너구리'라고 쓰고 괄호로 유해조수를 표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그래야 주민들이 딱 알아듣지 않을까요?"
  "박 주무관 말도 일리가 있군. 그럼 그렇게 합시다. 플래카드 예산으로 남은 게 좀 있나? 이 주무관, 예산이 얼마나 있나?"
  "올해는 플래카드가 자주 찢어져서 교체를 여러 번 했습니다. 그래서 남은 돈이 얼마 안 됩니다. 5장 정도 인쇄할 예산입니다."

  상훈은 자신의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으면서 김 주사에게 대답했다.

  "그럼, 그거라도 써서 내걸지. 앞으로 두 달 동안 플래카드 쓸 일이 얼마나 있겠어. 그러고 보니, 참 시간이 빨리 가. 벌써 한 해가 다 지나가네. 오늘 구내식당 점심 메뉴는 뭔가?"
  "북엇국하고 어묵볶음, 뭐 그렇다고 들었어요."
  "어째 별로다. 양평각에 가서 김치찌개나 먹을까? 이 주무관은 구내식당 갈 거야?"
  "저는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상훈은 동료들이 점심을 먹으러 회의실 문을 나서는 것을 보면서도, 선뜻 따라나서지 못했다. 정말로 영무가 괜찮은 건지, 다시 전화를 걸어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영무야, 치료는 받았어? 봉합하고 그런 정도는 아니지?"
  "그냥 드레싱 했고, 지금 집에 가요."
  "그래, 가서 좀 쉬어라."

  '너구리(유해조수)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영무는 업무용 노트북에 그 문구를 입력하고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천근만근 늘어지면서 도무지 의자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언제까지 내가 영무의 뒤치다꺼리를 할 수 있을까? 17살인 아이가 언제 대학을 가서 졸업하고 자기 밥벌이를 하게 될까? 아니, 대학은 갈 수나 있을까? 저렇게 정신적으로 불안정한데? 상훈은 5년 전에 암으로 세상을 뜬 형에게 새삼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영무는 상훈에게 커다란 혹과 같은 존재였다. 그 혹은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상훈에게는 영무와 같은 큰 혹이 또 하나 더 있었다. 치매에 걸린 노모였다. 아직은 자식의 얼굴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어머니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어머니는 상훈에게 진짜 자신의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면서 가구들을 어떻게 가져가냐고 매일 물었다. 그것은 장소에 대한 지남력(指南力)이 빠르게 손상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날이 왜 이렇게 어둡지?"
 
  사무실 창밖으로 먹구름 가득 찬 하늘이 보였다.

  "오늘 날씨."

  상훈은 휴대폰의 음성인식 버튼을 누르고 날씨를 물어보았다.

  "10월 29일 오늘, 기온은 15도. 흐리고 비가 내립니다."

  상훈은 자신의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곳은 상훈이 언제나 예비용 우산을 두는 곳이었다. 그런데 우산이 없었다. 지난주에 비가 올 때, 그 우산을 가져갔었던 모양이다. 창문에 빗방울이 조금씩 맺히는 것이 보였다. 하는 수 없지. 있다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야겠네. 상훈은 다음번에는 꼭 우산을 가져와서 서랍에 넣어두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점심을 걸렀지만, 상훈은 오후 내내 배가 고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믹스커피를 연거푸 마셔서 그런지 오히려 속이 쓰렸다. 역류성 후두염으로 고생하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커피를 마셔대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커피를 마시지 않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마실 수밖에 없는 그런 것. 어쩌면 영무가 자해하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싶어졌다. 녀석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상훈은 마음으로는 영무를 이해할 것 같았지만, 머리로는 영무의 행동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는 걸까? 부모가 없는 아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는 법이다. 영무에게는 그 상처가 부모의 빈자리였고, 그것을 극복할 수 없어서 저리도 몸부림치는 것일지도 몰랐다.

  5시 50분, 사무실 사람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퇴근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상훈은 플래카드 인쇄업체에 보내는 발주 신청서를 작성하고는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바깥의 빗소리가 세차게 들렸다. 1층 민원실의 구석진 곳에 교차로 신문 배포대가 있었다. 편의점까지는 10분, 상훈은 교차로 신문을 머리에 쓰고 갈 생각이었다. 배포대에는 마치 상훈을 위한 단 1부의 교차로 신문이 있었다.

  "운이 좋네."

  신문을 머리에 썼다고는 하지만,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0분의 거리를 정신없이 뛰어서, 상훈은 편의점에 도착했다. 편의점의 계산대에는 우산을 사려는 사람들 여럿이 줄 서 있었다. 상훈은 제일 싼 3천 원짜리 우산을 샀다. 이런 것에 돈을 쓰는 것이 너무나도 아깝게 느껴졌다. 싸구려 비닐우산의 값을 치르고 편의점 문을 나섰다. 비는 아까보다 더 세게 내리고 있었다. 지하철역까지만 걸어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비닐우산이 이 폭우를 잘 버텨내 주길 바라면서 상훈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라, 보장하라!"

  지하철역 입구에서는 장애인 단체의 농성이 한창이었다. 퇴근길의 시민들과 농성하는 장애인들이 뒤엉키면서 역의 입구는 막혀버린 것처럼 보였다.

  "작작 좀 하지, 젠장. 저게 뭐야, 욕 나오게."

  중년의 남자가 혼잣말로 욕설을 하고는 지하철역에서 돌아섰다. 상훈은 5분 거리의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누구에게나 괴롭고 억울한 일은 있는 법이다. 상훈은 지하철 역 앞에 드러누워 있는 장애인 농성자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왜 저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명분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가? 저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왜 자신에게 주어진 악조건을 견디지 못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상훈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맞부닥칠 자기 삶의 악조건을 생각했다. 손목에 붕대를 한 조카는 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을 것이며,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고향집에 데려다 달라며 울음을 터뜨리게 될 터였다. 16평의 비좁은 임대 아파트에서 상훈은 제대로 몸을 누일 방도 없었다. 두 개의 방은 조카와 노모가 썼고, 자신의 잠자리는 부엌 싱크대 옆이었다. 흐린 날에는 가끔 지독한 하수구 냄새가 올라와서, 상훈의 잠을 방해했다. 그 냄새가 자신의 몸에 배는 것이 아닌지, 상훈은 늘 자신의 체취에 신경이 쓰였다. 그 하수구 냄새는 가난과 불운의 총합처럼 느껴졌다. 그러므로 상훈은 냄새야말로 그 사람이 속한 계층을 증명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는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상훈의 마른 몸은 발 디딜 틈이 없는 승객들 사이에서 붕 뜬 것처럼 보였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버스에서 내렸을 때, 그토록 세차게 내렸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쳤다. 상훈은 3천 원짜리 우산이 아깝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돈, 돈, 돈. 언제나 돈이 문제였다. 이토록 고생스러운 퇴근길에 자신의 차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훈은 서른일곱의 나이에 자가용도 없는 임대아파트 주민인 자신의 처지에 한숨이 나왔다. 비로 흠뻑 젖은 외투에서는 퀴퀴한 냄새마저 풍겼다.

  "하층민의 냄새로군."

  아마도 자신은 죽을 때까지 그 냄새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무원으로 나라의 녹(祿)을 먹고 있으니, 정년퇴직만 한다면 어떻게든 노후에 밥은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무원이 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저기 보이는 아파트 공원 벤치에 드러누운 노숙자 신세가 되지는 않았을까? 상훈은 새삼스럽게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상훈은 천천히 공원 옆길로 걸었다. 상훈의 집은 공원에서 5분 거리에 있었다.

  "너, 여기서 뭐하는 거냐?"

  상훈이 노숙자로 생각한 사람은 영무였다. 영무는 등나무 퍼걸러(pergola) 아래 벤치에 힘없이 드러누워 있었다.

  "삼촌 기다리고 있었지."
  "이런 날씨에 집에 있지 않고. 몸도 안 좋은데. 어차피 집에 가면 삼촌 얼굴 볼 건데 뭐하러?"
  "삼촌, 삼촌은 내가 밉지?"

  영무는 흐느적거리는 몸을 겨우 세워 앉으며 그렇게 물었다.

  "그래, 밉다. 아주 미워. 진저리나게 미워."
  "삼촌은 거짓말을 진짜 못하네."
  "다 알면서 뭘 물어보냐?"

  상훈은 자신의 체구를 닮은 저 비쩍 마른 아이를 미워할 수 없었다. 핏줄이라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영무는 앞으로도 손목을 그을 것이고, 어쩌면 그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 그래도 영무를 미워하거나 내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상처는 좀 어때?"
  "그냥 칼이 들어가다 말았어. 응급실 인턴이 내 이름을 외우고 있더라고. 정신의학과에 연락한다고 그래서 그냥 도망치듯이 나왔지 뭐."
  "가만 보니, 너도 다 살 궁리는 하는구나."
  "응, 살기는 살아야지"

  영무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오늘, 무슨 일 있었던 거야?"
  "꼭 무슨 일이라기 보단... 내가 싫어하는 놈 인스타에 들어가 봤는데, 걔가 여름방학에 가족들하고 그랜드 캐니언에 갔던 사진을 올렸더라고. 그냥 그 사진을 보고나니까 화가 나서."
  "왜 나는 저런 데는 못가나, 그래서?"
  "잘 모르겠어. 그냥 죽고 싶은 기분이 들더라고."

  상훈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그랜드 캐니언을 가볼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못 갈 것 같았다.

  "삼촌도 그랜드 캐니언은 못가보고 죽을 것 같다. 요새는 TV에서 여행 프로도 많이 하잖냐. 그거 보면 더 실감나던데. 그런 거 보다 보면 거기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더라고. 웃기지 않니? 여행 프로가 여행을 꿈꾸지 못하게 만드니까."
  "그 여자는 잘 살고 있을까?"
 
  상훈의 이야기를 듣던 영무가 뜬금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 여자가 뭐냐? 그래도 네 엄마한테."
  "자식 버리고 팔자 고치러 간 여자잖아."
  "영무야, 엄마 보고 싶니?"

  영무는 상훈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난 말이야. 네가 좀 영악해졌으면 좋겠어. 아니, 영악해지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아.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지. 왜 자꾸 자신을 괴롭혀? 그렇게 손목을 그으면 기분이 좀 나아져?"
  "응. 잠깐은 그래."
  "그게 잠깐인 거잖아.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기분이 엉망인 거고. 그렇지?"
  "삼촌 말이 맞아."
  "네가 손목을 긋는다고 해도 그랜드 캐니언은 갈 수 없고, 떠나버린 엄마는 돌아오지 않아. 인생이란 게 그렇게 엉망진창이야. 삼촌 이야기해 줄까?"

  상훈은 엊그제 구청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엊그제 구청에 1급 관리관이 방문했어. 그 사람 나이가 서른다섯이야. 삼촌보다 두 살 어려. 근데 수행원이 아홉이나 되더라. 스물 둘에 행정고시에 붙었대. 명문대 출신에 집안도 강남 출신의 부자야. 그 젊은 관리관한테 육십이 다 된 우리 구청장님이 손을 파리처럼 비비면서 안내하는 거야. 네가 그 모습을 봤으면 재밌었을 텐데 말이지."
  "삼촌, 그 관리관이 부러웠어?"
  "그래, 부럽더라. 많이. 그래도 어쩌겠니? 그건 그 사람 인생이고, 난 내 인생을 살아야지. 난 구청장만 될 수 있어도 좋을 것 같지 뭐냐. 구청장 양반 출근할 때 어떤지 알아? 구청 직원들이 무슨 조폭들처럼 구청 현관에 도열한다고. 말하자면 우리 구청에서는 그 양반이 왕이야. 그런 사람이 새파란 관리관한테 고개 조아리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참..."
  "삼촌은 성실하니까 구청장은 될 수 있지 않을까?"
  "네가 속을 썩이지 않으면 어쩌면 먼 미래에 그럴 수도 있겠지. 삼촌은 그저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안 긋도록 노력해 볼게."

  영무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상훈을 바라보았다.

  "삼촌이 너를 그랜드캐년에 데려가기는 힘들 거야. 그래도 너한테 이 우산 같은 존재가 되어주고 싶다. 이 우산, 싸구려 3천 원짜리지만 오늘 비 올 때 잘 썼어. 네가  비를 맞고 걸어갈 때, 그냥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이 되는 거야. 삼촌 마음은 그렇다고."

  영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기다리겠다. 집에 가자."

  상훈은 영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영무가 일어서려다 기운이 없는지, 도로 앉았다. 상훈은 영무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상훈이 영무의 팔목을 잡는데, 오돌토돌한 흉터 자국이 만져졌다. 수십 번의 자해가 만든 흉터였다.

  "삼촌이 나중에 돈 모으면 너 피부과 데려갈게. 요새 레이저가 좋아서 이런 흉터도 다 없애준다 그러던데."
  "너무 심해서 레이저도 안될 거 같아."
  "그러니 살살 그으라고. 죽지 않을 만큼. 약도 잘 챙겨 먹고."

  눅눅해진 트렌치코트에서 풍기는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상훈은 영무와 함께 걸었다. 그쳤던 비가 다시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상훈은 하늘색 도트무늬 우산을 펼쳤다. 그리고는 우산을 영무 쪽으로 기울이고는 천천히 집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