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창고


얼마전부터 식탁에 반창고를 놔두었습니다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찾기가 편해서입니다 계속 다치는 일이
일어나더군요 상처에 바르는 연고는 TV 옆에 있습니다 TV 옆으로
가서 연고를 꾹, 짜고는 식탁으로 갑니다 그리고 반창고를 뜯어서
상처에 돌돌, 감아줍니다 이상한 치유의 동선(動線), 좀 우스운가요?
네, 살아보니 그렇더군요 인생이 제멋대로 흘러가는데 그걸 바로잡을
방법이, 정확하고 마땅한 방법이 없단 말이지요 어제는 식탁에 잘라놓은
작은 반창고 조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요?
나는 식탁 위를 손바닥으로 훑어봅니다 식탁 아래도 찬찬히 살펴봅니다
눈이 너무나도 나빠졌음을 느낍니다 늙음은 참으로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어디에도 반창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오후, 청소기를 돌리다가
청소기의 먼지 통을 들여다봅니다 작은 네모 조각이 보이는군요 그래요,
먼지를 좀 뒤집어쓰기는 했죠 그건 잃어버린 반창고였어요 나는 먼지 통에서
반창고를 끄집어내었습니다 너무 반가웠죠 손톱만 한 살구색의 반창고,
먼지를 털어주었습니다 물론 이걸 쓸 수는 없어요 나는 반창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달력의 가장자리에다 붙여놓았습니다 잘 어울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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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월, 시금치는 단맛을 잃어버렸지 추운 겨울을 견디려
단맛을 만들어내는 패기 따위, 이 봄날에는 필요 없어
꼬막도 이제 끝물이야 쪼그라든 꼬막살을 발라내면서
다시, 내년 겨울을 기약하는 거야 추울 때, 살을 불리고
악다구니를 쓰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데 손등은
쩍쩍 갈라지면서 가는 피가 흘러 왜 봄에도 부드러움이
스며들지 못할까, 내 손은 오랫동안 그랬어 발도 시려워
조그만 아이가 정신없이 뛰어다녀 흩날리는 벚꽃잎을
잡으려고 얼빠진 애비는 벚꽃 나무 옆의 소나무를 흔들어
너에게 꽃잎을, 이 봄을 주겠노라 나무의 비명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남자의 치열한 이기심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애새끼는 마구 소리를 지르는데 벚꽃잎은
수직으로 솟구쳐 멀리, 멀리, 멀리, 문득, 내 핏속에
흐르는 아버지의 유언, 너는 글을 쓰는 게 좋겠구나
아빠, 내가 언젠가는 유고 시집(遺稿詩集)을 낼 수 있을지도
너무 늦지 않았으면, 하지만 죽음은 항상 빨리 도착하지
엄마, 오래전 수술 자국이 아프지 않아? 아프지 않은데, 오늘은
그렇구나 방금, 내 왼쪽 귀가 따끔, 그렇게 신호를 보냈거든
내일은 비가 올 거야 8년 전에 다친 신경이 눈을 찡긋거리면서
아파트 출입구에서 4시간째 죽을힘을 다해 손 세차를 하던
남자는 만족한 표정으로 차를 타고 떠나는군 저 인간은 내일
비가 온다는 걸 몰라 흐리고 어리석은 미래가 뒤엉킨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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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생두


항아리에 넣어둔 생두를 꺼낸다 가위로 살짝 봉지를
자르자 진공이 풀리면서 생두가 쏟아진다 아니, 생두가
노란색이야 원래 신선한 생두는 초록색에 가깝다 나는
생두 봉지의 포장 일자를 본다 2015년 4월, 세상에, 10년이란
시간이 어쩌면, 생두는 봉지의 희박한 산소를 들이키며
초록색에서 노란색으로, 늙어버린 사람의 누렇게 뜬 얼굴,
생기도 없고 향기도 없는, 내다버릴까 잠깐 생각을 해본다
먹는 거 버리면 죄를 짓는 거야 그래, 어쨌든 볶아보면 알겠지
그런데 어쩌다가 10년을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대체 왜 그랬을까? 노란 생두를 신문지에 좌르륵 펼쳐놓고
결점두를 골라낸다 벌레 먹은 것, 곰팡이가 생긴 것, 자라다 만 것,
깨어지고 못생긴 것들, 나는 머나먼 인도네시아의 커피 농장을
그려본다 구름이 흐르고, 안개가 낀, 내가 알지 못하는 땅의 소리,
농부는 커피 농사에 별 재주가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은 아니며, 열정이란 것은 결국에는
버려지기 마련이지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고단한, 나는
너무 많은 쉼표를 찍고 있어 10층의 남자는 어제 아침에도,
오늘 낮에도 담배를 피우러 나오더군 목요일과 금요일은 평일,
직업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구하는 중인지, 직업이 없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돈을 벌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무직인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던 스님은 그렇게 대답한다
노란 생두에서 마대 자루의 털실 하나를 발견한다 털실을 볶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군 오래된 생두를 볶아 먹어도 죽지는 않아요 물론
먹으라고 권유할 수는 없죠 하지만 한번 그 생두를 볶아서 커피를
내려보세요 거기에도 그 나름의 맛이 있을지도요 세월의 맛 같은
자신을 카페 주인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블로그에 그렇게 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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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


어긋난 갈림길에서 나는 울었네
돌아갈 수 없으므로
벚꽃은 네모난 창에 갇혀있고
바람이 나무를 후들겨 팰 때

꽃이 피는 날은 그리 길지 않아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 알았다면
천천히 뒤돌아서 눈에 담아둘 것을

눈물은 뼛속 깊이 흘러 멍을 만들고
아마도 오랫동안, 아니 영영
말하지 않겠다고
후회하지 않겠다고
다 거짓말이지

누구나 거짓말을 해
이렇게 또 갈림길에서
뛰어가지 않겠어
한번 넘어진 뒤로는
그래도 가볍게 슬리퍼를
흙바닥에 스치면서
넘어지지 않는 법을 생각하지

벌써 지고 있는 벚꽃을
밟지 않으려고
갈림길에서는 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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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公募展)


인삼차와 우롱차를 섞으면 무슨 맛이 나는지 아니?
그게 말이지 인삼차가 이겨 인삼이 힘이 좀 센 거 같아
우롱차는 좀 매가리가 없는 모양이지 그런데 인삼차도
이기지 못하는 맛이 있어 치약맛, 이 빌어먹을 치약은
계속해서 물을 들이키게 만들거든 아무래도 버려야겠어
치약을 버리려니까 진짜 아깝네 이걸 어디에다 써먹을 데나
있는지 스뎅 그릇 때깔이나 나게 만들 때나 쓸까? 그러고 보니
오늘 시를 재활용했군 공모전의 마감일이었는데 말이야
이전에 떨어진 공모전의 시들을 그러모아서 다시 냈거든
한번 안된 거 또 안되라는 법 있어? 심사위원이 다를 수도
있잖아 이 공모전이라는 게 그래 심사위원 취향까지 연구
해야 해 나 원 참 더러워서 어디서 들으니 공모전 첨삭 전문
시 선생도 있다 그러더군 첨삭 비용은 얼마나 받아먹는 걸까?
그런데 진짜 궁금하기는 해 시란 무엇인가? 아니, 시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 시는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인가? 시인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딴 걸 생각하는 걸 그만두기로 하자 어차피
인생은 그냥 운빨일 뿐이지 밤마다 잠이 들 때 아주 간절히
기도는 해 좋은 꿈을 꾸자 그 좋은 꿈이 꾸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지 첨삭 선생의 더러운 빨간펜 따위는 무시하기로 하자
알러지 때문에 눈이 퉁퉁 붓고 가려워 안과 의사가 처방해 준
안약이 참 용하지 그거 단 한 방울, 눈에 넣었더니 눈이 안아파
인생도 그렇게 아프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네 어차피 되지도
않을 시를 또 재활용해서 내고 말았어 재활용은 참으로 누추한
단어야 거룩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재활용품을 찬미하면서도
은근히 경멸하지 인생이 재활용되지 않는 것이 유감이군
새롭게 리셋, 리부팅, 리뉴얼, 리사이클, 리모델링, 시,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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