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쓴 시



못쓴 시는
못생긴 얼굴
같아 엄마는
얼굴이 못생긴
것과 무식한 걸
제일로 싫어하셨지

엄마가 고른 남편은
그러니까 내 아버지는
많이 배웠고 잘 생겨서
좋아하셨지 그런데
엄마 인물은 어떤가
솔직히 말하면 별로야
눈도 별로 코도 별로
입매도 별로 언젠가
아빠에게 가만히
물었더랬지 엄마와
왜 결혼했어 그건 말이다
가을에 받은 편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거든

진한 커피색 계절에

그 진한 커피색
계절에 떠난 아버지
생각이 난다
참으로 써지지
않는 못생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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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봄비
 

덥고 눅눅한 공기
이상고온의 4월
귀신같이 아픈 오른쪽
귀는 비의 일기 예보

지기 시작한 꽃들을
보러 나간다 라일락과
겹벚꽃 스러지는 모든
것들은 아프고 서러워
멀리서 보이는 흰꽃의
큰 나무 한 그루
세상에, 라일락 나무야
아마도 서른 살쯤
견디고 견디어낸
무명의 삶 말없이
건네는 경외의 인사

재활용품 수거장에
나온 낡은 장롱 안
키 작은 의자 둘이
등을 대고 의지하며
어차피 인정사정없이
쪼개어질 너희들의
미래 그래도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가만히 귀 기울여
내일의 봄비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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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행복


야쿠르트 여자에게는
중학생 아들이 하나
있다 커다란 덩치에
해맑게 웃는 착한
아이는 학교 끝나고
언제나 엄마를 찾는다
그 엄마에게는 손님이
참 많다 매일 출근 도장
찍듯 아파트 사람들이
야쿠르트를 사 먹으러
간다 늘 후줄근한 추리닝
차림의 젊은 애 엄마는
편하게 자신의 일상을
늘어놓고 오른쪽이
마비된 아픈 여자는
길바닥에서 꺼끌거리는
목소리로 괴로운 속내를
토로한다 야쿠르트 여자는
별말 없이 잘 들어주고
가끔 미소를 짓는다
여자의 아이는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 아이가 웃을 때
여자는 함께 웃는다 오늘은
여자의 남편이 아들과 함께
온 것을 보았다 그들은
아주 행복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감자칩 한 봉지를
뜯고 제로 콜라를 마시며
시를 쓴다 타인의 행복
이라는 제목의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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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當選作)


당선작이라고 나온
시를 읽어 보았다
아기가 옹알이를 하는
건가 자폐적 세계에
갇힌 여중생의 한풀이
같더군 썩은 웃음이
흘러나온다 저런 게
요즘 시의 트렌드냐
미래파가 풀어놓은
무시무시한 독이
한국 시의 혈관을
옥죄고 있는데 이걸
누가 고칠 거냐 같은
붕어빵 틀에서 찍어낸
것 같은 눅눅한 시들
이런 걸 읽고서 열심히
베끼고 습작하면 당선이
되는 모양이군 서정시는
구닥다리라고 경멸당하고
우스꽝스러운 시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공부를
강요당하는 기형적인
현실에 누구 하나 반기를
들지 않는다 기존의
권위에 얌전히 순응하며
자기 생각이라고는 손톱
만큼도 없는 머저리들이
무슨 자기 글을 쓴다는
거냐 제도권에 들어가고
당선이 되기 위해 영혼을
팔고 글의 미래를 파는
널브러진 모래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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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배달부


우편배달부가 배달차의
트렁크를 열고 크게 숨을
내쉰다 참았던 힘든 숨
내가 그를 본지도 어느덧
16년째이다 젊었던 그는
이제 머리숱이 흐릿하며
등은 살짝 굽었고 목소리에는
쇳가루가 섞였다 중간에
몸이 아팠는지 잠깐
한 1년을 쉬었던 것도 같다
그가 등기 우편을 전할 때는
항상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네, 우체부입니다, 라고
기분좋은 목소리로 말한다
매일의 노동과 세월에
서서히 짜부라진 그는
아파트 구석진 곳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급하게 담배를 피우곤 한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휴식
시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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