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와 나


  "정현 씨, 이거 업무용 휴대폰이야. 인턴한테는 이런 걸 주지는 않는데, 요새 책 출간이 몰려서 일이 바빠. 그러니까 전화 오는 거 잘 받아서 업무 일지에 기록해 두고. 물어볼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고. 잘 알겠지만, 개인적인 용도로는 쓸 수 없어."

  정현은 이 대리로부터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새것처럼 보이는 검정색 휴대폰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위에서 시키는 일로 바빴다. 그런데 거기에다 업무용 휴대폰으로 오는 전화 응대라니, 정현은 머리에 무거운 짐보따리 하나를 더 얹은 느낌이었다. 나는 인턴이다. 이 회사의 최말단 인턴이다. 어쨌든 3개월의 수습 기간을 견뎌야 한다.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해내야 한다. 정현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면서, 건네받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은 자신의 휴대폰을 서랍에 넣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현 씨, 있다가 2시에는 편집부 회의가 있어. 거기 한번 들어가 봐. 내가 편집부 구 대리한테는 말해놨어. 편집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번 보는 거야. 장소는 5층 소회의실."  
  "네, 알겠습니다."

  정현이 업무용 휴대폰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이 대리가 그렇게 말하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오늘은 이래저래 바쁘겠네. 정현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 위에 켜진 모니터에는 쓰다만 업무일지 화면의 커서가 깜박이고 있었다. 어디까지 썼더라, 정현은 콧등에 흘러내린 안경을 바로 쓰고는 모니터를 들여다 보았다. 그때였다. 책상 위의 휴대폰에서 징, 징, 하는 진동음이 들렸다. 문자 메시지가 온 모양이었다.

  '칼리 헤어샵 이민정 디자이너입니다. 파마하실 때가 된 것 같아서 연락드려요. 이번 주에 오시면, 신년 할인으로 10퍼센트 할인해 드립니다.' 

  "이게 뭐지?"

  정현은 업무용 휴대폰에 뜬 문자 메시지를 읽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전에 휴대폰을 쓴 사람 앞으로 온 것 같았다. 어떤 여자가 썼나 보네. 칠칠하지 못하게 저게 뭐람. 전화번호 이동을 하려면 깔끔하게 정리를 하던가. 정현은 어쩌면 한동안 저런 쓸데없는 문자에 시달리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약간 짜증이 났다. 미용실 전화번호를 차단 목록에 넣고는 정현은 작성하던 업무 일지에 집중했다.

  '2026년 국가장학금 1차 신청 기한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기한 내에 신청해 주기 바랍니다.'

  "아니, 이건 또 뭐야?"

  국가장학금 신청에 대한 문자 메시지였다. 대학생인가 보군. 2개의 문자 메시지는 업무용 휴대폰의 이전 주인이 여대생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은 정현에게는 하등 쓸데없는 정보일 뿐이었다. 한 번 더, 정현은 그 안내 문자 전화번호를 차단 목록에 추가했다. 정현이 이 대리로부터 휴대폰을 받은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 도대체 오늘 하루에 몇 개의 전화번호가 차단 목록에 더 추가될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아도 업무 일지 작성에다, 출판사에 걸려 오는 문의 전화 응대, 자잘한 외부 심부름까지 해야 하는 정현에게 이 휴대폰은 뭔가 애물단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인턴이라는 자신의 처지에서 싫은 기색을 내비칠 수도 없었다. 모니터의 화면에서는 쓰다만 업무일지의 커서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모니터 하단에 뜬 시계를 보니, 1시 43분이었다. 2시에는 편집부 회의에 가야만 한다. 정현은 서둘러 오전 업무 일지 작성을 마무리했다.

  "일은 좀 어때요? 이 대리님이 마구 굴려서 힘든 건 아닌지 몰라."

  회의실에 들어와서 막 자리에 앉은 정현에게 말을 건 사람은 편집부의 구 대리였다. 약간 퉁퉁한 체격에 목소리까지 걸걸한 구 대리는 머리까지 짧게 잘라서 남자처럼 보였다. 편집부의 직원은 5명. 그 가운데 맨 막내 사원인 선호 씨만 빼고 모두 여자였다. 출판사도 이젠 여초 직장이 되었나 보군. 정현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위화감을 느꼈다. 정현이 배치된 마케팅부에서도 5명의 정직원 가운데 남자는 이 대리뿐이었다. 

  "아직은 업무 파악을 하느라 좀 정신이 없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병아리 시절에는 다들 그래요. 오늘 회의는 그냥 일상적인 거니까,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요. 메모하거나 그러지 말고. 그냥 수다 좀 떠는 거죠. 업무와 관련된 수다."

  구 대리가 그렇게 눙치는 말에 정현의 긴장한 마음도 조금은 펴지는 것 같았다. 회의의 주제는 새로 출간될 젊은 작가들의 단편선집 편집에 관한 것이었다. 정현은 자신의 자리에 놓인 프린트물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선집에 실린 작가들의 간략한 소개와 소설의 목차가 적혀 있었다. 책에 실릴 단편은 9편인데, 놀랍게도 그 소설의 작가들은 모두 여자였다. 세상에, 남자 작가들은 전멸한 모양이군. 정현의 관심사는 시였다. 요새 주목받는 젊은 시인들 가운데 여성들이 좀 더 눈에 띄기는 했지만, 정현이 좋아하는 남자 시인들도 몇몇 있었다. 그런데 소설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았다. 만약 괜찮은 소설을 써내는 남자 작가가 있다면, 그 단편선집에 실리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정현은 혼자 속으로 그렇게 반문했다.

  "유리아 작가님은 소설을 2편 보내왔는데, 어떤 걸 뽑는 게 좋겠어요? 다들 읽어본 소감을 말해봅시다. 나는 '엄마는 바다로 갔다'가 좋았는데."

  편집부장이 빠진 회의를 이끄는 사람은 구 대리였다. 구 대리의 말에 이어서 편집부 팀원들의 이런저런 의견 제시가 이루어졌다. 정현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이라,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서는 프린트물을 괜스레 뒤적여 보았다. 프린트물의 맨 하단에는 선집에 실릴 평론도 있었다.

  '우리 시대의 작가들은 페미니즘을 근원적으로 장착해야 한다.'

  정현은 그렇게 시작되는 평론을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페미니즘을 말하지 않으면 소설도 쓰지 못하나? 이건 뭔가 강제하는 느낌이군. 정현은 그 평론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그리 길지 않은 그 글을 읽고 나니, 삶은 계란을 꾸역꾸역 먹다가 목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현은 자신의 텀블러 뚜껑을 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우리들끼리만 말한 것 같다. 정현 씨 이야기도 좀 들어봐야지. 편집부 회의에 들어와 보니, 어때요?"
  "아, 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책이 만들어진다니, 흥미롭네요."

  정현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편집부의 막내 선호 씨가 정현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에 나온 작가 중에 정현 씨가 읽어보고 관심을 가지는 작가가 있어요?"
  "어, 그게 저는 소설보다는 시를 더 좋아해서요. 김은수 작가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러면, 우리들 회의하는 거 듣는 게 좀 괴로웠겠다. 그래도 간략하게 소감이라도 말하고 회의 마무리하죠."

  구 대리의 말에 편집부 사람들이 정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 선집에 실리는 작가들이 다 여성 작가더라고요. 남성 작가의 글도 한 편 싣는 것이 어떤가 싶은 생각도 들고 그러네요. 그러니까 그게, 균형을 맞춘다는 측면에서요."

  정현은 자신의 말에 뭔가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요새 소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한마디 보태려다가 쓸데없는 혹을 붙인 것만 같았다. 정현은 솔직하다 못해 약간은 나이브한 자기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선호 씨, 정현 씨가 읽어볼 만한 책들 좀 챙겨서 줘 봐."

  구 대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회의실 문을 나섰다. 정현은 편집부 사람들이 떠난 회의실 책상에 혼자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아니, 자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 않는가. 왜 획일성을 강제하는가? 정현은 살짝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음날, 정현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제 좀 신경을 써서 그런가 보네. 책상 오른쪽 맨 위쪽의 서랍을 열고 타이레놀을 찾았다. 딱 한 알 남은 타이레놀이 참으로 반가웠다. 저 약도 사놔야겠다. 약값도 많이 올랐던데. 정현은 혼잣말을 하면서, 알약을 삼켰다. 건너편 침대의 문국은 정현의 기척에 잠에서 깬 것 같았다.

  "몇 시냐?"
  "이제 8시 반 좀 넘었네. 나 때문에 깬 거야?"
  "깨기는 뭘. 아침잠도 젊었을 적에나 쏟아지지. 이젠 늙어서."
  "웃기는 소리하네. 야, 스물여섯이 늙은 거냐?"
  "늙었지, 늙은 거야."

  정현은 문국의 우스꽝스러운 푸념에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대학에 다닐 때는 공부하느라, 군대에 갔을 때는 얼른 시간이 흘러가길 바라면서, 그러다가 졸업반이 되고 허덕허덕하다가 겨우 인턴사원 명찰 하나 달고 있으니 어느덧 스물여섯이었다.

  "너, 방 비우는 날이 언제더라?"
  "2월 3일. 학사 관리실 게시판에 그렇게 적혀있더라고. 엊그제 문자로도 알려주고. 오늘 주말이니까, 신림동 쪽에 방 좀 알아보려고."
  "내가 같이 가줄까? 혼자보다는 낫잖아."
  "그러면 나야 좋지. 내가 점심 살게."

  정현은 방을 보러 가는 자신과 동행해 주겠다는 문국의 제안이 고마웠다. 정현이 이 학사에서 머물 수 있는 날은 이제 보름 남짓 남았을 뿐이었다. 이 기숙사는 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낡은 건물이었다. 정현의 고향 유지가 서울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을 위해 세운 학사였다. 기숙사에 당첨되는 것도 어려운 지방 학생 입장에서 이런 혜택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벽에는 군데군데 금이 가고, 건물의 외벽 페인트칠이 벗겨진 이 학사를 이제 정현은 떠나야만 했다. 정현은 무언가 서러운 느낌도 들었다. 보잘것없지만 작고 따뜻한 방의 아랫목에 있다가 내쫓김을 당하는 것만 같았다. 새로 구해야만 하는 자취방은 어떨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모든 것이 비싼 이 서울 바닥에서 과연 가난한 사회 초년생인 자신이 살만한 집이 있을까?

  그날 하루 동안 정현은 문국과 함께 신림동의 원룸 빌라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집을 찾는 것은 마치 모서리가 맞지 않는 퍼즐을 억지로 구겨서 끼워 넣는 일과도 같았다. 월세가 싼 곳은 화장실이 낡았고, 인테리어가 괜찮아보이는 어느 원룸은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정현이 부동산 중개인이 안내하는 동안, 살짝 벽을 두들겨 보니 '텅텅'하고 울리는 소리가 났다. 말만 원룸이지 싸구려 고시원 방이나 다름없었다. 정현이 보고 나온 어느 원룸 빌라에는 문신한 중년 남자가 드나들었다. 정현은 이 서울 바닥에서 싸구려 월세방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임을 실감했다.

  "젊은 양반, 그렇게 까다로우면 방 못 구해. 돈이 없으면 기대를 좀 접던가."

  정현과 함께 원룸촌을 돌며 방을 보여주던 중개인 영감이 정현에게 한마디했다. 정현은 영감의 좀 무례한 말투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다른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영감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영감의 말마따나 자신은 돈이 없었고, 까다로운 기준도 가지고 있었다.

  "정현아, 아까 봤던 그 전철역 근처 원룸 빌라 말이야. 그 정도면 괜찮은 거 같아. 그 정도 방에 월세 35만 원이면 나쁘지 않아. 관리비 8만 원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다른 데 보다는 깔끔하잖아. 보니까, 드나드는 사람들 행색도 멀끔해 보이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해."
  "영감탱이 말은 그냥 넘겨. 그런 거 신경쓰다가는 속만 상한다."
  
  정현은 문국과 함께 고시촌 근처의 돈가스 체인점에 들어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추운 날 나와서 고생해 준 문국에게 뭔가 괜찮은 것을 사주고 싶었지만, 그 돈가스도 1인분에 15000원짜리였다. 오히려 문국이 그 옆 가게의 12000원짜리 칼국수를 먹자는 것을 정현이 돈까스를 사겠다고 했다. 너무 튀겨서 질깃거리기까지 한 돈가스를 우물거리면서 정현은 가게 밖으로 보이는 고시촌의 거리를 응시했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창밖의 풍경은 어딘지 음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날씨처럼 정현의 마음도 잔뜩 구름이 낀 것처럼 느껴졌다.

  신림동에서 돌아온 그날 오후, 정현은 자신의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사를 하기 전에 미리 버릴 것은 버리고 해서, 가져갈 것들을 간소하게할 생각이었다. 징, 징. 책상 위에 놓아둔 정현의 업무용 휴대폰이 진동음 소리를 내었다. 정현은 주말에도 업무용 휴대폰을 살펴봐야했다. 이 대리가 인쇄소에서 연락올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회사에 두지말고 가져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김수지 님, 롤프 쇼핑몰 물류센터 채용 담당자입니다. 주말 아르바이트 배정이 완료되었습니다. 통근버스 출발 장소는 첨부한 링크를 눌러서 확인해주세요.'

  파마할 때가 다 되었고, 국가 장학금도 신청해야 하는 이 문자의 주인공은 주말에 쇼핑몰 물류센터 알바를 하러 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여대생의 이름은 김수지였다. 정현은 그 문자 메시지 번호를 수신 차단 목록에 넣기 위해 설정 버튼을 눌렀다. 다소 귀찮은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짜증이 나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여성이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정현은 기묘한 동질감마저 느꼈다.
 
  주말을 보내고 출근한 월요일, 정현은 이 대리와 함께 인쇄소에 가기로 되어있었다. 새로 출간할 시집과 계간지의 인쇄 품질을 보기 위한 외근이었다. 인쇄소라고 해서 뭔가 허름하고 시끄러운 공장 같을 거라고 생각한 정현은 깔끔한 건물의 외관에 좀 놀랐다. 인쇄소 안의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밝은 조명 아래에 자동화된 설비에서 쉴 새 없이 찍어내는 종이들이 반짝거리면서 빛을 내고 있었다.  

  "이렇게 인쇄 과정 전반을 살펴보는 걸, 인쇄 감리라고 하는 거야. 책 출간 전에 인쇄 상태를 보고 조정하는 일이지."

  정현은 이 대리가 담당 라인의 인쇄 주임을 만나는 동안,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출판사 블로그에 올릴 게시글 때문이었다. 그냥 노비가 따로 없네. 사진도 찍고, 전화도 받고, 탕비실 청소도 하고. 정현은 마음에 드는 구도가 나올 때까지, 여러 번 휴대폰의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면서, 최종본을 고르는데 휴대전화가 짧게 2번의 진동음을 내었다.

  '김수지 님의 늘봄 네일 숍 예약이 완료되었습니다. 1월 8일 오후 3시 30분에 뵙겠습니다.'

  주말에 열심히 알바하더니, 그 돈으로 손톱도 다듬나 보군. 수지야, 돈을 힘들게 벌었으면 좀 아껴 써라. 외모, 그까짓 거 다 한 꺼풀이야. 차근차근 돈을 모아야, 나중에 주식계좌 개설할 쥐꼬리만 한 자금이라도 되지 않겠니. 정현은 자그맣게 궁시렁거리면서, 차단 목록에 네일 숍 번호를 추가했다. 젠장, 언제까지 이런 번호들을 눌러서 차단해야 하지? 정현이 꾹꾹 휴대폰의 버튼을 누르고 있는데, 이 대리가 다가왔다.

  "정현 씨, 좀 와서 얘기 나누는 거나 듣지. 뭐해?"
  "아, 네. 업무용 폰으로 자꾸 이전 사용자의 문자메시지가 와서요. 그거 차단하느라..." 
  "그게, 전에 쓰던 폰이 깨지는 바람에 신규로 개통했더니 그런가 보네. 좀 번거로운가? 대부업체 독촉 전화 그런 건 아니지? 한동안 차단 계속하는 수밖에. 점심때 됐으니, 나가서 밥이나 먹자."

  월요일은 언제나 바빴다. 정현은 인쇄소에서 돌아온 후에, 저녁에 있을 저자 강연회 지원 준비 작업을 했다. 미리 건네받은 강연 원고를 대충 훑어보고, 어색한 부분이 없도록 수정했다. 강연이 끝난 후에는 사인회가 있을 예정이어서 펜과 종이도 넉넉히 챙겼다. 정현이 그렇게 준비하고 있는데, 누군가 책상 위에 책 서너 권을 두고 갔다. 편집부의 선호 씨였다.

  "시간 날 때, 한번 읽어보세요."

  책상 위에 놓인 책의 맨 위 표지에는 '세계 페미니즘 걸작 단편선'이라는 글씨가 박혀있었다. 정현은 그 아래 책들의 책등도 살펴보았다. '오늘의 한국 문학', '우리 시대의 젊은 여성 작가들', '페미니즘의 역사'. 정현은 그 제목들을 읽다가 뭔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져서, 책들은 모니터로 부터 좀 먼 구석으로 밀어냈다.

  "아, 이것도 가져가야지."

  정현은 업무용 폰을 들고는, 혹시 자신이 확인하지 못한 전화나 문자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새 문자 메시지가 있었는데, 백화점 화장품 매장의 카드 결제 완료 문자였다. 결제 금액은 15만 4천 원이었다. 정현은 물류센터 주말 알바를 하는 여대생의 씀씀이가 좀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은 그렇게 힘들게 아르바이트하면 돈을 좀 아껴 쓰거나 할 텐데, 수지는 그렇지 않았다. 이름이 있는 체인점 미용실에서 파마를 했고, 네일 숍에서 손톱을 다듬었으며,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샀다. 국가장학금 신청을 할 수 있는 요건이 되려면, 그렇게 집안이 여유가 있지도 않을 터였다.

  "수지야, 넌 참 편하게도 산다."

  정현은 카드 결제 알림 문자의 번호를 차단 목록에 추가하고는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자기가 번 돈을 어떤 미래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즉시 현실에 써버릴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정현은 새로 이사할 원룸의 관리비 8만 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느껴졌다. 여대생 김수지는 그런 자신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인쇄소와 저자 강연회로 바빴던 월요일이 지나고 목요일이 될 때까지 웬일로 업무용 폰의 알림은 조용했다. 정현은 번거롭게 느껴지던 수지와 관련된 문자 알림이 오지 않자,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이 되었을 때, 막 출근한 정현의 업무용 폰에 들어온 문자 메시지가 있었다.

  '김*지님의 그린 비치 호텔 예약이 완료되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진 문자의 내용에는 투숙과 관련된 안내 사항이 있었다. 수지는 강원도 양양의 호텔에서 주말을 보낼 계획이었다. 여대생 김수지는 연애도 열심히 하는가 보네. 정현은 갑작스러운 호텔 예약 안내 문자에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김수지는 정현에게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수지가 주말에 호텔에 가기로 되어있다는 사실은 약간의 배신감마저 들게 했다. 정현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호텔 예약 안내 전화번호를 차단 목록에 추가했다.

  "어, 세제가 다 떨어졌네."

  토요일 저녁, 정현은 기숙사의 밀린 빨래를 하기 위해 기숙사 세탁실에 있었다. 그런데 세탁물을 세탁기에 넣고 나서 보니, 세제 통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자기가 쓰고 세제가 떨어졌으면 관리실에 말이라도 해놓을 것이지. 정현은 38명이 사는 이 조그만 학사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생각했다. 컵라면 그릇을 치우지 않고 식탁에 놓고 가는 인간, 화장실 휴지를 떼어다가 방에다 놓고 쓰는 인간, 냉장고에 둔 다른 사람의 요구르트를 훔쳐 먹는 인간, 창밖으로 담배꽁초를 내던지는 인간... 인간이란 얼마나 이기적이고 무례하고 어리석은가. 정현은 그 시간에 호텔에서 누군가와 있을 수지는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를 잠깐 생각해 보았다.

  "다음은 사건 사고 소식입니다. 방금 전에 올라온 속보입니다. 강원 방송국의 박충기 기자 연결하겠습니다. 박 기자님, 강원도 그린 비치 호텔에서 투신 사망 사고가 있었다면서요. 어떤 사건인지 알려주시죠."

  정현이 관리실로 내려가려는데, 세탁실 옆의 휴게실에서 뉴스 채널의 속보가 들려왔다. 정현은 그냥 지나가려다가, '그린 비치'라는 단어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린 비치'는 수지가 예약한 그 호텔의 이름이었다. 정현은 TV 앞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네, 사건이 발생한 시각은 오늘 오후 7시 30분경입니다. 투숙자 세 명의 시신이 호텔 1층의 화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구급대가 출동했지만, 3명 모두 투신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이고요. 사망자는 남자 1명에 여자 2명입니다. 23살 여성 김 모 씨, 25살 여성 박 모 씨, 29살 남성 석 모 씨. 경찰은 이들이 어떻게 만나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조사하는 중입니다."

  "얼마 전에도 이런 비슷한 소식을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인터넷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함께 만나서, 투신 사망하게 된 사건이었는데요. 혹시 이번 사건도 그 사건과 유사점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선, 경찰에서 밝힌 바로는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경찰은 추가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이들의 소지품과 휴대전화를 수거해서 정밀 감식하고 있습니다. 이후로 조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정현은 갑자기 맥이 탁 풀리면서, TV 앞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낡고 터진 합성 가죽 소파는 정현이 앉자마자 부서질 듯한 소리를 내었다. 자신이 뉴스에서 들은 사망자 23살의 김 모 씨는 수지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추측일 수도 있었다. 주말에 투숙한 그린 비치 호텔에 젊은 여성이 한두 명이겠는가? 최근 몇 년 동안 양양은 주말마다 젊은 사람들이 몰리는 휴양지라고 들었다. 이번 주에 네일 숍에 가고, 새 화장품을 산 수지가 죽음을 택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다음날 새벽, 정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눈코입도 없는 어떤 여자의 얼굴이 도자기처럼 산산조각이 나서 해변가에 흩뿌려져 있었다. 정현은 그것이 수지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지가 이제는 세상에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정현은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씻으려고 화장실에 갔다. 아귀가 맞지 않는 화장실 창틀로 들어오는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어휴, 내가 미친 거야, 미친 거라고. 알지도 못하는 여자애 하나 죽은 건데."

  정현이 화장실에서 돌아오자, 문국이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하품하고 있었다.

  "야, 수지가 누구냐? 네가 하도 수지야, 수지야, 하고 불러대서 잠에서 깼다. 옛날 여자 친구야? 아님, 요즘 누구 만나?"

  "아, 아냐,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냐."

  정현은 세게 머리를 내저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새벽에 잠에서 깬 것이 약간은 불만스러운지, 문국은 혼자 궁시렁거리면서 다시 잠을 청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정현은 업무용 폰의 전원을 켰다. 이제껏 차단해 두었던 수지와 관련된 전화번호를 차단 목록에서 모두 해제했다. 만약에 수지가 살아있다면, 그 문자로 무엇이든 연락이 오기는 올 것이다. 정현은 그 전화번호들에서 어떻게든 무슨 연락이 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되었다.

  하지만, 보름이 지나는 동안 정현의 업무용 폰에는 수지와 관련된 그 어떤 문자도 오지 않았다. 대신에 정현은 왜 투고한 원고를 읽지 않느냐는 항의 전화를 비롯해, 인세를 언제 입금할 거냐고 재촉하는 작가의 전화 같은 것을 받았다. 그런 전화들을 받을 때, 지치지 않고 대답하는 법은 아주 간단했다. 자신을 기계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정현은 마치 자동응답기처럼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담당자에게 전하겠습니다. 불편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정현은 생각이 날 때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양양 호텔의 투신 사망 소식을 검색해 보았다. 그러나 인터넷 뉴스의 그 어디에서도 후속 보도는 확인할 수 없었다. 매일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세상을 떠난 젊은 사람들의 소식 따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정현은 수지가 확실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정현은 신림동의 원룸 빌라로 이사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별것도 없었다. 커다란 여행 캐리어 2개가 정현의 살림살이 전부였다. 학사 관리실에서 작은 승합차로 짐을 실어다 주었다. 정현은  땅값 비싼 서울에서 자신을 4년 동안 품어준 이 낡은 기숙사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이 학사를 세운 고향의 돈 많은 유지(有志) 양반은 지금은 하와이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정현은 얼굴도 모르는 그 영감님이 그곳의 햇살 아래에서 오랫동안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6개월 뒤면 너처럼 이 동네에서 방 구해야겠다."

  문국은 정현이 새 원룸에서 짐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문국은 학비를 버느라, 한 학기를 휴학하고 지방의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학자금 대출이 늘어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 취직이나 할 수 있을까? 넌 그래도 용케 취업해서 인턴이라도 되었는데 말이지. 영문학과는 그래도 불문학과보다 낫지 않냐?"
  "그런 게 어딨어? 어문학 계열은 다들 힘들지."
  "별로 쓸모도 없어 보이는 남의 나라말을 4년 동안 참으로 열심히도 배웠네." 

  정현은 영문학, 문국은 불문학 전공이었다. 문국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정현의 원룸을 나섰다. 문국을 배웅하고 나서, 정현은 이제는 자신의 방이 된 304호로 들어왔다. 방에는 독서실에서나 볼 법한 작은 크기의 책상이 창가 쪽에 놓여있었다. 정현은 아까 책상 위에 둔 업무용 폰의 화면을 열었다. 혹시라도 연락이 온 것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수지야, 호주로 떠난다는 소식은 들었어. 떠나기 전에 한번 얼굴이라도 보면 좋겠는데. 연락 좀 주라.'

  수지는 살아있었다. 아니, 죽은 적이 없었다. 정현은 그 문자 메시지를 보고 나서, 비로소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저 뉴스 소식만 듣고서, 수지가 죽었다고 단정해 버린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현이 수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여대생이라는 그 한 가지뿐이었다. 그럼에도 정현은 김수지라는 그 여학생이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어떻게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에게서 그런 친근한 느낌이 들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수지는 이제 호주로 떠날 예정이었다.

  정현은 수지가 가게 될 호주라는 나라를 떠올렸다. 코알라와 캥거루가 있는 나라. 국토의 대부분이 황량한 사막인 나라. TV의 여행 프로그램에서 본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와 원주민의 신성한 산 울룰루(Uluru)가 있는 나라. 정현은 언제쯤 자신은 그 나라를 가보게 될까를 생각했다. 어쩌면 먹고사느라 바빠서, 살아있는 동안 그 나라를 가볼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아이구, 박 부장님. 잘 지내십니까? 밥은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시나요? 남의 돈 떼먹고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월요일, 출판사에 가장 먼저 출근한 정현이 탕비실 청소를 하고 있을 때 업무용 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정현의 귀에 쇳소리의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전화를 잘못 거셨습니다. 이 전화는 문재 출판사 마케팅부 전화입니다."
  "어이, 이봐. 왜 이러셔. 목소리를 들어보니 댁이 박 부장이 아닌 건 알겠어. 하지만 거기에 박 부장이 있는 건 내가 다 알고 있거든. 박 부장 좀 바꿔봐."
  "선생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번호를 잘못 아셨어요. 전화 끊겠습니다."
  "그래, 끊어봐라 끊어봐! 너, 박 부장한테 그대로 전해. 내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돈 받아낸다고. 돈 안갚으면 명대로 못살 거라고..."

  정현은 위협적으로 을러대는 남자의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를 끊고는, 그 번호를 바로 차단 목록에 추가했다. 도대체 과거에 이 전화번호를 썼던 박 부장은 어떤 사람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번호는 뭔가 마가 낀 것 같았다. 오후에 그 쇳소리의 남자는 다른 번호로 전화를 또 걸어왔다. 여대생 김수지가 가고, 새로운 인물 박 부장이 정현의 일상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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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Butter)


  "뭘 그렇게 오래 들여다봐? 그 코트 마음에 들어?"
  "응. 지호 아빠, 이 코트 좀 만져봐 봐. 얼마나 부드러운지 몰라. 보니까, 캐시미어가 47퍼센트나 들어갔어. 그래서 그런가 너무 부드러운 거야."
  "그렇게 마음에 들면 그냥 하나 사. 가만있자, 가격이 얼마야?"
 
  경희는 코트 소매에 달린 가격표를 들여다보는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 경희의 예상대로 남편은 흠칫 놀라더니, 얼른 가격표가 붙은 소매 깃을 내려놓았다.

  "350이라니, 이건 좀 비싸네.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사줄게."

  35만 원짜리였다면, 경희의 남편도 흔쾌히 그 코트를 사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경희가 본 그 코트의 가격은 350만 원이었다. 그것도 연말 세일 행사로 나온 가격으로 그 코트의 가격은 원래 450만 원이었다.

  "코트에 금가루라도 뿌렸나, 뭐가 그렇게 비싸?"
  "아마, 그 코트가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 모양이지."

  경희와 남편은 그렇게 말을 주고받으면서 매장에서 나왔다. 그들이 나온 매장의 간판에는 '앤 마리(Anne Marie)'라는 검은색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그저 플라스틱 글자에 불과해 보일 뿐인 그 로고에는 고고한 매력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할리우드 여배우들과 세계의 갑부 여성들이 사랑하는 코트. 그것이 '앤 마리'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결정했다. 경희는 그저 만져보기만 했을 뿐인 캐시미어 코트에서조차 주눅이 드는 느낌이었다. 그 매장에 있는 캐시미어 100퍼센트 코트는 유리 상자 안에 진열되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았다. 무척 비싼 옷이겠지. 저런 옷을 돈 주고 사서 입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경희는 새삼스럽게 그런 것이 궁금해졌다.

  휴일의 프리미엄 아웃렛 매장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원래 몰리는 방문객들에다가, 연말연시 선물을 사기 위해 온 사람들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나오는 데에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겨우 지상 주차장으로 나오자,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이 차의 유리창에 부딪히며 흘러내렸다.

  "이거 좀 길이 막히겠는걸."

  남편은 약간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와이퍼의 작동 레버를 아래로 내렸다. 쓱싹쓱싹, 하는 소리와 함께 와이퍼가 빗방울들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난 괜찮으니까, 천천히 가요. 아무래도 빗길 운전은 조심하는 편이 낫지."

  경희는 뒤쪽으로 서서히 멀어지는 아웃렛 매장을 한번 쳐다보았다. 350만 원이라고 적혀있는 코트의 커다란 가격표가 건물의 꼭대기에서 깃발처럼 펄럭이는 것만 같았다. 그냥 입어보기라도 할 걸. 매대의 옷걸이에서 코트를 꺼내지도 못하고, 그저 코트 원단만 만져보고 나온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매장 안에는 코트를 걸쳐보고 거울에서 맵시를 보는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그런데 경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지도 않을 거, 괜히 입어보면 더 감질날 것도 같았다.

  "지호 녀석, 그냥 지방대 약대라도 들어가면 얼마나 좋아? 그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공대를 뭐하러 간다고 그러는지. 나 원 참."
  "나나 당신이나 걔 고집 못 꺾어. 알면서 그래요?"
  "아니까 속이 터지지. 어른들 말 들어서 하나도 손해날 게 없는데. 아마 나중에 후회하겠지. 그러다 정신 차리면 좋은 거고."

  지호는 나름 괜찮은 수능 점수를 받았다. 부부는 아들에게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약대 진학을 권유했지만, 지호는 듣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물리학을 공부하겠다고 했다. 지호는 명문대의 공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부부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월급쟁이로 산다는 것이 파리 목숨처럼 얼마나 손쉽게 내쳐질 수 있는 것인지 지호는 알지 못할 터였다. 그렇다고 그들의 자식이 학자로 대성할 그런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이 부부의 마음을 갑갑하게 만들었다. 포근한 겨울 날씨에 내리는 비가 뿌연 안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경희가 보기에 지호의 앞날은 그 안개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안개 속에 있는 것은 아들의 진로뿐만이 아니었다. 자신과 남편의 미래도 그러했다. 회사에서 중년의 관리직 부장으로 남편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부부에게 어떤 제대로 된 노년의 청사진이 있었던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없었다. 아무런, 그 무엇도 없었다.

  "사탕 가진 거 있어? 있으면 하나 좀 줘 봐."
  "응. 핸드백에 늘 갖고 다녀. 나이 드니까 자꾸 잔기침이 나서." 

  그들의 차는 횡단보도의 신호대기에 걸려 잠시 멈추었다. 경희는 핸드백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어 남편에게 건넸다.

  "어쨌든 올해는 무사히 넘어갔군. 작년에 희망퇴직으로 몇 명이 쓸려나간 줄 알아? 139명이야. 뭔가 회사에서 칼을 갈았다는 느낌이 들더라고. 이 악물고 말이야. 나중에 들으니, 그 퇴직 비용을 계열사에서 꾸어서 마련했다더군. 그러니까 돈 많이 드는 늙은 직원들 나가라, 이거지. 돈만 있었다면, 올해도 내보냈을 텐데 못했지. 하지만 내년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회사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거야?"
  "안 좋지. 근데 그게 직원들 때문이 아니라, 시대적인 흐름 때문에 그래. 그러니 구조조정에 들어가는 거지. 웬만한 연구 개발도 다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돌리고. 아마 몇 년 이내에 그룹에서 계열사 정리하고, 본사를 그냥 관리부서 규모로 줄여버릴 것 같아."

  경희는 남편에게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건데?'라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런 걸 물어보았자, 별다른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남편의 기분만 처지게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든 걸까?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경희는 돈을 맘껏 써본 적이 없었다. 

  "넌, 아주 돈을 많이 벌게 될 거야. 네 주변을 돈이 산처럼 둘러쌀 거야."

  경희는 숙이 아줌마가 자신에게 해준 그 말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숙이 아줌마가 세상을 뜬 지 얼마나 되었더라. 경희는 속으로 그 햇수를 헤아려 보았다. 벌써 20년이네. 숙이 아줌마는 늘 돈에 쪼들리며 살았다. 그건 아줌마가 가난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기 때문이다. 아줌마의 남편은 별다른 기술도 없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장사를 했다가 망하기를 반복했다. 아줌마는 어쨌든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다양한 부업을 했다. 역학을 배운 것도 그랬다. 사주 관상을 볼 줄 알면 돈이 좀 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경희가 수능시험을 치른 다음날, 아줌마는 경희의 집에 왔다가 그 말을 해주었다.

  그때부터 그 말은 경희에게 하나의 거대한 주문이 되었다. 어쨌든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역학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 아줌마의 점괘이기는 했지만, 경희는 그 말을 믿었다. 그래,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난 부자로 살아갈 운명인 거야. 경희는 사는 것이 힘들 때마다 그 말을 되새기곤 했다. 하지만 그 부자의 운명은 쉽사리 다가오질 않았다.

  "아니, 폭팔이 뭐야? 폭발이지. 어휴, 진짜 요새 애들 맞춤법이 엉망진창이네."

  안개를 뚫고 아웃렛에서 돌아온 그날 저녁, 경희는 자기소개서 원고를 교열하다가 헛웃음이 나왔다. '무난하다'를 '문안하다'로 쓴 것을 하도 읽다 보니, 경희는 '문안하다'가 맞는 말처럼 느껴져서 고치지 않고 넘어가는 때도 있었다. 이런 애들이 대학에 가서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한단 말인가? 교정이 끝난 자기소개서 원고 뭉치를 식탁 한쪽 구석으로 밀어놓고는, 경희는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저녁 내내 경희가 교정을 본 자기소개서는 세 건. 한 건당 3만 원씩 받고 있으니까, 9만 원을 번 셈이다. 그것들을 들여다보느라, 고개를 숙여서 그런지 경희의 목은 뻣뻣해져 있었다.

  "아, 먹고 살기 참 힘들다."

  도대체 숙이 아줌마가 말한 돈의 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하고 나면, 경희는 자신도 모르게 숙이 아줌마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아줌마가 그냥 초짜 역술가라서 엉터리 말을 한 것일 뿐이야. 그런 말을 믿다니, 나도 참 어리석지. 그렇게 되뇌면서 경희는 찻물을 끓이기 위해 식탁에서 일어났다.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저녁, 보일러의 실내 설정 온도는 17도였다. 아무리 한파주의보가 내렸다고 해도, 실내 온도가 그 정도까지 내려가는 일은 없었다. 당연히 경희의 집 보일러는 돌아가지 않았다. 스웨터에 오리털 파카를 껴입은 경희는 펭귄처럼 보였다. 옷을 껴입으니, 걸음걸이도 둔했다. 천천히 뒤뚱거리면서 경희는 가스렌지 앞으로 걸어갔다. 타타타... 가스레인지의 불꽃이 점화되는 소리를 냈다. 

  "홍차가 다 떨어졌네."

  경희가 찻잎 쪼가리 몇 개 남은 홍차 캔의 반짝거리는 바닥을 보는데,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아침 추운데 출근하려면 힘들겠네. 경희는 보일러의 실내 설정 온도를 23도로 높였다. 웅, 하는 소음과 함께 보일러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추운 것은 견딜 수 있어도, 돈을 벌어오는 가장의 육신을 힘들게 하는 일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홍차 캔을 하릴없이 내려놓고, 경희는 차를 끓이기 위한 것을 찾아보았다. 냉장고 한구석에 말라비틀어진 생강차 조각이 든 통이 보였다. 저걸 우려서 마시면 되겠네. 마침내 찻물이 끓는 소리를 내었다.

  알싸한 생강의 맛을 느끼면서, 경희는 아까 작업해 놓은 교정 원고를 인터넷에 업로드했다. 경희가 해놓은 일감을 올린 곳은 교정 전문 플랫폼(platform) 사이트였다. 그 사이트는 등록된 구직자들에게 들어온 교정 원고 일감을 배분해 주고, 그에 따른 수수료를 받았다. 이 사이트에서 일반적인 자기소개서 1건을 교정해 주는 비용은 5만 원이다. 그러니까 경희는 플랫폼 사이트에 2만 원의 중개수수료를 지급하고, 그 차액인 3만 원을 받는 셈이다.

  "어휴, 날강도 놈들."

  경희는 역의 플랫폼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누군가 자신의 지갑에서 아무렇지 않게 정해진 돈을 빼가고 있었다. 그것이 플랫폼 노동자로서 경희의 현실이었다. 경희는 오늘 일한 15만 원어치의 일감에서 6만 원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기가 막힌 시스템이었다.

  '문화 여고 37회 동창회의 밤 행사 일정'

  휴대폰을 잠시 들여다보던 경희는 동창회 알림 문자를 발견했다. 그 문자에 이어서 온 문자는 미주의 것이었다.

  '이번에는 너도 와라. 이제 애도 대학에 보냈겠다, 마음 편하게 보자고.'

  아들의 입시 때문에 마음 졸이며 지내온 3년이었다. 남의 자식 잘되었다는 소식 들으면 속이 시끄러워질까 봐, 경희는 동창회에 가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하지만, 지호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보니 경희의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궁금해지네.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경희는 식탁 건너편, 불이 꺼진 지호의 방을 응시했다. 아들은 친구들과 졸업 여행을 간다고 제주도로 떠났다. 이제, 아들을 곁에서 품어온 스무 해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조만간 지호는 자신의 날개를 펴고 부부의 곁을 떠날 것이다. 경희는 부부만 남게 될 그 집의 시간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앤 마리에서 기쁜 크리스마스 소식을 전합니다. 이제까지 없었던 특별한 세일!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이 행운을 꼭 붙잡으세요.'  

  경희는 동창회에 입고 갈 옷을 생각하다가, 오늘 아웃렛에서 본 앤 마리 코트를 떠올렸다. 그래서 들어가 본 앤 마리 홈페이지에서는 세일을 알리는 작은 팝업창이 떴다. 세일 품목을 클릭해서, 자신이 오늘 본 코트가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경희가 쇼핑몰에서 상품을 정렬하는 순서는 낮은 가격순이었다. 경희가 보았던 연갈색의 그 캐시미어 코트가 제일 상단에 떴다. 코트의 할인된 가격은 250만원이었다. 경희는 자신의 통장 잔고가 얼마인지 헤아려 보았다. 그 통장은 원고 교정으로 받는 돈이 입금되는 통장이었다. 아마도 거기에 남은 돈은 270만 원 언저리였을 것이다. 지호의 대학 등록금에 보태기 위해서 모아놓은 돈이었다. 앤 마리 코트를 사고 나면, 남는 돈은 20여만 원 정도가 될 것이다.

  그 코트는 꼭 사야만 하는 옷인가? 그렇게 스스로에서 물으면서, 경희는 코트 사진이 뜬 상품 페이지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아직까지 그런 가격대의 옷을 사 입어본 적이 경희에게는 한 번도 없었다. 겨울을 나는 옷은 10년도 넘은 오리털 롱패딩 하나뿐이었다. 다운 패딩이라고는 하지만, 깃털 함유량이 50퍼센트 정도라서 패딩은 좀 무겁게 느껴졌다. 거기에다 봉제선으로 가끔 삐져나오는 깃털들 때문에 패딩은 얇은 담요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솜으로 된 싸구려 패딩을 하나 샀지만, 막상 사고 보니 그 무게감이 거추장스러워서 옷장에 처박혀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옷의 무게에 민감해졌다. 적어도 250만 원짜리 앤 마리 코트는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캐시미어가 들어갔으니 따뜻하기까지 할 것이다. 경희는 그 코트가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옷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나가는 동창회에 낡은 롱패딩 따위를 입고가고 싶지는 않았다.

  경희가 그 코트의 구매 버튼을 눌렀을 때, 경희가 주문하려는 M 사이즈의 잔여 수량은 겨우 2벌뿐이었다. 경희는 마치 홀린듯 코트의 카드 결제를 끝냈다. 그렇게 코트를 주문하고 나서, 경희는 250만원이라는 코트의 가격을 다시금 생각했다. 그 돈은 경희가 3만 원짜리 교정 원고를 83건을 하고도 1만 원이 더 필요한 금액이었다. 노안이 온 눈으로 눈알이 빠지게 모니터에 뜬 글자들을 들여다보면서 받는 돈이었다. 경희는 자신이 충동구매를 한 것이 아닌지 잠깐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코트를 산 결정을 구태여 되돌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판매자 앤 마리에서 발송한 상품을 금일 배송할 예정입니다. 배송 예정 시간은 16시에서 17시 사이입니다.'

  사흘 뒤, 그렇게 앤 마리의 코트가 경희의 집 현관문 앞에 놓여있었다. '개봉 시 커터 칼 사용 절대 금지', 라고 시뻘건 색깔의 경고문이 커다란 박스 상단에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경희는 박스 옆면으로 이어진 테이프의 끝부분을 찾아서 손톱으로 테이프를 뜯어냈다. 갱지 같은 종이 완충재가 잔뜩 들어있어서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덜어냈다. 비닐 포장에 싸여있는 연갈색의 앤 마리 코트를 꺼내는 경희의 손이 떨렸다. 그저 코트일 뿐인데도, 그 코트에서는 신비로운 기운이랄지 그런 것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코트를 입어보니, 사이즈도 자신에게 잘 맞았다. 무엇보다 옷이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름의 두께감이 있는데도, 어떻게 코트를 입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코트의 질감이 무척 부드러워서 옷이 쉽게 상하지는 않을까 싶은 걱정도 들었다. 경희는 코트 소매를 손가락으로 한번 꾹, 하고 눌러보았다. 그러자 코트의 옷감은 눌린 자국도 없이 되살아났다. 비싼 옷은 이렇구나. 경희는 감탄했다.

  "야, 너도 앤 마리 코트 샀냐? 여기가 동창회장이 아니라, 앤 마리 매장 같네."

  동창회가 열리는 호텔 로비에서 경희를 본 미주가 그렇게 말했다. 미주가 입고 있는 코트도 앤 마리였다. 검정색의 코트를 입은 미주는 원체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라 마치 화보 모델처럼 보였다.

  "넌 남이 입은 코트만 봐도 다 아냐?"

  경희는 자신이 말하지 않았는데도, 단번에 알아 본 미주가 신기했다.

  "그런 게 보는 눈이라는 거야. 명품이란 게 왜 있겠니? 알아보는 사람들끼리만 알아보는 거지. 너 돈 좀 썼겠다."
  "돈 좀 쓴 게 아니라, 무리를 했지. 아웃렛에서 봤는데, 정말 사고 싶더라고."
  "앤 마리 코트가 예쁘기는 하지. 예쁜 정도가 아니라, 사람을 혹하게 하거든. 나도 이번에 세일해서 또 하나 샀으니까."

  미주의 남편은 대학교수였다. 미주는 친정이 부유한 편이라, 남편의 월급만으로 살림을 꾸리면서 살지는 않았다. 그런 미주에게 앤 마리 코트는 경희처럼 무리해서 사야만 하는 옷은 아니었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들어가서 구경이나 해볼까? 누가 누가 자랑을 늘어지게 하는지."

  미주는 코트의 느슨해진 벨트를 힘을 주어 매고는, 로비의 소파에서 일어났다. 경희는 미주의 뒤를 따라 쭈뼛거리면서 동창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고급 호텔의 행사장 분위기가 경희에게는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경희의 눈에 미주가 신고 있는 붉은 색 하이힐과 손에 든 녹색 핸드백이 보였다. 명품을 잘 모르는 경희였지만, 딱 봐도 그 신발과 가방은 비싼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경희는 자신의 굽 낮은 검은색 단화와 바닥의 귀퉁이가 살짝 헤진 회색 핸드백을 보았다. 250만 원짜리 앤 마리 코트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아들이 이번에 의대에 붙었다면서?"
  "아휴, 그래. 우리 민준이도 애를 썼지만, 나도 정말이지 피를 말리면서 살았다니까."

  경희와 미주가 앉은 옆 테이블에서 수선스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의대생 아들을 두게 되었다면서, 한껏 고개를 세운 사람은 문영이었다. 저렇게 잘난 척하는 건 여전하군. 경희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람의 본성에 대해 생각했다. 문영의 아버지는 중소기업체 사장이었다. 원체 돈이 많은 집안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들조차 문영에게는 좀 비굴하게 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문영은 공부를 그리 썩 잘하지는 못했다. 그저 그런 대학을 졸업하고 피부과 의사와 결혼했다. 청담동 사모님 소리를 들으면서 편하게 살아온 문영이었다.

  "아들이 쟤 머리를 닮지는 않았나 보네. 지방대 의대이기는 해도, 어쨌든 의대는 의대지."

  미주가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이죽거렸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주의 밝은 귀는 문영이 그 테이블에서 나누는 대화를 쫓아가고 있었다. 미주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경희도 그러했다.

  "남편이 나한테 정말 수고했다면서, 사고 싶은 걸 말해보라는 거야. 그래서 전부터 눈여겨 본 이 옷을 샀지."

  문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의자에 걸어둔 자신의 코트를 가리켰다.

  "이게 캐시미어 100퍼센트인데 정말 옷이 가벼워. 처음 입었을 때부터 느낌이 달라. 마치 나한테 딱 맞는 맞춤옷 같아."
  "캐시미어 100퍼센트는 들어만 봤는데, 정말 고급스럽다. 그런데 이런 옷은 얼마나 해?"

  문영의 옆자리에 앉은 동창이 문영의 자랑에 장단을 맞추면서 말을 이어갔다. 문영은 코트의 가격을 묻는 동창의 말에 동창의 얼굴을 잠깐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천이백만 원. 옷이 주는 만족감을 생각하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야."

  문영의 그 말을 듣던 미주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심사가 뒤틀린 것처럼 보이는 미주와는 달리, 경희는 오히려 호기심이 일었다. 천이백만 원짜리 코트는 대체 어떻게 생겼나, 문영이 앉은 의자에 걸쳐둔 코트에 눈길이 갔다. 진회색의 그 코트는 자신이 입은 코트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두께감은 더 얇아 보였고, 디자인도 무척 단순했다. 경희는 천 이백 만원짜리 코트를 비싸지 않다고 말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했다. 갑자기 자신이 입고 있는 250만 원짜리 코트가 싸구려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경희야, 여기 공기가 좀 탁하지 않니? 행사 시작하기 전에 바깥바람 좀 쐬고 올까?"
  "그래. 어째 나도 머리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미주는 벗어두었던 코트를 걸쳐 입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희의 마음속에서는 괜히 왔다는 생각이 슬슬 몰려오기 시작했다. 자신은 여기에 왜 오려고 한 것일까? 명문대 공대에 진학한 아들 자랑을 하기 위해서? 아니면 밖에서 앤 마리 코트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서?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냥 답답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매일 저녁 식탁에서 눈이 빠지게 원고를 교정하는 일상이 지겨웠다.

  "너, 아직도 담배 피우니?"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는 미주를 보면서 경희가 말했다. 미주는 고등학생 때부터 담배를 피웠었다.

  "응. 그런데 많이는 안 피워. 일 년에 한 서너 번? 전번에는 집 근처 공원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아들 녀석한테 딱 걸렸지 뭐야. 근데 걔가 뭐라고 그러는지 알아? 용돈 안 올려주면 할머니한테 이르겠대. 경희야, 내가 자식한테 협박을 당하고 산다. 하하..."

  미주는 어이없다는 듯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야, 네 할머니도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렇게 받아넘겼다니까. 나 원 참."
  "동우는 내년에 고 3이지? 이제 너도 뒷바라지하려면 힘들겠다. 난 어쨌든 후련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야."
  "공부 잘하는 자식 두는 게, 여자한테는 트로피 같은 건데 말이지. 경희 넌 그런 트로피 하나는 있는 셈이야."
  "트로피? 그런 건, 장식장에 한번 넣어두면 꺼내볼 일 없잖아. 자식은 자식대로 자기 인생을 사는 거지. 난 그저 매일 빠듯한 삶이 버거운걸."

  그렇게 말하는 경희의 눈에 호텔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들어왔다. 'Merry Christmas!' 글자를 빛내는 금색의 전구가 마치 금화처럼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문득, 오래전 숙이 아줌마가 자신에게 말해준 돈의 산을 생각했다. 힘들 때마다 그것이 운명이라고 믿었던, 돈의 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은 늘 돈에 쪼들렸다. 그것은 매우 복잡한 삶을 산다는 뜻이기도 했다. 경희는 큰돈을 써야 하는 어떤 선택을 할 때, 매번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만 했다. 이것이 나을지 저것이 나을지, 그 선택이 실패했을 경우에 대한 것까지 미루어 짐작해야만 했다. 최저가에 최적화된 삶. 중산층의 언저리를 맴돌지만, 언제든 추락해버릴지도 모르는 삶. 그것이 자신과 남편 앞에 놓인 현실이었다.

  디너로 나온 스테이크는 덜 익은 것이었다. 허기 때문에 몇 조각을 먹기는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경희의 속은 불편했다. 혼잡한 주말 저녁의 지하철을 타고서는 경희는 힘겹게 집으로 돌아왔다. 경희의 코트는 지하철의 붐비는 승객들에 밀려서 싸구려 담요처럼 짜부라든 것 같았다.

  "개 발에 편자로군."

  아파트 공동 현관 출입문에 다다른 경희는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4자리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자, 전등이 켜지면서 출입문이 열렸다. 경희가 출입문을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문이 세게 닫혔다. 깜짝 놀란 경희가 뒤를 돌아보니, 닫힌 문틈 사이로 자신의 코트 자락이 끼어있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경희는 코트를 세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코트가 주욱 찢어지는 소리를 내었다.

  "아니, 이게 무슨..."

  몇 초만에 문은 다시 열렸다. 하지만 경희의 250만 원짜리 코트는 너덜거리고 있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경희는 집으로 들어왔다. 낡은 구두에 화풀이하듯, 신발을 벗어서 현관에 내팽개쳤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연말 모임이 있어서 나간 남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거실에 발을 내딛자, 냉기가 뼛속을 타고 전기처럼 흘렀다. 겨우 기운을 차리고는 식탁 의자에 앉아서, 경희는 코트를 벗어서 살펴보았다. 코트의 뒷자락이 사선으로 찢어져 있었다.

  "아, 이건 수선도 할 수 없겠네."       

  코트가 솔기를 따라 뜯어졌다면, 어떻게든 수선해서 옷을 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단 자체가 찢긴 것을 이을 방법은 짜깁기뿐이었다. 앤 마리 코트를 짜깁기해서 입고 다니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우스꽝스러웠다. 경희는 불편했던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냉장고에 탄산수를 넣어둔 것이 떠올랐다. 그거라도 한 모금 마시면 나아질 것 같았다.

  탄산수 한 병이 냉장고 문 안쪽에 있었다. 그걸 꺼내는데, 그 위 칸에 굴러다니는 버터 조각이 눈에 띄었다.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든 버터였는데, 소비기한이 1달이나 지난 것이었다. 그런 것조차 버리는 것이 아까웠다. 경희는 탄산수는 꺼내지 않고, 그 버터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서 버터의 포장지를 뜯었다. 버터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경희는 손가락으로 버터를 푹, 찍어서 먹어보았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기름이 목을 타고 술술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돈이란 삶을 매끄럽게 만들어 주는 버터기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남은 버터를 손가락으로 찍어 먹는데, 녹아버린 버터기름이 식탁 바닥에 내던져둔 코트에 떨어졌다. 연갈색의 캐시미어 코트가 버터를 받아먹고 헤벌쭉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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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글자로 된 꿈을 꿉니다. 오늘 새벽에 꾼 꿈에는 '閉(닫을 폐)'라는 글자가 보였습니다.

  올해의 마지막 단편을 썼습니다. 기다려준 독자분들을 생각했어요.

  새해에 또 다른 단편으로 여러분과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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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수(信號手)


  "동민아, 너 내가 하던 알바 하지 않을래?"
  "그게 뭔데?"
  "신호수. 그 왜 있잖아, 건설 현장에서 차량 통제하고 그런 거."
  "그거, 일당이 얼마나 되냐?"
  "난 15만 원 받았어. 근데 넌 초짜라 그보다는 조금 줄 거야. 한 13만 원 정도?"
 
  동민은 자신에게 필요한 돈 200만 원을 벌려면, 경수가 말한 그 신호수 일을 며칠이나 해야 할지 계산해 보았다. 보름 좀 넘게 일하면 그 정도 돈을 마련할 수 있다니, 뭔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신호수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가끔 지나가다가 건설 현장에서 신호봉 들고 도로 통제하는 사람을 본 적은 있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신호수였다. 보기에는 그렇게 힘든 일 같지 않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길바닥에서 오만 먼지를 들이마시며 차들이 오가는 위험한 도로 위에서 하는 일이었다. 경수가 받았다는 그 15만 원은 어떤 면에서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대가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자식."

  동민은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자신의 졸업 작품 촬영을 맡은 민규를 향한 말이었다. 민규는 원래 동민이 생각했던 촬영 감독은 아니었다. 친하기도 하고 실력도 좋은 경수에게 촬영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경수가 졸업 작품 제작비를 마련하느라 아르바이트를 하는 바람에 동민의 계획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하는 수 없이 민규에게 촬영을 맡겼다. 민규는 동민과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동기들 사이에서는 카메라를 잘 다룬다는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그 성질머리가 문제였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뜻이 관철될 때까지 고집을 피웠다. 속된 말로 '곤조(根性)'를 심하게 부렸다. 그런 민규라도 졸업 작품 촬영 시즌이 되자, 너도나도 데려가려고 난리였다.

  "뭐, 시나리오는 나쁘지 않네."

  동민의 시나리오를 본 민규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 말을 동민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웃기는 자식이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민규의 호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짜증스러웠다. 어쨌든 민규는 동민의 단편 영화를 촬영하기로 약속했다. 동민은 비로소 안심했지만, 그 안심이 불쾌한 악몽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민규는 감독인 자신의 의도를 무시하고, 핸드 헬드(Hand-held, 삼각대와 같은 고정장비 없이 카메라를 손에 들고 촬영하는 기법)로 촬영하겠다고 우겼다. 정적인 드라마를 무슨 생각으로 핸드 헬드로 찍겠다고 그러는 건지, 동민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 단계에서 말을 꺼냈다면 어떻게 조율하던가, 민규를 하차시키든가 했을 것이다. 그런데 촬영이 시작된 현장에서 그렇게 뻗대니까, 동민은 속수무책으로 민규의 뜻에 끌려가고 말았다.

  "이 영화의 미장센을 생각하면 핸드 헬드가 맞다고."

  저 머저리 같은 자식이 미장센(Mise-en-scène)이 대체 뭔지나 알고 지껄이는 걸까? 동민은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자신에게는 그런 민규에게 맞설만한 독하고 대찬 구석이 없었다. 촬영 현장에서 마치 감독이 된 것처럼 설쳐대는 민규의 꼴을 동민은 감내하기로 했다. 그 졸업 작품에는 제작비 350만 원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돈은 요양보호사 일을 하는 모친이 힘들게 모은 돈이었다. 동민의 어머니는 영화 공부를 하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곤 했다. 동민은 학자금대출과 알바로 어떻게 학교는 다닐 수 있었지만, 제작비를 마련하려면 휴학을 해야할 판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경수도 그래서 지난 학기를 쉬고 알바를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내어준 돈으로 동민은 졸업 학기에 작품을 찍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피 같은 돈이 '민규'라는 골칫덩이 때문에 버려질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동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참아내기로 했다. 어차피 저 자식은 다시는 볼 사이가 아니다. 어떻게든 잘 달래어서 촬영을 끝마치는 것이 중요하다. 동민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아니, 색감이 왜 이런 거야?"

  동민은 영화의 모든 촬영이 다 끝나고 처음으로 본 촬영본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영화의 화면은 마치 뿌연 푸른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시푸르뎅뎅했다. 어느 공포 영화에서 나올법한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내 영화는 드라마지, 호러가 아니라고! 동민은 좌절하고 말았다. 그 모든 사달은 민규가 카메라의 '화이트 밸런스(White Balance, 카메라의 색온도 조절 기능)'를 잘못 맞추고 작업한 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어, 그 버튼이 살짝 내려가 버린 줄도 모르고 찍었네. 어쩌겠냐? 촬영하다보면 이런저런 일이 있는 법이지."

  동민은 유들거리는 말투로 그렇게 말하는 민규의 낯짝을 후려치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문제는 그렇게 망친 영화를 복구하는 비용이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의 많은 일은 돈이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될 수 있다. 동민의 엉망이 된 졸업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실력이 좋은 색 보정 업체에 일을 맡기면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될 문제였다. 그리고 그 비용이 200만 원이었다.

  "건설 기초 안전교육 이수증은 받아왔죠?"
  "네, 여기."

  동민은 백팩의 맨 바깥 주머니에서 작은 카드 모양의 이수증을 꺼냈다. 신호수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이수증이었다. 고작 4시간짜리 강의를 듣고서, 동민은 차들이 쌩쌩 무섭게 내달리는 도로 한복판에 서게 될 예정이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쉴 새 없이 비집고 들어오는 컨테이너 사무실은 냉골이나 다름없었다. 작은 히터 하나에 의지하면서 책상에 앉아있는 중년의 경리 아줌마가 짠해 보였다.

  "자, 내가 필요한 물품을 줄게요. 자세한 건, 저쪽 현장의 빨간 조끼 아저씨 보이죠? 그 아저씨가 설명해 줄 거고."

  동민은 경리로부터 무전기와 안전 조끼, 안전봉, 안전모를 건네받았다. 운전면허도 없는 자신이 어떻게 도로 위에서 차들이 잘 지나다니도록 할 수 있을지, 동민은 걱정이 되었다. 마치 전투 경험도 없는 신병이 곧바로 격전지에 투입되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박 군 대신에 오는 학생이구나. 이 일이 처음에만 좀 힘들지, 하다 보면 다 익숙해져서 할 만해."

  빨간 조끼를 입은 작업반장은 50대 초반의 남자였다. 남자는 꽤 덩치가 있었다. 거기에다 구레나룻을 길러서 그런지, 약간의 위압감도 느껴졌다. 이런 거친 건설 현장에서 일하려면 저 정도의 체격은 되어야 하는 건가? 동민은 키는 큰 편이지만 비쩍 마른 자신의 몸을 생각했다. 신호수도 자신과 같은 사람이 하면 차들이 우습게 볼 것만 같았다.

  "이 군이 할 일은 말이지, 아주 간단해. 건설 현장에 필요한 차들 말고는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거야. 덤프트럭, 여기 일하는 사람들 차량, 이런 거는 들여보내. 나머지는 입구에서 커트, 알았지? 여기가 인근 마을을 지나는 샛길이라서, 동네 주민들이 차 가지고 오기도 하거든. 그런데 못 지나다니게 하니까 불만이 있지. 그런 사람들도 잘 다독여야 하고. 욕을 좀 먹을 수도 있을 거야. 그럴 땐,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

  동민이 일하게 된 곳은 김포 인근의 도로 확장 공사 현장이었다. 그곳에는 끝없이 펼쳐진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동민은 서울시를 좀 벗어난 곳에 이런 농지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수도권의 웬만한 곳에는 죄다 아파트가 들어서는 판국이라, 아직도 이런 농촌 풍경이 남아있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곳의 풍경도 언젠가는 단조로운 고층 아파트로 대체될지도 몰랐다. 동민이 신호봉을 들고 서있는 이 도로를 확장하는 것도 그때를 대비한 사전 작업일지도 몰랐다.

  "야, 이 새끼야! 너 일 똑바로 안 해? 얼른 그거 치우고, 나 들여보내 줘야 할 거 아냐?"

  시멘트를 잔뜩 실은 덤프트럭 기사가 차창을 내리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동민은 주변 풍경을 보느라, 트럭이 어느새 현장 입구까지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출입구 주차를 금지하는 노란색 표지판을 치우고 트럭을 들여보내야만 했다. 기사의 고함에 화들짝 놀란 동민은 얼른 표지판을 치웠다. 그리고 안전봉을 크게 휘두르며 트럭이 지나가게끔 했다. 시멘트 가루에다 바닥의 흙먼지가 더해지며 동민의 얼굴과 옷은 금세 더러워졌다. 집채만 한 크기의 트럭이 바로 자신의 코앞까지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무서웠다. 민규 녀석이 그 화이트밸런스 버튼만 제대로 살펴봤더라면, 지금 뒤집어쓴 먼지와 욕설은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서, 시푸르죽죽한 화면을 고쳐놔야 했다.

  "뭘 그런 거 가지고 고민해? 돈 200만 원이면 해결될 일 아니야? 작품이 중요하지. 그 업체 정도면 싼 거야. 거기 색 보정 잘하는 건 너도 알잖아?"

  석호는 가볍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동민이 후반 작업 비용이 나가게 되어서 고민이라고 하자 한 말이었다. 작품이 중요한 걸 누가 모르나? 석호의 그 웃음이 동민의 고민을 비웃거나 가볍게 여겨서 한 말이 아님을 동민은 잘 알았다. 석호에게는 돈 200만 원을 마련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석호 저 자식은 참 재수 없네. 돈 200이 누구 집 애 이름이냐? 자기가 부자면, 남도 그렇게 다 돈이 썩어나는 줄 아는 모양이네."

  석호는 부자였다. 진짜 부자였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재벌 BK 그룹의 방계 자손이었다. 영화과에 들어온 재벌 4세라니, 석호는 입학 당시부터 화제를 몰고 다녔다. 석호가 듣는 교양 수업에는 언제나 예쁜 여학생들로 미어터졌다. 어떻게든 재벌가 아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싶어하는 여학생들이 끊이질 않았다. 동민은 그들을 바라보는 석호의 표정을 4년 동안 흥미롭게 관찰했다. 그것은 경멸이나 무시가 아니라, 철저한 무심함이었다. 마치 기차를 오랫동안 탄 여행객이 풍경을 지루하게 보는 것과도 비슷했다. 석호의 그 무관심한 표정은 일반 사람들과 자신은 태생부터 다르다고 여기는 지독한 선민의식에서 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동민은 자신과 석호에게는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써야만 하는 돈 200만 원이 전혀 고민이 되지 않는 세계에서 석호는 살고 있었다. 그것이 동민과 석호의 세계를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였다.     

  "이쪽으로는 가실 수가 없어요. 돌아가셔야 합니다."

  동민은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흰색 승용차를 향해 신호봉을 흔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네가 뭔데 가라 마라야? 나 여기 사는 주민이야. 그냥 지나가게 길 비키라고!"
 
  승합차의 조금 열린 창문으로 짧은 스포츠머리의 젊은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얼핏 보기에 동민과 비슷한 또래거나 좀 어린 것 같았다. 아, 쓰레기 새끼. 동민은 속으로 욕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여기가 공사 현장이라서요. 불편하시겠지만 좀 돌아서 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웃기고 있네. 내가 돌아가려면 10분을 뺑뺑이 돌아야 해. 여기로 가면 5분이면 된다고. 비켜, 비키라고. 병신 새끼, 지랄하고 있어."

  동민의 눈에는 시퍼렇게 물든 자신의 졸업 영화와 돈 200만 원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참아야지. 참아야 한다. 동민은 무슨 말을 하면 저 미친놈을 돌려보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도무지 저 자식은 말을 들어먹을 것 같지 않았다.

  "아이고, 선생님.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협조 좀 해주시면 저희도 얼른 공사를 끝마칠 수 있거든요. 제가 이렇게 고개 숙여 부탁드립니다. 폐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빨간 조끼의 작업반장이 어느새 달려와서 운전자를 달래고 있었다. 반장은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손을 비비고 있었다.

  "부탁을 할 거면 이렇게 해야지. 어디서 뻣뻣하게 고개 쳐들고 명령을 하고 있어? 당신이 책임자야? 저런 멍청이 새끼 세워두고 일하지 말라고. 알았어?"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악을 쓰던 놈이 드디어 차창을 올리고는 차를 돌려서 떠났다.  

  "이 군, 내가 하는 거 봤지? 다음에는 이렇게 고개 팍 숙이고 해야 해. 저런 놈들은 답이 없어. 저 자식 눈빛 좀 봐라. 저런 성질머리 가지고 언젠가 더 미친놈 만나면 대가리 깨지는 것밖에 더 있겠냐. 그냥 나 죽었네, 하고 상황을 잘 넘겨야지. 내가 동물 다큐를 아주 좋아하거든. 거기 보면 그런 거 나와. 무서운 천적 만날 때, 가만히 죽은 척하는 거. 그런 거야."

  반장은 동민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다. 동민은 반장의 식견에 조금은 감탄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학교에서 영화 속의 세계만을 무수히 들여다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거칠게 구른 저 남자는 인간의 본질을 나름대로 꿰뚫고 있었다. 동민은 이제 곧 떠나게 될 학교 밖의 세상을 떠올렸다. 과연 그곳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거기에는 오늘 만난 저런 미친 놈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동민은 진짜로 죽은 척을 하면서 미친 개에게 물리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생존을 위해 고개를 숙인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배워야 할 가장 필요한 덕목인지도 몰랐다.

  "일은 좀 어때?"

  동민이 한숨 좀 돌리고 앉아있을 때, 경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냥 정신이 하나도 없다. 오늘이 첫날이니까, 어떻게 하다 보면 늘겠지. 그래도 경수 네 덕분에 알바 구했어. 정말 고맙다."
  "고맙기는.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서로 돕고 사는 거지. 어휴, 너도 그 민규가 사고 친 것만 아니면 그 고생하겠냐?"
  "야, 걔 이름 꺼내지도 마라. 내가 그 자식, 자기 단편은 어떻게 찍었나 볼 거야. 더러운 성질머리에 입만 살아서는."
  "엊그제 만났는데, 촬영은 대충 끝난 모양이더라. 무슨 칸 영화제에 낼 거라는 둥, 어쩌고 그러던데. 그냥 속으로 웃었지."
  "아, 그 말 들으니까 정한 선배 생각나네. 그 선배가 칸 단편에서 상 탔잖아. 근데, 그 선배는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네."
  "너, 소식 못 들었나 보구나. 그 선배 취업했잖아. 셔터맨. 부인이 약사거든."
 
  나름대로 서글픈 소식이었다. 한때는 반짝거리던 사람이 빛을 잃고 현실에 안주한다는 것은 말이다. 영화를 전공했다고 해서 모두가 영화감독이 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자신과 경수도 각자의 장편을 찍을 기회가 앞으로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도대체 그 많은 영화과 학생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동민의 가슴은 더욱 갑갑하게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참, 동민아. 나 취업했어. C TV 알지? 거기 촬영팀 스태프로 일할 거야. 케이블 채널에서는 잘 나가는 곳이니까, 당분간 밥은 먹고 살겠지 싶다."
  "언제부터 일하는데?"
  "내년 3월. 그때까지 졸업 작품 마무리하고, 또 다른 동기들 촬영할 것도 해주려고."
  "정말 잘 됐다. 넌 실력이 좋으니까, 어디서든 잘 해낼 거야."

  경수와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동민은 자신의 진로를 떠올려 보고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수처럼 촬영 전공도 아니고, 시나리오 전공으로는 먹고 살 방도가 참으로 아득해 보였다. 자신이 발을 들여놓은 영화계라는 곳은 마치 거대한 도박장 같았다. 화려한 불빛에 이끌려서 들어왔지만, 그 도박장의 입구에서 동민이 손에 쥔 것은 몇 푼짜리 칩 한 움큼이었다. 그것이 곧 사라질 테고, 동민에게는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빚을 내서라도 도박을 하다가 폐인이 되어 나가던지, 아니면 일찍 그곳을 떠날 것인지에 대해서.

  "언젠가는 진짜 내 영화를 찍을 거야. 멋진 장편 영화."

  영화과의 아이들은 다들 그렇게 다짐을 하면서 4년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간간이 선배 누군가가 상업 장편 영화를 찍었다는 소식이 들리기는 했으나,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그저 잊히고 잊힐 뿐이었다.

  '졸업 작품 상영회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드디어 폐관 직전의 충무로 단관 극장에서 동민의 단편 영화가 상영되었다. 작년에 작품을 내지 못한 선배들과 동민의 동기들까지 해서 모두 17개의 단편이 상영되었다. 허름한 극장의 로비에는 졸업생과 그 가족, 지인들로 하루종일 내내 북적였다.

  "무슨 학생 단편을 천만 원 들여서 영화를 찍어? 재벌집 아드님이라지? 아무튼 돈이 많으면 좋긴 좋네. 영화 때깔은 잘 나왔으니."
  "그게 12분짜리잖아요. 그걸 프레임 단위로 계산해 보면, 한 프레임당 돈이 얼마나 되나..."

  화장실에서 나오던 동민에게 로비에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 그들이 말하는 영화는 석호의 졸업 작품이었다. 여름을 배경으로 찍은 그 단편은 낯선 도시에서 만난 젊은 남녀의 우연한 만남과 이별을 담았다. 석호의 단편은 뻔한 스토리를 서정적인 풍광과 빼어난 촬영으로 극복했다. 한마디로 돈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색 보정 작업도 업계 최고의 회사에다 맡겼다고 들었다. 그러니 영화과 학생 수준으로는 나오기 힘든 단편이 된 것이다.

  석호의 그 단편에 비한다면 동민의 졸업 작품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정신 사납게 흔들리는 핸드 헬드 시점은 관객의 탄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신호수 일을 하면서 번 돈 200만 원으로 덧칠한 시퍼런 색감은 그나마 정상적으로 보정되었다. 문제는 촬영 때문에 영화의 이야기가 보는 이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염병할 자식. 다시 한번, 동민은 속으로 민규에게 욕을 퍼부었다.

  "동민아, 애 많이 썼다. 그래도 네가 걱정한 것보다는 잘 나왔어. 너무 속상해하지 마."

  어깨가 축 처진 동민에게 다가와서 경수가 말을 건넸다. 그래도 동민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은 경수뿐이었다.

  "사람들이 석호 단편 얘기하더라고. 로비에서 말하는 거 들었거든."

  동민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그래. 괜찮게 찍었더라. 돈이 들어가면 아무래도 잘 뽑히잖아. 그런데 거기에는 그게 없어.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 주름. 주름이 없어."
  "주름? 무슨 주름?"
  "삶의 주름.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이런저런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잖아. 그런 게 주름을 만드는 거야. 석호의 영화는 아주 매끈하잖아. 석호는 너무나도 평탄하게 살아와서 그런 주름을 만들어낼 틈이 없었던 거지."
  "그런 주름이 있는 게 뭐가 좋아? 난 자글자글한 주름이 이어지는 삶은 싫다고. 어쩔 수가 없으니까, 그냥 주름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지."
  "글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예술가에게는 주름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만 그 주름에 대해 뭔가를 말할 수 있는 거라고."
  "모르겠다, 난."

  동민은 경수의 뜬금없는 주름 타령에 심드렁하게 답했다.

  "네 단편에는 거칠지만, 그 주름이 있어. 그게 너의 영화를 만드는 거야."

  그 말에 동민은 경수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아, 경수 저 녀석은 무슨 도인처럼 말하네. 분명 경수의 그 말은 동민의 쓸쓸한 마음 한구석을 건드렸다. 경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졸업 작품 상영회 2부가 시작됩니다. 관객 여러분께서는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있어 '상영 중'이라는 빨간 불빛이 켜졌다. 동민은 상영관에 들어가지 않았다. 혼자서 로비를 서성이던 동민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응시했다. 동민은 자신의 졸업 작품이 과연 정말로 찍고 싶었던 영화였을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거기에는 조급함과 불안이 깃들어져 있었다. 그 단편은 어떻게든 잘 만들어서 자신의 포트폴리오로 만들겠다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동민은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가 단지 민규의 엉터리 촬영 때문이 아님을 깨달았다. 진짜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직 동민의 마음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라이, 오라이! 기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동민은 여전히 김포의 한갓진 도로변에 서 있었다. 덤프트럭을 여유 있게 들여보내는 동민의 얼굴에는 이내 밀가루처럼 시멘트 가루와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이 공사가 끝나면 동민의 신호수 알바도 끝날 터였다. 그 일이 끝나면, 동민은 무엇을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신호봉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돌아가야 할지 알려주면 좋겠다고. 27살,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낮이었지만 날이 차츰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동민은 꾸물거리는 잿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하늘의 구름도 구불거리는 주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조금씩 날리는 눈가루가 동민의 신호봉 위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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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 초단편은 좀 늦어질 것 같습니다. 월요일쯤에는 올릴 수 있을 거예요.

2. 올 한 해도 이렇게 지나가네요. 올해의 성과는 시에서 소설로의 전환이네요. 글쓰기의 방식은 달라졌지만, 이전의 지평에서 넓혀가는 과정이 참 좋습니다. 한 해를 지나오면서 독자분들의 삶의 지평도 좀 더 새롭고, 넓어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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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적


  "대충 여기쯤일 것 같은데..."

  현수는 명 선생이 알려준 주소와 약도를 들고, 골목을 한참 동안 서성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방기가 내걸린 양옥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황해도 장군 만신(萬神)의 집'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초록색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현수는 쭈뼛거리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좀 낡은 2층 양옥집이 그곳에 있었다. 생각보다 꽤 널따란 마당에서는 장작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면서 타올랐다. 12월이기는 해도 갑작스럽게 시작된 한파에 사람들은 다들 놀란 모양새였다. 그 이전까지 날이 포근했기 때문이었다. 현수도 아침에 옷장에서 롱패딩을 꺼낸다고 부산을 좀 떨었다. 그렇게 챙겨입고 나왔는데도, 전철에서 나와서 주택가 골목을 꽤 걸었더니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장작불이 타오르는 드럼통 근처에는 중년의 남자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 하나가 현수의 인기척에 말을 걸어왔다.

  "굿 보러 왔어요?"
  "네."
  "그럼, 2층으로 가보쇼. 거기에 보살님이 있으니까."
 
  현수는 대답 대신에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2층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현관문이 비스듬히 열려있었다. 현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마루를 둘러보았다. 마루에서 보이는 주방에서는 중년의 여자들 서너 명이 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구야, 어디서 오셨어? 이렇게나 일찍 왔네."
 
  안방에서 쪽찐머리의 나이 든 보살이 나왔다.

  "저기, 명 선생님 소개로 왔는데요."
  "아, 명 선생님하고 아는 분이구나. 여기로 들어와요. 오느라 애썼네. 시장하지? 저기, 서천댁! 상 좀 차려봐."

  현수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보살은 부엌 쪽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나이가 꽤 들기는 했어도, 보살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저 양반이 장군 만신인가 보군. 정말 장군신(將軍神)을 모셔서 그런가, 늙은 보살에게서는 기백이랄지 그런 것이 있었다.

  "야, 너도 인제 그만 좀 일어나라. 손님도 왔는데."

  보살이 안방에 드러누워서 자던 남자에게 핀잔을 주었다. 키가 작고 마른 체구의 그 남자는 늘어지게 하품하면서 이내 일어났다.

  "아, 정말 잘 잤다. 일주일 내내 굿을 했더니, 너무 피곤해."

  한복을 입은 그 남자는 박수무당이었다. 현수는 작년 가을에 운현궁에서 있었던 굿판에서 그 박수를 본 적이 있었다. 저 양반이 이 만신과도 다 그리 연결되어 알고 지내는가 보다. 그것은 하나의 큰 가족이었다. 커다란 굿을 따내면, 함께 굿을 해서 수익을 나누는 믿음과 사업의 공동체 같은 것이었다.

  "제가 여기 들어와도 될지..."
  "아이고, 무슨 소릴. 배고플 텐데, 우선 식사나 해요. 어디, 굿판은 많이 좀 돌아봤수?"
  "아뇨. 그냥 명 선생님 따라서 서너 번 본 게 전부입니다."
  "그렇구나. 이왕지사 여기 왔으니까, 구경 잘하고 가요."

  보살이 사람을 대하는 데에는 나름 살가운 구석이 있었다. 그럼에도 갑작스레 보살의 집 안방에 앉게 된 현수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때마침 방 안으로 밥상이 들어왔다. 작은 소반에 오징어무침, 잡채, 시금치나물, 겉절이, 시레기국, 쌀밥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젊은 양반, 어여 들어. 나는 주방에 가서 일을 좀 도와야 해서."
  "네, 잘 먹겠습니다."

  현수는 추운 날씨에 낯선 길을 헤매느라 허기가 지기도 했다. 명 선생이 이르길, 저 장군 만신은 원체 배포가 크고 사람이 너그럽다고 했다. 모처럼 열리는 진적굿이니, 자기 이름을 대면 섭섭지 않게 대접해 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명 선생은 무슨 시 쓰는 양반이 언제 저렇게 보살을 알게 된 것일까? 현수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밥을 먹었다.

  "고모님, 저희 왔어요."
  "아이구, 이게 누구야? 벌써 신혼여행 갔다 온 거냐? 여기로 들어와라."

  보살의 친척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방으로 들어왔다. 현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했다. 자기가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현수가 밥을 먹다 말고,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났다. 그러자 보살이 현수에게 그냥 앉으라고 손짓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밥 먹어요. 여기는 내 조카 손주하고 며느리."
  "아, 네..."
 
  보살이 소개한 조카 손주는 삼십 대 초반, 그의 아내는 이십 대 후반으로 보였다.

  "굿 보러 오셨나 봐요."
  "네. 보살님이 이렇게 대접을 해주셔서..."
  "우리 고모님이 원래 손님 접대는 아주 잘하시는 분이세요. 저희 신경쓰지 마시고, 그냥 편하게 식사하세요."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래, 제주도는 잘 다녀왔어?"
  "네. 처갓집 심방(제주의 무당을 이르는 말) 어르신들 좀 뵈었습니다."
  "거기 일가분들은 아직도 굿을 하시나?"
  "웬걸요. 이제는 굿 일감도 들어오지 않고, 심방을 하려는 사람들도 거의 없답니다."
  "일이 그리되었나? 하긴, 사람도 시대도 많이 변했지."

  보살은 배자(褙子)의 안쪽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어 불을 붙였다. 현수는 천천히 밥을 먹으면서,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었다.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긴장이 풀어졌다.

  "심방의 무구(巫具)는 제자들에게 물려주게 되어있는데, 하려는 사람들이 없답니다. 그러니 대개는 박물관으로 간다 그러더구만요. 박물관마다 그렇게 기증받은 무구들이 넘쳐난대요."
  "저런, 제주의 신령님들이 많이 서운하시겠구먼."
  "그래도 땅과 하늘에 깃든 신명이 어디 딴 데 가시겠습니까? 어찌됐든 제자들은 나올 테고, 당연히 받들어 모시겠지요."
  "그렇겠지. 정성을 다해 빌면, 그 공덕이 다 쌓이는 법이야."

  보살의 그 말은 현수의 마음 한구석을 툭, 하고 건드렸다. 정성을 다한다면, 그것이 모여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까? 소설을 쓴 지 5년. 응모한 공모전의 최종심에 올라가 본 것은 3번이지만, 아직 당선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제는 슬슬 글쓰기를 그만 두어야 할까 싶은 고민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아, 네. 아주 맛있네요."

  보살의 조카 손주가 밥을 천천히 먹고 있는 현수에게 물었다.

  "어떤 일을 하시는지 물어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대학원생이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이라면..."
  "소설을 씁니다."

  현수의 말을 듣던 보살이 지그시 웃었다.

  "아, 소설이요? 그런데 고모님은 왜 웃으세요?"
  "아니야, 아니다. 내가 뭘 웃었다고 그래?"
  "에이, 내가 봤는데요.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저 손님에게 해주세요."
  "글쎄다."

  현수는 밥을 먹던 숟가락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보살이 자신에게 뭔가 말할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학생은 내가 말하면, 듣고 싶은 생각이 있어?"
  "네. 저도 좀 답답한 것이 있어서..."
 
  보살은 재떨이를 끌어다가 이내 담배를 비벼서 껐다.

  "글월 문(文)자가 보이기는 하는데, 그거 가지고는 글밥 먹고 살기 어려워. 어째 들리는 소식도 없고, 신통치가 않지? 계속 갈까 말까, 속은 시끄럽고."
 
  현수는 대답 대신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보살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냥 여기에서 그만두는 게 좋겠는데, 내가 보기엔 그래."
  "아이고, 고모님도 참. 뭘 그런 말씀을..."
 
  보살의 말을 들은 현수는 허를 찔린 것 같았다. 정말로 그만두어야 하는 걸까, 정말로? 그렇게 속으로 되묻고 있었다.

  "그래도 좀 더 노력하면 어떻게든 될 것도 같거든요. 글쓰기 말고, 딱히 다른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먹고 살 방도를 말하는 거지? 학생은 관운(官運)이 있긴 있으니까, 공무원이 되는 것도 괜찮아."

  현수는 나이 서른에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니 심란해졌다. 차라리, 저 말은 안 듣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근데 본인이 고집이 세어서, 아마도 하던 걸 포기하기가 쉽지는 않을 거야."

  보살의 그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현수는 새삼 자신이 살아온 서른 해를 돌이켜 보았다. 이제껏 자신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 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한 것도, 그리고 국문과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소설을 쓰기로 한 것도. 모두다. 부모님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도무지 돈도 되지 않는 공부만 한다고 다들 싫은 소리를 했다. 현수의 그런 선택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부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자 살자 글을 치열하게 쓴 것도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 그건 어설픈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몸부림인지도 몰랐다. 세상을 오래 산 어른들이 보기에, 현수는 그저 제멋대로 하는 철부지일 뿐이었다. 

  "탁, 탁, 탁!"

  보살은 성냥갑에서 성냥을 하나 꺼내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유엔(UN) 성냥'이라는 성냥갑의 글씨가 선명했다. 아니, 저 성냥이 아직도 나오나? 현수는 신기한듯, 성냥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현수는 아주 어렸을 적에 저 성냥갑을 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사람의 고집은 이 성냥 같은 거야. 나도 이 나이 먹도록 성냥을 쓰지, 라이터는 어째 못 쓰겠더라고."
  "고모님은 신딸, 신아들한테도 초에 라이터 쓰지 말라 잔소리하시죠?"
  "그거야 당연하지. 신령님께 올리는 초를 켜는데, 정성을 들여야지. 어디 편하게 불을 켜면 쓰나?"
  "아이구, 우리 고모님도 참... 하여간 못 말려요, 못 말려."

  보살의 조카 손주가 그렇게 눙쳤다. 그 말을 들으니, 보살의 말에 경직된 현수의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이제 슬슬 가봐야겠네요."
  "벌써 가냐? 하긴, 여행 갔다가 와서 피곤하기는 하겠다. 어여 가서 쉬어."
  "네. 저희는 먼저 일어납니다. 굿 잘 보고 가세요."

  보살의 조카 손주 내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수는 어쩔 수 없이 앉아있었던 자신 때문에 그들이 서둘러 떠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제가 자리에 있어서 불편하셨을 거 같아요."
  "그럴 리가요. 저희도 고모님께 짧게 인사드리고 가려던 참인데요."
  "잘 살아라. 잘 살 거야. 자식도 많이 낳고, 다복하게. 암, 그래야지."

  보살은 조카 손주와 며느리에게 축원의 말을 하며 대문 앞까지 배웅했다. 그들이 그렇게 떠난 방에서, 현수는 식어버린 밥과 국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무당의 진적굿을 보러 온 것부터 해서, 그 무당의 조카 손주 내외와의 만남,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무당의 공수까지. 언젠가 소설을 쓸 때 써먹으면 되겠군. 현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상에 남은 밥과 국을 마저 비웠다.

  "웬 손님이 안방을 차지하고 있네."

  한복을 입은 50대 중반의 여자가 방에 앉아있는 현수를 힐끗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뭐랄까, 참 무례하게 들리는 말투였다. 중년 여자의 옆에는 일행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30대 초반쯤 되었을까? 얼굴이 무척 고왔다. 현수는 언젠가 저 두 여자를 TV에서 본 기억이 났다. 젊은 여자는 한때 잘 나가던 배우였으나, 갑작스럽게 신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었다. 무례하게 말한 여자는 그 배우에게 내림굿을 한 신(神)엄마였다. 말하자면 그 젊은 여자는 보살에게는 손녀딸쯤 되는 관계였다. 진적굿은 무당이 오로지 자신을 위해 신령님들께 바치는 큰굿이다. 그런 중요한 행사를 위해 보살의 신딸과 신아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굿 보러 왔어? 이번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려나 보네."

  현수는 자신에게 거리낌없이 말을 놓는 여자를 보고 기분이 확 상했다. 참으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군. 신을 모신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반말지거리해도 된다는 건 아닐 텐데. 현수는 다 먹은 밥상을 들고 일어섰다. 부엌에 상을 내려두고는, 잘 먹었다고 인사를 했다.

  "6시부터 굿이 시작되니까, 내려가 봐요."

  부엌에서 일하던 아줌마 하나가 현수에게 그렇게 일러주었다. 마루의 시계를 보니 5시 40분이었다. 현수는 안방 한구석에 놔둔 자신의 백팩을 한쪽 어깨에 대충 메었다. 옥색 치마저고리를 입은 젊은 여자는 기운 없는 표정으로 그곳에 앉아있었다. 여자에게는 생기가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행해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보니,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아이 둘을 놔두고 신내림을 받았다고 했던가? 여자는 신병(神病)이 심해져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수는 TV에서 본 다큐의 내용을 떠올렸다. 현수가 본 여자의 신엄마는 무례하고 우악스럽게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인생이란 것이 참으로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구나. 현수는 여자의 선택을 새삼 복기하면서 삶에서 되돌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마당 장작불의 붉은 빛이 2층의 계단을 내려가는 현수의 눈에 환하게 비쳤다. 어느새 마당은 방문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촬영을 위한 카메라 장비를 둘러멘 사람들이며, 종교 관련 연구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각자 손마다 녹음기를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보살의 굿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살이 마침내 화려한 무복(巫服)을 입고 나타났다. 보살이 제일 먼저 굿당에 들어갔고, 마당의 사람들은 그 뒤를 따랐다. 30평 정도 되는 굿당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현수는 가방을 끌어안고는, 굿당 뒷줄에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현수의 주변에 앉은 이들은 모두 나이든 할머니들이었다. 굿을 보러 동네 노인들이 구경을 나온 모양이군. 현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굿을 하기 전에 제단을 정화하는 주당(周堂)물림은 오전에 이미 끝난 터라, 저녁의 굿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보살이 주력으로 모시는 장군신을 비롯해 여러 신들을 청해서 제단에 좌정시키고 흥겹게 해드려야 한다. 보살은 처음에는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신이 올라서 아주 힘있게 뛰더니, 덩실덩실 춤을 췄다. 현수는 늙은 만신의 몸 어디에서 저런 기운이 나오는가, 그저 신기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춤을 추며 사설을 풀어내던 보살이 갑자기 멈추더니, 출입구에 자리한 작은 옷장으로 달음질을 쳤다. 그러고는 그 옷장에 있는 온갖 무복들을 죄다 꺼내어서 바닥에 내던졌다. 아마도 여러 신들이 오시니까 거기에 맞는 무복을 골라 입으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 작은 옷장에서 무복들이 무진장 쏟아져 나왔다. 현수는 옷장이 자리한 벽 안쪽에 어디 숨겨진 공간이라도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보살은 이 옷 저 옷을 몸에 대보고는 흥이 나서 신나게 춤을 추었다. 그러면서 앞자리에 앉은 이들도 일으켜 세우면서 춤을 추게 하였다. 아마도 평소에 보살을 찾는 단골들로 보이는 이들은 스스럼없이 일어나서 어깨를 들썩이며 분위기를 맞추었다. 현수의 옆자리에 앉은 노인들도 하나둘씩 일어났다.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양새가 그 할머니들이 보살과 같은 무당임을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이 노인들은 모두 보살의 친구들이구나. 무당 친구들.'

  모두들 서서 춤을 추고 있는데, 오직 현수만 뻘쭘하게 앉아있었다. 현수는 마치 아르마딜로가 위기 상황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듯, 백팩을 꼭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이 모든 상황이 현수에게는 낯설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사람들로 꽉 들어찬 이 굿당에서 어떻게 나가볼 방법도 없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현수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춤을 추고 있는 허연 파마머리의 할머니였다. 노인이 입은 자주색 솜조끼의 노랑 꽃무늬가 나풀거리며 현수의 눈에 떨어졌다.

  "학생도 같이 춰. 어여!"

  현수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들 틈에서 가방을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봐 등에 백팩을 메었다. 그리고서 노인의 손짓을 따라 천천히 팔을 들었다 올렸다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춤을 따라 추기 시작하자,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들어간 힘이 빠지면서 춤사위가 가벼워졌다. 현수의 팔은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파도에 무언가가 떠밀리듯 들이쳤다가 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런 현수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하나의 장면이 있었다. 8살 때, 아파트 주차장에서 있었던 사고였다.

  부주의한 트럭 운전사가 트럭을 후진하다가 그 뒤에서 놀던 현수를 쳤다. 현수는 다행히도 다리만 살짝 다치는 경상을 입었다. 트럭 운전자는 별다른 처벌도 받지 않았다. 현수의 집을 찾아 사과하지도 않았다. 함께 놀던 아이들이 경찰에게 증언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 사고는 현수의 종아리에 기다란 흉터를 남겼다. 만약에 그 빌어먹을 트럭 기사가 조금만 더 뒤로 세게 후진을 했다면 어땠을까? 현수는 비로소 8살 이후의 자신의 삶이 덤으로 얻은 것임을 깨달았다.

  현수의 손은 나비처럼 부드럽게 펄럭였고, 발은 가볍고 빠르게 움직였다. 이런 걸 보고, 신이 실렸다고 하는 것이겠구나. 어쩌면 현수가 쓰는 글도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같았다. 어느 날에는 나이든 여자가, 또 다른 어느 날에는 아이가, 그다음날에는 젊은 남자가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면 현수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그것은 억지로 지어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쓸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무당의 팔자나 작가의 팔자나 별반 다를 게 없군.'

  사람들을 따라 덩실덩실 춤을 추던 현수는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던 현수의 등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소리가 나지 않게 무음으로 해놓은 휴대전화의 진동이었다. 현수는 탁해진 공기와 사람들을 헤치고 겨우 굿당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전화에 찍힌 발신 번호는 명 선생이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굿은 잘 보고 있는 거야?"
  "굿당에서 떠밀려 춤추다가 이제 나왔네요. 선생님은 언제 와요?"
  "난 밀린 일 좀 해야 해서. 어차피 굿은 사흘 내내 이어지니까, 내일 아침에나 출발하려고. 거기서 밤샐 거야?"
  "어휴, 힘들어서 못 해요. 춤 좀 췄더니, 기운이 다 빠지는데."
  "그럼, 집에 갔다가 내일 다시 와서 봐."
  "네, 그러려고요."

  현수는 휴대전화의 시각을 확인했다. 9시 43분. 인천에서 지금 출발하는 전철을 타야만, 집으로 가는 심야버스 막차를 겨우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깥의 공기는 머리가 쨍하고 깨질 듯이 차고 매서웠다.

  "뭔 날씨가 이리 오지도록 추워."
  "그러게. 그런데 내년 별신굿 소식은 들었어?"
  "거기 굿하지 않은 지가 꽤 되었어. 한 6년 되었나? 박만출 만신이 세상 뜨고는 굿 보기 어렵게 되었지. 굿할 돈 걷기도 어렵다 그러던데. 인자는 다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사니까. 그런 큰굿에 돈이 오죽 드는가 말일세. 그러니 지금 진적굿도 여기 보살이 큰맘 먹고 5년 만에 하는 것이고."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해가. 제대로 된 굿 한번 보기가 참 힘들어."
  "그러니까 굿도 짧아지는 거야. 이제는 무당들도 사설을 길게 안 하잖아. 사람들이 참을성이 없어서, 뭔가를 길게 못 본다고."

  두 명의 중년 남자는 드럼통에서 타는 장작불 옆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벌써 가시게? 내일 또 와서 보구려. 이런 굿 또 보기 어려우니."
 
  불을 쬐던 한 남자 하나가 대문으로 가는 현수를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네, 그럴 생각입니다."
 

  현수는 남자에게 짧게 인사를 건네고는 보살의 집 대문을 나섰다. 늦은 시각의 골목길에는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집에선가 큰 개가 컹컹, 짖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골목이 끝나는 곳에 이르렀다. 붕어빵을 파는 장사꾼의 노점이 보였다. 팔지 못한 붕어빵들이 주르르 늘어져 있었다. 남자는 히터 옆에서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이며 졸고 있었다. 출출해진 현수는 붕어빵을 사려다가, 그냥 지나가기로 했다. 장사꾼의 잠을 깨우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이제 보름 정도 남은 건가? 현수는 가만히 올해 남은 날들을 헤아려 보았다. 내년 봄부터 소설 공모전 일정이 시작된다. 문득, 쓰고 있는 중편을 장편으로 늘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떻게든 써봐야지. 현수는 자신이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푸르고도 서글픈 예감이었다. 어쩌면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은 글만 써내다가 그만두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자신이 써내는 글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 글의 모양새는 어떨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괜찮아. 덤으로 주어진 인생, 아직은 써야 할 것이 있어. 현수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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