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 지망생


1.

  묵혀둔 필력, 세상 속으로...

  그런 문구가 내걸린, 40세 이상만 응모할 수 있는 문학 공모전이 있다. 매일신문과 교보문고가 주관하는 '만추 문예'가 그것이다. 공모전 정보를 살펴보다가, 그런 게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런 것이 있었군. 해봐야지. 그런데 응모 요강이 따로 없다. 온라인으로만 응모할 수 있는데, 무슨 파일로 보내는지에 대한 지정도 없다. 참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공모전이다.


2.

  9월부터 쓰기 시작한 동시집 원고는 이제 29편이 되었다. 동시집 응모 요건인 50편에서 이제 21편이 남았다. 그런데 내가 쓰고 있는 것이 아이를 위한 동시인지, 아니면 어른을 위한 것인지 솔직히 헷갈린다. 독자가 아이라면 내가 쓴 동시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고, 어른이라면 이게 무슨 동시냐고 타박할지도 모른다. 뭐랄까, 일종의 잔혹 동시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렇다. 50편을 완성해서 공모전에 내기야 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될 것 같다.

  나에게 이 공모전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느껴진다. 매번 무언가 기대를 하고 떠나지만, 시간이 지나서 보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있다. 무슨 공모전 응모 기계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나는 '만추 문예'의 접수 메일 주소를 클릭하고, 시와 소설의 원고를 보냈다. 주최 측에서 파일 지정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PDF 파일로 보냈다. 온라인 접수를 받으면서 hwp 한글 파일 지정하는 곳은 짜증부터 치민다. 내가 한글로 원고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hwp가 우리말 파일의 금과옥조도 아니고, 도대체 왜 hwp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최근에는 PDF를 포함해서 그나마 docx 파일 접수를 받는 곳도 생긴 것은 바람직한 변화이다.

  '만추 문예'의 응모 요건은 시 분야 3편 이상, 소설은 단편으로 200자 원고지 70매 분량이다. 나는 내가 요새 쓰고 있는 동시 3편과 원고지 150매 분량의 중편 소설 파일을 접수 메일로 보냈다. 보내놓고 보니, 해보나 마나 한 일이었다. 동시 공모전도 아닌데 동시를 보냈고, 단편을 보내야 하는데 중편을 보냈다. 이건 당선이 되고 싶은 사람의 간절한 마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나는 그 '만추'라는 단어가 몹시도 거슬렸던 것이 틀림없다. 40세 이상이라는 응모자의 나이 요건도 그렇거니와, '묵혀둔 필력, 세상 속으로...'라는 우스꽝스러운 구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 손가락은 이전의 온라인 공모전에서 그러했듯, 습관처럼 원고 파일을 클릭해서 전송 버튼을 눌렀다.

  어쨌든 그렇게 접수 메일을 보내놓고 나서, 이 '만추 문예'의 이전 당선작들과 당선자들을 검색해 보았다. 적어도 이 공모전의 대략적인 개요를 알 필요가 있었다. 사실 그건 원고의 이메일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했었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 '만추 문예 당선작'이라고 구글 검색창에 글씨를 입력하자, 검색 결과가 주르륵 떴다. 딱 봐도 할머니처럼 보이는 1회 당선자의 사진이 떴다. 아, 그렇구나. 이 공모전의 수상작은 살아온 인생의 지독한 신산스러움을 글로써 구현해 내는 이에게 주는 일종의 표창장 같았다.       

 
3.

  다음날, 나는 족저근막염에 시달리는 발을 질질 끌고서, 산책을 하러 나갔다. 평일 오전, 이 동네의 절반은 아수라장의 소음과 이상한 고요가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한쪽 초등학교에서는 운동회가 열려서, '2학년 1반 나오세요' 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마이크 소음을 피해서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다른 초등학교가 보였다. 그곳은 마치 절간처럼 조용했다. 내가 학교의 정문에 다다랐을 때, 좀 키가 큰 남학생 하나가 마침 나오던 참이었다. 아마 4학년, 아니면 5학년쯤 되었을까? 호리호리한 아이는 오른쪽 옆구리가 아픈지, 그곳에 손을 짚고 있었다.

  아이는 나를 보고 수줍게 웃더니, 가볍게 인사를 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인사에 약간 당황했다. 가끔 동네에서 어린아이들이 생판 모르는 나에게 인사를 할 때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 나이의 아이가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어쨌든 나도 미소를 지으면서 아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이에게 뭔가 말을 해줘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허리가 아픈가 보구나. 병원에 가야겠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어색했다. 아이는 몸이 아프니까 조퇴를 한 것이었고,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아이의 보호자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통증을 느끼면서 천천히 걷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를 뒤로하고, 나는 빠르게 걸었다.

  마침내 근처 공원에 도착했다. 이 공원의 오전 시간을 채우는 이들은 모두 늙은 사람들이었다. 돈을 벌어야 하는 노동 현장과는 동떨어진 잉여 인력의 사람들. 찔레꽃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할머니 하나가 효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날 가요를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공원에 단 한 그루의 찔레꽃 나무가 있기는 했다. 그 찔레꽃이 져버린 지도 이미 오래, 공원에는 스산하고 쌀쌀한 가을의 기운이 느껴졌다.

  산책에서 돌아온 다음에 나는 여름 내내 틀었던 선풍기 청소를 하기로 했다. 선풍기의 날개를 분해해서 세제로 깨끗하게 씻었다. 모터 안쪽은 붓으로 먼지를 털어주었다. 회전축에 기름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루에 한 편씩 써야 하는 동시가 있었다. 동시 제목은 '조퇴'였다. 나는 아픈 허리에 손을 대고서 천천히 걷던 그 아이를 떠올렸다. 아이가 걷는 그 길과 돌아갈 집에 대해서, 그 아이의 마음에 대해서 써보기로 했다. 그렇게 오늘의 동시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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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온 날들보다


1.

  저는 암 말기 환자입니다. 요새 들어 글 쓰는 일이 재밌어졌어요. 그래서 공모전 이곳저곳에 글을 보내고 있거든요. 그런데 글을 너무 열심히 쓰다보니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너무 피곤합니다. 저는 어떻게든 공모전에 당선이 되고 싶어요. 이렇게 무리를 하면서 글을 써도 될까요?


2.

  나는 불교 신자도 아니면서, 정토회 회원도 아니면서, 정토회 지도 법사인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읽은지가 10년이 넘었다. 사람들의 고민 상담과 같은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 스님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재밌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읽은 '스님의 하루'에는 시한부 환자의 고민이 올라왔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생의 시간을 글쓰기에 전심전력으로 쏟고 있었다. 나는 과연 스님이 무어라고 했을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에 대한 법륜 스님의 답변은 올라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무얼까 궁금해하는데, 내가 들르는 문학 커뮤니티에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올라왔다. 뇌종양 진단을 받은 30대 남자는 자신의 글을 공모전에 열심히 보내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등단해서 책을 내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그는 결혼했고, 아이가 있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가 그 아이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이 어쩌면 유일한 유산이 될 것 같아서라고 했다.    

  처음에는 심드렁하게 무슨 낚시글인가 하고 읽다가, 짧지 않은 행간에서 기이한 진정성이 느껴졌다. 내가 그것을 느낀 부분은 바로 이런 구절에서였다.

  '내가 살아온 날들보다 더 오래 남게 될 글을 쓰고 싶다'

  아마도 글을 쓰는 이들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바람이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죽은 후에도 살아남는 글에 대한 간절한 바람. 사실 바람이라기보다 그것은 어쩌면 치열한 욕망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는, 많은 사람이 돈에 대한 열망으로 진저리를 치는 것과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그것의 차이는 얼마나 될지 헤아려본다. 

 
3.

  톨스토이의 단편 '주인과 일꾼(Master and Man, 1895)'에는 뼛속 깊이 돈에 물든, 사실은 환장했다고 말하는 게 맞는 부자 바실리가 나온다. 내세울 것 없는 부모 아래에서 자란 그는 오로지 돈에 대한 집착과 뛰어난 수완으로 나름의 부를 축적했다. 그에게는 매우 충실한 일꾼 니키타가 있다. 그런 니키타에게는 한 가지 단점이 있는데, 술만 마셨다 하면 도지는 술주정이었다. 일을 하면서 받는 새경을 술 때문에 탕진하느라 니키타는 아내와 자식에게도 천덕꾸러기 신세이다. 게다가 인색하고 교활한 주인 바실리는 니키타의 술병을 빌미로 새경을 깎아 싼값에 일꾼으로 부린다.

  바실리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재산을 불릴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눈발이 흩날리는 날, 바실리는 미리 봐둔 숲을 사기 위해 길을 떠난다. 원래 혼자 가기로 한 길은 아내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니키타를 마부로 데려가게 된다. 예정대로라면 바실리가 숲의 주인을 만나기로 한 장소에는 반나절이면 도착할 터
였다. 그런데 이 여정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거래장소에 도착하려는 바실리의 조급함 때문에 틀어지기 시작한다. 바실리는 이정표가 있는 대로변의 길 대신에 조금 더 빠른 지름길로 가라고 니키타에게 명령한다.

  바실리가 더 빨리 그 숲에 도착하려는 이유는 그 숲을 사려는 경쟁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빠르게 가야만 했다. 그에게는 물건의 가격을 교묘하게 후려쳐서 많은 이득을 남기는 나름의 장사 수완도 있었다. 어떻게든 그 숲을 사고 싶다. 그 숲에서 나오는 땔감이며 이런저런 것들은 자신의 재산을 더 크게 불려 줄 것이다. 바실리는 거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차 있다. 점점 더 세지는 눈발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름길로 들어서면서 계속 헤매고, 날은 점점 더 어두워진다. 바실리와 니키타는 목적지와 동떨어진 인근 마을에서 잠시 멈춘다. 그들을 환대한 마을 유지의 가족은 하룻밤 유숙하고 가라고 여러 번 권유한다. 하지만 바실리는 완강히 거절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반드시 사야 할 숲과 그것이 가져다줄 돈 생각밖에 없었다. 니키타는 눈과 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겨우 녹이고는, 주인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길을 떠난다. 니키타의 그런 모습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떠난 길은 점점 더 심해지는 눈보라 속에서 예기치 못한 파국을 향해 간다. 두 사람은 길을 잃는다. 한밤중이었고, 말은 지쳐서 움직이질 못했다. 바실리는 왜 자신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머물지 않았을까 자책한다. 물론 그것은 돈 때문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세찬 눈발이 휘날리는 길 위에 내다버릴 지경에 이르게 만든 그 돈에 대한 집요한 집착. 서서히 덮치는 죽음의 손길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쌓아온 재산과 앞으로 더 불릴 수 있는 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이 단편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나는 소설의 결말을 말하지는 않겠다. 소설의 결말은 톨스토이의 인본주의적인 사상으로 잘 봉합되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결말보다 주인 바실리의 내면 묘사가 매우 흥미로웠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인간이 보여주는 사고의 흐름, 그릇된 판단, 오만과 편견. 바실리의 온 마음을 옥죄는 것은 돈이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명예나 지식이나 뭐 다른 것들일 수도 있다.      

  나는 돈에 대한 바실리의 탐욕을 비웃었다. 어찌 저리도 어리석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나에게는 바실리의 돈과 같은 것이 없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떻게든 끄적거리게 되는 이런 글에 대한 것은 어떠한가? 말기 암 환자가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잊게 만드는 것, 어쩌면 생의 남은 시간 동안 아내와 아이와 보내는 것이 유익할 남자가 기꺼이 그것에 자신을 내던져 버리는 것. 거기에는 글쓰기가 있었다. 글쓰기는 구원처럼 보이지만 속박이고, 어쩌면 저주인지도 몰랐다.

  내가 살아온 날들보다 더 오래 남을 글을 쓸 수 있을까? 무수히 많은 이들이 그 질문에 기꺼이 자신의 삶을 걸었고,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거기에는 옳거나 그르다는 가치판단이 놓여있지는 않다. 다만 선택이 있을 뿐이다. 영화사의 기념비적 인물로 남은 위대한 감독이며 배우 오슨 웰스(Orson Welles, 1915-1985)는 말년에 다큐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영화라는 요망한 것이 내 인생을 망쳤다, 고. 그 말을 할 때 웰스의 눈은 붉어졌고, 곧 눈물이 고였다. 나는 이제 그의 괴로운 독백을 가끔 떠올리면서 이해하고, 가슴을 치며, 또 하루의 끝에 다다른다. 무언가에 사로잡힌다는 것의 대가는 때로 그렇게 잔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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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먹다


1.
 
  돌로 된 것 같은 바닥에는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금이 쫙쫙 가 있었다. 그뿐이었다.


2.

  동시 쓰기는 이제 17편에 접어들었다. 이게 하루에 한 편 쓰는 일도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밝고 긍정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그런 시들은 아니다. 그런 시들을 쓰고 싶지만 써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힘들고 괴롭고 서늘한 아이의 내면을 탐색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작업이 글을 쓰는 나 자신에게 관조의 힘을 갖게 해준다. 이렇게 쓰다 보면 동시집 공모의 요건인 50편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쓰고 싶은 글과 공모전의 심사 위원이 뽑고 싶은 글 사이의 간극을 계속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이렇게 계속 써나가는 것이 맞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지난주, 동화 공모전에서 물을 먹었다. 뭐랄까, 그냥 기분이 또 바닥이 된다. 어떤 글을 써야 하는 거지? 물론 내가 동화 작가가 되려는 것도 아니고, 뭐라도 써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쓴 것이기는 하다.

  가끔은 꿈이라기보다는, 그냥 단 하나의 장면만으로 끝나는 그런 것이 있다. 공모전 발표를 앞두고도 그랬다. 회색의 돌바닥인지, 거기에는 금이 가서 쩍쩍 갈라져 있었다. 아, 떨어졌구나. 단번에 알 수가 있었다. 이걸 뭐 예지몽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기분 나쁜 일이 생기기 전에는 그런 꿈을 자주 꾸곤 한다.

 
3.

  요새는 일하는 동안 오디오북을 틀어놓는다. 어제는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크리톤', '파이돈'을 5시간 동안 이어서 들었다. 겹치는 이야기가 연달아 나오니까 좀 지루한 느낌도 없잖아 있다. 소크라테스가 영혼에 대해 설파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하구나 싶다. 영혼과 사후 세계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보여주는 소크라테스는 윤회 사상도 믿는 듯하다. 살아서 악행을 한 사람은 저급한 동물로 태어난다느니 하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리스 철학이나 인도의 힌두교, 거기에서 뻗어 나온 불교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크라테스는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과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러므로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줄 수 있는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친구와 제자들은 어떻게든 탈옥하라고 했지만, 그는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을 부드럽게 질책한다.  

  뉴스를 보는데, 가슴 아픈 사건이 나왔다. 지역 축제에 자원봉사 하러 갔던 엄마와 중학생 아들이 트럭에 치여 사망한 사건이다. 60대의 트럭 운전자는 페달 오조작을 인정하고, 구속되었다. 그런 뉴스를 들으면 하루 종일 무언가가 마음에 걸린다. 단 한 번의 실수가 가져온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대해서 생각한다. 죽은 후의 세계가 있다면, 그 엄마와 아들이 정말로 좋은 곳에 가기를 바랄 뿐이다.

  문득, 나는 사후 세계를 믿는지 생각해 본다. 때로는 천국이 있을 것 같다가, 또 어떤 때는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결국 사후 세계에 대한 숙고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것으로 흐른다. 좋은 글을 쓰고 싶고, 그것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보고 싶다. 어찌 보면 소박한 꿈 같기도 한데, 이걸 이루는 것이 무척 힘들게 느껴진다.  

  아무튼 또 물을 먹었다. 올해 결과를 확인해야 할 공모전은 이제 3개가 남았다. 해를 넘겨서도 물을 먹을 일이 있을지 모른다. 물 먹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 되뇐다. 금이 가서 쩍쩍 갈라진 바닥에 잘박잘박 물이 출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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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꽃이 질 때


1.

  엊그제는 동시 공모전에 낼 시들을 골라서 응모했다. 그 공모전은 온라인 응모라서 참으로 편했다. 10편을 내는 것이었는데, 내고 보니 맨 처음의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제출한 원고의 변경이 쉽지가 않았다. 변경 과정에서 자꾸 오류가 나서, 그냥 제출을 취소하고 다시 접수했다. '어차피 안될 것이다'와 '어쩌면 뽑힐지도 모른다' 사이에서 어쨌든 동시 원고를 냈다.

  동시를 쓰면서, 나는 가상의 독자를 상정하기보다는 그냥 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느낌으로 써나갔다. 그것이 의외로 편했다. 글을 쓰는 작업이 작가 자신에게 가장 유익하고 즐겁지 않다면, 글쓰기는 별다른 쓸모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버려진 시간처럼 느껴졌던 2년 동안의 시 습작 기간이 도움이 되었다. 시 속에 화자를 설정하는 것, 사물과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 이런 것들이 동시를 쓰면서 다시금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이번 주에는 지난달에 응모했던 동화 공모전의 결과 발표가 있다. 그냥 장려상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또 떨어져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발표가 나는 날에도 아마 동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50편을 내야 하는 동시집 원고는 이제 9편을 채웠다. 어떻게든 써내지 않을까 싶다. 자꾸만 머리 복잡하게 이걸 왜 하나 생각을 하면 답이 나오질 않는다. 지금은 동시를 써야 할 때인가 보다, 하고 쓰고 있다.


2.

  지난주에는 에어컨 필터를 청소하고, 에어컨에 커버를 씌웠다. 올해도 덥기는 했지만 의외로 여름이 선선히 물러선 느낌이다. 작년에는 지독한 늦더위로 9월 말까지 에어컨을 켰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남은 것은 선풍기 2대, 그건 아직은 낮이 더우니까 좀 더 있다 들여놓을 생각이다. 선풍기 가운데 한 대는 15년 된 것인데, 목 부분이 부러져서 스카치테이프로 칭칭 감아두었다. 그 모양새가 참으로 볼품없다. 하지만 모터가 멀쩡히 돌아가는데, 버리는 것도 아까워서 쓰고 있다. 고장 나면 버려야지 싶지만, 고장이 나질 않는다. 그러고 보면 지금은 죄다 중국산 일색인 소형 가전제품이 국산이었던 시절은 참으로 만듦새가 좋았다.

  오늘은 마음먹고 생두를 볶았다. 원두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는 바람에 다시 커피를 볶아서 먹기로 했다. 오늘처럼 날이 선선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 로스팅하기에 좋은 날이다. 이건 할 때마다 그냥 사먹는 게 낫지, 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엄청난 연기와 가스불의 열기, 한 이틀은 집안에서 빠지지 않는 미친 듯한 커피 냄새 때문이다. 다시 원두를 사는 것은 오늘 볶아놓은 1kg을 다 먹고 난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3.

  옆 단지 아파트에는 멋진 배롱나무들이 있다. 여름 동안 그 나무의 꽃들이 피어있는 것을 보러 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 주말에 모처럼 시간이 나서 꽃들을 보러 갔다. 한창 고왔던 때의 꽃들은 지고, 이제는 빛바랜 배롱나무꽃들이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그것이라도 보았으면 되었다, 고 혼잣말을 했다. 이렇게 또 여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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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 오초완


1.

  9월 말일이 마감인 동시 공모전은 써내야 할 응모 편수가 10편이다. 공모전 공고를 본 것은 8월이 끝나갈 무렵.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채우나 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동시를 쓰는 것이 재미있었다. 하루에 2편을 쓰는 날도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10편을 채우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좀 더 써서 나중에 동시집으로 묶으면 어떨까 하는. 물론 그냥 시집도 잘 안 팔리는 판국에 동시를 누가 얼마나 사서 볼까 싶기도 하다. 차라리 동화는 나름의 시장성이 있어서 동시보다는 낫다. 큰 상금이 걸린 동화 공모전도 여럿 있다. 그게 다 시장의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굴러다니는 동시집 몇 권을 읽다가, '참 재미없네' 하고는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저런 동시는 쓰지 말아야지, 하는 깨달음을 주는 책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렇다. 동시가 재미있어야 하나? 밝고 희망을 주는 그런 메시지만을 아이에게 주어야 하나? 나는 그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했다.

  처음 쓰기 시작한 동시는 짐짓, '너희들, 세상의 밝은 면을 보아라' 하고 조금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써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시를 쓰는 것이 싫어졌다. 점점 내가 쓰는 동시에는 삐딱하고, 외롭고, 괴로운 아이의 목소리가 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매우 솔직한 동시라고 생각했다. 물론 솔직함이 재미와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대중성과는 더 멀어지고 있는 길인지도 모른다.  


2.

  원래 목표는 동시는 그냥 써보고, 동화 부문에 응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동시를 쓰다 보니, 소설 쓰기로의 전환이 되질 않는다. 2년 동안 시를 쓸 때도 그랬는데, 압축하면서 좁게 들어가는 시를 쓰는 동안에는 일반적인 산문 쓰기가 잘 되질 않았다. 반대로, 서사를 확장하고 풀어서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시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나에게 시와 소설을 동시에 쓰는 건 양립 불가능한 작업 같다. 그러니 지금 동화를 써야 하는데, 도무지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다.

  이 와중에 동시집 공모전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50편의 동시를 써서 내야 한다. 기한은 10월 31일까지. 요즘 동시를 하루에 2편을 쓸 때도 있으니까, 어떻게 규칙적으로 매일 써낸다면 마감일에 맞춰서 원고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써내는 것이 맞는지,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그쪽, 그러니까 아동문학 분야도 나름대로 준비하는 지망생들이 많을 것이고 내봤자 안될 거 같기도 하다. 뭔가 김수영 문학상에 2년 동안 시 써서 보냈다가 떨어진 그때의 기분이 스멀스멀 느껴지는 듯도 하다.

  이것이 된다, 하는 확신을 가지고 글을 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공모전에 글을 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떤 식으로는 감정의 파고를 겪는다. 오늘, 문학 커뮤니티에서 읽은 우스갯소리는 이랬다. '글 잘쓰는 사람의 사주에는 반드시 문곡귀인(文曲貴人)이 있는데, 내 사주에는 그것이 있다!' 대충 알아듣기로는 문곡귀인이란 글로써 이름을 날리게 하는 명운인 모양이었다. 지망생이 여북 답답하면 그런 것에나 의지할까 싶어서 쓴웃음이 나왔다. 요새 드는 생각은 인생의 7할, 아니 8할 정도는 그냥 운의 영역 같다. 나머지 2할은 재능이나 노력이 마구 욱여지는 무언가일 테고.

 
3.

  어떤 사람이 문학 커뮤니티에 자기 기록처럼 '오초완'이라고 올리는 것을 보았다. '오초완'이 뭐지? 하고 궁금해하다가 나중에서야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오늘의 초고(草稿) 완료'의 줄임말이었다. 무슨 소설을 어떻게 써내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투지 하나만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면에서 글쓰기는 시간과 체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게 거의 매일 '오초완'이라고 써낼 정도라면, 습작의 여건이 괜찮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위층에서는 보름째 인테리어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집안을 깨부술 듯 울리는 소음은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집 앞 놀이터에서는 선선해진 날씨에 아이들이 악다구니를 쓰면서 논다. 노안으로 침침해진 눈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시간은 저녁이나 되어서이다. 오늘도 동시 한 편을 써냈다. 새롭게 동시집 공모전에 낼 시를 세어 나간다. 50-1. 49편이 남았다. 그걸 써낼 수 있을지는 지금은 모른다. 10월 말일까지 매일 '동시, 오초완'을 해내다 보면 가능할지도. 이건 마치 실수로 잘못 탄 기차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 같다. 나는 이 기차의 종착역에 무엇이 있을지 전혀 알지 못한다. 어쨌든 지금은 기차에서 내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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