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어느 해였던가? 신춘문예 당선자의 소감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당선자는 기차를 타고 여행 중에 당선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홀로 떠나는 여행길에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듣는 건 참 좋겠구나. 혼자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오늘, 나는 우체국에서 어느 신문사에 보내는 신춘문예 원고를 등기로 부쳤다. 이십 대의 어느 날이었던가, 그때 보내고는 나는 신춘문예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랬다가 어제 문득, 올해 신춘문예 일정을 확인해 보고는 응모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과연 어떻게 될까? 에이, 거긴 문예창작과 애들이 목숨 걸고 글 써서 달려드는 전쟁터인데 내가 뭘... 그래도 내가 써놓은 글을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세상에 내보내는 일은 나름 뿌듯하다.
영상원에서 공부할 때, 나는 연극원 수업을 좋아해서 그쪽 수업을 꽤 많이 들었다. 내가 들은 수업 가운데에는 서사창작과 수업도 있었다. 수업 과제 때문에 동물원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법원 재판을 방청한 기억도 난다. 소설가 천운영 씨가 강의했던 수업이었다. 천운영 씨는 소설 쓰기의 기본을 '취재'로 생각했다. 그 수업의 말미에 내가 무슨 소설을 써서 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소설은 현실에 천착한 글쓰기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내가 그 수업에서 얻은 나름의 수확이었다.
서사창작과 수업에서는 극작과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기억나는 것이 시 창작 수업이었는데, 매주 시를 한 편씩 써와서 발표했다. 그렇게 시를 써서 발표하면 수강생들은 돌아가면서 그 시에 대해 평을 한다. 그것을 '합평'이라고 하는데, 그 시간이 수강생 각자에게 절대로 평온한 시간은 아니었다. 다들 자기 글에 나름의 자부심이 있는 애들이, 남이 자기 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다. 내가 그 수업 시간에 확인한 것은 나에게는 시에 대한 재능은 없다, 는 사실이었다. 그 수업 시간에 만났던 두 사람은 이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시인과 소설가가 되었다. 세월은 그렇게 빨리 흘러가 버렸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이란 이 사자성어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은 언젠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뜻이다. 나는 기억이 사라져가는 엄마에게 매일 사자성어를 외우게 하는 공부를 시킨다. 아직 언어에 대한 인지능력만은 손상되지 않고 온전한 우리 엄마는 대략 서른 개의 사자성어를 틀리지 않고 다 맞춘다. 거기에는 '낭중지추'도 있다. 나는 엄마에게 그 사자성어의 뜻을 말할 때마다 기묘한 서글픔을 느낀다. 과연 세상이 재능을 가진 사람을 다 알아주는가? 재능이 있다고 해서 모두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글을 쓰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재능만이 아니다. 문운(文運)도 따라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자신의 글쓰기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그저 버겁고 괴로운 과업이 될 뿐이다. 아마도 신춘문예 당선도 그 '문운'이라 부르는 것에 들어갈 것이다. 나는 우체국에서 받은 등기우편물 영수증의 번호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내게 그건 마치 로또 복권의 번호 같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등단'이라는 장밋빛 꿈에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들이붓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네 글은 말이다. 디테일이 좀 부족해."
시나리오 창작 수업을 강의하셨던 칠순의 소설가 선생님은 나에게 딱 그 한마디만 하셨을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글을 쓸 때마다 노작가 선생님의 그 말을 목에 걸린 가시처럼 되새긴다. 아마도 내가 받은 창작 수업은 그 짧은 조언만으로도 족한지도 모른다. 오늘 쓰는 이 글에는 디테일이 살아있을까? 이런 평범한 수필을 써 내려가는 일도 늘 그리 쉽지는 않다. 나에게 글쓰기는 언제나 바닷가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찾는 숙제 같다. 때론 힘들고 지루하지만, 재미도 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좀 어떤가. 오늘도 나는 이렇게 글 한 편을 써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