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기 전날의 봄


뽀얀 얼굴의
여중생 두 명
재잘거리며
지나간다

휠체어 탄 할머니
입을 벌리고
느린 생의 마지막을
힘겹게 들이마셔
기이한 바니타스(vanitas)

고압송전탑에
덩그마니 전기기사는
시린 벚꽃에 누워
목숨을 걸고 일하는 건
저런 거야

비가 오기 전날엔
늘 얼굴이 저리지
갉아먹힌 신경이
긁어대는 후유증

내일 날씨는 어때

인공지능이 알려주는
남자 성우의 단정한
목소리는 이상하게
잠겨 있어
비 올 확률 백 퍼센트
비 오기 전
흐린 오후의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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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萬愚節)


아픈 발을 끌고
산책을 나간다

오리털 잠바에
반바지를 입은
남자는 담배를
물고 천천히
달리는
검정 반팔의
영감은
추워 보여

덜그럭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흰 천에 꽁꽁 감긴
시신 한 구
남자 둘이
차에 싣는다

저걸 보려고
사나운 꿈자리
오늘은 별일
없나 했지

만우절엔
장국영 생각이 나
왜 죽었을까 하고

청춘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니
한숨만 나와
4월의 바보

무작정
사랑에 돌진하는
등신 같은 짓은
그만둘 때도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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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커피


이 커피에서는
흙냄새가 나는군
어쩌면 피 냄새인지도
그 나라는 계속해서
전쟁 중이지

이 커피가 비싼
이유는 사람들의
목숨값 때문인지도

총구멍 앞에서
커피 농부는
나무를 베어내며
마약이 피가 되어
흐를 땅을 일구지

그저 시커먼
쓰디쓴 물이건만
구불구불
기이한 글의
미로를 만들어

기근과 고통
분노와 슬픔
물질과 욕망의
서사가 흐르는
오늘의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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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필 때


그대를 만난 봄을
기억한다 벚꽃이
피어날 때

수줍게 웃으며
조곤조곤한 말투로
오손 웰스와
하워드 혹스를
이야기했지

영화가 우리의
뇌수를 타고
흐르며
그것이 중독인지도
모르고

너무 오래 앓았어
빈곤과 잊혀짐
누군가 그대의
글을 아직도
읽고 있을까

언젠가 지구는
형편없이 쪼그라든
백색왜성의 태양에게
잡아먹힌다는군

어차피 우리의 글은
살아남지 못해
그래도 봄바람에
미친 머리카락
춤추는 벚꽃잎을
좀 봐봐 모든
사라지는 것들

벚꽃 나무 그늘
아래 그대의
마지막 숨결을
더듬어 기억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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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당신은 말야
틈이 없어
비루한 이 몸으로는
삐기고 들어갈 수
없어 그래서
바늘이 되면
어떨까 생각했지

당신도 인간이니까
어쨌든 틈이 있을 거
아냐 바늘이 되어
들어가면 콕콕
찔러줄 테야

작게나마 비명을
지르기나 할까
당신은 이기적이고
냉정하지 좀
재수가 없어

바늘 따위 똑,
하고 분질러 버리는
철벽의 유전자
무작정 비참하더군

포대자루 감자칩 한 봉지
식탁에서 삭제시켰지
그제서야 알았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그냥 인생의 허기였어

부러진 바늘 하나
마음에 품고
잠을 청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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