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의 소감을 읽은 기억이 난다.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기차여행 중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글이었다. 와, 여행 중에 저런 기쁜 소식을 들으면 정말 좋겠네. 나는 언젠가 내가 당선 소식을 들을 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난달, 정말 오랜만에 신춘문예에 응모를 해보았다. 문예창작과 애들이 목숨 걸고 달려드는 전장에 나 같은 신참은 구경이나 하는 거지. 신춘문예는 뭔가 문운(文運)의 끝판왕 같다고 생각해서, 그래도 나에게 문운이 있는가를 시험해 보는 마음이었다.
언제쯤 심사를 하고 통보를 하는지 궁금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나는 우연히 문학 관련 커뮤니티를 알게 되어서, 그쪽에서 신춘문예 관련 소식을 들었다. 이번에 내가 신춘문예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이러하다.
1. 예심은 마감 후 5일에서 7일 이후에, 본심은 그로부터 일주일 되는 시점에 이루어진다.
2. 당선작 선정은 심사위원들이 본심에 올라온 응모작들을 논의하는 그날 저녁에 결정된다. 본심은 주말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3. 본심 현장에 있는 해당 신문사의 문화부 담당 기자는 자신의 휴대전화로 당선자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므로 당선 통보 전화는 010 번호로 뜬다.
4. 당선자가 타 신문사에 중복 투고를 했는지, 또는 이전에 수상 경력이 있는지, 기존 작품의 표절 시비가 있는지를 검토하는 과정이 있다.
5. 신문사에 따라 다르지만, 당선 통보 후 당선자들 모이게 해놓고 사진 찍는 곳도 있다. 1월 1일 신문에 내보낼 기삿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6. 신문사는 당선자들에게 추후 작품을 게재할 지면을 할당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신춘문예의 한계이기도 하다. 메이저 일간지 당선자들의 작품집이 4월경에 나오기는 한다.
7. 당선자들의 출신 학과는 문예창작과가 주를 이룬다.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신춘문예 당선자들 가운데, 문인으로 활동을 이어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8. 등단 작가로서 자기 작품을 실어줄 출판사를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신춘문예보다 문예지 공모를 통해 등단하는 것이 더 낫다.
신춘문예 당선을 간절히 바라는 문학도들의 글을 보면서, 문학을 사랑하는 그들의 열정과 노력에 나는 새삼 놀랐다. 그걸 보면서 내 마음속에 떠오른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글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이들의 유일한 통로가 '등단'이라는 방식밖에 없는 것일까? 신춘문예든 문예지든 당선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공모전의 심사위원들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당선이 되려면 심사위원들의 취향과 시대의 조류에 맞춰서 글을 써내야 한다. 무슨 족집게 과외 공부를 하듯 특정 창작 교실, 어느 서점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한다. 교수와 제자, 선배와 후배, 이리저리 알음알음 그 세계는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그 세계의 생태계에 진입하기 위해 그 글쓰기 틀에 맞추어서 잘 써내는 것이 당선의 지름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의 신춘문예 당선작과 심사위원들의 선정 이유를 읽었다. 내 기준으로는 도대체 이런 작품을 왜 뽑았을까 싶은 것도 있었다. 심사위원들의 평도 납득이 가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현학적으로 표현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걸 읽고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이 시대의 한국 문학을 이해하기에는 내가 늙었구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낼 수 없겠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치지 않고서 작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은 별로 없다. 메이저 문학 출판사에서 투고를 받는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름도 없는 신인 작가의 작품이 출판되는 일은 복권 당첨과도 같다. 기성 작가들의 글도 실어주기 어려운 판에 등단도 안 한 사람의 글을 받아줄 리가 없다. 최근 들어 새롭게 뜨고 있는 웹소설은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이들에게는 이질적인 것으로 비친다. 물론 웹소설 작가들을 폄하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웹소설 작가는 글로써 돈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이 순문학 작가보다 크다. 순문학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과연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될까? 글을 쓰는 사람에게 문학을 부업으로 하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전업 작가로 살아가는 삶은 사실 환상에 가깝다.
나는 지금의 한국 문학에 별다른 애착도 갖고 있지 않다. 중견작가로 주요하게 언급되는 한강의 소설은 나에게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 늘어지는 만연체의 흐느적거리는 문체는 참아내기 어렵다. 한강의 소설들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부풀려 있다. 그럼에도 해외에서 한강의 소설들이 인정받는 이유는 '번역'이라는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숙의 '외딴방'이 과거에 해외에 번역되어 누렸던 영광은 한강에게로 갔다.
2021년에 신경숙은 신작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내놓았다. 얼마 전에 나는 그 책을 읽으려다, 첫 페이지에서 책을 그냥 덮었다. 나는 더이상 신경숙의 문체를 견뎌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경숙은 과거 자기 작품을 둘러싼 표절 시비에 대해 명확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신경숙에 대해 그 어떤 평론가도 대놓고 비판한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다들 얼굴 아는 사이니까 그랬겠지. 나는 명색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저리도 부끄러움이 없고 자존감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신춘문예에 관한 글에서 길게 돌아 여기까지 왔다. 올해 신춘문예 당선자에 대한 통보는 거의 다 끝났다. 내년 봄에는 문예지 공모가 있다. 한국에서 작가가 되려면 어쨌든 '등단'이라는 바늘귀를 거쳐야 한다. 어쨌든 글은 계속 써야지. 나는 올 한 해 동안 써지지 않는 글을 부여잡고 고군분투했다. 영화 글은 거의 써낼 수가 없었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습작이라고 끄적거린 글들은 무슨 넝마쪼가리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뭘, 어떻게 써야지? 그럼에도 나는 '글쓰기'라는 무한도전을 멈출 수가 없다. 미래의 어느 날, 내가 나의 글과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그저 그곳의 풍광이 너무 쓸쓸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