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


어제는 치과에 다녀왔다 입술의 봉합사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말수가 적고 신중한 치과 의사 선생이
상처 부위를 찬찬히 잘 살펴보았다 실밥 뽑는 것도
따끔하게 아프다 흉터가 생길 것 같냐고 물으니,
그렇지는 않다고 말한다 1주일 뒤에 다시 보기로 하고
치과를 나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을 누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젊은 아가씨가 탔다 작업용 앞치마를 입고
대걸레를 들고 있었다 1층인가 보네, 나는 얼른 내렸다
그런데 좀 낯설다 2층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은 열린 상태였다
나는 그냥 타려다가 열림 버튼을 눌렀다 예전에 어떤 여자가 안에서
닫힘 버튼을 누르는 바람에 문에 끼일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보더니, 열림 버튼 눌렀어요, 아가씨가 말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타서는 아가씨에게 그 여자 이야기를 했다
매너 없는 사람이네요, 아가씨가 명쾌한 말투로 말했다
맞아, 매너가 없어, 아가씨는 매너 있는 사람이네요, 나는
웃으면서 그 젊은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이십 대 초반의
그 아가씨에게서는 젊음과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마침내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1층을 가리켰다 나는 아가씨에게
먼저 내리라고 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아가씨가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아가씨는 건물의 왼쪽 방향으로
금세 사라졌다 아마도 그녀는 이 건물 어느 가게의
종업원일 터였다 나는 아가씨가 사라진 모퉁이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그것은 마치 내 손에 있다가 어느새 사라진
젊음의 환영(幻影) 같았다 그 젊음이 나에게 있었을 때,
나는 그렇게 많이 불안하지도, 초조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사라진 세상의 언어처럼, 무겁게
닫힌 입가의 주름으로 남았을 뿐이다 나는 다시 한번
아가씨가 사라진 그 모통이를 바라보았다 겨울 햇살이
차디찬 바람에 부서지며 조용히 우는 소리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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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역성(非可逆性)


불행 중 다행이야 얼굴뼈에 금이 가지도 않았고
이가 부러진 것도 아니잖아 동생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렇게 말하면서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만 어째 그게 쉽지가 않다 찢어져서
꿰맨 입술에는 봉합사가 너덜거리고 있고, 얼굴에는
듀오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철사로 이어 붙여놓은
치아는 계속 욱신거린다 그냥 가만히 정류장에서
버스나 기다릴 것이지, 뭐하러 좀 걸어간다고 길바닥에
넘어져서는 이렇게 고생을 하나, 그 생각부터 해서
땅바닥에 찰떡같이 들러붙는 운동화 때문이다, 하는 생각,
아니다, 거지 같은 SUV 차량을 피하려다 넘어졌으니
그걸 운전한 놈이 웬수다, 까지 오만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돌아가고 싶다, 그 재수 없는 사고 이전의 시간으로,
그렇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군, 인생의 많은 것들은 결코 되돌릴 수가 없어
흰머리를 아무리 뽑아도 검은 머리는 나지 않고,
눈꺼풀은 시간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하지 어쩔 수 없는 것 투성이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로 하자 아스팔트 바닥에
되게 넘어지고도 얼굴이 부서지지 않은 것을,
아직까지 앞니가 붙어있는 것을, 마침 큰 병원이
가까이 있어서 응급실에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을,
젠장,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냥 혼자
잘근잘근 화를 씹게 된다 인생의 그 빌어먹을
비가역성(非可逆性) 따위, 그렇게 회한과 분노와 안도가
뒤엉킨 침울한 성탄 전야에 캐럴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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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雪上加霜)


올해 내가 응모한 마지막 공모전의 결과를 확인했다
떨어졌다 기분이 더럽게 나쁘다, 아니 나쁘다 못해
허무함을 느낀다 며칠 전, 꿈을 꾸었다 집에 들어가는데,
아파트 동호수가 적힌 문패가 보이질 않는다 심지어
아파트가 거의 폐가 직전의 흉한 모습이었다 집에서는
어느 이상한 여자가 무어라 지껄이며 나오고 있었다
참으로 괴이한 꿈이었다 조심해야지,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오늘은 병원에 갈 일이 있었다 진료
다 보고 약도 짓고, 이제 버스 타고 집에 가면 되었다
그런데 버스를 17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냥 운동 삼아서
좀 걷자, 그러고 좀 걷는데 식당의 주차장이 나왔다
마침 차가 나오던 참이었다 급하게 종종걸음을 하는데,
그냥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엎어졌다 안경이 깨지고,
얼굴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지나가던 어떤 아주머니가
일으켜 세워주며, 괜찮냐고 연신 물었다 얼른 치료받아야
겠어요,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빨리 버스를 타고
집에 가고 싶었다 그렇게 멍하니 10분 동안 정류장에
서있다가, 이대로 집에 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발길을
돌려서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은 의외로 한가했다
의사가 보더니 입술도 찢어졌고, 머리에 무슨 이상이 생겼는지
모른다고 CT를 찍자고 한다 CT를 찍었다 그런데 아무도
상처를 소독해주거나 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 구강외과 의사가
내려와서 봐야 한단다 1시간을 기다렸다 레지던트가 와서
흔들리는 이를 그냥 놔두면 치아가 빠질 수 있다고 한다
치과로 올라가서 철사로 이를 동여맸다 찢어진 입술도
꼬맸다 휘어진 안경테를 바로잡아서 겨우 얼굴에 걸쳤다
화장실에 들러서 얼굴을 본다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1925), 영화 속 총알에 안경이 부서진 아줌마
설상가상(雪上加霜), 참으로 더러운 꿈땜이다 치아는
겨우 붙여놓기는 했는데, 1달 후에나 이게 멀쩡한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왜 이렇게 기분 나쁜 꿈은
잘 꾸는지, 또 그런 건 왜 그렇게 기가 막히게 잘 맞는지
생각해 본다 문패도 없는 폐가 같은 집, 꿈에서 본 그 집이
꼭 지금의 내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얼굴은 마구 얻어터진
복싱 선수처럼 부어올랐다 이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그래도 다행이야,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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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님이 알려주신대


재수생 시절의 일이다 학원 선생 가운데 전직이
박수무당이었던 선생이 있었다 신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선생은 갑자기 신내림이 와서 무당이
되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당 노릇을
그리 오래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결국 본업인
학원 선생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학원생들에게
무당에게 점 볼 때 속아넘어가지 않는 법에 대해
간결하게 알려주었다 무당이 잘 맞추나 보려면
아주 최소한의 정보만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선생은 대개의 무당이 앞일에 대해서는 열 가지
가운데 한두 가지만을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것조차도 신령님에게 기도를 많이 해야 겨우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우리나라에서
제일 영험한 산은 계룡산, 이라고 엄숙하게 말했다
가끔 그 이야기가 생각나곤 했다 정말 무당이 앞날을
맞추기는 맞추나? 예전에 수원의 점집 골목을 찍은
TV 다큐를 본 적이 있다 거기에 나오는 늙은 무당의
일화가 재미있었다 그 무당은 하루 일과가 끝나면
다방에서 커피를 시켜다 먹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다방 마담에게 그날의 자기 수입을 은행에다
입금하는 일을 맡겼다 그렇게 마담을 믿고 통장을
맡겼는데, 그 마담이 나중에 통장을 털어서 도망가 버렸다
할머니 무당은 다방 커피를 마시면서 자신이 사기당한
일을 담담히 말했다 그러고는 커피 배달을 온 새로운
마담에게 통장을 내어주며 입금을 하라고 시켰다
이분은 믿으세요? 다큐를 찍던 PD가 무당에게 물었다
응, 얘는 나한테 사기 칠 애는 아냐, 그렇게 말하면서
무당은 호호호, 웃었다 신령님도 모든 걸 다 알려주는 건
아니군, 나는 점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그 늙은 무당의 느슨한 웃음 소리를 떠올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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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금치나물


인터넷으로 시금치 1kg을 샀다 주문한지 하루만에
박스에 담긴 싱싱한 시금치가 배송되었다 시금치가
깨끗해서 뿌리만 조금씩 다듬었다 커다란 스텐 냄비에
소금을 조금 넣고 물을 끓인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다듬어 놓은 시금치를 넣는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오래 삶으면 물크러진다 시간을 재보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손으로 시금치 잎을 만져보며 감을 잡는다
됐어, 이 정도면, 재빨리 시금치를 건져낸다
그릇에 받아놓은 찬물에 얼른 시금치를 넣는다
다시 또 한 무더기의 시금치를 냄비에 넣고는,
데친 시금치를 헹구어 낸다 그 사이에 시금치가
얼마쯤 물러지는지 살펴본다 냄비에서 시금치를
건져낸다 깨끗이 바락바락 주물러 헹구어 낸다
잎 사이에 모래나 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씻은 시금치를 있는 힘을 주어 물기를 꽉 짜낸다
대략 밥그릇 정도 크기의 덩어리 3개가 나온다
시금치를 무칠 양념을 준비한다 참기름병을 꺼낸다
나물은 참기름 맛으로 먹는 거지 참기름을 들이붓는다
진간장을 조금 넣는다 간은 소금으로 해야 깔끔하다
매실 엑기스를 조금 넣는다 간이 맞는가 본다 조금
싱겁다 집간장을 아주 조금 넣는다 대충 괜찮다
그런데 볶은 깨가 없구나 깨를 볶았어야 했는데,
그걸 볶으려면 깨를 씻어서 물기를 빼고, 두꺼운
팬에다가 볶아야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깨 좀 없으면 어때, 밀폐 용기를 꺼낸다 시금치나물을
두 개의 그릇에 나누어 담는다 무치지 않은 한 덩어리는
김치냉장고에 넣는다 이런저런 그릇 설거지가 기다린다
시금치를 나물로 먹으려면 이 번잡스러움을 감수해야 한다
나물이란 얼마나 비효율적이며 노동집약적인 음식인가
나는 한식의 미래가 암울하다고 생각했다 갈수록
사람들은 반찬 만드는 데에 시간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온갖 종류의 즉석 국과 반찬이 쏟아져 나오지만
나물은 어떻게 대체할 수가 없다 이것은 아주 순전한
노동의 결정체이다 나는 식탁에 앉아서 방금 무친
시금치나물을 밥도 없이 몇 젓가락이고 먹었다
달큰한 맛이 나는 시금치나물,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나는 맛, 하지만 이걸 또 해 먹으려면 결심을 해야하는
귀찮고도 번거로운 맛, 그냥 안 해 먹고 말지 하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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