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쓸 것인가 - 어떤 독서의 시대와 글쓰기


1.

  올해 초, 중앙일간지의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들을 읽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대화가 분명한 문장에 그 어디에서도 큰따옴표(" ")를 볼 수가 없었다. 그냥 나열된 문장 속에서 이것이 대화이겠거니 하면서 소설들을 읽어 내려갔다. 도무지 읽히지 않는 소설들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다. 요새는 이렇게 소설을 쓰나 보군. 인물들의 말과 생각은 문장들 속에서 정처 없이 떠내려가며 유랑하고 있었다. 그걸 제대로 정렬해 내는 것은 오직 독자의 몫이었다.

  불친절하군, 참으로 불친절해.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그 말을 자꾸만 되뇌었다. 도대체 이딴 유행은 누가 만든 것이며, 왜 그런 소설들을 써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을까? 나는 그것이 독자에 대한 철저한 기만과 무시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따옴표의 사용은 독자의 이해와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없애고 그냥 평서문으로 기술된 문장들 속에서 독자에게 인물들의 대화와 생각, 묘사를 온전히 구분해 내라고? 왜 독자가 그래야만 하는가? 우린 이렇게 쓸 거야. 그러니까 당신들은 어떻게든 읽으라고. 나에게 따옴표 없는 그 소설들은 거만한 선언처럼 들렸다.

  불친절한 것은 삭제된 따옴표뿐만이 아니었다. 서사가 실종된 소설에는 미문과 분위기만이 남아 있었다. 주인공인 젊은 여성은 원룸에서 고양이를 키우고, 이웃집 할머니와 소통하며 코코아나 마시는 소설들. 이제까지 내가 아는 소설이란 인물과 사건, 주제가 있는 명확한 세계였다. 그런데 이제 그 세계는 흐릿해져서 알아볼 수 없는 이상한 물체로 변해있었다. 아마도 작금의 소설에서 내가 느끼는 그러한 혼란스러움은 내가 살아온 시대와 문학적 경험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2.

  1980년대의 문학이란 사회변혁과 함께 굴러가는 수레바퀴와도 같았다. 강석경의 '숲속의 방(1985)'은 그 당시의 나에게 약간은 기이하고 공포스러운 독서 체험으로 남아 있다. 그만큼 그 시대의 분위기가 무거웠다는 뜻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는 운동권의 후일담 문학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시기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개인성에 대한 자각은 분명 이전 시대의 거대 담론에 포획된 개인과는 달랐다. 정치적 민주화는 사회와 대결했던 개인이 비로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개인의 부상(浮上). 내가 생각하기에 그 결정적인 계기는 1997년의 IMF 외환위기였다. 외세에 떠밀려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구조조정과 경기침체의 후폭풍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신경숙의 '외딴방(1995)'을 흔들리는 좌석버스 맨 뒷좌석에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일이 기억난다. 그 소설에는 상처받은 개인이 과거를 반추하며 만들어내는 나름의 울림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 신경숙은 그 시대를 통과하는 문학적 티켓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 티켓은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버려졌다. 신경숙이 다시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표절'이라는 치명적 오점보다도, 지금의 독자들이 더는 그의 소설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독자들이란 다름 아닌 20대와 30대의 여성 독자들이다. 쪼그라든 순문학 시장에서 여성 독자들은 쓰러진 집의 유일한 버팀목처럼 남아 있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소설을 써내는 것은 잘 알려진 생존의 비결이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2016)'이 보여준 성공은 얄팍한 문학적 성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 면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소설이 있는데, 양귀자의 '모순(1998)'이다. 양귀자는 대표작인 '원미동 사람들(1987)'을 통해 자신이 그려낸 주변부 세계에서 탈출했다. 작가는 이제 부촌인 평창동의 주민이 되었다. 그런 양귀자의 소설 '모순'이 보여주는 저력은 가히 놀라울 정도이다. 그리고 그 책은 2000년대의 여성 독자들을 지나, 지금은 책이 출간된 시기에 태어난 여성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모순'은 젊은 여성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사랑과 연애, 결혼을 이야기한다.

  양귀자에게는 먼 훗날 자신의 독자를 예견하는 선구안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모순'을 읽는 젊은 여성의 책상 위에는 요새 잘 나간다는 시인 고선경의 '샤워젤과 소다수(2023)'도 있을 것이다. 2026년에도 1955년생 작가의 책은 1997년생 시인의 시집에 밀리지 않는다. 내게는 이 기묘한 조화가 꽤나 경박스럽게 느껴진다. 내가 읽은 한국 문학은 이제 우리 사회의 부조리, 계층적 불평등을 말하는 대신에 페미니즘과 젠더 갈등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앞세우고 그것에 함입(陷入)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나올 출구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흐름에서 비켜선 이야기도 있었다. 나는 편혜영의 소설집 '사육장 쪽으로(2007)'가 보여준 중산층의 서늘하고도 허무한 초상을 기억한다. 편혜영은 매우 영리하게 계층적 서사와 여성의 이야기를 직조해 나갔다. 편혜영이라고 그늘이 없지는 않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몬순(2014)'의 표절 의혹은 아직도 해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편혜영은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공모전의 심사 위원으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내게는 그것이 고갈된 창작력의 대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애란을 빼놓는 것은 매우 서운한 일이 될 것이다. 김애란은 소설집 '비행운(2012)'을 통해 동시대를 통과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채롭고 폭넓은 서사로 풀어낸다. 그 이야기들은 유쾌하지만 부박(浮薄)하지 않고, 때론 서글프게 떠돈다. 어떤 면에서 김애란은 한국의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1938-1988, 미국의 단편 소설 작가)로 불리어도 손색이 없다. 나에게 김애란은 단편에 최적화된 작가이다. 이 작가에게 장편은 어쩐지 잘 맞지 않는 어색한 옷 같다.

    
3.

  결국 내게 남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이 시대에 한국에서 소설을 쓴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주류 서사는 여성 서사, 주변부의 서사는 성 소수자와 외국인 이야기가 자리 잡았다. 최근에 내가 흥미 있게 들은 단편 소설의 아이디어는 이주 여성(移住女性)의 서사였다. 글을 쓴 이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에서 그들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소재를 그러모았다. 그저 그런 일상적 이야기, 주제와는 확연히 다른 결의 이야기였다.

  내가 아는 그들의 이야기는 기껏해야 EBS의 프로그램 '다문화 고부 열전'에서 본 것이 전부이다. 그런 나와는 달리, 글을 쓴 이는 진짜 현실에서 이주 여성의 이야기를 보고 들었다. 그러한 현실성은 그저 이야기로 들었을 뿐인 관찰자의 시점에서는 결코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이 쓰는 이야기의 핍진성(逼眞性)을 획득하려면, 기자 출신의 작가 장강명처럼 취재를 열심히 하든가 아니면 자료 조사를 치밀하게 해야 한다. 이야기는 단순히 방구석의 모니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고 나서도 남는 문제는 있다. 나는 어떤 관점으로 쓸 것인가. 바로 그것이다.

  그 관점이란 어떤 면에서 글을 쓰는 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인생관, 살아온 인생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시대를 견디었고, 살아내었다. 그리고 지금도 통과하고 있다. 나만이 들려줄 수 있는 그 관점, 가치관, 인생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을 써내려고 하고, 써내는 중이다. 올해 상반기에는 단편 소설을, 지난 한 달 동안에는 SF 단편과 동시, 동화를 써서 공모전에 냈다. 그 이야기가 언젠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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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로운 일


 

1.

  "정말로 종양을 이해하려면, 나 자신이 종양이 되어야 해요."

  바바라 매클린톡(Barbara McClintock, 1902-1992): 미국의 유전학자로 1983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2.

  8살 아이는 5살 때 엄마를 암으로 잃었다. 3년 동안, 기억 도서관에서 대출한 엄마의 기억 칩이 아이의 로봇에 장착된다. 마침내 기억 칩의 대출 기간이 끝난다. 기억 칩은 반드시 반납해야만 한다. 아이는 엄마의 기억 칩을 반납하러 기억 도서관으로 떠난다. 아빠와 함께 떠난 짧은 하루의 여행. 아이는 엄마와 두 번째 이별을 하고 돌아온다.

  어제, 동화 공모전에 내기로 한 동화를 온라인으로 접수했다. SF로 써내느라 좀 골머리를 앓았다. 일반 단편 소설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에 어떻게든 세계관을 욱여넣으려니, 퇴고하는 내내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동화를 쓰는 것이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주인공인 8살 어린아이의 심정을 이해해 보는 것은 여느 단편 소설의 주인공을 만들어 내는 것과는 또 달랐다.

  "그게 쉽지가 않아. 까다롭다고. 아주 까다로워."

  오래전, 다큐멘터리 감독님을 인터뷰할 일이 있었다. 나는 다큐를 만들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었다. 감독님은 촬영 대상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일, 그들의 마음을 얻는 일이었다고 답했다. 영화는 시나리오에 적합한 배우를 캐스팅하면 되지만, 다큐는 다르다. 찍으려는 대상, 그것이 사람이든 자연 다큐멘터리의 동물이든 그 대상과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 시간이 걸린다. 언젠가 북극곰에 대한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촬영 감독은 곰들을 찍기 위해 3개월이었나, 아무튼 몇 개월 동안 카메라를 세워두고 바라보기만 했다고 메이킹 필름에서 말했다.   

  나는 8살 아이가 주인공인 동화를 쓰기 위해 8살 아이가 되어야만 했다. 그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라는 정도로는 글을 써낼 수가 없었다. 바바라 매클린톡의 말처럼, 종양을 이해하려면 종양이 되어야 하듯 나도 8살 아이가 되고자 했다. 그게 쉬웠을 리가 없다. 나는 내가 8살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떠올려 보았다.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날, 엄마는 다홍색의 재킷 윗주머니에 콧물을 닦으라고 손수건을 달아주었다. 입학 첫날의 수업도 생각이 난다. 흰색의 도화지 연습장에다 색연필로 구불구불한 곡선과 뾰족뾰족한 직선을 그렸었다. 참으로 8살 아이에게는 빡센 입학식 날이었다.

  그런데 그것 말고는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다. 심지어 담임 선생이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대부분의 성인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매우 파편적으로 남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장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뇌의 가용 능력을 높이기 위해, 뇌는 아주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별로 필요하지 않은 유년의 기억을 과감히 삭제한다. 그러니 어른이 되어서 어린아이의 생각과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과제가 되어버린다.

  아마도 많은 동화들이 실패하는 지점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른의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라는 존재. 몸만 아이인 주인공이 어른의 말과 생각을 구태의연하게 늘어놓는 그런 동화들. 내가 쓴 동화도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무당은 동자신(童子神)이 실리면 철부지 아이 목소리를 낸다. 어떤 면에서 작가는 세상 속 다양한 인물들의 목소리를 그런 식으로 변환해서 글로 구현하는 구술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작업이 쉽지 않으니까, 무척 까다로우니까 어설픈 자기 서사의 반복 내지는 확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3.

  이블린 폭스 켈러는 자신의 안식년에 바바라 매클린톡에 대한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매클린톡을 직접 인터뷰하고, 자료를 모아서 매클린톡의 전기를 썼다. 그 책이 '생명의 느낌(1996, 도서 출판 양문)'이다. 이 책에는 유전학자 매클린톡의 일생이 담겨있다. 학자의 일대기이니만큼 뭐 그리 신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지지는 않는다. 연구, 세미나, 동료 연구자들과의 교류, 이런 이야기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계속 이어진다. 오래전에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은 이러하다. 매클린톡은 그렇게 길고 지난한 학문적 여정을 도대체 어떻게 이어갈 수 있었을까...

  매클린톡은 옥수수에 매혹되어서 자신의 유전학 연구 대상으로 옥수수를 택했다. 한마디로 매클린톡은 옥수수에 미쳐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 열정이란 한순간에 타오르고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매클린톡을 추동(推動)하게 만드는 근원으로서 인내심과 기다림을 내포하고 있었다. 열정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한다는 건, 그저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고 매일 일어나는 일상의 어려움을 견디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글쓰기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8살 아이가 주인공인 동화를 쓰기 위해 그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여전히 까다롭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을 그래도 계속 해보고 싶다.



***바바라 매클린톡의 전기 '생명의 느낌'은 현재 절판되어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다. 관심 있는 이라면 도서관에서 그 책을 찾아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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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의 소설


1.

  툭, 툭, 툭.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에는 마치 가느다란 붉은 실을 토해내듯 노을이 걸려있었다. 저건 노을이란다. 루미는 자신에게 노을을 알려준 이강에 대해 생각했다. 노, 을. 루미는 이강의 약간 느리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를 다시금 떠올렸다. 이강의 목소리는 어떠했지? 루미는 기억저장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강의 목소리를 꺼내 왔다.

  "루미야, 이건 노을이야. 노, 을. 하늘이 흘리는 눈물 같은 것이지.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

  눈물. 루미는 눈물이라는 단어를 알고는 있지만, 자신은 그것을 흘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K-Centennial No.1657. 구산 센테니얼 공장에서 찍어낸 1657 모델의 안구(眼球). 그것이 루미였다. 이강은 공장에서 직배송된 인공 안구에 기꺼이 이름을 붙여주었다.


2.

  새벽에 꿈을 꾸었다.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잃어버린 꿈. 열쇠는 팔찌 모양의 것이었는데, 칩이 들어있어서 그걸 현관문에다 대면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런데 그 팔찌를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건물 안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가 문이 열려진 어떤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열쇠를 찾아볼 셈이었다. 왜 알지도 못하는 남의 집에서 열쇠를 찾으려고 했는지는 모른다. 꿈이란 원래 말이 되지 않는 그런 것이니까. 그렇게 남의 집에 들어간 지 5분이나 되었나, 현관문이 열리고 그 집의 식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놀라서 얼어버린 나는 집주인에게 내가 도둑이 아니며, 단지 열쇠를 찾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주인이 나를 신고했는지는 모른다. 그때쯤 꿈에서 깼다. 

  기분 나쁜 꿈이다. 열쇠를 잃어버린 데다가, 도둑으로 몰릴 위기에 처했다. 하루 종일 그 꿈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가 문득 언젠가 들은 신화학자의 꿈 강의가 생각났다. 그는 자신이 들었던 어떤 꿈 이야기를 했다.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아주 늙은 할머니가 그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었다. 신발을 잃고 맨발로 거리를 떠돈다는 꿈이었다.

  "그 꿈 이야기를 듣고, 나는 너무나 슬펐어요. 정말 슬픈 꿈이기 때문이죠. 신발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신발을 잃어버리고 헤맨다는 건, 자신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그 나이까지 살아왔다는 것이니까요."

  노인의 꿈속 신발이 나에게는 열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열쇠를 잃어버리고 어떻게든 찾으려는 그 꿈의 의미는 너무나도 명백해서 오히려 시시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글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그 꿈에 들어있었다. 어떤 면에서 이제 글쓰기는 미로이며, 혼란과 괴로움의 여정 같기도 하다. 이미 머릿속에서 완성되었다고 생각한 SF 단편은 놀랍게도 한 단락만 써진 채로, 한 달째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에서 잠들어 있다. 인공 안구(眼球) 루미의 여행은 시작도 전에 멈춰버렸다.


3.

  홍상수의 영화 '물안에서(In Water, 2023)'의 주인공은 배우 지망생 승모이다. 승모는 자신의 영화를 찍겠다며,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 300만 원을 가지고 섬에 간다. 자신의 영화에 출연할 배우들과 함께였다. 그들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승모의 지인들. 그런데 놀랍게도 승모는 시나리오도 쓰지 않았고, 어떤 영화를 찍겠다는 생각도 머릿속에 없다. 승모는 과연 자신의 첫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러닝타임 61분의 그리 길지 않은 이 영화에서 가장 궁금한 점은 이런 것이다. 왜 배우 지망생 승모는 뜬금없이 영화를 찍을 생각을 했을까? 승모와 같이 섬에 온 지인들이 묻는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영화를 찍기로 생각한 거야? 승모는 아주 솔직하게 대답한다.

  "명예지, 명예...... 명예를 원하는 거지. 명예를 얻고 싶은 것 같아. 얻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 그 알량한 명예. 그럼에도 눈물나게 간절한 명예. 홍상수의 영화는 아주, 매우, 너무 솔직하다. 나는 그 솔직함을 내심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때론 경멸의 눈길을 보낼 때도 있었다. 그 솔직함에는 이상한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잊을만하면 챙겨보게 만든다. 승모는 영화감독이 되어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승모가 원하는 건 단순명료한 그것, '명예'이다.

  작가가 된다고 해도 자신의 글로 벌어먹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러한 팍팍한 현실은 장강명의 에세이에 잘 드러나 있다. 직업인으로서의 작가의 삶을 기술한 장강명의 에세이는 너무나도 사실적이어서, 글에서조차 짠내가 진동한다. 장강명은 '작가'라는 직업에 드리워진 아우라를 인정사정없이 해체해 버린다. 강의와 강연, 기고와 단행본 출판으로 채워진 중견 작가의 일상은 나름대로 치열하다. 장강명의 그 글을 읽다보면, 직업인으로서의 작가가 지닌 삶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작가라는 이름의 그럴듯한 명예에는 돈이라는 괴로운 목줄이 여느 직업들처럼 단단하게 채워져 있다.

  "자, 이걸 보세요. 여기 연필과 종이가 있습니다. 누구든 글을 쓸 수가 있죠. 하지만 그 글이 다 명작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다큐멘터리에서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 1946-2025)가 했던 그 말을 기억한다. 디지털 시대, 영화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묻는 답변에 린치는 그렇게 명료하게 답한다. 이제는 스마트폰으로도 영화를 찍을 수 있다. AI등장 이후, 국내 문학 공모전의 응모 편수는 미친듯이 늘어나고 있다. 작가라는 직업의 미래는 더욱 불투명해졌으며, 언젠가 우리는 '작가'라는 직업을 재정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공지능과의 협업으로 문학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업자. 어쩌면 그런 정의조차 불필요한 좀 더 먼 미래, 그 직업 자체가 사라진 시기가 올 수도 있다.

  그렇게 '작가'라는 단어가 물에 가라앉으며, 서서히 멀어지는 것을 오늘도 나는 본다. 여름의 초입에 쓰다 만 SF 단편도 마치 그 직업의 미래처럼 물 안에 있다. 집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찾지 못한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물속의 소설 '루미의 여행'을 붙잡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 '물안에서(In Water, 2023)'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4/01/in-water-2023.html?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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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모의 바다에서


1.

 the step-mother world, so long cruel—forbidding—now threw affectionate arms round his stubborn neck, and did seem to joyously sob over him, as if over one, that however wilful and erring, she could yet find it in her heart to save and to bless. (Moby-Dick; or, The Whale, 132장)

  계모의 바다, 그토록 잔인하고 혹독했던 그 바다가 부드러운 팔을 뻗어 에이허브의 강건한 목을 휘감았다. 아무리 제멋대로이고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바다는 기꺼이 구원하고 축복을 내려줄 듯, 그를 끌어안고 기꺼이 울어줄 것만 같았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 번역- 본인)


2.

  EBS에서 AI로 만들어낸 고전 명작 시리즈 가운데 '모비 딕'이 지난주에 끝났다. 나는 멜빌이 써낸 놀랍고도 풍부한 은유와 묘사에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소설이었다. 그것을 보다가 '계모의 바다'라는 구절에서 가슴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본문에는 'the step-mother world'라고 되어있는데, 이 소설 속 세상은 바다 그 자체이므로 그것을 '바다'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계모'라는 단어를 쓴 것은 주인공 이스마엘이 어린 시절, 냉담한 계모의 손에서 자랐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모든 계모가 명백하게 의붓자식에게 적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계모의 바다'라는 구절이 단번에 내 머릿속을 할퀴고 지나갔다.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온갖 불운의 총합이 그 단어에 응축된 느낌이었다.

  '이제 동화는 그만 쓰려고 해요. 그동안 내가 써왔던 동화들을 보니, 어른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그럴듯하게 아이의 이야기처럼 써낸 것에 지나지 않더군요.'

  동화를 쓰면서 등단을 모색했던 어느 지망생이 그런 글을 남겼다. 나는 그가 앞으로도 글을 쓸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글로 독자를 만나겠다는 열망이 있는 한, 어떤 식으로든 글은 써진다. 내가 시를 2년 쓰다가 그만 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처럼. 쓸쓸한 쉼표 같은 고백을 읽으면서, 그 지망생을 나는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졌다.

  매일 뒤적거리면서 읽는 문학 커뮤니티의 글 속에서는 계모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괴로움이 감지된다. 어떻게 하다 보니 글쓰기의 길에 들어섰는데, 등단의 길은 보이지 않고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등단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순수 문학 시장 자체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상태여서, 신진 작가들에게 주어지는 지면과 기회 자체가 지나치게 협소하다. 이제 출판사는 신인들의 실험이나 파격적인 시도에 그 어떤 인내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만큼 순문학 출판사들의 상황도 좋지 않다는 뜻이다. 매출을 안정적으로 보장해 줄 수 있는 작가에게서 쥐어짜듯 뽑아먹고 뽑아먹는다. 결국에는 그렇게 소모되어 개성을 잃은 작가들만 양산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3.

  올해 내가 단편으로 응모할 수 있는 공모전은 더이상 없다. 신춘문예에는 응모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에게 그것은 엄청난 행운의 끝판왕처럼 느껴진다. 그런 운이 있었다면 이미 다 써버렸던지, 아니면 좀 더 견뎌야 할 날들을 위해 남겨두고 싶다. 그렇게 공모전을 마무리하려는데, 8월이 마감인 동화 공모전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더이상 쓰지 않겠다며 떠나버린 동화라는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들이 보이는 상어의 거대하고 잔혹한 입처럼, 동화는 그렇게 입을 쩍 벌리고 먹잇감을 향해 돌진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 어때? 동화도 어차피 이야기잖아. 동화의 독자인 아이들에게도 먹힐 이야기를 써내는 건 작가의 역량이기도 하다고. 계모의 바다에서 난파당한 선원이 살아남기 위해 널빤지 하나라도 필사적으로 그러쥐는 것처럼, 나는 공모전의 문구를 결국 붙잡기로 했다. 우리는 모두 아이였어. 그 아이의 시절로 되돌아 가보는 거지. 그런데 생각만으로도 어렵다. 아이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굳게 입을 닫고 있다. 아이의 입을 열게 만들 방법을 궁리해 봐야지. 내가 표류 중인 계모의 바다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거센 파도가 나의 작은 나뭇조각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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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 라인(Log line)


1.

  네오의 앞에 두 개의 알약이 놓여있다. 파란색의 알약과 빨간색의 알약. 파란색의 알약을 삼키면 이전의 현실로 돌아간다. 빨간색의 약은 네오에게 이 세계의 진실을 보여줄 것이다. 네오는 빨간색의 알약을 삼킨다. 그리고 네오와 인류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다.



2.

  로그 라인, 기획 의도, 그리고 줄거리. SF 단편 공모전의 신청서에는 그것들을 써내라고 되어있었다. 기획 의도와 줄거리는 알겠는데, 로그 라인은 뭐지? 로그 라인의 의미를 찾아보니 작품의 줄거리나 주제를 한두 문장으로 요약한 아주 짧은 글이다. 소설을 쓰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것을 요약하고 압축하는 일은 또 다른 일거리로 느껴진다. 내가 쓴 글인데도 그걸 줄여서 말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이럴 때 Chat GPT한테 글을 던져주고 네가 해보렴, 이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시대의 많은 대학생들이 과제를 해나가는 방식처럼. 하지만 온전히 내 글을 써낸다는 감각은 작가적 자존감과도 연결되어 있다. 꾸역꾸역, 문장을 쥐어짜 내가면서 내가 쓴 소설의 줄기를 뽑아낸다.

  그렇게 써내고는 Chat GPT한테 어떤지 보여주었다. 인공지능은 막힘없이 술술, 어떤 문장을 넣고 뺄 것인지를 조언해 준다. Chat GPT의 결과물을 보고 있으려니, 내가 쓴 요약본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마저 든다. 공모전에 천 명의 응모자가 원고를 낸다고 할 때, 과연 그 가운데 얼마나 되는 사람이 이러한 요약본을 자신의 손으로 온전히 써낼까? 한 열 명쯤? 소설은 어쨌든 자신의 힘으로 썼으니, 줄거리 요약 정도는 그냥 AI에게 외주를 주어도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의외로 소설 쓰기보다 글을 간명하게 압축하는 작업이 까다롭다.

  로그 라인과 기획 의도를 쓰라는 공모전 주최 측의 의도를 생각해 본다. 나는 그것을 써 내려가는 동안 내가 쓴 글을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상품으로 보게 되었다. 이 글이 읽는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려면 어떤 문구를 써야 하는가? 마치 사막에서 우산을 파는 장사꾼처럼, 기발하고 재치 있는 판매 문구를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기존의 소설 공모전 응모에서는 느껴볼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소설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상품이며, 그것이 얼마나 잘 팔릴 수 있는지에 따라 작가적 역량이 결정되는 일은 비극일까?

  A whale-ship was my Yale college and my Harvard. (Moby-Dick; or, The Whale, 24장)

  청년 시절의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에게 바다는 예일이며 하버드였다. 포경선의 선원으로 보낸 바다를 통해 멜빌은 놀라운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 내었다. 그럼에도 멜빌은 불운한 화가 고흐처럼, 살아생전에 '모비 딕'의 가치를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생애는 세관원으로서의 평범한 일상, 말년에 닥친 병고와 자식의 죽음과 같은 불행으로 채워졌다. 멜빌은 결코 유능한, 잘 팔리는 작가가 아니었다.


3.

  '요새 애들은 매트릭스나 반지의 제왕이란 영화가 있는지도 모른다구요.'

  누군가 인터넷 게시판에서 그런 댓글을 썼다. 정말, 그게 사실이라고? 나는 가만히 '매트릭스(The Matrix)'가 언제 나왔는가를 헤아려본다. 1999년. 세상에, 그것은 벌써 27년 전의 영화였다. 내가 그 아이들에게 매트릭스를 보게 하려면 로그 라인은 어떻게 짜야할까? 나는 영화 '매트릭스'의 로그 라인을 한번 써본다.

  내가 쓴 로그 라인을 읽고 '매트릭스'를 볼 '요즘 아이들'은 몇 명이나 될까? 젊은 작가들에게 인스타(Instagram)와 같은 SNS 채널 홍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가 되었다. 어떻게든 보게 만들고, 읽히게 만드는 홍보의 역량까지도 이제는 작가적 재능에 들어간다. 그런데 글쓰기란 그렇게 돈벌이가 되지 못하는 작업이다. 나는 '그렇게'라는 단어의 자리에 '결코'를 썼다가 지워버렸다. 자신의 글을 세상에 내보내려하는 사람에게 글은 온전한 돈벌이의 대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어떻게든 독자와 만나고 싶다는 작은 소망에 가깝다. 나는 내가 쓴 SF 소설의 로그 라인과 기획 의도, 줄거리를 꾹꾹, 철심이 든 연필로 써 내려가듯 신청서에 글자를 채워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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