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턴(lantern)
"어서 오세요."
"아줌마, 말보로 하이브리드 좀 줘 봐."
"잠시만 기다리세요."
경미는 담배 진열대에 서면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외워야 할 담배의 종류가 너무 많았다. 손님들이 찾는 담배가 제각각인데, 그걸 정확하고 빠르게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만있자, 말보로 하이브리드는 어디 있는 거지? 그게 멘솔 들어간 거니까, 여기쯤 있을 것 같은데...
"이 아줌마는 항상 느려. 그래 가지고 뭔 장사를 해?"
"아유, 죄송합니다. 이게 맨날 헷갈리네요. 아, 찾았다. 여기 있습니다."
"좀 빠릿빠릿하게 일 좀 하쇼."
"네, 네, 알겠습니다."
40대 중반의 키가 작고 퉁퉁한 남자 손님은 경미에게 그렇게 핀잔을 주고는 편의점 문을 나섰다. 역시 사람을 대하는 일은 쉽지 않구나. 경미는 나즈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남는 낮시간의 부업으로 찾은 것이 편의점 아르바이트였다. 동네 편의점 창문에 붙어있는 구인 광고를 보고, 편의점에 그냥 한번 들어가 본 것이 시작이었다.
경미가 면접을 본 편의점의 점주는 대기업에서 퇴직한 50대 초반의 중년 남자였다. 그는 경미의 생글생글한 웃음이 좋아 보인다면서, 그 자리에서 채용을 결정했다. 경미는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편의점 일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지만, 경미는 사장과 야간 알바생에게서 여러 가지를 빠르게 배워나갔다. 주부로만 살아온 경미 자신도 정말이지 놀랄 지경이었다. 자신에게 그토록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업무 매뉴얼이 다소 복잡하기도 했지만, 한번 익히고 나니 나름의 요령도 생겼다. 무엇보다 편의점이 오피스텔이 위치한 상업지구라, 번거로운 어린 학생이나 노인 손님이 거의 없었다. 어떨 때는 좀 시간이 남아돌아서, 책이라도 가져와서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신 여사, 오늘 매상은 좀 어때?"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요. 그냥 평일 수준으로 나왔어요."
경미는 사장이 자신을 부르는 '여사(女史)'라는 호칭을 들으면, 좀 우습기도 하고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사장은 매너가 좋은 사람으로 경미에게 말을 함부로 놓지도 않았고, 경미가 실수를 해도 큰소리로 질책하는 일도 없었다. 일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사장은 나름 괜찮은 고용주였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쉽게 안착할 수 있었던 것도 저런 사장의 태도 덕분이기도 했다.
"사장님, 신제품 프로모션으로 나온 것들이 있어요. 크림빵하고, 즉석 카르보나라, 물만두, 이렇게 세 개요. 이거 챙겨드릴까요?"
"난 크림빵 하나 가져갈 테니, 나머지는 신 여사 집에 가져가서 애들 간식으로 줘요."
사장은 크림빵 하나만 얌전하게 가져갔다. 원래대로라면 저런 신제품들은 사장이 다 가져가든가, 매대에 진열하게 되어있다. 그런데도 사장은 그런 것들이 나오면, 너그럽게 아량을 베풀어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져가게 했다.
경미는 야간 알바생에게 인수인계하면서 자신이 가져가기로 한 즉석 카르보나라 제품을 건네주었다. 서른 살의 야간 알바생은 늦깎이 대학생으로 학비를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알바생이 간식을 챙겨준 경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경미는 새로 나온 물만두는 어떤 맛일지 궁금해하며 집으로 향했다.
"이거, 편의점에서 얻어온 거야?"
저녁 식탁에 물만두를 쪄서 내온 것을 보고 남편이 물었다.
"우리 사장님, 참 관대해. 신제품 프로모션이 세 개 있었거든. 크림빵, 카르보나라, 물만두. 크림빵만 가져가고 나한테 나머지 가져가서 애들 간식 주라는 거야."
"당신은 간식 줄 애도 없으면서 어쩌다 그런 거짓말을 하게 된 거야?"
"글쎄, 그냥 아이가 있는 주부로 행세하는 게 내가 더 편할 것 같아서."
"그럼, 당신 아이들은 몇 살, 몇 살인데?"
남편이 짖궂은 표정을 지으며 경미에게 물었다.
"몇 살로 할까? 몇 살로 하면 좋겠어, 여보?"
"중학생 정도로 하지 뭐. 내가 마흔다섯이고 당신이 마흔셋이니까, 얼추 중학생 학부모 나이잖아."
"중학생은 좀 골치가 아파. 나는 사장님한테 초등학교 4학년하고 6학년인 아들이 둘 있다고 했거든."
남편은 경미의 말을 듣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초등생 아들 둘이 더 심란하지. 당신은 도대체 그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어떻게 다 하고 편의점 알바를 한다는 거야?"
"애들은 지들끼리 놔두면 더 잘 알아서 크는 거 아닐까?"
"그런가? 우린 사실 아무것도 모르잖아."
남편의 그 말을 들으니, 저녁 식탁의 음식이 벌써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이 식탁은 더 번잡스럽고 시끄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부의 식탁은 언제나 정갈했고 조용했다. 경미는 그런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까 보니까, 당신 택배가 하나 왔던데. 그거 뭐야?"
"응. 랜턴. 캠핑할 때 쓰는 거."
"근데, 랜턴은 저번에도 샀잖아."
"이건 색깔이 다른 거라구."
남편은 그 말을 하며 멋쩍게 웃었다.
"난 좀 이해가 안 되네. 당신은 캠핑을 가본 적도 없잖아. 왜 그렇게 캠핑용품을 사 모으는 거야? 창고 좀 봐봐. 죄다 당신 캠핑용품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포트메리온 그릇 사다 모으지 않아?"
"그건 그런데..."
경미는 자신의 말을 되받아치는 남편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미는 포트메리온 그릇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하나둘씩 사모으기 시작한 것이 작은 방 벽면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100년 후에 고고학자가 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파보면 말이지. 포트메리온과 닭 뼈만 나올지도 몰라. 집집마다 포트메리온 그릇 하나씩은 다 있고, 치킨에 환장한 민족이니까."
그렇게 눙치면서 남편은 식어버린 물만두를 하나 집어 들었다.
"이거 맛은 괜찮은데. 담백하고, 고기가 씹히는 것도 좋고. 잘 팔리겠는걸."
경미는 남편이 먹고 있는 물만두를 간식으로 줄 아이들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았다. 그 아이들이 있다면 남편과 자신이 더 행복했을지, 아니면 더 괴로워졌을지 궁금해졌다. 생기지 않는 아이를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경주의 이름난 한의원에서 지은 첩약을 먹으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해서, 남편과 경주에 다녀온 것이 2년 전이었다. 그 이후로 이 부부는 더는 아이를 갖는 걸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그 사실을 두 사람은 받아들였다.
"내일부터 2주 동안은 많이 늦을 거야. 완성된 선박을 검사해야하는데, 고객사에서 시한을 무척 촉박하게 준 거야. 어쩔 수 없이 야간작업도 해야 할 것 같고."
"아무튼 조심해서 해요. 무리하지 말고."
경미의 남편은 조선소 QM(Quality Management) 팀의 차장이다. 그곳에서는 건조된 선박을 검사하고 고객사에 인계하는 전과정을 감독한다. 남편이 사무실보다는 주로 현장에서 일하는지라, 경미는 남편이 다치거나 무슨 사고를 당하지는 않을까 늘 신경이 쓰였다. 이번에는 야간작업도 해야 한다고 하니, 남편의 일이 그저 빨리 순탄하게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만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출근하고 경미도 편의점에 갈 준비를 했다. 경미는 포트메리온 벨 머그컵에 믹스커피를 한 잔 탔다. 이상하게도 이 컵에는 믹스커피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컵에 그려진 분홍색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경미는 이 컵의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궁색하지 않은 살림에도 자신이 편의점에서 일하는 이유가 바로 포트메리온 그릇을 사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새로 나온 그릇 세트를 사려면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경미는 흠집이 나지 않는 수세미로 컵을 닦았다. 물을 틀어서 컵을 헹구는데, 순간 손이 컵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컵은 개수대 안쪽에 부딪히면서 손잡이가 깨졌다.
"아이고, 아침부터 참 재수가 없네."
경미는 이 벨 머그컵이 6개짜리 세트라는 걸 떠올렸다. 이 벚꽃 무늬만 따로 사는 일은 어려웠다. 판매처의 대부분은 벨 머그의 무늬를 랜덤으로 보내주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6개짜리 세트를 또 살 수도 없었다. 그건 낭비다. 아무리 포트메리온을 좋아해도 그런 돈을 쓰기는 싫었다. 경미는 벚꽃 무늬 머그컵을 포기하기로 했다. 어쨌든 손을 다치치 않았으니 다행이야. 깨진 머그컵을 신문지에다 주섬주섬 주워 담으며 경미는 혼자 중얼거렸다.
11시는 편의점의 물품이 입고되는 시간이었다. 배송 기사에게서 인계받은 물품을 확인하고, 배열하느라 11시부터 12시까지 경미는 무척 바빴다. 오늘은 특히 음료 제품이 많아서, 그걸 나르는 것도 꽤 힘들었다. 물건을 다 정리하고, 경미가 소비 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을 하나 뜯어서 먹은 시각은 1시 반이었다. 돈을 번다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구나. 경미는 세탁할 때 남편의 옷에서 나오는 가는 쇳가루를 떠올렸다. 아무리 작업복을 입고 보호 장비를 갖추어도 선박에서 나오는 이런저런 이물질과 유독물질을 남편은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노후를 위해 꾸준히 저축하고 연금을 붓고 있지만, 남편이 언제까지 직장에 다닐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경미는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지금의 편의점 일을 더 열심히 하겠다고 새삼스레 다짐했다.
"말보로 하이브리드."
가끔 그 담배를 사 가는 40대 중반의 남자 손님이었다. 남자는 머리를 빡빡 밀어버려서, 경미는 그 손님에게 '빡빡머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네. 여기 있습니다."
"아줌마, 이제 좀 말귀를 알아먹는구먼."
"손님 덕분에 열심히 담배 종류 공부했습니다."
'빡빡머리'가 흡족한 표정으로 담뱃값을 결제하고 편의점 문을 나섰다. 처음에 그런 험한 인상의 사람을 대할 때면 경미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으나, 요즘은 나름의 여유도 생겼다. 계산대 아래에는 바로 경찰 지구대와 연결되는 무선 비상벨 버튼이 있어서, 안심이 되는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편의점이 있는 위치가 번화한 상점가가 아니라서, 손님들 대부분은 그곳 오피스텔 거주민이거나 인근 사무실의 직원들이었다. 경미는 인품이 괜찮은 사장도 그렇고, 편의점을 찾는 손님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들 덕분에 경미는 돈을 버는 일을 통해 세상의 여러 단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커피와 간식을 찾는 사무실 직원들 한 무리가 우르르 계산을 끝내고 가버리자, 편의점은 다시 한산해졌다. 입고된 상품도 다 정리해서 진열해 놓았겠다, 소비기한 지난 폐기 식품도 확인해서 모아두었겠다, 경미에게 쉴 수 있는 약간의 자투리 시간이 생겼다. 그럴 때면 경미는 새로운 포트메리온 그릇들이 있나 스마트폰으로 들여다보곤 했다.
"아, 이건 좀 비싸다. 접시 하나에 5만 원이면, 세트는 돈이 얼마나 드는 거야?"
경미는 보랏빛의 예쁘장한 꽃들 사이로 노랑색과 하늘색의 나비가 날아다니는 둥근 접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포트메리온의 무늬는 가만 보면 거의 비슷해 보였다. 정해진 잎사귀 패턴이며 꽃과 나비도 그렇게 특출난 것이 없는 듯했다. 그럼에도 경미는 포트메리온 그릇들의 문양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치 자신이 그 꽃들과 나비가 있는 어떤 한가로운 오솔길을 거닐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이 좋기는 했지만, 문제는 가격이었다. 누군가 그랬던가? 주부들 취미의 끝판왕은 그릇이라고. 자신은 포트메리온 정도에 빠져있지만, 그보다 더더욱 비싼 외산 명품 그릇들은 많았다. 경미는 사람들이 무언가에 빠지게 되는 계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그 시작은 백화점에서 본 포트메리온의 유아용 식기에서부터였을 것이다. 앙증맞은 크기의 밥공기며 귀여운 무늬의 수저 세트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경미는 자신에게는 그 식기 세트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 대신에 그것을 본 그날, 경미는 2인용 커피잔 세트를 샀다. 분홍색의 벚꽃 무늬가 있는 커피잔 세트였다. 경미의 포트메리온 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경미가 황금빛 띠무늬의 접시 세트를 사려면 자신이 받게 될 월급에서 얼마를 써야 하는지 헤아려 보았다. 6개의 접시에다 앞접시까지 더하면, 남는 돈이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 그릇들이 예뻐도 그건 무리였다. 경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집에다 포트메리온 박물관을 차릴 것도 아니고, 어느 시점에서는 이 분수에 넘치는 취미를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때가 오지는 않은 것 같았다.
"신 여사, 오늘 매상은 괜찮은가? 매장에 다른 별일은 없고?"
"네, 낮에 사무실 손님들 덕분에 평일보다 조금 더 나왔어요. 사장님, 그런데 폐기 식품들은 어떻게 할까요?"
"이제 그런 건 그만 묻지 그래. 신 여사하고 창민 군하고 필요한 만큼 나눠 가지도록 해요."
소비기한이 지난 폐기 식품들도 알바생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편의점의 모든 물건은 사장의 것이었으므로, 당연하게도 폐기 식품을 처분하는 일에도 사장의 허락이 필요했다. 말만 소비기한이 지난 음식이지, 먹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떤 편의점에서는 점주가 그 폐기 식품들도 대부분 가져가서 알바생들의 원성을 듣는다는 말도 있었다. 그런 곳에 비하면, 경미나 야간 알바생에게 이 편의점은 일하기 괜찮은 곳이었다. 경미는 오늘 나온 빵과 요구르트, 과자를 나름 공평하게 나누었다. 그리고 그것을 야간 알바생에게 인수인계할 때 건넸다. 나이 든 복학생은 경미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가볍게 목례를 했다. 어떤 면에서 그런 나눔은 같이 일하는 처지의 사람들이 느끼는 연대감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편의점을 나오면서, 경미는 문득 프랑스의 자연주의 화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그림을 떠올렸다. 끊임없이 허리를 숙여서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의 이삭을 줍는 세 명의 여인. 경미에게 그 그림의 들판은 편의점이었고, 자기 손에 들린 폐기 식품 봉지는 이삭이었다. 경미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경미는 식탁에 앉아 그 비닐봉지에 든 빵을 하나 꺼냈다. 옥수수 크림빵이었다. 옅은 노란색의 옥수수 크림이 든 빵 맛은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남편은 오늘도 늦을 예정이었다. 고객사에서 요청한 선박의 인수 시한이 빠듯했으므로, 남편의 선박 점검 업무는 야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어제도 남편은 새벽 1시가 넘어 집에 들어왔다. 경미는 남편이 과로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그 시간까지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오늘도 경미는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이건 좀 느끼하네."
기대했던 옥수수 크림빵의 맛은 좀 실망스러웠다. 경미는 더이상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 남은 크림빵을 음식물 쓰레기통에다 버렸다. 가져온 요구르트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딱히 설거지할 그릇도 없었으므로, 경미는 약간의 피로를 느끼며 다소 멍한 상태로 식탁에 앉아있었다. 문득 새벽에 꾼 꿈 생각이 났다. 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났다.
"경미야, 고구마 좀 삶아라."
가끔 꿈에 아버지가 보이는 때가 있었다. 그런 경우, 뭔가 근심거리가 생기거나 자신의 몸이 아프거나 하는 일이 생겼다. 그러므로 경미는 아버지가 나온 꿈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말을 건넸다. 언젠가 친구와 재미 삼아 점집에 가보았을 때, 경미는 무당에게 그것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꿈에서 망자(亡者)가 보이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에요. 대개 조상님들은 자손을 지켜주고 싶어서 그렇게 나타나지요. 망자는 말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꿈에서 뭔가 말을 한다, 그러면 그건 좀 골치가 아파요. 그럴 땐 안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아요."
경미는 무당의 그 말이 떠올랐다. 오늘, 편의점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몸살 기운이 느껴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냥 평온한 하루였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고구마를 삶아달라는 말을 했을까? 아버지의 말대로 정말로 고구마를 삶아서 식탁에다 한 그릇 놓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경미는 며칠 전에 사놓은 밤고구마 상자를 열고는 고구마 세 개를 꺼냈다. 손으로 황토가 덕지덕지 묻은 고구마를 박박 씻었다. 그리고 고구마의 양 끝을 과도로 조금씩 잘라내었다. 전기밥솥에 고구마를 넣고 물을 반 컵 정도 부었다. 소금도 조금 넣었다. 빠른 취사 버튼을 누르고, 식탁에 앉아서 가만히 기다렸다. 15분 뒤에 밥솥의 추가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었고, 마침내 고구마가 다 삶아졌다. 경미는 그 고구마들을 꺼내어서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식탁에다 놓았다. 그러고 나니 무언가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요새 밤늦게 자서 피곤했던 것일까? 식탁에 엎드려서 잠이 들었던 경미는 휴대전화 울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식탁 건너편 벽에 걸린 시계가 가리킨 시각은 9시 45분이었다. 전화에 뜬 건 남편의 전화번호였다. 무슨 일이지? 경미는 황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 김 차장님 사모님 되세요? 저는 차장님과 같이 일하고 있는 박경수 대리입니다. 지금 응급실인데요. 야간작업 중에 사고가 좀 있었습니다. 지금 응급실인데, 여기가 어디냐 하면..."
경미는 너무 놀라서 휴대전화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결국 일이 이렇게 터지고 말았구나, 경미는 새삼스럽게 꿈에 보인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졌다. 도대체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다리에 힘이 빠져서 식탁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휴대전화에서는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는 상대편의 말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경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전화기를 주워들었다. 남편이 실려 간 곳은 시 외곽의 종합병원 응급실이었다. 외투를 찾아 대충 걸치고, 나갈 채비를 했다. 현관으로 나가려던 경미의 눈에 식탁 위의 고구마가 눈에 띄었다. 경미는 자신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서 그 고구마들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
경미는 수술실 앞에서 5시간을 기다렸다. 수술실을 나온 의사가 경미에게 수술은 잘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서는 자리를 떴다. 그래도 뭔가 고비는 넘긴 모양이었다. 회복실로 간 남편이 일반 병실로 온 것은 그날 오후였다. 남편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팔과 다리는 미라처럼 깁스를 잔뜩 감고 있었다.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으면 보통은 사망하거나, 하반신 마비가 되어버려요. 그런데 환자분은 골절로만 끝났으니, 이건 뭐 조상님이 도우셨다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내가 의사 생활 20년 동안 이런 경우는 딱 한 번 봤어요. 이제 두 번째가 되겠네요. 돌아오는 명절에 조상님 차례상은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세요."
회진을 돌던 의사는 넉살이 좋게 말을 건네며 경미를 안심시켰다. 남편은 5미터 높이의 난간에서 추락했다. 원래는 2인 1조로 점검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일정이 빡빡해서 혼자 점검 작업을 하다가 그런 사고가 난 것이다. 어느 정도 회복하려면 6개월 정도 재활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깟 6개월 정도의 시간은 목숨을 건지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의사가 가고 난 뒤, 경미는 남편의 메말라 터진 입술에 입술보호제를 조심스럽게 발라주었다. 그제야 아버지 드시라고 삶았던 고구마 생각이 났다. 부모자식의 끈이란 것이 그렇게 저승에서도 이어지는구나 싶어서 경미는 목이 메었다.
경미의 남편이 다시 회사에 복직한 것은 3개월이 흐른 뒤였다. 재활하는 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회사의 요청도 있고 더이상 재활에만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남편은 발목에 핀을 박아넣어 조금 다리를 끌면서 걸어 다녔다. 먹고 산다는 것이 뭔지, 제대로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회사에 나가는 남편을 경미는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남편이 일찍 퇴근한 늦가을 어느 금요일 저녁, 경미는 남편에게 아파트 공원으로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말했다.
"커피나 한잔해요. 내가 보온병하고 커피잔 챙길 테니."
"당신, 그 포트메리온 커피잔 구경이나 하지."
"그렇지 않아도 신상 커피잔을 대령해 놓았습니다."
경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남편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 평범한 일상이 이제는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경미는 끓인 물을 보온병에 담고, 새로 산 커피잔을 두툼한 가방에다 담았다. 늦가을 밤바람이 생각보다 차가웠다. 두툼한 겨울 외투를 걸친 두 사람은 벤치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이 커피잔, 너무 큰데?"
"그렇지? 상품평에다 누군가 이거 커피잔이 아니라 수프 컵이라고 불평을 해놓았는데, 그걸 그냥 흘려 읽었지 뭐야."
"고양이가 헤엄도 칠 수 있을 것 같아."
"뭔 고양이야? 그냥 참새 정도는 되겠네."
경미와 남편은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았다.
"나, 사실 당신에게 숨기는 일이 하나 있어."
경미는 남편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서 걱정이 되었다. 혹시 어디 밖에다 살림을 차려서 애가 있다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경미는 자신이 다니던 단골 기름집에 생긴 비극이 떠올랐다. 주인 남자가 아내 몰래 살림을 차려서 아들 둘을 낳은 것이 7년 만에 들통이 났다. 그 일로 충격을 받은 기름집 여자는 목숨을 끊었고, 시집을 간 딸도 엄마의 뒤를 따랐다. 기름집은 얼마 안 가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경미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이 나한테 또 샀다고 말한 랜턴 말이야. 당신 몰래 내가 회사에 사다놓은 게 다섯 개나 더 있어."
경미는 안도했다. 그런 랜턴이라면 열 개를 사도 괜찮다.
"나도 당신한테 말 안 한 게 있거든. 포트메리온 세트 하나가 막내동생 집에 있어."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비밀을 고백했다. 밤바람이 좀 세게 불자, 부부는 집으로 돌아왔다. 경미는 남편에게 랜턴의 불을 한번 켜보라고 말했다.
"이게 말이지, 독일제 명품 랜턴이야. 12가지 색이 있거든. 이건 연둣빛인데, 불을 붙이면 이 테두리가 이렇게 형광 연두색으로 빛나."
경미는 남편이 식탁에 켜놓은 랜턴의 불빛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제 더이상 자신에게는 포트메리온 그릇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기자기한 꽃들과 나비가 어우러진 그 포근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자신의 식탁에 고요하게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