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의 소설


1.

  툭, 툭, 툭.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에는 마치 가느다란 붉은 실을 토해내듯 노을이 걸려있었다. 저건 노을이란다. 루미는 자신에게 노을을 알려준 이강에 대해 생각했다. 노, 을. 루미는 이강의 약간 느리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를 다시금 떠올렸다. 이강의 목소리는 어떠했지? 루미는 기억저장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강의 목소리를 꺼내 왔다.

  "루미야, 이건 노을이야. 노, 을. 하늘이 흘리는 눈물 같은 것이지.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

  눈물. 루미는 눈물이라는 단어를 알고는 있지만, 자신은 그것을 흘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K-Centennial No.1657. 구산 센테니얼 공장에서 찍어낸 1657 모델의 안구(眼球). 그것이 루미였다. 이강은 공장에서 직배송된 인공 안구에 기꺼이 이름을 붙여주었다.


2.

  새벽에 꿈을 꾸었다.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잃어버린 꿈. 열쇠는 팔찌 모양의 것이었는데, 칩이 들어있어서 그걸 현관문에다 대면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런데 그 팔찌를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건물 안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가 문이 열려진 어떤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열쇠를 찾아볼 셈이었다. 왜 알지도 못하는 남의 집에서 열쇠를 찾으려고 했는지는 모른다. 꿈이란 원래 말이 되지 않는 그런 것이니까. 그렇게 남의 집에 들어간 지 5분이나 되었나, 현관문이 열리고 그 집의 식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놀라서 얼어버린 나는 집주인에게 내가 도둑이 아니며, 단지 열쇠를 찾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주인이 나를 신고했는지는 모른다. 그때쯤 꿈에서 깼다. 

  기분 나쁜 꿈이다. 열쇠를 잃어버린 데다가, 도둑으로 몰릴 위기에 처했다. 하루 종일 그 꿈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가 문득 언젠가 들은 신화학자의 꿈 강의가 생각났다. 그는 자신이 들었던 어떤 꿈 이야기를 했다.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아주 늙은 할머니가 그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었다. 신발을 잃고 맨발로 거리를 떠돈다는 꿈이었다.

  "그 꿈 이야기를 듣고, 나는 너무나 슬펐어요. 정말 슬픈 꿈이기 때문이죠. 신발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신발을 잃어버리고 헤맨다는 건, 자신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그 나이까지 살아왔다는 것이니까요."

  노인의 꿈속 신발이 나에게는 열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열쇠를 잃어버리고 어떻게든 찾으려는 그 꿈의 의미는 너무나도 명백해서 오히려 시시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글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그 꿈에 들어있었다. 어떤 면에서 이제 글쓰기는 미로이며, 혼란과 괴로움의 여정 같기도 하다. 이미 머릿속에서 완성되었다고 생각한 SF 단편은 놀랍게도 한 단락만 써진 채로, 한 달째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에서 잠들어 있다. 인공 안구(眼球) 루미의 여행은 시작도 전에 멈춰버렸다.


3.

  홍상수의 영화 '물안에서(In Water, 2023)'의 주인공은 배우 지망생 승모이다. 승모는 자신의 영화를 찍겠다며,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 300백만 원을 가지고 섬에 간다. 자신의 영화에 출연할 배우들과 함께였다. 그들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승모의 지인들. 그런데 놀랍게도 승모는 시나리오도 쓰지 않았고, 어떤 영화를 찍겠다는 생각도 머릿속에 없다. 승모는 과연 자신의 첫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러닝타임 61분의 그리 길지 않은 이 영화에서 가장 궁금한 점은 이런 것이다. 왜 배우 지망생 승모는 뜬금없이 영화를 찍을 생각을 했을까? 승모와 같이 섬에 온 지인들이 묻는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영화를 찍기로 생각한 거야? 승모는 아주 솔직하게 대답한다.

  "명예지, 명예...... 명예를 원하는 거지. 명예를 얻고 싶은 것 같아. 얻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 그 알량한 명예. 그럼에도 눈물나게 간절한 명예. 홍상수의 영화는 아주, 매우, 너무 솔직하다. 나는 그 솔직함을 내심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때론 경멸의 눈길을 보낼 때도 있었다. 그 솔직함에는 이상한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잊을만하면 챙겨보게 만든다. 승모는 영화감독이 되어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승모가 원하는 건 단순명료한 그것, '명예'이다.

  작가가 된다고 해도 자신의 글로 벌어먹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러한 팍팍한 현실은 장강명의 에세이에 잘 드러나 있다. 직업인으로서의 작가의 삶을 기술한 장강명의 에세이는 너무나도 사실적이어서, 글에서조차 짠내가 진동한다. 장강명은 '작가'라는 직업에 드리워진 아우라를 인정사정없이 해체해 버린다. 강의와 강연, 기고와 단행본 출판으로 채워진 중견 작가의 일상은 나름대로 치열하다. 장강명의 그 글을 읽다보면, 직업인으로서의 작가가 지닌 삶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작가라는 이름의 그럴듯한 명예에는 돈이라는 괴로운 목줄이 여느 직업들처럼 단단하게 채워져 있다.

  "자, 이걸 보세요. 여기 연필과 종이가 있습니다. 누구든 글을 쓸 수가 있죠. 하지만 그 글로 다 작가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다큐멘터리에서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 1946-2025)가 했던 그 말을 기억한다. 디지털 시대, 영화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묻는 답변에 린치는 그렇게 명료하게 답한다. 이제는 스마트폰으로도 영화를 찍을 수 있다. AI등장 이후, 국내 문학 공모전의 응모 편수는 미친듯이 늘어나고 있다. 작가라는 직업의 미래는 더욱 불투명해졌으며, 언젠가 우리는 '작가'라는 직업을 재정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공지능과의 협업으로 문학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업자. 어쩌면 그런 정의조차 불필요한 좀 더 먼 미래, 그 직업 자체가 사라진 시기가 올 수도 있다.

  그렇게 '작가'라는 단어가 물에 가라앉으며, 서서히 멀어지는 것을 오늘도 나는 본다. 여름의 초입에 쓰다 만 SF 단편도 마치 그 직업의 미래처럼 물 안에 있다. 집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찾지 못한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물속의 소설 '루미의 여행'을 붙잡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 '물안에서(In Water, 2023)'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4/01/in-water-2023.html?m=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계모의 바다에서


1.

 the step-mother world, so long cruel—forbidding—now threw affectionate arms round his stubborn neck, and did seem to joyously sob over him, as if over one, that however wilful and erring, she could yet find it in her heart to save and to bless. (Moby-Dick; or, The Whale, 132장)

  계모의 바다, 그토록 잔인하고 혹독했던 그 바다가 부드러운 팔을 뻗어 에이허브의 강건한 목을 휘감았다. 아무리 제멋대로이고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바다는 기꺼이 구원하고 축복을 내려줄 듯, 그를 끌어안고 기꺼이 울어줄 것만 같았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 번역- 본인)


2.

  EBS에서 AI로 만들어낸 고전 명작 시리즈 가운데 '모비 딕'이 지난주에 끝났다. 나는 멜빌이 써낸 놀랍고도 풍부한 은유와 묘사에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소설이었다. 그것을 보다가 '계모의 바다'라는 구절에서 가슴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본문에는 'the step-mother world'라고 되어있는데, 이 소설 속 세상은 바다 그 자체이므로 그것을 '바다'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계모'라는 단어를 쓴 것은 주인공 이스마엘이 어린 시절, 냉담한 계모의 손에서 자랐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모든 계모가 명백하게 의붓자식에게 적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계모의 바다'라는 구절이 단번에 내 머릿속을 할퀴고 지나갔다.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온갖 불운의 총합이 그 단어에 응축된 느낌이었다.

  '이제 동화는 그만 쓰려고 해요. 그동안 내가 써왔던 동화들을 보니, 어른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그럴듯하게 아이의 이야기처럼 써낸 것에 지나지 않더군요.'

  동화를 쓰면서 등단을 모색했던 어느 지망생이 그런 글을 남겼다. 나는 그가 앞으로도 글을 쓸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글로 독자를 만나겠다는 열망이 있는 한, 어떤 식으로든 글은 써진다. 내가 시를 2년 쓰다가 그만 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처럼. 쓸쓸한 쉼표 같은 고백을 읽으면서, 그 지망생을 나는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졌다.

  매일 뒤적거리면서 읽는 문학 커뮤니티의 글 속에서는 계모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괴로움이 감지된다. 어떻게 하다 보니 글쓰기의 길에 들어섰는데, 등단의 길은 보이지 않고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등단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순수 문학 시장 자체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상태여서, 신진 작가들에게 주어지는 지면과 기회 자체가 지나치게 협소하다. 이제 출판사는 신인들의 실험이나 파격적인 시도에 그 어떤 인내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만큼 순문학 출판사들의 상황도 좋지 않다는 뜻이다. 매출을 안정적으로 보장해 줄 수 있는 작가에게서 쥐어짜듯 뽑아먹고 뽑아먹는다. 결국에는 그렇게 소모되어 개성을 잃은 작가들만 양산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3.

  올해 내가 단편으로 응모할 수 있는 공모전은 더이상 없다. 신춘문예에는 응모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에게 그것은 엄청난 행운의 끝판왕처럼 느껴진다. 그런 운이 있었다면 이미 다 써버렸던지, 아니면 좀 더 견뎌야 할 날들을 위해 남겨두고 싶다. 그렇게 공모전을 마무리하려는데, 8월이 마감인 동화 공모전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더이상 쓰지 않겠다며 떠나버린 동화라는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들이 보이는 상어의 거대하고 잔혹한 입처럼, 동화는 그렇게 입을 쩍 벌리고 먹잇감을 향해 돌진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 어때? 동화도 어차피 이야기잖아. 동화의 독자인 아이들에게도 먹힐 이야기를 써내는 건 작가의 역량이기도 하다고. 계모의 바다에서 난파당한 선원이 살아남기 위해 널빤지 하나라도 필사적으로 그러쥐는 것처럼, 나는 공모전의 문구를 결국 붙잡기로 했다. 우리는 모두 아이였어. 그 아이의 시절로 되돌아 가보는 거지. 그런데 생각만으로도 어렵다. 아이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굳게 입을 닫고 있다. 아이의 입을 열게 만들 방법을 궁리해 봐야지. 내가 표류 중인 계모의 바다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거센 파도가 나의 작은 나뭇조각을 뒤흔들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로그 라인(Log line)


1.

  네오의 앞에 두 개의 알약이 놓여있다. 파란색의 알약과 빨간색의 알약. 파란색의 알약을 삼키면 이전의 현실로 돌아간다. 빨간색의 약은 네오에게 이 세계의 진실을 보여줄 것이다. 네오는 빨간색의 알약을 삼킨다. 그리고 네오와 인류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다.



2.

  로그 라인, 기획 의도, 그리고 줄거리. SF 단편 공모전의 신청서에는 그것들을 써내라고 되어있었다. 기획 의도와 줄거리는 알겠는데, 로그 라인은 뭐지? 로그 라인의 의미를 찾아보니 작품의 줄거리나 주제를 한두 문장으로 요약한 아주 짧은 글이다. 소설을 쓰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것을 요약하고 압축하는 일은 또 다른 일거리로 느껴진다. 내가 쓴 글인데도 그걸 줄여서 말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이럴 때 Chat GPT한테 글을 던져주고 네가 해보렴, 이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시대의 많은 대학생들이 과제를 해나가는 방식처럼. 하지만 온전히 내 글을 써낸다는 감각은 작가적 자존감과도 연결되어 있다. 꾸역꾸역, 문장을 쥐어짜 내가면서 내가 쓴 소설의 줄기를 뽑아낸다.

  그렇게 써내고는 Chat GPT한테 어떤지 보여주었다. 인공지능은 막힘없이 술술, 어떤 문장을 넣고 뺄 것인지를 조언해 준다. Chat GPT의 결과물을 보고 있으려니, 내가 쓴 요약본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마저 든다. 공모전에 천 명의 응모자가 원고를 낸다고 할 때, 과연 그 가운데 얼마나 되는 사람이 이러한 요약본을 자신의 손으로 온전히 써낼까? 한 열 명쯤? 소설은 어쨌든 자신의 힘으로 썼으니, 줄거리 요약 정도는 그냥 AI에게 외주를 주어도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의외로 소설 쓰기보다 글을 간명하게 압축하는 작업이 까다롭다.

  로그 라인과 기획 의도를 쓰라는 공모전 주최 측의 의도를 생각해 본다. 나는 그것을 써 내려가는 동안 내가 쓴 글을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상품으로 보게 되었다. 이 글이 읽는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려면 어떤 문구를 써야 하는가? 마치 사막에서 우산을 파는 장사꾼처럼, 기발하고 재치 있는 판매 문구를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기존의 소설 공모전 응모에서는 느껴볼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소설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상품이며, 그것이 얼마나 잘 팔릴 수 있는지에 따라 작가적 역량이 결정되는 일은 비극일까?

  A whale-ship was my Yale college and my Harvard. (Moby-Dick; or, The Whale, 24장)

  청년 시절의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에게 바다는 예일이며 하버드였다. 포경선의 선원으로 보낸 바다를 통해 멜빌은 놀라운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 내었다. 그럼에도 멜빌은 불운한 화가 고흐처럼, 살아생전에 '모비 딕'의 가치를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생애는 세관원으로서의 평범한 일상, 말년에 닥친 병고와 자식의 죽음과 같은 불행으로 채워졌다. 멜빌은 결코 유능한, 잘 팔리는 작가가 아니었다.


3.

  '요새 애들은 매트릭스나 반지의 제왕이란 영화가 있는지도 모른다구요.'

  누군가 인터넷 게시판에서 그런 댓글을 썼다. 정말, 그게 사실이라고? 나는 가만히 '매트릭스(The Matrix)'가 언제 나왔는가를 헤아려본다. 1999년. 세상에, 그것은 벌써 27년 전의 영화였다. 내가 그 아이들에게 매트릭스를 보게 하려면 로그 라인은 어떻게 짜야할까? 나는 영화 '매트릭스'의 로그 라인을 한번 써본다.

  내가 쓴 로그 라인을 읽고 '매트릭스'를 볼 '요즘 아이들'은 몇 명이나 될까? 젊은 작가들에게 인스타(Instagram)와 같은 SNS 채널 홍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가 되었다. 어떻게든 보게 만들고, 읽히게 만드는 홍보의 역량까지도 이제는 작가적 재능에 들어간다. 그런데 글쓰기란 그렇게 돈벌이가 되지 못하는 작업이다. 나는 '그렇게'라는 단어의 자리에 '결코'를 썼다가 지워버렸다. 자신의 글을 세상에 내보내려하는 사람에게 글은 온전한 돈벌이의 대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어떻게든 독자와 만나고 싶다는 작은 소망에 가깝다. 나는 내가 쓴 SF 소설의 로그 라인과 기획 의도, 줄거리를 꾹꾹, 철심이 든 연필로 써 내려가듯 신청서에 글자를 채워 나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대홍포(大紅袍)


1.

  마침내 황제의 칙사가 암벽 아래에 도착했다. 칙사는 말에서 내려, 황금색 상자를 경건하게 열었다. 상자 안에는 황제가 직접 쓴 교서(敎書)가 붉은 비단 위에 놓여 있었다. 칙사는 황제의 교서를 읽고 나서, 자신이 데려온 무관들에게 명하였다. 체구가 작고 날렵한 무관들이 기다란 비단을 몸에 감고, 암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절벽 위에 매달린 차(茶)나무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의 몸에 감은 피같이 붉은 비단을 풀어내어 차 나무에 덮어씌웠다.   


2.

  새로 쓰기 시작한 단편 소설은 처음 써놓은 한 단락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말을 잃어버린 눈사람처럼, 바보처럼 그렇게 소설은 멈춰 서있다. 어떻게 이 글의 멱살을 잡고 나가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다. 이 소설은 SF이며, 주인공은 눈알이다. 그렇다. 그런데 사람의 진짜 눈알이 아니라, 공장에서 찍어 만든 정교한 인공 눈알이다. 눈알의 주인은 시한부 암 환자이며, 안락사를 선택하기 위해 국경 지대로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에 자신의 인공 눈알을 떼어놓고, 자유를 준다. 하지만 눈알은 주인과의 이별을 감당할 수 없다. 떠나버린 주인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시작한다. 눈알은 과연 주인을 만날 수 있을까?

  도대체 내가 왜 이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소설을 왜 쓰려고 하는지 여전히 생각 중이다. 인간과 기계의 결합은 단순한 물리적인 것이 아니며, 감정적이며 유기적인 면이 있음을 말하고 싶기는 하다. 그런데 어떻게 눈알이 여행할 수 있는지 생각을 해보는데, 자꾸만 눈알이 굴러가는 장면만 떠오른다. 눈알은 구르고 구른다. 눈알도 옷을 입고 있다. 은하철도 999의 철이처럼 낡은 모자를 쓰고, 올이 너덜거리는 망토를 두르고 있다. 눈알은 어떻게 이동하지? 글은 거기에서 막힌다.


3.

  동생이 중국 출장에서 사 온 것이라면서, 차통(茶桶) 하나를 두고 갔다. 온통 한문으로 되어있는 그 차통에서 내 눈에 들어오는 한문은 '대홍포(大紅袍)'이다. 나는 차통 뒷면에 가득한 한자들을 사진으로 찍는다. 그런 다음에 구글 렌즈를 켜고, 번역 버튼을 누른다.

  '이 차는 우롱차이며, 품질 수준은 최고급이다. 원산지는 중국 푸젠성(福建省)...'

  나는 찻잎을 들여다본다. 기다랗고 삐죽삐죽한, 검은색에 가까운 찻잎이 비닐봉지에 담겨져 있다. 이 찻잎은 좀 볼품이 없다.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려내어 마셔본다. 밋밋하고 슴슴하다. 별다른 향도 없는 듯하다. 그래, 차는 대만의 우롱차가 제일이지. 나는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면서 진하게 우려낸 보리차 같은 대홍포를 심드렁하게 바라본다.

  그런데 별로 특별한 맛도 없는 것 같은 차에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이 차를 마시고 나서는, 다른 차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계속해서 이 차만 마시고 있다. 기이한 점은 대홍포의 찻잎에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차를 우려내고 나서 버리는 찻잎은 부드럽게 물크러지기 마련인데, 대홍포의 찻잎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우려내지 않은 마른 찻잎처럼 매우 뻣뻣했다. 찻잎은 찢어지지도, 물러지지도 않았다. 나는 이 보잘것없는 찻잎에서 일종의 근성(根性)을 느꼈다. 그랬다. 이것은 이 차의 성질이며 근원적인 본성이다.

  높은 절벽 위에서 자라는 차나무는 암벽을 타고 흐르는 물을 빨아들이며 자랐다. 대홍포의 중국어 위키 항목에는 이 차가 명나라 황후의 병을 낫게 하였으므로, 황제가 차나무에 붉은 비단옷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물론 확실한 역사적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아무튼 이 절벽 위의 차 나무는 중국 차의 전설이 되었다. 중국에서 대홍포 차나무의 가지를 꺾어 재배에 성공한 시기는 1980년대였다. 그러니까 오늘날 '대홍포'로 유통되는 모든 차는 그 절벽 위 대홍포의 후손인 셈이다.

  절벽에 뿌리를 내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은 차나무의 기개랄지 근성이 찻잎에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왜 계속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는가? 이 손톱만 한 찻잎에 있는 도저한 끈기가 과연 나에게는 있는가? 나는 대홍포의 찻잎을 수채에 버릴 때마다 그 생각을 한다. 이번 달이 마감인 SF 단편을 완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글쓰기를 놓지 않겠다는 마음은 높다란 절벽 위, 해가 무지막지하게 내리쬐는 뜨겁고 메마른 그곳에 여전히 매달려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땅을 파헤치고, 잠수를 하다


1.

  여자는 오른손에 돌돌 말린 두툼한 밧줄을, 왼손에는 쇠망치를 들고 있다.
  언제든, 어디로든 달려나갈 준비는 되어있다.


2.

  소설 쓰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올해 나에게 남은 마지막 공모전에 낼 단편을 써야 하는데, 겨우 한 문단을 써놓았을 뿐이다. 분명히 쓰고자 하는 이야기는 머릿속에 있는데,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럴 수도 있나? 소설 쓰는 법을 안다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어쨌든 쓰기는 했다. 그런데 글이 써지질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쩌면 이 소설은 내가 정말로 쓰고 싶었던 글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런 생각은 핑계가 아닐까? 글이 써지지 않는 것에 대한 그럴듯한 핑계.

  글쓰기도 근육 같은 것이라서, 매일 무언가를 써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일기를 쓴다. 그 일기마저도 쓸 시간이 나질 않아서, 사흘 나흘을 밀렸다가 기억을 더듬어 쓰기도 한다. 때로는 어제, 엊그제의 일을 마치 오늘의 일처럼 복기하고 쓰는 것이 뭔가 나 자신에게도 사기를 치는 것 같다. 일기마저도 진실에서 조금은 삐딱하게 나가버린 느낌.

  '내가 공모전에 당선될 확률을 높이는 방법을 알려줄까요? 미친 것 같은 글을 써보세요. 심사 위원도 사람이에요. 그들이 산더미 같은 지겨운 원고들 읽어낼 생각을 해봐요. 거기에서 미친 척하고 써낸 재미있는 글이 있으면 눈에 확 띄지 않겠냐는 거죠.'

  누군가 공모전 당선 비법이라면서, 조언이랍시고 그렇게 써놓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일기마저도 진실의 선에서 조금 삐딱하게 벗어난 것을 견디지 못하는데, 미친 척하고 글을 써내는 것은 더 못할 것 같다. 미쳐버린 글을 어떻게 쓰지? 진짜 미쳐야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닐 테고. 그것도 쓰기의 기술적인 부분이 있나? 공모전 당선자들을 무수히 배출한 어느 글쓰기 강좌에서는 그런 비법들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에 꿈을 꾸었다. 현관문 앞에 커다란 종이 박스들이 서너 개 제멋대로 놓여있었다. 문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박스들 때문에 나갈 수가 없었다. 저걸 어떻게 치울까 하다가 꿈에서 깼다. 나는 그 박스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잘 알고 있다. 버리면 되는데 버릴 수 없는 것들. 글을 쓸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처럼, 꿈속의 박스들이 계속 머릿속에 있다. 

 
3.

  여자의 아들은 19살의 나이에 갑자기 실종되었다. 갱단의 테러와 연루된, 무수한 죽음들 가운데 여자의 아들이 있을 터였다. 여자는 10년 넘게 아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멕시코의 어딘가에서 비밀 매장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자는 그곳으로 길을 떠난다. 여자의 오른손에 쥐어진 밧줄은 매장지의 구덩이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몸을 묶는 용도로 쓰일 것이다. 왼손에 든 쇠망치는 땅을 파헤치기 위한 유용한 도구이다.

  어느 사진작가가 그렇게 여자의 고통스러운 삶의 한 단면을 기록했다. 나는 그 사진에서 기이한 감동을 받았다. 죽어버린 것이 확실한 아들에게 제대로 된 무덤을 만들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57세의 어머니. 나는 여자가 밧줄로 몸을 묶고, 시신들로 뒤엉킨 구덩이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여자에게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이 있다. 필사적으로 땅을 파헤치면서 사라진 혈육의 흔적을 찾으려는 사람들. 그들은 엄청난 두려움과 대면하면서 과거의 상처 속으로 잠수한다.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일. 땅을 파헤치고 잠수를 하듯, 그렇게 써 내려가야지. 이 글을 쓰는 데 영감을 준 사진 속의 주인공은 미국의 공영 라디오 언론 npr.org의 다음 기사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npr.org/2026/03/08/g-s1-112521/photos-international-womens-day-justice-rights-action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