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스(mouse)


얼마 전부터 컴퓨터를 쓰다 보면 마우스가 멈춰서 재부팅을
해야만 했다 마우스 안쪽에 뭔가 먼지가 끼어서 그런 건가
싶어서 마우스를 분해해서 알코올솜으로 닦고 먼지를 제거했다
그런데도 마우스의 멈춤 증상은 여전했다 그래, 이건 고장난 거다
헤아려 보니 이 마우스를 쓴 것이 햇수로는 10년을 훌쩍 넘어섰다
그러니까 고장날 만할 때도 된 것이다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마우스
였는데 안녕, 하고 보내야만 했다 다행히도 이 마우스를 살 당시에
똑같은 것으로 한 개를 더 사다 놓았다 새 마우스는 너무나도
부드럽게 클릭이 된다 이거 봐, 나는 새것이라고, 마치 그렇게
나한테 말하는 것 같았다 요새는 무선 마우스를 편하다고 쓰겠지만
나는 여전히 유선 마우스가 좋다 이게 고장이 나려면 또 10년이
지나가 버릴지도 모르겠다 초창기 마우스에는 동그란 트랙볼이
들어가 있었고, 그 트랙볼 사이로 오만 먼지가 들어가서 주기적으로
분해해서 청소를 해주어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트랙볼 마우스를
좋아했었다 광마우스가 트랙볼 마우스를 대체할 때도 나는
단종 예정인 트랙볼 마우스를 미리 사다놓고 몇 년을 더 썼더랬다
이제는 내가 쓰는 이 광마우스 모델도 진작에 단종되었다 세상은
너무나도 빨리 변해가고 있다 새롭게 갱신되는 AI 엔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경탄보다는 무시무시하다는 생각만 든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앞으로도 글을 쓸 것이라 생각하지만, 과연 AI 시대에
글쓰기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구심은 커져만 간다 정말 두려워요,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20대 대학생이 AI 시대의 생존법을 고민하자,
누군가 충고했다 몸 쓰는 일을 배우세요 기술이 있으면 살아남습니다
글쓰기는 몸 쓰는 일도 아니고, 그것이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인지도
모르겠다 소설과 시, 평론이 AI로 대체되는 평행우주는 어떤 곳일까?
나는 문득, 깨끗하게 청소해 놓은 트랙볼 마우스를 클릭할 때의
그 느낌이 그리워졌다 다시는 느끼지 못할 그 정갈한 청량감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슬리퍼


작년 봄에 크록스 슬리퍼를 하나 샀다 나에게 이제까지
슬리퍼는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 신는 것이지, 그걸
신고 어딜 돌아다닌다거나 하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크록스 슬리퍼를 사고 난 뒤에는 그걸 신고서 가까운
곳에는 편하게 돌아다니게 되었다 물론 맨발로 슬리퍼를
신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더운 여름에도 양말을 신고 다녔다
막상 슬리퍼를 신고 다니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잘 신고 다니다가 날이 추워지니 슬리퍼를 신으면 발이 시려웠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운동화를 꺼냈다 그런데 매번 운동화 뒤축에
뒤꿈치를 욱여넣는 일이 참으로 귀찮고 번거로웠다 나는 봄 여름 내내
잘 신고 다녔던 슬리퍼를 다시 꺼냈다 발이 좀 시려웠지만, 두툼한
울 양말을 신으니까 나름대로 신을 만했다 아이구 얘야, 춥겠다
네가 돈이 없어서 이 겨울에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구나 엄마하고
신발 사러 가자 엄마가 사줄게 엄마는 슬리퍼를 신은 나를
볼 때마다 그렇게 말했다 엄마, 난 슬리퍼가 너무 편해서 그래요
엄마는 내가 한 말을 다음번에는 까맣게 잊어버리므로 나는
나중에는 그래요 엄마, 신발이나 하나 사주세요, 라고 말하곤 했다
얼마 전에는 동네에서 길을 기다가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젊은 여자와 마주쳤다 예전 같으면, 한겨울에 무슨 슬리퍼를 신고
다니나 싶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여자가
마치 잘 아는 사람처럼 반가웠다 아, 당신도 슬리퍼가 편해서
이 겨울에 신고 다니는군 나는 슬리퍼를 신고 다니게 되면서부터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엊그제는 반바지를 입고서 아파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청년을
보았다 겨울에 반바지라니, 뭔가 참으로 생경스러웠지만 한편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저 사람은 열이 많은 사람인가 보군
그래서 반바지가 편한 거야 나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항아리들


며칠 전에 집을 나서는데, 아파트 출입구 뒷편에 못 보던 것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크고 작은 장독 항아리들이었다 아마도 누군가
어디서 주워 온 것들은 집에다 둘 데가 마땅찮아서, 거기에다 둔
모양이었다 그냥 하나만 있어도 눈에 거슬리는데, 잔뜩 쌓아둔
모양새가 영 마뜩잖았다 항아리 옆에는 쓰지 않은 화분도
여러 개가 있었다 그곳은 엄연히 공용 부지인데, 그걸 쌓아놓은
인간은 자기 집 마당처럼 쓰고 있었다 그 항아리들을 치우는
방법은 우선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 경험상
대부분 관리사무소의 일 처리는 늦고, 그걸 기다리는 것은
꽤나 짜증스러웠다 나는 매번 지나다니면서 그 꼴사나운 항아리를
보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종이를 써 붙이기로 했다 이곳은
공용 공간입니다 개인 물건을 쌓아두지 마세요 빠른 시일 내에
치워주길 바랍니다, 그렇게 써서 항아리에 붙여놓았다 다음날,
종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항아리는 여전히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이독경(牛耳讀經), 좋게 말해도 알아처먹질
못하는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 나는 다시 한번 글을 써
붙였다 아파트 공용 공간에 개인 물건 쌓아놓지 마시오 이 항아리들은
불법 폐기물이니, 항아리 주인은 치우시오 그리고 이 종이 함부로
떼지 마시오 CCTV 확인합니다 그 종이를 붙이고 나서 그다음 날,
나는 아파트를 나가는 길에 그 많은 항아리와 화분들이 휑하니 사라진
공터를 확인했다 항아리 주인이란 작자는 도대체 그것들을 어디로
가져간 것일까? 분명히 치울 데가 있음에도 너저분하게 공용 부지에
쌓아놓은 뻔뻔함이 역겨워졌다 그러면서도 나는 문득 그 항아리들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시골의 장독대에 있는 항아리는 정겨운 풍경이겠지만,
아파트 공터에 쌓여있는 빈 항아리들은 그저 흉물스러운 풍광일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단 2장의 종이로 항아리들을 먼 곳으로 보내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속 가능한 돌봄

여자는 아흔 살의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거동이 좀 불편하긴 해도 여자의 엄마는 인지능력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 여자의 고민은 거기에 있었다 인지능력이
아직 남아있는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도 괜찮을까? 여자는 이미
그 엄마를 15년 동안 돌봤다 형제들이 있다고 해도, 돌봄은 미혼인
여자의 몫이나 다름없었다 힘들다는 말이 목까지 차오른 것도
오래되었다 그래도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이란 질기디질긴 것이다
여자는 엄마를 어떻게든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감과 이제는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 사이에서 고민했다 쉽게 결론이 나질 않자,
여자는 자신의 사연을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렸다 어떤 이들은 여자가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엄마를 좀 더 보살피라고 했고, 또 다른 어떤
이들은 15년이면 할 만큼 했으니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라고 했다
그 후, 여자가 자신의 글에 달린 그 많은 댓글을 보고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15년이라, 여자가 아픈 엄마와 보낸
그 세월의 이면을 그 누가 가늠할 수 있겠는가? 치매를 앓는 엄마를
보살피면서 나는 지속 가능한 돌봄에 대해 늘 생각하게 된다
엄마가 낮시간만이라도 주간보호센터에 가면 좋으련만, 엄마는
그런 곳에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하신다 왜 그러시냐고 물으니,
거기에는 영감들이 있어서 싫으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할멈들만
있는 주간보호센터는 가시겠냐고 하니까, 그건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하신다 아, 할멈들만 있는 주간보호센터가 있기는 있을까?
아마도 그런 곳은 없을 것이다 엄마의 인지능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나는 엄마와 함께하는 이 여정이 어떻게 이어질지 전혀
알지 못한다 지속 가능한 돌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할
돌봄의 몫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결국 아웃소싱할 수밖에 없다
돈으로 교환되는 돌봄의 자본주의적 아웃소싱, 그것이 불가피한
선택이 되는 순간이 내게도 조금씩, 고통스럽게 다가오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쇼핑몰 앱에서 길을 잃다


최근 들어서 좀 심해진 습관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쇼핑몰 앱에 접속하는 시간이 늘었다는 것이다 전에는
뭔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앱에 접속해서 구매를 했는데,
이제는 딱히 살 것이 없어도 쇼핑몰 앱에 들어가 본다
특가로 나온 상품이나 기한이 임박해서 싸게 나온 상품을
보면 저걸 사야 할까, 잠깐 생각해 본다 그래서 사게 된 것들은
정말로 필요한 것들과는 좀 거리가 멀다 예를 들면 오렌지잼과
새로 나온 홍차 같은 것이다 오렌지잼은 사놓고는 아직 뚜껑도
열지 않았다 홍차 티백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차 맛이 좋았다
뭐랄까, 일단 사놓고 그 물건에 가치를 부여하는 셈인데 이게
소소한 일상의 행복인지 아니면 작은 소비를 통해 골치 아픈
고민에서 주기적으로 도피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곤 한다
물론 크게 값나가는 물건을 산 적은 없다 잼이나 홍차같이
확실히 먹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추리닝처럼 손쉽게 입을 수
있는 옷 같은 것, 주방 세제처럼 조만간 쓰게 될 물건 같은 것
꽤 비싼 물건을 충동적으로 샀다면 후회하겠지만, 이런저런
생필품을 사다 놓는 것이라 과소비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다
보니 쇼핑몰 앱에 접속해서 보내는 시간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랄지, 시간 낭비에 대한 나름의 죄책감이 그냥
허물어져 버린 느낌이 든다 어쩔 때는 그냥 하릴없이
쇼핑몰 앱을 들여다보면서 그 안에서 머물러 있을 때가
있다 뭔가를 사고 싶다는 마음도 들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삶에 대한 어떤 허기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로부터 마냥 도피하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지난 새벽에 꾼 꿈에는 집안 가득
빨랫감이 쌓여있었다 빨랫감은 천장 높이까지 그득그득했다
문득, 꿈은 가장 정확한 안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많은 빨래를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 갈수록
쇼핑몰 앱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시간이 늘어난다면
빨랫감은 계속 더 쌓이겠지, 나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