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누수(漏水)


원대한 꿈을 가진 이는
좌절하기 쉽다 그는
자신의 몰락을 쉽게
예감하지 못한다
미리 알지 못하는 자의
비극은 그 꿈의 크기만큼
버려야 할 것들에 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봄조차
누렇게 뜬 영양실조의
얼굴로 다가온다 누수는
소리 없이 이어지고 마침내
꿈의 물탱크에서는 텅텅
하는 소리만이 들린다
기괴한 메아리는 이명이
되어 쉴 새 없이 괴롭히며
현실의 비감함은 배고픔과
기나긴 침묵을 낳는다
두려움과 분노는 끼익끽
거리는 미닫이문 뒤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는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앞에서
오랫동안 서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명 시인의 학익진(鶴翼陣)


내게는 30명의 독자가
있다 못 쓴 시나 잘 쓴 시나
어쨌든 읽는 독자들 나는
12척의 전함으로 적군에
맞섰던 이순신 장군님을
우러러 생각한다 충무공은
구국의 결단으로 이 나라를
구해내셨다 하지만 쉬운 시를
쓰는 무명의 시인은 30명의
독자와 함께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할지 모른다 자신의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월 1만 원의 구독료로 매일
글을 쓴 젊은 작가가 있었다
구독자들을 어찌어찌 모아
쥐어짜 내고 쥐어짜 내어 글을
써서 작가는 빚을 다 갚았다고
한다 글로써 밥벌이를 해야하는
글쟁이의 자본주의적 생존기는
나에게 기묘한 이질감을 준다
내가 30명의 독자에게 매달
1만 원의 구독료를 받고 매일
시를 쓰겠다고 하면 어떠한가
피를 팔아서 빵을 사는 매혈의
심정으로 시를 팔아서 나는
무엇을 사 먹을 것인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다 문학의
자본주의는 독자의 숫자를
돈으로 환산한다 돈이 되지
않는 글은 죽은 문학이며
무익한 것으로 취급받는다
30명의 독자는 무명 시인이
닳아빠진 자본주의적 문학에
대항하는 비장한 학익진(鶴翼陣)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부부


횡단보도의 건너편
고개를 수그린
할머니는 침을
흘리고 영감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휴지를 꺼내어
늙은 아내의 입을
닦아준다

느린 낙엽의 속도
잊혀지고
물크러지는
노년의 시간

삐딱하게 고개를
돌리며 걷는다
그것이 내게는
오지 않을 것처럼

저 멀리에서
유모차를 끌고
젊은 부부가
지나간다
그들의 아이는
쉴 새 없이
비눗방울을
불어 날린다

내 얼굴과 옷에서
벌레처럼 터지는
비눗방울들
지 애새끼의
즐거움만 보는
외눈박이의 등신들

시멘트 공원 바닥
홀로 구구구
이기지 못할 봄을
온몸으로 앓는
멧비둘기 하나
짝 찾아 날아가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의 일기


일기 쓰기가 싫은
날이 있다 기분 나쁜
일에 대해 복기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다

새벽에 아빠가
꿈에 나왔다 아빠는
집에 불이 날 것
같으니 이사를 가라고
한다 꿈속의 아빠는
진짜 아빠가 맞을까
하루 종일 고민한다

5년을 쓴 전동칫솔이
고장났다 흔들거리는
전동축에 잇몸이 갈려
나가는 것 같다 새 걸
안 사고 버텨보려고
본드를 붙여본다
궁상은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본드와
무진장 흐른다

동물의 세계가
끝날 무렵에 초인종이
울린다 행방불명이
된 슬리퍼 택배를
들고 웬 남자가 서있다
남의 집 택배를 받아놓고
일주일 있다 돌려주는
이상한 패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밤이 되면 아픈 몸이
비명을 지른다
얼굴은 찌릿찌릿
발바닥은 쩌억쩌억
알레르기는 눈물을
쉴 새 없이 토해낸다
아아, 아버지
이 고운 봄 어디에
계십니까 쓰라린
오늘의 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4월의 산책


벚꽃과 목련이
진 자리 서글픈
봄의 잔해들
누구에게나
좋은 때는 너무
빨리 지나가

빨강 조끼를 입은
공공근로 늙은이들
공원 의자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고 있지

미장원에서 자른
머리는 너무나
가벼워 흰머리가
잘려 나갔기 때문일
거야 언제부터인가
긴 머리가 싫어졌어
희끗희끗한 짧은
머리가 더 나아

뭐가 잘났다고
모두들 입 좀
다물고 있었으면
좋겠어 여당을
지지하는 미용실
원장은 심통이 나서
그렇게 말하더군
선거 끝나고
고작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햇빛에 데워진
아스팔트에
비둘기는 배를
대고 따땃하게
늘어진 팔자
4월 오롯한
행복의 비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