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링크: 개별난방 공사에 대해 생각함 3 
https://blog.aladin.co.kr/sirius7/15607635



  며칠 전, 아파트 입구 게시판에 입주자대표회의 결과 공지문이 붙어있었다. 늙다리 거수기들의 그렇고 그런 회의록. 그런데 눈길을 끄는 항목이 있었다. 보일러 기사의 계약만료에 관한 것이었다. 계약만료, 해고, 잘리는 것, 뭐 다 똑같은 이야기다. 이제 아파트의 중앙난방 보일러를 담당하는 기사는 더는 필요 없다. 그 직원은 이 더운 여름에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러 나가야 할 것이다.

  지난 2주 동안은 새 가스관을 매립하는 공사가 있었다. 개별난방을 하게 되면 이전보다 가스 용량의 수요가 엄청나게 커지기 때문에 대용량의 가스관 매설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려면 아파트 주변 도로를 죄다 파헤치고 새로 가스관을 매립해야만 한다. 포크레인이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지막지하게 도로를 깨부수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렇게 파헤치는 도로는 2년 전에 새로 포장한 것이다. 도로포장 사업은 주민들의 숙원 사업이기도 했다. 그동안 낡은 보도블록은 걸을 때마다 패이고 부서져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장기수선충당금이 모일 때까지 기다려서 마침내 도로 공사를 했다. 그 공사 대금이 내 기억으로는 대략 1억 5천인지, 아무튼 2억 좀 못되는 금액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도로가 파헤쳐지고 있었다.

  공사업체에서 가스관 매설을 끝내고 다시 포장해 놓은 도로 상태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상태가 좋았던 아스팔트는 중장비로 죄다 긁혀있었고, 보도블록은 너덜더덜한 상태였다. 이 꼬라지가 보기가 그랬던지, 입주자대표회의에서도 말이 나왔던 모양이다. 재포장 공사 입찰을 해서 다시 공사를 하겠다는 거다. 미친 거냐? 장기수선충당금이 지들 돈 아니라고 그렇게 마구 써재끼고 있었다. 웃긴 건, 이 아파트 단지에서 거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저 집값 오르고, 자기 집 관리비 조금 아끼면 그만인 것이겠지.

  개별난방 전환공사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던 몇몇 사람들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구청 담당자가 현장 실사를 나왔는지도 알 수 없다. 그 결과에 대해 알려주기로 했는데, 입주자대표회의의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는 아무런 공지문을 내지 않고 있다.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문제를 제기하려면, 개별난방 전환 안건 상정과 주민 투표 과정에서 했었어야 맞다. 그때는 죄다 쌍수 들고 찬성하더니, 공사 시작하고 다 헤집어 놓는 단계에 와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니. 그냥 등신인 거겠지.

  관리사무소에서 게시한 공용부분 개별난방 공사대금은 5억 원이 넘는다. 아마 이번 공사로 장기수선충당금은 바닥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크다. 당분간 이 아파트 단지의 필요한 공사 따위는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2년 전에 도로 포장에 쓰여진 억대의 돈은 이번에 길바닥에서 녹아버렸다. 입주자대표회의의 머저리들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었다면 이런 식의 근시안적이고 퇴행적인 사업 추진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걸 보면, 남의 돈 쓰는 일은 참 우스울 정도로 쉽다.

  요새 아파트 재활용품 분리수거장을 지나가다 보면 오만가지 물품들이 다 나온다. 아마도 다용도실에 보일러를 설치하면서, 다들 그곳에 되는대로 쌓아두었던 살림살이들을 이번 기회에 정리하는 모양새다. 나도 커다란 화분 5개와 오래전에 비싼 돈 주고 산 김치통을 버렸다. 쓰지도 않은 새 김치통은 너무 컸다. 내가 버린 것들은 내놓자마자 누군가 다 가져가 버렸다. 그렇게 이 아파트 사람들은 헌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대신에 새 가전제품과 가구를 들여놓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가전제품 회사와 가구 배달점의 큰 트럭이 드나든다.

  어제는 엘리베이터에 공사업체의 새 공지문이 나붙었다. 공사대금 마감일을 알리는 종이였다. '공사대금을 마감일까지 납부해주지 않으면, 난방이 개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딜 가나 돈을 늦게 내는 사람들은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그 공지문의 문구는 기묘한 협박조로 들렸다. 저런 업체에서는 돈을 못 받으면 어떤 방식으로 돈을 받아낼까? 미수금을 받기 위해 해당 세대의 문을 두드리나? 아니면 용역 깡패? 설마, 그건 아니겠지. 나는 엘리베이터가 집에 도착하기까지 그렇게 그냥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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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링크: 개별난방 공사에 대해 생각함 2 
https://blog.aladin.co.kr/sirius7/15597949



  "에이씨, 나 안할 거야!"

  한 인부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계단에 울려 퍼졌다. 열린 우리집 현관문 사이로 화가 잔뜩 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잘 안되어서 저러나 보네... 현장 인부들 가운데 지 성질 못 이기고 저러는 건 그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형님, 진짜 힘들어 죽겠어. 뭐가 이렇게 일이 많아."
  "야, 나도 힘들다."
  "아, 그럼 나하고 형님하고 일 바꿔서 할까. 바꿔! 바꾸자고."

  퉁퉁한 남자는 일도 안 하면서, 우리집에서 작업하는 늙은 인부에게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는 잘 알지 못하는 '노가다의 세계'를 TV로 시청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 토요일에는 우리 라인의 보일러 공사가 있었다. 공사는 아침 7시 반부터 오후 5시까지 이어졌다. 온갖 소음과 먼지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내가 보니까, 이 공사팀은 대략 7명에서 8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하나의 팀을 이루어서 일을 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부분의 공사를 했다. 대략 정해진 순서에 따라, 앞 공정이 끝나면 다음 공정을 맡은 인부가 그 일을 했다. 하루 종일 대문은 열어놓아야 했는데, 낯선 외부인이 내 집에 그 어떤 예의도 차리지 않고 마구 드나드는 것도 참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그들은 결코 집주인에게 인사를 하지도 않았고, 예의도 없었다. 아침에 제일 먼저 보일러 포장 뜯으러 온 인간은 전등을 켜놓지 않았다면서 큰 소리로 불평했다.

  내가 이제까지 보아온 그런 현장직 노동자들은 대개 '밝기'에 민감했다. 작업 현장은 무조건 환하게 밝아야만 한다. 이건 아주 환한 대낮에도 적용된다. 낮에도 전등을 켜놓아야만 한다. 나는 아침까지도 집안의 짐을 치우느라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침의 그 노가다는 아주 무례한 인간이어서, 전등불이 안 켜져 있다며 대놓고 성질을 부렸다. 그 더러운 성질머리는 공사로 드나들 때마다 신발을 내팽개치는 소리에서도 드러났다.

  이런 공사를 하게 되면 용역을 주는, 그러니까 공사비를 지불하는 집주인은 '갑'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을'이 되어버린다. 보일러 시공은 일반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다. 대개 '노가다'로 불리는 사람들은 이제 현장의 전권을 쥐고 있는 전문가 '갑'이 된다. 집주인이 시공이 잘 되어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저, 계약한 대로 공사가 무사히 잘 끝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러니 인부들이 성깔을 부리는 것도 좀 너그럽게 보아야 한다.

  그런데 중간중간 인부들이 일해놓은 것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수도 배관을 연결할 때는 테플론 테이프로 감아서 연결을 하는데, 그 테이프 감아놓은 꼬라지가 정말 웃겼기 때문이다. 테플론 테이프는 마감이 잘 안되어서 깃발처럼 너덜거리고 있었다. 야, 내가 감아도 저거보다는 더 잘 감겠다. 정말이지 물이나 새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난방 분배기를 교체하느라 깨어놓은 시멘트 덩어리는 분배기함 안쪽에 대충 쌓아두었다. 내가 그걸 치워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곧 그 일을 맡은 인부가 와서 철판으로 그냥 덮어버렸다. 언젠가 TV 뉴스에 나온 인테리어 괴담이 떠올랐다. 인테리어 공사를 마치고 입주한 집주인이 1년 뒤에 베란다 누수로 바닥을 뜯었더니, 거기엔 온갖 건축 쓰레기가 다 있었다는. 그렇게 분배기함에는 지저분한 시멘트 조각들이 그대로 매장되었다.     

  마침내 작업이 끝났다. 나는 마지막 현장 인부가 내민 작업 확인서에 서명을 해주고 문을 닫았다. 

  "일도 못 하면서 곤조는 오지게도 부리네."

  곤조. 근성(根性, こんじょう)이라는 뜻의 이 일본어는 영화 현장에서도 많이 쓰인다. 오래전의 일이다. 후배의 졸업 작품 상영회에 갔었다. 후배의 작품은 20여분 가량의 단편으로 장르는 드라마였다. 그런데 촬영이 좀 이상했다. 핸드헬드(Hand-held)로 촬영된 화면은 내내 정신 사납게 흔들렸다. 아니, 왜 저걸 저렇게 찍었지? 나는 중간 휴식 시간에 그 후배를 만났다.

  "근데 말이야, 왜 촬영을 그렇게 한 거야?"
  "아, 그게요. J가 촬영 감독이었는데, 핸드헬드로 하겠다고 빡빡 우겨서... 내가 끝까지 그건 아니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냥 걔한테 밀린 거죠."

  후배는 아쉬움으로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J는 잘 알고 있었다. J는 자기주장이 강한 편에 속했다. 그게 좀 웃긴 게, 뭔가 대단한 전문가적 능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쓰잘데기 없는 자부심에서 오는 거였다. 아마도 프리 프로덕션(Pre-production) 과정에서 후배와 제작팀은 대략의 작업 과정을 합의했을 것이다. 그런데, J가 정작 로케이션 현장에 가서는 핸드헬드로 찍어야겠다고 곤조를 부렸던 모양이다. 어쩌겠는가. 후배의 졸업작품은 어쩔 수 없이 J의 뜻대로 촬영되었다.

  1) 일머리도 없으면서 곤조를 부리는 것
  2) 맡은 일을 잘하면서 곤조를 부리는 것

  2번의 경우는 그나마 봐줄 만하지만, 1번을 인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떻게든 1번과 엮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만, 사람 사는 일이 꼭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보일러 시공 인부들의 곤조 부리기. 나는 그런 것을 관찰하는 것도 작가로서 나름대로 흥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문가가 아니다. 전문가는 큰 그림을 생각하고, 책임감 있게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 인부들은 보일러 설치를 누군가의 집에 온기와 편안함을 더하는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 대충대충 해버려도 괜찮은 일이었을 뿐이다. 노가다와 전문가의 그 머나먼 간극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나는 수도 배관의 나풀거리는 테플론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감싸주었다. 테프론 테이프도 제대로 감을 줄 모르는 이들에게 '전문가'의 칭호는 결코 합당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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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의 글: 개별난방 공사에 대해 생각함 1편 링크
https://blog.aladin.co.kr/sirius7/15583628


  폭풍 전야. 드디어 내일은 대망의, 아니 그 빌어먹을 보일러 공사가 있다. 오늘은 바로 옆라인 공사였는데, 하루 종일 들리는 공사 소음에 귀가 먹먹해졌다. 이번 기회에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보일러'라는 기계는 전자레인지나 세탁기와 같은 가전제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일러는 가스와 냉온수 배관, 난방 분배기와 연결을 해야 하는 복잡한 기계이다. 당연히 보일러의 설치 과정은 까다롭다. 집안에 그런 기계가 들어온다는 건,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골칫덩이를 장만하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내 생각에는 개별난방이 기존의 중앙난방보다 더 좋은 점은 약간의 난방비 절약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 단지의 90퍼센트의 입주민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개별난방 전환을 찬성했을까? 물론 기존 중앙난방으로 부과되는 난방비에 대한 불만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보다 아파트 소유주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였을 것이다. 아파트 인근의 2개 단지는 여전히 중앙난방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다. 그러니까 개별난방 방식으로의 전환은 매매(賣買) 시, 그 아파트 단지 대비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아파트 단지 보다 더 오래된 그 아파트는 왜 개별난방 전환을 고려하지 않는가? 그곳은 그런 공사 따위에 관심이 없다. 그 아파트 단지에서는 '재건축'을 밀어붙이는 중이다. 어차피 재건축할 거, 개별난방 공사를 해서 뭐하겠는가? 거긴 재건축 추진 위원회가 열심히 활동 중이다. 어떻게든 집값을 올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단순히 먹고 자고 쉬는 곳이 아니라, 거대한 물질적 욕망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나처럼 공사 소음과 먼지가 귀찮아서 개별난방 전환에 '반대' 표를 던진 사람은 어떤 면에서 참으로 나이브한 것일지도 모른다. 중앙난방의 비효율성이 정말로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선은 주민들의 전반적인 양해를 얻어서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동대표 회장의 독단적인 안건 상정에 이어 단 한 번의 설명회, 주민 투표, 공사 착수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한마디로 총체적인 불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개별난방 전환 공사는 전체 입주민의 80퍼센트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투표가 부결되면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입주자 대표 회의는 반대표 세대를 설득해서 정족수에 필요한 찬성표를 받아내면 된다. 기존의 찬성표는 그대로 유효표 수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건 최근의 법원 판례를 근거로 한다. 법원은 입주자 대표 회의의 신속한 사업 추진이 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사에 반대하는 개별 세대의 선택권은 없다고 봐야 한다.

  지난번 글에서 이제 개별난방 공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고 언급했다. 가칭 '개별난방 공사를 우려하는 입주민 모임'이 실제적인 행동에 나섰다.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그들은 구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그들이 오늘 엘리베이터에 붙인 종이 쪼가리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1) 다음 주에는 담당 주무관이 아파트로 현장 실사를 나오기로 예정되어 있다. 2) 보일러 공사 대금을 업체에 납부하는 일을 유예해달라. 그들이 부과한 보일러 가격과 공사비는 공동구매임에도 별로 저렴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청의 현장 실사가 끝난 후에 납부해도 늦지 않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다.

  그런데 담당 공무원이 나와서 점검한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시공 과정에서 행정 절차상의 심각한 문제가 없는 이상 공사가 중단되기도 어렵고, 이제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구청 공무원이 가진 권한은 아주 제한적이다. 그들은 관련 법 규정에 근거한 위법적인 사항만을 지적하고 행정적인 조치만을 부과할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그런 부분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면, 시장이 온다고 해도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그 기구가 가진 권한은 막강하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는 아파트 단지의 최종 의사 결정 기구로, 입주민은 자신들의 권리를 각 동의 입주자 대표들에게 양도한 것으로 간주된다. 아마도 그 담당 공무원이 할 수 있는 이야기란, '어떻게 싸우지 말고 잘 알아서 하세요', 정도일 것이다.

  오늘 엘리베이터에는 새로운 공사 일정이 나붙었다. 아파트 단지의 주변 도로를 다 파헤쳐서 새롭게 도시가스 배관을 설치할 거라는 공사 공지였다. 이 작은 아파트 단지는 재건축의 전망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재건축에 필요한 용적률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재건축 가능성은 별로 없으니, 개별난방 전환으로 집값이나 올리자, 이런 생각으로 90퍼센트의 주민들은 기꺼이 찬성표를 던졌다. 집안 곳곳을 죄다 들쑤시고 뒤집어엎으면서, 거대한 흰 벌레 같은 보일러 호스가 덕지덕지 연결된 거실의 정경은 누군가에게는 참으로 감격스러울 것이다. 그것이 과연 입주민들의 기대대로 집값 천만 원의 상승을 가져다주겠는가? 내가 살고 있는 이 낡은 집은 그렇게 엄청난 물욕과 총체적인 불합리성이 조우하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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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요새 틈이 날 때마다 하는 일이 있다. 구글 서치 콘솔(Google Search Console)에 들어가서 내 블로그 글들의 색인 생성을 요청하는 일이다. 이제까지 써온 영화 글들이 대략 500편 정도이다. 이 글들이 구글 검색 결과에 나오게 하려면, 구글에다가 직접 요청해야 한다. 그런데 이 작업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무려 500편의 글의 URL을 일일이 클릭해야만 한다. 클릭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구글에다가 '요청'하는 것이지, 그걸 들어주는 건 구글 마음이다.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인 셈. 구글이 보기에 내 글이 지들의 검색 결과에 나올 만큼 영양가 없다고 생각하면, 퇴짜를 놓을 수도 있다.

  아이구, 구글 행님요. 좀 잘 봐주이소. 겉으로는 이렇게 말을 해도, 속으로는 더럽고 치사하다는 생각만 든다. 내 머릿속에는 문득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1980년대와 90년대, 미국 대사관의 비자 신청은 꽤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구불구불, 마치 전국구 맛집의 대기 줄처럼 미국 대사관 앞에서 비자 신청을 하려고 기다리는 이들은 무작정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 신청을 하기 위해 기나긴 줄을 선 이들의 사진은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대국이 가지는 힘을 상징했다. 구글 서치 콘솔을 드나들면서 내 많은 글의 URL을 일일이 찍는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딱, 그 사진 생각이 났다. 천조국 미국은 구글이며, 나는 그 구글 왕국의 방문 비자를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다.

  사실 나는 최근까지도 '구글 서치 콘솔'이 뭔지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자신의 블로그 개설기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블로그의 글이 구글 검색에 나오게 하려면, 구글에 직접 글의 색인 생성을 요청해야 합니다'는 구절에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내가 글을 쫙 쓰면 구글 갸들이 다 알아서 검색하도록 해주는 거 아니었어? 정말로 나는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내 구글 블로그는 원래 알라딘 서재의 영화 글 백업 창고 개념의 블로그였다. 그런데 그쪽 블로그의 방문자 유입은 아주 적었다. 나는 그 블로거의 글을 읽고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건 내 블로그 글이 구글 검색 결과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려면, '내 글이 검색 결과에 나오게 해주십사' 나는 구글에 정중하게 요청해야 하는 거였다.

  나처럼 구글 왕국 행 방문 티켓을 얻으려는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블로그로 금전적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더욱더 열심히 구글의 대문을 두드리고 두드릴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글, 콘텐츠가 구글 검색 결과에 나와야지 사람들이 와서 볼 테니까. 구글은 그런 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즉시 응답하지 않는다. 아니, 하기 어렵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 구글의 입장은 이러하다.

  "우리 시스템에는 매일 엄청난 요청이 들어오고 있어. 우리가 그걸 다 들어주려면 시스템에 부하가 걸려. 그러니 시간이 걸린다고. 기다리던가, 아니면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당신 글이 인터넷의 어디쯤에 있는지 찾아서 알려줘. 물론 그렇게 알려줘도 언제 등록이 될지 확답은 줄 수 없어."

  산더미처럼 쌓인 곰 인형의 눈알 붙이기 부업. 구글 서치 콘솔에다가 500편이 넘는 글의 URL을 찍고 있는 내 모양새가 그러하다. 나는 왜 이걸 하고 있을까? 그건 내 새끼들, 내 피와 시간과 정신이 들어간 그 글들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는 속담. 여기에서 '함함하다'는 말은 털이 보드랍고 반지르르하다는 뜻이다. 나에게는 함함하기 그지없는 그 글이 구글의 이름표를 달고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딱, 그것뿐이다.

  나에게는 아직도 인터넷으로 눈알을 붙여주어야 할 곰인형이 300개나 남아있다. 구글은 하루에 기껏해야 10여 개 안팎의 색인 생성 요청을 받아들인다. 나는 새삼 새로운 시대의 정보 권력자 구글의 위엄을 실감한다. 그것은 나에게 카프카가 쓴 '성(城)'의 거대한 성문 벽 앞의 한 인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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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방 가위를 찾기 위해 나는 방 2개를 왔다 갔다 했다. 이곳저곳을 훑어보고 나서야 가위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내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는가? 아니다. 지금 집안은 난민 캠프를 방불케 한다. 작은 방에는 생수가 쌓여있고, 다른 방에는 세탁 세제와 항아리며 잡다한 살림살이가 자리하고 있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바로 '개별난방 전환 공사'이다. 내가 살고 있는 32년 된 이 구축 아파트는 중앙난방에서 개별난방으로의 전환을 앞두고 있다. 400 세대가 못 되는 이 작은 아파트 단지는 거대한 공사판으로 변했고, 하루 종일 공사 소음이 메아리처럼 울린다. 끔찍하다.

  작년 겨울의 일이었다. 동대표 영감탱이가 어디서 무슨 소리를 주워듣고는 귀가 펄럭였던 모양이다. 갑자기 '개별난방 전환 공사'를 입주자 대표 회의 안건으로 내걸었다. 그러더니 입주민을 위한 설명회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열렸다. 그 설명회에 주민 몇 명이 참석했는지는 모른다. 관리사무소에서는 방송으로 내보내길, 많은 입주민이 개별난방 전환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했다. 곧 개별난방 전환 찬반 투표가 실시되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나는 그냥 부결되려니 했다. 공사가 시작되려면, 전체 입주민의 80퍼센트 이상이 찬성을 해야 한다. 나는 반대 입장이었다. 그 지난한 공사는 생각만 해도 귀찮았다.

  물론 겨울이면 난방비가 많이 나오기는 했다. 특히 가스 요금 인상률이 무척 높았던 작년 겨울은 난방비만 30만 원 가까이 나왔다. 주민들 사이에서 난방과 관련한 이런 저런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난방을 넣는 날씨와 시간대로 인한 민원도 매해 반복되는 문제였다. 그런 불편함이 있기는 해도, 중앙난방에 익숙해진 나는 구태여 개별난방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겨울만 그럭저럭 넘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다수 주민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무려 90퍼센트가 넘는 압도적 찬성률로 개별난방 전환이 결정되었다. 그 결정에는 공사가 완료되면 '집값이 오른다'는 장밋빛 전망도 깔려있었다. 우리집 포함, '반대' 표는 겨우 20세대 정도였다.

  그래서 오늘, 1차 공사로 가스계량기 교체와 가스관 연결 공사가 이루어졌다. 관리사무소의 공지문에는 다용도실을 치워달라고 적혀 있었다. 공사 1주일 전부터 나는 다용도실의 짐을 빼내었다. 무슨 화수분처럼 살림살이가 나왔다.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그릇과 화분도 있었다. 그것들을 내다 버리는 것도 일이었다. 공사를 하게 되면 먼지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그 먼지들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부엌의 잡다한 물건들도 치워놓아야 했다. 내가 오늘 주방 가위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입주민 찬반 투표에서부터 시공사와 보일러 선정, 이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과연 그 세부적인 결정이 얼마나 투명한 걸까? 겨우 몇 명의 입주자 대표라는 사람들이 거수기처럼 참석하는 회의와 회장 주도의 사업 추진은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찬성표를 던진 90퍼센트의 주민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불만과 균열의 지점은 엊그제 엘리베이터에 붙은 종이 쪼가리 하나에서 드러난다.

  자칭 '개별난방 공사를 우려하는 모임'이라는 사람들이 글을 써 붙여놓았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공사 내용과 상황이 주민들에게 제대로 공유되지 않고 있다. 공사 업체에 입주민의 불만을 전달하고 시정을 요청하려고 한다. 뜻이 있는 입주민분들은 일요일 저녁 8시에 주민회관에 모여달라.

  "웃기고 자빠졌네."

  그걸 읽자마자 그 말이 나왔다. 아니, 그럴 거면 공사 전에 입주자 대표회의 방청 신청을 하고 발언을 하던가, 관리사무소에 민원을 넣던가 해야지. 이제 와서 도대체 뭘 하자는 건가. 이미 아파트 전체가 공사판으로 변한 마당에. 머저리들. 버스 떠난 다음에 등신처럼 손 흔드는 격이다. 공사 업체에 뭔 요구를 한다는 건가? 공사 완료 기념 열쇠고리라도 받아내겠다는 건가? 그 거지같은 종이 쪼가리는 멸시 받아 마땅하다.

  일주일 뒤에는 보일러 설치 공사가 있다. 또 한 번 이 집은 먼지와 소음에 휩싸일 것이다. 이 공사를 해서 얼마나 세대 난방비가 절약될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원치 않는 공사를 다수결이라는 다수의 횡포로 한 달 넘게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공사는 8월 말이 되어서야 끝날 예정이다. 개별난방 전환 공사는 아파트라는 애증의 주거공간과 입주자 대표회의라는 불투명한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불신만을 나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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