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상(박해일 분)은 유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힘든 아르바이트를 마다하지 않는 착실한 대학원생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여자 친구는 유부남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뜻밖의 계기로 그 유부남이 편집장으로 있는 잡지사에 취직하게 되면서 원상의 일상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자 친구를 빼앗긴데 이어 잡지사 일로 만나게 되어 호감을 갖게 된 수의사 박성연(배종옥 분)마저 편집장 한윤식(문성근 분)과 좋아지내는 사이가 되자 원상은 편집장에 대한 질투와 선망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쯤되면 원상이 참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 원상에게서는 분노와 원한의 감정을 가진 피해자의 전형적인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그는 오히려 한윤식에게 호감을 가진 것처럼 보이며 운전기사 겸 비서 노릇까지 자청하면서까지 한윤식의 근처를 맴돈다. 물론 한윤식이 가해자의 위치에 서있는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는 분명 일탈의 경계선에 있으면서도 그가 살아가는 방식은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아내에게도 애인에게도 공정하게 잘 대해주면서 즐겁게 살아가면 된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쿨해보이기까지 한다.

  이상한 것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위험한 가해자는 이원상이라고 믿게 된다는 점이다. 그는 책임지지도 못할 무모한 행동으로 하숙집 딸에게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기고, 그에게 연민과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박성연에게도 자신이 보여준 말과 행동이 편집장과의 경쟁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며 냉정히 관계를 끝내버린다. 원상이 지닌 모습은 분명 편집장과는 대조적으로 순수하게 보인다. 하숙집 딸이 삶의 무거운 짐으로 힘들어할 때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모습이라던가, 유학 자금을 모으기 위해 건물 청소 아르바이트도 가리지 않고 착실히 하는 모습 등은 그가 세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는 먼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순수성은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기치 못한 상처와 균열의 흔적들을 남기고 만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영화의 마지막에는 하숙집을 나와 한윤식의 집에 머무르게 된 원상이 윤식의 딸과 대면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결코 가볍게 보이질 않는다. 이전까지 그가 보여준 모습대로라면 윤식의 딸과는 어떤 관계에 있게 될지 또 그가 몰고올 상처와 균열은 어느만큼일지, 보는 이는 지레짐작으로 겁마저 먹게 된다.

  이 영화는 왜 순수함이 가져오는 결과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무수한 균열인지에 대해 묻고 있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이기적이며 속물처럼 보이기까지한 한윤식의 삶은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 무해하다. 불확실하고 갈 곳 모르는 청춘의 순수한 모습 속에 숨겨진 파괴력과 위험을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의 동선으로 살려내는 점이야말로 이 영화의 탁월함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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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히 TV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어떤 할머니의 손에 길러지던 개가 주인이 죽자 시름에 잠겨서 먹는 것마저 거부하다가 결국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할머니 대신 새로 주인이 된 이는 개를 아낌없이 보살폈지만 그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동물에게도 영혼이라는 것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것과는 어떻게 다를까? 영혼에 등급을 매기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렇다면 영혼에도 저급과 고급이 존재할까... 주인을 따라 죽어버린 개의 이야기는 내게 뜻밖의 물음을 남겼다.

  영화 "파이란"에 나오는 이강재(최민식 분)의 삶은 남루하고 비참하게 떠도는 영혼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살아온 삶의 내력을 아무리 털어보아도 순결한 것, 온전한 것이 나올 것 같지가 않다. 그에게는 멸시와 모욕을 받는 것이 일상이며 어떤때는 당연해 보이기까지 하다. 때론 울컥하는 마음에 어깃장을 놓아보기도 하지만 남는 것은 상처입은 얼굴과 추스리기 어려운 몸 뿐이다. 이런 그에게 구원이란 것이 가능할까? 놀랍게도 그것은 얼굴도 모르는 한 여인(장백지 분)의 죽음을 통해서 시작된다. 

   강재는 세상을 떠난 파이란이 남긴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린다. 왜 그랬을까? 그건 자신을 그리워하고 고맙게 생각했던 여인에 대한 마음의 빚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사실 그 둘 사이에는 감정의 교류라고 할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건 마치 송신만 가능한 전파 발신기와 같다. 그 때문에 강재에게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거듭 써내려간 여인의 편지글은 이상하게도 보는 이의 마음에 와닿기 보다는 여인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 순간 공허하게 흩어져버린다. 장례식을 위해 내려간 해변가 마을에서 강재가 보여준 감정의 동요는 지나치다는 인상을 준다(그 때문에 그의 동생은 형의 그런 모습이 오버한다고 하고, 직업 소개소 소장은 연기라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여인이 그토록 절절하게 써내려갔던 편지는 외로운 타국 생활에서 스스로를 견딜 수 있게 만든 독백인지도 모르며, 강재가 해변가에서 토해내었던 울음은 영락해버린 자신의 처지에 대한 처절한 회한에 가깝게 보인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그러한 단절에도 불구하고  순전한 한 여자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던 남자는 자신의 남루한 영혼을 응시하게 된다. 그러나 온전한 삶을 향한 구원의 여정에 들어섰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남자의 꿈은 곧 좌절되고 만다. 이렇게 보면 감독은 지독한 비관론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파이란"이 보여주는 세상은 순결한 영혼이 존재하기에는 사악한 곳이며, 그렇지 못한 영혼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줄만큼 따뜻한 곳이 아니다.

  강재와 파이란. 그 둘 사이의 소통의 불일치와 만남의 부재는 이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영혼과 그 구원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비극적 결말을 보여주지만, 한편으로는 강재가 죽기전에 비디오를 통해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파이란의 모습을 보며 감동하는 장면은 사악함과 어리석음이 가득한 세상에서도 버릴 수 없는 희망이 있음을 내비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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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0-09 14:33   좋아요 0 | URL
저 이 영화 무지 좋아해요. 잘 읽었습니다.^^
 


 

 

 

 

 

 

 

 

 

  후 샤오시엔의 영화들은 대부분 러닝타임보다 훨씬 더 길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것을 롱테이크의 미학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는 상당한 고통을 수반한다. 더군다나 그 내용이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생겨나는 상처들의 이야기가 많으니 참으로 괴로운 영화보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들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본다. 재미도 별로 없고("동동의 여름방학"이 예외이기는 했지만) 영화 속의 이야기도 때론 참 고통스러운데도 영화를 끌어안고 내려놓기가 싫다.

  "동년왕사"의 주인공 아하의 가족사는 이야기 자체로 보면 그보다 더 비극적일 수가 없다. 1947년에 중국 본토에서 어쩔 수 없이 이주하게 된 아버지는 늘 본토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다가 폐렴으로 죽고,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서 툭하면 집을 나가버리는 할머니와 함께 다섯명의 아이들을 부양하는 신산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어린 아하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그 어머니는 후두암으로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고, 늘 집에서 누워만 지내던 할머지는 그 후 얼마 안있어 개미가 들끓는 시체로 손주들에게 발견된다. 이렇듯 영화는 한 가족에게 닥친 불행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그로 인해 지속되는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감독은 어설픈 희망에 대해서도 쉽게 말해주지 않는다. 성장하면서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던 아하는 자신의 폭력적인 성향이 군사학교에 맞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곳에 가려고 결심하지만 좋아하던 여학생이 보여준 신뢰 때문에 대학 시험에 응시한다. 그러나 1년 후 시험의 실패를 알려주는 아하 자신의 나래이션과 함께 영화는 서둘러 끝나버린다. 그토록 많은 고통과 슬픔을 겪은 아하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상처의 그림자는 길고도 깊다.

  왜 그러한 상처가 생기게 되었는지, 그것은 결코 끝나지 않고 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악몽인지 영화를 보는 이도 함께 고통스럽다. 그 때문이었을까? 두시간이 넘도록 이 영화를 보고 났더니 진이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조개가 진주를 만드는 과정은 자신의 몸 속에 들어온 돌이나 모래 같은 이물질에 대한 반응에서부터 시작된다. 조개는 그 이물질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같이 끌어안고 사는 것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전자를 선택하면 썩어서 그냥 죽는 것이며, 후자는 이물질을 감싸안는 물질을 만들어내어 몸 속에 진주로 키워내는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보석으로 취급되는 진주겠지만 조개의 입장에서는 그것과 함께 사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날마다 커지는 그 덩어리로 인해 더 고통스럽고 힘들지도 모를 일이다.

  살면서 주어지는 마음의 상처가 심하면 어떤 이는 고통을 참다못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취한다.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것은 더 힘들다. 상처가 나를 삼켜버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켜내야하기 때문이다. "동년왕사"는 비극적인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그 무참한 상처만 응시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의 고통스러운 진리를 보여주는듯 하다. 진주는 아름다운 보석이지만 그 우아한 아름다움 안에 그토록 잔혹한 진실이 숨겨져 있음이 참으로 아이러니인 것처럼 때론 우리네 삶도 그렇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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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05-14 11:23   좋아요 0 | URL
서투른 코멘트를 달기 주저되는 리뷰네요.이물질을 거부하면 썩어서 그냥 죽는다..으음.저에게 울림을 주는군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지금으로부터 십년도 더 된 그 때, 내게 그 책은 아무런 감흥이나 의미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소설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여주인공이 모든것이 갖추어진 부잣집 신사와 결혼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도대체 뭐가 그리 대단하다는 건지, 왜 세계 명작선집에 이 책이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재작년에 EBS에서 BBC에서 제작한  6부작 드라마 "오만과 편견"을 방영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도 시큰둥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며칠전, 이 드라마를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게 왠일인가, 그 오래된 기억 속에서 박제된 소설 속 주인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마치 피란델로의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에서 등장인물들이 작가에게 자신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하는 것처럼, "오만과 편견"의 등장인물들은 책 속의 활자에서 모두 뛰쳐나와서 내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재치와 기지가 넘치는 대사, 각각의 인물들이 지닌 개성들, 관계 사이의 끌림과 긴장감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예전엔 단지 결혼을 둘러싼 소동 쯤으로 생각되었던 이야기 속에서 새삼 발견한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 그 현실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렇다면 제인 오스틴이 바라본 결혼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엘리자벳과 다아시의 경우처럼 그러한 행복한 결혼에 이르는 것에 대해 한치의 의구심도 갖지 않았을까? 그의 소설 대부분의 결말이 주인공들의 결혼이라는 사실만을 본다면 그렇다고 여길법도 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작가가 생각한 이상적인 결혼은 엘리자벳과 다아시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그가 바라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속하는 실제의 결혼생활이란 엘리자벳의 사촌 콜린스와 친구 샬롯의 경우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결혼 후 처음으로 자신을 방문한 엘리자벳에게 샬럿은 남편과 자신이 얼마나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있으며 각자의 일과를 어떻게 유지하는지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나서 이렇게 말한다.

 "난 혼자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 

  샬롯은 콜린스와의 결혼생활이 그렇게 될 줄 명확히 인식을 했음에도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도무지 분별력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콜린스와 같은 사람과 결혼한 이유는 그가 가진 배경의 안락함이었다. 샬롯의 태도는 속물 근성과는 다른 것으로 그보다는 결혼의 현실적인 측면을 인정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아는 사람들이 선본지 일주일, 또는 한달내지 그 보다 조금 더 된 시간만에 결혼에 이르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젠 어느정도는 이해가 된다. 물론 당사자들 가운데에는 "한눈에 반했답니다!"라고 친절하게 내게 알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과연 무엇이 그들의 진심에 가까운 것일까? 그것이 내게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이젠 그들을 오만과 편견으로 대하지 않게 된 것은 세월이 가져다준 가장 큰 수확이다. 

  세상의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에 관해서도 감정과 현실은 따로 고려될 수 있으며, 때론 그 어느것 하나에 의지하여 결정을 내릴 수도 있음을, 그리고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 또한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엘리자벳과 다아시는 감정과 현실, 그 둘다에 충실한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경우가 이젠 흥미있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콜린스와 샬롯의 결혼에 대해 오래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에게 "오만과 편견"이 다시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세월의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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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 샤오시엔의 영화들은 재미하고는 거리가 먼 영화들이다. 그의 작품 가운데 맨처음으로 본 "비정성시"만해도 그 지명도 때문에 꼭 보겠다고 결심을 해서 보다가 다 자버린 기억이 난다. 난 아직도 그 영화는 처음과 끝부분만 떠오른다. 그의 근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해상화"는 또 어떤가. 도대체 몇분이나 이어져서 끝날 것 같지 않은 롱테이크들을 참아내는 것은 지루하다 못해 거의 고역에 가까웠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는 확실히 작가라고 말할 수 있을듯 하다. 관객을 향해 자신의 의도를 그처럼 완벽하게 필름으로 전달할 수 있는 역량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보는 관객은 환호하면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그냥 피해버리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 밖에 할 수가 없다. 그 중간에서 어정쩡한 타협을 하고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호남호녀"는 대만의 영화인으로서 그가 천착하는 대만 현대사의 어두운 그늘에 대한 탐구의 열정으로 나온 작품이다.  중국 본토에서 밀려나 대만에 자리잡은 장개석 정부는 대만 본성인과의 마찰을 유혈로 진압하고 거기에 동조하는 지식인, 학생 집단마저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차별로 테러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영화는 그 시절에 희생된 창 비유와 청 하오뚱 부부의 이야기를 마치 액자처럼 끼워넣고 창 비유 역을 연기한 영화 배우의 현실을 평행편집을 통해 보여준다. 

  오로지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올바른 길을 걸어온 남편을 테러로 잃고 슬픔에 찬 삶을 살아야했던 1950년대의 여인과,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살던 자신을 사랑으로써 감싸며 그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했던 남자가 자신의 눈 앞에서 폭력조직에 의해 살해당하는 모습을 본 1990년대의 여인의 삶은 기묘하게도 닮아있다. 창 비유 역을 맡은 여자 배우는 사랑하는 사람을 어처구니 없는 폭력으로 잃어야만 했던 자신의 고통을 정치적인 보복의 희생자였던 한 여인의 고통 속에서 응시한다. 과연 무엇이 달라진 걸까? 시대는 바뀌어도 선량한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죽어가는 현실에 대해 감독은 마치 되묻고 있는듯 하다. 

  내가 후 샤오시엔의 영화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어찌 보면 참으로 정치적인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한편으로는 이루지 못한 것, 되돌릴 수 없는 것, 그로 인한 상처에 대한 연민과 괴로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통은 결국 살아남은 사람들만의 몫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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