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샤오시엔의 영화들은 대부분 러닝타임보다 훨씬 더 길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것을 롱테이크의 미학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는 상당한 고통을 수반한다. 더군다나 그 내용이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생겨나는 상처들의 이야기가 많으니 참으로 괴로운 영화보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들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본다. 재미도 별로 없고("동동의 여름방학"이 예외이기는 했지만) 영화 속의 이야기도 때론 참 고통스러운데도 영화를 끌어안고 내려놓기가 싫다.

  "동년왕사"의 주인공 아하의 가족사는 이야기 자체로 보면 그보다 더 비극적일 수가 없다. 1947년에 중국 본토에서 어쩔 수 없이 이주하게 된 아버지는 늘 본토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다가 폐렴으로 죽고,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서 툭하면 집을 나가버리는 할머니와 함께 다섯명의 아이들을 부양하는 신산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어린 아하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그 어머니는 후두암으로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고, 늘 집에서 누워만 지내던 할머지는 그 후 얼마 안있어 개미가 들끓는 시체로 손주들에게 발견된다. 이렇듯 영화는 한 가족에게 닥친 불행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그로 인해 지속되는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감독은 어설픈 희망에 대해서도 쉽게 말해주지 않는다. 성장하면서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던 아하는 자신의 폭력적인 성향이 군사학교에 맞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곳에 가려고 결심하지만 좋아하던 여학생이 보여준 신뢰 때문에 대학 시험에 응시한다. 그러나 1년 후 시험의 실패를 알려주는 아하 자신의 나래이션과 함께 영화는 서둘러 끝나버린다. 그토록 많은 고통과 슬픔을 겪은 아하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상처의 그림자는 길고도 깊다.

  왜 그러한 상처가 생기게 되었는지, 그것은 결코 끝나지 않고 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악몽인지 영화를 보는 이도 함께 고통스럽다. 그 때문이었을까? 두시간이 넘도록 이 영화를 보고 났더니 진이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조개가 진주를 만드는 과정은 자신의 몸 속에 들어온 돌이나 모래 같은 이물질에 대한 반응에서부터 시작된다. 조개는 그 이물질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같이 끌어안고 사는 것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전자를 선택하면 썩어서 그냥 죽는 것이며, 후자는 이물질을 감싸안는 물질을 만들어내어 몸 속에 진주로 키워내는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보석으로 취급되는 진주겠지만 조개의 입장에서는 그것과 함께 사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날마다 커지는 그 덩어리로 인해 더 고통스럽고 힘들지도 모를 일이다.

  살면서 주어지는 마음의 상처가 심하면 어떤 이는 고통을 참다못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취한다.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것은 더 힘들다. 상처가 나를 삼켜버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켜내야하기 때문이다. "동년왕사"는 비극적인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그 무참한 상처만 응시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의 고통스러운 진리를 보여주는듯 하다. 진주는 아름다운 보석이지만 그 우아한 아름다움 안에 그토록 잔혹한 진실이 숨겨져 있음이 참으로 아이러니인 것처럼 때론 우리네 삶도 그렇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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