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당신"은 태국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2002년도 작품이다. 작년의 EBS 다큐 페스티벌에서도 이 감독의 작품이 소개되었는데 "정오의 신비한 물체"가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인 다큐의 형식에서 벗어나 환상과 현실이 기이하게 얽힌 이 작품은 어떤면에서 그의 영화세계를 잘 보여준다는 생각도 든다. "친애하는 당신"의 경우도 매우 독특하다. 시작한지 40분도 훨씬 지나서 뜨는 제목이라던가, 인물들간의 설정이 불분명한 점, 또한 영화의 대부분이 마치 밀림 속의 정지된 화면 같다는 점이 그러하다.

  영화에는 세명의 인물이 나온다. 태국으로 건너온 버마 노동자 청년 민, 그와 비슷한 또래의 태국 노동자 여성 륭, 륭과 모종의 관계에 있는 중년의 여성 오른이 그들이다. 이 세사람은 어떤 고리로 이어져있긴 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된 것이며 또 이어지는지에 대해 영화는 끝까지 침묵한다. 다만 그 세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함께 밀림에 있게 된 시간 동안만을 카메라는 세밀하게 포착해낸다.

  밀림이란 공간에 부여된 의미는 감독만이 부여한 아주 독창적인 것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듯 그곳은 순수의, 손상되지 않은, 원시적인 것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바로 이 공간 속으로 민과 륭, 오른, 이 세명의 인물들을 떠밀었다. 각각 서로 다른 욕망을 가진 세명의 인물들이 그곳에서 만나게 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아름다움과는 먼 것이라는 점은 민이 앓고 있는 원인모를 피부병과 그들 곁에 끊임없이 출몰하는 개미떼가 잘 보여준다. 륭과 오른은 민의 피부병에 관심을 기울이고 낫게하려고 하지만 그의 피부에서는 계속 부스럼이 일고 껍질이 벗겨진다. 륭은 민과의 낭만적인 소풍을 생각하며 이런저런 간식을 싸왔지만 그 음식들은 오히려 숲개미들의 먹이가 될 뿐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세사람은 모처럼 맑은 강물에 몸을 담그고 평화롭게 보이는 한때를 보낸다. 평화롭게 보인다는 표현을 쓴 것은 그것이 진정한 평화와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속셈과 욕망으로 상대방을 탐색하고 결코 마음을 열지 않는다. 단지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인다는 것, 이 세사람의 모습이야말로 대부분의 인간들이 사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감독은 묻는 것이다. 그대는 진정으로 사람이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가? 설령 소통이 가능하다 해도 그것이 진실된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강물에서 나온 후 민과 륭은 낮잠에 빠져들고, 오른은 한쪽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아, 이 장면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든다. 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영화는 차이밍량의 "애정만세"의 끝장면이었다. 그래, 결국은 이거였어. 아주 뻔한 이야기잖아. 인간이란 그렇게 착하지도 않고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른이에게 말하지도 않아. 그리고 그건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슬프고 괴롭다는 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닌데 말이야...

  이 영화가 칸의 주목할만한 시선을 통해 세상에 나왔을 때 평론가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대한 그러한 열광적인 반응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의 배경이 단지 태국 밀림이라는 것, 그 이상의 것이 있을까? 이 영화의 속편격이라고 할 수 있는 감독의 최근작 "열대병"을 보고나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더 분명해질지는 모르겠다.

  "친애하는 당신"에는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진실이 태국의 밀림을 배경으로 아주 느린 호흡으로 펼쳐진다. 밀림 속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그 모든 것은 진심이 아니고 가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식과 허영의 시간들이 우리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점을 놓치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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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이 슌지의 영화들을 볼 때마다 새삼 느끼는 것은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은 거의 모든 것이 가슴을 통하여 오기 때문이다. "러브 레터(1995)"의 눈부신 설원에서 안부를 묻는 여주인공의 애절한 목소리라던가, "4월 이야기(1998)"에 나오는 비오는 날의 빨간색 우산은 어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 아니다. 최근작 "하나와 앨리스(2004)"를 보라. 감독 자신이 작곡한 영화 음악은 러닝타임 내내 관객의 귀를 떠나지 않는다. 그는 영상과 소리를 다루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감독임에는 틀림이 없는듯 하다.

  이런 그가 1996년에 만든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영화가 다루는 소재나 분위기가 과연 이와이가 만든 것인가 하는 의문을 자아내기에 충분할지도 모른다. 깔끔하게 정제된 화면을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피가 튀는 잔혹한 장면과 더러운 뒷골목의 이곳저곳을 누비는 카메라의 시선이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새삼 놀라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인다. 그리코가 엔타운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라던가(이 역을 맡은 여배우 차라는 실제로 가수이며 배우 아사노 타다노부의 아내이다), 정체불명의 요원 란(와타베 아츠로 분)과 관련된 액션 장면들은 이와이의 영상을 다루는 솜씨를 보여준다. 화면은 쉴새없이 지나가고 관객은 여러명의 인물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숨이 찰 지경이다. 그러니 무슨 생각을 오래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보고 느낄 따름이다. 거기에다 일어와 영어, 중국어가 섞인 대사는 혼란스럽게 들린다.

  두시간 반에 가까운 러닝 타임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이와이 슌지가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매우 충실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제목이 의미하는 "나비"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꿈, 더럽고 비참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살아나가게 만드는 아주 작은 희망 같은 것을 의미하지만, 그 나비는 그리코와 아게하의 가슴에 새겨진 날지 못하는 문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현실은 절망스러운 것이다. 어쩌면 그 현실을 과도한 희망과 꿈으로써 넘어서려고 하는 시도는 무위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리코와 함께 행복하기를 꿈꾸었던 페이홍이 "마이웨이"를 부르며 결국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장면과 그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친구들이 돈다발을 불 속에 모두 넣어버리는 장면은 비극을 넘어서 허무에 가깝다. 

  꿈을 꿔, 꿈을 꾸라니까, 하고 이와이 슌지는 자신의 영화들 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 같다. 현실이 괴롭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그도 분명 알고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극복하는 방식은 바로 환상을 통해서이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얼핏 보기에는 좌절된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그 밑바닥에 깔린 것은 환상성이다. 단지 현실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꿈과 환상의 힘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와이 슌지를 단순히 아름답고 감각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쉽게 단정할 수 없게 만드는 근거이기도 하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이야기 얼개가 다소 빈약한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여러면에서 볼 거리가 많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코 역으로 나온 차라의 노래와 독특한 매력, 이제는 중년에 접어든 란 역의 와타베 아츠로의 고운 얼굴(!)과 명료한 영어발음을 들을 수 있다(그가 이처럼 분명한 대사처리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작품들에서 배역의 차이가 있기는 해도 점차적으로 발음이 불분명하게 뭉그러지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이밖에도 이와이 슌지가 생각한 가상의 세계인 엔타운의 모습들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최근작 "하나와 앨리스"에서도 이와이 슌지는 여전히 자신만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길 위에서 만나는 새로운 느낌들을 앞으로 어떤 작품을 통해 보여줄지 기대를 품게 만드는 감독, 그는 바로 이와이 월드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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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과연 정확하게 그 시간이 어느정도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무리 넉넉히 잡아도 이십대 후반까지가 아닐까? 그런면에서 본다면 "오렌지 데이즈"의 주인공들은 청춘의 빛나는 순간에 있는 이들이다. 카이와 그의 친구인 쇼헤이와 케이타, 사에와 친구 아카네, 이렇게 다섯명은 오렌지 색 노트에 자신들의 고민과 생각을 적어가며 가까워진다. 이야기가 이쯤되면 아주 흔한 청춘 드라마려니 생각하기 쉽지만 오렌지 데이즈는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그 뒷면의 예민하게 흔들리는 젊음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본 이들은 "아, 나도 그땐 그랬어"와 같은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카이와 사에의 쉽지 않은 연애의 과정이 이야기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긴 하지만 드라마가 보여주는 것은 꿈과 이상을 찾아가는 젊은 날에 관한 것이다. 사진에 관심이 있지만 자신의 재능에 회의를 느끼고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는 쇼헤이, 괜찮은 직장에 취업이 확정되었지만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일까 묻는 케이타와 아카네, 잃어버린 청력과 음악에 대한 열망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에, 전공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카이, 그 다섯명의 청춘들이 껴안고 있는 어려움은 그 시기를 지나는 이들이라면 한번쯤 겪어 보았을만한 것이다.

  "오렌지 데이즈"는 그들이 보내는 순수함과 생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찬 청춘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그 시간이 지난 후에는 무료하고 지친 일상을 버틸 힘이 되어주는 아름다운 기억이 되기 때문이다. 그 소중한 시간들을 보내면서 카이와 사에는 서로가 일생에 빛이 되어주는 존재임을 알게 되고, 쇼헤이와 아카네는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힘을 얻으며, 케이타는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가업을 물려받겠다는 결심을 한다.

  문득 청년 심리학 강의를 들었을 때가 떠오른다. 인간에게는 각 발달단계마다 성취해야만 하는 발달과업이 있다. 그것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했느냐에 따라 다음 발달 단계의 성취가 달라지는데 일과 사랑은 청년기의 발달과업이다. 자신이 살아가면서 해야할 평생의 일, 그 시간을 함께 할 단 한명의 소중한 사람을 청춘의 날들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 두가지를 찾아가는 청춘의 날들은 반짝반짝 빛나지만 그 빛남의 뒷면에는 그에 못지않은 아픔과 고민이 있다는 것을 그 시간을 건너간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오렌지 데이즈"의 주인공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힘이 되어주면서 그 시기를 지나간다.

  "너는 내 생의 빛이었어."

  사에는 카이에게 고백한다. 이제 막 어둑어둑 해지려는 길 위에서 그렇게 한줄기 빛이 되어주는 무언가를 찾아가는 시간, 그것이 사람이든 일이든 좋다. 그것을 찾는 청춘의 시간은 아름답다. "오렌지 데이즈"는 바로 그 빛나는 날들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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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드라마를 보다보면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드라마 내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요한 흐름이 된다면 그 드라마는 직업 드라마가 된다. 최근에 내가 본 직업 드라마들 속에서 여러 흥미로운 점들이 보여서 이야기 해보려 한다.

  무엇보다도 직업 드라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춤추는 대수사선(1997, 이하 춤대)"이 아닐까 싶다. 춤대 매니아라는 말까지 생겼을만큼 이 드라마의 매력은 대단하다. 형사라는 특수한 직업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주연배우들의 호연이 탄탄한 각본과 조화를 이루면서 놀랄만한 흡인력을 갖게되었던 것이다. 전직이 영업사원인 주인공 아오시마 형사는 정의와 원칙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 그의 신념은 이상하게도 주변의 동료, 상관, 상부와 끊임없는 마찰을 일으킨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직업적 윤리와 의무에 충실한 사람이지만 바로 그 점으로 인해 그가 속한 집단에서 "골칫거리"로 인식된다. 결국 TV판 춤추는 대수사선은 아오시마 형사가 자신의 상황에서 최선의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대우와 처벌을 받아 동네 파출소로 좌천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왜 개인의 선한 지향과 가치가 그가 속한 집단의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아마도 "제도"라는 거대한 장벽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이유로 아오시마의 선배로 퇴임을 앞둔 노련한 와쿠 형사는 "부당하다고 느낀다면 높은 자리에 올라서 제도를 바꾸라"는 신조를 강조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바꿀 수 없다면 거기에 맞추어 사는 것이 현실의 방도인 셈인데 아오시마는 이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갈등은 "블랙잭에게 안부를(2003)"의 신출내기 의사 에이지로도 겪는다. 고등학교 영어교사인 아버지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지워가며 의대를 졸업한 에이지로는 대학병원의 인턴으로 의사로서의 첫발을 내딛지만, 비리와 편법이 판치는 의료 현실에 실망과 분노를 넘어 좌절감마저 느낀다. 그런 그를 그 누구도 내놓고 응원하지 않는다. 그와 뜻을 같이 한다는 것은 집단의 규범과 가치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정의롭지만 환영받지 못하며 따돌림 당한다. 왜 모두들 무엇이 옳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할까? 시간이 지나도 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까? 에이지로는 끊임없이 고민하지만 해답은 없다. 많은 이들은 늘 그래왔던 규범과 전통이라는 이름아래 그냥 묻어져 가는 것이다. 

   "비기너(2003)"는 보다 직설적으로 법이라는 제도를 조명한다. 각자 다양한 출신 배경을 지닌 8명의 사법연수생들의 이야기와 매회 제시되는 사건들을 통해 법 제도의 의의와 가치에 물음을 던진다. 법에 대한 희망을 갖고서 첫시작을 하는 그들에게 법은 따뜻한 인간의 얼굴을 지닌 것이 아니라, 엄격하고 때론 냉혹한 것이며 그에 따라 내린 어떤 판결은 부조리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변화는 불가능한 것일까? 일본의 드라마는 결코 제도의 급진적인 변화와 개혁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춤대의 두번째 극장판 영화라고 할 수 있는 "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에서 아오시마는 그런 말을 한다. 올바른 엘리트가 이끄는 집단에는 희망이 있다고. 수평하고 대등한 의사결정 방식 대신, 집단내 차별을 인정하고 엘리트 옹호론으로 가는 것인가 하는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런치의 여왕(2002)"은 변화에 대한 소시민의 이상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어 30년 넘게 작은 경양식집을 이어온 나베시마 가문의 구성원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가게를 어떻게 운영해나갈지 고민하고, 서로 다른 대안으로 인해 갈등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결국 택하는 것은 전통이다. 아버지 나베시마가 "내일 일본이 가라앉더라도 난 오늘 데미그라 소스를 만들겠다"고 한 말은 의무와 전통에 충실한 일본인의 면모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오랜 경기침체와 불황을 겪고 있는 일본 사회는 지금의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그들이 생각하는 사회 변화와 제도 개혁에 대한 기대와 열망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만들어질 직업 드라마들 속에서 그러한 면면들을 살펴보는 것도 그 궁금증을 푸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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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작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 분)는 손님들로부터 매일 이른 새벽에 유모차를 끌고다닌다는 노파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데 얼마후 그는 집을 나서는 길에 우연히 노파와 그 유모차 안에 타고 있는 죠제(이케와키 치즈루 분)를 만나게 된다. 하반신이 마비된채 바깥 세상과 단절되어 집에서만 지내던 죠제에게 이른 새벽의 산보는 세상과 만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 그 만남을 계기로 츠네오와 죠제는 서로의 마음을 열어가는 사이가 되지만 츠네오의 여자친구가 한 말로 인한 오해로 죠제는 상처를 받고 둘 사이는 멀어진다. 얼마후 죠제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죠제를 다시 찾은 츠네오는 죠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으로 바뀌어있음을 알고 함께 지내기 시작하는데...

  죠제와 츠네오가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는 그 과정을 보노라면 사람과 사람이 소통한다는 것,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 깊이 공감하게 된다. 할머니와 함께 좁고 불편한 집에서 주워온 책들을 통해 세상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던 죠제는 츠네오를 통해 진짜 세상과 만난다. 츠네오에 대한 죠제의 감정은 그의 고백에서 잘 드러난다. 자신은 츠네오를 만나기 전까지 아무것도 없는 깊고 어두운 바다 밑바닥을 돌아다녔지만 이제는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고. 그러나 츠네오가 떠나면 또다시 어두운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조개처럼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나 그들이 함께 했던 소중하고 아름다왔던 시간들은 어느날 갑자기 끝나버린다. 츠네오는 예전의 여자친구에게 다시 돌아가고 죠제는 혼자만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왜 죠제와 헤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츠네오는 "자신이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라고만 독백할 뿐, 더이상의 설명은 없다. 그리고 다시는 죠제를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츠네오와 함께 지내는 동안 죠제는 휠체어를 사자는 츠네오의 제안을 거절한다. 츠네오의 등에 업힐 수 있다는 것은 죠제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행복을 느끼는 하나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츠네오가 떠난 후 전동 휠체어를 타고 바깥을 다니는 죠제의 모습은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뒷모습에서는 쓸쓸함이 묻어난다. 죠제는 이제 홀로 깊은 바다 속을 헤매는 조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두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졌더라면... 이라고 한탄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더러는 함께 할 수 없는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 두사람이 함께 사랑했던 그 시간들,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만나 어둡고 깊은 바다밑에서 수면 가까이로 떠올랐던 그 황홀한 순간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눈부시게 빛나던 사랑의 아름다운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빛나고 아름다운 것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 것 같다. 지속될 수 없는 것,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슬프고 쓸쓸한 그림자를 남긴다. 그런 이유로 많은 이들은 그 괴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 보다는 이루어진 사랑의 남루한 일상을 끌어안고 사는 것을 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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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15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싶었던 영화를 놓쳤네요.

혹시 어디 하는 데 없는지 알아봐야겠어요.

저도 일본영화 좋아합니다.

기타노 다케시 것은 극장에서 거의 다 봤어요.

최근 것 빼고......

푸른별 2004-11-15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은 영화인데 개봉관을 많이 못잡은 것 같아요. 지금도 상영하고 있을 것 같은데... 하나와 엘리스 보셨나요? 나름대로 재미있게 본 영화였습니다. 특히 끝부분의 발레장면이 아름다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