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지금으로부터 십년도 더 된 그 때, 내게 그 책은 아무런 감흥이나 의미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소설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여주인공이 모든것이 갖추어진 부잣집 신사와 결혼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도대체 뭐가 그리 대단하다는 건지, 왜 세계 명작선집에 이 책이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재작년에 EBS에서 BBC에서 제작한  6부작 드라마 "오만과 편견"을 방영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도 시큰둥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며칠전, 이 드라마를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게 왠일인가, 그 오래된 기억 속에서 박제된 소설 속 주인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마치 피란델로의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에서 등장인물들이 작가에게 자신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하는 것처럼, "오만과 편견"의 등장인물들은 책 속의 활자에서 모두 뛰쳐나와서 내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재치와 기지가 넘치는 대사, 각각의 인물들이 지닌 개성들, 관계 사이의 끌림과 긴장감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예전엔 단지 결혼을 둘러싼 소동 쯤으로 생각되었던 이야기 속에서 새삼 발견한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 그 현실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렇다면 제인 오스틴이 바라본 결혼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엘리자벳과 다아시의 경우처럼 그러한 행복한 결혼에 이르는 것에 대해 한치의 의구심도 갖지 않았을까? 그의 소설 대부분의 결말이 주인공들의 결혼이라는 사실만을 본다면 그렇다고 여길법도 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작가가 생각한 이상적인 결혼은 엘리자벳과 다아시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그가 바라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속하는 실제의 결혼생활이란 엘리자벳의 사촌 콜린스와 친구 샬롯의 경우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결혼 후 처음으로 자신을 방문한 엘리자벳에게 샬럿은 남편과 자신이 얼마나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있으며 각자의 일과를 어떻게 유지하는지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나서 이렇게 말한다.

 "난 혼자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 

  샬롯은 콜린스와의 결혼생활이 그렇게 될 줄 명확히 인식을 했음에도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도무지 분별력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콜린스와 같은 사람과 결혼한 이유는 그가 가진 배경의 안락함이었다. 샬롯의 태도는 속물 근성과는 다른 것으로 그보다는 결혼의 현실적인 측면을 인정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아는 사람들이 선본지 일주일, 또는 한달내지 그 보다 조금 더 된 시간만에 결혼에 이르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젠 어느정도는 이해가 된다. 물론 당사자들 가운데에는 "한눈에 반했답니다!"라고 친절하게 내게 알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과연 무엇이 그들의 진심에 가까운 것일까? 그것이 내게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이젠 그들을 오만과 편견으로 대하지 않게 된 것은 세월이 가져다준 가장 큰 수확이다. 

  세상의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에 관해서도 감정과 현실은 따로 고려될 수 있으며, 때론 그 어느것 하나에 의지하여 결정을 내릴 수도 있음을, 그리고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 또한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엘리자벳과 다아시는 감정과 현실, 그 둘다에 충실한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경우가 이젠 흥미있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콜린스와 샬롯의 결혼에 대해 오래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에게 "오만과 편견"이 다시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세월의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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