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래도 사랑할만한 인간 
  홍상수는 이전의 영화들에서 항상 자신의 분신들을 등장시켜왔다. “오! 수정”에서 문성근이 분한 영화감독, “극장전”의 김상경이 분한 영화 감독 지망생은 어느 정도 감독 자신이 반영된 캐릭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해변의 여인”에서 홍상수는 그 자신을 날 것으로 내놓는듯한 느낌이 든다. 중래가 바로 그 인물이다. 
  중래란 인물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이와 같은 철없음을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문숙과 만나고 헤어진 일을 보면 그가 매우 즉흥적이고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숙이 후배의 애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자신에게 넘어오게 만드려고 부리는 수작이라던가, 하룻밤을 보낸 후에 문숙이 보이는 친근함이 부담스러워 “산뜻해지고 싶다”고 단번에 감정적으로 밀쳐내는 장면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 계산적이거나 비열한 구석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래는 그렇게 문숙을 보내고 혼자 다시 서해안으로 돌아와서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른다.  
  그런 중래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해변가 나무 앞에서 꺽꺽 소리를 내며 우는 장면이 아닐까? 그렇다. 중래는 그런 인간이다. 횟집 종업원은 마구 무시하며 욕을 퍼대는 그가 나무 한 그루가 주는 알 수 없는 도저한 감동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중래란 인물의 그러한 자기중심성은 선희에게 인터뷰를 하고 싶다며 접근해서 이것저것 묻는 대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살아오면서 무엇이 제일 힘들었느냐는 중래의 질문에 선희는 그다지 힘들었던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중래는 “난 초등학교 3학년 이래로 사는 게 힘든데.”라며 혼잣말을 한다. 중래의 그 말은 결코 우스개 소리가 아니며 아마도 그가 믿는 진실일 것이다. 사는 건 누구에게나 힘들다. 그러나 중래에게는 자신을 둘러싼 삶의 모든 일이 매우 심각하고 극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중심성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문숙을 보자. 문숙은 중래와 선희가 술에 취해 쓰러진 자신의 머리를 넘어갔는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중래에게는 정말 사소하고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문숙에게는 그토록 중대한 관심사였던 것이다.  
  중래와 문숙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은 그러한 자기중심성이 만들어내는 파열음 속에서 어긋나게 배열되어 있다. 하늘의 별은 자신이 불러주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게 아니나며 천진스럽게 말하던 문숙은 선희의 지갑이 침대 밑에 있는 것을 알고도 선희에게는 못보았노라고 말한다. “해변의 여인”에 나오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다면적인 모습과 감정의 과잉, 극대화된 자기중심성을 이해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홍상수는 이에 대해 친절한 모범 답안을 제시해준다. 그의 전작들에 그러한 모습들이 있었는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림까지 그려서 관객들에게 답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답은 중래가 문숙에게 사물과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 들어있다. 하나의 실체를 온전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또는 두세 가지 정도의 정보나 사실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보다 자세한 관찰을 통한 많은 정보를 취합해 판단할 때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설파하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중래는 알기 쉬운 도형 그림을 그려가며 문숙에게 자신의 의견을 납득시킨다.     
  중래가 그려낸 도식은 어떤 면에서는 홍상수가 견지하는 인식론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이기심과 극도의 불합리함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는 의미 있고 숭고한 것을 찾고, 그것에 매혹되기 쉬운 면이 있다는 것 또한 놓치지 않고 보여주려 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중래나 문숙은 결코 속물로 단정짓고 내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도정(道程)에 있는 인물인 셈이다. 그러므로 홍상수에게 그들은 치졸함과 어리석음, 지나친 자기중심성에 빠진 인물들임에도 ‘그래도 사랑할만한 인간’인 것이다.


2. 우연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 
  “해변의 여인”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몇몇 장면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연출은 홍상수의 전작들에서도 종종 봐왔던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해변에서 개를 산책시키던 젊은 남녀는 왜 개를 도로에 내버리고 가버릴까? 중래가 욕을 퍼댔던 횟집 종업원은 매우 소심한 인물이었음에도 왜 해변가에서 중래와 선희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보였던 것일까? (그가 매우 소심한 인물이라는 점은 선희에게 얻어맞은 뒤 겁에 질려 소변을 보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한 장면들은 마치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왜 별로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사건이 지나치듯 제시되는 것일까? 영화 초반부에 중래가 횟집 종업원에게 한 언사는 분명 모욕적이고 지나친 면이 있다. 중래는 그것에 대해 사과하라는 후배 창욱의 요구를 애써 무시한다. 중래에게 그 일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심각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이 한밤의 해변을 거닐고 있는 중래에게 예기치 않은 일로 나타난다. 그는 굉음을 내며 오토바이로 위협하는 낯선 이로 인해 겁에 질린다. 그를 이 위기에서 구해주는 것은 선희의 대찬 행동이다.  
  그런가하면 주인에게 버려진 개 똘이는 새 주인과 함께 전혀 다른 이름으로 문숙 앞에 나타난다. 그 순간에 문숙이 똘이에 대해 이전에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과 믿음은 배반당하고 어긋나버린다. 아무렇지 않게 무심코 지나버린 사물과 사건이 시간이 지난 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와 나타나는 것, 그것은 마치 멀리 가버렸다 생각한 부메랑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과도 비슷해 보인다.  
  홍상수가 생각하는 이 세계란 그처럼 인과론(因果論)으로 촘촘히 짜여진 그물망 속에 우연(偶然)이 슬그머니 끼어드는 곳이다. 중래가 처음에 구상한 영화가 우연히 일어난 세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탐구해 가는 인물에 대한 것이란 점도 그러한 감독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처음 던진 곳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부메랑처럼 우리네 삶은 아주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이 전혀 다른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결정론적 숙명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홍상수는 여기에 우연성이 선사하는 헐거운 매력을 덧붙인다. 문숙과 선희가 맺은 유대 관계를 생각해보면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  
  문숙과 선희는 술을 마시며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다. 문숙은 그 다음날, 침대 밑에서 아무렇지 않게 지갑을 빼내어 든다. 그 지갑은 선희가 그토록 찾던 것이었지만 문숙이 결코 보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것을 마침내 문숙은 선희에게 돌려준다. 중래라는 한 남자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두 여자 사이에 적대감이 아닌 새로운 유대감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과연 이전의 홍상수 영화에서 무시당하고 소홀히 다뤄져왔던 여성성에 대한 변모된 시각을 반영하는 것일까? 혹자는 이것을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여성들간의 연대의식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한다. 일면 수긍이 가는 말이기도 하지만, 홍상수의 관심은 그와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는 두 여자의 만남 그 자체가 갖고 온 우연한 결과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중래와 문숙, 선희는 우연히 서해안의 해변가에서 만났다. 그리고 떠났다. 중래는 새 영화의 시놉을 건지고, 선희는 잃어버린 지갑을 찾으며, 문숙은 해변 모래사장에 빠져버린 차를 빼내어 마침내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그들은 함께 지내는 동안 즐거웠을까? 아마 충분히 즐거웠을 것이다.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삶은, 이 거대한 우연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그 자체로 놀랍고 의미 있는 것이다. 그 발견의 여정을 홍상수는 여유와 유머를 담아 그려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분명 〈8과 1/2〉은 잘 만든 영화이다. 펠리니는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갈등과 고뇌를 현실과 무의식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드는 매혹적 영상으로 승화시켰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나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왜 그랬을까? 문득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작가는 자기 자신의 고통을 후벼 파내어 팔아먹고 사는 존재라는. 펠리니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가톨릭에 대한 부채의식, 복잡한 여성 편력, 제작자와의 갈등, 창작의 어려움, 언론과 대중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들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는 펠리니의 삶과 예술에 대한 근원적 태도를 이해하는 데에는 정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8과 1/2〉은 감독 자신에게는 일종의 자기 고백이자, 세상과 사람들을 향한 예술적 선언을 했다는 면에서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8과 1/2〉에서 펠리니가 추구하는 작가적 태도에는 독선의 가능성도 내포되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펠리니의 후기 작품들이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고 탐미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사티리콘〉은 그 결정판이었다. 펠리니는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구원의 가능성으로서의 영화 만들기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내면과 상처들로 침잠하는 것을 선택했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펠리니가 〈8과 1/2〉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에 작가가 상업성을 떠나 생존한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예술적 태도를 포기하지 않고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8과 1/2〉과 같은 영화는 시간이 갈수록 제작이 불가능한 프로젝트가 되어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감독의 작가적 지위는 불안하고 모호한 것으로 변해간다. 

  오늘날 멀티플렉스의 폭주하는 관객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에게 감독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일이 관심사가 되고 있는가? 결코 아닐 것이다. 대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시각을 압도하는 볼거리이다. 제작자와 투자자가 원하는 영화는 돈이 될만한 영화이며, 감독이 가진 역량은 그러한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의 시대에 펠리니가 추구하는 예술적 태도, 작가적 역량은 그다지 유용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구이도는 자신이 만들려는 영화 속의 모든 인물들을 불러모아 서로 손을 맞잡고 춤추게 만든다. 구이도를 통해 펠리니는 자신의 과거와 진실하게 조우하고, 그가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과 화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진정한 작가가 탄생하는 순간은 허위의식과 겉치레를 포기하고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게 직면하게 될 때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8과 1/2〉은 펠리니의 작가적 정체성을 명시적으로 알리는 이정표와도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예술로서의 영화적 위치가 자본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펠리니가, 그리고 〈8과 1/2〉과 같은 영화가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본다. 이 영화는 우리가 진정으로 작가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리고 작가의 예술적 선택에 얼마나 인내하고 관심을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괴물〉, 반미의식의 산물 

 〈괴물〉은 괴수 영화인가? 분명, 나름대로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돈이 많이 들어가면 안되는 것이 없다)으로 구현된 괴물의 형상은 이제까지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구경거리이기는 하다. 대다수 한국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며 우리도 이제 헐리우드에 못지않은 괴수 영화를 갖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왜 봉준호는 2006년 7월의 한강에 괴물을 등장시켰을까? 그것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지 않고서 이 영화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키는 일은 어려워 보인다. 영화 초반의 장면들이 암시하듯 괴물과 미군 부대가 한강에 무단 방류한 포름알데히드는 무언가 관련이 있다. 여기서 ‘암시’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것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멀쩡한 한강의 물고기가 어느 날 갑자기 괴물로 변해버린 것이 단지 독극물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그럼에도 우리가 이 영화에서 괴물 탄생의 배후로 미국을 자연스럽게 인지하는 것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삽입한 독극물 방류 장면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반미에 대한 노골적인 정서를 드러낸 매우 정치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반미의식이 극렬했던 1980년대가 아닌 2000년대에 미국에 대한 적대와 분노가 새삼스레 괴물의 형상으로 나타나야하는가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를 독극물 방류 사건으로 한정짓는 것은 손쉽기는 해도 설득력은 떨어진다. 그 보다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일상화된 반미 의식의 표출이라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괴물이 반미 의식이 격렬한 아랍 세계가 아닌, 혈맹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부르던 한국에 나타났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영화 〈괴물〉에 나타난 반미의식은 매우 분명하고 노골적인 것이라 우리의 흥미를 그다지 끌지 못한다. 한때 운동권에 몸담았던, 그러나 이제는 무기력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둘째 아들 박남일의 존재도 그러하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가족에 대한 묘사이다. 한강 매점을 운영하고 있는 강두네 가족을 들여다보는 일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을 제시해준다고도 할 수 있다.


2. 위기상황에서의 가족주의

  강두네 가족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서민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가족에 대한 애정만큼은 각별한 그들을 결집시키는 매개체는 바로 혈연, 핏줄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무화시킨다. 박희봉에게 현서를 찾는 일은 아들 강두의 앞날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어있다. 왜냐하면 약간 모자라서 어떻게 살지 늘 걱정스러운 아들에게 그나마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은 손녀인 현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핏줄이 안정된 삶을 영위하는 일은 박희봉의 존재가 세대를 이어 기억됨을 의미한다. 

  혈연은 오랫동안 한민족(韓民族)으로 이상화된 공동체를 유지시켜온 가장 강력한 가치였다. 그러니 그것이 〈괴물〉의 강두네 가족에게 있어 유달리 부각되거나 특별하다고 할 것도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위험과 재난 상황에서 혈연에 바탕을 둔 가족주의가 작동하는 기제에 대해서다. 왜 사회체제, 국가는 생명의 위협에 처한 개인, 가족을 보호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그 위협에 맞서 싸워야 하는가? 

  봉준호는 〈괴물〉의 강두네 가족에게 닥친 재앙에 대한 해결을 전적으로 그 가족 자신의 몫으로 돌려놓는다. 이 가족이 괴물에게 대항하기 위해 가진 것이라곤 낡은 소총과 화염병, 양궁 활이 전부이다. 사회와 국가는 이 가족의 안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미국의 지휘를 받는 비상본부와 미디어는 오로지 바이러스의 실체 규명에만 집착한다. 사회, 국가가 그 구성원을 보호해야할 의무를 저버릴 때 개인이 희망을 둘 수 있는 유일한 곳은 가족이라는 익숙하고 오래된 가치이다. 그러므로 강두네 가족은 괴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한다.       

  괴물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고, 강두네 가족이 괴물과 사투를 벌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 이젠 도대체 이 괴물의 정체가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감독이 이미 영화 초반부에 포름알데히드라는 열쇳말을 주었으므로 추측이 어렵지 않다. 괴물은 전부터 우리와 함께 존재했던 그 무엇이었다. 단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의해 돌연변이된 개체가 된 것이다.  


3. 〈괴물〉, 한국 사회의 무의식적 지층을 탐구하다

  영화 속의 괴물을 보면서 관객이 복합적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잔혹하게 사람들을 잡아먹고 해치는 괴물, 현서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괴물의 모습은 분노와 증오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지만, 인골을 고통스럽게 내뱉는 모습이라던가, 화염에 휩싸여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에 이르면 도대체 이 괴물이 왜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는지 일말의 동정심이 일기도 한다. 그러한 이중적 감정을 촉발하게 만드는 근원에는 이 사태의 근본적인 책임을 괴물이 아닌 독극물을 방류한 미군, 미국으로 보는 시각이 자리하고 있다.

  〈괴물〉에서 괴물의 존재론적 해명은 매우 모호하다. 그것은 괴물이 최후를 맞는 순간까지 해소되지 않고 남는다. 괴물은 분명 우리 자신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대리자라고 볼 수도 없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그 둘 사이의 비극적 공존이 낳은, 말 그대로 알 수 없는 괴이한 생명체, ‘괴물’인 것이다.

  봉준호는 전작인 〈살인의 추억〉으로 한국 사회의 80년대를 관통하는 무의식을 담아내었다. 그의 〈괴물〉은 2000년대의 한국 사회의 무의식적 지층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을까? 반미와 가족주의의 문제를 괴물로 형상화시켜서 그려낸 그의 역량은 확실히 뛰어나다. 그러나 새로운 것, 혁신적인 것을 담아내기에 〈괴물〉은 여전히 미흡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가지고 나아갈 것이 가족주의, 그것도 혈연에 바탕을 둔 가치일까? 봉준호는 혈연이 아닌 이들 사이의 연대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결말 부분에서 강두는 죽은 딸 현서와 함께 붙잡혀 있었던 세주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세주가 현서의 기억을 갖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어쨌든 가족은 지속된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잠정적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눈 오는 한강변을 바라보던 강두는 무언가 이상한 기척을 느끼곤 소총을 집어 든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한 사내가 언젠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괴물’과 대면해서 자신의 가족을 지켜낼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을 과연 그 누가 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당신이 〈히든〉을 다 보고나서도 누가 테이프를 보냈는지 알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영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 미하일 하네케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희곡 『문밖에서』에는 진실에 관한 의미심장한 표현이 있다. 보르헤르트는 진실을 ‘한낮에 거리를 배회하는 창녀’로 비유한다. 진실의 얼굴은 보는 이를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누구든 그것을 밝은 빛이 아닌 어둠 속에서나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잊고 있었던 과거의 진실이 어느날 갑자기 한낮의 빛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면? 조르주와 안나 부부에게 닥친 일이 그것이다. 그들의 일상을 담은, 예사롭지 않은 비디오 테입이 배달되면서 이 가족의 삶은 혼란과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영화는 처음엔 스릴러 장르의 공식을 충실히 이행해나간다. 관객은 과연 저 테입을 촬영해서 그들 부부에게 보낸 이가 누구일까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그러나 조르주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기억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테입 보다는, 과연 숨겨진 진실이 무엇이냐가 더 중요하게 된다. 

  조르주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과거의 진실이란 이런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알제리인의 아이를 부모가 입양하려 하자 거짓말을 하여 아이를 집에서 쫓겨나게 만들었다. 그 이유를 묻는 부인에게 그는 대답한다. 자신이 혼자 쓰던 방과, 그 밖의 것들을 나누기 싫었을 뿐이라고. 그의 거짓말로 인해 입양의 기회를 박탈당한 아이, 마지드의 삶은 이후 철저히 무시되고 잊혀진다. 조르주에게 배달된 테입은 표면적으로는 마지드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테입이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기억의 재생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에 대한 양심의 가책, 죄책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드가 자살한 후, 그의 아들이 조르주와 대면하여 나누는 대화는 그 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조르주에게 말한다. 평생 동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의 얼굴이 어떤지 보고 싶었다고.

  조르주에게 마지드의 일은 잊혀진, 사소한 과거의 편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는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영락해버린 마지드의 삶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나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못한다. 조르주는 자신의 삶에 불편이나 위해를 끼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것은 무엇이든 제거하는 것이 당연하며, 선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조르주의 신념은 자신의 소유물과 공간에 침입하는 그 어떤 대상, 즉 타자에 대한 끊임없는 배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결국 타자에게 행하는 폭력과 야만적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데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마지드의 아들에게 답한다. 

  “내게 양심의 가책 따윈 바라지 마. 네 아버지의 인생을 망쳤다는 것 말이야. 난 아무 잘못이 없어!”

  그가 보여주는 이러한 모습은 1961년의 파리 대학살과 관련하여 프랑스 사회가 보여주었던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자세를 떠올리게 한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며 자신들의 범죄와 살인에 면죄부를 주며 진실에 대해 침묵하는 프랑스 지식인의 행태는, 과거 서구의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대해 행했던 지배 논리와도 맞닿아있다. 〈히든〉을 통해 하네케가 직격탄을 날리는 곳은 바로 그 지점이다. 

  사실 자신의 소유물, 집, 가족, 삶의 안락함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 그 자체가 추악하거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욕망의 추구가 타자의 권리, 더 나아가 생명을 담보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기에서 타자는 단지 프랑스 내의 알제리 인, 유색인종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강대국에 의해 침탈당하는 약소국까지 포함한다고도 볼 수 있다. 조르주와 안나 부부의 집 거실에 있는 TV가 쏟아내는 뉴스들을 보면 이 점은 더욱 명확해진다. 이라크 전을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에 관한 화면은 서구 유럽과 미국이 가진 근원적인 두려움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신들을 둘러싼 세계가 외부의 불온한 타자에 의해 습격당하거나 오염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이다. 두려움과 공포는 즉각적인 공격을 감행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 어떤 예외 없이 대규모의 전면전과 학살로 귀결되는 것이다. 미디어는 그러한 모든 과정에서 학살자의 거짓과 공모한다. 거짓은 순식간에 진실이 되고, 곧이어 역사로 자리 잡는다.  

  그렇다면 진실은 어떻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가? 여기에서 다시 〈히든〉에 나오는 비디오 테입을 언급해야할 필요성이 생긴다. 감독 자신이 언급했듯 테입을 누가 만들었느냐는 우리의 진정한 관심사가 될 수 없다. 사실 〈히든〉에서 현실과 테입의 화면에는 아무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 시선의 주체가 다르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시선에 의해 재현되는 현실은 파편화된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안나는 진실을 계속 숨기는 남편 조르주에게 테입은 ‘그와는 다르게 자신에게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테입은 배회하는 진실이 택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히든〉에서 진실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에서 달아나버린 가해자 조르주의 무의식 안에서도 살아남았다(영화 초반부에 피를 토하는 아이가 등장하는 두 번의 인써트 장면을 기억하라). 중요한 것은 진실이 결국에는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말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논쟁적인 마지막 장면은 그 점을 입증해주고 있다.

  조르주의 아들 피에로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나오는 길이다. 그 때 마지드의 아들이 그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진다. 그 둘은 과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하네케는 이 마지막 장면에 대해 ‘무수한 해답과 해석이 있을 수 있다’며 열린 결말임을 강조한다. 그 장면은 화해와 소통의 시도로 읽힐 수 있는 여지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상처 입은 진실은 그렇게 성급히 서둘러 봉합되고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을 드러낼 때까지 세대를 통해 전달되어 살아남으려 할 것이다.     

  자신의 일상에 손톱만큼의 균열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타자의 삶에 가하는 거짓과 폭력은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히든〉은 가진 자가 지키고자 하는 일상의 안온함 속에 감추어진 추악한 욕망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인다. 진실은 가해자에 의해 수탈당하고 도륙되지만 살아남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가해자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건드리고, 세대에 세대를 이어 자신의 생명력을 보존해나간다. 이제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고 믿는 조르주는 수면제를 먹고 편안히 잠이 든다. 그러나 피 흘리는 진실의 얼굴은 여전히 그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그것은 잊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되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영화의 원작자인 스티븐 킹의 소설에는 종종 글쓰기의 괴로움과 작가라는 직업의 압박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작품 《미저리》는 어떤 면에서 그러한 괴로움이 극단적으로 형상화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샤이닝”의 주인공 잭의 직업도 작가이다. 호텔의 겨울 관리인을 자청한 것도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잭이 관리인으로 있게 된 이 호텔은 알 수 없는 괴기가 서린 곳으로 잭과 그 가족은 거기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고통을 받게 된다. 당연히 잭의 글쓰기 계획은 무산되고, 잭이 미친 듯이 써내는 것이란 ‘일만 하고 놀지 않는 잭은 바보가 된다’라는 문장뿐이다.

 

  “샤이닝”이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주체할 수 없이 스크린 위를 범람하는 붉은 피와 도저히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족에 대한 끔찍한 살의는 분명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포의 심연을 들여다보노라면 거기엔 글쓰기와 가족이 주는 견딜 수 없는 강박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쓰려고 고군분투하는 작가에게 가족이란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그 점은 작가의 마음에 고통과 증오를 불러온다.

 

  결국 잭의 글쓰기가 성공적으로 완수되기 위해서는 가족이 제거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용납될 수 없는 무의식적 욕망은 그런 이유로 꿈의 형태를 빌어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지각되지 않는 무의식의 소원성취 방식으로서의 꿈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는 왜곡되는 모든 꿈에서 소원은 무의식에서 비롯되며, 낮에는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 

 

  영화 “샤이닝”은 작가의 억압된 무의식적 욕망이 실현하고 싶어 하는 꿈을 충실히 구현해낸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글쓰기와 가족, 그 두 가지가 빚어낸 끔찍하지만, 안전한 악몽이 된 것이다. 

 

1)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인숙 역, 꿈의 해석, 열린 책들, 199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히피드림~ 2005-11-13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 아직 못 봤는데요. 본 사람들은 다 괜찮다고 하더라구여. 님의 리뷰를 보니 더 보고 싶어지는데요.^^

푸른별 2005-11-13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년 전에 보고, 이번에 일 때문에 다시 보게 되었지요. 리뷰라는 것이 그렇지만 참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생각과 느낌이 읽는 이와 얼마나 소통할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지요. 내가 써놓고 보니 지나치게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 샤이닝에 관해서는 다른 유명한 리뷰들이 많은데 내 글은 그것과는 거리가 있어서 이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DVD 발매가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삭제본인지 모르겠어요. 한번 보세요. 기이하고 참 독특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