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무”에는 주인공 소무가 주점의 아가씨와 거리의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시퀀스가 있다. 짓다 말았거나, 마치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건물 안으로 소무는 잠깐동안 들어갔다가 나온다. 내게는 그것이 마치 급격한 개발이 진행 중인 중국의 모습에 대한 은유처럼 생각되었다. “소무”에는 그런 식의 공간적 기호가 곳곳에 포진해있다. 영화는 소도시와 그 외곽의 시골 풍경을 마치 다큐를 찍듯 건조한 화면에 담아낸다. “소무”에 나오는 모든 공간은 전근대성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친구가 경영하는 잡화점이나, 약국, 미용실, 주점, 소무의 부모님 집을 보라. 이것은 마치 70년대 개발 독재가 횡행하던 한국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이에 반해 "몰완몰료"가 보여주는 도시 공간의 이미지는 서구적이며 세련된 것이다. 물론 북경이라는 공간은 자금성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의미가 강한 곳이지만 이러한 옛 건축물들이 몰완몰료에서는 하나의 삽화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초반부의 관광객이 등장하는 장면이라던가, 갈우가 사장을 협박해서 돈을 갖고 나오게 하는 장소 정도인 것이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강조되고 있는 공간은 마치 멋진 모델하우스를 연상하게 하는 오천련의 집을 비롯해, 병원, 경찰서 등과 같은 도시 기능의 핵심을 담당하는 곳이다. 그러한 장소들은 "소무"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낡고 구질구질한 소도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근대화된, 또는 근대화를 지향하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대변하는 기표들로 작동한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에 나오는 음악들 또한 그 기표들을 풍부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몰완몰료”에서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나오는 음악은 빠르고 비트가 강한 랩 음악이고, "소무"에서는 비교적 느린 템포의 중국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영화는 마치 작심을 하고 북경 시내를 보여주기로 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돈을 갖고 나오기로 한 사장과의 약속은 계속 틀어지고, 갈우와 오천련은 하릴없이 차를 타고 북경의 이곳저곳을 쏘다닌다. 카메라는 그들의 차를 따라가면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마치 북경 시내 곳곳을 보여주는 관광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장면들은 영화가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북경의 도시적 이미지, 또는 중국 근대화의 상징적 의미로서의 북경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두 영화가 보여주는 중국의 모습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현실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각각의 영화가 제작된 시기가 “소무” 97년, “몰완몰료”는 99년이라는 점은 두 영화가 각각 담아내고 있는 공간적 의미를 단순히 중국의 과거와 현재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두 영화는 근대와 전근대, 개발과 비개발, 도시와 농촌, 새것과 옛것, 실리와 명분이 혼재하는 현대 중국의 초상과 맞닿아 있다.

 

  공간은 단지 배경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규제하고 변화시킨다. 같은 경찰서라 하더라도 “소무”에 나오는 경찰과 “몰완몰료”에 나오는 경찰의 일처리 방식은 다르다. 전자는 공포와 위압감을 주는 모습으로, 후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으로 나온다. 이것은 파기하고 도태시켜야할 전근대성에는 낡고 오래된 건물뿐 만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무”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제거해야할 공공의 적이며 사회악으로 지목된 소무는 경찰에 연행된다. 경찰이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소무는 수갑이 채워진 채로 방치되고, 곧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된다. 나는 소무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서 증오보다는 깊게 드리워진 수치심을 보았다. 그것은 비단 소매치기 잡범인 소무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소무로 대변되는 그들 자신의 빈곤과 무기력, 부정부패와 미신, 물신적 욕망으로 채워진 자본주의적 심성이 온존하는 전근대적 공간과 생활방식에 대한 자조적 시선으로 읽힌다.  

 

  그에 반해 “몰완몰료”가 보여주는 결말은 급격한 근대화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입이 가져다준 어두운 일면, 즉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의 상실에 대한 중국인들의 열렬한 희구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누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지켜주려는 갈우, 그의 곁에는 아름답고 마음씨 착한 오천련이 자리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결말은 지금의 중국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것이기에 영화 속에서나 재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소무”에서 소무가 잠시나마 마음을 주었던 주점의 아가씨가 돈 많은 남자를 만나 떠나버리는 것이 현실이라면, “몰완몰료”의 결말은 매우 이상적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작위적인 것이다.

 

  현재와 같은 속도라면 조만간 중국에서 “소무”에서 보았던 정체되고 낙후된 소도시들의 모습은 빠르게 변할 것이다. 중국인들이 열렬히 지지해마지 않는 자본주의는 그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보여줄 것인가? 그래서 그들은 “몰완몰료”가 보여주는 세련된 도시적 공간에서 도덕적인 가치를 지키며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중국인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들이 잃어버려야할 것들이 너무 많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영화는 그들의 상상 속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지금보다 더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찾아 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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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 취향이라는 것은 얼마나 변덕스러운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사부의 영화 “포스트맨 블루스”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나에게 이 감독의 세계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잘려진 손가락이 영화에서 수시로 나온다거나, 킬러와 야쿠자, 살인 장면의 반복적인 노출이 그렇게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 세계를 조금씩이나마 탐험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배우 “츠츠미 신이치” 덕분이다.

  츠츠미 신이치는 사부의 영화 “하드 럭 히어로(2003)”와 “행복의 종(2002)”을 제외한 전 작품에서 주연을 맡아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감독과 배우가 지속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서로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츠츠미 신이치는 사부의 영화세계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자이자 후원자로 자신의 연기 영역 뿐만 아니라 사부 감독의 영화적 역량을 극대화시키는 면모를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그를 사부의 페르소나라고 부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된 “탄환 러너(1996)”는 사부의 이름을 전세계 영화계에 알리는 신호탄 같은 작품이었다.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세 명의 인물들은 쫓고 쫓기면서 달리는 과정 속에 각자의 욕망을 응시하고 스스로를 성찰하게 된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의 대부분은 달리는 신이 차지하고 있다. 속도감 넘치는 영화적 전개로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두는 사부 영화의 특징은 1997년작 “포스트맨 블루스”에서도 빛난다. 

 

  인간의 육체가 지닌 능력을 극단으로 밀어붙여서 시험이라도 하듯 이 영화에서 츠츠미 신이치는 자전거와 하나가 되어 달리고 또 달린다. 평범한 우편 배달부가 예기치 못한 우연한 사건으로 희대의 살인범으로 몰려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된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거기에 사부만의 이야기 작법과 유머 감각이 들어가면서 영화는 독창성과 힘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렇듯 사소한 사건이 오해를 낳고, 그 오해가 예측할 수 없는 결말을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동인이 되는 이야기 구조는 “포스트맨 블루스” 뿐만 아니라 사부의 또 다른 영화 “먼데이(1999)”와 “드라이브(2001)”에서도 볼 수 있다. 

 

 

  “먼데이”와 “드라이브”의 주인공들은 별다른 희망이나 기대도 없이 매일매일의 익숙해진 일상에 지쳐있는 소시민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런 그들에게 어느날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에서 인물들은 이전과는 다른 극적인 정체성의 변화를 겪는다. “먼데이”의 주인공은 평범한 회사원에서 나중에는 인류의 진정한 평화를 역설하며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려는 인물로 변화하는가 하면, “드라이브”의 제약회사 영업사원은 은행 강도들에게 인질로 잡히는 시련을 겪는 동안 자신의 나약함과 직면하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의 또 다른 영화인 “언럭키 몽키(1998)”는 사부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단지 인간성에 관한 탐구뿐만이 아니라 좀 더 보편적인 사회 문제까지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꾼에서 더 나아가 설득력을 갖는 사회적 메시지까지 담아내는 영화작가로서의 사부의 면모는 그의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예를 들면 “언럭키 몽키”에서 츠츠미 신이치가 분한 은행 강도는 공청회장에서 자본주의의 추악한 일면과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일장의 연설을 하고, “드라이브”에서 테라지마 스스무가 비판적 가사의 랩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장면이 그것이다. 

 

  "행복의 종(2002)”은 전형적인 사부 영화의 틀에서는 약간 벗어나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츠츠미 신이치 대신 역시 사부 영화에서 자주 얼굴을 보이는 배우 테라지마 스스무를 주연으로 한 이 영화는 공장폐쇄로 실직한 노동자가 삶의 참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이전의 사부 영화들을 보아온 이들이라면 이 영화가 과연 사부가 만든 것인지 의문을 품게 만들 정도로 “행복의 종”은 평탄한 이야기 전개와 다소 밋밋한 결말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 작품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지칠 줄 모르고 달려온 사부가 자신을 돌아보는 중간 휴식 지점의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003년에 인기 절정의 아이돌 그룹 V6의 뮤직비디오 의뢰를 받고서 만든 영화 “하드 럭 히어로”는 이제 사부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그가 앞으로 들고 나올 영화가 어떤 모습일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사부만의 독창성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사부의 영화에 열광하는 이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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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식 1주일 전에 약혼자에게 채인 고등학교 교사 료스케, 자신 없는 무료한 일상에 지쳐있는 호텔직원 미칸, 오래전 이혼한 후 규동집을 운영하며 아무런 희망없이 홀로 지내는 미도리카와, 전업주부로 남편과 아이들에게 외면당한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를 갖는 오리에, 재혼한 엄마와 계부를 인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와타루, 부모님이 정해준 인생행로를 거부하며 집을 뛰쳐나온 부잣집 딸 아이, 베스트셀러 작가지만 공허한 내면을 지닌 이치로, 서로 다른 사연을 지닌 이 일곱 명의 사람들은 어느날 규동 집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들은 모두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그것은 사랑일까? 드라마의 제목 "사랑이 하고 싶어x3"인 것만 본다면 그들이 찾는 것이 연인에 대한 사랑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야기는 단순하게 연인을 찾는 과정으로 직진하지 않는다.

  "사랑이 하고 싶어x3"의 이야기는 료스케와 아이, 미칸의 삼각구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는 딱히 누구를 주연배우로 볼 것인가를 말하기가 어렵다. 일곱 명의 인물들이 가진 이야기는 회를 거듭하며 균등하게 전개된다. 각각의 인물들이 한회의 내래이션을 이끌어가면서 자신의 삶과 그것에서 이끌어낸 성찰을 마치 일기를 쓰듯 풀어내는 점도 인상적이다.

  일곱 명의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외치고 있다. "외롭다. 외로워서 미칠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고 함께 하고 싶다." 이 외침은 만남을 갈구하게 되고 그래서 인물들은 새로운 만남 속에서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자신이 찾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대면한 것은 연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지금의 선택으로 앞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인지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문하고 성찰한다. 마침내 그들은 알게 된다. 자신이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음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자신과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임을...

  이 드라마가 결국 보여주는 것은 연인을 찾아 떠나는 이들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길을 진지하게 묻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스스로의 모습과 삶에 자신을 갖지 못하고 흔들리는 이에게 사랑은 또 다른 짐일 수 밖에 없으며 혼란스러움을 더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일곱 명의 인물들은 다른 이를 사랑하기에 앞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임을 깨닫고 그 길을 찾아 나선다. 결국 자신의 내면을 채워줄 그 무언가를 열렬히 찾아 헤매던 그들은 답을 얻었다. 그제서야 그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진정한 사랑도 찾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드라마적인 설정만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회에서 료스케는 아름답게 변화된 미칸을 바라보며 외친다.

  "네가 지금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너 자신과 너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일 거야."

  어쩌면 료스케의 이 말은 자신의 길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들려주고픈 소중한 격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이 하고 싶어x3"의 인물들은 진정한 사랑이 하고 싶은 이들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아주 평범해 보이지만, 그래서 놓치기 쉬운 진실에 관한 것이다. 나를 사랑할 수 있을 때, 내 삶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라야 사랑은 찾아오는 것임을, 아니 발견할 수 있다는 진실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자신의 진정한 길을 찾는 이들의 마음 속 깊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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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음 따위는 살아가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 있었다. 시대적 배경은 1940년, 검열관 사키사카는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자신에게 올라오는 희극 대본을 철저히 검열하여 어떻게든 극장에서 상연되는 것을 막고자 한다. 그런 그에게 희극작가 츠바키라는 강적이 나타난다. 웃음의 요소를 배제시키려고 온갖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검열관에 맞서 츠바키는 자기만의 방법으로 더 웃기는 내용을 넣은 희극을 쓰게 되고, 그 과정에서 웃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검열관은 공동 창작자가 되기를 자처한다.

  웃음의 대학(호시 마모루 감독, 2004년)에 나온 희극작가 츠바키를 괴롭히는 것은 검열관으로 상징되는 국가 권력이다. 개인이 자유롭게 웃을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하려는 거대 권력에 맞서려는 츠바키의 무기는 오직 글 뿐이다. 그가 고치고 삭제하라는 검열관의 요구를 순순히 수용하는 것은 어찌보면 권력에 순응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어떤식으로는 자신의 글을 관객과 만나게끔 하려는 강한 열망이 자리하고 있다. 츠바키에게는 쓰고 또 쓰는 것이 곧 저항의 방법이었던 셈이다. 그의 열정은 마침내 검열관의 마음마저 움직인다. 강제 징집 영장을 받고 떠나는 그에게 검열관 사키사카는 외친다. 나라를 위해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반드시 살아 돌아와서 멋진 희극을 함께 공연하자고...

  브로드웨이를 쏴라(우디 앨런 감독, 1995)에 나오는 극작가 데이빗을 괴롭히는 것은 국가권력이 아닌 돈, 바로 자본이다. 자신의 작품을 상연하는 데에 필요한 돈을 구하지 못해 고생하던 그는 마피아 두목을 제작자로 받아들이게 된다. 상연을 댓가로 두목은 자신의 애인을 주연 배우로 써줄 것을 요구하게 되고 그 순간부터 데이빗의 연극은 예측 불허의 결말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다. 대사조차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올리브, 연극에 사사건건 참견하는 올리브의 경호원 치치, 배우들 간의 불화, 그 와중에 주연배우 헬렌과 사랑에 빠져버리는 데이빗... 이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데이빗은 무력하기만 하다. 그런 그가 도움을 받게 되는 사람은 바로 치치. 16살 때부터 갱으로 살아온 치치는 자신의 처절한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희극 대본에 생기를 불어넣고, 연극은 데이빗이 아닌 치치의 것이 되어간다. 

  하나의 연극 상연을 두고 결국 살인까지 일어나는 것을보면서 데이빗은 절망하며 브로드웨이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에게 예술이란 잔혹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다. 데이빗이 느끼는 참혹한 심정은 어댑테이션(스파이크 존즈 감독, 2002)의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우프만에게 이르면 좀 더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그물망 속으로 들어온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글쓰기에 좀 더 솔직하게 자신을 던질 수 없었던 그는 "난초 도둑"이라는 책을 각본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난 좌절감과 회의에 휩싸인다.

  그와는 달리 여유있고 낙관적인 쌍둥이 동생 도널드는 그냥 한번 써본 대본으로 제작자들에게 극찬을 받게 되는데, 동생의 성공에 대한 질시와 벽에 부딪힌 각본 작업으로 찰리는 점점 더 괴로워할 뿐이다. 도널드는 어떻게든 형을 돕고자 "난초 도둑"의 원작자인 수잔을 만나서 인터뷰를 시도하게 되고, 그들 형제는 수잔과 수잔의 책에 나온 실제 주인공 라로쉬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얽히기 시작한다. 결국 그들의 만남은 도널드의 죽음으로 끝나게 되고, 찰리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써야하는지, 어떻게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통찰할 수 있게 된다.

  이 세 편의 영화에 나타난 작가의 초상은 참으로 괴롭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깨끗한 책상에서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이라는 불구덩이 속에서 스스로를 던져 소진시키면서 자신의 글을 건지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초상에는 기쁨 보다는 슬픔이, 여유보다는 쫓기는 초조함이, 희망 보다는 불안과 우울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과연 이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애초부터 작가들은 그런 것을 누군가 이해해주기를 바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하는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단 하나의 것만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을 따름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죽은 후에도 남을 작품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모든 것을 말하고 사람들과 소통한다. 그러기 위해 치루어야할 댓가가 무엇이든 간에 글쓰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세 편의 영화들은 각기 다른 방식이기는 해도 작가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탐색해가며 진솔한 초상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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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다 요지 감독의 2002년도 작품인 "황혼의 사무라이(원제: 황혼의 세이베이)"는 일반적인 사무라이 영화에 대한 기대에서 벗어나 있다. 이 영화에서 결투신은 겨우 두번에 지나지 않고, 주인공은 하급 사무라이로 농사짓는 것을 삶의 낙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이 사람은 아내의 장례식을 치루느라 사무라이의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장검마저 팔아버렸다.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로 독자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해온 야마다 요지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시대극의 연출에 있어서도 빼어난 재능이 있음을 보여준다.  

  폐병으로 아내를 잃은 번의 하급 관료인 세이베이에게는 치매에 걸린 노모와 어린 두딸이 있다. 적은 급료로  살림을 꾸려가자니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일이 끝나면 곧장 퇴근해서 벌레잡이 통을 만드는 부업을 해가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는데 그런 그를 동료들은 "칼퇴근 세이베이"라며 비웃기 일쑤다. 이런 그에게 어느날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난다. 친구의 여동생이며 어릴적부터 소꿉친구인 토모에의 이혼한 전남편이 행패를 부리는 것을 막다가 결투를 신청받게 된 것이다.  

  목검으로 상대를 가볍게 제압했다는 소문이 성안에 파다하게 퍼진 것과는 상관없이 세이베이는 자신의 평온한 일상에 충실할 뿐이지만 영주의 죽음과 관련하여 측근들의 세력다툼이 벌어지자 그 또한 분란의 한가운데에 있게된다. 자결을 거부하고 집에 칩거한 경호대장을 죽이라는 명이 세이베이에게 주어진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을 생각하고 그는 결투에 나가기 전 토모에에게 살아돌아온다면 부인이 되어달라고 청한다. 과연 그는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여기까지의 이야기만 보자면 이 영화는 참 밋밋해 보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결투하기 위해 간 세이베이는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는 경호대장을 발견하는데 그는 결투에 바로 임하려는 세이베이에게 대답대신 술을 건네며 자신의 인생살이에 대해 들려준다. 그 대화에는 몰락해가는 막부 시대의 마지막 사무라이들의 고단한 일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단지 가족과 소박하게 살고 싶었을 따름인 그 두 사무라이들의 인생을 어긋나게 만든 것은 지배계급이 부여한 허울뿐인 명예와 종속적인 의무였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조금씩 무너지고 흔들리기 시작한 지점에 있는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직감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투는 치뤄지고 세이베이는 살아서 집에 돌아온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이 과거를 회상하는 세이베이의 큰딸의 내레이션이라는 점이다. 큰딸의 내레이션에는 그리움과 자랑스러움이 묻어져나온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 모습은 자신들의 지나온 과거에서 끊임없이 무엇이 일본적인 것인가를 묻고 지켜내려는 일본인들의 성향과도 맞닿아있는듯도 하다. 물론 그것이 맹목적인 추종으로 치달을 경우 과거사에 대한 일방적인 미화로 나타나기도 한다.

  "황혼의 사무라이"는 아주 영리한 방법으로 일본적인 것에 대해 찬미한다. 큰딸이 과거를 회상하는 시점이 일본의 제국주의가 아시아에서 맹위를 떨치던 때라는 점도 기이한 울림을 낳는다. 막부 말기, 몰락해가는 사무라이 계급의 한 단면을 그려내면서 자신의 의무와 가족에게 충실하려 했던 한 남자의 모습을 각인시키고 거기에서 이상적인 일본의 가치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한 시도는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절제된 연출과 잘 짜여진 이야기 구성은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이 영화의 속편격인 "숨은 검, 귀신의 손톱"이 궁금해진다. 야마다 요지는 그 작품에서도 녹슬지 않은 자신의 솜씨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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