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은 독일 나치즘의 모태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노동당이 결성된 해였다. 이것은 후에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당으로 거듭나면서 히틀러의 확고부동한 통치기반이 되었다. 1920년에 제작된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이 나치즘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지나친 추측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이후 독일 사회가 겪게 될 정치 사회적 격변을 예고하는 징후가 나타나 있다. 영화에 나타난 ‘밤’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제인이 밤에 몽유병자 케사르에게 납치당하는 장면은 마치 헨리 푸셀리의 그 유명한 그림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밤’은 침입, 강탈, 납치, 살인과 같은 악행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쉽게 은폐시킬 수 있는 시간적 배경이 된다. 칼리가리 박사는 밤의 악몽의 주재자이며 모든 악행의 중심에 서있지만, 직접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조종자, 감시자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박사가 원장으로 있는 방사형으로 설계된 정신병원은 푸코가 말한 ‘판옵티콘(Panopticon)’의 전형이며, 이것은 이후 독일 국민들이 처하게 될 국가적 감시와 처벌을 예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칼리가리 박사를 히틀러로 볼 수 있을까?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박사가 사랑한 ‘밤’을 히틀러 또한 사랑했을 것이다. 그는 독일 사회에 ‘밤’이 드리워지길 기다렸고, 마침내 그 ‘밤’이 오자 자신이 생각한 모든 것을 구현해내었다. 그런 의미에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전쟁과 살육의 광풍이 혹독하게 휘몰아쳤던 히틀러 치하 독일의 ‘밤’에 대한 전주곡처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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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0-09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수긍이 가는 멋진 해석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왜 제목이 "엘리펀트"일까가 궁금해졌다. 서양의 우화에서 '거실의 코끼리'는 피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을 뜻하는데,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극심한 폭력의 문제가 그러한 것일 수 있다는 것. 또 한가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이야기에서 나온 것처럼 하나의 사물, 사태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 어떤 것이 감독의 의도에 더 적합한지를 알아보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미국 콜럼바인 고교의 총기 난사 사건은 미국 사회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감독 마이클 무어에게도 이 사건은 하나의 화두가 되어 "볼링 포 콜럼바인"이라는 다큐를 만들게 했다. 마이클 무어가 바라본 이 사건의 본질은 미국 사회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에 대한 불만이 사람들을 절망과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 결과 사람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총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그것이 가져오는 폭력과 살상에 무감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어의 분석은 총기 난사 사건의 주범들의 범행 당일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좀 더 큰 사회학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구스 반 산트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았을까? "엘리펀트"는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좋은 답을 제공해줄 것 같지만 사실 이 영화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없다. 감독은 단지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는 피해자와 가해자 학생들의 일상을 매우 건조하고 담담하게 훓어나간다. 서로 겹치는 시점 쇼트나, 롱테이크 같은 기법의 사용은 흥미있긴 해도 그다지 인상적인 것도 아니다(어떤 면에서는 졸립게 만든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영화는 후반부에서 가해자 학생들의 시점으로 전개되면서 여러가지 단서들을 보여준다. TV에서 나오는 히틀러와 나치에 관한 뉴스, 그들이 즐기던 인명 살상 컴퓨터 게임, 자주 보는 인터넷의 총기 구매 사이트 등.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것도 강조되어 있지 않고 그저 추측의 가능성만을 흘릴 뿐이다. 구스 반 산트는 처음부터 관점이라던가 해석이라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그 대신에,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했는지 섣불리 단정짓고 결론내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감독의 입장은 정치적으로 정당한 것일까? 그것은 어떤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문제화시키는 것에 비하면 매우 영리하고 세련되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작가의 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작가란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하며, 자신의 작품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한다.

  "엘리펀트"가 논란을 일으키는 지점은 바로 그곳이다. 서정적인 오프닝과 엔딩 신, 가해자 학생이 연주하는 평화로운 피아노 음악, 이런 것이 구스 반 산트의 작가적 관점이라면 더이상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그만의 독특한 시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사건의 본질을 직면하는 대신 유보하고 침묵함으로써 자신의 작가적 위치를 일정부분 포기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보여주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술가는 그 이면의 진실을 응시하고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엘리펀트"가 나름대로 주목할 작품이기는 해도 보는 이의 마음 깊이 와닿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러한 부분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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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0-09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보고 리뷰 쓴 적이 있어요.^^ 이 영화에 대해 미국의 한 유명 평론가가 "무의미하고 무책임하다"고 말했데요.그런데 여기에 대해 감독인 구스 반 산트는 바로 그 무의미함이 자신이 의도한 것이라고 했답니다. 님의 글을 쭉 읽어보니 그 평론가가 그 한마디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지 알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 다큐는 지난 5월, 우즈베키스탄에서 발생한 유혈 사태의 참상에 대한 신속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사태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시청자들의 시사적 안목을 넓혔다는 점에서 정보성과 시의성이 돋보인다. 또한 이 유혈 참극에 있어서 미국의 역할을 규명하고, 석유자원을 둘러싼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연방 독립국의 정치 경제적 현실을 조명한 부분 또한 논리성이 돋보였다.

 

  무엇보다 이 다큐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인터뷰의 효과적인 사용에 관한 것이다. 다큐의 전체적인 얼개는 인터뷰가 내레이션에서 제기한 문제와 의문들에 대해 효과적인 답을 주고, 인터뷰에서 제기된 문제는 내레이션으로 설명해주는 반복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방식은 시청자가 주제에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적으로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터뷰 대상자의 선정인데 전문가와 전직 관료, 사태 피해자들의 인터뷰는 나름대로 적절했다는 판단이다. 또한 시사 다큐의 특성을 살려서 사태와 관련하여 보도된 TV 자료를 배치한 것도 다큐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에 기여했다고 본다.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다큐에는 몇몇 허점들이 보인다. 그것은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보다 다양하고 균형 잡힌 관점을 제시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석유와 미국, 연방국의 민주주의 혁명과의 관련성이 지나치게 부각되어서 다른 측면을 살펴보는 데는 소홀했다는 인상을 준다.

 

  5월 23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강병태 칼럼은 이 다큐가 간과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미국이 러시아, 중국과의 영향력 경쟁과 관련, 이미 카리모프 정권과 노골적으로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지역의 미국 세력 확장에 맞서서 중국과 러시아가 조직한 상하이 협력기구 정상회의(SCO)가 지난해 6월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렸다. 여기서 러시아는 우즈벡과 전략적 동반관계를 맺었고 이를 통해 우즈벡의 석유 공급을 장악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타격을 입힌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달, 미국과 유럽은 우즈벡의 인권상황을 이유로 경제 원조를 동결했고, 이를 통해 미국은 카리모프 정권의 붕괴를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한다는 관측이 나왔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다큐에서는 미국이 카리모프 정권에 대해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점만을 부각시켰고, 우즈벡 정치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분석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끝부분에서야 중국에 관한 부분이 다루어지긴 했지만 사실 그 부분은 다큐에서 계륵과도 같은 느낌이 든다. 생뚱맞다는 인상인 것이다. 그러한 인상을 주게 된 것은 우즈벡과 주변국 사이의 유기적 연관관계에 대한 파악 없이 슬쩍 끼워 넣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디잔 지역의 소요 사태에 정체불명의 무장세력이 끼어들어 교도소와 정부 공격으로 이어졌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다큐는 수감된 사업가 아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온 테러조직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인터뷰는 어디까지나 사실 확인의 단서가 될 수 있을 뿐이지 그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제작진의 철저한 자료 조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었다.

 

  시사 다큐가 시의성과 신속함을 필요로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시청자들의 정확한 이해와 판단을 위해 면밀하고 정확한 자료 분석이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현장 보고> 우즈벡 유혈 사태, 그 진상은?”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다.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자세와 안목으로 이러한 다큐를 제작, 편성한 방송사의 노력이 보다 치열하고 정교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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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명의 내래이터, 하나의 이야기

  다큐는 두개의 이야기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축은 김윤아가 내래이터로 등장하는 1948년 제주 4.3 항쟁을 전후한 역사적 사실 관계에 관한 기술이며, 두 번째 축은 일반 성우가 내래이터로 나와서 간첩 사건의 피해자인 강희철에 관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이 두개의 축은 전혀 다른 개별적 이야기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종국에 있어서는 만나게 되는데,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두 명의 내래이터가 말하는 것은 본래는 하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제작진은 두개의 이야기 축을 설정하고 서로 다른 내래이터로 하여금 다르게 보이는 듯한 이야기를 하게 만든 것일까?

  그것은 이 다큐의 중심 이야기가 되는 강희철이라는 개인이 1986년에 체포되어 16년간 복역해야했던 참혹했던 고통의 뿌리가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시작된 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무려 사십년 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한 개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만큼의 위력을 가졌다면 그 사건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하나의 이야기 축은 4.3 항쟁의 시작에서, 또 다른 이야기 축은 강희철의 현재의 삶에 두고 그 두 이야기를 교차 편집을 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48년의 4.3 항쟁과 2005년을 살고 있는 강희철이라는 개인의 역사가 만나게 된다.

  김윤아가 내래이터로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 축은 4.3 항쟁을 전후한 제주도의 상황을 역사적 사료에 근거해서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여기에 주로 사용된 기법은 재연인데, 주목할만한 점은 대사와 행동의 변화가 정적이라는 점이다. 마치 정지된 사진 이미지처럼, 칼라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화면 구성은 그 자체로 당시의 자료 화면을 연상케 만든다. 특히 54년 북촌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묵념 사건에 대한 기술에 있어서는 연출된 여러 장의 사진 이미지들을 조합해서 보여줌으로써 그 사건의 실재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이미지를 중시하는 특징은 핏빛이 주조를 이루는 애니메이션 장면의 삽입에 있어서 더욱 두드러진다. “빨갱이”로 몰려서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했던 민간인들을 상징하는 색이자, 희생과 분노의 의미를 담고 있는 붉은 색은 매우 강렬한 시각적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다 김윤아가 직접 부르는 노래들은 시청자들에게 정서적으로 강하게 호소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첫 번째 이야기 축은 비극적 역사에 대한 시청자들의 감정 이입과 동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반면 일반 성우가 내래이터로 나오는 두 번째 이야기 축은 차분하고 건조하게 진행된다. 강희철 자신이 말하는 개인사와 간첩 사건과 관련된 진실은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의해 뒷받침 되고 있다. 또한 강희철 이전에도 조작된 간첩단 사건인 65년 혁명당 조작 사건과 77년의 강우규 간첩 사건의 피해자들을 조명하면서 4.3 항쟁의 고통스러운 그림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깊이 드리워졌는가를 또렷이 응시하게 만든다.

  이 두 번째 이야기 축에서도 재연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물들의 인터뷰 그 자체만으로도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데에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보도된 신문 자료와 인물들의 현재의 삶을 담아낸 화면은 이 이야기 축에 사실성과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두개의 축을 따라가던 각각의 이야기들은 마침내 2005년 현재에서 만나게 된다. 김윤아의 내래이션은 1948년에서 4.3 특별법과 턱수건 할머니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알려진 오늘날로 사뿐히 날아온다. 또 다른 이야기 축이었던 강희철은 2005년인 지금, 보안관찰을 연장한다는 통보를 제주지검에서 받는다. 합쳐진 하나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직도 4.3은 끝나지 않은, 여전히 피 흘리고 있는 현재의 역사라는 것이다.          


2. 왜 김윤아의 제주도인가

  앞서서 이 다큐는 두개의 이야기 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기술하였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그 이야기들을 구분짓는 편집상의 특징은 무엇일까? 바로 노래이다. 김윤아가 부르는 노래는 하나의 이야기 축에서 다른 이야기 축으로 이동할 때 나오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노래들의 사용은 내용의 전체적인 통일성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을까? 

  분명히 음악이 나오는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 음악이 가사가 있는 노래라면 시청자들의 주의력은 화면뿐만 아니라 노래의 가사를 파악하는 것에 분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반복, 삽입된 노래들은 이야기의 중심에 쉽게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문제는 김윤아가 내래이터로 나오는 이야기 축에서 중심이 되어야하는 것이 4.3 항쟁의 역사적 궤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김윤아의 노래들과 그 독특한 음성이 더 지배적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김윤아의 제주도”인가? “김윤아”라는 이름이 대표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가수라는 직업적 정체성 외에 제주 4.3 항쟁을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를 대표한다는 뜻일까? 확실히 김윤아는 여느 인기 가수들과는 차별되는 코드를 지니고 있다. “자우림”이라는 인디에서 출발해 이제는 메이저가 된 밴드의 보컬로 활동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 음악세계를 구축해왔을 뿐만 아니라 음악 외적인 면에서도 여성 문제라던가, 다른 사회 문제에 있어서 나름의 목소리를 내왔던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4.3항쟁을 다룬 기존의 다큐들과 확연히 다른 지점을 구축하기 위해 “김윤아”라는 카드를 쓴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다큐 중간 중간 삽입되는 노래들을 직접 부른 김윤아의 모습이나, 감각적인 비주얼이 들어간 애니메이션, 재연 부분에 들어간 사진적 이미지의 구성은 이 프로가 젊은 세대들을 주 시청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이 프로그램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어느 정도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지녔는가에 관해서는 의문이 든다. 뮤직 비디오를 찍는 것도 아닌데 노래를 부르는 김윤아의 클로즈업된 얼굴을 여러 번 보는 것은 김윤아의 팬이 아닌 다음에야 매우 곤혹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깊게 논의되어야할 점은 김윤아가 하는 내래이션에 관한 것이다. 

  그의 내래이션은 과연 자신의 내적 체험과 통찰에서 나온 것일까? 단지 대본 작가가 써준 것을 그대로 읊어 내려가는 것이었다면 내래이션의 화자가 “나(김윤아)”로 나오는 부분은 솔직하지 못한 것이며 사실이 아니다. 내래이터를 유명인으로 쓰는 문제에 있어서 신중해야할 부분은 바로 그런 점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제작진은 “김윤아”라는 카드를 씀에 있어서 형식적이고 외적인 부분에 치우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3. 진실의 힘

  이 다큐를 보면서 나는 새삼 방송을 만드는 이들의 사명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방송 프로그램은 때론 즐거움을 주기 위해 제작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목적은 가난하고, 소외받고 있으며,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쉽게 잊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이유로 침묵 속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공평하다는 것은 그러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고, 그들이 우리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웃임을 일깨우는 일일 터이다. 방송은 그 중요한 역할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윤아의 제주도”는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그 기획 의도를 나름대로 높이 사줄만 하다. 제주 4.3 항쟁이 오늘날까지 드리운 치유되지 않는 상처와 고통의 그림자를 응시하게 만들고, 그 그림자 속에서 침묵을 강요받았던 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잊혀진 목소리를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다큐를 통해 들을 수 있었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거기에 서린 깊은 슬픔은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와닿았다. 이것은 오직 그 목소리에 실린 진실의 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진실의 힘, 그것 외에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이 아무리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을 구태여 보기 쉽고, 듣기 좋게 포장해야할 필요가 있다면, 그만큼 오늘날에는 진실마저도 미디어와 자본의 논리에 좌우되고 있고, 이러한 상황에 우리들이 무감각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다큐에 나온 가수 김윤아나, 그의 노래나, 눈길을 끄는 애니메이션 등과 같은 시도는 결국 포장일 뿐이다. 그것은 이 다큐가 가진 창조성과는 상관이 없고, 그 보다는 대중성을 고려한 결과이다. 방송 다큐가 시청률과 광고주의 요구를 고려하여 갈수록 연성화되어가는 경향은 참으로 우려할만하다.

  보다 많은 이들에게 진실을 얼굴을 마주보게 만드는 다양하고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김윤아의 제주도”에 그러한 방법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쉽고 편하게 가려고 했다는 점이다. 이 다큐를 보고난 다음에 김윤아의 노래와 그 얼굴이 더 오래 남는다면 이것은 분명 실패한 다큐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내게는 제작진이 진실이 가진 힘을 보다 신뢰하고 기대었어야한다는 아쉬움이 남는 다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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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혁명 당시에 시위 참가자들이 만들어낸 구호 가운데에는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것도 있었다. “안달루시아의 개”는 우리의 현실인식을 부정하는 지점, 즉 상상력이 유일한 권력을 획득하게 되는 무의식의 세계에 관한 영화이다. 여자의 눈을 예리하게 가르는 그 유명한 장면을 보라. 이것이 보여주는 의미는 너무나 분명해서 달리 무슨 말이 필요 없다. 새로운 세계를 보기위한 눈을 뜨라는 것이다.

 

  브뉘엘은 우리가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의 제도와 권력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전복시킬 힘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종교, 계급, 언어, 시공간에 대한 감각 등과 같이 현실적 토대를 이루는 요소들이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다. 브뉘엘은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 와서 보시오, 당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과연 그것은 진짜일까?”

 

  영화는 그 질문에 분명히 “아니다”라고 답하고 있다. 그 대답이야말로 이 영화가 현실 비판을 넘어서서 체제 전복적인 메시지까지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것을 꿈꾸는 인간은 권력을 지닌 집단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라야 우리는 진정한 인식과 이해의 눈을 뜨게 된다. 진정한 변혁의 시작은 거기에서부터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브뉘엘은 속삭인다. 문을 열면 바로 해변이 펼쳐지는 놀라운 세계로 오라고. 그곳에서 상상력의 권력을 마음껏 획득하라고. 상상하는 순간 모든 것이 실재하게 되는 세계는 얼마나 멋진가! 이 세계를 보기 위해 우리는 단지 "새로운 눈"을 뜨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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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0-09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라카미 류의 <69>라는 소설에도 이 구호가 인용됐어요. 그땐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유명한 말이더라구요.^^;; 요즘도 가끔 이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답니다. 이 영화 꼭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