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자신의 사랑이 받아지길 기대하며 고백한 후에 되돌아 오는 것이 외면과 거절이라면 당사자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괴로울까? 같은반의 동급생 요시다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 이토는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거기에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이들에게는 게이라고 놀림을 받는데 그를 좋아하는 여학생 아이하라만이 친구가 되어준다. 반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하라에게 묘한 호기심과 연민을 느끼게된 요시다는 그것이 사랑의 감정으로 변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을 향한 이토의 마음은 외면한채 요시다는 방학이 되자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 위해 아이하라의 고향을 알고 있는 이토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밤바다에서 함께 만난 세사람은 서로의 진심을 마주하게 된다.   

  그 자신이 게이이기도 한 감독 하시구치 료스케는 이 영화 "해변의 신밧드"로 세계의 유명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자신의 이름을 단번에 알렸다. 단순한 학원 드라마라고 하기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인물들의 섬세한 내면과 감정의 표현들은 너무나도 빼어나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퀴어 영화로 분류하기도 쉽지 않다. 감독은 십대의 혼란스러운 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관계의 근원까지 탐구해나가는 저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왜 내가 사랑하는 그대는 나의 얼굴을 보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대는 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에 매혹되는가? "해변의 신밧드"에 나오는 이토, 요시다, 아이하라가 꿈꾸는 사랑은 서로 만날 수 없는 곳을 향하고 있다. 과연 이 세상에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랑을 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세상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사랑 보다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이의 시선이 이미 다른 곳을 향해있는 어긋난 사랑이 더 많은데도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대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라. 그는 그대의 얼굴을 보고 있는가? 그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시선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또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대를 향한 누군가의 또 다른 시선이 있는지 둘러보라. 이 세상에는 단지 마음만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가슴아프고 슬픈 일인지에 대해서도...

  이 영화의 제목이 왜 "해변의 신밧드"인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감독은 왜 그런 제목을 붙였을까? 세명의 주인공들은 밤의 바닷가에서 서로의 진심을 알게되고 비로소 사랑하는 이의 얼굴 뿐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이의 얼굴도 마주하게 된다. 더 넓은 세상이 보고 싶어서 모험을 떠나는 신밧드처럼 준비가 되어있다면, 우리는 삶이 보여주는 진실의 얼굴과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시구치 료스케는 이 영화를 보는 이에게 함께 그 해변가에 서보지 않겠느냐고 진지한 얼굴로 물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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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포로수용소. 이곳에는 합리적인 사고와 지도력을 지닌 소장 요노이 대위(사카모토 류이치 분), 잔혹하고 무지막지한 하라 상사(기타노 다케시 분), 포로들과 일본군 사이의 소통을 중재하는 통역관 로렌스(톰 콘티 분)가 수용소 안의 크고 작은 사건 속에서 지내고 있다. 어느날 요노이 대위는 군사재판에서 영국군 포로 잭 셀리어스(데이빗 보위 분)를 보고 첫눈에 매혹당한다. 사형의 위기에서 잭을 구해 수용소로 데려온 그는 이전과는 달리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폭압적으로 변해가고 수용소의 상황은 점차 악화되어 간다. 그러던 중 포로들이 반입한 라디오가 발견되는 사건이 터지고 잭과 로렌스는 배후로 지목받아 감옥에 갇히는데...

  일본의 영화사에 있어서 오시마 나기사가 일으킨 파란과 반향은 그 무엇으로도 측정하기 힘들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의 면면에는 억압하는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부인하고 저항하는 도발성이 드러난다.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에도 오시마의 그러한 정치적인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얼핏 보기에 이 영화는 동성애가 주가 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이 영화를 싸고 있는 수많은 포장 가운데 가장 눈에 띠는 것일 뿐이다. 동성애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서구에 대한 동양인의 애증, 지배와 피지배, 학대와 피학대, 집단과 개인 사이의 충돌과 갈등이 겹겹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요노이 대위가 잭에게 느끼는 감정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인가? 아니면 자신이 동경하는 서구에 대한 동경과 흠모인가? 사실 그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요노이 대위는 잭을 본 이후로 자신이 이전과는 달리 매우 흔들리고 있으며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조차도 그의 흔들림을 막을 수가 없다. 살육과 공포가 극대화된 전쟁이라고 해도 사람의 뼛속 깊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의 부하와 포로들에게 잔인한 행위를 일삼는 하라 상사조차도 통역관인 로렌스에게 일종의 유대감과 연민을 갖고 있다. 성탄절에 자신의 명령으로 잭과 로렌스를 풀어주며 즐거워하는 하라의 얼굴은 분명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요노이 대위에게 한 단한번의 키스와 포옹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잭의 마음 속에는, 일본군에게 비굴한 것처럼 보여서 동료들로부터 차라리 자결하라는 빈정거림을 듣는 로렌스의 마음 속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 이 영화를 보다보면 인간의 마음 속에는 그 무엇으로도 헤아리기 힘든 물길이 있음을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그 심연을 얼핏 들여다보게 만든 것은 오시마 나기사이기 때문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이제는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선 사카모토 류이치의 배우로서의 삼십대의 모습과 그의 영화음악, 데이빗 보위가 보여주는 죽음이 드리워진 매혹, 기타노 다케시의 티 하나 없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이 영화가 주는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오시마의 전작들에 비하면 파괴적이고 도발적인 감성은 다소 무디게 느껴질지 몰라도 이 영화는 그가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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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0-09 14:27   좋아요 0 | URL
이 영화는 영국인이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 영화를 어느 날 우연히 케이블에서 보고 난 후에 인터넷에서 영화에 관련된 정보들을 찾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요. 영화에 대해 제가 가졌던 의문의 원인을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제 생각으론 이 영화는 서구인이 동양(정확히는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은 잘 드러나지만 일본이 그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은 잘 드러나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이 영화에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실수는 서양이 일본을 바라보는 방식을 아무런 비판이나 수정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만약 이런 종류의 영화가 서양의 자본을 가지고 백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특별히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인이 스스로에 대한 자의식이나 성찰 없이 서양적인 시각을 그대로 차용하여 만든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습니다. 오시마 감독은 이 영화를 어떤 명백한 '목적의식' 하에 만들었습니다. 바로 칸느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이 그 목표였죠. 그러기 위해선 코스모폴리탄적인 의식이 잘 드러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겠죠. 그래서 영국의 자본을 투자받았고 데이빗 보위같은 백인배우를 기용한 겁니다. 하지만 그 해(83년) 칸느 그랑프리는 같은 일본인 감독인 이마무라 쇼헤이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는 <나라야마 부시코>라는 일본적인 영화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이죠. 오시마 감독의 얄팍한 계산과 매우 비교되는 영화사의 한 사건이라 할만하죠. 적어도 제 생각으로는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삶은 쉽게 내던져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누추함과 외로움, 슬픔이 무척 큰 때에도 더 꼭꼭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햇빛 찬란한 월요일"에 나오는 다섯명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꼭꼭 끌어안고 사는 것에 지치고 이력이 난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일하던 항구의 조선소가 문을 닫자 실직자가 된 이들은 2년이 지난 후에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동네 술집에서 술이나 마시며 시간을 죽이는 신세가 되었다.

  다혈질이면서 유머감각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산타, 고된 노동을 하는 아내에 대한 자책과 자괴감에 시달리는 호세, 아내가 집 나간 것을 친구들에게도 숨기고 사는 아마도르, 과거의 추억 속에 사는 러시아 이민 노동자 세르게이,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취업을 하려고 온갖 노력을 하지만 늘 좌절하고 마는 리노. 카메라는 이들의 무미건조한 일상을 따라다니며 담아낸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탄탄한 내러티브를 갖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띤다. 조선소의 폐쇄와 관련된 상황이나, 각각의 인물들이 갖고 있는 갈등과 고민을 매우 차분하고 설득력있게 풀어낸다. 감독은 이윤과 효율만을 강조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드리우는 어두운 그늘을 비판하면서 그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삶에 대해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다만 조선사업과 관련해 주인공이 한국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부분은 우리나라 관객에게는 심정적으로 거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들이 어디를 가야 일자리를 찾고, 인간적인 삶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산타는 자신의 나라와 대척점에 있는 광활한 호주 대륙에 가서 멋지게 사는 것을 꿈꾸지만 그것은 실현될 수 있을까?  삶의 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택한 아마도르, 그리고 여전히 햇빛 찬란한 월요일의 출근을 꿈꾸며 쉽지 않는 삶을 살아내야하는 친구들. 이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영화는 분명하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대신에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그 자리, 던져버릴 수도 없어서 그저 꼭꼭 껴앉고 있는 삶의 괴로움과 피로함에 대해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삶은 그렇게 구질구질하고 칙칙한 것이 아니라고? 그렇다고 삶이 장미빛의 꿈과 희망, 기쁨과 평화로움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도 분명 아니다. "열자(列子)"에는 고통받는 날을 빼면 일생은 며칠 밖에 되지 않는다는 귀절이 나온다. 감독은 그 고통받는 날들에 대한 길고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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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와 관련된 책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본의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들은 화려하고 빠른 영상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지루하고 밋밋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 유명한 동경 이야기를 보라.  두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노부부의 이야기가 고요한 강물처럼 흘러간다.  그의 영화들을 보고 내가 느끼는 오즈는 말주변이 뛰어난 이야기꾼이라기 보다는 다소 어눌한 말씨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놓고 듣는 이가 이야기에 대해 천천히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지 싶다.

  부초 이야기(1934)와 부초(1959)는 원본과 리메이크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사실 오즈 영화에서는 이런 예가 많다. 그래서 몇편을 보아도 다 비슷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나의  주제(가족의 문제, 특히 결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를  두고 약간씩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오즈가 자신의 작품에서는 왜 그토록 결혼의 문제를 두고 천착했는지 하는 것이다. 한 가족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변하는 계기가 되는 자녀의 결혼이라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는 구성원 각자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들을 포착할 수 있는 좋은 소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즈가 보여주는 세계는 가족이라는 틀에 가둘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이 가지는 다양한 감정들, 관계 맺음, 운명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두 작품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를 기둥으로 유랑 극단원들의 비애와 한 인간의 고달픈 인생역정이 씨실과 날실로 엮어지는 옷감처럼 펼쳐진다. 사실 두 작품은 흑백과 칼라, 몇몇 장면의 설정을 제외하고는 스타일에 있어서도 거의 동일하다. 물론 원본인 부초 이야기는 나중에 만든 부초에 비해 질박하고 어딘가 비어있는 구석이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감정의 밀도라는 측면에서는 단연 부초 이야기가 더 낫다고 본다. 특히 끝부분의 시퀀스들에서 오즈는 떠다니는 인생의 아픔과 혈육지정에 대해 완벽하게 자신의 의도를 구현한다.

  오즈의 작품들을 보다 보면 과연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게 된다. 부모는 자식을 키우고, 그 자식들은 결혼을 해서 독립을 하고, 늙은 부모는 자신의 생을 돌아보며 죽음을 준비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안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수채화처럼 그려진다. 그는 자신이 남긴 작품들을 속에서 "자, 산다는 건 이런거 아니겠소"라고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말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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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벌써 십년도 더 된 이야기다. 이 영화를 본 같은 반 아이가 그 남자 주인공이 어찌나 춤을 잘 추는지 보고서 넋이 나가는 줄 알았다고 하는 말을 들은 것이.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이란 세월이 지나는 동안 가끔씩 그 영화를 생각했지만 어찌하다가 이제서야 보게 되었으니...

  자신이 추고 싶은 춤과 대회 우승이라는 놓칠 수 없는 두가지 꿈 가운데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당하는 주인공 스캇은 갈등하고 번민한다. 이야기의 얼개는 단순하다.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스캇과 그것을 방해하고 어렵게 만드는 악의를 가진 협회장의 대립구도 속에 부모의 좌절된 젊은 날의 춤 이야기가 흥미롭게 배치되어있다. 거기에다 뛰어난 춤솜씨를 볼 수 있는 대회 장면과 연습과정, 함께 어우러진 음악들 또한 놓칠 수 없는 매력으로 작용한다. 

  단순한 춤 영화겠거니 하고 본 영화에서 의외로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는 일도 즐겁다. "겁먹는 인생은 종친 인생이다!"라고 주인공들이 되뇌이는 대사는 마음 한구석에 남는다 . 결국 스캇이 발견하는 것은 자신이 마음으로 원하는 춤을 출 때 행복하다는 것, 스스로가 느끼는 만족과 충만함이 관객에게 전달될 때 관객도 함께 환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보고나서 문득 언젠가 읽은 밥 딜런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의 젊은 시절, 자신의 목소리가 가수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가수의 길을 포기하려했을 때 누군가 해준 다음의 말을 듣고 가수의 꿈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너의 노래를 해라."

  어쩌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뛰어난 재능이나 지식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바즈 루어만 감독은 멋진 춤이 있는 이 영화를 통해 인생의 숨겨진 진리를 단순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너의 춤을 춰라, 그리고 그 순간의 행복을 가슴으로 느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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