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TV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어떤 할머니의 손에 길러지던 개가 주인이 죽자 시름에 잠겨서 먹는 것마저 거부하다가 결국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할머니 대신 새로 주인이 된 이는 개를 아낌없이 보살폈지만 그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동물에게도 영혼이라는 것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것과는 어떻게 다를까? 영혼에 등급을 매기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렇다면 영혼에도 저급과 고급이 존재할까... 주인을 따라 죽어버린 개의 이야기는 내게 뜻밖의 물음을 남겼다.

  영화 "파이란"에 나오는 이강재(최민식 분)의 삶은 남루하고 비참하게 떠도는 영혼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살아온 삶의 내력을 아무리 털어보아도 순결한 것, 온전한 것이 나올 것 같지가 않다. 그에게는 멸시와 모욕을 받는 것이 일상이며 어떤때는 당연해 보이기까지 하다. 때론 울컥하는 마음에 어깃장을 놓아보기도 하지만 남는 것은 상처입은 얼굴과 추스리기 어려운 몸 뿐이다. 이런 그에게 구원이란 것이 가능할까? 놀랍게도 그것은 얼굴도 모르는 한 여인(장백지 분)의 죽음을 통해서 시작된다. 

   강재는 세상을 떠난 파이란이 남긴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린다. 왜 그랬을까? 그건 자신을 그리워하고 고맙게 생각했던 여인에 대한 마음의 빚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사실 그 둘 사이에는 감정의 교류라고 할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건 마치 송신만 가능한 전파 발신기와 같다. 그 때문에 강재에게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거듭 써내려간 여인의 편지글은 이상하게도 보는 이의 마음에 와닿기 보다는 여인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 순간 공허하게 흩어져버린다. 장례식을 위해 내려간 해변가 마을에서 강재가 보여준 감정의 동요는 지나치다는 인상을 준다(그 때문에 그의 동생은 형의 그런 모습이 오버한다고 하고, 직업 소개소 소장은 연기라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여인이 그토록 절절하게 써내려갔던 편지는 외로운 타국 생활에서 스스로를 견딜 수 있게 만든 독백인지도 모르며, 강재가 해변가에서 토해내었던 울음은 영락해버린 자신의 처지에 대한 처절한 회한에 가깝게 보인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그러한 단절에도 불구하고  순전한 한 여자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던 남자는 자신의 남루한 영혼을 응시하게 된다. 그러나 온전한 삶을 향한 구원의 여정에 들어섰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남자의 꿈은 곧 좌절되고 만다. 이렇게 보면 감독은 지독한 비관론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파이란"이 보여주는 세상은 순결한 영혼이 존재하기에는 사악한 곳이며, 그렇지 못한 영혼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줄만큼 따뜻한 곳이 아니다.

  강재와 파이란. 그 둘 사이의 소통의 불일치와 만남의 부재는 이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영혼과 그 구원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비극적 결말을 보여주지만, 한편으로는 강재가 죽기전에 비디오를 통해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파이란의 모습을 보며 감동하는 장면은 사악함과 어리석음이 가득한 세상에서도 버릴 수 없는 희망이 있음을 내비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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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0-09 14:33   좋아요 0 | URL
저 이 영화 무지 좋아해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