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한 달 정도 미뤄 두었던 2007년의 책 정리 글 '삼부작'의 마무리를 이제서야 짓는다. 최근 몇 편의 서평들을 정리해 집필할 생각으로 본의(!) 아니게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몇 가지 잡다한 주제의 많은 책과 글들을 분류하고 재검토하게 되었는데(단적인 예를 들자면, 이 방에서는 벤야민(Benjamin)을 읽었고, 저 방에서는 무페(Mouffe)를 읽었으며, 그 방에서는 데리다(Derrida)를 읽고, 지하철에서는 트로츠키(Trotsky)를 읽고 있었다), 이제는 예전보다 성격이 많이 느긋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순간 돌아보면 '원점'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2008년에는 그러지 말자고, 급하지 않고 여유롭게 작업해보자고, 그렇게 굳게 다짐해본다. 굳게 다짐해보지만, 작심삼일이 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편리한 자기기만의 환상조차 버리고 나면, 저 '예상된 실패'를 머금은 다짐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신년의 다짐이란 어쨌든 '다짐'이라는 형식으로서는ㅡ어쩌면 그러한 형식으로서만ㅡ의미와 의의가 있을 것이라는 구차한 변명 한 자락을 슬쩍 흘리며, '강박'과 '반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신년 덕담처럼 진부하고 남루한 질문 한 자락을 다시금 첨부해둔다. 올해 말에는 이 글을 다시 읽으며 즐거운 미소를 지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외국 저자의 저서 다섯 권을 뽑아본다:
1. Jacques Rancière, Politique de la littérature,
Paris: Galilée(coll. "La Philosophie en effet"), 2007.
2. Arnaud Bouaniche, Gilles Deleuze, une introduction,
Paris: Pocket(coll. "Agora"), 2007.
3. György Ligeti, Gesammelte Schriften Band 1, 2, Mainz: Schott, 2007.
4. Lorenzo Chiesa, Subjectivity and Otherness: A Philosophical Reading of Lacan,
Cambridge/London: The MIT Press(coll. "Short Circuits"), 2007.
5. Maurice Blanchot, Chroniques littéraires du Journal des débats,
Paris: Gallimard(coll. "Les Cahiers de la NRF"), 2007.
▷ Jacques Rancière, Politique de la littérature,
Paris: Galilée(coll. "La Philosophie en effet"), 2007.
1) 21세기에 들어 랑시에르(Rancière)의 학자적 역량과 그 영향력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출간된 그의 저서들이 지닌 양과 질이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2007년에 출간된 위의 책은 이러한 랑시에르의 이론적 여정, 특히나 그가 꾸준히 지속해온 '문학론'을 일단락 지어주는 저서라는 인상이 강하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문학의 정치[학]'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우선 두 개의 제한규정이 필요할 것이다. 첫째, '문학의 정치학'은 작가의 사회참여론, 곧 '참여문학론'과는 거리를 둔다. 랑시에르가 사르트르(Sartre)와 '대결'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둘째, 또한 이러한 작업은 이른바 문학의 사회성에 대한 담론, 곧 '문학사회학'을 겨냥하지 않는다. 랑시에르의 문학에 대한 관점은ㅡ『불화(Mésentente)』의 연장선 위에서ㅡ여러 체제들과 여러 정치[학]들 사이의 긴장, 그 긴장이 산출하는 충돌(heurt)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문학은, 간단히 말해서, 글쓰기의 예술이 취하는 동일시의 새로운 체제(régime)이다. 하나의 예술이 지니는 동일시의 체제란, 실천들, 그러한 실천들이 갖는 가시성의 형식들, 그리고 지성의 양태들이 이루는 관계의 체계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정의하는 것은 감각적인 것의 분배(le partage du sensible) 안에 개입하는 어떤 특정한 방식이다."(위의 책, p.15, 번역: 람혼) 이 문장에서 우선 주목해야 할 곳은 크게 두 부분으로 보인다: 첫째, '역사성'의 한 형식으로 도입되는 "체제"라는 용어는 비단 랑시에르의 논의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딕키(Dickie) 등의 '예술제도론'에 대해 갖고 있는 관계를 검토함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둘째, 랑시에르 정치학의 '전매특허'라 말할 수 있을 저 "감각적인 것의 분배" 개념은 바움가르텐(Baumgarten)과 칸트(Kant) 이후로 실로 변화무쌍하게 전개되어온 '감성학' 또는 '감각학'으로서의 미학의 영역이 어떻게 효과적이고도 전략적으로 정치학의 영역과 접합할 수 있는가를 가장 성공적으로 예시하고 있는 사례이다. 벤야민과 루카치(Lukács)의 여러 언급들에서 이미 '예언적으로' 드러나듯이, 현대에 이르러 미학은 그 '어원'에 맞게ㅡ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근대의 미학'이 전개했던 이론적 장면들의 전체적 풍경을 떠올려본다면, 이 '어원에 맞게'라는 현상은 미학에 있어서 오히려 역설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는 '희비극적' 상황이 발생하는 것인데ㅡ일종의 '감각학(Ästhetik)'에 근접해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텐데, 개인적인 기준에서 볼 때 랑시에르의 '미학적-정치학적' 논의를 검토할 때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학' 또는 '감성학'으로서의 미학이 지닌 위치와 지위이다. 랑시에르에게 있어서 어떻게 '감각적인 것'이라고 하는 미학적 범주가 '분배'라고 하는 정치학적 범주와 연결되고 결합되는가 하는 물음은 바로 이러한 미학의 '근대적', '학문적' 위치를 숙지함으로써만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장 '근대적인' 학문 영역으로서 미학이 지닌 '사상사적' 위치를 염두에 두고 랑시에르의 글을 읽을 때, 그가 푸코(Foucault)에 이어 '미학'을 통해 '존재론적' 영역에 접근하는 또 하나의 '다른' 길을 열어 보여주고 있는 철학자임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독을 권한다.
▷ Jacques Rancière, Le partage du sensible. Esthétique et politique,
Paris: La Fabrique, 2000.
▷ Jacques Rancière, L'inconscient esthétique,
Paris: Galilée(coll. "La Philosophie en effet"), 2001.
▷ Jacques Rancière, Malaise dans l'esthétique,
Paris: Galilée(coll. "La Philosophie en effet"), 2004.
랑시에르의 다른 책들에 관해서는 일전에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의 그림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짤막하게나마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http://blog.aladin.co.kr/sinthome/1840680). 얼마 전 그의 책이 한 권 국역되어 나온 바도 있고(벌써부터 엄청난 욕을 먹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걸 보니, 장수할(?) 번역본임에 틀림없다), 또 몇 권의 번역본이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도 접하게 된다. 번역 비평의 '흑심(黑心)'을 잔뜩 키우게 되는 실로 '풍성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번역되었으면 하는 랑시에르의 책은, 바로 앞에서도 그 개념의 중요성을 이미 강조했던 바 있거니와, 2000년에 출간된 『감각적인 것의 분배. 미학과 정치학(Le partage du sensible. Esthétique et politique)』이다. 랑시에르의 '미학-정치학' 논의를 가장 압축적이고도 집약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작지만 좋은 책이다(후주를 합해도 75쪽 분량밖에 되지 않는 소책자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은 가브리엘 록힐(Gabriel Rockhill)의 번역을 통해 'The Politics of Aesthetics'라는 제목으로 2004년에 영역된 바 있는데, 특히나 책의 말미에 수록되어 있는 슬라보이 지젝(Slavoj Žižek)의 명쾌한 후기를 읽는 즐거움도 놓칠 수 없는 백미이다. 더불어, 이 후기에서 간략히 정리되고 있는 정치[학]의 분류법에 대한 설명, 곧 랑시에르가 『불화』에서 구분하고 있는 '정치한' 세 가지 정치[학]의 분류법(archi-politique, para-politique, méta-politique)에 한 가지(ultra-politics)를 더 추가한 지젝의 네 가지 분류법에 대한 해설은 『불화』 읽기의 입문으로도 아주 유용할 것이라는 팁(tip) 한 자락도 첨언해둔다(그렇다, 사실 저 『감각적인 것의 분배. 미학과 정치학』과 함께 가장 먼저 번역되어야 할 랑시에르의 책은 바로 이 『불화』이다).
▷ Arnaud Bouaniche, Gilles Deleuze, une introduction,
Paris: Pocket(coll. "Agora"), 2007.
2) 아르노 부아니슈(Arnaud Bouaniche)가 쓴 이 들뢰즈 철학 입문서는 일전에도 한 번 지나가는 길에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http://blog.aladin.co.kr/sinthome/1731219), 그 서술에 있어서 다소 '도식적인' 감이 없지는 않지만, 들뢰즈 철학에의 입문에 있어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된 책도 드물다는 생각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러한 양질의 '입문서'로서의 책은 사실 '거인'과도 같은 저작들의 숲 사이로 나 있는 일종의 매력적인 '샛길' 또는 '틈새'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발빠른 편집자와 번역자가 어서 나서서 '소리 소문 없이'ㅡ하지만 '제대로'ㅡ번역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강하게 드는 책이다(특히나 들뢰즈 전공자가 '비판적' 역자 후기를 달아 번역했을 때 더욱 유용한 국역본이 될 가능성이 높은 책이라고 생각된다). 들뢰즈 철학에 이미 익숙한 독자라면 일종의 '총정리' 차원에서, 들뢰즈 철학에 처음 입문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압축적이면서도 내실 있는 '길잡이' 차원에서 읽어볼 만한 책이다. 전체 2부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의 압권은 바로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1부인데, 이른바 '들뢰즈가 새롭게 구성한 철학사'를 다루고 있는 1장 '사유'에서 시작해 2장 '정치학'과 3장 '미학'을 거쳐 4장 '철학'에로 나아가는 구성이 사뭇 안정적이다. 이 책의 매력은 특히 책 사이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상자 기사들인데, 들뢰즈 철학의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중요한 인물들(예를 들어, 장 이폴리트(Jean Hyppolite),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 장 발(Jean Wahl),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야콥 폰 윅스퀼(Jacob von Uexküll),ㅡ그리고 물론 말할 것도 없이ㅡ펠릭스 과타리(Félix Guattari), 퍼스(Peirce), 화이트헤드(Whitehead) 등등)과 그들의 책에 대한 간략하지만 긴요한 설명들을 담고 있다. 다만 이 책에 대해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들뢰즈의 '반(反)-플라톤주의'에 대한 강조가 조금 지나쳐 들뢰즈의 '플라톤주의'를 간과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
▷ Gilles Deleuze, 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Paris: Minuit(coll. "Paradoxe"), 2002.
▷ Gilles Deleuze, . Deux régimes de fous.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Paris: Minuit(coll. "Paradoxe"), 2003.
▷ 질 들뢰즈, 『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편역), 이학사, 2007.
2007년에 번역된ㅡ실은 '편역'이지만ㅡ『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또한 들뢰즈 '입문'과 관련해 주목을 요하는 책이다. 이 책의 주요 저본이 된 책은 들뢰즈 사후에 간행된 두 권의 저작/대담 모음집인데, 다비드 라푸자드(David Lapoujade)의 편집으로 미뉘 출판사를 통해 각각 2002년과 2003년에 출간된 바 있다. 사실 '냉정히' 생각해보자면 플라톤 이후의 모든 서양 철학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언제나 어떤 '철학사'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긴 했지만, 헤겔(Hegel)과 하이데거(Heidegger) 이후로 들뢰즈만큼이나 이토록 다시금 우리를 '전면적으로' 철학사에 집중하게끔 만들었던 철학자가 또 있었을까 싶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이 번역본은 더욱 더 시간을 두고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François Dosse, 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 Biographie croisée,
Paris: La Découverte, 2007.
들뢰즈와 관련하여 요즘 '열독(熱讀)'하고 있는 책은 바로 프랑수아 도스(François Dosse)가 쓴 위의 전기이다. 이 역시나 2007년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이다. 600쪽이 넘는 두툼한 분량이라 독서 자체가 일종의 '대장정'이 될 것임은 현재로서도 불을 보듯 뻔하지만, 때로는 아장아장, 때로는 성큼성큼, '묵직한 잰걸음'으로 걸어가보는 수밖에. 견고하고 우직한 '하이킹' 장비들을 챙길 일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를 동시에 다룬 '교차 편집'의 전기로서는 도스의 이 책이 처음이 아닐까 하는데, 최근 한 지인의 소개로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고 있는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에 한 번 '맛'을 들인 이후로 전기 장르가 예전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고백 한 자락 덧붙여본다(이 시리즈의 쳇 베이커(Chet Baker) 전기에 이어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전기까지 읽고 말았는데, 아마도 다음에는 서점에서 빌 에반스(Bill Evans)의 전기를 들고 계산대로 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약간 걱정이 앞선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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