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과 '재현'의 장소로서의 국립현대미술관, 그리고 백남준의 <다다익선>. [사진: 襤魂]

1) 며칠 전 실로 오랜만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을 다녀왔다. 이 '거대한' 미술관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두 가지가 떠오른다. 열네 살 무렵의 어느 여름 나는 이 미술관의 [똑같이] 거대한 정원 한 구석에 앉아 그림 한 장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서양화가 조덕현 선생, 동양화가 김호석 선생, 그리고 만화가 이희재 선생을 강사로 모시고 대략 일주일 동안 열렸던 '청소년을 위한' 미술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날 정원에 앉아 내가 그리고 있던 그림은 거친 채색화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소재는 그곳의 풍경 안에는 있지도 않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거지의 모습이었다! 그 그림은 당시 김호석 선생으로부터 '경악에 찬', 그리고 '우려를 담은' 호평을 받았는데, 그 시절의 어린 나는 나름대로는 미술 수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풍의, 고풍스러운 어느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같은, 이야기 한 자락이 그 첫 기억이다. 두 번째 기억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고 계신 어머니는, 언제부터인가 국립현대미술관을 가지 않으신다. 내 인생 최초의 기억들이 대부분 어머니의 손을 잡고 전시회들을 보러 다녔던 기억이고 보면, 이러한 어머니의 '결심'은 사뭇 격세지감의 느낌을 자아내지 않을 수가 없는데, 하지만 이에 대한 어머니의 변론(辯論)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그렇게 '외따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문제라는 것, 곧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 위치 자체가 문화정책의 한 실패를 방증하고 있다는 것이다(어머니의 비교 대상은 파리 시내 한복판에 있는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서부터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사실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시립미술관, 한가람미술관, 호암갤러리(아직도 있는지 모르겠다), 로댕갤러리, 리움, 조선일보미술관, 일민미술관, 그 외 사간동과 인사동의 크고 작은 화랑 등 서울시내의 다른 미술관들과 비교했을 때 분명 '작심하고' 찾아가야 하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머니의 주장은 단호하다.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존재가, 가장 근대적이고ㅡ'모던'의 의미에서ㅡ현대적인 도시문화와 동떨어진 곳에 '여유롭고 한가하게'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현대성'에 대한 일종의 무지이자 이율배반이라는 것. 내가 어머니의 의견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간에,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공간이 내게 일종의 '기억'이라는 지위로 남아 있게 된 것을 보면, 일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2007년 7월, 이 동물원 옆 '현대적' 미술관에서는 세 개의 전시회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 베르나르 브네(Bernar Venet), 그리고 정연두의 전시가 그것.

   

▷ 바젤리츠의 '거꾸로 된' 레닌 점묘 초상, 그리고 그 '기원[Ur-text]'. 

2) 바젤리츠의 문제의식은 '재현(representation)'의 논리에 놓여 있다. 현대의 구상회화에 있어서 이 재현이 문제되지 않았던 적이 있겠냐마는, 이에 대한 바젤리츠의 접근방식은 단순하면서도 자극적이다. 요는, 거꾸로 그리며 거꾸로 본다는 것. 많은 이들이 바젤리츠가 선택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소재들, 그리고 그러한 소재들을 거꾸로 그린 방식에서 일종의 '전복성'이라는 개념을 애써 끌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바젤리츠의 그림에서 '기억'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역사적' 기억 또는 '회고적' 기억이 아니라 '재현이라는 형식'에 대한 기억일 것이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이 거꾸로 그리고 보는 방식에서 오히려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그림들이 소위 '전복성'에 대한 단순하고 순진한 상징이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이 거꾸로 된 그림임을 곧 바로 '인지'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 바젤리츠의 이른바 '러시안 페인팅' 연작은 우리가 구상회화 속에서 '구상'을 인지하는 방식, 곧 우리가 그림 속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포착하는 인지 과정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 거꾸로 그려졌다는 것을, 혹은 그림이 거꾸로 걸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단박에 알아챈다. '이 그림은 거꾸로 그려져 있다' 혹은 '이 그림은 거꾸로 걸려 있다'는 인식은, 그것이 오직 추상회화가 아닌 구상회화인 한에서만 가능한 그런 종류의 인식인 것이다. 아마도 바로 된 그림 속에서보다 거꾸로 된 그림 속에서 사물들이 '훨씬 더 잘 보인다'는, '곧 바로 보는 이의 눈을 향하게 된다'는 바젤리츠의 말은, 바로 이러한 구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언급으로,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시선에 대한 바젤리츠만의 '회화적' 전략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렇듯 바젤리츠의 '거꾸로'라는 방법론은 시선이라는 현상에 대한 하나의 회화적 질문으로서 이해될 때만이 비로소 재현의 논리에 대한 '반성(reflection)'이라는 지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 외의 의미, 예를 들어 형상에 대한 즉물적인 전복이라는 의미만을 이야기한다면, 그의 그림은 전혀 새로울 것도, 논의할 것도 없는, 또 하나의 진부한 '회화' 이상은 아닐 것이다.

   

   

▷ '거꾸로' 된 바젤리츠의 그림에서 '형상의 전복' 따위의 의미만을 이끌어내는 이론적 행위는, 역설적이게도, 전혀 '전복적'이지 못하다.

3) 덧붙여, 지나가는 길에 이러한 '재현'의 논리와 체계에 관한 가장 최근의 주목할 만한 미학적 논의를 꼽자면,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책들을 추천하고 싶다. 아래 두 권의 일독을 권한다. 랑시에르에게 있어서[도] 미학이 하나의 학제(discipline)가 아니라 담론의 체계 혹은 물음의 형식들임은 분명하지만, 그는 부르디외(Bourdieu)와도 '구별(distinction)'되는, 리오타르(Lyotard)와도 '분쟁(différend)'을 일으키는,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게다가 정신분석의 예술적 '기반'과 '기원'에 대해 역으로 '정신분석'을 가하고 있는 『미학적 무의식』의 논의는 특히 흥미롭다. 최근 랑시에르의 책들 몇 권을 지하철을 오가며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후일 다른 글로 따로 미루겠다. 바젤리츠의 인상적인 레닌 초상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하나 더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지젝(Žižek) 편집의 레닌 선집인데, 이 책의 후기(Lenin's Choice)에서 지젝은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ly correct)'이라는 것에 대항해 '진실에 대한 권리(right to truth)'라는 각을 세우고 있다(pp.168-178 참조). 개인적으로 이러한 논의를 구상회화의 '비평'에 적용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회화에 있어서 '정치적 올바름'이란 회화의 전복성에 대한 '단면적인' 주장일 것이며, 회화에 있어서 '진실에 대한 권리'란 시선에 대한 일견 '나이브'해 보이는 물음에 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젤리츠가 '거꾸로' 그리기의 대상으로 단번에 레닌의 초상을 '선택'한 것에는 분명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Jacques Rancière, L'inconscient esthétique
    Paris: Galilée(coll. "La philosophie en effet"), 2001.
▷ Jacques Rancière, Malaise dans l'esthétique
    Paris: Galilée(coll. "La philosophie en effet"), 2004.

▷ Slavoj Žižek(ed.), Revolution at the Gates, London/New York: Verso, 2002.



▷ 피아노 위를 배회하는, 레닌의 환영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그림.

4) 더불어, 왜 레닌인가, 왜 '이 시대'에 하필이면 레닌인가ㅡ지젝은 심지어 월스트리트 근무자들 중에서도 마르크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지만 '레닌'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그 어느 누구라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는 '유머'를 날리고 있는데ㅡ하는 물음 앞에서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하나 더 있다. 피아노 위에 떠오른 레닌[들]의 환영을 그린 달리(Dali)의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실은, 고백하자면, 이 모든 개인적인 이유들 때문에, 그 덕분에, 나는 바젤리츠의 레닌 초상 앞에서, 다소 오랜 시간을, 머무를 수 밖에,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브네의 이른바 '비결정적인 선들'은, 아마도 현대미술의 곤궁(predicament), 그 비결정성과 불확정성에 대한 '현상적' 혹은 '윤리적' 등가인지도 모른다. 

5) 브네의 작품이 제기하는 문제는 실로 '재현'만큼이나 오래 된 개념미술의 문제, 곧 예술에 있어 쾌(快)의 측면과 지(知)의 측면 사이의 대립이다. 전시회 한 구석에 마련된 공간에서 브네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영상을 보고 있자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동시에 개인적으로 어떤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브네는 그 자체로 현대미술이 봉착했던 하나의 막다른 골목, 곧 'predicament'라는 영어 단어가 정확히 가리키고 있는 바로 그 사태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브네의 작품들과 그에 따르는 연혁을 일별하면서ㅡ이러한 '일별'이야말로 바로 '회고전(retrospective)'이라는 형식에 가장 적합하고 알맞을 전시와 관람의 방식이 아니겠는가ㅡ곧 바로 현대미술에 관한 단토(Danto)의 논의를 떠올렸던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브네의 '시행착오'가 결국 다다른 지점은 어디였던가. 그것은 바로 '비결정적/불확정적 선(indeterminate line)'의 지점이었다. 왜 이것을 '비결정적/불확정적'이라고 부르며 또한 '선'이라고 부르는가, 그것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해석학적 지평은 무엇인가, 여기서 중요한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ㅡ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ㅡ'현상적으로' 그 선들은 결코 비결정적인 것이 될 수 없으며ㅡ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그렇게 결정된' 하나의 형상이기 때문에ㅡ또한 그것은 이미 '선'조차도 아니기 때문이다(면을 선으로 치환하는 하나의 '환상', 예술의 지극히 당연한 과정과 일환으로 인식되었던ㅡ그래서 '인식' 그 자체조차 되지 않았던ㅡ그 환상의 추상화 과정에 대한 반발과 문제의식이야말로, 개념미술이 취했던 가장 '급진적인' 입장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내게는 아래 사진의 퍼포먼스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쉽게 '동양화의 기법과 정신'을 연상시킨다, 한 번 더 강조하자면, '너무도 쉽게' 말이다. 이 '너무나도 손쉬움'은 현대미술의 저 '위대했던 곤궁'에 비할 때 정말 비겁하고 단순한 회피이자 도피는 아닌가, 우연성과 수동성을 가장한 가장 '필연적이고 적극적인' 회피, 동양을 가장한 가장 서양적인 '오리엔탈리즘'으로의 도피, 그런 것은 아닌가, 아닐 것인가, 그런 물음이 꾸역꾸역 자꾸만 내 머리 속을 채워만 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저 무쾌(無快)의 지(知)는 '거꾸로' 쾌(快)의 무지(無知)로 귀착하는 것이 아닌가, 혹시 그런 것은 아닌가, 그런 우려의 물음과 함께. 그러니까 요는, 이 작품들의 기괴하리만치 '심각함'과 '진지함'은, 이제 나에게는 오히려, 실소에 가까운 웃음을 자아내고 있었다는 것, 만약 저 작품들이 나의 이러한 '선적(禪的)인' 웃음을 의도했던 것이라면, 당신의 예술은 성공했다!

▷ 이 '선적(禪的)인' 퍼포먼스는 혹시, 현대미술의 '손쉽고 고매한' 도피가 아닐까, 무쾌의 지가 아닌, 혹시라도, 쾌의 무지는 아니겠는가.

6) 정연두의 작품은 유쾌하다. 전시장 초입의 '보라매 댄스홀'에서부터 그러한 유쾌한 '키치'의 미는 십분 발휘되고 있었다. 이어지는 그의 <로케이션> 연작을 보면서 머금었던 나의 웃음은, 실로 오랜만에 터져나오는 이미지에 대한 순수한 웃음이었다는 고백 한 자락. 정연두 전시의 압권은 그 후반부에 있다.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가 전시되고 있는ㅡ혹은 어쩌면 '상영'되고 있는, 이라고 말해야 할ㅡ'응접실'과 작품 제작에 쓰였던 세트가 있는 전시 공간이 바로 그것. 정연두가 '미술의 시간성'을 이해하는 방식은 그만의 'long take' 기법 속에 녹아 있다.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가 만들어내는 '정지된 장면'들은 그 자체로 각각 응접실을 장식하는 화폭들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고정된' 화폭 사이에 '시간'이 개입하고 침범한다. 너무나 '당연하게' 보여지고 있던 '자연'과 '풍경'은, 저 시간의 개입과 침범 앞에서, 이제는 더 이상 결코 '자연스러운' 장면도, '풍경이 있는' 화면도 아닌 것이 된다. 배경이 되는 정경은 단순한 인쇄물이었고, 나무라고 생각했던 자연물은 이리저리 옮길 수 있는 인공물이었으며, 눈부신 햇살이라고 여겼던 빛은 단순한 조명의 효과였다. 최근 몇 년 간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보여준 키치에 대한 전반적인 경도 속에서도, 정연두만의 유쾌함, 그만의 키치가 빛을 발하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공간에 대한 시간의 침투' 속에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모든 '유쾌함'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가리키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런 '고루한' 물음들을 동시에 마냥 놓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내가 지닌 일종의 '천형'이랄까. 이러한 정연두 식의 '키치' 전시에 대해 또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작품 제작 세트 앞에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었는데,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 또는 '작품 앞에서 사진 찍는 것은 금지돼 있습니다' 등의 클리셰가 왜 이런 종류의 전시에도 적용되는 것인지 나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여! 물론 나는 직원들의 감시를 용의주도하게 따돌리고 남몰래 나의 이러한 사진에 관한 '지론'을 관철시키는 데에 성공했지만 말이다(그 '아슬아슬한 미학'의 사진들을 이 자리에서 공개하지는 않으련다).







▷ 정연두,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의 몇몇 '장면들', 고정된, 그러나 고정되어 있지 않은.

7) 앞서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두 개의 기억을 이야기했지만, 그 개인적인 기억의 장에서 백남준이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원통형의 중앙부에 우뚝 서 있는 백남준의 'monolith'ㅡ어쩌면 'poly-lith'라고 해야 할 것인가ㅡ, 어린 시절 처음으로 보았던 이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多多益善)>의 충격에서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부자유'야말로 기억의 대표적인 속성 중의 하나겠지만, 떠오르는 여담 한 자락 풀어놓자면, 얼마 전 나는 한 후배로부터 무조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자성어를 순서대로 두 개만 말해야 하는 일종의 심리 테스트를 받았는데, 내 대답은 각각 차례대로 '암중모색'과 '다다익선'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사자성어는 자신의 '인생관'을 의미하며 두 번째 사자성어는 자신의 '애정관'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후배의 답변이 되돌아왔으니! 말 그대로 '암중모색'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 '충격'이라 이름할 것에는 보다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으니, <다다익선>의 화면에 등장하였던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와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의 모습이 바로 그 이유를 구성하는 두 인물이라 하겠다. 물론 보위라는 뮤지션 자체가 지닌 예술적/경계적 성격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때의 나는 나의 이 오래된 우상이 백남준의 작품에 등장하였다는 사실에서 일종의 희열을 느꼈던 것, 조금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생에서 거의 첫 번째라 할 '미학적' 물음에 봉착했던 것인데, 지금 다시 떠올려보자면 그 물음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물음, 조금 더 한정하자면 이른바 '키치(Kitsch)'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물음이었던 것이다. 물음은 오늘이라고 해서 달리 없어지진 않는다. 오랜만에 다시 만났던 <다다익선>, 그 거대한 구조물 사이로 보이는 몇몇 작동되지 않는 텔레비전들이, 마치 이가 몇 개 빠진 '태고의' 유적처럼, 조금은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곳, 바로 그곳 동물원 옆 놀이동산 옆 국립현대미술관은, 여전히 내게 '현대'인가, 아직도 내게, '현대'일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물음. 그런데 이 물음은, '여전히' 하나의 미학적 물음일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하나의 역사적 물음일 것인가, 하는, 또 하나의, 그렇고 그런, 물음. 그 몇 겹, 몇 자락의 물음, 물음들.

2007. 7. 7.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