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uum이 흐른다. 그것을 연주하는 악기는 물론 쳄발로이지만, 그 악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쳄발로의 소리가 아니다. 죄르지 리게티(György Ligeti)의 음악을 처음 들었던 때는 15살 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폴리포니(polyphony)'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내게 처음으로 '알려주었던' 것은 바흐친의 글이 아니라, 아이러니컬하게도, 리게티의 음악이었다(이 사실이 내게 '아이러니컬'할 수 있는 이유는 '폴리포니'라는 말이 갖는 저 희랍어 어원의 직접성과 그에 대한 배반에서 찾아져야 한다). 

처음으로 들었던 그의 작품은 아마도 「진혼곡(Requiem)」이었거나  「영원한 빛(Lux aeterna)」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나는 독일의 현대음악 전문 레이블인 Wergo에서 나온 그의 음악 CD들을 미친 듯이 사모으기 시작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Sony에서 리게티의 전작을 기획하여 발매하기 시작했지만, 소니의 그 성의 없고 치졸한 디자인은 베르고 레이블의 저 아우라 넘치는 음반들에 전혀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내게는 언제나 리게티와 베르고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강력한 연상의 고리로 엮여 있었으며 아무것도 그 강한 고리를 깰 수 없었다(물론 중간에 출시가 중단되기는 했지만 소니의 리게티 프로젝트 시리즈가 Teldec의 리게티 에디션 시리즈와 함께 리게티 음악의 면모를 일별해볼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음반들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최근 몇 개의 우연의 선들이 겹쳐져 다시금 리게티가 내게로 다가오게 된 계기가 있었다. 음렬주의에 대한 열광 또는 음렬주의에 대한 회의라는 화두는 내게 학문적이거나 이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하나의 '감각'에 관한 문제였다. 이러한 교양(독일어 'Bildung'이 지닌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문제는 아마도 쇤베르크와 리게티의 음악을 처음으로 들었던 저 유년기의 경험과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이다. 쇤베르크-베베른-베르크-아도르노를 잇는 [탈]구축의 선 하나, 그리고 불레즈와 슈톡하우젠이라는 양극을 갖는 팽팽한 긴장의 선 하나(이 두 선들은 서로 공시적으로도, 또한 통시적으로도 비교 가능하다). 

그리고 세 번째 선.
이 선은 유별나게 애착이 가는 선인데, 왜냐하면 이 선이 실은 가장 근대적인(modern)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르톡-(코다이)-리게티의 선이 그것. 혹자는 이 세 번째 선이 어떻게 앞의 두 선들과 대등한 위치에 나란히 혹은 수직적으로 놓일 수 있는지 의구심을 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의 선과 존 케이지(John Cage)의 선에 할당된 공간을 따로 떼어 말해야 할 필요를 느낌에도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음에 그는 주목해야 한다. 이 세 번째 선은 멀게는 우리가 흔히 '국민(주의)음악'이라고 부르는 어떤 괴물 같은 것, 곧 '내셔널 뮤직(National Music)'ㅡ소문자가 아닌 대문자 '국민음악'ㅡ이라고 하는 것까지 소급이 가능하다. 그러나 소급만이 가능할 뿐 환원되지는 않는 선이다. 예를 들어, 가장 극명한 예를 들어, 바르톡의 조성을 보라, 듣지 말고 보라. 그것은 음렬주의를 넘어서지 않고 음렬주의의 외부를 끊임없이 간지럽히고 지분댄다. 좀 더 들어가 바르톡의 현악4중주 6번을 보라, 특히 마지막 악장을, 듣지 말고 보라.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이 어떤 때에는 '민족주의'라고 번역되기도 하였고 또 어떤 때에는 '국민주의'라고 번역되기도 하였지만, 그리고 또한 그렇게 각각 번역되었을 때 그 번역어들 나름이 갖는 포지티브와 네가티브가 있는 것이고, 또 있었던 것이었겠고, 또 있어야 했던 것이겠지만. 그리고 또한 이것은 내가 18살 여름에 고산메 선생과 함께 보았던 펜데레츠키와 안익태 곡들의 저 '민족주의적이고도 국민주의적인' 공연에 대한 경험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겠지만.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바르톡과 리게티가 걸어갔던 저 내셔널리즘에 대한 어긋남과 어깃장의 선들은 얼마나 통쾌하고 시원했던가. 그 사실이 다시 내 머리 속에 상기되었을 때 나는 피아노 앞으로 달려가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기타가 아닌 피아노 앞으로.

나는 피아노를 '잘' 치지 못한다. 물론 그 어느 누구도 작곡가에게 고도의 연주력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 세상은 그만큼 '전문화'되어 있고 '프로화'되어 있는 것이므로. 하지만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내가 연주하는 피아노의 음들 속에서 쇤베르크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고 리게티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가능한 일이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좋게 말해 가장 미니멀한, 나쁘게 말해 아무런 스킬도 테크닉도 없는, 그런 연주 스타일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이것도 물론 가능한 일이다. 나는 물론 '전문가'도 '프로'도 아니다. 음악깨나 들어봤다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피에르 불레즈의 「구조들(Structures)」 같은 작품이나 스티브 라이히의 영향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리 넓지 않은 인간관계 때문에 가장 가능성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 역시 가능하긴 한 일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한 인간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이 사실이 나를 찌른다, 건드린다.

서두 또한 지극히 개인적이었지만, 이하, 소장하고 있는 책들 중에서 리게티를 '듣기' 위해 '읽기' 좋은 책들 몇 권을, 역시나 지극히 개인적으로 소개해본다:



▷ 이희경, 『 리게티, 횡단의 음악 』, 예솔, 2004. 
  
이 책은, 리게티에 관한 논문·번역·음반해설 등 리게티 음악의 학문적 전도사 역할을 정력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이희경 씨가 저술한 책으로 2005년 대한민국학술원의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기도 한 책이다. 2006년 생일에 파랑에게서 받은 선물인데, 선물을 받은 기쁨도 기쁨이었지만, 한달음에 달리며 읽어내려갔던 즐거운 경험을 안겨주었던 책으로 기억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글로 된 리게티 관련 자료를 읽는다는 즐거움에 책 읽는 즐거움이 배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알타이어 '네이티브 스피커'의 괴로움이여...). 책의 구성은 전기적 사실들과 작곡가들과의 관계, 작곡기법과 악기별 연구, 작곡법의 음악사적 의의 등으로 비교적 평범하지만, 리게티의 음악을 듣는 데에 있어 아주 유용한 해설과 자료들을 담고 있는, 일독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또한 이희경 씨의 논문 「90년대 이후 리게티 작품에서 '국지성(locality)'의 문제」(『서양음악학』, 9-3호(통권 12호), 2006) 또한 일독을 권하는데, 90년대 리게티의 음악, 특히 피아노 협주곡 이후 그가 보여주는 음악적 '국지성'이 어떻게 '세계성'과 '보편성'을 얻고 있는가라는 다소 진부한 주제에 대한 진지한 의의 정리를 담고 있다. 다만 이 논문은 음악이나 작곡법에 대한 논문이라기보다는 리게티 음악의 '인문학적' 의미에 보다 치중한 것이라는 점만을 덧붙여두자(음악학자들의 인문학 '차용'은 어찌 이리도 기초적인 '세계화' 수준에 머무는가, 하는 물음을 한 번쯤 던져볼 수 있겠다).

   

▷ Richard Toop, György Ligeti, London: Phaidon, 1999.
▷ Richard Steinitz, György Ligeti. Music of the Imagination
    Boston: Northeastern University Press, 2003.

영어로 된 리게티 해설서는 이 두 권의 책을 추천한다. 먼저 리차드 툽의 책은 일단 굉장히 활력 넘치는 문체로 씌어져 있기 때문에 유독 독서의 즐거움을 많이 선사하는 책이다. 또한 책의 구성을 보면, 전기적인 서술과 음악적인 문제의식을 병행·통합시키는 장의 구분과 서술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리게티 음악의 면모를 파악해볼 수 있는 '종합적인 저술'이라는 인상을 준다. 한 가지 더 이 책이 갖고 있는 미덕은ㅡ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출판사가 Phaidon이라는 사실에서 간파하였겠지만ㅡ감칠맛 나는 도해들을 다수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금 더 음악에 치중한 전문적인 해설을 보고 싶다면 리차드 슈타이니츠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시기별 대표 음악을 그 당시 리게티가 지니고 있던 작곡의 문제의식과 함께 분석한 책으로서, 해당 악보와 함께 자세한 곡 해설, 작곡·연주의 배경 상황 등을 세밀하게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 다만 두 책 모두 리게티 사망 이전에 출간된 책들이기 때문에 '결정본' 전기로서의 자격은 '태생적으로' 상실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은 지적해둘 수 있겠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생존작가의 '전집'도 나오는 마당에(대표적인 예를 들어주마, 김승옥과 김지하). 어쩌면 '이미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전집 출간이라는 애도(Trauer)를 바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정말 우리는ㅡ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ㅡ그들을 애도했는가, 애도한 적이 있었던가, 애도한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멜랑콜리에 걸려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여담 한 자락, 풀어놓아본다.

▷ György Ligeti, Gesammelte Schriften, Mainz: Schott, 2007.

물론 리게티 자신의 저술을 빠트릴 수 없겠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리게티의 '저작 전집'인데, 그가 작곡 틈틈이 저술했던 음악 관련 글들을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작곡가에게 있어 그의 작곡보다 그의 글을 더 부차적으로 취급한다는] 관습에 기대어 '틈틈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약간 어폐가 있는데, 리게티의 글들을 직접 읽어보면 그가 작곡가임과 동시에 또한 한 명의 훌륭한 [음악]이론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리게티가 '서방' 음악계에 데뷔하던 시기의 주류였던 음렬주의에 대한 생각들을 비롯하여 각 시기별 자신의 작곡에 있어서 가장 첨예하고 품고 있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나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이 책만한 참고자료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완역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책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 보인다. 번역을 한다면 현재로서는 이희경 씨가 가장 적임자로 보이지만.  

리게티의 음반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해볼 수 있다. Wergo 레이블에서 출반한 음반들, Sony의 리게티 프로젝트 총 8장(오페라 Le Grand Macabre가 2장이므로 정확히는 9장), Teldec의 리게티 에디션 총 5장이 그것이다. 물론 개별적인 곡을 녹음한 음반들도 여럿 있다. 피아노 연습곡 음반들도 이미 몇 종류가 출시되어 있는 상태이며, 또한 얼마전에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한 곡들만 따로 모아서 4장의 기획 음반이 출시되기도 했다. 이 모든 음반들에 대한 소개를 다 쓴다면, 팔이 아플 테니, 그리고 너무나 귀찮은 일이 될 터이니, 이 음반들에 대한 소개는 기회가 있을 때 Anarchiv 코너 등을 통해 슬금슬금 풀어놓기로 한다. 다만 한 가지 덧붙여두고 싶은 말은, 특히 20세기의 곡들은 악보와 함께 보고 들을 때 그 '보기'에 의해 '듣기'의 즐거움이 배가 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읽기'의 행위는 즐거움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더 잘 '듣기/이해하기(불어 'entendre'의 두 가지 의미에서)'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라캉적인 의미에서ㅡ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을 수반하는 기이한 즐거움이라는 의미에서의ㅡjouissance를 위해서, 라고 해두자. 리게티의 악보 대부분은 독일 Mainz의 Schott사에서 출판되어 있으며 편집 또한 아름답다.

얼마전 한양대 음대에서 컴퓨터 음악을 가르치는 Richard Dudas 선생과 리게티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얼마 전에 서울에서 열렸던 리게티 추모 음악회 자리에 같은 날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리게티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이야기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경험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또한 리게티의 Atmosphères를 실황으로 듣는다는 경험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ㅡ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날의 공연이 그 곡을 라이브로 듣는 '첫 경험'이었다ㅡ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우리는 낸캐로우(Nancarrow)의 음악에 대한 농담까지 주고 받았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내 가슴에 와닿았다. 나는 연신 마음 속으로 그 말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 또한 그렇다고:

"I think I am his son, though I couldn't meet him while he was alive."

2007. 5. 7.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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