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연극』 2009년 8월호에 기고했던 글을 역시나 뒤늦게 옮겨놓는다. 당시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잠시 인용했던ㅡ그러나 또한 이 글의 중심적 선율 중 하나가 되고 있는ㅡ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연극에 관한 테제들(Thèses sur le théâtre)」은 그의 책 Petit manuel d'inesthétique에 수록되어 있는 글인데, 이 책의 국역본이 바로 얼마 전인 2010년 1월에 바디우 전공자인 장태순 선생의 번역을 통해 간단히 『비미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되었다(그러니까 이 국역본은 원서가 나온 지 10년이 조금 넘어 번역된 것인데, 내가 "연극-관념"이라고 옮겼던 "idée-théâtre"를 장태순 선생은 플라톤적 의미에 따라 "연극-이념"으로 옮기고 있다). 일독을 요하는 책이다. 특히나 바디우의 '비미학'을 랑시에르의 '미학/감성학'과 접속시켜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도. 대체적으로 철학자들은 춤의 문제에 대해ㅡ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ㅡ철학적 담론을 제기하기를 꺼려하거나 그러한 담론을 산출하는 데에 무능한 경향이 있는데(아마도 이에 관해서는, 춤의 문제를 철학적 문제로 '강림'하게 했던ㅡ혹은 철학의 문제를 춤의 문제로 '승화'시켰던ㅡ니체(Nietzsche)가 거의 유일한 '예외'일 것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사유의 은유로서의 춤(Le danse comme métaphore de la pensée)」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소중하게 느껴지는 글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일독을 권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하의 글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역시나 연극과 그 음악, 음악과 그 연극에 관해서이다, 모두 알다시피 말이다. 어쨌든 이 글은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공연ㅡ그 공연은 사실 내가 쓰고 내가 연출하고 내가 작곡하며 내가 연주하고 연기하는 공연이 될 텐데ㅡ에 관한 '상상'의 일단과 일말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글이다. 그 공연을 언젠가는 꼭 할 수 있을 것이란 희미한 희망을 동력 삼아, 오늘도 펜을 든다.
(2010.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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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하는 배우, 연기하는 악사
— '사건'과 '관념'으로서의 연극, '잔향'과 '이명'으로서의 음악

 

최 정 우 (작곡가/번역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연극에 관한 테제들」에서 사건(événement)과 관념(idée)의 관점에서 연극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첫째, 연극은 반복되는 상연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대에 오르는 그 순간 하나의 단독적인(singulier) 사건이 됩니다. 바디우는 이러한 연극적 혹은 무대적 사건을 "사유의 사건(événement de pensée)"이라는 말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연극이라는 가장 '물질적'이며 '실제적'인 장르 안에서 일견 가장 낯설게 보이는 '관념'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연극은 무엇보다 하나의 '사유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연극은 그 자체로 배열과 조합의 행위에 기초한 하나의 복합적 작업을 뜻하는 것, 곧 다양한 구성요소들 사이의 특정한 '배치(agencement)'를 뜻하는 것입니다. 연출이라는 작업이 뜻하는 첫 번째 의미는 아마도 이러한 '배치'의 행위가 될 겁니다. 또한 이러한 배치의 작업이 산출하는 것을 바디우는 "연극-관념(idée-théâtre)"이라는 독립적인 조어(造語)로 부르고 있습니다. 연극은 여러 구성요소들의 배치를 통해서 연극에 고유한 특정한 관념을 산출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둘째, 연극은 무엇보다 하나의 관념이지만, 그러한 관념이란 오직 상연이라는 형식 안에서만 출현하는 어떤 것, 무대화라는 과정 없이는 미리 존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연극만이 생산할 수 있는 독특하고도 단독적인 의미에서의 '연극-관념'이란, 오로지 연극적 배치라는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능한 사유의 형식들 중에서도 연극이 유독 특별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유가 배우의 몸, 무대, 빛과 소리 등 물질성의 다양한 형식들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이유에서일 겁니다. 

 

 

▷ 강연 중인 알랭 바디우: 연극은 '배치'이며 또한 '사유의 사건'이다.

 
이러한 물질적 요소들의 배치란 무엇보다 먼저 하나의 '건축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장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연극의 건축술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것이 거의 언제나 그러한 건축의 '해체'라는 사실입니다. 연극이 하나의 구조물을 건축함과 동시에 해체하는 것은 어쩌면 연극이 연극이기에 지닐 수밖에 없는 숙명이자 마력일 겁니다. 연극은 고착이 아니라 유동이며, 또한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집니다. 오히려 연극은 어쩌면 이러한 시간성, 이러한 덧없음, 이러한 물질적이고 시간적인 유한성 그 자체를 가장 적극적으로 껴안고 보듬으며 나가는 장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음악의 시간성이 연극과 만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음악의 시간은 연극의 시간과 때로는 포개지고 때로는 어긋나기도 하며, 또한 연극과 음악은 서로를 통해 자신이 그 스스로는 갖고 있지 못했던 특정한 '공간'을 얻기도 합니다. 그 시간과 공간은 구축됨과 동시에 해체되는 어떤 것, 쌓임과 동시에 닳아 없어지는 어떤 것입니다. 이러한 해체의 이미지는 연극이 끝나면 철거되고 사라지는 무대의 이미지와 겹쳐집니다. 공연이 끝나면 무대와 배우와 조명과 음악 등의 모든 물질적인 요소들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혹은 여러 개의) 관념만이 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러한 '관념'이란, 저 '물질'의 존재가 없었다면 결코 남을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관념, 물질성의 형식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산출될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사유입니다. 연극이 우리에게 선사하고 우리 곁에 잔존케 하여 그 영향을 지속시키게 하는 관념이란, 이렇듯 연극의 '물질성' 혹은 '유물론적' 연극성에 기반하고 있는 어떤 것입니다. 

 

     

Alain Badiou, Petit manuel d'inesthétique, Paris: Seuil, 1998.
▷ 알랭 바디우, 『 비미학 』(장태순 옮김), 이학사, 2010.

 

음악 또한 이러한 '물질성'을 통해 '관념성'을, 유한한 '시간성'을 통해 무한한 '영원성'을 얻고자 합니다. 무대 곳곳과 그곳을 스쳐간 배우들의 몸에 들러붙어 있던 소리의 흔적들은 어느 순간, 음악이 하나의 '유령'으로서 '본래적'이고 '근본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어떤 확정적 무형성(無形性)으로부터 잡힐 듯 말 듯 눈에 보이지 않는 불확정적인 유형성(有形性)으로, 그리고 시간 속의 존재로부터 다시 시간 밖의 비존재로, 그렇게 이행하고 이탈합니다. 이 과정의 끝에 남겨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잔향'이라는 말로 부르고 싶습니다. 그것은 또한—전혀 부정적이거나 병리적인 의미에서가 아닌—일종의 '이명(耳鳴)'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잔향'과 '이명'은 또한 무엇보다 하나의 '울림'이며, 이 울림은 또한 '들리지 않는 소리', 이미 지나간 소리들이 남겨놓은 '관념의 음(音)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잔향'은, 이 '울림'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사유', 하나의 '관념'이 됩니다. 곧 음악은 하나의 사유와 관념이 마치 '잔향'처럼 퍼지고 '울림'처럼 남겨지기를 기대하고 또한 의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음악이 자신의 '무형성'으로부터 '유형성'을 긷고 일구는 방식, 자신의 유한적 '시간성'을 통해 오히려 무한적 '영원성'을 약속할 수 있는 방식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성은, 이러한 영원성은, 어떤 실체를 지닌 가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연극은, 가정을 통해 사실을, 허구를 통해 진실을, 무형을 통해 유형을, 순간을 통해 영원을, 그리고 특수를 통해 보편을 약속하는 것이기에, 언제나 그 자신의 약속을 배반함으로써만 오히려 그 약속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역설을 띠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설은, 연극음악이 하나의 독립적인 음악이 아니라 연극적 배치의 한 구성요소로서 드러나고 경험될 때에만 오히려 가장 성공적인 '총체성'을 띤다는 또 다른 역설로, 다시금 반복되고 변주되고 있습니다. 

 

         

▷ 파트리스 파비스: 텍스트성은 무엇보다 하나의 '물질성'으로, 하나의 '음악'으로 온다.
    Patrice Pavis, Le théâtre contemporain, Paris: Nathan, 2002.
 

파트리스 파비스(Patrice Pavis)는 『현대 연극』의 논의를 통해서 드라마 텍스트의 분석을 텍스트성(textualité)에 대한 천착으로, 곧 텍스트의 '물질성'과 '음악성'으로의 침잠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에게 연극 텍스트에 대한 이해란 곧 그 텍스트의 물질성을 이해하는 일, 다시 말해 그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기표들의 '소리'와 '리듬'과 '유희'를 이해하는 일이 되고 있는 것이죠. 텍스트를 하나의 '음악'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음악의 '선율'과 '템포' 안으로 침잠하는 일, 반복하자면 이것은 곧 연극적 '배치'의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되고 있습니다. 연극적 텍스트를, 그리고 그 텍스트가 지닌 물질성을, 무엇보다도 하나의 '음악'으로 이해하고 수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서 '연극적' 배치란 또한 일종의 '음악적' 배열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 연기자는 또한 어떻게 한 명의 연주자가 되는가: 2008년 대관령 국제음악제 중 얼 킴(Earl Kim) 작곡의 <린다에게(Dear Linda)>에 출연한 배우 윤여정의 모습.

 
제가 언젠가 꼭 한 번 무대에 올려보기를 꿈꾸는 하나의 '연극'이 있습니다. 배우가 무대에 오릅니다. 단, 그는 '연기'를 하는 연기자로서 무대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연주'를 하는 연주자로서 무대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악기를 든 연주자들이 같이 무대에 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연극이 뮤지컬이거나 음악극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악기를 든 연주자들은 '연기'하는 배우를 위한 반주자들이 아닌 것이죠. 여기서 배우는, 오히려 그 자신이 하나의 '악기'가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하나의 '선율'과 '음색'을 이루고, 또한 그의 몸짓은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연극이 끝난 후, 무대에 불이 꺼지면, 그때 비로소 남겨질 하나의 사유, 하나의 관념을 상상해봅니다. 그 사유와 관념은, 딱딱하게만 들리는 그 이름과는 전혀 다르게,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물질과 시간이 떠난 후에 남겨진 어떤 비물질성과 비시간성, 그것은 오직 그러한 물질과 시간이라는 유한한 조건들을 거쳤기에 가능해진 하나의 무한입니다. 음악은 하나의 관념이겠지만, 그것은 오직 '물질'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그러한 한에서의 '관념'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물질과 관념의 교차와 공존 속에서, 배우는 한 명의 악사가 되고, 연기는 또 다른 연주가 되며, 연출은 일종의 작곡이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와 음반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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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음과 모음 』 2009년 여름호(소설편, 인문편).

*) 『자음과 모음』 2009년 여름호에 기고했던 글을 뒤늦게 옮겨놓는다. 보다 적확하게 말하자면, 조표의 변환이 없이 변조되는 바르토크의 악보, 그리고 도돌이표 없이 반복되는 사티의 악보, 이 두 개의 보이지 않는 악보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보이는 어떤 음표들 사이에서, 나는 하나의 글을 쓰고자 했다. 그러니까 다시금 보다 적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여기서 내 마음대로, 내 마음껏 설정하고 있는 저 [서구 (정치)철학의] 테제들의 역사라는 것도, 실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지시문을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라고 종용하며 강권하고 있다. 이 사유의 '강제'를, 이 사유의 '찌름'을 공유 혹은 공감하기를 바라면서, 나는 사유의 악보 한 장을 제출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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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제들의 역사를 위한 현악사중주


최 정 우 

 

In my beginning is my end.
— T. S. Eliot, Four Quartets 

 

 

Béla Bartók, <Streichquartett V>, Finale.

 

1. 역전된 침입, 혹은 현악사중주의 처음과 끝: 바르토크를 위하여

하나의 악보에서 시작해보자. 이 글이 '시작'으로 삼고자 하는 악보는, 다소 역설적일지도 모르지만, 한 음악의 '말미'에 해당한다. 벨라 바르토크(Béla Bartók)의 <현악사중주 5번>의 마지막 악장인 5악장(Finale)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여기서 문제는, 699번째 마디부터 시작되고 있는 어떤 역전된 '침입', 곧 무조(無調)로 일관되던 곡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하고 있는, 그리고 그 갑작스러웠던 등장만큼이나 불현듯 퇴장하고 있는, 어떤 조성(調性)의 개입이다(여기서 내가 이러한 침입을 '역전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조성에 대한 무조성의 구조적이고 전반적인 침입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적'이고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는 A장조의 '역습'이랄까, 혹은 조표의 변환도 없이, 그것도 '무심하게(con indifferenza)'라는 지극히 무심하기 그지없는 하나의 지시문만을 수반한 채, 그렇게 얄미우리만치 스리슬쩍 이루어지는, 무조성에 대한 조성의 어떤 '복수'랄까(그러므로 여기서 'con indifferenza'라는 지시문은 A장조라는 조성을 하나의 '특정한' 조성으로 파악하지 않기를 당부하는 하나의 기호학적 표현, 혹은, 따로 특정한 조표를 바꿔 달지 않음으로써 그 A장조라는 조성을 심지어 하나의 '조성'으로도 파악하지 말기를 당부하고 부연하는 하나의 '형식적' 술어가 되고 있지 않은가). 이렇듯 급작스럽게 등장한 하나의 조성 아닌 조성(A장조)은, 이후 716번째 마디에서 '점점 느리게(rallentando)'라는 지시문과 함께, 언제 무엇이 있었던가 하는 찰나의 느낌만을 간직한 채(혹은 상실한 채), 다시금 무조의 음표들 속으로 파묻혀 사라진다. 마치 초대받지 못한 자리에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 멋쩍게 사라지는 수줍은 불청객의 모습처럼, 혹은 심각한 연극의 중간에 자신의 차례와 인물을 찾지 못하고 커튼 뒤로 고개를 불쑥 들이미는 서툰 광대의 얼굴처럼. 

 

 

▷ 벨라 바르토크의 깍지 낀 두 손. 나는 바르토크의 저 안광(眼光)과 동일한 안광을 지녔던 사람을 세 명 더 알고 있다. 보들레르, 히틀러, 피카소가 그들이다. 

 

그러므로 무조에 대한 이러한 조성의 '침입'은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 않은가. 첫째, 이 자체가 또 하나의 물음을 예비하고 예고할 텐데, 왜 조성에 대한 무조성의 침입이 아니라, 반대로, 그 역(逆)이 문제가 되는가 하는 물음, 곧 왜 무조성에 대한 조성의 침입이 문제가 되는가 하는 물음이 있다. 둘째, 이는 보다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일 텐데, 한 음악의 예술적 통일성과 형식적 일관성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혹은 어떻게 '감지'되고 '분할'되는가 하는 물음이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자. 첫 번째 물음의 정체는 이렇다: '안온한' 조성들의 해체와 재구축으로서의 '불온한' 무조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서는 그 반대로 '편안한' 무조 사이를 갑자기 침입해 들어오는 '불편한' 조성이 문제라는 것, 곧 익숙하던 어떤 것이 갑자기 낯을 바꿔 낯선 모습으로 등장하고 다가오게 되는 '두려운/낯선 것(das Unheimliche)'의 경험이 문제라는 것. 이러한 경험은 '시간적' 선후관계와 '구조적' 발전관계로서 조성과 무조성이 맺고 있는 '역사성'과 '인과성'의 관계방식을 뒤집는다. 얄궂지 않은가, 무조성이 조성을 해체하고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성이 무조성을 흔들고 혼란케 한다니. 두 번째 물음의 정체는 이렇다: 통일성과 일관성을 깨는 듯이 보이는—아니, 그렇게 '들리는'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이러한 조성의 침입은 다시금 보다 큰 통일성과 일관성의 문법으로 포섭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 여기서 더 적확한 문제의 형식은, '통일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또는 '일관성'을 어떤 개념으로[까지] 이해할 것인가 하는 일종의 투정과도 같은 의문문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입 또는 침입은 하나의 '장난'일까, 아니면 하나의 '징후'일까. 그것이 '장난'과도 같은 놀이라고 한다면, 그 놀이란 확고한 조성의 질서를 깨는 무조성의 '참신함'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안온하게' 이어져온 무조성의 선율에 일침을 가하는 조성의 '익숙한 불편함'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기에, 그 갑작스러운 선율들의 재구성과 해체는 우리에게 '익숙함'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징후적' 질문들을 던지는 놀이이기도 하다. 신비하지 않은가, 때로는 가장 익숙한 것이 또한 가장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이 질문(들)은 아마도 '형식주의'에 대한 물음의 형태가 아니라, 더 적확하게는, 물음에 대한 '형식'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이 악보의 '형식'에 힘입어, 그리고 또한 이 형식적 '악보'에 힘입어, 여기서 나는 테제들의 역사에 관한 '음악적' 가설들의 한 묶음을 제시하고자 할 것이다. 왜 여기서는 '역사적' 테제들이, 그리고 그러한 테제들의 어떤 '역사'가 문제가 되는 것인가? 테제란 무엇보다 가장 단순하고 극명한 형태의 철학적/정치적 '정식'임과 동시에 일종의 '구멍 뚫린 텍스트'이기에, 그리고 그러한 텍스트의 '지시문'에 따르는/반(反)하는 어떤 연기와 연주를 기다리고 기대하고 있는 일종의 '희곡'이자 '악보'이기도 하기에. 따라서 나는 한 명의 '배우'이자 '연주자'로서, 이 '희곡'이 지닌 구멍을, 이 '악보'가 지닌 어떤 간극을, 메우거나 비우면서, 또한 가장 '표현적으로/표정을 풍부하게(espressivo)' 연기하고 연주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 '음악적' 가설들은 '명제'의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형식'이라는 명제로 제시될 것이다. 이 글의 흐름 안에서는 오직 이 점만이, 곧 명제라는 형식과 형식이라는 명제 사이의 이 차이만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라고 먼저 밝혀둬야 할 텐데, 그러나 하나의 글 안에서 그 글의 중요성이 어디에 있음을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고 있는 이 지극히 '수행적'인 행위란, 오히려 바로 그 가리킴 안에서 자신의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수행성'을 상실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물음이, 또한 나의 세 번째 문제가 될 것이다. 아마도 이 글은 바로 이러한 글 자체의 어떤 '불가능성'에 바쳐질 것이다. 그리고 또한, 아마도 바로 이러한 '불가능성'[만]이 중요할 것이다, 라고, 나는 다시 한 번 개입하고, 다른 자리에서 침입하며, 반복하듯 읊조린다. 따라서 바르토크의 어떤 '끝'으로부터 시작한 나의 이 '처음'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알레고리가 될 텐데, 나는 이 악보가 담고 있는 몇 개의 주제악구들을 밑천삼아 몇 개의 현악사중주를 연주하고 변주할 것이다. 이 곡의 제목은 '테제들의 한 역사'이다. 



2. 제1바이올린, 혹은 첫 번째 사중주: 18세기의 테제, 칸트를 위하여 

 

 

▷ 내가 궁금한 것은 칸트의 뇌가 아니라 그의 머리카락이다.

 
제1주제는 18세기의 테제, 곧 칸트(Kant)의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이 불러일으키는 '세계시민'과 '보편사'라는 악상(樂想)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목적론으로서의 자연'이 투영된 보편사, 그리고 이에 기반하고 있는 어떤 '인류애'의 집단[으로 상정된] UN의 무력함과 불능을 가장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북한임을 상기할 때, 우리는, 마치 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해 뒤틀린 역설의 탄성을 내뱉는 어떤 이들처럼, 북한이라는 국가가 제기하는 세계시민의 '불가능성'이라는 문제적 지형에 대해 일종의 '민족적 자긍심'이라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민족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세계시민적'이고 '보편사적'인 상황이 있다고 한다면, 역설적이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분단 상황'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이 말이 지닌 '법적' 의미를 오해하여 나를 국가보안법으로 고발할지도 모르는 난독증 환자들의 어떤 충정 어린 '공명심'을 피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이는 하나의 반문, 그러나 언제나 부정의 답만을 예상하게 되지는 않는, 그런 역설적인 반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두는바, 문제는 이러한 반문이 그에 답변하지 '못하는' 어떤 불능을 사전에 전제하는 물음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과 대답의 구조 그 자체를 '가능케' 하고 촉발시키는 어떤 '불가능성'의 물음이라는 사실이다.

현실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은 아직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라는 제도적/개념적 존재의 자장과 효과를 거부하고 그로부터 탈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는 하나의 '가설'이 있다. 이는 언뜻 민족주의/국가주의를 하나의 현실로서 인정하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사고로 보이지만, 사실 이는 궁극적으로는 '선한' 민족주의/국가주의의 완성이 바로 그 민족주의/국가주의의 폐해와 부작용들을 지양하고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초극주의적' 사고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극복과 지양의 변증법이 지닌 가장 '현실적'인 판본으로서의 이러한 '초극'은 칸트적인 의미에서의 '초월'이 결코 아니다.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바라본 보편사, 바로 그 보편사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통일의 의미는 무엇인가. 돌이켜보자면, 각각 상대방으로부터 '민족편향주의'와 '계급환원주의'라는 편협한 규정어로 명명되었던 사회정치적 사조의 양대 산맥이 존재했고 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 흐름들을 각각 'NL'과 'PD'라는 약칭의 이름으로, 혹은 '해방적 내셔널리즘'과 '보편적 세계시민주의'라는 긍정적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내게 이 두 개의 흐름은 두 곡의 노래로 각각 대변되고 상징되는 지극히 '음악적'인 것이기도 하다. 송창식 작곡 김민기 작사의 <내 나라 내 겨레>와 사회주의 운동의 송가인 <인터내셔널 가(歌)>가 바로 그것. 내가 이 두 개의 노래 사이에서 느끼게 되는 어떤 '불편함' 혹은 어떤 '위화감'의 정체란, 바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완성과 초월이라는 저 오래된 '근대적' 의제설정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하는 것이다. 하나의 '분단 상황', 세계에서 오직 유일하게 '근대민족국가'로서의 통일을 이루지 못한 하나의 '이중 국가',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우리(내 나라 내 겨레?)'가 처한 특수한 역사적/정치적 상황을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술어이겠지만, 나는 '우리'의 이 특수한 상황 자체가 오히려 민족/국민국가(nation-state)라고 하는 저 '역사적 보편성'의 가장 극명한 징후를 드러내는 독/약(pharmakon)으로서의 어떤 '특수한 보편성'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아마도 바로 이 때문에 국민국가 체제의 집단화 혹은 중앙화로 대표되는 우리의 '세계'는 그 자신의 징후를 '봉합'하고 '은폐'하기 위해 북한 문제 혹은 한반도 문제에 그렇게 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켄 로치(Ken Loach) 감독이 부르는 인터내셔널의 노래.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특수한 상황, 특수한 갈등이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현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징후'로 파악되어야 한다. 민족주의/국가주의라는 하나의 '역사적 특수성' 안에서 사고된 '통일'의 주제를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이 외형적으로 추구하고 갈구하는 듯이 보이는 어떤 '소원'과 '소망'을 오히려 배반하면서 소위 '비정상적'인 분단 체제를 의도치 않게—혹은 '의도적으로'—고착시키고 악용하게 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현실적으로 작동하고 활동하고 있는 민족과 국가의 개념에 대한 천착과 그 극복에의 의지에 덧붙여, 동시에 이 '징후적' 개념들을 그 바닥과 한계에 이르기까지 '소진'시키고 그 '불가능한' 가능성의 실체와 마주하기를 병행하는 작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병행이 소위 '국가 및 민족의 소멸'이라는 지극히 '이상적'인 대안과 거리를 두는 것은, 하나의 '불가능성' 혹은 하나의 '아포리아'를 증거로 들면서 민족과 국가의 개념이 징후적인 것이기에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특히나 '탈근대'를 고민하는 입장에서라면, 근대와 탈근대 사이의 어떤 '명시적'이고 '환상적'인 대립에 대한 강조와 그 지양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극소의' 차이에 대한 섬세한 구분이 오히려 더욱 절실히 필요해지고 중요해지는 것. 이러한 병행이란 어쩌면, 가장 '현실적으로', 하나의 현상과 하나의 이상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기우뚱한 균형'을 잡아가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기우뚱한 균형'에 이어 역시나 김진석의 개념을 차용하자면, '초월'의 자리란 어쩌면 바로 이러한 '포월(匍越)'의 자리에서 출발하고 완성되고 다시금 시도되는 것일 터. 

 

 

▷ UN 안전보장이사회가 '보장'하는 '안전'은 무엇을 위한 안전이며 누구의 안전인가?

 
그러므로 '선한/건강한' 민족/국가주의가 따로 있고 '악한/건강하지 못한' 민족/국가주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민족/국가주의는 그 자체가 역설적이게도 항상 어떤 '불건강성' 위에 기반하고 기초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징후적인 '건강성'의 담론이다. 지연되고 미완된 근대적 과제로서의 통일이라는 개념은, 말하자면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상정된] 혁명론'이나 '부르주아 사회 이후에 도래할 [것으로 상정된] 공산주의의 역사적 운동법칙' 따위의 논의를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목적론적' 측면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라고 반문하는 <내 나라 내 겨레>의 문법과 어조 안에서, 내가 불끈하고 울컥하는 '민족적' 감상을 느끼면서도—마치 하나의 핏줄처럼 '도도히' 흐르는 민족과 국가의 저 이데올로기적 강수(江水)가 '체질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이 감정적 반응 속에서, 과연 누가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느냐만—동시에 그것이 정말 말 그대로 '옳은가' 하는 또 다른 반문을 품게 되는 것은, 아마도 저 민족/국가라는 개념이 은연중에 하나의 이상성으로 상정하는 어떤 '건강성' 그 자체가 하나의 근원적 '불건강성' 위에, 곧 어떤 도착과 패착 위에 기초한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건강한' 민족주의 혹은 '건전한' 국가주의의 조건들을 생각하는 방식은 일종의 '부정의 부정'을 통과할 수밖에 없을 텐데, '내 나라 내 겨레'로서의 '우리'가 보편사적 세계사에 '기여'하고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한국인 출신 UN 사무총장을 배출하는 따위의 '민족적 자긍심 넘치는' 일이 아니다(소위 '노동자/민중의 전 세계적 단결과 통합'의 여정이 거쳐 온 역사적 패착의 길 위로, 또한 소위 '세계 평화를 위한 국가들의 연합'이라는 명목을 내세우는 UN 자체가 바로 그 '평화'에 대해 극도의 무력함을 노출했던 저 모든 실패의 여정들이, 지극히 '상동적'으로 겹쳐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한반도의 '역사적'이고 '지정학적'인 상황 그 자체가 역으로, '불건강성'을 '건강성'으로 덮고 있는 저 민족/국민국가 체제의 상징적이고 폭력적인 '일반성'에 대해, 일종의 파열하는 '실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 바로 그 점이 아닐까. 그리고 바로 세계사 속의 이러한 '실재'로 이해된 한국사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적극적인 '세계사적 기여'가 아니겠는가.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한반도와 통일이라는 주제를 '세계'라는 하나의 상징체계에 대한 일종의 '치명적 실재'로 이해한다. 내가 민족/국민국가 안에서 모종의 '건강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실재가 지니는 '수행적 불건강성'일 것이며, 내가 '조국'이라는 단어로 생각하고 품게 되는 나만의 '민족적 감수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의 대상은 또한 한반도가 지닌 세계사적 '실재'로서의 역사적/국제[정치]적 파국의 지위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소위 '민족해방'의 길과 '민중민주'의 길은 감성의 분할 방식에 대한 일종의 전복과 이종교배의 작업 위에서 겹쳐지고 있지 않은가. 또한 여기서 이러한 '이종접합'이 하나의 정치적 과제로, 아니 숫제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로서 제출되고 있지 않은가. 근대 민족/국민국가의 '완전한' 완성을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이자 선결조건으로 이해되고 추구되는 통일이란, '선진국화'에 대한 저 모든 도착적인 담론들의 기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통일의 담론으로부터 이탈한 지점에서 비로소 통일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분단'이란—이 '분단'이라는 단어로부터, 그 단어를 '신비화'하고 '신격화'할 수 있는 모든 수식과 형용의 요소들을 과감히 차단하고 생각하건대—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하나의 '저주'이자 '축복'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에게 '통일'이란 근대적 상식의 복원과 복기라기보다는, 바로 그러한 상식의 가능조건들을 비판하고 파열하는 데에까지 나가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지 않나.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역사적/현실적 상황은 어쩌면 '통일'이라는 근대적/민족적 개념을 통해 일종의 '사고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 지극히 관념적인 여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그런데 이것은 '관념의 약점'이라기보다는 '현실의 강점'이 아닌가, 혹은, 이러한 관념의 '사고실험'은 현실의 '핵실험'만큼이나 위험하고도 모험적인 줄타기인 것은 아닌가). 소위 '영구평화'와 '평화공존'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은 일개 민족/국민국가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그렇다고 그러한 국가들의 '연합'으로 상정된 UN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상황'은 어쩌면 그러한 근대적 국민국가들 사이의 '평화'라는 상식의 체계 그 자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균열의 양가성을 더욱 노출시킬 수 있는 '역사적 소여' 그 자체는 아니겠는가. 이러한 역사적 소여로부터 도출되는 하나의 '목적론적'이고 '역사주의적'이며 '지정학적'이고 '세계사적'인 한반도의 '소명'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흔해빠진 정치가들이 지극히 유토피아적으로 제시하는 '동북아 정치/경제의 허브' 따위가 될 수 없다(이러한 '힘의 균형점'으로서의 정치적 위치 부여는 칸트적인 의미에서 '현상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라캉적인 의미에서 '환상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 한반도의 근대와 한민족의 통일이라는 도착적이고 착종된 근대적 '병리성' 자체를 백안시하는 저 '균형점'의 담론은 그 자체로 가장 '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또한 이러한 시작은, 하나의 끝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또는, 이 난국/파국으로서의 끝은, 여전히 어떤 사유의 시작을, 아직 시작되지 않은 하나의 시작을, 이미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통일을 하나의 '끝'이 아니라 하나의 '시작'으로 보자는 가장 '통속적'이고도 가장 '민족적'인 자기다짐 내지 자기암시는 바로 이러한 근대적이고 병리적인 '불건강성' 속에서 파악될 때 오히려 그 자신의 '통속성'과 '민족성'의 굴레를 털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이러한 물음은 또한, 가장 민족적인 노래인 <내 나라 내 겨레>도 아니고 가장 국제적인 노래인 <인터내셔널 가>도 아닌, 지극히 '중립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상정된 또 하나의 익숙한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어떤 '악보'를 다시금 눈을 씻고 들여다보게 되는 이유가 된다.

 

3. 제2바이올린, 혹은 두 번째 사중주: 19세기의 테제, 마르크스를 위하여  

 

In other words, this is Marx's 'profile', literally.

 
제2주제는 19세기의 테제, 곧 마르크스(Marx)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이 불러일으키는 '유물론적 이름'에 관한 악상으로부터 시작한다.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Feuerbach)의 이름을 문제 삼았다면, 곧 포이어바흐의 이름을 통해 기존의 유물론에 대해 다시금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면, 여기서 나는 바로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마르크스라는 이름에 대해,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그의 이름은 어떻게 오는가.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이름이 한국어 안에서 갖는 표기의 차이와 그 파장에 대해서이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와 '맑스'의 차이에 대하여. 외국어 표기의 표준적 규정에 의거해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Marx'를 '마르크스'로 쓰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또한 '맑스'라는 표기 역시나 결코 낯설지 않다. '마르크스'라는 표준적 표기 규정에 대해 '맑스'를 고집하는 것, 나는 거기서—이 두 종류의 표기법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그 어떤 가치판단적인 규정도 배제하고 말하건대—일종의 '순수함'에 대한 무의식적 열정을 본다. 하여 나는 상상하고, 공상해본다, 어쩌면 이는 곧, '맑고자' 하는 어떤 구별 짓기에의 열망, '마르크스'라고 탁하게 말하지 않고 '맑스'라고 맑게 말하려는 욕망, 혹은 '그들'의 입으로 저주하듯 부르는 '마르크스'의 이름과 '우리'의 입으로 힘차게 불러보는 '맑스'의 이름을 구별하고자 하는 어떤 '순수한' 구획과 대립의 열정은 아닐 것인가, 하고. 어찌하여 소위 '주류 담론'의 매체들에서는 표준적 외국어 표기법이라는 '미명'하에 '마르크스'라는 표기를 고집하고,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제도적'이며 '비표준적'인 매체로 분류되는 어떤 책들에서는 '맑스'라는 표기를 고집하고 있는가(혹은 '주류적'인 매체라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창비' 같은 곳에서는 왜 굳이 '맑스'라는 표기를 고집하고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자. 이는 외국어 발음에 관한 한국어 표기의 확정을 둘러싼 투쟁이라는 심급, 곧 단순히 언어학적인 이론에만 국한된 지극히 '중립적'인 심급에서만 결정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Marx'의 이름을 어느 쪽에서 어떻게 (한국어로) 전유하고 소유할 것인가 하는 '선택'과 '독점'의 문제는, 단순한 표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명명법의 투쟁이 되고 있는 것(덧붙여, 하나의 계급을 '근로자'로 부를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로 부를 것인가 하는 명명법의 문제 역시 이러한 '마르크스/맑스'의 표기법이라는 투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임을 첨언해두자). 

 

 

▷ 천명관, 『 고래 』, 문학동네, 2004.

 
이 이름의 문제를 잠시 에둘러 가보자. 2005년에 소설가 김영하는 천명관의 소설 『고래』에 대한 단평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어쨌든 이런 결과로 '정통 문학 수업'을 받고 작가가 되면 '문학이 될 수 있는 것'과 '문학이 될 수 없는 것'에 정통하게 되겠고, 미지의 영역을 찾아 모험을 떠나기보다는 자기 속으로 파고들며 이른바 '내면'과 '문체'에 집중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반면에 소설에 비해 훨씬 제약이 강한 장르에서 훈련을 받았던 사람이 소설판으로 넘어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를테면 영화판에서 시나리오를 쓰던 사람이라면? 시나리오는 이야기를 적는다는 점에서는 소설과 같으나 그 제약의 강도에서는 오직 희곡만이 그와 견줄 수 있을 뿐이다. […] 지난해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한 천명관의 『고래』는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작가가 소설을 쓸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힌트를 준다. […] 그러나 쇼가 끝난 후, 독자들의 마음속에서 이런 의문이 피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물의 내면, 묘사의 밀도를 생략하고 '순수한 이야기'만으로 가득 채운 이 작품이 과연 현대 소설의 나아갈 바일까? 만약 그렇다면 대저 소설이란 무엇인가. 정말 이야기의 버라이어티쇼, 그것뿐이란 말인가.
ㅡ 김영하, 「소설, 너는 누구냐?」, 『시사저널』 797호 참조.

이 단평을 읽고 난 후 나는, 김영하의 저 마지막 문장과 똑같이, 근대문학의 질문들 가운데 가장 진부하다고 할 수 있을 다음과 같은 물음을 다시금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소설이란 무엇인가. 김영하의 글에서는 이상하게도 하나의 표리(表裏)가 공존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는 '표'와 '리'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글, 하나의 딜레마를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는 글이라는 것. 오직 바로 이러한 점에서만 이 글은 '매력적'이며 또한 '징후적'이다. 김영하는 천명관의 『고래』가 단지 "순수한 이야기"들만의 나열이며 "인물의 내면, 묘사의 밀도를 생략"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고래』가 그러한가 하는 의문은 일단 차치하고라도, 바로 이 의문에 대한 답은 김영하 스스로가 순서를 바꿔 글의 초입에서 이미 제시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흥미로운 의문이 먼저 일어나는 것이다. 

 

 

▷ 천명관 씨,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십니까?

 
'내면'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모더니즘' 소설이 그 주제로 삼고 있는 개인의 공간, 그리고 그러한 개인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문학적 방법론인 심리 묘사에 대한 근대[문학]의 등록상표(trademark)가 바로 내면이다. 김영하가 예로 드는 "잡담, 괴담, 객담, 민담, 루머" 등의 다양한 이야기 형태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소설'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예를 들어 돌이켜보자면, 어떤 의미에서 김윤식의 저 모든 저작들은 바로 이러한 '[근대]소설이 [근대]소설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혹은 '[근대]소설이 아닌 것은 결코 [근대]소설이 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거대한 천착의 작업이 되고 있지 않은가). 왜냐하면 모든 소설이란 적확하게 말해서 언제나 '모더니티 소설'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반드시 '내면'에 대한 어떤 식의 '성찰'과 '반추'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다시 한 번 김윤식의 예를 들자면, 그는 박상륭의 작품들 중 『평심』이 근대적 소설의 형식으로 귀화한 한 '패관(稗官)' 혹은 '잡설가(雜說家)'의 '귀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오직 『평심』만이 비로소 근대적 소설 비평의 '유효한' 대상이 될 수 있었음을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김윤식, 「자이나교도 박상륭의 고고학적 글쓰기론」, 박상륭, 『소설법』(현대문학, 2005). 353-354쪽 참조], 오직 이러한 모더니티의 형식으로 도래하는 것만이 하나의 '소설'이—'잡설'이 아니라—될 수 있다는 점에서 김윤식의 기준은 확고하며, 또한 그러한 '확고함'에 의해 그 비평 작업의 상징계는 가장 '확고하게' 동요한다, 바로 박상륭이라는 한국[근대]문학의 가장 극단적인 '실재' 안에서). 이렇듯 무엇이 소설이고 무엇이 소설이 아닌가라는 문제는 기준점만 확실히 잡는다면, 그리고 여러 가능한 기준점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선험적(a priori)이기까지 한 '모더니티'라는 규준만 잡는다면, 아주 확실하고 명확하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이 명확한 기준은 바로 그 명확성 때문에 흔들리고 요동친다. '모더니티'는 바로 이러한 동요하는 유동성 안에서, 오직 그 안에서만 가장 명확한 개념이 된다는 의미에서, 그 자체로서 가장 '모더니즘적'인 개념으로 자기증식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영하의 저 글은 그 자신이 생각하는 소설에 대한 기호론(嗜好論)이지—결코 이것이 '기호론(記號論)'이 아님에 유의하자—소설의 세태와 그것의 나아갈 바를 걱정하는 일종의 '시국선언문'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김영하가 『고래』를 단순히 "이야기의 버라이어티 쇼"라고 느끼는 것은 그가 소설에 대해 갖고 있는 어떤 기호와 기준 때문일 뿐, 그렇다고 실제로 『고래』라는 한 편의 소설이 '소설'이 아닌 것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며 또한 소설이 나아갈 바가 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나 역시도 『고래』를 크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그러므로 이는 또한 나 자신의 한 '기호(嗜好/記號)'를 밝히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선호의 문제와는 별개로 이미 『고래』는 제도적으로, 그리고 형식적으로, 하나의 소설이 되었고 또 되고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근대의 가장 핵심적인 문학 장르인 소설, 동시에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 '불시착'한 가장 '불확정적'인 문학 장르이기도 한 소설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자 '마력'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또한 '문학이 될 수 있는 것'과 '문학이 될 수 없는 것'의 구별과 결정이란, 그 자체로 이미 '감각적인 것의 분할'이라는 문제가 되고 있는 것. 

 

 

▷ 김영하 씨께도 천명과 씨와 동일한 질문을 드립니다.

 
사실 보다 중요한 문제점은 이렇다: 모더니티와 산업사회를 배경으로 태어났던 '소설'이라는 장르의 윤곽과 범위 자체가 이미 오래전에 지각변동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부한 상황진단 못지않게 더 진부한 사실은, 김영하의 글에서 잠깐, 아주 잠깐 드러났듯, 그 지각변동의 여러 현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꼽을 수 있는 것이 또한 바로 장르들 간의 교접과 장르 밖으로의 이탈이라는 점이다. 내면과 묘사의 밀도에 대한 김영하의 안타까운 호소는 바로 이러한 '잡종교배'와 '무단가출'에 대한 염려의 잔소리, 소설의 '순수한 혈통'에 대한 완고한 고집이 지닌 또 다른 얼굴일 수 있다(김영하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들이 종종 '영화적'이라는 세평을 듣는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일까, 아니면 싫어하는 것일까, 또한 시나리오와 희곡이 갖고 있는 것으로 상정되는 어떤 '불완전성'이란 실은 '내적으로 완벽하게 통일되어 있으며 그 자체만으로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상정된] 소설 장르의 '완전성'으로부터 역으로 반추되어 규정된 성격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일까). 그런데, 이 또한 주지하다시피, 소설의 순수한 혈통이란 기껏해야 18세기에 시작된 한 특정한 가문의 문학적 핏줄일 뿐이다. 이 혈통의 '역사적' 성격은 그 피가 지닌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의해 언제나 은폐되어 왔다는 사실을, 모든 이야기의 형식이 지니고 있는 이 가장 단순한 진실을, 그는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또한, 이미 예고한 바대로, 김영하 스스로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을 이미 처음부터 제시하고 있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이런 결과로 '정통 문학 수업'을 받고 작가가 되면 '문학이 될 수 있는 것'과 '문학이 될 수 없는 것'에 정통하게 되겠고, 미지의 영역을 찾아 모험을 떠나기보다는 자기 속으로 파고들며 이른바 '내면'과 '문체'에 집중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혹은 김영하는, 기껏해야 소설 장르가 지닌 '역사적 상대성'에 대한 강조에 머무르려 하는 것인가? 어쩌면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또 다른 곳에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징후'가 지니고 있는 의미와 무의미일 것이다. 김영하의 글은 '소설, 너는 누구냐?'라는 제목을 갖는다. '소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20세기 전반에나 '유효하게' 물을 수 있었던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영하는, 마치 취조하듯 혹은 통성명하듯, 소설이 "누구"인지를 묻고 있다. 작품은 상품이 되었고 다시 상품은 신격 또는 신격에 준하는 인격을 얻었다. 물신(物神, Fetisch)에 대한 마르크스의 놀라운 통찰도 이미 오래전의 일이 되었다. 소설 역시나 이미 오래전에 물신이 된 것이었다. '무엇'임을 묻지 않고 '누구'임을 묻는 것, 나는 바로 이 의문사의 '사소한' 차이 안에서 모더니티 문학의 가장 확실하고 가장 최종적인 '거대한' 징후를 목격한다. 

 

 

▷ 김사량, 그의 사진, 빛이 바래 있다, 말 그대로.

 
이 누구냐는 물음 앞에서, 이 이름에 대한 물음 앞에서, 나는 다소 생뚱맞은 비약적인 대답을 내놓으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에 대해 '미나미(南)'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김사량의 언어를 빌려 대답하고자 한다. '소설은 누구냐'라는 물음 앞에서, 나는 소설의 '이름'으로, 소설의 이름을 전유하기 위한 투쟁의 '이름'으로, 곧 김사량의 '언어'로 답하고자 한다. 김사량의 소설 「빛 속에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 협회 안에서는 어느새 미나미 선생으로 통하고 있었다. 내 성(姓)은 알다시피 '남'으로 읽혀야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일본식으로 불리고 있었다. 내 동료들이 그런 식으로 불러주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그런 호칭이 매우 신경에 거슬렸다. 그러나 나중에는 역시 이런 천진한 아이들과 같이 뒹굴며 놀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나는 위선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또한 비굴한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타일러왔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만약 이 아동부 중에 조선 아이라도 있었다면 나는 억지로라도 나를 '남'이라고 부르도록 했을 것이라고 스스로 열심히 변명을 하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런 호칭은 내지(內地) 아이들은 물론 조선 아이들에게도 감정적으로 나쁜 영향만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ㅡ 김사량, 「빛 속으로」, 『빛 속으로』(오근영 옮김, 소담, 2001), 22-23쪽.

'남(南)'이라는 성을 '미나미'로 발음하게 되는 것, 그 이름을 통해 '내지(內地)'와 '외지(外地)'의 경계를 그리게 되는 것은 다시금 저 '네이션(nation)'의 자장 안에서이다. 나는 피식민지인이 피식민지인에 대해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로 무엇을 쓴다는 사실을 민족주의가 가질 수 있는 어떤 효과적이고 저항적인 글쓰기의 방법론으로 보는 시각에는 전혀 동조할 수 없다. 그것이 단지 정치적으로 '일차적'이기만 한 분석이라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이중어 글쓰기'라는 근대적/식민지적 문학의 한 극단에 위치한 김사량의 언어 안에서 드러나고 있는 쟁점은 보다 더 '극적'인 것인데, 내가 인용한 부분은 특히나 고유명의 '번역' 혹은 '표기'라는 문제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문제적'인 것이 된다. 번역이란 단순한 일대일대응의 옮기기가 아닌 것, 번역이란 오히려 무엇을 잃거나 덧붙인 상태에서의 어떤 변환 내지 전화(轉化)를 의미하는 것이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어떤 상실이거나 덧칠이다. 번역에 있어서는 언어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일대일대응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가감 없는 번역이란 없고 곡해 없는 해석이란 무의미하기까지 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김사량의 소설 안에서 "선생"으로 표상되고 있는 '근대적 지식인'이란, 특히나 피식민지인으로서의 지식인이란, 그런 자립적이고 독자적인 옮김의 존재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그러므로 이러한 '식민지적' 언어의 특수성이란 그 자체로 근대적 번역이 처한 일종의 '보편성'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러나 오해하지 말기를, 그는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또는 기대 '이상'으로—곧 필요 '이하'나 기대 '이하'가 아니라—착종(錯綜)된 존재일 것이다. 이 착종된 존재에게 언어의 선택이란 곧 삶의 선택, 아니 차라리 죽음의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왜냐하면 이러한 언어의 '선택'이란 다시 말해 곧 '네이션'의 선택이며, 이는 근본적으로 거국적 저항도 민족적 배반도 아닌 하나의 '도약', 그것도 마르크스식(혹은 맑스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죽음을 무릅쓴 도약(salto mortale)'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이션'의 선택이라는 의미에서 언어의 선택은 또한 하나의 '경제(economy)'에 대한 선택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의 '선택'이란 다양한 선택지들 사이에서의 자유로운 선택이 전혀 아니다. 언어와 네이션은 기본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면에 이러한 선택은 바로 그러한 극도의 '부자유성'으로 인해서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선택이 되기도 한다(따라서 이러한 선택의 '자유'에 대한 성찰은 그 자체로 가장 '근대적인' 사유에 속하는 것). 언어와 네이션이란 선택할 수 없는 태생적인 것이라는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전제에 대해, 바로 그러한 전제의 한 최극단인 식민지 안에서, 그 '선택'에 대한 회의와 상념은 바로 그러한 ‘태생’과 '핏줄'이 언어와 맺고 있는 것으로 상정된 하나의 '절대적' 관계성 자체를 의문에 부치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 하지만 또한 선택할 수 없는 것의 '선택적인 성격' 그 자체를 노출시키는 이러한 선택의 불가능성이 바로 우리의 '근대'와 그 '근대적' 언어가 제출하는 가장 문학적이고도 정치적인 문제이다. 김사량의 언어가 가장 근대적인 공간 안에서 그 근대성의 가장 외부적인 '주변부'를 가장 '중심적으로' 건드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언어와 네이션의 선택의 문제가 그의 소설 안에서 가장 예리하고 민감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사량이 말하는 공간, 곧 '빛 속'의 공간이란, 빛 그 자체에 결부된 오래된 은유처럼, 일종의 개안(開眼)을 위한 광명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어둠을 보기 위한 눈의 서툰 깜빡거림, 일종의 폐안(廢眼)을 위한 조건, 빛이 만들어내는 어둠의 조건이기도 하지 않은가. 

 

 

▷ 메치니코프의 이름: 아편이 될 것인가, 유산균 발효음료가 될 것인가.

 
하나의 기억. 2000년 언저리의 어느 때 즈음이었던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렸던 한국/민주 양대 노총의 합동집회를 마치고 동석한 어느 뒤풀이 자리에서 한국노총 관계자 한 명이 내게 들려주었던 재미난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는 언젠가 한 번 마르크스(혹은 맑스?)의 사진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시골집에 내려갔다고 한다. 시골집의 막둥이 동생은 그 사진을 유심히 보더니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어라,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 음... 아, 생각났다! 메치니코프!"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좌중은 일제히 웃어 넘어갔지만, 아마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또한 그 질펀한 웃음 속에서 각자 머금을 수밖에 없는 흥그러운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이야기의 끝이 아니었다. 동생이 그렇게 티셔츠 속의 인물을 '알아보자' 옆에 있던 어머니가 이어 장단을 맞추듯 이렇게 말씀하시더란다: "맞다, 맞아! 생명 연장의 꿈!"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이야기는 단순한 농담을 넘어선다(그리고 나는 이렇듯 '농담'이라고 하는 그 자신에 대한 제한적 규정을 넘어서는 농담을 가장 좋아한다). 여기서 '생명 연장의 꿈'을 예의 내 나름의 방식으로 '확대'해석해보자면, 마르크스/맑스의 수염 덥수룩한 얼굴은 어쩌면 메치니코프의 저 퀭하니 꺼진 역시나 수염 가득한 얼굴로 착각되고 오해돼도 상관없는 것이 아닐까, 마르크스와 맑스 사이의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마르크스와 메치니코프 사이의 차이가, 혹은 그 둘 사이의 공통점이, 보다 더 '감각적'이며 '직접적'인 문제가 아니겠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아니 '맑스'는, 어쩌면 '메치니코프'의 다른 이름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며, 또한 그러한 종교를 대신하게 된 과학은 어쩌면 그 아편의 지위마저도 물려받게 된 건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인민은 어떠한 상황 하에서 아편을 필요로 한다는 것, 곧 '실재'의 이름으로 환상의 '이름'을 걷어내기 전까지는, 인민은 아편이라는 '환상'의 기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아닐까. 그 아편의 이름이 '마르크스'이든 '맑스'이든 혹은 '메치니코프'이든 간에. 그렇다면 문제는 보다 극명해지지 않는가. '아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유산균 발효음료'가 될 것인가(그리고 여기서는 다만, 이 질문이 단지 어떤 상황을 '희화화'하기 위해서 던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만을 첨언해두자).

 

4. 비올라, 혹은 세 번째 사중주: 20세기의 테제, 벤야민을 위하여 

 

 

▷ 벤야민, 그의 두통은 '실재적'인 고통일 수도, '상징적'인 기호일 수도 있다.

 
제3주제는 20세기의 테제, 곧 벤야민(
Benjamin)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가 불러일으키는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악상에서 시작한다. 이른바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 중의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세계시민주의자(코스모폴리탄)가 오히려 더욱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반대로 민족주의자(내셔널리스트)가 더욱 코스모폴리탄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는 사실이다. '코스모폴리탄의 민족주의'라는 형용모순이야말로 한국의 근현대사 속의 특정한 정치적 흐름과 운동들을 규정짓는 하나의 대표적 은유가 아닌가(반대로 '내셔널리스트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이란, 일종의 대구를 이루는 은유, 하지만 또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그 자체로 '국수주의자의 사대주의'를 바로 연상시키는, 보다 '악질적'인 은유가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은유에 '불과(不過)'한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은유는 이데올로기의 거울이며 일종의 징후이자 증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파와 좌파의 착종된 역사, 그리고 그 역사가 수놓고 또한 그 역사를 수놓고 있는 이 은유들의 잔치에 천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은유는 여러 미시적인 단계에서 작동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는 메이지(明治) 시대 최고의 엘리트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한 '테러리스트' 안중근을 민족의 영웅으로 평가하는 데에 실로 익숙하고 친숙하다(실제로 나는 중학교 때 '안중근 의사는 사실은 결국 테러리스트가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던져 교무실에 불려갔던 적이 있다). 이러한 지극히 자연스런 '민족적' 평가 안에는, 당연하게도, 일종의 '중립적' 윤리성을 가장한 '민족주의적' 편향성이 있다. 우리는 그러한 평가의 '기술'을 '국민학교'에서 배웠다(요즘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초등학교’에서 배우겠지만,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단지 '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바꾼다고 해서 그 학교라는 제도가 지닌 '국민-국가적' 특성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텐데, 그러고 보면 이름과 그 이름의 변환에 대한 이 순수하고도 순진한 맹신은 또한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 '국민학교'에서 우리는 이토 히로부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배울 수 없었다. 그는 단지 안중근 의사가 지극히 '당연하고도 올바르게' 살해한 '악당'의 보스였을 뿐이니까(그러므로 이 애국심 어린 대항적 민족/국가주의란 또한 그 자체로 얼마나 '조폭적'인가). 이로부터 다시 몇 개의 예시들을 다양한 방향으로 비약시켜보자면, 우리는 그 '국민학교'에서 심지어 '김산'이라는 이름은 들을 수조차 없었고, 백석의 시를 읽어주거나 임화의 비평을 소개해주는 교사는 거의 전무했다. 그렇다면 저 '국민학교'의 교육이란 과연 내셔널리즘적인 것인가 코스모폴리탄적인 것인가, 이참에 묻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몇 가지 '이름'들을 더 들어보자. 우리는 윤이상, 이응노, 송두율(이들 이름 사이의 어떤 '공통점'이 느껴지는가) 등에 대한 국내의 이른바 '주류적인' 평가에 깔려 있는 어떤 이데올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코스모폴리탄'의 이름들에 대해서 가장 극우적인 '내셔널리즘'의 잣대를 들이댈 때, 그 이름들이 이루어놓은 소위 '보편사적'인 가치는 마치 민족/국민국가의 '취미란'에나 기입해 넣어야 할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본업과 취미의 대차대조표와도 같은 민족주의와 국민국가의 이 빈약하기 그지없는 '이력서' 한 장. 그 이력서 안에서 저 모든 이름들의 자리는 지워지고 오직 하나의 이름만이, 어쩌면 '대한민국'이라는 가장 거대한 이름, 그러나 동시에 가장 왜소한 이름만이 처량하게 남는다. 이 근대는 무엇인가. 우리의 근대는,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일종의 '이중-번역된 근대(double-translated modernity)'가 아닐 수 없다(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중-번역'의 또 다른 이름이 아마도 임화가 말했던 '이식문학'이 될 터). 예를 들어 나는 '이광수'라는 이름, 곧 한국 근대문학의 등록상표('트라데말크')와도 같은 그 아이콘의 이름 안에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라는 이름의 '한국적 번안'을 목격한다. '번역'에 앞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근대적 '번안'의 풍경과 기제이다. 단순한 '문화사' 혹은 '세계사'가 아니라, 문화의 고고학적 '징후사'와 세계라는 개념의 계보학적 '성립사'를 쓰기 위해, 다시 말해서, '객관적'이고 '초극 가능한' 근대의 역사를 쓰고 닫고 봉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근대라는 전염병의 병리학과 역학조사라는 메타-이데올로기의 궤적을 쓰고 열고 해방하기 위해.  

이러한 쉽지 않은 작업의 첫걸음을 위해서, 우리는 아마도 먼저 언어에 대한 하나의 '집착'에서 출발해야 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벤야민은 「번역가의 과제」에서 다음과 쓰고 있다:

그러므로 번역(Übersetzung)은, 역설적이게도, 원문을 적어도 보다 더 결정적인 언어의 영역으로 옮겨 심는(verpflanzt) 것이다. 왜냐하면 원문은 더 이상 이 이외의 그 어떤 중계(Übertragung)를 통해서도 옮겨질 수 없으며, 항상 오직 이러한 언어의 영역 안에서만 새롭고 다른 부분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Walter Benjamin, "Die Aufgabe des Übersetzers", Gesammelte Schriften, Band IV-1,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1, p.15.

이를 일종의 전도된 낭만주의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또한 이를 그저 '낭만주의'라고만 부를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의문들로부터 먼저 시작하자. 이어 벤야민은 또한 이렇게 쓰고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원문의 성립과 같은 시대에 있어서는, 번역의 언어가 원문처럼 읽힌다는 것은 번역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문자 그대로의 번역에 의해 보장받게 되는 충실한 번역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작업에서 언어의 보충(
Sprachergänzung)에 대한 거대한 갈망(Sehnsucht)이 드러난다는 점이다."(같은 책, p.18) 여기서 문제는 어떤 '보충'으로서의 번역/중계, 곧 원문 전체에 대한 포괄이 아니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원문보다 더 '결정적일' 수 있는 어떤 언어의 영역, 곧 이식과 이행의 영역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집착 아닌 집착이란 내게는 순수한 '언어' 자체에 대한 신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불순한 '교통(Verkehr)'에 대한 이론과 열망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러한 집착이 내게 단순한 '아집'이나 일종의 '절대주의'로만 여겨질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순수 언어의 ‘순수성’이란 언제나 언어 사이의 교통과 번역이 지닌 어떤 '불순성' 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순수 언어(die reine Sprache)'는, 바로 그 순수 언어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에서,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 그러므로 '순수 언어'란, 하나의 확고한 동일성으로서 그 자체로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행과 이식의 행간에서, 언뜻, 순간으로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것일 터. 그런데 맥락이 여기까지에 이르고 보면, 나의 언어, 나의 공간이란, 그 이행의 순간들과 이식의 지점들을 포착하고자 하는, 무수히 헛되거나 헛되이 무수한, 그런 덩어리들이 비우고 있고 그런 틈새들이 채우고 있는, 하나의 장소에 다름 아닐 텐데, 그렇다면 아마도 나의 이야기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다름 아님'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여기서 '다름 아니다'라는 표현이야말로 어쩌면 '이중-번역'된 '이중-부정'의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아니겠는가).

번역이란 무엇인가, 라는 ‘사실’에 대한 질문, 혹은, 번역이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당위'에 대한 질문, 그러므로 이러한 질문은 번역의 '정의(definition/justice)'를 묻는 이중적인 의문문이기도 하다('정의'를 영어로 번역하라고 했을 때, 문과생은 'justice'로, 이과생은 'definition'으로 옮긴다는 저 웃지 못 할 오래된 농담을 떠올려보자). 세계시민(코스모폴리탄)이라는 존재를 단순히 조잡한 인류애의 총합이 낳은 결과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다언어와 다문화에 대한 이해와 배려에 대한 요구는 하나의 보편적이고 윤리적인 '당위'가 아니라 하나의 인문학적이고 사상적인 '위기'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일종의 부정적 '모토'가 지닌 어떤 '진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다문화주의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불능성의 위기일 것이다. '문화적 상대론'과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보편적 정의(justice)로 정의(definition)되는 다문화주의의 윤리란, 혹은 더 구체적으로는, 한국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는 소위 '다문화가정'에 대한 인류애 넘치는 배려와 관용의 윤리란, 그 자체로 존재론적이고 사회적인 '번역의 위기'를 봉합하고 봉인하려는 하나의 무력한 '당위'—하지만 무력한 그만큼 동시에 '폭력적'이기도 한 하나의 당위—가 되고 있지 않은가. '번역'의 층위를 인구어(印歐語)-한국어 관계의 층위에 국한시키지 말고, 오히려 한국어-동남아시아어 관계의 층위에서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번역의 문제가 어떤 정치적/국제적 쟁점의 심급에 있는가를 보다 정확히 알려줄 수 있는 '언어적 실천'이 되지 않는가. 

 

 

▷ 여기에 왜 에드문트 후설의 사진이 들어가야 하는가?

 
예를 들어, 당연하게도, 인구어의 구조는 한국어의 구조와 상이하기 때문에—바로 이러한 '차이' 때문에 한 유명한 작가의 상상력 넘치는 '알타이 연합' 같은 구상이 또한 가능해지는 것 아니겠는가—우리가 흔히 '번역문 투'라고 부르는 어투와 어조가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문장이 비문인가 아닌가를 점검하기 위해 주어와 술어의 정확한 호응, 주절과 종속절의 적절한 포함관계를 따지는 것은, 지극히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역시나 지극히 냉정하게 말하자면, 결코 '우리식'은 아니다(곧 가장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문장 구조의 분석과 교정은 전혀 '민족적'이지 못하다는 하나의 역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읽으면서, 쓰면서, 그렇게 한다. 이는 인구어의 번역과 교육이 낳은 '긍정적' 결과라고 이야기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렇듯 하나의 구문과 하나의 문장 안에서 품사를 가르고 구분하는 행위는 분명 지극히 근대적/서구적인 입장의 언어관으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하다. 확장해서 말하자면, 번역 안에서는 쫓아야 할 두세 마리의 토끼들이 '공존'하고 '병존'하고 있는 것일 텐데, 흔히들 언어적 '구조'의 정합성이라는 문제만을 쫓다가 '저들'말도 '우리'말도 아니게 되는 경우를 왕왕 목격하게 되지만, 그래서 또한 가장 훌륭한 '의역'의 가능성을 찾곤 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오히려 '직역'의 영역에서 더욱 치밀하게 파고들어갈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또한 내게는 바로 이 점이 벤야민의 저 수수께끼 같은 글 「번역가의 과제」를 계속해서 다시 읽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번역의 가장 이상적인 조건은, 곧 원문의 언어가 가진 구조와 성격을 가장 잘 '환기'시키는 언어이다. 다만 이러한 과정의 결과물이 여전히 '한국어'로 남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제기될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이러한 의문은 가장 적극적으로는 '국어'의 문제, 곧 '국가-언어'로서의 '한국어'의 문제와 결부하여 생각해야만 하는 물음이기도 한 것이다. '코스모폴리탄의 국어'라는, 일견 형용모순으로 보이는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도 내게는 이러한 '국가-언어'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문제로 남는다. 이러한 번역에 대한 상상과 몽상, 언어의 '간극' 속에서만 존재하는 '순수 언어'에 대한 공상은, 어떤 구체적인 번역물에 대한 비난이거나 비판이라기보다는, 내가 내 스스로에게 조금 '과(過)하다' 싶을 정도로 과(科)하는, 번역에 대한 일종의 '이상적' 규준이 된다. 단, 이러한 하나의 '이상성'은 순진하고 단순한 '유토피아적' 의미에서가 아니라—그 희랍적 어원에서 또한 마찬가지로 부정어 접두사를 포함하고 있는—'아포리아적'인 것으로, 곧 하나의 '불가능성'으로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 

 

 

▷ 아도르노의 '섹시한' 망중한(忙中閑).

 

여기서 먼저 분명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바로 저 벤야민의 '순수 언어'가 서 있는 정확한 위치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벤야민의 사유 안에서 이러한 '순수 언어'가 차치하는 지위란, 아마도 벤야민 그 자신의 이론적/학문적 위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것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가설 한 자락을 제시하고자 한다. 벤야민의 '순수 언어'란 것이 과연, 우리가 그 말에서 손쉽게 '유추'하고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순수'하거나 '근본주의적'인 개념인 것인가 하는 물음, 바로 이 물음이 또한 나로 하여금 벤야민의 저 잠언과도 같은 글 「번역가의 과제」를 계속해서 읽게 만드는 추동력이기도 하다. 이러한 '순수 언어'의 정체를 벤야민 자신의 이론적 입지와 연계시켜보는 것은 그 자체로 흥미로울 텐데, 이는 벤야민이야말로 가장 '주변적'이며 '파편적'인 글쓰기에 있어 가장 큰 성과와 예감을 보여주었던 저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으나, 그의 글은 독일 고전철학과 괴테 이후의 독문학 또는 당대의 유럽 문학/문화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또한 그의 글쓰기 전략에는 동시대의 다른 이론가들과 비교했을 때에도 오롯이 도드라지는 어떤 구별점이 있는 것이다. 극명한 대조의 예를 통해 이를 형상화해보자면, 벤야민의 글은 후설(Husserl)의 글과도 다르고 아도르노(Adorno)의 글과도 다르다. 이러한 '변방'과 '주변부'의 저자로서의 벤야민에게 도대체 '순수 언어'란 무엇인가. 어떤 의미에서 저 '직역'에 대한 사유와 천착은 바로 벤야민의 이 '순수하지 않은' 순수 언어, 가장 '주변적'인 '중심'언어에 대한 물음의 형식으로밖에는 이루어질 수 없지 않을까. 모든 번역이 '숙명적'으로 일종의 '의역'이 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할 때, 사실 벤야민의 출발점도 이러한 '숙명적 의역'의 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는 또한 '제대로 된' 직역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가장 훌륭한' 의역일 것이라는 '보편적' 명제의 실제적/실정적 정체를 문제 삼는다. 이에 나는, 벤야민의 '신비주의'라는 것을, 이 '순수 언어'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저 '직역'의 영역과 '의역'의 영역이 상충되지 않고 양립가능하게 만나게 되는 어떤 '신비한' 지점, 바로 그러한 간극과 이행으로서 번역이 갖게 되는 성격이 바로 저 '순수 언어'의 자리는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저 '순수 언어'의 '순수성'이란 오직 이러한 '불순한' 교통 안에서만 사유되고 추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물음들을 던져보는 것이다. 나는 아마도 이러한 역설적 접근이 벤야민의 '신비주의'를 이해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오는 중이다. 그렇게 보면 '순수 언어'라고 하는 것은, 동일성에 기초한 하나의 ‘실체’로서, 곧 일종의 '메타-언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번역과 이행과 이동의 사이와 간극, 그 틈새와 골 안에서 하나의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그렇게 이해된 '순수 언어'란, 그 말 자체가 주는 손쉬운 인상과는 다르게, 결코 '순진무구'하거나 '근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주변적'이고 '매개적'인 역설적 '순수성'을 띠게 되는 것은 아니겠는가. 곧, '순수 언어'란 '타자의 언어'와 '타자의 이름'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 일종의 '보편적 고유명'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순수 언어'와 '직역'의 문제, 혹은 '원문의 구조와 어감을 환기시켜줄 수 있는 번역'에 대한 내 생각의 시발점은 바로 이러한 '순수 언어'의 '불순성'이 되고 있는 것. 이는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 '부정적'인 길을 걷는 것, 혹은 언어들 사이의 '오인/왜곡/변형/재창조'의 길을 보다 적극적으로 따라가 보는 것일 텐데, 또한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저 '순수 언어'에 대한 상상과 사유는 기실 언어의 가장 '불순한' 성격에 대한 뒤틀린 직시가 되고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5. 첼로, 혹은 네 번째 사중주: 21세기의 테제, 랑시에르를 위하여 

 

 

▷ 랑시에르를 읽자, 다만 찬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리거나 삐딱하게 하기 위해, 불화를 확인하고 산출하기 위해. 

 
제4주제는 21세기의 테제, 곧 랑시에르(Rancière)의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가 불러일으키는 '정치적 주체화'와 '정체성'의 악상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여기서는 감각적인 것의 분할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한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또는 셈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셈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미학적 체제' 안에서 하나의 예술 혹은 예술가가 어떻게 하나의 '정체성'으로 구성되는가 하는 질문으로 바꿔 지극히 '국부적으로' 살펴볼 텐데, 어쩌면 정치적 주체화란 곧 몫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밤이 하나의 '이름'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또한 미학적/감성적 혁명이기 때문이었던 것. 책을 읽는 사람이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꼭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그 역(逆)은 왜 아니겠느냐마는!). 하지만 이러한 '가르침/배움'의 이야기에 앞서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내가 가끔씩 이 두 종류의 인간, 곧 책 읽는 인간과 음악 듣는 인간 사이에 어떤 '장벽'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왔다는 사실이다. '두 종류의 인간'이라고 아예 거창하게 구획 짓듯 분류하고 서로 격리시키기까지 해버렸지만, 이러한 분류법 자체는 실은 전혀 '일반적'이지 못하다. 즐길 수 있는 다른 여러 '매체'들이 있다는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매체의 종류와 그 향유의 조건들을 규정하는 정치경제적 전제들을 백안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더욱 더. 그런 의미에서 이는 어쩌면 가장 국지적인 분류, 혹은 가장 주변적이고 어쩌면 가장 부차적이기까지 한 '상부구조'에 대한 분류의 모습을 띠겠지만, 이러한 '장벽'이란, 사람들이 그것을 쉽게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딱 그만큼, 뛰어넘기가 극히 어렵다. 여기서는 특히 나의 이 문장 '형식'에 주목하기 바란다. 나는 결코 '사람들이 이 장벽을 뛰어넘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벽은 사실 쉽게 뛰어넘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는 절대 말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또한 '사람들이 이 장벽을 뛰어넘기가 쉽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 장벽은 그리 만만히 뛰어넘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도 결코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또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여기서 문제는 '언어(문자)-지향'의 인간과 '감각(소리)-지향'의 인간 사이에서 상정할 수 있는 '체질'과 '성향'의 사상의학적 분류법 같은 것이 아니다. 

 

 

▷ 이것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사진이다, 리처드 기어(Richard Gere)의 사진이 아니라.

 

사이드(Said)는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오늘날 문학계 지성과 일반 지식인들은 음악 예술에 대한 실용적 지식이 거의 없고, 악기를 연주한다거나 음악 기초이론을 배우는 경우가 드물며, 카라얀과 칼라스 같은 몇몇 유명 연주자들의 음반을 구매하는 것을 제외하면 음악 실제에 관한 한 사실상 문맹이다. 서로 다른 연주와 해석 및 양식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모차르트, 베르크, 메시앙 음악에서 화성과 리듬이 어떻게 다른지를 판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ㅡ 에드워드 사이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마티, 2008), 169쪽. 

이 말에 누군가는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겠고 또 누군가는 반성에 가까운 안타까움 한 조각을 마음속에 머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이 문장들이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 착잡한 상념들은 몇 가지 의문들을, 말하자면 사이드의 이 문장 안에는 '유럽과 비유럽 사이의 학문적/예술적 경계와 지배관계'에 대한 성찰이 누락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 그리고 '계급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경제적 차이에 따른 교육의 평등'이라는 문제가 간과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 등을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문학계 지성"과 "일반 지식인"이 꼭 음악의 기초이론을 배워야 하는가, 혹은 단순히 카라얀이나 칼라스 '따위'가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이고 '전문적'인 음악적 향유를 할 수 있는 조건들을 꼭 갖춰야 하는가 하는 등등의 많은 질문과 반발들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책 읽기의 능력과 악보 읽기의 능력을 단순히 '총체적으로' 서로 결합시키는 '르네상스적 인간'에 대한 어떤 희구나 요청이 아니라, 다시 말해 상이한 '능력'들 사이의 어떤 일괄적인 결합과 통합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적으로' 사고하고 쓰고자 하는 어떤 시도, 곧 '음악을 사유할' 수 있기 위해 행하는 어떤 노력에 대한 강조에 다름 아니다(따라서 이러한 도약에의 시도는 어쩌면 마르크스적 'salto mortale'가 지닌 예술적 판본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지식인 비르투오소"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이드의 문제의식이란 내게 이렇게, 이런 걸음으로, 그리고 또한 이런 그림자로 다가오는 어떤 물음의 한 자락이다: 지식인 비르투오소란 무엇인가. 이러한 정체성의 문제는 또한 저 랑시에르적인 '감각적인 것의 분할(le partage du sensible)'이라는 개념과 지극히 '문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내가 굴드에게서 느끼는 '문제적' 지점은 언제나, 그의 손이나 피아노가 아니라, 그가 앉아 있는 저 '의자'로부터 기인하고 도출되는 무엇이다.

 

사이드가 지식인 비르투오소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인물로 꼽고 있는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Gould)의 '문제적' 특성에 관한 사이드의 글을 읽어보자: "그가 비르투오시티를 의식적으로 재설정하고 재정립하여 도달하려 한 결론은 일반적으로 연주자가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여 담론을 만들어내는 지식인들의 영역에 속한다."(같은 책, 176쪽) 이 문장 안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싶은 어구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일견 부차적인 것으로 보이는 바로 저 "일반적으로"라는 부사이다. '일반적으로', 곧 여기서는 어쩌면 '뭉뚱그려' 이야기했을 때 그렇다는 것, 또한 이렇게 '일반적으로' 혹은 '뭉뚱그려' 말하지 않고서는 달리 이를 쓸 수 없었다는 것, 아마도 저 "일반적으로"라는 말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모호한 '비언어(非言語)'의 지점일 것이다. 곧 굴드가 목표로 했던 지점은 "언어를 사용하여 담론을 만들어내는 지식인들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일단은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자체가 '언어'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때론 음악이 '언어적'이기도, 때론 언어가 '음악적'이기도 할 테지만, 무엇보다 음악은 언어가 아니며 또한 그 역(逆) 역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섬세하게 구분되어야 하는데, 비슷한 관점에서 사이드가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굴드가 비르투오소로서 거둔 성취의 극적인 면은, 그의 연주가 명백한 수사학적 양식을 통해 전달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음악 연주자들이 시도하지 않고 어쩌면 시도할 수도 없는 특정한 유형의 진술로서도 전달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전문화 시대, 반인본주의적인 원자화 시대에 연속성, 합리적 지성, 미적 아름다움의 가치를 주장하는 진술이다."(같은 책, 188쪽) 이러한 "특정한 유형의 진술"은 물론 "대부분의 연주자들"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영역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진술'과 '서술'을 업으로 하는 이들, 곧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자들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인 것도 아니다. 굴드의 이러한 특성이란, 바로 이러한 모호함과 경계성 위에서 번뜩이는 어떤 '확실성', 곧 가장 합리적인 지성이 빛을 발하는 미(美)의 가치를 가장 '합리적이지 않은' 합리성으로, 가장 '언어적이지 않은' 언어(음악?)로 '진술'하는 행위에 있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이것이 또한 바로 굴드의 '말년/후기적' 특성이 지닌 파국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진술'이 아닐까. "결국 굴드에게서 바흐(Bach)의 음악은 도처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부정과 무질서에 맞서는 데서 본질적인 힘을 과시하는 합리적 체계의 등장을 보여주는 원형 같은 것이다. 이것을 피아노로 실현하려면 연주자는 스스로를 소비하는 대중이 아니라 작곡가와 일치시켜야 한다."(같은 책, 188쪽)

이 문장 안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이것을 피아노로 실현하려면"이라는 구절이다. 굴드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부정과 무질서에 맞서는 데서 본질적인 힘을 과시하는 합리적 체계의 등장을 보여주는 원형" 같은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런 것만이 될 수 없다. 말하자면 저 "원형"이란 그 화려한 수사와 엄청난 무게감에 비할 때 오히려 너무나 '단순한' 것이다. 그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를 오로지 '피아노로써[만] 실현해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결국 언어적 진술이 아니라 피아노로써 '실연(實演)'하고 '실현(實現)'해야만 하는 것이다(어쩌면 이러한 숙명적 '감행'은 그 자체로 음악이 선사할 수 있는 어떤 '감동'과 연계되어 있는 것일 터이다). 내가 모호함과 경계성 위에서 번뜩이는 확실성이라고 말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과정 안에 있다. 또한 나는 "스스로를 […] 작곡가와 일치시켜야 한다"는 지식인 비르투오소의 이 '선택적 책무'가, 연주자가 연주에 임할 때 작곡가의 '의도'나 '정신'과 혼연일체 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따위의 지극히 '낭만적인' 지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자 한다. 굴드가 한 명의 뛰어난 '비르투오소'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연주의 과정을 통해 작곡의 과정이 새롭게 다시 '창안'되는 장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또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이 바로 굴드가 생각했던 바흐적 '인벤션(invention)'의 진정한 의미였다. 연주 자체가 선사할 수 있는 희열과 더불어 '작용 중인 현재' 혹은 '작곡 중인 작품'을 가장 '현재적'이고 '진행적'으로 드러낸다는 것. 그러므로 내가 저 '지식인 비르투오소'라는 정체성을 생각하면서 다시 묻게 되는 오래된 질문은 실로 간단하고 단순하다: 책 읽는[쓰는] 자와 음악 듣는[만드는] 자는 어디서 만나고 어디서 헤어지는가. 이 둘의 언어적이고도 음악적인 '정체성'은 누구의 밤을 통해 구성되고 또한 해체되는가. 



6. 갱신되는 반복, 혹은 피아노 독주곡의 끝과 처음: 사티를 위하여 

 

 

▷ 사티의 도돌이표 없는 도돌이표.

 
같은 것의 반복, 하지만 동일하지 않은 것의 반복, 아니 반복됨으로써 오히려 동일하지 않게 되는 것들의 반복이 있다. 테제들은 동일한 것들을 동일하지 않은 방식으로 반복하고 그 반복 안에서 어떤 전복을 이끌어낸다. 혹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테제들은 보편적이지 않은 것 위에서 하나의 보편성을(칸트), 유물론적이지 않은 것 위에서 하나의 유물론을(마르크스), 역사적이지 못한 것 위에서 하나의 역사성을(벤야민), 그리고 정치와 가장 멀어 보이는 것 위에서 하나의 정치를(랑시에르) 수립하고 정식화한다. 나의 현악사중주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한 곡의 피아노 독주로, 혹은 피아노와 현악사중주를 포함하는 한 곡의 피아노 오중주로, 바뀐다, 변주된다, 반복된다. 주지하다시피, 에릭 사티(
Erik Satie)는 자신의 음악을 일종의 '가구'로서 이해하고 '가구'로서 제작했다(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진정한 'ambience'의 효시일 것이다). 사티는 <Vexations>에서 단 한 개의 테제를, 곧 단 세 줄로만 이루어진 한 장의 악보를 제시한다. 이 악보의 지시문은 이 짧은 악구가 840회나 반복되어야만 한다고 지시하고 있다. 1963년에 존 케이지(John Cage)가 몇 명의 피아니스트를 기용하여 19시간가량을 '소모'하면서 이 곡을 발굴/초연했지만, 결국 이 단 세 줄의 악보를 결코 '완주'하지는 못했다(그렇다면 이러한 'vexations'이란 누구를 '약 올리고' 무엇을 '괴롭히기' 위함인가). 이러한 840번의 반복 안에서, 일종의 '가구'로서의 사티의 음악은, 가장 커다란 하나의 가구, 말하자면 하나의 '분위기(ambience)'를 형성한다. 피에르 앙리(Pierre Henry)처럼 음악을 이해하고 추구하려는 경향의 가장 '극단적인 극단'이 있다고 한다면, 혹여 그것은 어쩌면 '피에르 앙리'라는 인간과 그를 둘러싼 환경의 분위기 그 자체를 하나의 '음악'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아닐 것인가. 조성이 무조 속으로 개입하고 침입했던 바르토크의 악보와는 다르게, 사티의 악보는 그 끝없이 반복되는 시간의 진행 속에서 조성과 무조를 교차시키고 뒤섞어버린다. 이토록 짧은 악구의 거의 무한에 가까운 반복 안에서, 이러한 조성과 무조의 끊임없는 교차와 혼합은 어떻게 '들리는가', 곧 어떻게 '감지'되는가? 여기서는 조성이 무조를 침입하는 것인가, 아니면 무조가 조성을 파괴하는 것인가? 혹은, 거의 24시간 동안 지속될 840번의 반복 후 우리가 '감지'하게 될 모종의 '통일성'과 '일관성'이란 과연 어떤 모습일 것인가? 그 840번의 반복이 종국에 맞이하게 될 하나의 끝을, 우리는 과연 '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제까지 나는 테제들의 한 역사와 그 가능성/불가능성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해독’하고 '변주'해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해독(解讀/解毒) 그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곧, 포이어바흐에 관한 마르크스의 저 마지막 테제를 비틀어 차용하자면, 문제는 테제들을 '불가능'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테제의 '불가능성'을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서두에 붙인 제사(題詞)로도 모자라 글의 말미에도 또한 동일한 시인의 동일한 시로부터 추출한 또 하나의 제사를, 그것도 시작이 아니라 말미에, 하나 더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말하자면, 이것으로 끝이 아니므로, 이 글은,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의 시작을 가리키고 있으므로, 혹은, 더 냉정하게 말해서, 이 글로는 오직, 하나의 시작밖에는 가리킬 수 없으므로. 나는 하나의 악보로 시작한 이 글을 또한 하나의 악보로 닫고자 한다. 끝이 없는 시작과 반복의 악보로, '400번의 구타'가 아니라 '840번의 반복'을 지시하고 있는, 단 한 장의 악보로. 내가 이 글을 닫고 이 곡을 마치면서 덧붙이고자 하는 하나의 '악보'는 고로 840번 반복되어야 하는 하나의 '테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테제들의 역사에 대한 연주와 변주는, 그리고 그 '불가능성'에 대한 어떤 실천의 형식은, 아마도 840번이라는 반복의 회수로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고 모자랄, 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In my end is my beginning.
— T. S. Eliot, Four Quartets 

 

 

Erik Satie, <Vexations>.

 
*) 사족(蛇足)을 하나 첨부하자면, 아직 바르토크의 현악사중주(총 여섯 개)와 사티의 피아노 곡들을 들어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일청(一聽)을 강권하는 바이다(단, 사티의 <짐노페디>는 논외로 한다). 나는 최근에 어떤 우발적이고 우연한 계기를 통해ㅡ하지만 '우발적이고 우연하지' 않은 계기란 게 과연 존재할까?ㅡ오랜만에 다시금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들에 열광하고 있는 중이다. 고백하자면, 사실 이 글의 정리도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 8번을 들으면서 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언제부터인가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되었다는 느낌이 있다. 고등학교 때는 주다스 프리스트를 들으면서 수학 문제를 풀기도 했는데 말이다! (2010. 2. 15.)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와 음반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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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6 0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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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6 0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6 12: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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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6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6 2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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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6 2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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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 2010-04-25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만큼이나 부지런하십니다.^^

람혼 2010-04-27 03:01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글쓰기에 관해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 같은 게으름뱅이도 없을 텐데요...^^; 지젝은 부지런함을 넘어 숫제 글쓰기 중독이 아닌가 하고 생각될 때도 가끔 있습니다.
 

 

Daniel Bensaïd (1946-2010)

 

지난 2010년 1월 12일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ïd)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소식은 내겐 특히 개인적으로 큰 충격이었다.
그와 관련해 남몰래 계획하고 있던 일이 있었기에...'왜 하필이면 이 때에'라는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마치 마음 한 구석에 구멍이 뻥 뚫린 느낌이다.
 

최근에 그의 글을 하나 번역한 바도 있거니와(『레닌 재장전』 中 「"도약! 도약! 도약!"」), 과거 그의 책들 중에서 특히 『저항들: 일반 두더지학 시론(Résistances: essai de taupologie générale)』, 『트로츠키주의들(Les Trotskysmes)』, 『변화할 세계(Un monde à changer)』,『세속 정치 찬가(Éloge de la politique profane)』등을 정말 유익하게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 뿐이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

  

  

     

Daniel Bensaïd, Résistances: essai de taupologie générale, Paris: Fayard, 2001.
Daniel Bensaïd, Les Trotskysmes, Paris: PUF, 2002

 

     

Daniel Bensaïd, Un monde à changer, Paris: Textuel, 2003.
Daniel Bensaïd, Éloge de la politique profane, Paris: Albin Michel, 200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하는 벤사이드의 부음을 알리는 『르 몽드(Le Monde)』紙의 기사들이다:

1) 혁명적 공산주의 연맹(LCR)의 창립자 중 하나인 다니엘 벤사이드 사망:
http://www.lemonde.fr/carnet/article/2010/01/12/daniel-bensaid-un-des-fondateurs-de-la-lcr-est-mort_1290812_3382.html

2) 참여 지식인 벤사이드 사망(音聲 프로필):
http://www.lemonde.fr/politique/portfolio/2010/01/12/daniel-bensaid-un-intellectuel-engage_1290822_823448.html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하는 역시나 벤사이드의 부음을 알리는 『뤼마니테(L'Humanité)』紙의 기사들이다:

1) 다니엘 벤사이드 사망:
http://www.humanite.fr/Daniel-Bensaid-est-mort

2) 철학자이자 투사였던 보기 드문 맑시스트 지식인, 다니엘 벤사이드:
http://www.humanite.fr/article2758719,275871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하는 『레프트 21』에 실린 알렉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의 조사(弔辭) 번역 전문:

http://www.left21.com/article/7505
 

 

 

 

 

벤사이드 책의 국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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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0-01-28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기사는 프랑스어라 읽을 수 없지만 마음이 참 아픕니다.

람혼 2010-01-28 11:43   좋아요 0 | URL
네, 정말 마음 아픈 소식이에요... ㅠㅠ (저도 부고 기사는 대충 읽었습니다...) 찾아보니 캘리니코스가 벤사이드를 위해 쓴 弔辭가 있군요(위에 링크해두었습니다).
그나저나 휘모리님, 잘 지내고 계시죠? ^^

다락방 2010-01-28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고 계신지 물으려 했는데, 이 페이퍼를 보니 묻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려요.

람혼 2010-01-28 10:24   좋아요 0 | URL
사실 잘 지내고 있는 건지 아닌지 스스로도 잘 모를 정도로 정신이 어딘가로 실종된 상태가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다락방님께서 종종 '물어봐주신다면' 제 실종된 정신을 찾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1-29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 하먼도 그렇고 다니엘 벤사이드도 그렇고 트로츠키파 학자들이 연달아서 타계하는군요.갤리니코스는 추모하느라 바쁘겠구요.

람혼 2010-01-30 06:31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 잘 지내시죠? 사실 며칠 전 하워드 진의 타계 소식도 제 우울증을 증폭시켜주고 있습니다. 벤사이드의 부음은 지금도 여전히 제 가슴 속에 울리면서 공회전을 하고 있네요...

요즘은 개인적으로 무언가 많이 후회되고, 또 그런 후회의 마음이 다시금 정신의 신발끈을 동여매는 동력이 되는, 그런 상반되는 심리들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 이 울증의 주기를 끊어야 할 텐데요, 마음처럼 쉽지 않군요.

캘리니코스는 부디 오래 오래 살아서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1-30 14:46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팔굽혀 펴기 열심히 하면서 왕성하게 살고 있답니다.

하먼이나 벤사이드나 한창 일할 나이에 저세상으로 간 것 같아요.

악순환의 꼬리를 끊고 기운을 내시기 바랍니다.

람혼 2010-01-31 01:09   좋아요 0 | URL
역시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하고 계시는군요.
격려에 힘입어 기운 내겠습니다!

푸른바다 2010-02-02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니엘 벤사이드, 크리스 하먼 등을 모두 처음 들어본 것을 보면 저는 참 미지근한 삶을 산 모양입니다^^ 캘리니코스는 그의 몇가지 논쟁과 저술들을 알고 있고 그의 <이론과 서사>는 소장하고 있기에 모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역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람혼님이 올려놓으신 프랑스어 기사들을 구글로 영역해서 읽었습니다. 내용은 파악할만 하더군요^^ 번역된 캘리니코스의 추도사들도 읽었고, 한국인 운동가가 쓴 크리스 하먼에 대한 추모글도 읽었습니다. 인류의 진보를 위해 뜨거운 삶을 살다간 이들에게 경의와 조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산 사람들의 몫을 위해 람혼님, 힘내시기 바랍니다^^

람혼 2010-02-02 20:36   좋아요 0 | URL
미지근한 삶이라니,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구글 번역기는 성능이 어떤가요?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어서요...
어쨌든 푸른바다님 말씀처럼, 우리는 또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을 계속 살아나가야겠지요... 푸른바다님도 힘내시길! 파이팅입니다! ^^
 

 

▷ 홍태영, 장태순, 최정우, 조영일, 장진범, 양찰렬, 홍철기, 강병호,
    『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 』, 난장, 2010.

1) 근황 하나: 공저(共著)한 책이 한 권 출간되었다. 현재 가장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8명의 정치철학자들에 대한 책인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난장, 2010)이 바로 그것. 이 책에서 나는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와 그의 정치철학에 대한 글을 맡아 썼다. 이 외에도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샹탈 무페(Chantal Mouffe),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에 대한 다른 필자들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다소 거칠고 범박하게 말하자면, 현대는 말 그대로 '정치철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반면 현대는 결코 '정치'의 시대는 아니다. 현대의 정치철학은 바로 이 '정치-없음'의 사태에 주목하며 또한 바로 이러한 정치적 부재(不在)와 불능(不能)의 사태로부터 다시 태어나고 있다.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현대 정치철학의 가장 근본적 테제인 것. 현대의 정치철학이 가장 첨예하게 문제 삼고 있는 지점은 바로 일견 '탈-정치'의 시대로 보이는 우리의 시대, 그 정치적 시공간의 '불가능성'이다. 이 책 또한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현대 정치철학에 대한 사유의 '탑재'와 '증폭'을 위해서라도 일독을 강권하는 바이다. 이하에서는 이 책에 수록된 랑시에르에 관한 내 글의 서두 일부분을 옮겨놓는다.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부르주아지의 낮보다 아름다운가, 과연?

프롤레타리아트의 낮과 밤. 계급투쟁이라는 '낡은' 관념을 곧바로 연상케 하는 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단어와 하루라는 시간의 경제적 길이를 지극히 '낭만주의적'이고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주는 저 '낮'과 '밤'이라는 단어, 그리고 또한 그들 셋 사이를 맺어주고 있는 저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언어적 조합은 일견 우리에게 하나의 오래된 신화나 전설처럼 실로 닳고 닳은 고색창연한 구절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 프롤레타리아트의 낮과 밤이란 단순히 낭만적 시간성의 형식을 차용한 상징적일 뿐인 은유가 결코 아니다.

자크 랑시에르에게 그런 밤과 낮이란 무엇보다 물질적인 시간 그 자체, 더 정확하게는 한 체제 안에서 감각적인 것들이 분할되고 배분되는 미학-정치적인 시공간을 의미한다.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밤이란 자본주의 체제의 '어두운' 이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밤의 시간, 프롤레타리아트가 낮 동안의 노동을 마친 후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이탈하고 주체화 과정을 감행하는 한에서의 '밤'이라는 시간을 뜻한다. 따라서 그 밤이란 어떤 의미에서 '해방'의 길로 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해방의 시간은 감각적인 것의 밤과 정치적인 것의 낮을 지난다. [下略]

ㅡ 최정우, 「자크 랑시에르: 감성적/미학적 전복으로서의 정치와 해방」 

 

 

▷ 바디우, 캘리니코스, 이글턴, 제임슨, 지젝, 벤사이드, 쿠벨라키스, 발리바르, 르세르클, 네그리 外,
    『 레닌 재장전: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이현우, 이재원, 한보희, 최정우 外 옮김), 마티, 2010.

2) 근황 둘: 공역(共譯)한 책도 한 권 출간되었다. 『레닌 재장전: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마티, 2010)가 바로 그것. 이 중에서 나는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ïd)의 글을 번역했다. 레닌의 '르네상스'라고 해야 할까, 최근 레닌에 대한 재조명 혹은 재해석과 더불어 그에 관한 책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는 와중에서도 이 책은 각별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최근 가장 활발한 이론적 활동을 벌이고 있는 저자들의 면면은 차치하고라도, '진리의 정치'라는 일견 고색창연한 듯 보이는 정치적 '진정성'의 관점에서 이른바 '레닌주의적 제스처' 혹은 '레닌적 몸짓'의 정치적 현재성과 타당성, '위기'와 '혁명'의 개념에 대한 재전유와 재사유를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작년이었던가, 한 신문의 칼럼에서 윤평중 교수는 '이제 진리의 정치를 걷어내자'는 요지의 점잖은(?) 충고를 386 세대에게 던진 바 있었는데, 하지만 과연 우리가 걷어내고 던져버려야 할 것이 정말 '진리의 정치'인가 하는 의구심은 지금도 여전하다). 왜 다시 레닌인가? 왜 다시금 레닌적 제스처를 '장전'해야만 하는가? 이 질문은 특히나 슬라보이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과 『지젝이 만난 레닌(Revolution at the Gates)』이 출간된 이후로부터만 생각해봐도 현대 정치철학의 가장 중요한 물음이 되고 있는 바, 정치와 혁명의 개념이 겪고 있는 어떤 '불가능성'을 사유하고 그 사유의 아포리아들을 '실천'해내는 일에 광범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의 날개에는 번역자들의 대담에서 나왔던 말들 중 일부도 실려 있는데, 그 중 나의 말은 이렇다(기억의 재구성을 통해, 다소 수정해서 말하자면):

왜 레닌을 '다시' 읽을 필요가 생겼을까? 이 점이 중요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또한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단어들을 되새기게 된다. 정의, 당, 조직, 혁명... 이제 마르크스는 오히려 지식인의 세계에 속한 사람, 곧 하나의 사상가이자 고전이 되었다. 하지만 레닌은 여전히 지식인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사상가이다. 그런 점에서 레닌은 문제적이다. 왜 다시 레닌을 읽을 필요가 생겼을까? 다시 한 번 자문하게 된다. 

 

 

▷ 차근호 작, 김광보 연출, 연극 <루시드 드림>, 산울림소극장, 2010년 1월 12일~1월 31일.

3) 근황 셋: 차근호 작가의 신작 <루시드 드림>이 김광보의 연출로 현재 산울림소극장에서 상연 중이다. 이 연극은 내가 올해 처음으로 작곡한 작업이기도 하다. 당월 31일까지 계속되며, 이남희, 길해연, 정승길 등 내가 평소 경애하는 배우들이 출연한다(월요일 휴관, 화~금: 8시, 토: 4시, 7시, 일: 4시). 이 연극은 일종의 '범죄심리극'의 외양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영감을 얻은 연쇄살인범과 그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사이의 기이한 관계, 그리고 그 혹은 그들의 '자아분열'을 다룬 작품으로, 연초에 관극하기에는 다소 무거운(?) 감이 없지 않지만, 라스콜리니코프(로쟈)와 소냐 사이에 일어났던 어떤 '구원'이 '새로운 인간'을 통해 부정되고 극복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비록 그것이 '최후/최초의 인간'이 지닌 차가운 광기처럼 느껴질지라도 말이다. <루시드 드림>을 위해 작곡한 음악들 또한 개인적으로 만족스럽다. 관극을 권하는 바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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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0-01-24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나오는 연극인가요?^^

람혼 2010-01-24 17:00   좋아요 0 | URL
출연하시는 것 아니었나요? ^^

2010-01-25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6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1-26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독을 '강권'하시니 젊은 연구자들의 패기가 서린 따끈따근한 초판본을 일단 집에 모셔두어야 겠습니다. 그 일독의 행위가 언제 일어나게 될지는 아직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버트란드 러셀이 레닌을 만난 후 '지적으로 한계가 있고 좀 장난기 있는 잔인성이 느껴졌다'고 혹평을 하는데, '지식인' 러셀의 '정치가' 레닌에 대한 정직한 평인 것 같습니다. 저는 레닌의 마키아벨리적 'virtu'가 러셀에게 '장난기 있는 잔인성'으로 느껴진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으로 읽었던 알튀세르의 글이 녹두에서 펴낸 <레닌>에 실려있던 '레닌과 철학'이었는데, 그 정치한 논리에 감동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진경 선생이 <사사방>에서 알튀세르를 조롱했었기에 무의식적으로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알튀세르에 대해 갖고 있었는데 이 글을 통해 그 인상이 좋은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지식인' 알튀세르는 러셀과는 달리 레닌의 지적 능력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었지요. 사르트르도 레닌의 지적 능력은 무시했지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러셀과 모택동의 접촉도 있었는데, 그 당시 러셀은 이미 저명한 학자로 중국을 방문 중이었지만 모택동은 일개 도서관 사서로서 러셀의 연설을 청강했었지요. '정치가' 모택동의 '지식인' 러셀에 대한 비평도 흥미롭습니다^^ 사르트르가 쿠바의 카스트로를 만난 후 '그는 사회주의 혁명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물론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에게는 '지식인'과 '정치가' 사이의 어떤 묘한 긴장도 느껴집니다^^

레닌은 '여전히 지식인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사상가'라는 대목을 읽고 스쳐간 단상들이었습니다^^

람혼 2010-01-26 02:02   좋아요 0 | URL
제가 말하고 싶었던 핵심을 적확하게 짚어주신 것 같아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푸른바다님.

제가 이른바 최근의 '레닌 르네상스'에 적극 동의를 표하는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들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은 테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 아카데미적이고 교조적인 맑스-레닌주의를 논외로 한다면] 레닌은 이론화된 적도 없었고 현재에도 이론화되지 않고 있는데, 바로 그 '이론화할 수 없는 레닌'이라는 하나의 기표야말로 레닌이 지닌 정치적 현재성의 요체이다, 라고 말이죠.

따라서 레닌은 하나의 기표임과 동시에 하나의 징후 혹은 증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레닌적 제스처의 정치적 재전유와 함께 우리가 이론적으로 고민해야 할 일은, 바로 이러한 레닌-기표의 증상과 징후를 어떻게 정신분석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생각입니다(덧붙여,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제가 앞에서 '논외'로 한다고 표현했던 '과거의 교조적인 맑스-레닌주의'라는 말과 현상 자체도, 다만 '그저 그렇게' 치부되고 환원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해석과 재평가를 요청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지식인과 정치가 사이, 혹은 이론가와 실천가 사이에는 어떤 긴장과 거리가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 거리란 이해로써 '좁혀질 수 있고' 또한 '좁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그 거리의 외연을 확장시킴으로써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러셀이 레닌에게서 본 '장난기 있는 잔인성'의 실체가 마키아벨리적 비르투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선 즐거운 동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푸른바다 2010-02-02 18:24   좋아요 0 | URL
예, 지식인과 혁명가/정치인 사이의 거리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각자의 역할을 존중할 때 진정한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은 다른 책들과 함께 지난 주에 주문을 했건만, 주문한 책들 중 원서 한권이 품절이어서 아직도 도착을 안했네요^^ 한국 정치학계의 중견들이 쓴 <서양근대정치사상사>와 비교 독해를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람혼 2010-02-02 20:39   좋아요 0 | URL
저도 <서양근대정치사상사>를 읽어봐야겠군요! ^^
개인적으로 요즘 오랜만에 너무 '한쪽' 독서에 치우치게 되어서, 다시금 시야를 조금 더 다른 곳으로 넓혀보려고 합니다.
어떻게 된 건지 마음의 여유는 점점 더 줄어드니 참 큰일입니다. 힘내야죠!

2010-01-26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6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나타 수이사이드  l  Renata Suicide

 
2009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신촌에서
제가 몸담고 있는 밴드 Renata Suicide의 '해넘이 공연'이 있습니다.

이 해넘이 공연은 '라이브로 함께 송구영신을'이라는 모토로(물론 '내 마음대로'의 모토입니다만) 
12월 31일 저녁에 시작하여 1월 1일 0시의 타종까지 이어지는,
2006년부터 저희가 다른 밴드들과 함께 벌써 4년째 이어오고 있는 공연입니다.
조촐하면서도 소탈한 분위기의 이 해넘이 공연에 제현(諸賢/諸眩)을 초대합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일시: 2009년 12월 31일 목요일 밤 9시
장소: 신촌 긱라이브하우스(Geek Livehouse) [클릭 → 약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Renata Suicide
www.renatasuicide.net

2002년 4월 19일, 람혼(vocal/guitar), 반시(bass), 파랑(drums)이 신림동 모처에서 작당(作黨)하여 결성한 3인조 음악집단.

클럽과 연극/무용 무대를 중심으로, 프로그레시브와 사이키델릭, 메탈과 모던 록, 댄스와 아방가르드 등을 혼합한 중독성 넘치는 이종(異種)의 록 음악을 선보이며 점차로 마니아층을 넓혀오고 있다.

그간 홍대/신촌 클럽과 대학로 연극/무용 무대 등을 통해 100회 이상의 공연을 펼쳤고,
특히 장 주네(Jean Genet)의 연극 <발코니>, 새러 케인(Sarah Kane)의 연극 <새벽 4시 48분>, 정영두 안무의 무용 <휘어진 시간>, 장은정 안무의 무용 <육식주의자들>, 이윤정 안무의 무용 <아바나行 간이열차: 여섯을 위한 삼중주> 등 많은 문제작들에서 작곡과 연주를 맡아 주목을 받았다.
EBS의 '스페이스 공감', 원음방송의 '밴드 피플 라디오 스타' 등의 프로그램에도 출연하였다.

끈질기게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근대적 풍경들을 노래하는 <경성연가>, 일상의 허무주의에 대한 우려와 애정이 섞인 착종된 감정을 노래하는 <매뉴얼(Manual)>, 자학 속에 도사린 작은 열정에 관한 노래인 <독의 노래>, 카프카(Kafka)의 동명소설에서 착상된 <단식광대>, 패자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관찰자적 시선을 담은 <서브라이더(Sub-rider)> 등, 그간 20곡 정도의 노래들을 만들고 공연했으며, 현재 첫 번째 앨범 발표를 위해 오랜 시간 많은 곡들을 새로 쓰거나 다듬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나타 수이사이드는 코다파이, 웰에 이어서 그날 세 번째로 무대에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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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9-12-28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님, 마지막 사진이 엑박이에요.

아, 이런 소식을 들을 때 시골사는 한탄을 합니다. 모쪼록 뜻깊은 공연이 되시길 빕니다.

람혼 2009-12-28 20:31   좋아요 0 | URL
앗, 마지막 사진은 클럽으로 링크되어 있는 공연 포스터인데, 제가 볼 때는 '엑박'이 아닌데요, 저한테만 그렇게 보이는 걸까요? ^^;

그나저나 파란여우님의 전언이 참으로 반갑습니다. 저서 출간을 전후하여 그간 많이 바쁘셨죠? 파란여우님의 책을 아주 많이들 보고 계시다는 소문이 있어 저도 왠지 흐뭇하고 반가운 마음을 갖고 있던 차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2009년은 파란여우님께 더욱 특별한 한 해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새삼스럽게 축하드리고, 다시 한 번 응원합니다! ^^

파란여우 2009-12-28 20:37   좋아요 0 | URL
지금은 잘 보입니다 :)

고맙습니다. 알라딘 몇몇 분들의 서재는 제 도서관인데 그 중 한 곳이 람혼님 서재입니다. 알라딘 도서관이죠.

람혼 2009-12-28 23:23   좋아요 0 | URL
아, 잘 보인다니 다행입니다. 한시름(?) 놓았습니다.^^

'도서관'이라는 말씀에 참으로 감사하면서도, 그에 걸맞는 내실이 없는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뒤따릅니다. 파란여우님의 말씀을 채찍과 당근 삼아 2010년에는 좀 더 알찬 서재로 꾸려보겠습니다.

2009-12-30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31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1-01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 님.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작년 한해 독일어까지 알려주셔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람혼 2010-01-01 17:21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원하시는 바 모두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더불어 노이에자이트(die neue Zeit)님의 이름 그대로 정말 '새로운 시대'가 왔으면 하는 바람 함께 전해봅니다!

푸른바다 2010-01-04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님, 좀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너무 바쁘게만 몰아부치지 마시고 좀더 여유있게 하시는 일들을 추진하셨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봅니다^^ 무엇보다 건강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람혼 2010-01-04 15:41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인사가 늦었습니다. 2010년, 푸른바다님의 멋지고 알찬 새해를 기원합니다. 언젠가 함께 남극 여행을 했으면 하는 불가능한(?) 소망도 전해봅니다! ^^
그나저나 정말 제게 필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말씀대로 올해에는 너무 휘몰아치지 않고 좀 더 여유롭게 작업할 수 있도록 마음과 상황들을 조정해보려고 합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조만간 뵐 수 있기를!

푸른바다 2010-01-05 09:19   좋아요 0 | URL
꼭 불가능한 소망만은 아니겠지요^^ 엄연히 지구상에 존재하는 곳인데 불가능이야 하겠습니까?^^ 하지만 람혼님의 마음 속에 있는 그곳은 물리적 그곳이 상징하는 어떠한 극한을 의미하는 것일 터, 그곳은 물리적인 그곳보다 훨씬더 가기 힘든 곳일지 모르지요^^ 하지만 그 곳에 대한 꿈을 꾸는 것이 살아가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도 조만간 뵐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람혼 2010-01-17 08:05   좋아요 0 | URL
며칠 전에 정말로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커다란 배를 타고 남극으로 떠나는 꿈을요... 두터운 방한복에 털모자를 쓰고 있는 제 모습을 보았는데, 이것이 예지몽이기를 기원해봅니다.^^

모딜리아니 2010-04-25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다음 공연에 꼭 가야겠다.
박정희 연출이 한 공연 음악이 람혼씨 꺼였군요.
발코니 봤는데.
번역본 구하느라 엄청 애먹었었는데.

람혼 2010-04-27 03:04   좋아요 0 | URL
Jean Genet의 <발코니>도 보셨군요.
오래 전에 했던 작품이라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발코니> 음악도 제가 작곡하고 연주했었는데,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
다음 공연 때 꼭 방문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