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태영, 장태순, 최정우, 조영일, 장진범, 양찰렬, 홍철기, 강병호,
『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 』, 난장, 2010.
1) 근황 하나: 공저(共著)한 책이 한 권 출간되었다. 현재 가장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8명의 정치철학자들에 대한 책인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난장, 2010)이 바로 그것. 이 책에서 나는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와 그의 정치철학에 대한 글을 맡아 썼다. 이 외에도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샹탈 무페(Chantal Mouffe),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에 대한 다른 필자들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다소 거칠고 범박하게 말하자면, 현대는 말 그대로 '정치철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반면 현대는 결코 '정치'의 시대는 아니다. 현대의 정치철학은 바로 이 '정치-없음'의 사태에 주목하며 또한 바로 이러한 정치적 부재(不在)와 불능(不能)의 사태로부터 다시 태어나고 있다.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현대 정치철학의 가장 근본적 테제인 것. 현대의 정치철학이 가장 첨예하게 문제 삼고 있는 지점은 바로 일견 '탈-정치'의 시대로 보이는 우리의 시대, 그 정치적 시공간의 '불가능성'이다. 이 책 또한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현대 정치철학에 대한 사유의 '탑재'와 '증폭'을 위해서라도 일독을 강권하는 바이다. 이하에서는 이 책에 수록된 랑시에르에 관한 내 글의 서두 일부분을 옮겨놓는다.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부르주아지의 낮보다 아름다운가, 과연?
프롤레타리아트의 낮과 밤. 계급투쟁이라는 '낡은' 관념을 곧바로 연상케 하는 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단어와 하루라는 시간의 경제적 길이를 지극히 '낭만주의적'이고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주는 저 '낮'과 '밤'이라는 단어, 그리고 또한 그들 셋 사이를 맺어주고 있는 저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언어적 조합은 일견 우리에게 하나의 오래된 신화나 전설처럼 실로 닳고 닳은 고색창연한 구절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 프롤레타리아트의 낮과 밤이란 단순히 낭만적 시간성의 형식을 차용한 상징적일 뿐인 은유가 결코 아니다.
자크 랑시에르에게 그런 밤과 낮이란 무엇보다 물질적인 시간 그 자체, 더 정확하게는 한 체제 안에서 감각적인 것들이 분할되고 배분되는 미학-정치적인 시공간을 의미한다.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밤이란 자본주의 체제의 '어두운' 이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밤의 시간, 프롤레타리아트가 낮 동안의 노동을 마친 후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이탈하고 주체화 과정을 감행하는 한에서의 '밤'이라는 시간을 뜻한다. 따라서 그 밤이란 어떤 의미에서 '해방'의 길로 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해방의 시간은 감각적인 것의 밤과 정치적인 것의 낮을 지난다. [下略]
ㅡ 최정우, 「자크 랑시에르: 감성적/미학적 전복으로서의 정치와 해방」
▷ 바디우, 캘리니코스, 이글턴, 제임슨, 지젝, 벤사이드, 쿠벨라키스, 발리바르, 르세르클, 네그리 外,
『 레닌 재장전: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이현우, 이재원, 한보희, 최정우 外 옮김), 마티, 2010.
2) 근황 둘: 공역(共譯)한 책도 한 권 출간되었다. 『레닌 재장전: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마티, 2010)가 바로 그것. 이 중에서 나는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ïd)의 글을 번역했다. 레닌의 '르네상스'라고 해야 할까, 최근 레닌에 대한 재조명 혹은 재해석과 더불어 그에 관한 책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는 와중에서도 이 책은 각별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최근 가장 활발한 이론적 활동을 벌이고 있는 저자들의 면면은 차치하고라도, '진리의 정치'라는 일견 고색창연한 듯 보이는 정치적 '진정성'의 관점에서 이른바 '레닌주의적 제스처' 혹은 '레닌적 몸짓'의 정치적 현재성과 타당성, '위기'와 '혁명'의 개념에 대한 재전유와 재사유를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작년이었던가, 한 신문의 칼럼에서 윤평중 교수는 '이제 진리의 정치를 걷어내자'는 요지의 점잖은(?) 충고를 386 세대에게 던진 바 있었는데, 하지만 과연 우리가 걷어내고 던져버려야 할 것이 정말 '진리의 정치'인가 하는 의구심은 지금도 여전하다). 왜 다시 레닌인가? 왜 다시금 레닌적 제스처를 '장전'해야만 하는가? 이 질문은 특히나 슬라보이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과 『지젝이 만난 레닌(Revolution at the Gates)』이 출간된 이후로부터만 생각해봐도 현대 정치철학의 가장 중요한 물음이 되고 있는 바, 정치와 혁명의 개념이 겪고 있는 어떤 '불가능성'을 사유하고 그 사유의 아포리아들을 '실천'해내는 일에 광범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의 날개에는 번역자들의 대담에서 나왔던 말들 중 일부도 실려 있는데, 그 중 나의 말은 이렇다(기억의 재구성을 통해, 다소 수정해서 말하자면):
왜 레닌을 '다시' 읽을 필요가 생겼을까? 이 점이 중요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또한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단어들을 되새기게 된다. 정의, 당, 조직, 혁명... 이제 마르크스는 오히려 지식인의 세계에 속한 사람, 곧 하나의 사상가이자 고전이 되었다. 하지만 레닌은 여전히 지식인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사상가이다. 그런 점에서 레닌은 문제적이다. 왜 다시 레닌을 읽을 필요가 생겼을까? 다시 한 번 자문하게 된다.
▷ 차근호 작, 김광보 연출, 연극 <루시드 드림>, 산울림소극장, 2010년 1월 12일~1월 31일.
3) 근황 셋: 차근호 작가의 신작 <루시드 드림>이 김광보의 연출로 현재 산울림소극장에서 상연 중이다. 이 연극은 내가 올해 처음으로 작곡한 작업이기도 하다. 당월 31일까지 계속되며, 이남희, 길해연, 정승길 등 내가 평소 경애하는 배우들이 출연한다(월요일 휴관, 화~금: 8시, 토: 4시, 7시, 일: 4시). 이 연극은 일종의 '범죄심리극'의 외양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영감을 얻은 연쇄살인범과 그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사이의 기이한 관계, 그리고 그 혹은 그들의 '자아분열'을 다룬 작품으로, 연초에 관극하기에는 다소 무거운(?) 감이 없지 않지만, 라스콜리니코프(로쟈)와 소냐 사이에 일어났던 어떤 '구원'이 '새로운 인간'을 통해 부정되고 극복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비록 그것이 '최후/최초의 인간'이 지닌 차가운 광기처럼 느껴질지라도 말이다. <루시드 드림>을 위해 작곡한 음악들 또한 개인적으로 만족스럽다. 관극을 권하는 바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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