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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Jenaer Systementwürfe III. Gesammelte Werke, Band 8, Hamburg: Felix Meiner, 1976.
▷ G. W. F. 헤겔, 『 헤겔 예나 시기 정신철학 』(서정혁 옮김), 이제이북스, 2006.  

1) 1격 혹은 주격의 이데올로기
 
우선 독일어의 번역, 아니 사실 거의 모든 인구어(印歐語)의 번역에 따르는 문제로서 '1격' 혹은 '주격'의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두 가지 사례만 들어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헤겔 예나 시기 정신철학>의 84쪽에서 원문 p.186의 "Schatze"는 "Schatz"로, 85쪽에서 원문 p.188의 "Meinen"은 "Meiner"로 바꿔져 병기되어 있다. 첫 번째의 경우는 복수 단어를 단수로 표기한 경우이고, 두 번째의 경우는 2격을 1격으로 바꿔 표기한 경우이다. 
  
① 먼저 두 번째 경우를 살펴보면, 이는 주격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드러내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번역자라면 아마도 누구나 이러한 '주격'의 신화 앞에서 잠시나마 머뭇거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화' 또는 '일반성의 제시'라는 환상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격지배를 기본으로 하는 인구어로부터 교착을 기본으로 알타이어로의 이행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고민이기도 하다. 따라서 1격 또는 주격으로의 변형 병기는 일종의 용단, 용감한 선택, 과감한 번역과 '번안'의 결단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용감하다'와 '과감하다'라는 형용사에 어떤 긍정적인 부가가치가 따로 매겨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 가지 착각해서는 안 되는 문제는, 번역이 아니라 '단순한' 병기가 문제가 될 때 오히려 이러한 표기법의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돌출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병기 또한 전혀 단순할 수만은 없는 것이며 중립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의 새삼스럽다면 새삼스러울 발견과 인식,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또 하나의 '부가적인' 문제를 제기하자면 이렇다: 예를 들어 "Meinen"을 "Meiner"로 [격]변형시켜 병기하는 것은 'Ur-text'의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원문 그대로' 표기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나는 원문주의자, 텍스트지상주의자는 아니다. 뭐, 어쩌면, 혹은 그런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러한 '부가적인' 문제가 원문주의자의 주변을 감싸며 제기되는 문제는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② 첫 번째의 경우 역시 기본적으로 '주격'의 신화 또는 '기본형'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복수형태의 기본형은 단수라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물론 이데올로기의 이러한 작동이 베일을 벗을 때 그것은 이미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이 역시, 조금은 다른 층위에서이긴 하지만, 두 번째 경우와 동일한 문제들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역시 '부가적인', 그러나 보다 더 메타적인 문제 하나를 더 야기시킨다: 두 번째의 경우, 곧 격지배의 '기본형'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첫 번째의 경우, 곧 단/복수의 '기본형'이라는 이데올로기의 '기본형'인가?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사례들은 어떤 위계로 구획되고 조직되어 있는가, 혹은 있어야 하는가? 다시 한 번 곁가지를 치자면, "있어야 하는가?"라는 당위적 물음은, 다시 한 번 독일어를 차용해볼 때, 'sollen'의 물음이어야 할 것인가, 혹은 그래야만 하는가? 

 
2) 다산과 공포: 생산적이거나 혹은 무시무시하거나
 
이 책에는 중대한 오역이 하나 있다. 국역본 84쪽 17행의 "생산적일 수fruchtbar 있는 밤"은 원문(p.187:8)의 "furchtbar"에 대한 오독(誤讀) 또는 실독(失讀)인 것이다. "무시무시한 밤" 혹은 "무시무시하게 된 밤"([...] die furchtbar wird)으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 문자에 대한 잘못된 판독으로 "생산적인 밤", "생산적일 수 있는 밤"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오역이라는 지적을 넘어 이러한 번역 또는 번안을 징후적으로 독해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무시무시한 '세계의 밤(die Nacht der Welt)'에 대한 저 유명한 헤겔의 문장이 이토록 '생산적'으로 보이는 사례는 다시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질문들은 이렇다: 'furchtbar'를 'fruchtbar'로 잘못 판독하는 것, 곧 '오인'하는 것은 단순한 환시인가, 아니면 어떤 종류의 심리적 과정으로서의 치환인가? 이것은 어쩌면 하나의 강박일까? 이러한 강박증은 가역적일까 비가역적일까?
 
재미있는 것은, 과실(果實)이 많다는 것, 그것은 곧 생산적이라는 사실, 하지만 동시에 또한 그것은 무시무시하다는 사실이다. 과실(果實)이 많다는 것은 또한 과실(過失)이 많다는 말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무시무시하면서 또한 동시에 생산적인 밤이야말로, 헤겔의 저 '세계의 밤'에 대한 가장 합당한 설명이자 해석이 아니겠는가.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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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었던 자크 라캉(Jacques Lacan) 관련서들 중에서 다음 두 권의 입문서는 단연 돋보였다:

1) 숀 호머(Sean Homer), 『 라캉 읽기 』(김서영 옮김), 은행나무, 2006.
2) Slavoj Žižek, How to Read Lacan, New York: Norton, 2007[American edition] .



1) 먼저 숀 호머의 책은 아주 가독성이 뛰어나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비교적 적은 분량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라캉의 대표적인 주제어들(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팔루스, 무의식, 성차 등등)을 중심으로 매우 집약적이면서도 또한 통시적인 부분도 놓치지 않는 서술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어느 정도 프로이트와 라캉의 글들에 익숙한 독자들이 그렇지 못한 독자들보다 더 얻을 것이 많은 책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모든 '입문서'들의 '자기지시적' 혹은 '메타적' 문제가 그 책 한 권만으로는 결코 해당 주제에 '입문'할 수 없다는 것임을 떠올려볼 때, 이는 사실 모든 입문서들의 존재론적 한계 내지는 축복이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무엇보다 입문서는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책이 아니라 다른 독서로 향한 여러 갈래의 길들을 열어주는 책이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Freudian-Lacanian [L]ink' 또는 정신분석의 'hypertext'를 향한 욕망을 일깨워주는, 보기 드물게 훌륭한 입문서의 미덕을 갖추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의 내용은 서문에서 저자가 밝혔던 기우ㅡ라캉이 전생애에 걸쳐 수정하고 발전시켰던 정신분석 이론의 다양성을 어떻게 한 권의 작은 입문서에 담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ㅡ를 잠재우고도 남음이 있다.

2) 지젝의 책은 출간이 예고되었을 때부터 이미 상당한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 본격적인 지젝의 저작이라는 점보다는 이른바 "How to Read..."라는 입문서 장르를 그가 어떻게 소화해낼지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결론은 뭐랄까, 역시 지젝은 지젝이었다는 것?! 지하철을 오가며 한달음에 완독할 수 있는 재미를 갖추고 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설명은 어쩌면 지젝에게는 너무 뻔한 찬사일지도 모르겠으니,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련다('I' will not do so)! 이 책은 단순한 입문서나 해설서의 지평을 뛰어넘어 『삐딱하게 보기』의 신판 축약본과도 같은 인상까지 주고 있다. 라캉-지젝의 주요 개념과 논리들이 한 페이지 안에서도 수도 없이 튀어나오는 보기 드문 장관을 목격하게 된다는 점만 지적해두자.

하지만 다시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지젝의 저작들이 거의 언제나 '가벼운' 입문서와 '무거운' 본격서 사이를 왕복하거나 그 둘을 접붙이고 흘레붙여왔음을 기억해볼 때, 이러한 지젝만의 방식으로 씌어진 '입문서'가 그리 새삼스러울 것까지는 없다.

오히려 이 책이 입문서의 미덕을 지니고 있음은, 모든 입문서의 필수항목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Suggestions for Further Reading'에서 보다 '전형적으로' 잘 드러난다. 거기에서 지젝은 라캉의 『에크리(Ecrits)』에 수록된 글들과 관련 세미나들을 함께 읽는 일종의 '병행-연결 독서법'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는 라캉을 인구어(원어인 불어 또는 번역어인 영어)로 본격적으로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특히 유익한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여 다음의 책도 주목을 요한다:

3) 박찬부, 『 라캉: 재현과 그 불만 』, 문학과지성사, 2006.



3) 이 책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논평은 되도록 삼가고,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실재계에 대한 라캉 이론의 변화 추이에 대한 언급을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이 책의 전체 내용은 바로 이러한 실재계의 '두 얼굴' 또는 '죽음충동' 개념을 둘러싸고 구획되어 있다는 인상이다:

"그[라캉]는 일차적으로 균열과 결핍이 없는 충만이라는 관점에서 실재를 서술한 반면 후년에는 이와 거의 정반대로 그것의 트라우마적 성격, 불가능성과 아포리아라는 관점에서 실재에 접근한다.
전자는 프로이트의 메타포를 빌려 전인미답의 땅이나 해도가 그려져 있지 않은 바다와 같은 언어 이전의 '전상징적pre-symbolic' 실재가 존재하고ㅡ이것은 가설적 측면이 강하다ㅡ그 위에 상상적 재현이나 상징적 재현 작업이 이루어졌을 때 이러한 재현 작업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며 뒤에 남는 어떤 것, 다시 말해서 재현화 과정 속에 언제나 상실한 것으로 드러나는 어떤 '직접성'의 영역 같은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실재에 대한 '후상징적post-symbolic' 접근법으로서 그것은 재현 체계의 '밖'에 있는 기존적 실체가 아니라 재현 과정의 결과적 산물이며 '잉여 효과'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렇게 상징화·형식화의 한계 지점에서 생성되는 후상징적 실재는 그 상징 질서의 '안'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그것에 환원될 수 없는 '외-존재성'을 보이는 역설적 존재로 드러난다."(14-15쪽)

인용으로만 만족하겠다는 약소한 약속을 어기고 기어코 사족을 붙이자면, 라캉 후기의 이러한 실재계에 대한 강조 또는 실재계 이론의 변화는 전기 이론의 '본질주의적' 또는 '환원론적' 성격ㅡ또는 그러한 오해ㅡ을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라캉 후기의 '불가능한(impossible)' 실재는 특히 바타이유(Bataille)가 사고하였던 에로티슴의 문제 또는 바타이유적 '유물론'의 문제와 결부될 때 또 다른 강력한 이론적 폭발력을 가질 것이라는 기대와 전망을 갖고 있다(라캉 탄생 100주년에서 1년 늦은 시점에 출간되었던 국내 필진의 저작집 『라깡의 재탄생』(창작과비평사, 2002)이 다소 불만족스러운 부분적인 이유도 이러한 개인적인 기대와 전망이 반영되지 못했음과 맞닿아 있다). 라캉과 바타이유 사이에서 일어난 전기적 또는 이론적 '사건들'에 관한 연구는 아마도 두 인물의 사유 안에서 이러한 '불가능성'을 함께 사유할 때 열리게 되는 또 하나의 소중한 이론의 장이 되리라는 기대와 전망이 그것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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