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柄谷行人, 『 思想はいかに可能か 』, 東京: インスクリプト, 2005.
1)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초기 비평집 『사상은 어떻게 가능한가(思想はいかに可能か)』를 주섬주섬 읽다가, 문득 내가 몇 개월 전에 썼던 글 한 편이 생각났다. 이에 『텍스트』 2010년 3월호에 기고했던 글을 뒤늦게 이곳에 옮겨 놓는다(이런 식으로 업로드 준비만 해놓고 아직 이곳에 따로 올리지 못한 글들은 점점 쌓여만 가는데─이러한 '축적된 지연'의 이유는 무엇보다 내 글에 대한 나 자신의 지독한 '결벽증' 때문이겠지만, 나는 최근 나의 '조급한 무력증'으로부터도 탈출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나는 다만 조만간 이 모든 글들을 이곳에 차곡차곡 풀어놓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글은,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의 주류(!) 출판사들이 경쟁적으로 펴내고 있는 소위 '세계문학전집'의 성격을 일별해보고, 그를 통해 '세계문학'이라는 개념을 문제적이고도 논쟁적인 방식으로 살펴보고자 했던 글이다. 나는 이 글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그만큼의 많은 논의들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랐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못했다(그 이유는 아마도 물질적으로는 매체와 그 파급력의 문제 때문일 것이고, 이론적으로는 내 글이 지닌 이론적 아포리아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몇몇 출판사들은 나의 이러한 논의 자체를 불편하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나는 그 출판사들에게 오히려 묻고자 하는 것이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세계문학'이란, '세계'와 '문학'의 개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가장 간단한 질문 하나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면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의 책을 수백 권, 수천 권 낸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그러나 이에 관해 여전히 누군가는 대답하고 있으며, 또한 누군가는 계속 질문하고 있다). 모든 '세계문학전집'들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자신만의 대답으로 응답한 후에 책을 팔아야 할 것이고, 또한 독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을 들은 후에(혹은 독자 스스로 자신만의 질문을 물은 후에) 비로소 책을 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무언가를 '팔고 사는' 일이 대저 그러할진대, 말하자면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순수한 [듯 보이는] 정의(定義, definition)의 문제는 곧 '세계문학은 어떤 형태와 방식으로 판매되고 유통되는가'라는 어떤 정의(正義, justice)의 문제가 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정의'의 문제는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고 오직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만 유효하다. 가장 '문제적인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이하의 글은 무엇보다 '세계문학'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우리 시대의 희극론' 같은 것으로 가장 먼저 읽혀야 하지 않을까, 일단은 그렇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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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텍스트 』, 2010년 3월호(통권 44호)
세계문학의 이름으로: 낯선 '세계'와 낯익은 '문학'
최 정 우 (작곡가/비평가/번역가)
1. 오래된 책장을 넘기며:
'세계문학'은 무엇이었나?
누렇게 빛이 바랜 책장을 열어 20년 전의 글을 다시 읽어본다. 1990년─그러니까 이제 1990년대도 어느새 20년 전의 시간이 되었다는 이야기인데─금성출판사에서 간행되었던 『세계문학대전집(世界文學大全集)』(전120권)의 발간사에서 편집위원들은 이 전집의 출간을 위한 변을 다음과 같이 다소 거창하고 고색창연한 어투로 밝히고 있었다.
"말이 있어 생각이 표현되니, 비로소 노래가 있고 사상이 있고 문명이 발달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와 역사, 종교와 사유의 기원을 말에서 찾는 것도, 말 속에 인간의 본향이 있기 때문이리라. '세계문학'은 그 말의 바다요, 생각의 하늘과 땅이요, 역사의 형상이요, 미래의 비전이다. […] '세계문학'은 말의 편린이 아닌 총합이며, 집대성인 까닭에 인간의 전영역이다. 인간이 지향하는 사랑과 평화와 구원의 기원이 담긴 또 하나의 바이블이다."
다 읽고 나니 실로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이보다 더 원대하고 더 이상적인 인류의 기획이 또 있을까? 이 발간사 속에서 '세계문학'은 창해와 천지의 규모를 가뿐히 뛰어넘어 인간적 사유와 실천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엄청난 개념이 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문학은, 그리고 세계문학은, 마치 한 권의 바이블을 짓는 것과 같은, 한 벌의 세계를 짓는 일과도 같은, 일종의 '창조'와 맞먹는 중량감을 지닌 무엇이 되고 있는 것.
그런데 이러한 거대한 개념의 '세계문학'은 우리에게 두 가지 종류의 거대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먼저 역사적이고 분류법적인 관점에서의 착각이 있다. 인류 문명의 작은 일부분에 불과한 '문학'이라는 영역 혹은 장르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인류의 행보를 전체적으로 규정짓는 문화사적 보편개념이라고 침소봉대해 생각하게끔 할 수 있는 사상적 폭력의 위험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으로, 첫 번째 착각의 당연한 귀결로서, 상업적인 혹은 경제적인 관점에서의 착각이 있다. 이 전집들만 완벽히 독파한다면 전 인류의 보편적 사유를 곧바로 체득하리라 믿게끔 만들 수 있는 과장된 광고의 폐해가 바로 그것이다(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세계문학전집'이라는 근대적 편제가 지닌 가장 '보편적'인 믿음이자 소망일 것이다). '세계문학'의 거대하고도 보편적인 중요성을 강변하고 강권하고 있는 저 발간사는 말 그대로 지극히 상업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광고 문구임과 동시에 지극히 상징적인 의미에서도 일종의 '경제적인' 프로파간다가 되고 있는 것인데, 이는 바로 여기서 '세계문학'이라는 개념이 지닌 가장 지독한 근대성의 징후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보편적이고 예술적으로 조탁해낸 언어적 구성물의 '최고정점'이 세상을 포착하고 재현하며 지배한다는, 그리고 세계는 문학으로써 주어지고 해석되며 다시금 갱신된다는, 저 유서 깊은 근대[문학]성의 거대서사. 괴테(Goethe)가 이른바 국민문학의 특수성과 인류적 보편성의 이상적 합일로서 일반적 '세계문학'의 개념을 제시한 이래, 우리에게 '세계문학전집'은 우리 가정의 가장 '내밀한' 정신적 영토인 책장의 안 보이는 저 구석 끝까지 파견된 근대성의 특파원, 우리 삶의 근대성이 지닌 알리바이의 적극적 옹호자이자 변호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세계문학전집' 한 질(帙)은 곧 그러한 근대적 담론과 생활의 풍경을 잉태하고 재현하며 애도하기 위한 하나의 질(膣)이기도 했으니.
▷ 괴테, '세계문학'의 창시자?
2. 우리의 몇몇 '세계문학전집'들: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불과' 20년 전인 1990년대까지도 '잔존'했던 저 고색창연한 근대[문학]성의 거대서사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사상적 광풍을 거친 우리 시대에 과연 완전히 사라지기만 했던 것일까? 오히려 세계문학은 '여전히' 하나의 유령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유령은 단지 유령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다시 새로운 옷을 걸치고 익숙한 몸을 입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세계문학'이라는 이 유령을 기억하고 다시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것이 '유령'이기 때문에, 곧 그 유령이 부활하여 다시금 우리 주변에 출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국내의 여러 굵직굵직한 출판사들이 경쟁적으로 '세계문학전집'을 다시 내놓고 있는 현상이 바로 그러한 출몰의 풍경일 터. 물론 이 세계문학전집들은 기존 전집들의 관행과 타성을 타파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으며 그러한 의지는 몇몇 참신한 목록들을 통해서도 강조되고 있는 바이다. [여기서 잠시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을 밝히자면, 민음사 전집에서는 곰브로비치(Gombrowicz)의 『페르디두르케』와 『포르노그라피아』, 콜테스(Koltès)의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핀천(Pynchon)의 『제49호 품목의 경매』, 케루악(Kerouac)의 『길 위에서』 등이(왜 이 전집의 42권이 그람시(Gramsci)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서 릴케(Rilke)의 『말테의 수기』로 바뀌게 되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문학동네 전집에서는 로스(Roth)의 『휴먼 스테인』이, 대산 전집에서는 스턴(Sterne)의 『트리스트럼 샌디』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행인』 등이, 창비 전집에서는 폴란드 편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가, 펭귄 전집에서는 가르시아 로르카(García Lorca)의 『인상과 풍경』, 버로스(Burroughs)의 『퀴어』와 『정키』 등이 특히 반가운 목록들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전집들이 권두나 권말에서 제시하고 있는 출간의 변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출사표'야말로 그 전집의 출간이 기반하고 있는 문학적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직접적이면서도 은밀한 징후이기 때문이다.
▷ 비톨트 곰브로비치, 『 포르노그라피아 』(임미경 옮김), 민음사, 2004.
▷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임수현 옮김), 민음사, 2005.
▷ 안토니오 그람시, 『 감옥에서 보낸 편지 』(린 로너 엮음, 양희정 옮김), 민음사, 2000.
먼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밝히고 있는 출간의 변을 읽어보자: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 「두시언해」가 단순한 번역 문학이 아니고 당당한 우리의 문학 고전이듯이 우리말로 옮겨 놓은 모든 번역 문학은 사실상 우리 문학이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문학을 자임하며 오늘의 독자들을 향하여 엄선하여 번역한 문학 고전을 선보인다. 어엿한 우리 문학으로 읽히리라 자부하면서 새로운 감동과 전율을 고대하는 젊은 독자들에게 떳떳이 이 책들을 추천한다."
먼저 이 발간사가 힘주어 이야기하고 있는 번역의 문제와 세대의 문제는 여기서는 잠시 건너뛰도록 하자(그러나 이렇게 건너뛴 번역과 세대의 문제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의문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 이 문장들 속에서 나의 주목을 가장 강렬하게 끄는 것은, 일견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는, 그래서 오히려 일부러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결코 '보이지 않을' 그런 사소한 단어들이다. 그것은 곧 "당당한", "어엿한", "떳떳이" 등, 일견 부차적으로 보이지만 단연 이 발간사의 핵심적인 어조를 담고 있는 단어들인 것. 이 말들은 '세계문학'과 '우리문학' 사이에 놓인 어떤 시차(時差/視差), 어떤 알리바이를 드러내면서도 또한 동시에 감추고 있다. 왜 그러한가? '세계문학'에 동참하지 않는 한 '우리문학'은 한없이 초라하고 피폐하며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발간사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세계'와 '문학'의 개념에 관한 하나의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복속되어 있는 어떤 '희망사항'에 다름 아니다. 그 '소박한' 희망에 따르자면 '우리문학'은 어엿하게 '세계문학'과 당당하고 떳떳하게 어깨를 겨루어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대의를 위해 '세계문학'은 '우리문학'의 바깥에 있는 어떤 거대한 타자가 되어야 함과 동시에 그로 회귀하고 귀속되어야 할 하나의 절대적 동일자로서 등장하고 있는 것.
▷ 필립 로스, 『 휴먼 스테인 1 』(박범수 옮김), 문학동네, 2009.
▷ 로렌스 스턴, 『 트리스트럼 샌디 1 』(홍경숙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1.
▷ 나쓰메 소세키, 『 행인 』(유숙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1.
이번에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이 밝히고 있는 출간의 변을 읽어보자(이는 '세계문학'에 대한 일종의 '확인사살'이 되고 있는데):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변방에서 누리던 고요한 평화는 곧 아득한 과거의 추억이 될 것입니다.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중심부로 진입할수록 세계문학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이방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 타자로서 반성적 거울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 세계문학전집은 한국문학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문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젖힐 것입니다."
자, 이 문장들 속에서 '세계문학'의 개념을 둘러싸고 가장 첨예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른바 '중심부로의 진입'이냐 '변방에의 낙오'냐 하는, 문학적이고 역사적으로 지극히 실존적이면서도 생존적인, 선택적이면서도 결코 선택적일 수 없는 하나의 '선택적' 물음이다(그리고 이러한 생존과 선택의 물음은 또한 우리가 왜 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여 소식에 관심을 기울이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되기도 한다). 곧 여기서 세계문학의 문제는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되는 세계체제의 대리전, 정치-문화적 헤게모니 투쟁의 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발간사의 이러한 문법대로라면, 오히려 발간사의 저 문장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사실 '세계문학'의 변방에 머물러 있던 [것으로 생각되는] '우리문학'은 결코 한 번도 "고요한 평화"와 "아득한 추억"의 아련하고 느긋한 느낌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 되어야 한다). 이 발간사가 말하고 있는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새로운 시야"란, 그것이 이미 그 자체로 세계문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특정한 패러다임을 전제하고 있는 한에서, 결코 새로운 것이 될 수 없다. 중심부와 변방의 대립/해소란 곧 보편성과 특수성의 대립/해소라는 전제로부터 바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지극히 '근대적인'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 타데우쉬 보로프스키(外), 『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정병권, 최성은 옮김), 창비, 2010.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 인상과 풍경 』(엄지영 옮김), 웅진씽크빅, 2008.
▷ 윌리엄 버로스, 『 정키 』(조동섭 옮김), 웅진씽크빅, 2009.
창비 세계문학전집의 경우는 이러한 도식의 보다 직접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하겠는데, 아예 문학의 국가별 분류법을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듯한 편제(영국 편, 미국 편, 독일 편, 스페인/라틴아메리카 편, 프랑스 편, 중국 편, 일본 편, 폴란드 편, 러시아 편)가 그러하다. 바로 여기서 이 세계문학전집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와 '문학'의 의미나 범위가 드러나고 있는 것. 대산 세계문학총서의 경우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은 '고전'의 초역을 목표로 한다는 변별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 총서가 앞서 내가 문제 삼았던 '세계', '문학', '세계문학'의 개념을 새롭게 사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소위 '정전(正典)'으로서의 고전이라는 기준은 여전히 유효하며 권장되고 발굴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곧 현재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세계문학'의 이데올로기란 어쩌면 언제부터인가 계속 동일하게 유지되어온 하나의 유서 깊은 '편견'일지 모른다. 그러한 '세계문학'이란 '우리문학'이 민첩하게 포착하고 근원적으로 귀속되어야 할 어떤 "본향(本鄕)"으로 상정된 영역, 특수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러한 특수성을 넘어서 도달해야 할 하나의 보편성으로 설정된 지점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세계문학전집'들이 담고 있는 담론의 기본적 내용은 20년 전의 문법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오히려 '문학적'이라기보다는 더욱 '정치적'이고 '경제적'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더 넓게는 그 20년 전의 문법 또한 보다 광범위한 '근대문학'의 규범과 분류법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문학전집'을 구성하는 '진정한 고전'의 형식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그 전집의 발간사 속에서 발견되는 무엇이다. 그래서 그 '고전'들은 국가의 역사와 민족의 문학이 어떤 특수성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세계적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근대적이고 변증법적인 길에 대해 실로 주옥같은 '명대사'들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동시대의 역사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서 동참하고 있다는 거대한 역사적 환상을 불러일으켜주는 저 명대사들에, 우리는 아마도 거의 모두 깜빡 속아 넘어갈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문학'을 읽고 있다는, 그래서 우리는 변방이 아니라 중심에 있다는, 또한 그래서 우리는 저 '세계'와 '문학' 앞에서 비굴하지 않고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다는 하나의 거대한 환상. 내가 '세계문학전집'에서 목격하고 체감하는 것은 바로 이 거대한 환상의 거스를 수 없는 매력과 위험이다. 따라서 지금 나에겐, 가장 오래되었지만 또한 가장 절실한 하나의 질문을 다시 묻는 일이, 더욱 시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근대, 국민, 국가, 문학을 둘러싼 물음들:
'세계문학'이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따라서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근대적인, 너무나 근대적인 물음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그것이 '세계'의 개념과 '문학'의 개념을 동시에 다루고 있는 것이기에, 또한 그 자체로 근대를 넘어서는 물음이 되고자 한다. 따라서 결국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근대적이면서도 탈근대적인 지극히 '문제적'인 물음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 하나의 질문을 구성하는 세 가지 부속적 질문들을 다시금 지극히 '새삼스럽게' 던져보고자 한다. 첫째, '세계'의 개념이란 무엇인가? 이는 외견상 '세계'의 정의를 직접적으로 묻고 있는 물음이지만, 그렇기에 동시에 또한 국가, 민족, 국적의 의미를 그 배음으로 깔고 있는 물음이기도 하다. 세계의 개념과 정의는 현재의 국민국가 체제와 세계화라는 패러다임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문학'의 개념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왜 '세계문학전집'의 주요성분을 이루는 것은 시나 희곡이 아니라 소설인가? 이 문제는 근대의 문학적 형식과 세계문학의 개념이 탄생하게 된 문화사적이고 경제사적인 문제와 그 궤도를 같이하는 것이다. 셋째, 따라서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세 번째 물음은 다시 세 개의 물음으로 나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국가, 민족(국민), 국경, 국적의 개념을 넘어서는 비(非)-장소(비-국가), 난민(비-국민), 경계(사이), 무국적의 문학을 설정하고 상상하고 실행할 수 있는가? 둘째, 소설이라고 하는 지극히 '근대적'인 장르를 넘어서는 또 다른 장르, 또 다른 형식, 또 다른 문학적 지형을 우리는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창출할 수 있는가? 셋째, 세계문학의 '진정한' 형태는 과연 존재하는가? 곧, 우리는 '문학'을 통해 어떻게 '세계'와 만날 수 있는가, 혹은, 우리는 '세계'라는 개념을 어떻게 '문학'을 통해 변혁하고 쇄신하며 따라서 새롭게 창안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세계문학'이라는 개념과 '세계문학전집'이라는 편제는, 우리에게 이러한 근대성의 물음들을 첨예하게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만, '보편적' 문제의 형식일 수 있다. '우리'는 '세계'를, 그리고 '우리문학'은 '세계문학'을, 어떤 정치 아래에서 어떤 미학으로 정의하고 재현하며 추구하고 있는가? 곧 이러한 '문학적' 물음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정치적' 물음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의 '세계문학전집'이란 그 자체로 '제3세계적'인 형식의 대표적 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구미(歐美)에서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세계문학전집'의 체제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구조의 문제이며 더 적확하게는 세계체제와 헤게모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그리고 극단적으로 말해, 구미에서 '세계문학'이 문학적 보편성의 알리바이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인류학적' 사례들의 어떤 수집벽(蒐集癖)을 의미한다면, 한국에서 '세계문학'이란 그러한 보편적 알리바이에 조급히 동참하고 동일화되고자 하는 '식민지적' 사후약방문의 어떤 도벽(盜癖)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문학'이란 그 자체로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국가별로 특수하며 차별적인 체계를 갖는 것이며, 우리의 '세계문학전집'은 그 자체로 '세계문학'인 것이 아니라 '우리문학'의 특수성과 그 특수성에 대한 어떤 근대적 열등감이 드러나고 있는 징후인 것이다. 세계문학은 만국공통의 언어도 아니고 국제표준의 분류체계도 아닌 것. '우리의' 세계문학 개념이 하나의 '징후'이며 또 그런 '징후'로 읽힐 수 있는 이유는, 첫째, 그러한 세계문학이 '세계적으로' 국민국가들 사이의 위계와 서열과 헤게모니 관계가 어떤 순서로 어떻게 정렬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국가적' 투시도이기 때문이며, 둘째, 또한 그러한 세계문학은 '국내적으로' 그러한 투시도가 특정한 '민족적' 방식으로 왜곡되고 곡해되어 변형/전유된 하나의 '이식문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세계문학전집'이란, 말 그대로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광범위한 대외용/국제용이 아니라, 우리문학의 '보편적 알리바이'를 위한 편협한 대내용/국내용의 '세계문학'일 뿐이다('세계문학전집'이 지닌 이러한 '국내성'의 문제는 바로 그러한 '고전'들이 '학생들의 논술시험에도 좋다'는 식으로 선전되는 '교육적' 광고 문구에서 가장 천박한 형태로 드러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이러한 '세계문학전집'이 과연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재생산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2008년 홀베르그 국제기념상 수상 강연에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이러한 '세계문학'의 대외성과 국내성 혹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를 "세계문학은 외무부를 두고 있는가(Does world literature have a foreign office)?"라는 다소 도발적인 물음으로 정식화한 바 있다. 문강형준 옮김, 「세계문학은 외무부를 두고 있는가?」, 『자음과모음』, 2009년 가을, 1109-1124쪽 참조.]
▷ 강연 중인 프레드릭 제임슨.
이를 위해 먼저 서로 성격이 전혀 다른 몇 가지 질문들을 두서없이 던져보도록 하자(그런데 이 질문들의 '성격'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포착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이 질문들이 그렇게 '두서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저 '세계문학'이라는 거대한 근대성의 문제가 지닌 '문제적' 지평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박경리의 『토지』와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세계명작소설'인가 아니면 '한국대표문학'인가? 박상륭의 문학은 '세계문학'인가 아닌가, 혹은 그의 문학은 그 자체로 '세계적'인가 아니면 '한국적'인가? 바로 어제 갓 등단한 한국작가의 소설은 '세계문학'의 범주에 속할 수 있는가?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사드(Sade)의 『소돔 120일』은 동일한 위계에 놓일 수 있는 '세계문학(들)'인가? 바로 이러한 질문들이 곧 세계문학이 지닌 보편성과 특수성, 세계전체와 국민국가, 국제 언어와 민족 언어, 고전의 정의와 시대의 성격 등 모든 '세계-문학적' 물음들의 부분-전체인 질문들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문학전집'들은 이러한 물음들을 묻고 있는가? 아니, 그러한 물음들을 물을 수 있는 체제와 편제를 그 자체로 갖고 있는가? '세계문학'이 무엇인지 묻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 질문들에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질문들이 있다.
▷ Sade, Œuvres complètes du Marquis de Sade, tome 1, Paris: Pauvert, 1986.
▷ 박지원,『 열하일기 1 』(김혈조 옮김), 돌베개, 2009.
▷ 박지원, 『 연암집 上 』(신호열, 김명호 옮김), 돌베개, 2007.
말하자면, '사드와 함께(avec Sade) 박지원을...'이라는 '세계문학적' 설정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4. 차이와 불일치들의 '전집'을 위하여:
어떠한 '세계문학'을 요청해야 하는가?
그리하여 묻자면, 우리의 '세계문학'은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격렬히 반대했던 시애틀 시위와 함께 행동할 수 있는가? 우리의 '세계문학'은 아이티의 비극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가? 우리의 '세계문학'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과 코펜하겐 기후협약의 문제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만약 우리의 '세계문학'이 이러한 문제들에 답할 수 없다면, 아니 이러한 문제들을 물을 수조차 없다면, 우리에게 그러한 '세계문학'이란, 아니 그저 '문학'이란, 도대체 어떤 보편적 의미를 띨 수 있는가? 나는 여기서 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에 관한 논쟁을 새삼 반복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세계문학이라는 거대서사가 지닌 어떤 '보편성'을 건드리는 것이라면, 동시에 우리는 그 세계문학의 '특수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되물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저 '당당하고 떳떳하며 어엿하기까지 한' 세계문학은, 용산참사에서 죽어간 영혼들을 함께 애도할 수 있는가? '법치(法治)'라는 이름을 참칭하여 외려 '법치(法癡)'와 '법치(法恥)'의 나라를 만들고 있는 현재 우리의 '국민국가'에 대해, 우리는 '세계문학'의 이름으로 묻고 또 답할 수 있는가?
물론 누군가는 이 지점에서 내가 세계문학이 지녀야 할 어떤 '현재성'을 너무 즉물적으로 사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사회 반영적 문학이나 현실 참여적 문학의 중요성 또는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문학은 단순한 물리적 실천이나 프로파간다가 아니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기에. 다만 내가 바라는 '세계문학'이란, 내가 소장하고픈 '세계문학전집'이란, 이러한 물음들에 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혹은 최소한 이러한 물음들을 물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문학이란 어쩌면 일종의 비교문학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비교문학'이란 일반적 학제로서의 다국적 문학들 사이의 비교연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비교'란 허구적 보편성의 완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잡다하고 불편한 차이들의 확인을 위해 필요한 무엇이다. 그리고 만약 세계문학이 존재할 수 있고 또 존재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이 불편한 차이들과 불일치들의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요청될 수 있고 또 요청되어야 하는 이 차이와 불일치의 '세계문학전집'이란 어쩌면 그 자체로 불가능의 기획을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세계문학은 없다' 따위의 부정적이고 확정적인 언사를 내뱉으며 어설픈 포스트모던의 몸짓을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문학은 존재하며, 그러나 동시에 지금 존재하는 방식이 아닌 어떤 다른 형태로 존재하기를 요청받고 있다. 문제는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이며 또한 그 '문학'이 어떤 문학이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적'이고도 '문학적'인 요청으로부터 한 순간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세계문학'이 우리에게 불편하게 묻고 있는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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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리 이글턴, 『 문학이론입문 』[구판](김명환, 정남영, 장남수 옮김), 창작과비평사, 1986.
▷ 테리 이글턴, 『 문학이론입문 』[개정판](김현수 옮김), 인간사랑, 2001.
▷ 테리 이글턴, 『 우리 시대의 비극론 』(이현석 옮김),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6.
▷ 피에르 마슈레, 『 문학 생산 이론을 위하여 』(배영달 옮김), 백의, 1994.
▷ Jacques Rancière, Politique de la littérature, Paris: Galilée, 2007.
▷ 자크 랑시에르, 『 문학의 정치 』(유재홍 옮김), 인간사랑, 2009.
2) 그러므로 내게는 몇 가지 '다시 읽기'가 가능하고 또 필요할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의 문학론,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의 문학론,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문학론 등이 그러한 읽기의 재료가 될 터. 이는 또한 일반화된 문제설정으로서의 '문학의 정치'를 다시 읽기 위한 작업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다시 읽기'의 작업이란, 가장 먼저 '문학'의 개념 바로 그 자체를 직접적인 목표로 삼는 것이겠지만, 또한 무엇보다 저 '문학'이라는 개념의 주위를 에둘러 가는 우회(détour)와 귀환(retour)의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말하자면, 이택광 선생은 최근 자신의 블로그(http://wallflower.egloos.com/3416668)에 내 글이 지닌 성격과 전망에 관해 소중하고 감사한 고견을 제시한 바 있는데, 내가 항상 경계하며 혐오해 오고 있는 부분이 바로 그가 염려하는 저 '문학비평으로의 흡수'라는 지점임을 생각해보면, 그의 견해는 상당히 날카로운 데가 있다고 하겠다. 이택광 선생의 말 그대로, "사유의 형식으로서 현실을 드러내는 에쎄(essai)의 본령을 장르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 자체로 글쓰기가 내게 의미하고 제시하는 어떤 절체절명의 문제이다. 이 점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은 내게는 참으로 감사하고 소중한 일이다(子曰,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 했거늘, 역시 나는 '군자'가 되기에는 아직 한참 모자란 모양이다). 이에 그의 글에 힘입어 다시 내 신발끈을 조여 묶는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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