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북매거진 『텍스트』 2009년 5월(40호).

*) 월간 북매거진 『텍스트』 2009년 5월호(40호)에 기고했던 글을 옮겨놓는다. 이 글은 알튀세르의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재출간에 부쳐 올해 1월쯤에 썼던 서평인데, 잡지 자체가 다소 늦게 출간되는 바람에 이제서야 이곳에 공개한다. 『텍스트』에는 "자서전의 (불)가능성에 대한 반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재출간을 반기며"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이하에서는 내가 원래 붙였던 제목을 복원하였다. 내가 음악을 작곡했던 연극이 도쿄(東京)의 무대에 올려지는 연유로 해서, 며칠 동안 일본으로 공연 여행을 떠난다. 이 글을 포함해 이하 두 개의 글을, 역시나 이곳에 장승처럼 세워두고, 나는 길을 떠난다. 그런데 돌이켜보자면, '법적 정상성'이란, 비단 자서전이라는 글쓰기의 형식 안에서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는 세관에서도, '국민'과 '국적'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고 적용되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정신분석이란, 그리고 그러한 정신분석과 결합된 법이란, 역설적이게도 그 자체로 얼마나 '국제적'이면서 동시에 '국가적'인가.
ㅡ 2009.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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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을 위반하는 자서전: 알튀세르의 서명과 자서전의 (불)가능성
ㅡ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재간본 서평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아마도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가 우리에게 '다가왔고' 또 우리로부터 '물러갔던' 저 시간의 흔적들을 우리는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중흥기'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의 이러한 은유적인 명명과 규정을 둘러싼 어떤 기억과 풍경들에 관해서는 모두들 그 나름으로 덧붙이거나 덜어낼 말들이 있을지 모른다. 어떤 이는 그 이론의 행보가 결코 '흔적'으로만 남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고 반문할 지도 모르고, 또 어떤 이는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중흥'이란 개념이 도대체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반문은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구조주의와 탈근대주의의 유행이 한국의 이론 지형에 그려놓은 '궤적'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에 연결되고(그러므로 이는 알튀세르가 우리에게 '다가온' 적은 있지만 결코 우리에게서 '물러간' 적은 없다는 반응일 터), 두 번째 의문은 한국에서 언제 마르크스주의가 제대로 '흥성'한 적이 있었던가 하는 또 다른 반문에 가닿는다(그러므로 이는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부흥'이나 '중흥' 따위의 개념을 말하기 전에 먼저 그 내적 '형성'과 외적 '쇄신'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반응일 터). 그리 짧지 않은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알튀세르'라는 고유명이 가져온 어떤 '절단(coupure)'은 사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담론 지형에 결코 작지 않은 족적을 남기고 있다. 우리는 그의 글을 접한 후 다시는 그 이전처럼 마르크스주의를 사유할 수 없게 되었던 것, 바꿔 말해서, 어쩌면 그의 이후에 우리는 비로소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알튀세르는 이미 '잊혀진' 존재일 수 있다. 어쩌면 알튀세르와 그의 논의들에 대한 '발전적 재검토'를 가장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오히려 그의 존재를 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이 시점에서 마치 '억압된 것의 회귀'처럼 찾아온 알튀세르 자서전의 재출간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L'Avenir dure longtemps)』의 국역본은 그렇게 15년 만에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Louis Althusser, L'avenir dure longtemps, Paris: Stock/IMEC, 1992.

알튀세르의 이 자서전을 다시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먼저 '광인(狂人)의 자서전'이란 어떤 개념이며 그러한 개념이 과연 '가능'한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알튀세르는 착란 상태에서 아내 엘렌을 교살하고 금치산자 판정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범죄'에 대해 '면소' 판결을 받았던 것. 이런 의미에서 거의 모든 자서전들이 생의 말미에 저술된다는 새삼스럽지만 흥미로운 사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말미'라고 하는 시간적 규정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의 임박을 알리는 물리적 표현인 것만은 아니다. 알튀세르에게는 금치산자로서 법적 책임을 면책당한 바로 그 시점이 어쩌면 이러한 자서전을 쓰기에 가장 '적합한' 말미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서전을 쓰는 행위는 자서전의 저자가 자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완결된' 통일적 시점을 지니고 있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완결성'이 닫힌 체계로서의 어떤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완성되지 않은 완결의 시점, 통일적이지 못한 통일의 시점이 일종의 '전회' 혹은 '일단락'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자서전은 삶의 기록임은 물론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회고'해가는 일종의 수행적(performative) 죽음의 기록이기도 하다. 따라서 죽음은 한 사람의 삶에서 단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찾아올 수 있으며,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그가 바로 그러한 자신의 어떤 '죽음' 이후에 비로소 써내려갔던 삶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그 자신의 '죽음'을 '소화'하는 방식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후(事後)에 작성되는 자서전은 또한 사후(死後)에 이루어지는 자서전이기도 한 것. 그러므로 자서전이란 하나의 '유언장'이자 '묘비명'이며, 그 자서전의 저자는 그러한 유언의 내용을 집행하고 증명하는 법적 주체의 모습을 띤다. 그런데 여기서 '법적(法的)'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니체는 그 자신의 자서전이라 할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의 초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의 신용으로(auf meinen eignen Credit hin) 살아간다. 어쩌면 내가 산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편견(Vorurtheil)일까?"(Friedrich Nietzsche, Ecce homo. Kritische Studienausgabe, Band 6, Berlin: Walter de Gruyter, 1988², p.257

 

▷ 루이 알튀세르, 『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이매진, 2008.

자신의 존재는 그 존재 스스로에 의해서만 가장 '정확하게' 이야기될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숙명 혹은 오래된 편견과도 같은 환상. 자서전은 이러한 '치명적' 조건을 고스란히, 그리고 가장 '정직하게' 안고 안고 가는 글쓰기의 형식이다. 작품에 대한 저자의 사법적 권리는 자서전이라는 글쓰기 장르 안에서 가장 뚜렷하게 표현되고 인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서전의 저자는 가장 적극적인 의미에서 '저작권의 소유자'라 명명할 수 있다. 이러한 글쓰기의 '사법성'을 가능케 해주는 환경은, 필립 르죈(Philippe Lejeune)도 잘 지적하고 있는바, '고유명사'의 공간, 곧 '서명(signature)'의 공간에 다름 아니다. 앞서 인용했듯이,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의 서문에서 자신의 "신용(Credit)"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에게 이러한 신용이 '자기 자신의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가 이 당연한 '사실'을 새삼 되새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먼저 이러한 물음이 가능한 것은, 자서전에서 서명이라는 형식이 단순히 '안전하게 보장되는', 곧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법성의 표현으로만 소급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광인의 자서전'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자서전 장르 안에서 '영원한 타자'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 점을 니체는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서전이라는 글쓰기 장르 안에서 일견 지극히 당연하고 견고하게 보이던 저자의 '진실성'과 그 서명이 지닌 '사법성'은 광인으로서의 자서전 저자라는 개념에 의해서 그 근본부터 동요하기 시작한다. 왜 그런가? 바로 '광인의 자서전'이라는 말 안에서—그 권리와 정의상—'광인'이라는 개념과 '자서전'이라는 개념이 그 자체로 서로 양립불가능한 일종의 형용모순(oxymoron)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자서전의 기획과 효과가 진실성/성실성(sincérité)이라는 특이성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때, 광인의 글쓰기는 그러한 조건 자체를 만족시킬 수 없는 어떤 이질적인 것, 일반적으로 자서전을 가능케 하는 그러한 전제조건들 자체를 오히려 무화시키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이는 뒤집어 말해, 자서전을 쓰는 글쓰기 행위 자체가 이미 어떤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그 저자의 '정상적인' 사법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방증에 다름 아니다. 자서전 저자의 자격 자체가 이미 '법적으로' 인가되고 또 공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기본적 자격을 규정짓는 이러한 정상성(normalité)의 기준은 자서전의 내부를 구획하는 은폐된 바깥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하나의 책이 자서전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저자의 인지도나 유명세를 떠나서 사회적이고도 사법적인 심급, 곧 저자의 정상적 상태를 이미 전제하는 어떤 기본적인 심급에서 먼저 결정된다. 자서전이 그 자신의 '진실한' 이야기일 수 있으려면 우선 저자 자신이 정상적인 사고능력을 소유하고 있는가 없는가, 즉 우리가 그의 서술을 그의 삶이 지닌 '진실한'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전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광인의 글쓰기 '능력'은 믿을지언정—때때로 광인이란 어떤 '문학적 천재'의 표상이기도 하므로—그 글이 지닌 '진실성'에는 의문을 품는다. 설령 그가 자칭 '자서전'을 썼더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진실성'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허구적 구성물' 혹은 하나의 '증상'으로 다가오기 쉽다(예를 들어 정신분석이 저 슈레버(Schreber)의 '자서전'을 기본적으로 어떤 방식과 태도로 다뤄왔는지를 상기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소위 '정상인'은 자서전이라는 글쓰기 안에서 이미 그 자체로 어떤 사법적 특권을 소유하고 있는 반면, 광인에게는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저자의 자격이 원천적으로 박탈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자서전 저자의 '사법성'이라는 문제가 지닌 '정상성'의 문제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자서전 저자의 자격이라는 문제를 가장 예민하게 자각하고 있는 자서전 텍스트이다. 

 

▷ 루이 알튀세르, 『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돌베개, 1993.

다시 말하자면, 알튀세르는 자서전이 요구하는 정상적인 사법성을 박탈당한 '자서전 저자'이며 또한 그런 저자가 되고 있다. 정신병 판정에 의해서 그는 자신의 살인죄에 대해서조차 그 자신의 '법적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서전 저자로서 알튀세르의 '서명'이 저 '자서전의 규약' 자체를 동요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서전은 그 자체로 자서전이라는 장르와 그 저자의 서명이 맺고 있는 안정적인 '계약 관계'의 표면을 어지럽힌다. 자서전 저자의 이름과 그의 서명은 자서전의 진실성을 확보해주는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기본적인 장치이지만, 알튀세르는 그러한 자서전의 공간 밖에 있는 완전한 타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잃은 실종자, 서명의 권리를 잃은 금치산자, 결국 실명(實名)을 잃음으로써 사회적 실명(失明)에 이른 저자로서 우리 앞에 등장한다. 그러므로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그 자체로 '유령적'이다. 자서전 저자로서의 알튀세르는 논리적 언어와 일관성 있는 기억의 영역인 이성을 잃어버렸다고 간주되는 사람, 따라서 자서전을 쓸 수 없는 사람, 곧 '저자가 될 수 없는 저자'라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서전은 이 실명(實名)이 실명(失明)되는 순간, 다시 말해 일견 안정적이고 당연한 것처럼 보이던 자서전과 서명 사이의 계약 관계가 파기되고 무화될 수 있는 어떤 (불)가능성의 순간을 그 자체로 드러내고 있는 것. 따라서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한다, 알튀세르는 자서전적 글쓰기의 사법권과 서명의 저작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바로 그 시점으로부터 오히려 그 자신의 자서전적 글쓰기를 감행하고 있다고. 그러므로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시작부터 그 자체로 이미 '불가능성'의 자서전이라는 역설적 위치를 점하게 된다. 이 자서전이 하나의 '자서전'일 수 있는가 하고 묻는 모든 질문은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으며 바로 이 문제 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재출간된 국역본에 수록된 진태원의 해제 역시 이러한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이 책이 자서전인가'하는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이 '자서전'의 마지막 장(23장)이 그 이전 장들의 모든 정신분석적 설명과 해석들을 우발성의 유물론으로 뒤엎는 '반전'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곧 앞뒤가 딱 들어맞는 '안온한' 정신분석적 해석의 담론을 거부하고 그러한 담론을 책의 구성 자체로써 전복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자서전' 자체를 우발적 유물론에 대한 일종의 '수행적 글쓰기'로 보고 있다. 여기서 나는 그보다는 더 '외적인' 문제,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자서전에 대해 '외적'이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자서전적 글쓰기 그 자체를 가능케 하는 어떤 '내적' 논리로서의 사법성과 서명의 문제에 더 주목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 자신이 광인인 자서전 저자에게 남겨진 글쓰기의 전략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자신의 삶과 내면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정상적인' 자서전 저자의 전략과 결코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한 발 더 나간다. 동시에 그러한 자서전 장르가 지닌 허구적 구성과 배치의 전략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폭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은 단순히 '광인의 자서전'만이 취할 수 있는 배타적이고 방어적인 전략인 것만은 아니다. 정상적인 자서전 역시 일종의 '허구'이다. 자서전의 '진실성'이란 그 자서전의 내용을 이루는 모든 이야기들이 '사실'이며 '진실'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진실성이란 저자가 자신의 삶을 통일적이고 유기적인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해내는 한에서만 '진실'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서전의 진실성이란 이중적인 특성을 갖는다. 사실 자서전의 저자는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전한 동일성도 완전한 타자성도 증명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서전 저자라는 주체의 성격은 그 자체로 병리적이며 징후적이지 않은가. 자서전의 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법적 대리인'이며 또한 자기 자신인 것과 자기 자신이 아닌 것 사이의 '경계선을 걷는 자'일 수밖에 없는 것.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자서전 쓰기는 기본적으로 바로 이러한 경계선 위에 위치하며, 또한 그 스스로 이 경계선 위에 있음을 가장 첨예하게 인식하고 있는 글쓰기이다. 말하자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저자 알튀세르는, 아직 한 번도 무덤으로 들어간 적이 없는, 하지만 동시에 무덤으로부터 걸어 나온 저자인 것이다. 알튀세르의 자서전적 글쓰기가 지닌 '환경'은 이렇듯 유달리 고독하다. 따라서 그의 자서전이 자기변호와 자기정당성이라는 자서전의 기본적 구성요소를 넘어,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복권을 시도할 뿐만 아니라 정상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자서전 안에서의 서명과 저자의 사법성이라는 첨예한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알튀세르는 특히 2장을 통해 프랑스의 형법제도 안에서 정신병 판정을 받은 피고가 일반적으로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서술하는 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아내 엘렌을 정신착란 상태에서 교살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서술인 1장은 그 몽환적이고도 담담한 어조로 인해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알튀세르는 그러한 '눈먼' 살해의 원인을 어머니가 자신의 자살충동을 알튀세르로 하여금 대리수행하게 한 전이로 분석하면서, 전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정신분석적 틀에 '딱 맞게' 재구성하고 재배열시키는 자서전 쓰기를 수행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부분은 어쩌면 정신분석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완벽한' 설명이 아닌가: "내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내게 루이(Louis)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루이, 무척이나 오랫동안 내가 문자 그대로 혐오한 이름이다. 나는 모음이 단 하나뿐인 이 이름이 너무 짧다고 여겼으며 마지막 모음 '이(i)'의 그 날카로운 음조는 나를 찔러 대는 것이었다[…]. 또한 그 이름은 나 대신 너무 쉽게 '위(oui)'라고 말했으며, 나는 나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내 어머니의 욕망에 대한 '위'인 그 '위'에 대해 반발했다. 그리고 특히 그 이름은 3인칭 대명사인 '뤼(lui)'를 말하기도 하는데, 익명의 제3자를 부르는 것처럼 울림으로써 나 자신의 모든 고유한 인격을 박탈하는 것이었으며 내 등 뒤에 있는 그 남자를 암시하고 있었다. 뤼(lui), 그것은 곧 뤼(Louis)였으며, 내 어머니가 사랑했던 내 삼촌이지 나는 아니었다."(국역본, 65-66쪽) [번역에서는 구판본(돌베개, 1993)과 재간본(이매진, 2008)이 대동소이하다. 다만 이번 재간본이 더욱 반가운 것은 증보판의 자료들이 새로이 번역 수록되었다는 점인데, 특히나 알튀세르가 깊이 천착했던 '유물론 전통'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과 그 이론적 전망을 감안할 때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에 대한 노트의 번역은 그 중 가장 반가운 일이라 하겠다. 더불어 이 '정신분석적' 자서전과의 병행 독서를 위해서라도 알튀세르의 『정신분석과 인문과학: 두 개의 강연(Psychanalyse et sciences humaines: deux conférences)』이 가까운 미래에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덧붙여둔다. 특히나 이 책의 첫 글은 알튀세르에게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으로서 정신분석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자신의 이름에 관한 이 일화는 알튀세르로 하여금 자서전을 쓰게 만들었던 어떤 현실적 박탈의 경험과 겹쳐진다. 'oui'라고 말하는, 그리고 'lui'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욕망이 투영된 'Louis'라는 이름의 존재. '나'는 그러한 어머니의 욕망(자살의 충동)에 의해 아내를 교살하게 되고(따라서 아내 엘렌은 또한 '어머니'이기도 한 것), 마치 3인칭 대명사 'lui'가 '나'의 고유한 인격과 사법적 권리를 박탈했던 것처럼, '나'는 금치산자라는 선고 속에서 '내' 자신의 욕망과 권리로는 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분석은 정신분석적으로 너무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구조를 갖는 것이기에 이 자서전의 구성과 해석방식이 지극히 '인위적'이며 '주관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여기서 이러한 인위성과 주관성은 그 자체로 '말할 수 없는 자의 말'을 가능케 해주는 핵심적인 전략에 다름 아니다.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된 저자의 자서전이 원칙적으로 진실성에 대한 보장을 결여하는 것으로밖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면, 알튀세르는 자신의 삶을 특정한 강박의 결과물로서 재구성하고, 또한 그렇게 재구성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의도적으로' 밝히고 적용함으로써, 표면적인 진실성과는 다른 종류의 '진실성'에 가닿는다. 

 

Louis Althusser, Psychanalyse et sciences humaines, Paris: LGF/IMEC, 1996.

그러한 점에서 다음과 같은 알튀세르의 말은 이 자서전의 성격을 가늠해볼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내가 일러두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이 일기도 회상록도 자서전도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내가 오직 드러내고자 한 것, 그것은 바로 내 존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또 내 존재를 이러한 형태로, 즉 그 속에서 내가 나 자신을 알아보게 되고 타인들도 나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그런 형태로 만든 모든 정서적 감정 상태들이 던져준 충격이다."(국역본, 55쪽) 자타가 공인할 수 있는 '나'라는 존재는 결국 만들어진 존재, 따라서 기본적으로 허구 혹은 가상의 존재이다. 금치산자로서의 자서전 저자가 자신의 존재를 재구성하고 그 텍스트의 진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정상과 비정상을 넘어 모든 저자가 갖고 있는, 그러나 대부분 그 작용을 은폐하고자 하는 '허구의 존재방식', 그 자체를 스스로 폭로하고 드러내놓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그는 독자에 대해서 오히려 가장 '솔직할' 수 있는 것이며 '광인의 자서전'에만 고유한 특유의 '진실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자서전 저자의 법적 자격이 박탈된 저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글쓰기의 권리, 그것은 '진실'에의 권리가 아니라 '거짓'에의 권리, 곧 허구와 가상의 권리인 것. 따라서 자서전이 반드시 '표면적인' 진실성을 담보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 때, 알튀세르가 말하고 있듯이, 이 텍스트는 '순수한' 자서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알튀세르가 자신의 자서전은 '구성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 텍스트는 오히려 온전한 '자서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금치산자로서의 자서전 저자에게 표면적인 진실성을 부정하는 허구의 권리를 스스로 선포하는 행위가 필요했었다면, 그에게는 같은 강도로 반대 방향에서 자신의 이 '자서전'이 자서전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위반의 언어' 또한 필요했던 것. 따라서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그 스스로가 자서전임을 부정함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자서전적 글쓰기의 영역을 보여준다. 스스로 자서전이 아니라고 말하는 바로 그 자신의 진술로써 비로소 자서전이 되는 책,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다시 한 번 '불가능성'의 자서전이 된다. [이러한 '부정성'으로서의 자서전이 지닌 특성은 오히려 알튀세르 스스로가 저 루소의 『고백록』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부분에서 더욱 '역설적' 설득력을 갖는다고 하겠다.] 이렇게 하여 '광인의 자서전' 속에서 취해지는 허구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변호의 언어이며 정당성의 문법을 갖지만 동시에 그 구성의 '허구성' 자체를 드러내는 허구라는 점에서 단순한 변명이나 정당화가 아닌 '위반'의 성격을 띠게 된다. 알튀세르는 이 자서전을 통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고 구분하는 기준, 그리고 무엇보다 정상성이라는 개념 자체와 저자의 서명이 갖는 사법적 권리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적으로 '완전무결한' 자서전이 그 자체로 지니고 있는 의미와 한계를 문제 삼으며, 그리고 우발성의 유물론으로 난 또 다른 길을 암시하면서. 알튀세르는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단절(rupture)'을 말할 뿐이며, 또한 '우연한 마주침'을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렇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국역본, 360쪽)는 말은 그 말 자체보다도 더 멀리, 더 오래 지속된다. 그 말은 대미를 장식하는 결어(結語)가 결코 아닌 것이다.

오늘날 누가 알튀세르를 다시 읽을 것인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알튀세르 '그 자신에 의한(par lui­-même)' 하나의 전기적 텍스트로 보든, 혹은 '자기에 대한 글쓰기(écriture de soi)'가 만개한 하나의 자서전적 텍스트로 보든, 혹은 개인적인 역사와 문제들을 '우발성의 유물론'에 대한 논의와 접합시키고 있는 이질적이고 전략적인 텍스트로 보든, 그 독서의 방식은 실로 여러 갈래로 열려 있다. 하지만 먼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알튀세르를 '다시' 읽기로 결심하고 감행하는 하나의 '행동'이다. 이 일독(一讀)의 행위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알튀세르는 오래 지속될 것이며 또한 오래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재출간을 반기는 이유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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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람혼 인터뷰: 알튀세르 심포지엄에 즈음하여
    from 중독(重讀/中毒)에의 권유 2010-08-17 06:07 
      ▷ 칠판 앞에 앉아 있는 루이 알튀세르의 모습.   1) 2010년, '맑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타계 20주년을 맞이하여 그를 '다시 읽는' 심포지엄이 서울의 한 [대학교가 아닌] '유흥가' 한복판에서 열린다(그리고 나는 사실 개인적으로 이 점이 참 마음에 든다). 일시는 2010년 8월 25일 수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이고, 장소는 홍대 상상마당 4층 아카데
 
 
게슴츠레 2009-06-12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디우, 랑시에르, 발리바르 등 주목받고 있는 현대정치철학 사상가들을 보면 알튀세르와의 이론적/실천적 '거리'에 의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도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현대 마르크스주의 이론들을 구조화하는 '텅 빈 중심'으로서의 알튀세르는 청산이든 계승이든 무엇이든 간에 람혼 님 말대로 '다시 읽힐'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텅 빈 중심이라는 이제는 식상한 표현을 다시 사용하는 이유는 세 명의 논자 각각이 생각하는 '알튀세르'가 도저히 비슷하다고 할 수 없을만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알튀세르 이해에 있어서의 모순은 그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노골적인 의미에서의 바로 여기 한국에서도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얼마 전 교수신문에서 있었던 진태원 씨와 홍준기 씨의 논쟁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론으로는 첨단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두 분들이 부딪친 것은 각자가 이론적 모범으로 삼고 있는 발리바르도 지젝도 라캉도 아니고 바로 '알튀세르'였죠. 알튀세르를 헤겔리언으로 읽을 것인가 스피노지앵으로 읽을 것인가. 이러한 시차는 두 분들의 오독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알튀세르 자신이 안고 있는 상이한 모순들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군요. 그리고 발리바르가 한 논문에서 스피노자를 평하며 말했듯이 이러한 모순들은 생산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미 유럽의 세 논자와 한국의 두 논자들에게서 우리는 알튀세르의 미래가 오래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여튼 알튀세르를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람혼 2009-06-12 16:37   좋아요 0 | URL
저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ㅡ아마도 <까다로운 주체>의 서문에서였던가요?ㅡ지젝이 알튀세르의 '문제적' 중요성을 탁월하게 '문제적으로' 언급했던 부분에 기본적으로 크게 동감하는 편입니다. 게슴츠레님이 말씀하신 세 사람 중에서, 특히나 알튀세르 이론의 '생산적 재전유'ㅡ만약 그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ㅡ를 생각해볼 때, 저는 현재로서는 발리바르의 작업들에 가장 크게 주목하고 싶습니다. 아직 저로서는 공부가 훨씬 더 많이 필요하겠지만, 랑시에르와 바디우의 영역에는 아직 '완전히 발을 들이기'가 다소 저어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취지에서, '거대한' 저작에 대해 다소 인색한 측면이 있지만, 저는 특히나 마슈레의 여러 작업들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작년에 마슈레가 출간했던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에 대한 짧지만 알찬 분석도 조만간 시간이 허락할 때 소개해볼까 합니다). 어쨌거나 '다시 읽기'란 단순히 책 아래 파묻혀 있던 또 다른 책을 꺼내 펴보는 단순한 회상의 형식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제가 강조한 그 단어 그대로, 하나의 '감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고요하지만 열렬히 품고 있습니다.

[해이] 2009-06-12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어실력이 빨리 늘어야 할텐데ㅎㅎ 전직 알튀세리앵들의 작업들이 정말 흥미롭습니다. 게슴츠레님 말씀대로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도록 지속되는 듯 합니다^^ "다른 사람과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자신의 사고의 조건 그 자체가 되는 그런 인텔리.... 알튀세르는 다른 사람과 생각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람혼 2009-06-13 13:24   좋아요 0 | URL
[해이님]의 '인용'을 보면서, "사고의 조건"이란 본래부터 그런 게 아닐까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불어 실력 일취월장하시길 기원합니다! ^^

anathema 2009-06-15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텍스트가 폐간된줄 알았는데 지금도 발행되고 있군요.

람혼 2009-06-15 03:30   좋아요 0 | URL
네, 그 꾸준한 간행에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을 만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