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연극』지 4월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벌써 1년의 1/3이 흘러갔다). 여기서는 지면의 제약과 주제의 한계 때문에 깊이 다루지는 못하고 살짝 '암시'하는 데에 그쳤지만, 이하의 시론적 논의를 통해 내가 개인적으로 특히 천착해보고 싶은 문제는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의 번역어로서의 '자리바꿈(déplacement)', 그리고 바로 이 한 단어 안에서 진동하고 있는 브레히트-알튀세르-랑시에르 사이의 '[예술]이론적' 관계이다. 조만간 여건이 허락될 때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과 알튀세르의 '유물론적' 연극론, 그리고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 담론을 연결시키는 글을 한 편 써볼까 하는데, 이하 옮겨놓는 글은 그러한 글쓰기 기획을 위한 작은 '전주곡'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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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 알튀세르의 모습. 그는 '유물론적' 연극 혹은 브레히트와 마르크스의 관계에 관해 몇 편의 중요한 글을 남기고 있다.
음악의 바깥, 바깥의 연극
ㅡ 알튀세르의 '유물론적' 연극론과 연극음악의 '소격효과'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연극을 하는 사람들 혹은 연극을 보는 사람들이 굳이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글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연극의 상연을 위해서나 관극을 위해서 마르크스(Marx)의 저작들을 읽을 필요가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말이죠. 여기서 제가 던지고 싶은 물음은 어쩌면 이러한 독서와 관극 사이의 어떤 '낯선' 관계에 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유물론적' 연극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러한 연극 속에서 '유물론적' 음악이란 또한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요? 알튀세르는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의 입장에서 연극에 관해 몇 편의 중요한 글들을 남기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 특히 조르조 스트렐러(Giorgio Strehler)가 연출한 베르톨라치(Bertolazzi)의 연극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촉발된 글인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 그리고 브레히트: 유물론적 연극에 관한 노트들」(『마르크스를 위하여』에 수록)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관객과 작품 사이에 어떤 거리가 생기도록 하려면 이러한 거리가 (기술적) 처리나 인물들의 심리적 양상 안에서뿐만 아니라 작품 그 자체 속에서 산출되는 어떤 방식이 필요하다. […] 의식의 환영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환영들의 실제적 조건들을 끌어내는 이러한 거리가 산출되고 형상화되는 것은 바로 작품 자체의 내부, 그 내적 구조의 역동성 안에서이다." 흔히 우리가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라는 지극히 ‘익숙한’ 말로 명명하고 있는 브레히트(Brecht)의 이 '낯선' 기획 안에서, 관객과 작품 사이에 산출되고 또 산출되어야 할 '거리'란 단순히 연극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연극철학적인 어떤 것이라고, 연극의 외적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 구조 그 자체의 역동성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알튀세르가 연극에 관한 또 다른 글인 「브레히트와 마르크스에 대하여」(『철학 정치 문집』 2권에 수록)에서 브레히트의 저 유명한 '소격효과'를 '변동/자리바꿈(déplacement) 효과'라는 번역어로 옮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자리바꿈'일까요?
▷ Louis Althusser, Pour Marx, Paris: La Découverte, 1996(Maspero, 1965¹).
이에 답하기 위해 먼저 이런 '낯선' 질문을 던져보죠: 연극음악은 '들리는' 것일까요? 관객이 그 음악을 말 그대로 '듣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겠죠. 물리적으로 말해서 배우들에게도 그 음악이 '들리는' 것 또한 물론입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배우는 그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존재로 상정되어 있습니다(이 점은 너무도 '당연하게' 전제되어 있는 것이라 또한 우리가 매번 간과하게 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음악은 극의 서사 자체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극적 구조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극음악은 '은폐' 속에서 역으로 어떤 '현시'에 가닿고, 다른 무대적 요소들과의 '무관계'를 통해 반대로 어떤 '관계성'을 획득하며, 또한 그 극도의 추상성 속에서 오히려 가장 구체적인 위치와 맥락을 부여받습니다. 따라서 음악은 연극 안에서 명시적이고 재현적인 방식으로 등장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언제나 잠재적이며 징후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를 무대장치와 한 번 비교해보죠. 무대라는 공간은 그 미학적인 구조와 형태가 아무리 '추상적'이라고 할지라도 언제나 일차적으로 배우가 발 딛고 서 있는 '물리적' 장소로서 제시되고 경험됩니다. 음악은 이와 다릅니다. 어쩌면 이러한 의미에서 음악은 무형의 형태를 창조하는 일종의 '조형 작업', 혹은 더 수수께끼처럼 말해서, 빛을 만든다기보다는 그림자를 만드는 일종의 '조명 작업'에 더 근접하고 있습니다. 암전의 공간과 휴지의 시간 속에서 떨리고 울리는 음악, 빛을 등진 어둠을 타고서야 관객의 귀에 가닿는 역설적인 소리들. 반대로 우리는 극의 정서와 배우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따라가는 음악을 흔히 '신파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그것이 '신파적'인 이유는 미학적으로 '촌스럽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므로 '자리바꿈(déplacement)'이란 또한 '카타르시스(catharsis)'와 미학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에서도 대립되는 말이 되고 있습니다. 후자가 연극의 내부에서 그 바깥의 삶을 해소하고자 하는 기제라면, 전자는 연극의 바깥에서 그 속의 삶과 직면하고자 하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연극과 삶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대립이기도 합니다.
▷ Louis Althusser,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I, Paris: LGF, 2001.
이에 또 하나의 '낯선' 질문이 있게 됩니다: 관객은 연극을 '보고' 싶어 하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항상 연극 안에서 또 하나의 삶을 보고 있고 또 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릅니다(삶'으로서의' 연극 혹은 삶'에 대한' 연극을 주창하는 저 모든 수사법들을 떠올려봅시다, '연극을 통해 삶에 다가가기'라는 모토가 지닌 저 고색창연한 순진함을 말이죠). 이건 어쩌면 하나의 관성이나 타성, 혹은 본능적이라고까지 할 감정이입의 습관일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관객은 습관적으로 음악 안에서 '음악'을 듣고자 합니다(이것은 동어반복일 뿐일까요?). 하지만 연극음악은 음악 자체로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으로 상정된, 하지만 관객의 '상상' 속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들리는 음악. 더 세밀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집단으로서의 관객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하지만 개개의 관객들의 머릿속에서는 너무나 확실히 울려 퍼지는 음악. 우리는 '감각'으로 음악을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에 못지않게 '관념'을 통해서도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 됩니다. 오히려 연극음악의 물질성은 오직 이러한 관념성 안에서만 바로 그 물질적인 성격을 획득한다는 역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음악 자체가 물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알튀세르가 브레히트의 극을 새로운 "실천의 연극이 아니라 연극의 새로운 실천"이라고 말하고 있듯이(「브레히트와 마르크스에 대하여」), 연극음악 역시 어떤 새로운 '음악'보다는 음악의 새로운 '실천'을 문제 삼는 것이며, 연극음악의 유물론적인 성격이란 바로 이러한 실천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El Nost Milan>을 연출 중인 조르조 스트렐러(가운데)의 모습, 1955년.
음악 안에 중심은 없습니다. 연극음악은 바그너(Wagner)의 라이트모티프도 아니지만 뮤지컬의 메인테마 같은 것은 더 더욱 아니니까요. 유물론적 연극 안에서 '주인공/영웅'이 부재하듯, 연극음악 안에서 결정적인 '주제악구'는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됩니다. 연극음악이 관객에게 들려주는 것은 역설적으로 음악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연극 안에서 음악이 언제나 연극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만은 아닙니다. 연극음악은 관객에게 그 음악 바깥의 것을, 무대라는 환영의 공간 바깥의 것을 '들리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연극을 하나의 삶으로 치환하거나 연극 속에 삶을 이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연극은 연극일 뿐이라는 일견 당연한 사실을, 중요한 것은 오히려 연극 안에서도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는 삶의 형태와 모순들이라는 사실을, '들리게' 해야 합니다. 연극음악이 들려주는 '음악'이란 이러한 '바깥의 구조'여야 하며, 음악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음악의 바깥은, 마치 연극이 연극일 뿐이라는 인식이 오직 연극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듯, 오직 음악의 '내부'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바깥'이기도 합니다. '거리'란 물리적 내부와 외부 사이에 패인 골이 아니라 '내부'라고 상정되었던 것을 '외부적'인 것으로 '들리게' 하는 구조적인 틈의 힘, 곧 '자리바꿈'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유물론적 연극에 관한 노트들」의 말미에서 알튀세르는 자신의 글을 이렇게 끝내고 있습니다(아니,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작품은 실로 새로운 관객의 생산이다. 공연이 끝날 때 시작하는 배우, 오로지 공연을 완수하기 위해서만 시작하는, 하지만 또한 삶 속에서 그렇게 하는 배우가 바로 이러한 새로운 관객의 모습이다." 음악이 끝나는 시점에서 비로소 시작하는 음악, 음악의 내적 구조를 통해 오히려 그 바깥을 열고 가리키는 음악, 아마도 이 안에서 탄생할 새로운 '연주자/감상자'의 모습이 또한 저 "새로운 관객"의 다른 얼굴이기도 할 것입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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