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연극』지 4월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벌써 1년의 1/3이 흘러갔다). 여기서는 지면의 제약과 주제의 한계 때문에 깊이 다루지는 못하고 살짝 '암시'하는 데에 그쳤지만, 이하의 시론적 논의를 통해 내가 개인적으로 특히 천착해보고 싶은 문제는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의 번역어로서의 '자리바꿈(déplacement)', 그리고 바로 이 한 단어 안에서 진동하고 있는 브레히트-알튀세르-랑시에르 사이의 '[예술]이론적' 관계이다. 조만간 여건이 허락될 때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과 알튀세르의 '유물론적' 연극론, 그리고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 담론을 연결시키는 글을 한 편 써볼까 하는데, 이하 옮겨놓는 글은 그러한 글쓰기 기획을 위한 작은 '전주곡'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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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 알튀세르의 모습. 그는 '유물론적' 연극 혹은 브레히트와 마르크스의 관계에 관해 몇 편의 중요한 글을 남기고 있다.

 
음악의 바깥, 바깥의 연극
ㅡ 알튀세르의 '유물론적' 연극론과 연극음악의 '소격효과'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연극을 하는 사람들 혹은 연극을 보는 사람들이 굳이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글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연극의 상연을 위해서나 관극을 위해서 마르크스(Marx)의 저작들을 읽을 필요가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말이죠. 여기서 제가 던지고 싶은 물음은 어쩌면 이러한 독서와 관극 사이의 어떤 '낯선' 관계에 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유물론적' 연극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러한 연극 속에서 '유물론적' 음악이란 또한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요? 알튀세르는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의 입장에서 연극에 관해 몇 편의 중요한 글들을 남기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 특히 조르조 스트렐러(Giorgio Strehler)가 연출한 베르톨라치(Bertolazzi)의 연극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촉발된 글인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 그리고 브레히트: 유물론적 연극에 관한 노트들」(『마르크스를 위하여』에 수록)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관객과 작품 사이에 어떤 거리가 생기도록 하려면 이러한 거리가 (기술적) 처리나 인물들의 심리적 양상 안에서뿐만 아니라 작품 그 자체 속에서 산출되는 어떤 방식이 필요하다. […] 의식의 환영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환영들의 실제적 조건들을 끌어내는 이러한 거리가 산출되고 형상화되는 것은 바로 작품 자체의 내부, 그 내적 구조의 역동성 안에서이다." 흔히 우리가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라는 지극히 ‘익숙한’ 말로 명명하고 있는 브레히트(Brecht)의 이 '낯선' 기획 안에서, 관객과 작품 사이에 산출되고 또 산출되어야 할 '거리'란 단순히 연극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연극철학적인 어떤 것이라고, 연극의 외적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 구조 그 자체의 역동성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알튀세르가 연극에 관한 또 다른 글인 「브레히트와 마르크스에 대하여」(『철학 정치 문집』 2권에 수록)에서 브레히트의 저 유명한 '소격효과'를 '변동/자리바꿈(déplacement) 효과'라는 번역어로 옮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자리바꿈'일까요? 

 

Louis Althusser, Pour Marx, Paris: La Découverte, 1996(Maspero, 1965¹).

이에 답하기 위해 먼저 이런 '낯선' 질문을 던져보죠: 연극음악은 '들리는' 것일까요? 관객이 그 음악을 말 그대로 '듣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겠죠. 물리적으로 말해서 배우들에게도 그 음악이 '들리는' 것 또한 물론입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배우는 그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존재로 상정되어 있습니다(이 점은 너무도 '당연하게' 전제되어 있는 것이라 또한 우리가 매번 간과하게 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음악은 극의 서사 자체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극적 구조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극음악은 '은폐' 속에서 역으로 어떤 '현시'에 가닿고, 다른 무대적 요소들과의 '무관계'를 통해 반대로 어떤 '관계성'을 획득하며, 또한 그 극도의 추상성 속에서 오히려 가장 구체적인 위치와 맥락을 부여받습니다. 따라서 음악은 연극 안에서 명시적이고 재현적인 방식으로 등장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언제나 잠재적이며 징후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를 무대장치와 한 번 비교해보죠. 무대라는 공간은 그 미학적인 구조와 형태가 아무리 '추상적'이라고 할지라도 언제나 일차적으로 배우가 발 딛고 서 있는 '물리적' 장소로서 제시되고 경험됩니다. 음악은 이와 다릅니다. 어쩌면 이러한 의미에서 음악은 무형의 형태를 창조하는 일종의 '조형 작업', 혹은 더 수수께끼처럼 말해서, 빛을 만든다기보다는 그림자를 만드는 일종의 '조명 작업'에 더 근접하고 있습니다. 암전의 공간과 휴지의 시간 속에서 떨리고 울리는 음악, 빛을 등진 어둠을 타고서야 관객의 귀에 가닿는 역설적인 소리들. 반대로 우리는 극의 정서와 배우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따라가는 음악을 흔히 '신파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그것이 '신파적'인 이유는 미학적으로 '촌스럽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므로 '자리바꿈(déplacement)'이란 또한 '카타르시스(catharsis)'와 미학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에서도 대립되는 말이 되고 있습니다. 후자가 연극의 내부에서 그 바깥의 삶을 해소하고자 하는 기제라면, 전자는 연극의 바깥에서 그 속의 삶과 직면하고자 하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연극과 삶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대립이기도 합니다. 

 

Louis Althusser,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I, Paris: LGF, 2001.

이에 또 하나의 '낯선' 질문이 있게 됩니다: 관객은 연극을 '보고' 싶어 하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항상 연극 안에서 또 하나의 삶을 보고 있고 또 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릅니다(삶'으로서의' 연극 혹은 삶'에 대한' 연극을 주창하는 저 모든 수사법들을 떠올려봅시다, '연극을 통해 삶에 다가가기'라는 모토가 지닌 저 고색창연한 순진함을 말이죠). 이건 어쩌면 하나의 관성이나 타성, 혹은 본능적이라고까지 할 감정이입의 습관일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관객은 습관적으로 음악 안에서 '음악'을 듣고자 합니다(이것은 동어반복일 뿐일까요?). 하지만 연극음악은 음악 자체로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으로 상정된, 하지만 관객의 '상상' 속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들리는 음악. 더 세밀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집단으로서의 관객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하지만 개개의 관객들의 머릿속에서는 너무나 확실히 울려 퍼지는 음악. 우리는 '감각'으로 음악을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에 못지않게 '관념'을 통해서도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 됩니다. 오히려 연극음악의 물질성은 오직 이러한 관념성 안에서만 바로 그 물질적인 성격을 획득한다는 역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음악 자체가 물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알튀세르가 브레히트의 극을 새로운 "실천의 연극이 아니라 연극의 새로운 실천"이라고 말하고 있듯이(「브레히트와 마르크스에 대하여」), 연극음악 역시 어떤 새로운 '음악'보다는 음악의 새로운 '실천'을 문제 삼는 것이며, 연극음악의 유물론적인 성격이란 바로 이러한 실천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El Nost Milan>을 연출 중인 조르조 스트렐러(가운데)의 모습, 1955년.

음악 안에 중심은 없습니다. 연극음악은 바그너(Wagner)의 라이트모티프도 아니지만 뮤지컬의 메인테마 같은 것은 더 더욱 아니니까요. 유물론적 연극 안에서 '주인공/영웅'이 부재하듯, 연극음악 안에서 결정적인 '주제악구'는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됩니다. 연극음악이 관객에게 들려주는 것은 역설적으로 음악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연극 안에서 음악이 언제나 연극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만은 아닙니다. 연극음악은 관객에게 그 음악 바깥의 것을, 무대라는 환영의 공간 바깥의 것을 '들리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연극을 하나의 삶으로 치환하거나 연극 속에 삶을 이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연극은 연극일 뿐이라는 일견 당연한 사실을, 중요한 것은 오히려 연극 안에서도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는 삶의 형태와 모순들이라는 사실을, '들리게' 해야 합니다. 연극음악이 들려주는 '음악'이란 이러한 '바깥의 구조'여야 하며, 음악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음악의 바깥은, 마치 연극이 연극일 뿐이라는 인식이 오직 연극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듯, 오직 음악의 '내부'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바깥'이기도 합니다. '거리'란 물리적 내부와 외부 사이에 패인 골이 아니라 '내부'라고 상정되었던 것을 '외부적'인 것으로 '들리게' 하는 구조적인 틈의 힘, 곧 '자리바꿈'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유물론적 연극에 관한 노트들」의 말미에서 알튀세르는 자신의 글을 이렇게 끝내고 있습니다(아니,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작품은 실로 새로운 관객의 생산이다. 공연이 끝날 때 시작하는 배우, 오로지 공연을 완수하기 위해서만 시작하는, 하지만 또한 삶 속에서 그렇게 하는 배우가 바로 이러한 새로운 관객의 모습이다." 음악이 끝나는 시점에서 비로소 시작하는 음악, 음악의 내적 구조를 통해 오히려 그 바깥을 열고 가리키는 음악, 아마도 이 안에서 탄생할 새로운 '연주자/감상자'의 모습이 또한 저 "새로운 관객"의 다른 얼굴이기도 할 것입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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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람혼 인터뷰: 알튀세르 심포지엄에 즈음하여
    from 중독(重讀/中毒)에의 권유 2010-08-17 06:07 
      ▷ 칠판 앞에 앉아 있는 루이 알튀세르의 모습.   1) 2010년, '맑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타계 20주년을 맞이하여 그를 '다시 읽는' 심포지엄이 서울의 한 [대학교가 아닌] '유흥가' 한복판에서 열린다(그리고 나는 사실 개인적으로 이 점이 참 마음에 든다). 일시는 2010년 8월 25일 수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이고, 장소는 홍대 상상마당 4층 아카데
 
 
2009-04-13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15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13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15 1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재灰 2009-04-13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연재를 특히 '아껴' 읽습니다. 업(業)에 대한 '자의식'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자의식은 그 자체로 늘 내밀한 영역인지라, 느리게 읽고는 말 없이 그냥 갈 수 없어 이렇게 댓글을 답니다. 은폐 속에서 현시에 가닿고, 무관계를 통해 관계에 이르고, 추상 속에서 구체를 얻는다는 님의 연극음악을 글쓰기의 자의식, 혹은 비평의 자의식으로 바꿔 읽으려 애를 써봅니다.

님의 '시 아닌 시'에서 힘의 소진과 충전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충전이 더욱 가열차길 바라고 있습니다.^^

람혼 2009-04-15 12:43   좋아요 0 | URL
다시 옮겨주신 그 어구들이 그 자체로 제 '자의식'에 대한 일종의 '자기-진단' 혹은 '자기-패착'(?)이 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요, 어쨌거나 內外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내밀한' 영역을 '외화'시켜 이야기하기라는 과정에는 그 나름의 기쁨과 고통이 동시에 '양가적으로' 따르는 것 같습니다. '시 아닌 시'에서 양가적인 힘을 직감하셨다니, '시인 아닌 시인'은 그 말씀에서 또한 소중한 힘을 긷게 됩니다.^^

드팀전 2009-04-14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잘 읽었습니다. '유물론적 음악'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의 낯섦이 궁금해서 끝까지 읽게 되었는데...대략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잇었습니다. 수용자의 관념성 안에서 다시 재구성되는 물질성이라는 역설에 그 핵심이 있는듯 합니다.
최근에 <롤리타>를 읽으며 '소격효과'와는 의도는 완전히 반대되지만..전통적 소설의 몰입에 대해 구조와 문체,또 직접 개입을 통해 모더니즘적 전통에서 빼내려는 나보코프의 의도에서 역설적인 방식의 '거리두기'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오히려 브레히트가 무대와의 소격을 통해 현실을 구성한다면 나보코프 방식은 현실과의 소격을 통해 작품을 구성하는 방식이더군요. 제가 재대로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리바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연극과 상대적 대척점에 놓여 있는 영화음악의 직접성에 대해 글을 쓸수도 있겟다 싶습니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만 들으면 머릿속에 완전히 아프리카만 생각나버리고..마스카니를 들으면 흑백의 드니로만 머릿속에 맴돌아서 아주 귀찮습니다.^^

람혼 2009-04-15 12:48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의 글 때문에 <롤리타>를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독서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요, <롤리타>를 처음 읽었을 때 그 소재 자체보다는 전체적 형식과 말미의 해결방식에서 더 큰 자극과 충격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도 제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요...^^

모차르트와 마스카니의 곡들에 대한 일종의 '조건반사'를 읽고 파안대소했습니다(개인적인 예를 추가하자면, 저는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만 들으면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이 떠오르는데요, 얼마 전 영화 <발키리>(톰 크루즈 주연) 도입에 그 곡이 나올 때는ㅡ이미 영화 제목 자체가 그 곡을 또한 가리키고 있음에도ㅡ반대로 왠지 어색한(?) 느낌을 받게 되더군요^^;). 정말 그렇군요! 실로 '귀찮기'까지 한 일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드팀전님이 잘 지적해주신 대로 언젠가 영화음악 안에서의 '자리바꿈'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들이 들었어요. 좋은 사유의 tip, 감사드립니다.^^

드팀전 2009-04-15 12:47   좋아요 0 | URL
아...제게 필요한 tip이 있었는데..^^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희곡도 한번씩 보는데요..람혼님이 추천해주실 만한 작가 있으신가요?

람혼 2009-04-15 12:57   좋아요 0 | URL
하하, 방금 위에서 발퀴레 이야기를 추가하고 있었는데... 글쎄요, 제가 드팀전님의 '내밀한' 취향은 잘 모르지만...^^; 일단 영미권 작가 중에서 바로 떠오르는 이들을 말씀드리면, Sarah Kane이나 Mark Ravenhill을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아마도 이미 읽어보셨을 거라 생각되지만, 개인적으로 1990년대 이후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희곡은 단연코 Martin McDonagh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아직 안 읽어보셨다면 '강추'입니다(국내에서는 아마도 'Pillowman'이 가장 유명하겠지만,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 'The Leenane Trilogy'를 추천해드립니다). 그밖에, David Harrower의 'Blackbird'와 Tracy Letts의 'August: Osage County'도 추천합니다.^^

드팀전 2009-04-15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거 다 번역본 있나요? ...없을 듯..다 영어로 써놓은 거 보니까 없는 것 같은데.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찾아본 후;<킬러들의 도시>를 감독하기도 했던 젊은 작가군요.음...번역된 건 없는듯...

람혼 2009-04-16 01:00   좋아요 0 | URL
네, 위에 말씀드렸던 추천서들은 제가 알기로 아직 국역본은 없는 책들입니다. 희곡 쪽은 역작과 수작들이라 해도 비교적 최신의 것들은 신속하게 번역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요... 다만, Martin McDonagh의 초기 작품들은 아일랜드 사투리가 섞인 영어들이 종종 나와서 독서에 조금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Pillowman' 같은 작품은 큰 어려움 없이ㅡ그리고 매우 흥미롭게ㅡ읽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같은 의미에서 또한 David Harrower의 'Blackbird'도 비교적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한국 작가들의 희곡은 그리 재미있는 것도 없을 뿐더러, 제가 최근에 읽은 몇 편의 희곡들은 '업무' 때문에 미출간된 원고들을 바로 읽은 것이라 따로 구하시라고 추천해드리기가 좀 어렵네요... 아무튼 죄송한 마음...

드팀전 2009-04-16 09:09   좋아요 0 | URL
^^ 죄송이라니요.안그래도 알라딘에서 희곡쪽 리스트를 한번 살펴봤습니다. 세익스피어가 제일 많더군요.ㅋㅋ 그래서 처음부터 소설만큼 기대하지 않았지만 희곡들의 국역 작업이 잘 안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비즈니스적 차원도 있겠구..또 희곡이라는 것이 무대상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보니 그쪽 분야에 계신분들의 각색 또는 자체적 번역 작업을 통해 바로 무대로 올라갈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어쨋거나 새로운 작가들을 많이 알게되었으니 저로서는 크나큰 소득이었습니다. 필로우맨은 국내 공연도 있었더군요. 책 소개 몇 줄을 읽었는데..꼭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감사해요.

람혼 2009-04-16 10:41   좋아요 0 | URL
네, 말씀하신 대로 희곡의 출간/국역 작업은 소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인프라'가 취약한 것이 사실이죠. 또한 최근으로 올수록 텍스트 중심의 희곡에 기반한 공연보다는 언어에만 의존하지 않는 보다 '다원적'인 공연이 더 많아졌다는 이유도 추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Martin McDonagh의 작품들과 'Pillowman' 공연 등에 관해서는 제가 예전에 쓴 글이 하나 있으니 참고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http://blog.aladdin.co.kr/sinthome/1557842

2009-04-15 1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16 0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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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09: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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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1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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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17: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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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18: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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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음과 모음 』, 2009년 봄, 인문편/소설편.

*) 『자음과 모음』 2009년 봄호에 기고했던 글을 옮겨놓는다. 다른 문예계간지와 비교해 분량이 만만치 않은 두툼한 잡지라 틈틈이 읽는 데에도 시간이 좀 걸렸지만, 모처럼 문예계간지 독서에서 알찬 체험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호부터 4회 정도 연재를 맡게 되었는데, 그 어떤 지면보다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주어진 셈이다(일천하고 부족한 사람에게 이런 공간을 마련해준 편집부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일전에 써두었던 주제를 확대/심화시켜 보았는데, 여기서 나의 중점은 아마도 마지막 두 문단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관해 원하는 만큼 자세히 서술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글쟁이들이 흔히 말하는 '시간과 지면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아직 내 안에서 채 영글지 못한 사유의 한 자락을 내 스스로 조금 더 부패시키거나 지연시키고 싶기 때문이었다(그러므로 이 글의 말미는 어쩌면 사실 내가 딱 '원했던 만큼', 그만큼일 수도 있다). 마지막 두 문단 이후와 관련해서 이 글에 덧붙여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문학동네, 2008)를 조영일의 『한국문학과 그 적들』(도서출판 b, 2009), 고명철의 『뼈꽃이 피다』(케포이북스, 2009) 등의 평론집과 비교하며 독해하는 과정을 서술할 계획이었지만, 이에 관해선 나중에 독립된 글 한 편으로 다루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에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 개인적으로 도드라지게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박민규 소설의 어떤 '징후성'이다(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징후성'이란 어떤 '비대표적 대표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징후성은 작품 자체의 징후성으로 그치지 않는다(이와 결부 혹은 단절되는 맥락에서 박해천 선생은 얼마 전 내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龍'자가 네 개나 들어가는 제목을 가진—박민규의 단편 하나를 추천해주셨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품었던 것은, 야구만큼이나 무협지에도 별반 열광적 관심이 없는 나의 개인적 취향은 언젠가는 '규명'되어야 할 일종의 '연구 대상'일 것이라는 새삼스런 생각 한 자락). 덧붙이자면, 나는 항상 박민규의 소설(대표적으로는 그의 『핑퐁』)에 가해지는 '과소적' 혹은 '과잉적' 해석에 대해 언제나 불편한 감정을 품어 오고 있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찬양하기 혹은 걱정하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모 아니면 도. 예를 들어 비약하자면,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어구에 대해 갖게 되는, 비평 안의 어떤 불만 혹은 불편함 말이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한 가지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한 마디 이상씩은 언급한 이러한 징후성보다 더 '징후적'인 것이 존재하며, 또한 사실 이것이 바로 내가 깊이 천착하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른바 '근대' 또는 '근대문학'을 둘러싼 외형적이고 직설적인 대화나 논쟁에는 별 관심이 없다. 비평가는 '근대' 그 자체를 말할 때가 아니라 '근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은연중에 의도치 않게 드러낼 때 그 가장 '근대적'인 성격을 노출한다. 이는 '과소적'으로 말하자면 한 비평가의 방법론과 소명의식에 녹아 있는 '근대-문학적' 사고일 테고, 보다 '과잉적'으로 말한다면 비평 그 자체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는 하나의 '근대적' 한계지점일 것이다(우리는 이를 오랫동안 '모더니티'라는 가장 거대한 말로 가장 소심하게 불러오고 있다). 범박한 말로 표현하자면, 나의 주된 관심사 역시나 일종의 '메타-비평'에 가닿아 있다고 해야 할 텐데, 그렇지만 이러한 개인적인 주제의식은 '비평에 대한 비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평의 조건에 대한 비평'을 문제 삼는 것이라고, 똑같이 범박한 표현을 차용해서, 일단은 내 나름대로 선을 그어둔다. 한 소설가 선배는 개인적인 통화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람혼아, 그렇고 그런 비평 같은 건 쓰지 말고, 제대로 된 비평을 써라." 이 제한된 표현 안에 선배가 채 모두 담지 못한 의중이 얼마나 많겠는가(또한, 여느 말처럼, 이는 또 얼마나 많은 오독의 여지를 남겨두는 말인가, 하는 의문도 드는데, 어쩌면 이는, 김지하의 「오적」에 나오는 저 오래된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의 다른 버전일 것인가). 나는 내 스스로를 비평가로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지만, 또한 비평의 정의란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기에, 또한 창작자와 평론가 사이의 골이란 그렇게 깊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저 선배의 조언을 나는 내 방식대로 흡수하고 섬겨 담는다. 하여, 쓸 수밖에. 말하지 않고 쓸 수밖에. 글의 발 아래 납작 엎드린 채 일종의 '행복감'을 느끼는 한 명의 매저키스트로서(그런데, 문득, 순진한 척 묻자면, 이 매저키스트에게 '반란'은 가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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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
ㅡ 이사만루(二死滿壘)와 무타무주(無打無走), 근대와 리셋(reset)의 욕망


13년 전의 이야기 한 자락: 때는 1996년 여름, 나는 서울의 한 서점에서 당시 신간으로 출간되었던 사이토 지로(齋藤次郞)의 책 『아톰의 철학』을 찾고 있었다(이 책은 데츠카 오사무(手塚治虫)의 생애와 그의 만화 세계를 다룬 책이었다). 다만 그때 내가 범했던 '결정적인' 패착이란 이 책을 만화 코너에서만 열심히 찾고 있었다는 것. 지금과 같은 우수한 성능의 검색용 컴퓨터를 서점에서 찾을 수 없었던 시기, 나는 나만의 서툴고 원시적인 검색 방법에만 의존하는 데에 스스로 조금씩 지쳐갔고, 결국에는 서적의 분류법에 있어서 나와는 비교가 안 되는 '전문가'인 서점 직원에게 책이 있는 장소를 문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내가 알아낸 놀라운 사실은, 그 책이 '당당하게도' 철학 코너에 분류되어 있었다는 것.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 서광사와 민음사의 책들 가운데에, 문학과지성사와 창작과비평사의 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얄미운' 곳에 그렇게 '얄밉게' 꽂혀 있었다는 것. 푸코가 보르헤스의 중국식 동물 분류법을 보면서 느꼈던 어떤 인식론적인 '충격'은 사실 그리 멀리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윤대녕의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이 처음에는 '레저' 코너에 분류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훨씬 더 나중의 일이다. 

 

▷ 데츠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

다시 14년 전의 이야기 한 자락: 내가 『아톰의 철학』을 찾으면서 느꼈던 이 실소를 동반한 기묘한 감정을 다카하시 겐이치로(高橋原一郞) 또한 비슷하게, 하지만 나보다는 가볍게, 아마도 조소를 띠며, 어쩌면 약간은 자조 섞인 감정을 느끼면서, 그렇게 느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1988년 일본에서 출간되었고 1995년에 처음 국역본이 나온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다: "필자는 이 작품에서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의 한 시대의 정신 풍경을 그려보려고 했다. 그 때문에 '야구'라고 하는 도구를 필요로 한 것이다. 그 때문인지, 많은 책방에서 이 작품이 스포츠 코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불평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한 번 쓰인 작품은,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까."(『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박혜성 옮김, 웅진출판, 1995, 3쪽) 

 

▷ 다카하시 겐이치로, 『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박혜성 옮김), 웅진출판, 1995.

이 짧은 문장들 속에서 다카하시는 실로 많은 말들을 풀어놓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문학평론가는 물론이거니와 야구해설자조차도 실소하게끔 만들 귀찮고 성가신 '문학적' 아포리아(aporia)가, 그것도 아무리 줄여봤자 최소한 세 개의 아포리아가, 너끈히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첫째, 여기에는 분류법의 문제가 있다. '아톰의 철학'이라고 하면 철학 코너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라고 하면 스포츠 코너로 분류되는 저 '웃지 못 할 몰상식'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이 문제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이 '당연하게' 보이는 비웃음의 근거를 그 자체로 고착시키거나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아마도 다카하시 또한 그럴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분류법이 정정되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분류되고 있다는 하나의 '현상'인 것. 그러므로 이를 비웃거나 탓하기보다는—그 어느 누구도 그럴 수 있는 '자격'은 없을 것이다—마치 다카하시의 소설 속 주전 투수가 라이프니츠(Leibniz)를 흉내 내는 것을 다시 한 번 흉내 내듯 "칸트 할아범"(『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59쪽)을 흉내 내면서, 우선 이 글은 이러한 비웃음의 담론 체계를 형성시켰던 가능 조건들을 물어야 할 것이다(그러므로 오히려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나의 비웃음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자체, 저러한 분류법 앞에서 그것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분류의 정신이 지닌 어떤 '에피스테메'일 것). 둘째로, 문학이 한 "나라의", "한 시대의 정신풍경을" 그려낸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저 오래된 사회적 반영론의 테제를 굳이 새삼스레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혹은 헤겔의 저 시대정신(Zeitgeist)을 어렵사리 기억해내지 않더라도, 어쩌면 그 자체로 역시 이미 '지당한' 명제일지 모른다. 누군가는 이에 대해 순진한 의심을 품기도 했겠고, 또 누군가는 이에 대해 두 번 이상으로 중첩된 긍정과 부정의 회로를 거쳐 정당함과 부당함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 어디쯤에 이미 당도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불행히도 우리에게 이러한 문제는 아직도 여전히 '살아 있는' 문제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글은 또한 '문학은 무엇을 그려내는 것인가'라고 하는, 케케묵은 문학적 대상에 관한 물음을 다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과연 "한 번 쓰인 작품은,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의 국역본이 출간되었던 1995년이라면, 내 기억으로는 이 땅에 '저자(auteur)의 죽음'이라든가 '텍스트(texte)의 독립적이고 구조적이며 비인격적인 성격' 등등의 이론들이 맹위를 떨치며 한 바탕 장안을 풍성하게 풍미하던 시기였다. 나는 이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부르기보다는—'그렇다면 그 이후 현재에 이르는 시기는 무슨 시기란 말인가'라는 물음은 차치하고라도—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적 이식문학론의 시기'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인데,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저 유명한 '이식문학'의 테제와 그 주창자 임화(林和)를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단지 그대로 지나가버리기만 했던 유행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또한 작가와 작품 사이에서 벌어졌던 저 오래된 숙명적 역전과 재역전의 전적에 관해 재차 삼차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처럼 이 글은 적어도 저 세 가지의 골치 아픈 난제들 모두를 정확하고 적확하게 분석해가는 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 임화의 빛바랜(?) 사진 한 장.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이 '네 번째' 문제는 언뜻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어쩌면 '문화' 일반,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법' 일반에 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일견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일종의 접속사에 관한 문제라는 외양을 띠게 되기 때문이다. 다카하시의 저 한국어판 서문 속에서 내가 시급하게—비록 14년이라는 시간차가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욱 시급하게, 곧 니체적인 의미에서 가장 '반시대적으로(unzeitgemäß)'—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사실 따로 있는데, 그가 사용한 두 개의 '그 때문에'가 바로 그것. 첫 번째 '그 때문에':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의 "정신풍경"을 그리려 한다는 이유 때문에 야구라는 도구가 필요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나? 두 번째 '그 때문에': 이 문제는 사실 앞의 세 가지 물음들 중 첫 번째 물음, 곧 '자연스러운' 분류법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보다 미묘한 것이다. 이 문제는, '야구'라는 단어가 책 제목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도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라는 긴 어구를 이루고 있는 저 모든 수식어들이, 곧 성질(quality)과 양태(mode)와 국적(nationality)에 관한 저 모든 꾸밈말들이, '야구'라는 한 단어만을 집중적으로 꾸며주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해서 이 책이 스포츠 코너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냐는, 그런 일도 가끔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겠냐는, 분류 체계의 성립과 인정과 수용에 관한 투덜거림의 외양을 취하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이것이 일종의 '투덜거림'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마도 이 두 번째 '그 때문에'는 다카하시의 서문 속에서 "그 때문인지"라고 하는 한 발짝 물러선 어법으로 변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곧 분류법의 기원, 보다 정확히는 하나의 분류법이 가능하게 되는 어떤 '환경(milieu)'을 문제 삼는다. 따라서 우리의 중점은 분류 체계 일반의 구성 요소와 그 법적 정당성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분류법을 두르고 있는 테두리가 만들어내는 여백, 어쩌면 이미 그 자체가 특정한 하나의 분류법을 미리 지시하고 구획하고 있는 '유일한' 잣대라고 해야 할 바로 그 여백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여백' 또는 '바깥'은 문학이 품고 있을 저 스트라이크 존(strike zone)의 비가시성(非可視性)과 비인과성(非因果性), 그 보이지 않는 공간을 보이게 만드는, 그 원인 없는 시간에 원인을 부여하는, 가시성과 인과성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 박민규. '작가적' 정체성의 몇 가지 요소들: 안경과 담배, 그리고 반지들.

2003년 혹은 1982년의 야구 이야기 한 자락: 이러한 '그 때문에'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시도하고 있는 또 다른 '야구 소설' 하나(하지만 이 '닳아빠진' 두 소설들을 '야구 소설'로 분류하고 명명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분류법일까). 분명히 1982년에 출간되었다면 당연하게도 서점의 야구 코너에 가장 먼저 가서 꽂혀 있었을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화자는 야구 경기를 "인생의 축소판"으로 언급한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한겨레신문사, 2003, 86쪽). 왜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인가? 어째서 80년대에 소년기를 보낸 화자의 시공간은 한 개의 야구장으로, 한 개의 야구공으로, 그렇게 '축소'되어만 가는가(그러므로 여기서 다시 물어보아야 하는 물음 하나는, 이 2003년의 야구 이야기가 1982년의 야구 이야기의 압축된 '후일담 문학'은 아닐 것인가 하는 물음)? 소설의 화자는 청소년기의 어느 3루 끝자락에서 그만 덜컥, 그것도 야구를 통해서,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현실 인식을 스스로 깨우치게 된다(혹은, 그러한 현실 인식에 '걸려 넘어지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여기서 독자는 왜 '마르크스'가 아니라 '주의'에 작은따옴표가 붙어야 했는지를 잠깐 동안이나마 음미해보아야 한다고, 나는 권고한다): "그날 밤 나는, 낡고 먼지 낀 내 방의 창문을 통해—저 캄캄한 어둠 속에 융기해 있는 새로운 세 개의 지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부유층과 중산층, 그리고 서민층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지층들이었고, 각자가 묻힌 지층 속에서 오늘도 화석처럼 잠들어 있을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보았다. 꽤 노력도 하고, 평범하게 살면서도 수치와 치욕을 겪으며 서민층에 묻혀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무진장, 혹은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하면서도 그저 그런 인간으로 취급받으며 중산층에 파묻혀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그리고 도무지 그 안부를 알 길이 없는—이 프로의 세계에서 방출되거나 철거되어—저 수십 km 아래의 현무암층이나 석회암층에 파묻혀 있을 수많은 얼굴들을, 나는 보았다."(129쪽)

프로야구에서 이루어졌던 이러한 계급의 구분은 정확히 일상의 삶 속에서도, 어쩌면 그 속에서 더욱 확연하게,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 그것이 이 소년의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이다. 역설적으로, 하지만 지극히 합리적으로, 이러한 '냉철하며 진부한 현실 인식'이 소년의 삶에 강하고 독한 추동력을 부여한다. 여기까지는 저 유명한 근대화의 저돌적인 추동력에 관한 이야기와 정확히 짝을 이루는 어느(혹은 '여느') 소년의 흔하디흔한 성장통(成長痛)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뒤도 말고, 앞만 보고] 달려라 메로스, 혹은, 소년이여, ['프로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야망을 가져라 등등의 뒤틀린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소년에게 기이한 생존의 욕망과 기형적인 삶의 의지가 마치 일종의 약물처럼 투여되는 것이다.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만년 꼴찌 팀에로 오체투지 하듯 온몸을 감정이입 시켰던 이 소년에게는, 그러므로 야구가 인생의 축소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생이 야구의 확대판이자 실측지도였던 것. 삶이 야구 같은 것임을 깨닫고 삶을 야구처럼 살지 않겠다고 바득바득 우기며 살던 소년은 인생의 중간계투 시기에 일견 매우 맥 빠지는 결론에 도달한다: "세계는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성해 나가는 것이었다."(242쪽)

기껏해야 이 가장 기초적인 근대 인식론의 명제 따위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 현대의 원효(元曉)는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을 그렇게나 많이 그리고 그렇게나 오래도록 퍼마셔야 했던가? 세계는 주체가 구성하는 바로 그러한 한에서만 '세계'일 수 있다는, 이 근대 인식론의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할 순진무구한 모토의 재탕 혹은 중탕을 위해서? 하지만 나는 저 명제 자체의 진부함에 질려 등을 돌리기 전에 먼저 이렇게 소년 스스로 구성한 세계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러한 구성 작용의 '대상'은 무엇인가 물어보아야 할 것 같다(말하자면, 나는 이 성장소설의 '노에마(noema)'와 '노에시스(noesis)'를 다시금 되묻고 싶은 것). 일견 진부해 보이는 이러한 인식론이 장년이 된 소년의 비관적이고 진부했던 또 다른 인식론,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해야겠지만, 고로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할 따름"(212쪽)이었던 과거의 인식론과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기에. 또한 그것이 데카르트의 명제를 한 번 뒤집는 척만 한 후 다시금 진부하고 특정한 버전의 칸트에게로 나아가버린 듯, 일견 맥이 풀려버린 인상을 주는 전회(轉回)이기에, 나는 더욱 더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대척점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오히려 가장 먼저 깨달았어야 했고 또 가장 먼저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이 '근대적인 너무나 근대적인' 인식론의 도식은 왜 이 소년에게 이리도 뒤늦게, 지각(遲刻/知覺)하여 도착했던가? 이러한 지각과 지연을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삶을 새롭게 분류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또 하나의 분류법, 그것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인생의 축소판이었던 야구에 관한 새로운 분류법의 탄생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하고 있다: "애당초 승부의 판가름이 무의미한 경기였다. 아니, 같은 룰이 적용될 수 없는 서로 다른 야구를 통해—두 팀은 격돌했던 것이다. 7회 초의 공격은 끝이 나지 않았다. 오른쪽 잡초 덤불 쪽으로 빠진—2루성 타구를 잡으러 간 <프로토스>는 공을 던지지 않았고, 그 이유는 공을 찾다가 발견한 노란 들꽃이 너무 아름다워서였고, 또 모두가 그런 식이었다. 워낙 힘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괴소년은 그렇게 많은 포볼을 던지고도 도무지 지치지 않았고, 또 같은 이유로 아무도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수비들은 계속 체력을 축적하고, 오히려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타자들이 지쳐만 가는 이상한 경기가 계속 이어졌다. 길고 긴 7회의 공격이 언제 끝날지가 요원했던—아직 원아웃인가 그랬고 스코어는 20:1인 상황에서, 결국 타임을 외친 올스타즈의 주장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 "그만 하죠.""(292쪽)

서로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두 개의 축 사이에서 어떤 비트겐슈타인적 짜릿함이 인다. "노란 꽃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아예 공을 던지지 않는 방만한 야구와 "오히려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타자들이 지쳐만 가는" 치열한 야구는 규칙과 분류의 체계를 서로 달리 하는 이질적인(hétérogène) 것일 수밖에 없다. 후자의 야구는 우리에게 익히 친숙한 '프로'의 야구이며, 전자의 야구는 우리가 한 번쯤은 상상해봤을지 모를, 하지만 또한 상상하자마자 머리를 흔들어 머리 밖으로 몰아냈을지도 모를, 그런 기이한 야구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열심히 할수록 쇠약해져만 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체 모를 괴물에게 살과 피를 빼앗기는 듯이 느껴지는 '프로'의 야구는 '이사만루(二死滿壘)'라는 절체절명의 상황과 규칙을 따르는 야구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사만루의 절박하고 강제적인 질서를 따르는 야구가 아닌, '프로'라고 하는 인간 이상(또는 이하)의 것을 강요하는 야구에 대항하여 자진해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야구, 나는 이러한 야구를—어쩌면 하나의 대구(對句)를 만들어주고 싶은 '순수한' 형식적 '악취미'에서—'무타무주(無打無走, no hit no run)'의 야구라 부르려고 한다. 

 

▷ '기호의 제국'에서 야구 하기, 혹은, '우아하고 감상적인' 사진-텍스트의 이데올로기.

1988년, 또는 1995년, 혹은 어쩌면 어떤 먼 미래의 야구 이야기 한 자락: 야구가 사라진 시대에 출간되었더라면 아예 서점의 야구 코너를 통째로 창시했을 법한, 야구에 관한 도서 목록 작성의 초고가 되었을 법한 다카하시의 소설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무타무주'의 야구라는 새로운 '분류법'의 한 사례를 만난다. 소설의 내러티브는, 사전 속의 야구에 관한 정의도 불확실함으로 가득 차 있을 정도로 야구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세상에서 벌어지는 야구에 관한 이야기라는 외형을 띤다: "야구[사어(死語)]—아주 옛날에 죽었기 때문에 잘 모른다. 긴 것으로 둥근 것을 치는 게임이라고도 말하여지고 있다. 지면에 네모난 것을 놓고 악귀를 쫓았다."(『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72쪽) 나는 여기서, 어떤 이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그러나 또 어떤 이는 몰지각하다고 생각했을, 하나의 '자연스러운' 분류법, 곧 13년 전에 내가 만났던 저 '아톰의 철학'에 대한 분류법과 다시금 조우한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나는 의심해본다, 생각해본다, 상상해본다, 혹여, 『아톰의 철학』을 만화 코너가 아니라 철학 코너로 분류했던 것은, 어느 이름 모를 열성 삼미 슈퍼스타즈 팬클럽 회원의 교묘하고도 지능적인 '작전'이 아니었던가 하고, 아니면, 그때 내가 철학 코너라고 생각/착각했던 그 서가가 실은, 다카하시의 인물들이 때때로 야구에 대한 명언과 탁견과 열정이 담긴 책들을 꺼내보고 그 문구들을 공책에 옮겨 적곤 하던 야구 관련 코너의 서가가 아니었던가 하고. 그래서 또 나는 의심한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해야겠지만, 실은, 이제껏, 이사만루가 안겨다주는 '숨 막힘'으로만 존재해 왔던 것은 아닌가 하고, 혹은, 야구에는, 존재에는, 오로지 이사만루라는 분류법 외에 다른 분류법이 없다는 듯이, 그렇게 살고 존재해 왔던 것은 아닌가 하고. 그리고 이어 나는, 어렴풋이, 알아챈다, 다카하시 소설 속의 등장인물 랜디 바스가 인류의 모든 책들을 야구에 관한 잠언과 해설로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처럼, 아톰과 철학에 대한 혼란스러운 분류 체계가 사실은 또 하나의 '야구 이야기'에 다름 아니었음을, 그것은 또한 삶의 축소판과 확대판을 아우르는 울타리와 여백에 관한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에 다름 아니었음을(그런데 동시에 나는 '체질적으로' 이러한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결론에 대해 반발하고 있는 것). 그리하여 다카하시가 새롭게 작성하는 실제 세계의 분류법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자, 야구사상 가장 위대한 타자 중 한 사람인 다카기 유타카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 리얼 월드를 다음의 두 개로 분류하고 있다. / (1) 홈 베이스 위에 있는, 타자의 어깨로부터 무릎까지의 공간—즉, 스트라이크 존. / (2) 그 이외의 모든 것."(76쪽) 

 

Ludwig Wittgenstein, Werkausgabe, Band 1,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4.

*) 새로운 규칙과 분류의 체계를 한 벌 짓는 일과, 규칙과 분류 자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물음을 묻는 일은, 분명 서로 다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후자의 입장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를 읽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이 책을 하나의 '야구 이야기'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어쩌면 비트겐슈타인은 '진짜' 야구를 알았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푸코가 잘 보여주었듯, 새로운 분류법으로 인해 탄생하는 것은 곧 새로운 인식론이며 새로운 담론의 체계일 터. 그렇다면 이사만루와 무타무주 사이의 골이 가리키는 새로운 담론의 체계란 어떤 것일까(그런데,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가)? 그것은, 기존했던 과거시제로서의 이사만루의 야구가 제한적인 경제가 지닌 협소한 윤리학적 체계를 가리킨다고 한다면, 도래할 미래시제로서의 무타무주의 야구는 이사만루의 야구가 '멸종'해버린 세상에서 만나게 될 하나의 새로운 삶의 미학 또는 미학적 윤리학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다는, 하나의 '허무맹랑한' 가설일 것인가?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러한 윤리와 존재의 '미학화(美學化)'가 하나의 문학적 '유토피아(utopia)'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한다 해도, 이사만루의 야구가 사라진 무타무주의 야구 세상 속에서 다카하시의 소설이 짙은 '디스토피아(dystopia)'의 냄새를 풍기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러므로 이러한 물음은, 혹여, 무타무주라는 새로운 분류법의 문학적/스포츠적 체계가, 여전히 유토피아'주의적'이라고 하는 하나의 특정 담론 체계 안에, 그래서 결국 아직은 변증법적 이분법이라는 오래된 늪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묻는, 유독 우리 시대에 특히 더욱 진부해져버린 저 의심과 회의의 물음으로, 다시금 귀착된다. 다시금, 반복되는, 저 문학적 '아포리아'로서의 '유토피아', 두 개의 부정적 접두사('a-', 'u-')가 만들었던, 이 '오래된' 신조어들. 그리하여 나에게는, 이제 '다섯 번째'가 되어야 할 질문 하나가 오롯이 떠오른다. '근대' 문학을 바라보는 가장 '근대적인' 시선이란 어떤 것인가?

물론 이사만루의 문학적(혹은 '시대적') 상황이 무타무주의 문학(어쩌면 '시대정신'?)으로써 타파되고 위반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순진한 일일 것이다(게다가 이러한 '순진한' 생각은 저 바타이유적 '위반'이라는 작용의 의미와 효과에 대한 몰이해를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 무타무주의 문학이란 기존하는 게임의 법칙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기에, 또한 당연하게도 어떤 '점수'도 낼 수 없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러한 '노히트노런'의 경쾌함은 언젠가 또 하나의 훌륭한 '물신(Fetisch)' 같은 유행이 될지도 모른다. 마치 우승 후에 연고지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기는 프로야구단처럼: "우승을 했으니까요. 그럼 서울로 가는 것이 이 세계의 룰입니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281쪽) 그래서, 근대 문학이란, 곧 근대적 상황 속에서 잉태되었고 소비되고 있는 근대 소설이란, 본래부터 겉으로는 '무타무주'의 가면을 쓰고 실제로는 '무사득점(無死得點)'의 만루 홈런 기회나 대량학살과도 같은 '삼중병살(三重倂殺)'의 기회만을 노리는 기민하고 약삭빠른 심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그래서—실은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이—문학의 전장(戰場) 또한 결국은 피 튀기는 연장전에 돌입한 헤게모니 투쟁의 속편이었음을 새삼스럽게 반추하게 되면,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말했던바 '사회적 실천'의 책무를 떠맡은 중심적 예술 행위라는 의미에서의 근대 문학은 이미 종언을 고한 것으로 보인다(하기야 근대의 종언뿐만 아니라 문학의 종언을 발음하고 발언했던 이가 어디 이 '일본인' 비평가 하나뿐이었겠느냐마는). 위반하고는, 다시 되돌아오게 되는 한계(limite)의 공간. 이 무한한 '영원회귀'의 운동 속에서—누구나 이 원환의 운동 속에서는, 소승적이 되기는 쉬워도 대승적이 되기는 어려울 터—누군가는 '역사의 종언'을 목격했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복음의 창궐'을 목도했을 것이다.

90년대 이후 이와 같은 상황을 체감한 푸념과 투덜거림이 내뱉었던 하나의 '문학적이고도 세속적인' 물음이 하나 있다(이것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하지만 이제는 그 어느 누구도 애써 발설하려고 하지 않는, 여섯 번째 질문이다): 왜 한국의 작가들은 더 이상 민족의 분단 상황을 문제 삼지 않고 더 이상 가장 '낮은' 곳으로도 임하려 하지 않는가? 누군가는 당신이 관심을 가지지 못할 뿐이지 그렇지 않은 작가들이 여전히 얼마든지 많이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었]고, 또 누군가는 그런 현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전지구화가 가져다준 영향이자 폐해라고 말할 것이[었]다. 혹은, 좀 더 에둘러 말하자면, '태백산맥' 사이로 외제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래도 '빛의 제국'은 여전히 건재하지 않느냐고 안도하면서 말할 수도 있[었]고—이는 다시 말하자면, 조정래 식으로 쌓아가며 '삭히던' 것을 이제는 김영하 식으로 '돌파할' 수 있게 된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한데—, 또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한다면 도대체 '난장이가 쏘아 올렸다던 그 작은 공'은 지금쯤 어느 궤도를 돌고 있는 위성이 되었느냐고 분을 삭이지 못한 채로 반문할 수도 있[었]다(30년 전 저 난쟁이 가장의 모습과 현재의 용산은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른가). 하지만 저 물음이 물음으로서 유효하다면, 그 유효성은 이 문제에 대한 당장의 해답을 내리려고 하는 결단의 조급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저 물음이 물음일 수 있는 가능 조건들을 탐색해야 한다. 저 물음 안에서 무엇보다 먼저 물어져야 할 것은, 과연 '한국의' 작가란 도대체 누구인가, 작가라는 '직업' 앞에 '국적'을 표시하는 수식어가 첨가될 수 있다면, 그리고 거기에 다시 그 국적의 '소유'를 표시하는 조사 "~의"가 흘레붙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닐 것인가 등등의 물음이다. 이 물음들은, 그러므로, 역사와 문학의 종언에 대한 물음들, 그리고 그러한 종언 이후에 비로소 겨우 다시 시작되는, '역사 없는' 시대의 문학에 대한 물음들일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이사만루'라는 절박한 상황 인식이 유효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둘'이라는 이분법이 죽고[二死] 그와는 다른 다종다양한 분류법들이 만개할 수 있는[滿壘]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는 지극히 '은유적인' 상황 인식 하에서만 그러하다(그러나 은유의 힘은 무엇보다 무섭고도 위대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은 또한 '복음의 창궐'을 '복음'으로만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창궐'로만 받아들일 것인지를 선택하고 결정하기 위한 또 하나의 은유적이고 문학적인 전제 조건의 한 형태일 것이다. 아마도 이 새로운 물음과 인식의 소재들은, 마치 민족국가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국경선들처럼 엄연히 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확고한 분류법 그 자체에 대한 이의제기일 것이고, 또한 하나의 물음이 또 다른 물음들을 촉발시키는 위반의 풍경을 보여주는, 그래서는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들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류법 하나쯤은 잉태시킬지 모르는 하나의 작은 반례(反例)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의 저 물음을 다시 물어야 한다: 이사만루라는 절대적인 순간에 과연 무타무주는 '가능할' 것인가? 칠 수 있을까 칠 수 없을까 하는 선택적 물음에 직면하여 이 물음이 강요하는 대답을 찾는 것은 어쩌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숫제 이 물음의 틀과 영역을 바꿔버리는 일, 동문서답을 하거나 전혀 다른 것을 되물어보는 일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어쩌면 이 역전된 물음이 우리가 수치스러울 정도로 새삼스럽게 되물어야 할 오늘날 '우리' 문학의 물음일 것이며, 또한 이는 어쩌면 '한국의'—혹은 '일본의', '그 어딘가의'—문학이 특별히 지금 이 순간 다시 되물어야 할 '방치된' 물음인지도 모른다. 치지 못하고 달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치지도 않고 달리지도 않는 것,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물음(따라서 이 지극히 '문학적인' 질문은 실은 가장 '구조적인' 물음, 곧 체계 자체에 대한 물음이 되고 있는 것). 그러므로 오늘 다시 물어야 할 이 물음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하는 물음, 이러한 '불가능성'이 어떻게 도래하는가를 묻는 어떤 '가능성'에 대한 물음인 것. 

 

▷ 김종현 감독,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2004).

이 시점에서 나는 두 개의 '야구 영화'를 떠올려본다(다시 반복하지만, 이번에는 이 두 영화를 '야구 영화'로 분류하는 분류법은 과연 정당할까).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2004)에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패전 처리 전문 투수' 감사용은 승리를 위해 공을 던진다. 거기에는 약자와 패자의 설움이 있고 패배와 좌절에도 굴하지 않는 풀뿌리 같은 희망이 있지만, 반면 거기에는 '저들'—그들의 실체가 실제이든 가상이든—이 만들어 놓은 승리와 패배의 판 자체를 흐트러뜨리고 뒤집어버리려는 '문학적' 위반의 물음이 부재한다('영화' 속에서 '문학적' 위반의 어떤 단초를 찾아보려는 것은 정당한 분류법적 욕망의 발로일까, 아니면 단지 당연시될 뿐인 크로스오버적 욕망의 발로일까, 하고 다시 한 번 자문해보게 되지만, 어쨌든 소설 속의 삼미 슈퍼스타즈와 영화 속의 삼미 슈퍼스타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서로 갈라지고 있다). 반면 영화 <아는 여자>(2004)의 주인공은 이길 것이냐 질 것이냐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타자 쪽으로 신중하게 투구해도 모자랄 공을 엉뚱하게도 뒤로 돌아 경기장 바깥으로 길게 내던져버린다. 그 공은 야구장을 가득 메운 모든 이들의 황당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멀리 멀리 날아간다, 달아난다, 뒤집어버리고, 순간적으로, 위반한다. 이제까지 '당연한 듯' 존재했던 경기의 규칙들은 바로 그 한 순간에 증발해버리고, 그 자리에 대신 기이한 분류법의 일단이 반짝하며 출몰한다. 이 분류법은 투수가 마운드에 서서 상대편 타자를 향해 공을 던지면서도 몸소 '노히트노런'을 기록할 수도 있다는 '신기한' 사실을 목격했을 때 새롭게 열리게 되는 하나의 분류법이다. "기록의 경기"(『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50쪽)인 야구에서 아예 기존의 기록 체계를 통째로 무시하는 또 다른 체계 하나가 찰나적으로 새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수비 실책도 아니고, 더구나 고의 사구는 더 더욱 아니므로(담장 밖으로 날려버린 그 공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투지의 데드볼', 어쩌면 그 말 그대로 하나의 '데드볼'?). 다카하시와 박민규의 인물들이 이 후자의 투수만을 '진정한 야구 선수'라 여길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못해 쑥스러울 정도로 새삼스럽다. 그렇다면 우리를 망설이게 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은, 저 확실성일 것인가 아니면 저 수치심일 것인가. 

 

▷ 장진 감독, 영화 <아는 여자>(2004).

이러한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더 눈길을 주게 되는 것은 박민규의 또 다른 소설 『핑퐁』이다. 상상해보자면, 어쩌면 박민규의 『핑퐁』 이후에 도래할 시간은—그러한 '시간'이 있다고 한다면—, 거꾸로 다카하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가 보여주고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그러므로 나의 또 다른 상상 한 자락은 박민규가 『핑퐁』을 통해 저 다카하시적 세계의 전사(前史)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이 되고 있는데). 이는 어쩌면 절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의 강박적이며 잔인한 상상이 될 것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이러한 상상은, 삭제되고 말소된 시간 이후에 도래한 '시간'에서, 곧 시간성 그 자체가 말소되고 삭제되어버린 시간에서, 시간이 다시금 새롭게—혹은 똑같이—시작되고 있음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자체로—문학과 근대에 종언을 고하는 가장 '탈-근대적인' 몸짓 이후 여전히 저 '근대'의 시간은 끈질기게 지속되며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의미에서—우리의 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대한 하나의 완벽한 비유가 아닌가? 그러므로 『핑퐁』이 보여주는 문제설정과 해결의 방식을 '편리한' 방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지만 그러한 '정당함' 자체가 이미 근대문학적인 시선 안에서 파악된 것임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한 평론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못과 모아이의 '언인스톨'은 그래서 의외로 슬프지도 착잡하지도 않다. 이는 달리 말하면 이 소설이 제시하는 '해결의 현실성'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가 '해결의 현실성'을 말할 때 그것은 실현 가능하냐 아니냐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SF든 신약이든 다 괜찮다). 이 선택이 과연 우리 시대의 정치적 지평에서 래디컬한 상상력으로 작동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러나 『핑퐁』과 같은 식의 파국적 해결은 어딘가 편리한 방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41쪽) '수비 실책'을 문제 삼는 감독의 시선은, 말하자면 여전히 '이사만루의 야구'라는 지평 위에 있는 것, 이는 탈근대를 근대라는 잣대로 파악하는, 그리고 그렇게 파악할 수밖에 없는 몸짓이다. 

 

▷ 박민규가 직접 그린 '못'과 '모아이'의 형상.

그런데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렇듯 비평이라고 하는 하나의 문학적 행위가 저 야구 감독의 훈수, 저 가장 근대적인 문제설정의 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 나는 『핑퐁』이 보여주는 결말을 '리셋(reset)에의 욕망'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리셋에의 욕망은, 특히나 탈근대를 고민하는 '근대적인' 비평의 시선에게는 참으로 불편한 것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비평의 시선만을 '근대적'이라 비판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사실 '리셋에의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저 근대의 '종말' 혹은 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와 마찬가지로, 탈근대에 대한 가장 근대적인 시선과 해결의 시도로부터 도출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리셋의 개념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에 대한 다종다양한 '근대주의적' 반응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근대주의'를 여닫는 하나의 문학적 실체이다. 이 실체의 모습은 내게 유달리 징후적으로 보인다. "아침에는 전근대이고 오후에는 근대이며 저녁에는 탈근대인 것은 무엇인가? 정답은 한국이다."(『몰락의 에티카』, 43쪽) 이 말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곳은 바로 한국근대문학의 자리, 그리고 그에 대한 가장 '근대적인' 비평의 자리에 다름 아닌 것. 그렇다면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의 물음들을 이러한 '불가능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비평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어떤 근대성을 바로 그 글쓰기의 가장 수행적인(performative) 행위를 통해 문제 삼지 않는다면, 이러한 '불가능성'을 사유할 수 있는 자리란 과연 어디인가.

—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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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3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15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나의 詩 ㅡ 그런데 이것은 정말 詩일까?
그게, 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시 없이 시를 쓰는, 시의 시늉이라도 할 수밖에.
심장이 없더라도, 손을 빌려서.

어조를 버리기란 지극히 어렵다, 혀를 버리기만큼이나,
어렵다. 하지만 그 지극히 개인적인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이브하게, 아주 나이브하게,
말해보려 한다. 가장 믿을 수 없는 말이 또한,
나이브하게 말하려고 한다는 말 그 자체일 것, 이겠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마치,
들으려는 귀가 있는 자,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귀를 가진 모든 사람의 말처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최근의 몇몇 후안무치한 작태들을 쭉 지켜보면서,
욕하기에도 아까운 것들,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깝다,
욕하기에도. 그런 자들이 이른바 자칭 타칭
이 사회와 국가의 '지도층'이라는 작자들이다. 욕하기에도
아까운 것들이다.

눈 딱 감고 '역사의 심판'이란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므로, '눈 딱 감는' 일이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그럼 그 전에는 믿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렇다 혹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기독교에 대해 하는 식으로 말해보자면,
'역사의 심판'이라는 종교에 대해서 나는 '날라리 신자'였다고 해야겠지.
믿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진심과 신심으로 믿지는 않았다고 해야겠지.
하지만 알다시피, '역사의 심판'이란,
순진하고 순수한 믿음만으로 기다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잖아요.
그것은 묵시록적인 예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사유와 행동 속에 있다고,
(그런데 이 말은 또 얼마나 무책임하며 또한
비윤리적인 말인가,
'사유와 행동' 속에라니, 하지만,)
누군가가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유했지만 사유하지 않았고,
행동했지만 행동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이 그림은 정확히 90도를 회전시켜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그림이기도 했다.

북한의 로켓 발사와 김정일 장군의 '다이어트 성공'에 관해
죽마고우로부터 아주 재미있고 감사한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누군가는 섣불리 재단하고 넘겨버릴 것이다, 아마도, 하지만,
웃으면서도 눈물이 났다.
세상에 그 친구처럼 사고가 유연하고 초연한 사람들만 있다면
나는 숨을 좀 쉴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나는 숨을 쉴 수가 없다,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삶의 가치를 고귀한 것으로 떠받드는 이들에게,
하지만 그 고귀함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그것을 가장 소박하고
검소하게 떠받드는 이들에게,
나는 전혀
하고 싶은 말도 없고
섞고 싶은 살도 없다.
고백하자면, 나는 숨 쉬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나는 힘이 빠져 있다. 내 탓이
아니다. 나는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결코, 가장 날카롭고
뼈저린 복수와 원한을 위하여, 복수를 나만의 것으로 만든 그 책임을, 
전가시키기 위해서. 몰염치한 전가가 아니라,
가장 정당하고 적법한 전가를 위해서,
살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사는,

바보들이 천지에 널려 있다.
나는 바보들을 아예 보지 않거나, 숨을 끊어 놓을 것이다.
법은, 바보들을 죽였다는 죄로, 그들을 차별했다는 죄로,
나를 가두고 형을 집행할 것이다.
손가락질,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심장은 필요없다, 시인의 손이
필요할 것이다, 뭍에서 물 만난 것처럼 펄떡펄떡 날뛰는,
그 날것의 손이, 그 손가락들이, 필요할 것이다.
심장은 필요없다, 가리키기 위해서는,
단지 가리키기 위해서라면, 달이 아니라,
겨우 손가락만을 가리키기 위해서라,
할지라도.
심장보다는 손이, 더 빠르게,
더 절절히, 시를 쓴다, 쓰디 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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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세알 2009-04-0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힘이 빠져있어요. 웃음 소리 상쾌한, 사람 좋은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요. '대통령이 바뀐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웃으면서 말했어요. 저도 웃으면서 말했어요. '아니..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그녀를 적으로 돌릴 수가 없어요. 무지몽매하다고 화를 낼 수도 없어요. 수많은 그녀와 그들을 다 적으로 만들 수도 없어요. 그래서 저는 힘이 빠져 있어요.

람혼 2009-04-10 10:57   좋아요 0 | URL
'그녀'가 무지몽매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대통령이라는 텅 빈 기호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는다고 해서 뭔가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어쩌면 '그녀'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일지도 모르죠, 또 우리의 대통령은 지독한 보나파르트주의자인지도 모르고요... 선인과 악인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이 체제 하에서는 그 어떤 선인도 결국 '사천의 선인'일 수밖에 없지 않나, 그 어떤 어머니도 '억척어멈'일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 힘 빠진 생각이 듭니다. 몇 가지 풍경들이 두서 없이 떠오릅니다. 중앙일보는 경기도 교육감 선거 소식을 단신으로도 다루지 않고 오히려 사설에서 혀를 차듯 언급하며 일장훈계를 늘어놓습니다, 교육정책의 엇박자가 걱정된다고. 이 나라의 교육을 걱정하는 척 짐짓 점잖게 훈계하는 그 태도가 더럽고 역겨웠습니다(검찰에 소환되는 신문사 사주 앞에서 "사장님, 힘내세요!"를 목청껏 함께 외치는 기자들이 과연 기자이고 언론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북한 로켓 발사에 대해서는 '그 돈으로 굶주리는 북한주민들을 먹여살려라'라는 취지의 나이브한 주장들이 대두됩니다. 거꾸로 '대한민국'이라는 커다란 이름의 나라는 과연 어떤가 생각해보면, 이 나라가 한 해 국방비로 쏟아붇는 돈의 일부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면 정말 그 거대한 이름에 값하는 국가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찬가지로 '나이브'한 주장으로 저 주장의 '나이브'함을 되갚아주고 싶습니다(도대체 이 정부가 외교의 '외'자는 알고 있는 건지, 혹은 정말 '외'자밖에 몰라서 일을 이렇게 '외'통수를 하는 건지,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정부에 밉살스럽게 보인다는 이유로, PD와 노조위원장을 잡아가고 TV 뉴스 앵커와 라디오 DJ를 교체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말과 입에 몰아닥치는 이 불도저들의 난개발주의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심장보다는 아마도 손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마도...
 

*) 『한국연극』지 2009년 3월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사유의 한 자락을 지푸라기 잡듯 붙잡아 조금 더 깊이 파 볼 생각이다. 이쯤에서 뜬금없이 추억과 잡념 한 자락을 풀어놓자면, 학부를 다니던 시절에 나는 개인적으로 '음악미학'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ㅡ어쩌면 그래서 더욱 더ㅡ카를 달하우스(Carl Dahlhaus)가 쓴 얇고 가벼운 음악미학 책을 아리송하고도 불가해한 마음으로 몇 번씩 되풀이해 읽던 시절이었다. 그 어떤 예술보다 언어와의 '상동성(相同性)'을 강하게 갖고 있는 음악, 그러나 '언어' 자체로의 환원과 소급과 전이에 그 어떤 예술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저항하고 반발하고 있는 음악에 대한 '미학'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물음은, 언젠가부터 내 안에서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두 가지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아마도 이런 것을 두고 '결과론적 해석'이라 부를 수 있을 터). 음악이라는 하나의 예술적 '장르'가 미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못해 쑥스러울 정도로 '자명한' 사실이겠지만, '음악미학'이라는 학제(Disziplin)의 성립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는 지극히 형식적이고도 구조적인 '가능성'에 관한 물음은 여전히 내게 유효하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음악미학이란 내게 여전히 가장 문제적이며 가장 역동적인 '장르'이기도 하다. 보다 확장해서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이 음악과 언어 사이의 '친화성(Wahlverwandtschaft)'이라는 골 깊은ㅡ그러므로, 가장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이 가장 가깝고도 먼ㅡ간극 속에서 헤매고 있는 중이겠다. 언젠가 이 연재가 '무사히' 완료되는 시점에서 글들을 모두 한 곳으로 모으고 엮고 보충하여 책 한 권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다, 음악미학 자체의 어떤 (불)가능성을 타진해보고 싶은 '소박한' 마음에서, 그리고 또한 동시에, 완성되지 못할 어떤 것을 넘보는 '거대한' 욕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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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데우시 칸토르 연출, <죽은 교실>의 한 장면.
 


죽은 교실이 가르쳐주는 삶, 무지한 스승이 가르쳐주는 앎
ㅡ '무지한' 연극과 '해방된' 관객 사이, 연극음악의 미학과 정치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우리에게 연극 <죽은 교실(Umarła Klasa, 1975)>로 잘 알려진 폴란드의 연출가 타데우시 칸토르(Tadeusz Kantor)는 그 자신의 연극론을 밝히는 일종의 선언문인 「죽음의 연극」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관객과 배우의 관계가 지닌 본질적 의미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한 사람(관객)의 맞은편에, 언뜻 우리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동시에 완전히 이질적인 한 사람(배우)이,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넘어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 그때 발생하는 충격의 원시적 힘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칸토르가 '형이상학적 충격'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러한 충격적 힘의 회복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선 어떤 '감각'에 대한 복원에 다름 아닙니다. 아마도 칸토르의 이러한 언명을 읽으면서 동시에 저 유명한 아르토(Artaud)의 '잔혹극론'을 자동적이고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아르토가 말하는 '형이상학적 연극'과 칸토르의 '형이상학적 충격'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칸토르의 연극적 사유와 그 무대화 작업은, 마치 한스 벨머(Hans Bellmer)가 인형(poupée)을 통해 추구했던 미술작업과 유사한 예술­사유의 궤적을 그린다는 점에서, 아르토의 것과는 조금 차이가 납니다.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예술­사유는 오히려 프로이트(Freud)가 말한 의미에서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 곧 'unheimlich'한 경험 위에 가장 강한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곧 그것은 아르토의 연극처럼 '제의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신분석적'인 어떤 것이며, '예술적' 연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교육적'인 연극에 더 가깝게 가닿습니다. 그렇다면 이 죽은 교실이 교육하고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니, 그보다 먼저, 과연 '죽은' 교실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는 있는 걸까요? 

       

AA(Antonin Artaud)와 BB(Bertolt Brecht). 나는 언제나 개인적으로 이 둘을 이러한 두 개의 반복적인 알파벳 '애칭'으로 불러왔는데, 이 두 연극적 '거인'에게서 내가 느끼는 어떤 '거리감'은ㅡ다시 한 번 더 통속적으로 말해ㅡ언제나 실로 가깝고도 멀다. 하지만 보다 정확히ㅡ그리고 더욱 통속적으로ㅡ말하자면, 과연 누가 안 그럴 수 있겠는가!

연극과 교육이라는 주제 안에서 우리는 브레히트(Brecht)의 서사극이 과거에나 지금이나 차지하고 있는 어떤 중심적인 지위를 간과할 수 없을 겁니다. 주지하다시피 서사극은 관객과 무대 사이의 일차원적 감정이입을 차단하고 어떤 심미적이고 비판적인 '거리'를 발생시킴으로써 사회적 의식의 교육이라고 하는 연극적 책무에 봉사합니다. 반면에 그 대척점에는 이러한 '거리' 자체를 무화시키고 승화시키려는 연극적 기획 또한 존재합니다. 아르토의 연극적 이상은 바로 이러한 제의적 기획에 적합한 것이었죠. 그러나 브레히트의 서사극과 아르토의 잔혹극은 관객에 대해 어떤 '교사'의 위치에 서게 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두 연극적 기획은 모두 공연과 관객이 지니고 있는 어떤 '타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연극의 '개혁'이란 바로 이러한 연극적 타성의 제거, 혹은 이러한 연극적 환영으로부터의 탈출을 목표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ㅡ자신의 책 『무지한 스승(Le maître ignorant)』의 논의를 연극과 관객의 문제로 확장시키고 있는ㅡ『해방된 관객(Le spectateur émancipé)』을 통해 이 두 연극적 기획 모두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랑시에르의 논의를 칸토르의 <죽은 교실>에 적용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칸토르의 연극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교육'이란 브레히트나 아르토가 염두에 두고 있던 종류의 교육은 아닙니다. '죽은' 교실이 가르쳐주는 '산'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거리두기를 통한 사회적 의식의 고취도 아니고 거리를 제거하는 제의적 합치의 경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르쳐주는 것은 그 자신이 알 수도 없고 예상할 수도 없는 효과, 곧 어떤 '충격'의 효과입니다. 칸토르가 말하는 '형이상학적 충격'이란 곧 이 예측할 수 없는 관극의 경험,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이질성이 가져다주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에 관련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죽은' 교실의 교사인 칸토르는 또한 '무지한' 스승이기도 한 것이죠. 

   

Jacques Rancière, Le spectateur émancipé, Paris: La Fabrique, 2008.
Tadeusz Kantor, A Journey through Other Spaces(ed. & trad. by M. Kobialka), 
    Berkeley/Los Angeles/Lon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 첫 번째 책은 랑시에르의 최신작(2008) 『해방된 관객』이다. 책의 표제가 된 첫 장 「해방된 관객」의 논의도 그 자체로 흥미롭지만,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사유의 이미지(L'image pensive)」가 가장 큰 개인적인 흥미를 끌었다. 이 글에서 랑시에르는 『밝은 방(La chambre claire)』으로 대변되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사진/이미지론에 대해 흥미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책에 관해서는 조만간 '지극히 개인적인 2008년의 책들'을 정리할 기회에 다시 한 번 언급하도록 하겠다(2009년이 시작된 지 벌써 삼 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음에도, 작년에 읽었던 책들에 관한 짧은 정리도 다 못 쓰고 있는 이 참담한 실상은 내 '정신없는 게으름'의 소산이라고 할 밖에). 두 번째 책은 칸토르가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쓴 글, 연극론, 선언문 등을 담고 있는 요긴한 책이다. 역시나 일독을 권한다.

연극에 대한 일종의 '번역'을 목표로 하는 연극음악 역시 스스로 이러한 '무지한 스승'의 위치에 설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장면 안에서 그에 상응하는 이러저러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음악은 일면적 '번안'의 음악에 그칠 뿐만 아니라 또한 관객을 '열등한' 학생으로만 보는 억압적 설명자의 위치에 머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해방된' 관객은 무엇보다 '평등'의 관객이며, 이러한 평등은 연극적 경험의 영역 안에서 하나의 목표가 아니라 일종의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이러한 '해방된' 관객 앞에서 연극평론가들이 한가하게 매기는 한갓 평점이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연극음악은 이러한 관객들을 위한 어떤 '정치'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음악이 하나의 '프로파간다'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서사극이나 잔혹극에서처럼 미학이 하나의 '윤리'로 파악되지 않고 오히려 감각적 분배를 문제 삼고 재배치하는 하나의 '정치'로 실행되고 경험되어야 함을 뜻할 뿐입니다. 이러한 기획 안에서 연극음악은 관극경험의 집단적 측면과 개인적 측면 사이를 오가는 어떤 비결정성을 극대화하고 무대화하는 '적극적 장치'로 기능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위에서 비로소 미학과 정치를 사유할 수 있으며 또한 사유해야 하는 것이죠. 연극음악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또한 관객에 대해 '무지한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음악의 '가르침'이란 곧ㅡ바타이유(Bataille)가 말한 의미에서ㅡ죽음을 통해 삶을 인식하는, 죽음 속에서조차 삶을 긍정하는, 오히려 죽음을 통해서만 삶의 (불)가능성을 파악하는 역설적 경험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비결정성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익숙함과 생경함 사이에서, 동질적인 것과 이질적인 것 사이에서 동요하는 하나의 '정치성'입니다. 따라서 연극음악은 그 자신의 이질성을 통해 연극과의 동질성을 획득하게 되는 어떤 역설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며, 가르치거나 설명하지 않고 다만 환기함으로써 경험하게 할 뿐입니다. 연극음악은 이러한 복수성/다수성의 경험을 환기함으로써 해방된 관객의 해방된 관극에 봉사합니다. 

 

▷ <죽은 교실>을 연출하는 칸토르: 인형들 사이에 서서, 인형들의 귀에 무언가를ㅡ그리고 또한 어쩌면 '무언가(無言歌)'를ㅡ속삭이고 있는 듯한 저 칸토르의 모습에 주목하라.

아마도 죽은 교실은 그 자체로 '죽어' 있을 겁니다. 그것이 불가능성의 연극이며 또한 죽음의 연극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관객이 그 연극 안에서 보는 것,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죽음만이 아니라는 역설이 가능해집니다. 관객의 맞은편에, 건널 수 없는 건널목을 건너, 가장 친숙하면서도 가장 이질적으로 등장하는 하나의 죽음 속에서, 관객은 예술과 삶이 서로 간섭하고 침투하는 하나의 '미학적' 풍경을 목격하고 번역하게 됩니다. 죽음의 무대는, 마치 조감도(鳥瞰圖)/오감도(烏瞰圖)를 보듯 위에서 내려다본 관객과 배우의 극장 안에서, 하나의 삶을 기억하게 하고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삶이 되는 연극을 상연합니다. 그렇게 다시 환기된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감각, 이전에는 서로 다르게 분할되었던, 하지만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재분할되는, 그러한 한에서의 감각들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관객은 '미학'을 통해 일종의 '정치'를 행하게 됩니다. '정치적인' 연극음악이란 선전도구나 설명자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이러한 해방을 가능케 하는 '미학적인' 음악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칸토르가 말했던 "관객과 배우의 관계가 지닌 본질적 의미"란 이 '무지한' 연극과 '해방된' 관객 사이에 위치한 어떤 (불)가능성의 경험을, 또한 "충격의 원시적 힘"이란 그러한 해방의 힘을 가리키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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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승옥 작가가 스케치해준 초상화. 이번 호 연재분부터 사진 대신 이 그림이 필자의 모습을 대체하게 되었다. 일면식 없는 분이 이렇게 소중한 그림을 그려주신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그림으로 보는 내 자신은 내게 전혀 익숙하거나 친근하지 못하다. 실로 오랜만에 이 '낯선' 감정이 나의 마음을 움직인다. 끈기 있게 무엇을 그려본 지가 참으로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랜만에 그림을 다시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 인생 참, 딱 놀기 좋아하는 한량(閑良)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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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9-03-09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치 조감도(鳥瞰圖)/오감도(烏瞰圖)를 보듯 위에서 내려다 본 관객과 배우의 극장 안에서, 하나의 삶을 기억하게 하고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삶이 되는 연극....

이 문장이 오늘 특히 와 닿습니다. 우리는 각자 배우이자 연출가이자, 그래서 타인의 삶을 보고 기억하고 또 나 자신도 흔적을 누군가에게 주고....그런거란 말이죠.배우도 되고 관객도 되고 무대설치가도 되고....또 인형이 되기도 하는.

초상화가 멋집니다. 특히 두개골 주변부에 흐르는 듯한 연필 흔적이 후광처럼 자연스럽니다.

람혼 2009-03-10 03:55   좋아요 0 | URL
파란여우님 반갑습니다. 저는 "... 또 인형이 되기도 하는"이라는 파란여우님의 말씀이 특히나 가장 가깝고 찌릿하게 와닿는데요, 삶 속의 만남이라는 풍경 안에서 그 인형의 모습이 가장 '헌신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또한 동시에 가장 '적막하게'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두개골 주변의 연필 선들을 저는 가끔 '머리카락'처럼 바라보기도 합니다, 저렇게 머리를 길러서 어깨 위로 넘겨보는 어떨까 하는... 이것은 어쩌면 일종의 '희망사항'일까요? ^^

2009-03-10 0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10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콩세알 2009-03-13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의 아우라를 깨는 것 같아서 조금 두렵지만 용감하게 말해보겠습니다.
'저거 담배 연기 아니에요?' ^^;;

람혼 2009-03-13 18:56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머리카락'이 아닐까 하는 생각(희망사항?)이었는데요.^^
그나저나 콩세알님, 처음 뵙는 것 같아요, 반갑습니다.

콩세알 2009-03-15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너무 볼드(bold/bald) 했나요? ^^;; 처음 뵙는 것은 아니구요 네이버에서 가끔 덧글을 달았었지요. 물론 다른 닉으로...그래서 그냥 편하게 말을 했나봐요.

람혼 2009-03-16 07:13   좋아요 0 | URL
앗, 누구실까요? 궁금해지네요.^^ 왠지 어조에서 '아는' 분이라는 느낌은 들었습니다만... 계속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2009-04-02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02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 『문학동네』 58호, 2009년 봄.

1) 『문학동네』 2009년 봄호에 기고한 서평을 옮겨놓는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무지한 스승(Le maître ignorant)』 국역본 출간에 부친 글이다. 지난해 12월 랑시에르 방한 강연 시기에 발맞춰 간행된 이 책은 현재까지 나온 몇 종의 랑시에르 국역본 중 최선의 번역을 보여주고 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짧은 기간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던 랑시에르의 수용사(受容史)를 되짚어 보자면, 그 짧은 '역사'에는 번역에 있어서 과거 1990년대 초중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수용과 전유를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번역-인프라' 혹은 '독자-인프라'라는 측면에서 그때와 지금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1990년대 당시 우리가 오역되고 오도된 푸코를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자주 읽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작금의 랑시에르 수용 현황은 그보다 크게 나아진 점이 없다는 게 또한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에 '이론의 수입'이라는 '식민지적 풍경'을 둘러싼 어떤 환경(milieu)을 생각해볼 때, 번역의 수준이나 독자의 수용 환경에서 그때보다 지금이 더 나아졌는가 하는 물음에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물론 현재는 당시보다 '관련 전공자'도 더 많아졌고 수입된 이론의 요체를 '체득한' 이들도 훨씬 많아졌다. 하지만 현재에도 과거 못지않게 부주의한 번역들, 잘못 옮겨진 번역들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고쳐나가야 할까? 이는 흔히 말해서ㅡ하지만 이는 또한 흔하다고 해서 진부하게 여겨서는 안 될,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문제일 텐데ㅡ어떤 '시스템'의 문제이다.

2) 물론 시스템의 문제라고 말하면 여러 가지를 떠올려볼 수 있을 텐데, 그 중 내가 여기서 개인적으로 말하고 싶은 부분은 서로 연결되는 두 개의 문제, 곧 글의 호흡과 인터넷 공간의 글쓰기라는 문제이다. 먼저, 글의 호흡 문제: 일간지나 주간지 단위로 작성되고 배포되고 소화되는 어떤 이론의 자리란, 오직 짧은 단위의 호흡으로만, 다시 말해, 기껏해야 서너 개의 단락 안에서 '소개하고 해석하고 진단하는'ㅡ혹은 '그렇게 해야 하는'ㅡ일련의 극히 짧은 호흡을 통해서만, 스쳐지나듯 나타났다 사라져 버린다. 여기서 문제는 글 자체의 물리적 분량이 아니라 그러한 분량 안에서 덩달아 짧아지는 어떤 사상(思想)의 호흡이다. 또한 이렇게 짧아진 글의 호흡이 가져온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른바 이론에 대한 '소화불량'과 '주마간산'의 양상이다(아래 나의 글이 실린, 소위 '문예 계간지'에서도 이러한 글의 호흡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체계적인 구조를 가진 저작이 '실종'되고 조각 글들의 병치와 합본으로서의 책이 '창궐'하게 된 배경을 해석하는 데에는 물론 '책'이라고 하는 유형/무형의 실체를 둘러싼 다양한 '정치경제적' 변화의 요소들이 고려돼야 하겠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글쓰기의 호흡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게 역시나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3) 다음으로, 인터넷 공간의 글쓰기 문제: 글의 호흡 문제는 사실 이러한 '최신의' 글쓰기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최근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인터넷 공간의 저작권 문제에 있어서는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물론 여러 측면에 걸쳐져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글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옮겨온ㅡ역시나 짧은 호흡의ㅡ글들을 수록하고 배열하기만 하는 공간은 자칫 인터넷 공간의 글쓰기ㅡ글 '올리기'라고 해야 할 것인가ㅡ를 공허한 형식으로 만들 수 있다(글의 분량이 아무리 짧다 해도, 그리고 그 글이 담고 있는 생각이 내 자신의 것과 대척점에 서 있다 해도, 자신의 생각과 글로 이루어진 공간을 보고 만나는 일은, 그래서 내게 가장 흐뭇하고 기분 좋은 일 중의 하나이며, 그러한 공간들이 서로 교류해 이루어내는 하나의 '공동체'는 내가 생각하는 지극히 개인적인ㅡ따라서 지극히 '개인적으로' 집단적인ㅡ'이카리아(Icaria)'의 모습이기도 하다). 정보의 공유와 확산에 있어서 인터넷이 지닌 긍정적이고도 활동적인 역할은 자명하지만, 그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매체로서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상실한다면 쓰레기가 넘치는 세상에 쓰레기 하나를 더할 뿐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말하기'란, 그러므로 내게는 하나의 '징후적' 기만인데,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최근에 유명해진 어떤 한 책을 읽지 않고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기'에 관해 비판적으로 말하고 있는 나 또한, 아마도 그러한 기만적인 술책을 행하고 있는 자들 중 하나일 것인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조차 읽지 않고 말하기란, 그러므로 또한 얼마나 역설적이고 징후적인가, 하여 다시 묻자면, '읽기'라는 행위는 무엇이며 또 그 행위의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로 규정될 수 있을까). 나는 어쩌면 여기서 이 '포스트모던'한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을 지극히 '반시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주체성을 강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체성'과 '주체화'의 문제는, 지금, 여기서, 새롭게, 다시, 사유되어야만 한다.

4) 반면 번역자들이 자신의 번역본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들에 대한 정오표를 과거에 비해 신속하게 올리고 또한 그에 대한 '피드백'을 기대할 수 있게 된 환경은, 인터넷 공간과 책의 공간이 만나는 장에서 이루어진 긍정적인 측면 중 하나일 것이다. 랑시에르의 번역과 관련된 어떤 구체적이고 특수한 '지층'과 '환경'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 '랑시에르'라는 고유명이 번역과 수용이라는 지층과 환경 '일반(überhaupt)'에 대한 하나의 '바로미터' 혹은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있고 또한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랑시에르의 사유 내용이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의 이론과 실천 영역에서 전유되는 방식과 양상도 중요하겠지만, '랑시에르'라는 고유명과 그 '형식' 자체가 우리에게 '징후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수용'과 '번역'의 구조 혹은 현황 역시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곱씹어야 할 문제라는 것 역시 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내가 현재 한국의 이론적/실천적 현황에서 '랑시에르'라는 '고유명'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역설적이게도, 글의 초입(初入)부터 사족(蛇足)이 길어졌지만ㅡ그것도 번호까지 매겨 가며ㅡ, 주지하다시피, 이는 내 몹쓸 고질병이다. 이하 기고문 전문을 관련된 이미지 몇 장과 함께ㅡ역시나 내 몹쓸 예의 사족들을 첨부해ㅡ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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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cques Rancière, Le maître ignorant, Paris: 10/18, 2004(1987¹). 
 


'무지한' 스승의 '보편적' 가르침: 지적 해방이란 무엇인가
ㅡ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궁리, 2008) 서평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영화 <13번째 전사(The 13th Warrior)>(1999)에서 우리는 '번역'이라는 개념 혹은 '학습'이라는 경험에 대해 반추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장면을 하나 목격하게 된다. 북구인들의 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던 한 아랍인(안토니오 반데라스)이 단지 이들의 대화를 끈질기고 주의 깊게 듣는 과정만을 통해서 그 전혀 이해할 수 없던 웅얼거림을 점차 분절된 언어로 파악하게 되는 '기적'과도 같은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반데라스에게 단지 웅얼거림으로만 들리던 그 말들은 이제 그도 관객도 알아들을 수 있는 하나의 언어, 곧 영어로 바뀌어간다). 『무지한 스승(Le Maître ignorant)』에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이런 '영화'와도 같은 사례가 1818년 루뱅 대학에서 실제로 일어났으며, 심지어 그러한 '학습'의 방식을 "보편적 가르침(enseignement universel)"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기적'이나 급작스런 '개안(開眼)'도 아니고 '천재적인 어학실력' 같은 것은 더 더욱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때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겪게 되는 어떤 과정에 대한 한 탁월한 사례라는 것이다. 지능은 모두에게 평등한 것이며 그 자체로 위계를 갖지 않는다. 『무지한 스승』에서 랑시에르는 하나의 고유명을 중심축으로 삼아 이러한 평등의 원리를 시험대 위로, 교단 위로 올려놓는다. 그 고유명은 바로 조제프 자코토(Joseph Jacotot)이다. 

 

▷ 안토니오 반데라스(Antonio Banderas) 주연, 영화 <13번째 전사>의 포스터.

왜 자코토라는 이름이 문제가 되는가? 망명한 혁명가이자 교육자였던 자코토는 루뱅 대학에서 하나의 '지적 모험'을 감행한다. 네덜란드어를 전혀 할 줄 몰랐던 프랑스인 선생 자코토는 반대로 프랑스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 교재 한 권을 건네주었고, '놀랍게도' 학생들은 단지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의 비교와 그 반복을 통해 프랑스어 구문들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냈던 것이다. 자코토의 이 '우연한 경험', 그리고 이를 통해 그가 정식화하게 된 '보편적 가르침'의 내용은, 교사와 학생 사이 혹은 개개의 학생들 사이에 지능의 차이가 존재함을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이던 당시 유럽의 교육계에는 하나의 '추문'에 가까웠다(그리고 이는 현재에도 쉽게 '잊혀지는' 진실이며 또한 여전히 추문이기도 하다). 지적 해방의 교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설명자'가 아니라 단지 '무지한 스승'이라는 이 역설과도 같은 주장을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랑시에르는 설명자에 의한 교육을 '바보 만들기(abrutissement)'라는 말로, 무지한 스승에 의한 교육을 '해방(émancipation)'이라는 말로 명명하면서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 교육과 공동체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Jacques Rancière, La nuit des prolétaires, Paris: Hachette, 2008(Fayard, 1981¹).
Jacques Rancière, Le philosophe et ses pauvres, Paris: Flammarion, 2007(Fayard, 1983¹).
*)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아마도 랑시에르의 책들 중 가장 먼저 소개되어야 할 책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는 개념은 물론 '정치와 미학의 관계'라는 랑시에르의 중심적 주제에 있어 이 책은 하나의 이정표, 하나의 전환점을 내포하고 있는 일종의 '원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노동자의 목소리'를 찾는다고 하는 어떤 순진하고 적극적인 정체성 탐색의 작업이 내포하고 있는 또 다른 '아포리아'를 가장 생산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ㅡ그리고 그 이론적 진행 안에서 가장 '수행적으로'ㅡ전복함으로써, '노동자의 목소리'를 찾는다는 행위 자체를 보다 '징후적'이고 '정치적'인 시각에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가장 '미학적'인 것 안에, 곧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대한 의문과 재사유 안에, 가장 '정치적'인 혁명과 해방의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는 랑시에르의 기본적 입장은 이미 이 책에서 정립되고 있는 것. "프롤레타리아라는 존재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욕망하는 이러한 변절자들이 어떠한 우회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노동자 정체성의 이미지와 담론을 형성하게 되었는가(par quels détours ces transfuges, désireux de s'arracher à la contrainte de l'existence prolétaire, ont-ils paradoxalement forgé l'image et le discours de l'identité ouvrière)?"(La nuit des prolétaires, p.10)라는 물음은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관통하는 가장 중심적인 문제의식에 다름 아니다. 지식인 문제와 관련하여 이상의 논의를 확장/심화시키고 있는 『철학자와 그 빈자들』 역시 일독을 요하는 책(그러므로 또한 '노동자의 목소리'를 노동자에게 '온전하게' 되찾아주는 것으로 상정되고 설정된 어떤 '지식인의 임무'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허구이며 기만이다).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 의한 '보편적 가르침'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보편적 가르침은 무엇보다 비슷함에 대한 보편적 입증이다. 이는 모든 해방된 자들, 즉 스스로를 다른 모든 이들과 비슷한 인간으로 생각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Jacques Rancière, Le Maître ignorant, Paris: 10/18, 2004(1987¹), p.71, 국역본 86쪽. 번역은 일부 수정하였다. 이하에서는 인용문 뒤 괄호 안에서 원서 쪽수와 국역본 쪽수만을 병기하기로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각자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맡은 바 일에 충실'하라고 말하는 원칙은 일견 지당한 말처럼 보이지만, 이는 '그 자신의 일을 제외한 다른 일은 하지 말라'고 하는 제한적이고 분할적인 명령이며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 지적 해방과 정치적 주체화를 가로막는 걸림돌로서 오히려 지배적 질서의 억압을 더욱 공고히 할 뿐이다. 랑시에르가 다른 책 『프롤레타리아의 밤(La Nuit des prolétaires)』(1981)과 『철학자와 그의 빈자들(Le Philosophe et ses pauvres)』(1983)에서 중점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문제 역시 바로 이러한 '플라톤의 거짓말', 곧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맡은 바를 수행하며 각자의 분수와 조건에 맞게 살아가라는 억압적 명령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랑시에르가 오랜 시간 천착했던 문제 중 하나는 노동자 자신의 '목소리'란 어떤 것인가, 곧 '프롤레타리아적 정체성'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런데 랑시에르의 결론은, 노동자라는 계급의식을 자체적으로 구성하는 '동일자적' 정체성은 없다는 것, 오히려 노동자의 정체성 자체가 부르주아적 정체성과의 모방적/대항적 관계를 통해 구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랑시에르가 노동자들의 문서고 연구를 통해 낮 동안의 노동을 마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밤의 시간, 곧 전혀 은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말 그대로의 '프롤레타리아의 밤'이라는 시간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정치와 혁명의 심급을 '감각적인 것의 나눔(le partage du sensible)'이라는 개념을 통해 감성학/미학의 차원에서 새롭게 사유하고자 하는 랑시에르의 근본적 문제의식도 사실 그의 이러한 '이론적 경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발견한 '프롤레타리아의 밤'이란 곧 철학/사유하는 자와 생활/노동하는 자를 가르는 분할의 방식에 대한 도전의 시간이었으며, 또한 그렇기에 그 밤 자체가 이미 어떤 '감성적/미학적 전복'을 준비하고 잉태하는 시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2006년에 새롭게 덧붙인 『철학자와 그의 빈자들』의 서문에서 "노동자의 해방은 무엇보다 하나의 감성적/미학적 혁명(une révolution esthétique)이었다"고 단언하고 있다(Jacques Rancière, Le Philosophe et ses pauvres, Paris: Flammarion, 2007(1983¹), p.vi). 이러한 지적 해방의 주제와 평등의 원리는 『무지한 스승』 안에서 자코토의 경험과 교육의 문제를 중심으로 특화되고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저 '플라톤의 거짓말'을 비판하듯 『무지한 스승』에서 교육 안의 '소크라테스주의' 또한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스승과 학생 사이에 쉽게 전제되는 지능의 우열이 아니라 오직 스승의 의지와 학생의 의지가 만나는 곳에서, 곧 평등의 원리가 실천되고 입증되는 곳에서, '보편적 가르침'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보편적 가르침의 모든 실천은 다음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너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63/78) 이렇듯 '무지한 스승'의 가르침은 학생에게 어떤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을 해방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다. "무지한 자는 더 적게 하는 동시에 더 많이 할 것"(54/68)이라는 역설은 그래서 가능해진다. 이러한 지능의 평등을 전제로 할 때에만 오히려 학습과 대화 자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해방은 이 평등에 대한 의식이다. […] 인민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지도 부족이 아니라 인민의 지능이 열등하다는 믿음이다."(68/83) 

   

Alain Faure & Jacques Rancière(éds.), La parole ouvrière, Paris: La Fabrique, 2007(1976¹).
Jacques Rancière, Le partage du sensible, Paris: La Fabrique, 2000.
*) 랑시에르가 알랭 포르와 함께 편집한 『노동자의 말』은 『프롤레타리아의 밤』으로 가는 일종의 가교 역할로서도 중요한 책이지만, 그 자체로 랑시에르가 알튀세르(Althusser)와 '단절'한 이유와 향후 천착했던 작업의 요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또한 중요한 '자료집'이다(랑시에르가 편집한 루이-가브리엘 고니(Louis-Gabriel Gauny)의 책 『평민 철학자(Le philosophe plébéien)』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일독을 요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문서고를 뒤지는 랑시에르의 이미지는 여기서, 광기와 감금의 역사적 기록물들 속에 거주했던 푸코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아마도 '푸코'라는 고유명과 함께, 그리고 다시금 '랑시에르'라는 고유명과 함께, 우리는 저 '역사'라는 작업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다시 묻자면, 왜 자코토의 이름은ㅡ그것이 단순히 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넘어ㅡ왜 하나의 '고유명'일 수밖에 없는가? "자코토는 진보의 기치 아래 평등이 지워지고 지도라는 미명 아래 해방이 지워지고 있음을 생각했던 유일한 이였다."(222/252, 번역 일부 수정) 이러한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자코토 이후 그 제자들이 행한 교육에서 어떤 '진보주의적 오염'의 요소를 발견하고 다시금 자코토를 참조할 것을, 그의 저 '우연한 경험'의 내용과 '무지한 스승'의 개념으로 돌아갈 것을, 그래서 다시금 지적 해방과 평등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고할 것을 권유한다. 진보주의적 교육자들조차도 저 자코토의 평등의 원칙을 쉽사리 잊고 다시금 불평등의 전제에 기초해 평등을 쟁취해야 할 하나의 목적으로 삼는 오류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보편적 가르침'은 해방보다는 지도(instruction)를 중시하는 저 '설명자'의 교육에 다시금 봉사하게 될 위험이 크다(소위 '진보주의적' 교육에 있어서도 상황이 이럴진대 하물며 '보수적인' 교육에 대해서는 더 말해 무엇하랴만, 다만 『무지한 스승』이 진보론자들의 교육론에 대한 보수적 교육론의 비판 근거로 쓰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굳이 덧붙여두는 것은 아마도 나의 노파심 때문일 터). 자코토가 행했던 교육적 모험은 오히려 지금 이 시대에 다시금 새롭게 사유하고 재전유해야 할 무엇이다. "자코토는 진보의 표상과 제도화를 평등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모험에 대한 포기로, 공교육을 해방에 대한 애도작업으로 지각했던 유일한 평등주의자였다."(222-223/252, 번역 일부 수정) 따라서 마치 제도화된 타성적 기독교를 넘어서 예수의 이름이 언제나 다시 참고하고 회귀해야 할 하나의 '원점'인 것과도 비슷하게, 랑시에르에게 자코토의 이름 또한 평등의 원리와 보편적 가르침, 그리고 그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지적 해방의 문제에서 언제나 다시금 되돌아가고 재사유해야 할 하나의 출발점의 위치를 점한다. "자코토라는 이름, 그것은 진보라는 허구 아래 매장돼버린 이성적 존재들의 평등을 한탄하며 동시에 비웃는 이러한 앎이 지닌 고유명이었다."(223/253, 번역 일부 수정) 그러나 역사적으로 유달리 도드라져 보이는 자코토의 이 '특수한' 사례는 유일무이한 돌연변이와도 같은 어떤 '예외'가 아니다. 랑시에르에게 자코토의 이름이 하나의 '고유명'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평등의 원리를 확인하고 입증하는 하나의 '보편적' 사례를 증언하고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 '무지한 스승'의 고유명, 조제프 자코토(Joseph Jacotot).

그런데 자코토는 이 "보편적 가르침은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만 또한 그 "보편적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본다.(231/261) 자코토가 했던 예언, 그리고 그 예언을 '자리바꿈'하면서 다시금 랑시에르가 반복하고 있는 이 예언을 오늘날 한국 교육의 몇몇 사례에 '성공적으로' 적용해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축복일까 저주일까. 일제고사에 반발하며 학생들과 체험학습을 나갔던 교사에게 해임과 파면을 선고하고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는 우열반의 편성을 마치 개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인 양 으스대며 국제중과 자사고의 설립이 소위 '교육선진화'의 지름길인 것처럼 선전하는 이 땅의 척박한 공교육 풍토는 그 자체가 지능의 평등이라는 전제와 보편적 가르침의 원칙을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걸림돌이다. 또한 소위 '국가정체성'의 확립이라는 허울 좋은 미명하에 특정한 역사적 사실과 그에 대한 관점들을 '자학적'이고 '좌파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배척하고 말소하려는 정부의 태도는 그 스스로가 그렇게 비판하고 비난해 마지않는 일본 우익 교과서들의 행태와 어떻게 다른가? 정부는 '국민'이라는 '열등한' 학생을 대상으로 특정한 국가정체성과 민족의식을 가르치려 드는 '유식한' 스승과 '설명자'의 위치에 섬으로써 오히려 그 자신의 '무식함'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미네르바의 학력을 문제 삼아 그 '자질'을 비판하는 보수언론들 또한 이러한 '무식함'에서 그리 멀지 않다). 이러한 여러 상황들은 소위 보수는 물론이거니와 자칭 진보 역시나 자코토가 예언한 저 보편적 가르침의 '좌절'을 허투루 흘려들어서는 안 되는 절박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예언의 다른 한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또한 이러한 보편적 가르침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랑시에르가 말하듯, "평등은 주어지거나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고 입증되는 것"(227/257)이며, 따라서 "평등은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출발점, 모든 정황 속에서 유지해야 할 하나의 가정"(228-229/258)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자코토'의 이름을, 그리고 '랑시에르'라는 고유명을 우리의 자리로 소환해 다시 사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자크 랑시에르, 『 무지한 스승 』(양창렬 옮김), 궁리, 2008.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번역에 관한 것이다. 이상 몇 부분의 인용에서 번역을 일부 수정했으나, 『무지한 스승』의 국역본이 그간 오역의 문제로 말이 많았던 몇몇 랑시에르 국역본들과 비교했을 때 가독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은 실로 다행스럽고 긍정적이다. 작년에 랑시에르의 한 국역본을 두고서 번역자가 오역을 비판한 이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건도 있었던바, 여기서 내가 랑시에르 책의 '번역'에 대해 개인적으로 특별히 지적하고자 하는 이유는 오직 이 하나의 반문(反問)을 던져보기 위함이다. 만약 한국의 독자들에게 랑시에르 책의 프랑스어-한국어 대역본을 건네준다면? 그런데 그것이 오역으로 가득 차 있는 책이라면? 우리의 독자들은 과연 저 자코토의 학생들처럼 프랑스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인가? 바꿔 묻자면, 그럴 때 번역자는 독자들에게 과연 '무지한 스승'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인가? 번역자들이 이 반문을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것은 물론이겠지만, 또한 '무지한 스승'이라는 개념을 그 스스로 '오용'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용어를 차용해서 말하자면, 무지한 스승이란 결코 자신의 오역을 통해 학생들에게 교훈을 안겨주는 '반면교사(反面敎師)' 같은 것이 아니기에.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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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9-03-02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면에서 읽지 못한 서두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여담이지만, 계간지들이 랑시에르로 도배돼 있더군요. 대단히 '한국적'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람혼 2009-03-03 01:16   좋아요 0 | URL
서론이 길어지는 것, 글이 가는 골목 어귀 혹은 마주치는 그림마다 사족을 붙이게 되는 것, 이게 제 '병증'의 요체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른 계간지는 확인해보지 못했는데, 지난 겨울 방한 강연도 있고 했으니, 아마도 봄호들에서는 랑시에르를 많게든 적게든 다뤄줄 거라는 예상은 했습니다. 이도 어쩌면 지극히 '한국적인' 예상을 하게 된 경우에 해당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요...^^

2009-03-03 0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3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3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4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9-03-05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랑시에르가 이야기하는 "보편적 가르침"이라는 것은 칸트의 보편윤리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네요.

"네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설령 그것이 "뿌리 내리지 못"하더라도 실질적인 '평등'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실을 가로지르는, 관철시켜내야만 하는 하나의 초월적인 (보편)원칙이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해 주는 것으로 랑시에르를 이해해도 될까요?

람혼 2009-03-05 02:14   좋아요 0 | URL
지난 몇 년 동안 랑시에르의 책들을 계속 읽어 오면서 제게도 또한 그가 가장 예리하게 주석하고 내밀하게 접근하고 있는 철학자가 바로 칸트라는 생각이 거의 심증과 물증으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랑시에르가 지닌 어떤 '급진성'이 바로 이러한 칸트 독해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느낌인데요, 특히나 리오타르의 칸트론을 비판하면서 칸트의 숭고론과 판단력 비판의 문제의식을 새롭게 재전유하고 있는 랑시에르와 마주치게 되면 그러한 느낌이 더욱 강화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 시대ㅡ얼마나 어렵고 두려운 단어인가요, '이 시대'ㅡ에는, 래디컬한 '마르크스주의자'보다 래디컬한 '칸트주의자'가 더욱 간절히 요청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 그런 느낌이 들면서, 랑시에르와 가라타니 고진을 잇는 어떤 접점에 다시금 시선을 보내게 됩니다. 오랜만의 yoonta님 댓글이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