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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음과 모음 』, 2009년 봄, 인문편/소설편.
*) 『자음과 모음』 2009년 봄호에 기고했던 글을 옮겨놓는다. 다른 문예계간지와 비교해 분량이 만만치 않은 두툼한 잡지라 틈틈이 읽는 데에도 시간이 좀 걸렸지만, 모처럼 문예계간지 독서에서 알찬 체험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호부터 4회 정도 연재를 맡게 되었는데, 그 어떤 지면보다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주어진 셈이다(일천하고 부족한 사람에게 이런 공간을 마련해준 편집부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일전에 써두었던 주제를 확대/심화시켜 보았는데, 여기서 나의 중점은 아마도 마지막 두 문단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관해 원하는 만큼 자세히 서술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글쟁이들이 흔히 말하는 '시간과 지면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아직 내 안에서 채 영글지 못한 사유의 한 자락을 내 스스로 조금 더 부패시키거나 지연시키고 싶기 때문이었다(그러므로 이 글의 말미는 어쩌면 사실 내가 딱 '원했던 만큼', 그만큼일 수도 있다). 마지막 두 문단 이후와 관련해서 이 글에 덧붙여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문학동네, 2008)를 조영일의 『한국문학과 그 적들』(도서출판 b, 2009), 고명철의 『뼈꽃이 피다』(케포이북스, 2009) 등의 평론집과 비교하며 독해하는 과정을 서술할 계획이었지만, 이에 관해선 나중에 독립된 글 한 편으로 다루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에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 개인적으로 도드라지게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박민규 소설의 어떤 '징후성'이다(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징후성'이란 어떤 '비대표적 대표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징후성은 작품 자체의 징후성으로 그치지 않는다(이와 결부 혹은 단절되는 맥락에서 박해천 선생은 얼마 전 내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龍'자가 네 개나 들어가는 제목을 가진—박민규의 단편 하나를 추천해주셨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품었던 것은, 야구만큼이나 무협지에도 별반 열광적 관심이 없는 나의 개인적 취향은 언젠가는 '규명'되어야 할 일종의 '연구 대상'일 것이라는 새삼스런 생각 한 자락). 덧붙이자면, 나는 항상 박민규의 소설(대표적으로는 그의 『핑퐁』)에 가해지는 '과소적' 혹은 '과잉적' 해석에 대해 언제나 불편한 감정을 품어 오고 있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찬양하기 혹은 걱정하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모 아니면 도. 예를 들어 비약하자면,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어구에 대해 갖게 되는, 비평 안의 어떤 불만 혹은 불편함 말이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한 가지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한 마디 이상씩은 언급한 이러한 징후성보다 더 '징후적'인 것이 존재하며, 또한 사실 이것이 바로 내가 깊이 천착하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른바 '근대' 또는 '근대문학'을 둘러싼 외형적이고 직설적인 대화나 논쟁에는 별 관심이 없다. 비평가는 '근대' 그 자체를 말할 때가 아니라 '근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은연중에 의도치 않게 드러낼 때 그 가장 '근대적'인 성격을 노출한다. 이는 '과소적'으로 말하자면 한 비평가의 방법론과 소명의식에 녹아 있는 '근대-문학적' 사고일 테고, 보다 '과잉적'으로 말한다면 비평 그 자체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는 하나의 '근대적' 한계지점일 것이다(우리는 이를 오랫동안 '모더니티'라는 가장 거대한 말로 가장 소심하게 불러오고 있다). 범박한 말로 표현하자면, 나의 주된 관심사 역시나 일종의 '메타-비평'에 가닿아 있다고 해야 할 텐데, 그렇지만 이러한 개인적인 주제의식은 '비평에 대한 비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평의 조건에 대한 비평'을 문제 삼는 것이라고, 똑같이 범박한 표현을 차용해서, 일단은 내 나름대로 선을 그어둔다. 한 소설가 선배는 개인적인 통화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람혼아, 그렇고 그런 비평 같은 건 쓰지 말고, 제대로 된 비평을 써라." 이 제한된 표현 안에 선배가 채 모두 담지 못한 의중이 얼마나 많겠는가(또한, 여느 말처럼, 이는 또 얼마나 많은 오독의 여지를 남겨두는 말인가, 하는 의문도 드는데, 어쩌면 이는, 김지하의 「오적」에 나오는 저 오래된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의 다른 버전일 것인가). 나는 내 스스로를 비평가로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지만, 또한 비평의 정의란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기에, 또한 창작자와 평론가 사이의 골이란 그렇게 깊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저 선배의 조언을 나는 내 방식대로 흡수하고 섬겨 담는다. 하여, 쓸 수밖에. 말하지 않고 쓸 수밖에. 글의 발 아래 납작 엎드린 채 일종의 '행복감'을 느끼는 한 명의 매저키스트로서(그런데, 문득, 순진한 척 묻자면, 이 매저키스트에게 '반란'은 가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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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
ㅡ 이사만루(二死滿壘)와 무타무주(無打無走), 근대와 리셋(reset)의 욕망
13년 전의 이야기 한 자락: 때는 1996년 여름, 나는 서울의 한 서점에서 당시 신간으로 출간되었던 사이토 지로(齋藤次郞)의 책 『아톰의 철학』을 찾고 있었다(이 책은 데츠카 오사무(手塚治虫)의 생애와 그의 만화 세계를 다룬 책이었다). 다만 그때 내가 범했던 '결정적인' 패착이란 이 책을 만화 코너에서만 열심히 찾고 있었다는 것. 지금과 같은 우수한 성능의 검색용 컴퓨터를 서점에서 찾을 수 없었던 시기, 나는 나만의 서툴고 원시적인 검색 방법에만 의존하는 데에 스스로 조금씩 지쳐갔고, 결국에는 서적의 분류법에 있어서 나와는 비교가 안 되는 '전문가'인 서점 직원에게 책이 있는 장소를 문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내가 알아낸 놀라운 사실은, 그 책이 '당당하게도' 철학 코너에 분류되어 있었다는 것.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 서광사와 민음사의 책들 가운데에, 문학과지성사와 창작과비평사의 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얄미운' 곳에 그렇게 '얄밉게' 꽂혀 있었다는 것. 푸코가 보르헤스의 중국식 동물 분류법을 보면서 느꼈던 어떤 인식론적인 '충격'은 사실 그리 멀리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윤대녕의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이 처음에는 '레저' 코너에 분류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훨씬 더 나중의 일이다.
▷ 데츠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
다시 14년 전의 이야기 한 자락: 내가 『아톰의 철학』을 찾으면서 느꼈던 이 실소를 동반한 기묘한 감정을 다카하시 겐이치로(高橋原一郞) 또한 비슷하게, 하지만 나보다는 가볍게, 아마도 조소를 띠며, 어쩌면 약간은 자조 섞인 감정을 느끼면서, 그렇게 느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1988년 일본에서 출간되었고 1995년에 처음 국역본이 나온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다: "필자는 이 작품에서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의 한 시대의 정신 풍경을 그려보려고 했다. 그 때문에 '야구'라고 하는 도구를 필요로 한 것이다. 그 때문인지, 많은 책방에서 이 작품이 스포츠 코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불평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한 번 쓰인 작품은,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까."(『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박혜성 옮김, 웅진출판, 1995, 3쪽)
▷ 다카하시 겐이치로, 『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박혜성 옮김), 웅진출판, 1995.
이 짧은 문장들 속에서 다카하시는 실로 많은 말들을 풀어놓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문학평론가는 물론이거니와 야구해설자조차도 실소하게끔 만들 귀찮고 성가신 '문학적' 아포리아(aporia)가, 그것도 아무리 줄여봤자 최소한 세 개의 아포리아가, 너끈히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첫째, 여기에는 분류법의 문제가 있다. '아톰의 철학'이라고 하면 철학 코너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라고 하면 스포츠 코너로 분류되는 저 '웃지 못 할 몰상식'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이 문제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이 '당연하게' 보이는 비웃음의 근거를 그 자체로 고착시키거나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아마도 다카하시 또한 그럴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분류법이 정정되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분류되고 있다는 하나의 '현상'인 것. 그러므로 이를 비웃거나 탓하기보다는—그 어느 누구도 그럴 수 있는 '자격'은 없을 것이다—마치 다카하시의 소설 속 주전 투수가 라이프니츠(Leibniz)를 흉내 내는 것을 다시 한 번 흉내 내듯 "칸트 할아범"(『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59쪽)을 흉내 내면서, 우선 이 글은 이러한 비웃음의 담론 체계를 형성시켰던 가능 조건들을 물어야 할 것이다(그러므로 오히려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나의 비웃음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자체, 저러한 분류법 앞에서 그것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분류의 정신이 지닌 어떤 '에피스테메'일 것). 둘째로, 문학이 한 "나라의", "한 시대의 정신풍경을" 그려낸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저 오래된 사회적 반영론의 테제를 굳이 새삼스레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혹은 헤겔의 저 시대정신(Zeitgeist)을 어렵사리 기억해내지 않더라도, 어쩌면 그 자체로 역시 이미 '지당한' 명제일지 모른다. 누군가는 이에 대해 순진한 의심을 품기도 했겠고, 또 누군가는 이에 대해 두 번 이상으로 중첩된 긍정과 부정의 회로를 거쳐 정당함과 부당함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 어디쯤에 이미 당도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불행히도 우리에게 이러한 문제는 아직도 여전히 '살아 있는' 문제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글은 또한 '문학은 무엇을 그려내는 것인가'라고 하는, 케케묵은 문학적 대상에 관한 물음을 다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과연 "한 번 쓰인 작품은,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의 국역본이 출간되었던 1995년이라면, 내 기억으로는 이 땅에 '저자(auteur)의 죽음'이라든가 '텍스트(texte)의 독립적이고 구조적이며 비인격적인 성격' 등등의 이론들이 맹위를 떨치며 한 바탕 장안을 풍성하게 풍미하던 시기였다. 나는 이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부르기보다는—'그렇다면 그 이후 현재에 이르는 시기는 무슨 시기란 말인가'라는 물음은 차치하고라도—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적 이식문학론의 시기'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인데,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저 유명한 '이식문학'의 테제와 그 주창자 임화(林和)를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단지 그대로 지나가버리기만 했던 유행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또한 작가와 작품 사이에서 벌어졌던 저 오래된 숙명적 역전과 재역전의 전적에 관해 재차 삼차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처럼 이 글은 적어도 저 세 가지의 골치 아픈 난제들 모두를 정확하고 적확하게 분석해가는 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 임화의 빛바랜(?) 사진 한 장.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이 '네 번째' 문제는 언뜻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어쩌면 '문화' 일반,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법' 일반에 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일견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일종의 접속사에 관한 문제라는 외양을 띠게 되기 때문이다. 다카하시의 저 한국어판 서문 속에서 내가 시급하게—비록 14년이라는 시간차가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욱 시급하게, 곧 니체적인 의미에서 가장 '반시대적으로(unzeitgemäß)'—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사실 따로 있는데, 그가 사용한 두 개의 '그 때문에'가 바로 그것. 첫 번째 '그 때문에':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의 "정신풍경"을 그리려 한다는 이유 때문에 야구라는 도구가 필요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나? 두 번째 '그 때문에': 이 문제는 사실 앞의 세 가지 물음들 중 첫 번째 물음, 곧 '자연스러운' 분류법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보다 미묘한 것이다. 이 문제는, '야구'라는 단어가 책 제목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도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라는 긴 어구를 이루고 있는 저 모든 수식어들이, 곧 성질(quality)과 양태(mode)와 국적(nationality)에 관한 저 모든 꾸밈말들이, '야구'라는 한 단어만을 집중적으로 꾸며주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해서 이 책이 스포츠 코너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냐는, 그런 일도 가끔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겠냐는, 분류 체계의 성립과 인정과 수용에 관한 투덜거림의 외양을 취하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이것이 일종의 '투덜거림'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마도 이 두 번째 '그 때문에'는 다카하시의 서문 속에서 "그 때문인지"라고 하는 한 발짝 물러선 어법으로 변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곧 분류법의 기원, 보다 정확히는 하나의 분류법이 가능하게 되는 어떤 '환경(milieu)'을 문제 삼는다. 따라서 우리의 중점은 분류 체계 일반의 구성 요소와 그 법적 정당성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분류법을 두르고 있는 테두리가 만들어내는 여백, 어쩌면 이미 그 자체가 특정한 하나의 분류법을 미리 지시하고 구획하고 있는 '유일한' 잣대라고 해야 할 바로 그 여백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여백' 또는 '바깥'은 문학이 품고 있을 저 스트라이크 존(strike zone)의 비가시성(非可視性)과 비인과성(非因果性), 그 보이지 않는 공간을 보이게 만드는, 그 원인 없는 시간에 원인을 부여하는, 가시성과 인과성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 박민규. '작가적' 정체성의 몇 가지 요소들: 안경과 담배, 그리고 반지들.
2003년 혹은 1982년의 야구 이야기 한 자락: 이러한 '그 때문에'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시도하고 있는 또 다른 '야구 소설' 하나(하지만 이 '닳아빠진' 두 소설들을 '야구 소설'로 분류하고 명명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분류법일까). 분명히 1982년에 출간되었다면 당연하게도 서점의 야구 코너에 가장 먼저 가서 꽂혀 있었을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화자는 야구 경기를 "인생의 축소판"으로 언급한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한겨레신문사, 2003, 86쪽). 왜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인가? 어째서 80년대에 소년기를 보낸 화자의 시공간은 한 개의 야구장으로, 한 개의 야구공으로, 그렇게 '축소'되어만 가는가(그러므로 여기서 다시 물어보아야 하는 물음 하나는, 이 2003년의 야구 이야기가 1982년의 야구 이야기의 압축된 '후일담 문학'은 아닐 것인가 하는 물음)? 소설의 화자는 청소년기의 어느 3루 끝자락에서 그만 덜컥, 그것도 야구를 통해서,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현실 인식을 스스로 깨우치게 된다(혹은, 그러한 현실 인식에 '걸려 넘어지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여기서 독자는 왜 '마르크스'가 아니라 '주의'에 작은따옴표가 붙어야 했는지를 잠깐 동안이나마 음미해보아야 한다고, 나는 권고한다): "그날 밤 나는, 낡고 먼지 낀 내 방의 창문을 통해—저 캄캄한 어둠 속에 융기해 있는 새로운 세 개의 지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부유층과 중산층, 그리고 서민층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지층들이었고, 각자가 묻힌 지층 속에서 오늘도 화석처럼 잠들어 있을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보았다. 꽤 노력도 하고, 평범하게 살면서도 수치와 치욕을 겪으며 서민층에 묻혀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무진장, 혹은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하면서도 그저 그런 인간으로 취급받으며 중산층에 파묻혀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그리고 도무지 그 안부를 알 길이 없는—이 프로의 세계에서 방출되거나 철거되어—저 수십 km 아래의 현무암층이나 석회암층에 파묻혀 있을 수많은 얼굴들을, 나는 보았다."(129쪽)
프로야구에서 이루어졌던 이러한 계급의 구분은 정확히 일상의 삶 속에서도, 어쩌면 그 속에서 더욱 확연하게,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 그것이 이 소년의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이다. 역설적으로, 하지만 지극히 합리적으로, 이러한 '냉철하며 진부한 현실 인식'이 소년의 삶에 강하고 독한 추동력을 부여한다. 여기까지는 저 유명한 근대화의 저돌적인 추동력에 관한 이야기와 정확히 짝을 이루는 어느(혹은 '여느') 소년의 흔하디흔한 성장통(成長痛)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뒤도 말고, 앞만 보고] 달려라 메로스, 혹은, 소년이여, ['프로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야망을 가져라 등등의 뒤틀린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소년에게 기이한 생존의 욕망과 기형적인 삶의 의지가 마치 일종의 약물처럼 투여되는 것이다.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만년 꼴찌 팀에로 오체투지 하듯 온몸을 감정이입 시켰던 이 소년에게는, 그러므로 야구가 인생의 축소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생이 야구의 확대판이자 실측지도였던 것. 삶이 야구 같은 것임을 깨닫고 삶을 야구처럼 살지 않겠다고 바득바득 우기며 살던 소년은 인생의 중간계투 시기에 일견 매우 맥 빠지는 결론에 도달한다: "세계는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성해 나가는 것이었다."(242쪽)
기껏해야 이 가장 기초적인 근대 인식론의 명제 따위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 현대의 원효(元曉)는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을 그렇게나 많이 그리고 그렇게나 오래도록 퍼마셔야 했던가? 세계는 주체가 구성하는 바로 그러한 한에서만 '세계'일 수 있다는, 이 근대 인식론의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할 순진무구한 모토의 재탕 혹은 중탕을 위해서? 하지만 나는 저 명제 자체의 진부함에 질려 등을 돌리기 전에 먼저 이렇게 소년 스스로 구성한 세계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러한 구성 작용의 '대상'은 무엇인가 물어보아야 할 것 같다(말하자면, 나는 이 성장소설의 '노에마(noema)'와 '노에시스(noesis)'를 다시금 되묻고 싶은 것). 일견 진부해 보이는 이러한 인식론이 장년이 된 소년의 비관적이고 진부했던 또 다른 인식론,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해야겠지만, 고로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할 따름"(212쪽)이었던 과거의 인식론과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기에. 또한 그것이 데카르트의 명제를 한 번 뒤집는 척만 한 후 다시금 진부하고 특정한 버전의 칸트에게로 나아가버린 듯, 일견 맥이 풀려버린 인상을 주는 전회(轉回)이기에, 나는 더욱 더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대척점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오히려 가장 먼저 깨달았어야 했고 또 가장 먼저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이 '근대적인 너무나 근대적인' 인식론의 도식은 왜 이 소년에게 이리도 뒤늦게, 지각(遲刻/知覺)하여 도착했던가? 이러한 지각과 지연을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삶을 새롭게 분류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또 하나의 분류법, 그것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인생의 축소판이었던 야구에 관한 새로운 분류법의 탄생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하고 있다: "애당초 승부의 판가름이 무의미한 경기였다. 아니, 같은 룰이 적용될 수 없는 서로 다른 야구를 통해—두 팀은 격돌했던 것이다. 7회 초의 공격은 끝이 나지 않았다. 오른쪽 잡초 덤불 쪽으로 빠진—2루성 타구를 잡으러 간 <프로토스>는 공을 던지지 않았고, 그 이유는 공을 찾다가 발견한 노란 들꽃이 너무 아름다워서였고, 또 모두가 그런 식이었다. 워낙 힘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괴소년은 그렇게 많은 포볼을 던지고도 도무지 지치지 않았고, 또 같은 이유로 아무도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수비들은 계속 체력을 축적하고, 오히려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타자들이 지쳐만 가는 이상한 경기가 계속 이어졌다. 길고 긴 7회의 공격이 언제 끝날지가 요원했던—아직 원아웃인가 그랬고 스코어는 20:1인 상황에서, 결국 타임을 외친 올스타즈의 주장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 "그만 하죠.""(292쪽)
서로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두 개의 축 사이에서 어떤 비트겐슈타인적 짜릿함이 인다. "노란 꽃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아예 공을 던지지 않는 방만한 야구와 "오히려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타자들이 지쳐만 가는" 치열한 야구는 규칙과 분류의 체계를 서로 달리 하는 이질적인(hétérogène) 것일 수밖에 없다. 후자의 야구는 우리에게 익히 친숙한 '프로'의 야구이며, 전자의 야구는 우리가 한 번쯤은 상상해봤을지 모를, 하지만 또한 상상하자마자 머리를 흔들어 머리 밖으로 몰아냈을지도 모를, 그런 기이한 야구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열심히 할수록 쇠약해져만 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체 모를 괴물에게 살과 피를 빼앗기는 듯이 느껴지는 '프로'의 야구는 '이사만루(二死滿壘)'라는 절체절명의 상황과 규칙을 따르는 야구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사만루의 절박하고 강제적인 질서를 따르는 야구가 아닌, '프로'라고 하는 인간 이상(또는 이하)의 것을 강요하는 야구에 대항하여 자진해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야구, 나는 이러한 야구를—어쩌면 하나의 대구(對句)를 만들어주고 싶은 '순수한' 형식적 '악취미'에서—'무타무주(無打無走, no hit no run)'의 야구라 부르려고 한다.
▷ '기호의 제국'에서 야구 하기, 혹은, '우아하고 감상적인' 사진-텍스트의 이데올로기.
1988년, 또는 1995년, 혹은 어쩌면 어떤 먼 미래의 야구 이야기 한 자락: 야구가 사라진 시대에 출간되었더라면 아예 서점의 야구 코너를 통째로 창시했을 법한, 야구에 관한 도서 목록 작성의 초고가 되었을 법한 다카하시의 소설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무타무주'의 야구라는 새로운 '분류법'의 한 사례를 만난다. 소설의 내러티브는, 사전 속의 야구에 관한 정의도 불확실함으로 가득 차 있을 정도로 야구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세상에서 벌어지는 야구에 관한 이야기라는 외형을 띤다: "야구[사어(死語)]—아주 옛날에 죽었기 때문에 잘 모른다. 긴 것으로 둥근 것을 치는 게임이라고도 말하여지고 있다. 지면에 네모난 것을 놓고 악귀를 쫓았다."(『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72쪽) 나는 여기서, 어떤 이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그러나 또 어떤 이는 몰지각하다고 생각했을, 하나의 '자연스러운' 분류법, 곧 13년 전에 내가 만났던 저 '아톰의 철학'에 대한 분류법과 다시금 조우한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나는 의심해본다, 생각해본다, 상상해본다, 혹여, 『아톰의 철학』을 만화 코너가 아니라 철학 코너로 분류했던 것은, 어느 이름 모를 열성 삼미 슈퍼스타즈 팬클럽 회원의 교묘하고도 지능적인 '작전'이 아니었던가 하고, 아니면, 그때 내가 철학 코너라고 생각/착각했던 그 서가가 실은, 다카하시의 인물들이 때때로 야구에 대한 명언과 탁견과 열정이 담긴 책들을 꺼내보고 그 문구들을 공책에 옮겨 적곤 하던 야구 관련 코너의 서가가 아니었던가 하고. 그래서 또 나는 의심한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해야겠지만, 실은, 이제껏, 이사만루가 안겨다주는 '숨 막힘'으로만 존재해 왔던 것은 아닌가 하고, 혹은, 야구에는, 존재에는, 오로지 이사만루라는 분류법 외에 다른 분류법이 없다는 듯이, 그렇게 살고 존재해 왔던 것은 아닌가 하고. 그리고 이어 나는, 어렴풋이, 알아챈다, 다카하시 소설 속의 등장인물 랜디 바스가 인류의 모든 책들을 야구에 관한 잠언과 해설로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처럼, 아톰과 철학에 대한 혼란스러운 분류 체계가 사실은 또 하나의 '야구 이야기'에 다름 아니었음을, 그것은 또한 삶의 축소판과 확대판을 아우르는 울타리와 여백에 관한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에 다름 아니었음을(그런데 동시에 나는 '체질적으로' 이러한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결론에 대해 반발하고 있는 것). 그리하여 다카하시가 새롭게 작성하는 실제 세계의 분류법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자, 야구사상 가장 위대한 타자 중 한 사람인 다카기 유타카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 리얼 월드를 다음의 두 개로 분류하고 있다. / (1) 홈 베이스 위에 있는, 타자의 어깨로부터 무릎까지의 공간—즉, 스트라이크 존. / (2) 그 이외의 모든 것."(76쪽)
▷ Ludwig Wittgenstein, Werkausgabe, Band 1,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4.
*) 새로운 규칙과 분류의 체계를 한 벌 짓는 일과, 규칙과 분류 자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물음을 묻는 일은, 분명 서로 다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후자의 입장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를 읽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이 책을 하나의 '야구 이야기'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어쩌면 비트겐슈타인은 '진짜' 야구를 알았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푸코가 잘 보여주었듯, 새로운 분류법으로 인해 탄생하는 것은 곧 새로운 인식론이며 새로운 담론의 체계일 터. 그렇다면 이사만루와 무타무주 사이의 골이 가리키는 새로운 담론의 체계란 어떤 것일까(그런데,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가)? 그것은, 기존했던 과거시제로서의 이사만루의 야구가 제한적인 경제가 지닌 협소한 윤리학적 체계를 가리킨다고 한다면, 도래할 미래시제로서의 무타무주의 야구는 이사만루의 야구가 '멸종'해버린 세상에서 만나게 될 하나의 새로운 삶의 미학 또는 미학적 윤리학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다는, 하나의 '허무맹랑한' 가설일 것인가?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러한 윤리와 존재의 '미학화(美學化)'가 하나의 문학적 '유토피아(utopia)'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한다 해도, 이사만루의 야구가 사라진 무타무주의 야구 세상 속에서 다카하시의 소설이 짙은 '디스토피아(dystopia)'의 냄새를 풍기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러므로 이러한 물음은, 혹여, 무타무주라는 새로운 분류법의 문학적/스포츠적 체계가, 여전히 유토피아'주의적'이라고 하는 하나의 특정 담론 체계 안에, 그래서 결국 아직은 변증법적 이분법이라는 오래된 늪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묻는, 유독 우리 시대에 특히 더욱 진부해져버린 저 의심과 회의의 물음으로, 다시금 귀착된다. 다시금, 반복되는, 저 문학적 '아포리아'로서의 '유토피아', 두 개의 부정적 접두사('a-', 'u-')가 만들었던, 이 '오래된' 신조어들. 그리하여 나에게는, 이제 '다섯 번째'가 되어야 할 질문 하나가 오롯이 떠오른다. '근대' 문학을 바라보는 가장 '근대적인' 시선이란 어떤 것인가?
물론 이사만루의 문학적(혹은 '시대적') 상황이 무타무주의 문학(어쩌면 '시대정신'?)으로써 타파되고 위반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순진한 일일 것이다(게다가 이러한 '순진한' 생각은 저 바타이유적 '위반'이라는 작용의 의미와 효과에 대한 몰이해를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 무타무주의 문학이란 기존하는 게임의 법칙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기에, 또한 당연하게도 어떤 '점수'도 낼 수 없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러한 '노히트노런'의 경쾌함은 언젠가 또 하나의 훌륭한 '물신(Fetisch)' 같은 유행이 될지도 모른다. 마치 우승 후에 연고지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기는 프로야구단처럼: "우승을 했으니까요. 그럼 서울로 가는 것이 이 세계의 룰입니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281쪽) 그래서, 근대 문학이란, 곧 근대적 상황 속에서 잉태되었고 소비되고 있는 근대 소설이란, 본래부터 겉으로는 '무타무주'의 가면을 쓰고 실제로는 '무사득점(無死得點)'의 만루 홈런 기회나 대량학살과도 같은 '삼중병살(三重倂殺)'의 기회만을 노리는 기민하고 약삭빠른 심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그래서—실은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이—문학의 전장(戰場) 또한 결국은 피 튀기는 연장전에 돌입한 헤게모니 투쟁의 속편이었음을 새삼스럽게 반추하게 되면,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말했던바 '사회적 실천'의 책무를 떠맡은 중심적 예술 행위라는 의미에서의 근대 문학은 이미 종언을 고한 것으로 보인다(하기야 근대의 종언뿐만 아니라 문학의 종언을 발음하고 발언했던 이가 어디 이 '일본인' 비평가 하나뿐이었겠느냐마는). 위반하고는, 다시 되돌아오게 되는 한계(limite)의 공간. 이 무한한 '영원회귀'의 운동 속에서—누구나 이 원환의 운동 속에서는, 소승적이 되기는 쉬워도 대승적이 되기는 어려울 터—누군가는 '역사의 종언'을 목격했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복음의 창궐'을 목도했을 것이다.
90년대 이후 이와 같은 상황을 체감한 푸념과 투덜거림이 내뱉었던 하나의 '문학적이고도 세속적인' 물음이 하나 있다(이것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하지만 이제는 그 어느 누구도 애써 발설하려고 하지 않는, 여섯 번째 질문이다): 왜 한국의 작가들은 더 이상 민족의 분단 상황을 문제 삼지 않고 더 이상 가장 '낮은' 곳으로도 임하려 하지 않는가? 누군가는 당신이 관심을 가지지 못할 뿐이지 그렇지 않은 작가들이 여전히 얼마든지 많이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었]고, 또 누군가는 그런 현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전지구화가 가져다준 영향이자 폐해라고 말할 것이[었]다. 혹은, 좀 더 에둘러 말하자면, '태백산맥' 사이로 외제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래도 '빛의 제국'은 여전히 건재하지 않느냐고 안도하면서 말할 수도 있[었]고—이는 다시 말하자면, 조정래 식으로 쌓아가며 '삭히던' 것을 이제는 김영하 식으로 '돌파할' 수 있게 된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한데—, 또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한다면 도대체 '난장이가 쏘아 올렸다던 그 작은 공'은 지금쯤 어느 궤도를 돌고 있는 위성이 되었느냐고 분을 삭이지 못한 채로 반문할 수도 있[었]다(30년 전 저 난쟁이 가장의 모습과 현재의 용산은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른가). 하지만 저 물음이 물음으로서 유효하다면, 그 유효성은 이 문제에 대한 당장의 해답을 내리려고 하는 결단의 조급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저 물음이 물음일 수 있는 가능 조건들을 탐색해야 한다. 저 물음 안에서 무엇보다 먼저 물어져야 할 것은, 과연 '한국의' 작가란 도대체 누구인가, 작가라는 '직업' 앞에 '국적'을 표시하는 수식어가 첨가될 수 있다면, 그리고 거기에 다시 그 국적의 '소유'를 표시하는 조사 "~의"가 흘레붙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닐 것인가 등등의 물음이다. 이 물음들은, 그러므로, 역사와 문학의 종언에 대한 물음들, 그리고 그러한 종언 이후에 비로소 겨우 다시 시작되는, '역사 없는' 시대의 문학에 대한 물음들일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이사만루'라는 절박한 상황 인식이 유효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둘'이라는 이분법이 죽고[二死] 그와는 다른 다종다양한 분류법들이 만개할 수 있는[滿壘]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는 지극히 '은유적인' 상황 인식 하에서만 그러하다(그러나 은유의 힘은 무엇보다 무섭고도 위대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은 또한 '복음의 창궐'을 '복음'으로만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창궐'로만 받아들일 것인지를 선택하고 결정하기 위한 또 하나의 은유적이고 문학적인 전제 조건의 한 형태일 것이다. 아마도 이 새로운 물음과 인식의 소재들은, 마치 민족국가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국경선들처럼 엄연히 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확고한 분류법 그 자체에 대한 이의제기일 것이고, 또한 하나의 물음이 또 다른 물음들을 촉발시키는 위반의 풍경을 보여주는, 그래서는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들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류법 하나쯤은 잉태시킬지 모르는 하나의 작은 반례(反例)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의 저 물음을 다시 물어야 한다: 이사만루라는 절대적인 순간에 과연 무타무주는 '가능할' 것인가? 칠 수 있을까 칠 수 없을까 하는 선택적 물음에 직면하여 이 물음이 강요하는 대답을 찾는 것은 어쩌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숫제 이 물음의 틀과 영역을 바꿔버리는 일, 동문서답을 하거나 전혀 다른 것을 되물어보는 일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어쩌면 이 역전된 물음이 우리가 수치스러울 정도로 새삼스럽게 되물어야 할 오늘날 '우리' 문학의 물음일 것이며, 또한 이는 어쩌면 '한국의'—혹은 '일본의', '그 어딘가의'—문학이 특별히 지금 이 순간 다시 되물어야 할 '방치된' 물음인지도 모른다. 치지 못하고 달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치지도 않고 달리지도 않는 것,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물음(따라서 이 지극히 '문학적인' 질문은 실은 가장 '구조적인' 물음, 곧 체계 자체에 대한 물음이 되고 있는 것). 그러므로 오늘 다시 물어야 할 이 물음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하는 물음, 이러한 '불가능성'이 어떻게 도래하는가를 묻는 어떤 '가능성'에 대한 물음인 것.
▷ 김종현 감독,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2004).
이 시점에서 나는 두 개의 '야구 영화'를 떠올려본다(다시 반복하지만, 이번에는 이 두 영화를 '야구 영화'로 분류하는 분류법은 과연 정당할까).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2004)에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패전 처리 전문 투수' 감사용은 승리를 위해 공을 던진다. 거기에는 약자와 패자의 설움이 있고 패배와 좌절에도 굴하지 않는 풀뿌리 같은 희망이 있지만, 반면 거기에는 '저들'—그들의 실체가 실제이든 가상이든—이 만들어 놓은 승리와 패배의 판 자체를 흐트러뜨리고 뒤집어버리려는 '문학적' 위반의 물음이 부재한다('영화' 속에서 '문학적' 위반의 어떤 단초를 찾아보려는 것은 정당한 분류법적 욕망의 발로일까, 아니면 단지 당연시될 뿐인 크로스오버적 욕망의 발로일까, 하고 다시 한 번 자문해보게 되지만, 어쨌든 소설 속의 삼미 슈퍼스타즈와 영화 속의 삼미 슈퍼스타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서로 갈라지고 있다). 반면 영화 <아는 여자>(2004)의 주인공은 이길 것이냐 질 것이냐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타자 쪽으로 신중하게 투구해도 모자랄 공을 엉뚱하게도 뒤로 돌아 경기장 바깥으로 길게 내던져버린다. 그 공은 야구장을 가득 메운 모든 이들의 황당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멀리 멀리 날아간다, 달아난다, 뒤집어버리고, 순간적으로, 위반한다. 이제까지 '당연한 듯' 존재했던 경기의 규칙들은 바로 그 한 순간에 증발해버리고, 그 자리에 대신 기이한 분류법의 일단이 반짝하며 출몰한다. 이 분류법은 투수가 마운드에 서서 상대편 타자를 향해 공을 던지면서도 몸소 '노히트노런'을 기록할 수도 있다는 '신기한' 사실을 목격했을 때 새롭게 열리게 되는 하나의 분류법이다. "기록의 경기"(『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50쪽)인 야구에서 아예 기존의 기록 체계를 통째로 무시하는 또 다른 체계 하나가 찰나적으로 새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수비 실책도 아니고, 더구나 고의 사구는 더 더욱 아니므로(담장 밖으로 날려버린 그 공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투지의 데드볼', 어쩌면 그 말 그대로 하나의 '데드볼'?). 다카하시와 박민규의 인물들이 이 후자의 투수만을 '진정한 야구 선수'라 여길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못해 쑥스러울 정도로 새삼스럽다. 그렇다면 우리를 망설이게 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은, 저 확실성일 것인가 아니면 저 수치심일 것인가.
▷ 장진 감독, 영화 <아는 여자>(2004).
이러한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더 눈길을 주게 되는 것은 박민규의 또 다른 소설 『핑퐁』이다. 상상해보자면, 어쩌면 박민규의 『핑퐁』 이후에 도래할 시간은—그러한 '시간'이 있다고 한다면—, 거꾸로 다카하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가 보여주고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그러므로 나의 또 다른 상상 한 자락은 박민규가 『핑퐁』을 통해 저 다카하시적 세계의 전사(前史)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이 되고 있는데). 이는 어쩌면 절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의 강박적이며 잔인한 상상이 될 것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이러한 상상은, 삭제되고 말소된 시간 이후에 도래한 '시간'에서, 곧 시간성 그 자체가 말소되고 삭제되어버린 시간에서, 시간이 다시금 새롭게—혹은 똑같이—시작되고 있음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자체로—문학과 근대에 종언을 고하는 가장 '탈-근대적인' 몸짓 이후 여전히 저 '근대'의 시간은 끈질기게 지속되며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의미에서—우리의 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대한 하나의 완벽한 비유가 아닌가? 그러므로 『핑퐁』이 보여주는 문제설정과 해결의 방식을 '편리한' 방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지만 그러한 '정당함' 자체가 이미 근대문학적인 시선 안에서 파악된 것임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한 평론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못과 모아이의 '언인스톨'은 그래서 의외로 슬프지도 착잡하지도 않다. 이는 달리 말하면 이 소설이 제시하는 '해결의 현실성'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가 '해결의 현실성'을 말할 때 그것은 실현 가능하냐 아니냐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SF든 신약이든 다 괜찮다). 이 선택이 과연 우리 시대의 정치적 지평에서 래디컬한 상상력으로 작동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러나 『핑퐁』과 같은 식의 파국적 해결은 어딘가 편리한 방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41쪽) '수비 실책'을 문제 삼는 감독의 시선은, 말하자면 여전히 '이사만루의 야구'라는 지평 위에 있는 것, 이는 탈근대를 근대라는 잣대로 파악하는, 그리고 그렇게 파악할 수밖에 없는 몸짓이다.
▷ 박민규가 직접 그린 '못'과 '모아이'의 형상.
그런데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렇듯 비평이라고 하는 하나의 문학적 행위가 저 야구 감독의 훈수, 저 가장 근대적인 문제설정의 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 나는 『핑퐁』이 보여주는 결말을 '리셋(reset)에의 욕망'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리셋에의 욕망은, 특히나 탈근대를 고민하는 '근대적인' 비평의 시선에게는 참으로 불편한 것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비평의 시선만을 '근대적'이라 비판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사실 '리셋에의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저 근대의 '종말' 혹은 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와 마찬가지로, 탈근대에 대한 가장 근대적인 시선과 해결의 시도로부터 도출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리셋의 개념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에 대한 다종다양한 '근대주의적' 반응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근대주의'를 여닫는 하나의 문학적 실체이다. 이 실체의 모습은 내게 유달리 징후적으로 보인다. "아침에는 전근대이고 오후에는 근대이며 저녁에는 탈근대인 것은 무엇인가? 정답은 한국이다."(『몰락의 에티카』, 43쪽) 이 말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곳은 바로 한국근대문학의 자리, 그리고 그에 대한 가장 '근대적인' 비평의 자리에 다름 아닌 것. 그렇다면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의 물음들을 이러한 '불가능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비평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어떤 근대성을 바로 그 글쓰기의 가장 수행적인(performative) 행위를 통해 문제 삼지 않는다면, 이러한 '불가능성'을 사유할 수 있는 자리란 과연 어디인가.
—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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