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연극』지 2009년 3월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사유의 한 자락을 지푸라기 잡듯 붙잡아 조금 더 깊이 파 볼 생각이다. 이쯤에서 뜬금없이 추억과 잡념 한 자락을 풀어놓자면, 학부를 다니던 시절에 나는 개인적으로 '음악미학'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ㅡ어쩌면 그래서 더욱 더ㅡ카를 달하우스(Carl Dahlhaus)가 쓴 얇고 가벼운 음악미학 책을 아리송하고도 불가해한 마음으로 몇 번씩 되풀이해 읽던 시절이었다. 그 어떤 예술보다 언어와의 '상동성(相同性)'을 강하게 갖고 있는 음악, 그러나 '언어' 자체로의 환원과 소급과 전이에 그 어떤 예술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저항하고 반발하고 있는 음악에 대한 '미학'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물음은, 언젠가부터 내 안에서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두 가지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아마도 이런 것을 두고 '결과론적 해석'이라 부를 수 있을 터). 음악이라는 하나의 예술적 '장르'가 미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못해 쑥스러울 정도로 '자명한' 사실이겠지만, '음악미학'이라는 학제(Disziplin)의 성립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는 지극히 형식적이고도 구조적인 '가능성'에 관한 물음은 여전히 내게 유효하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음악미학이란 내게 여전히 가장 문제적이며 가장 역동적인 '장르'이기도 하다. 보다 확장해서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이 음악과 언어 사이의 '친화성(Wahlverwandtschaft)'이라는 골 깊은ㅡ그러므로, 가장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이 가장 가깝고도 먼ㅡ간극 속에서 헤매고 있는 중이겠다. 언젠가 이 연재가 '무사히' 완료되는 시점에서 글들을 모두 한 곳으로 모으고 엮고 보충하여 책 한 권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다, 음악미학 자체의 어떤 (불)가능성을 타진해보고 싶은 '소박한' 마음에서, 그리고 또한 동시에, 완성되지 못할 어떤 것을 넘보는 '거대한' 욕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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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데우시 칸토르 연출, <죽은 교실>의 한 장면.
죽은 교실이 가르쳐주는 삶, 무지한 스승이 가르쳐주는 앎
ㅡ '무지한' 연극과 '해방된' 관객 사이, 연극음악의 미학과 정치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우리에게 연극 <죽은 교실(Umarła Klasa, 1975)>로 잘 알려진 폴란드의 연출가 타데우시 칸토르(Tadeusz Kantor)는 그 자신의 연극론을 밝히는 일종의 선언문인 「죽음의 연극」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관객과 배우의 관계가 지닌 본질적 의미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한 사람(관객)의 맞은편에, 언뜻 우리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동시에 완전히 이질적인 한 사람(배우)이,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넘어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 그때 발생하는 충격의 원시적 힘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칸토르가 '형이상학적 충격'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러한 충격적 힘의 회복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선 어떤 '감각'에 대한 복원에 다름 아닙니다. 아마도 칸토르의 이러한 언명을 읽으면서 동시에 저 유명한 아르토(Artaud)의 '잔혹극론'을 자동적이고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아르토가 말하는 '형이상학적 연극'과 칸토르의 '형이상학적 충격'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칸토르의 연극적 사유와 그 무대화 작업은, 마치 한스 벨머(Hans Bellmer)가 인형(poupée)을 통해 추구했던 미술작업과 유사한 예술사유의 궤적을 그린다는 점에서, 아르토의 것과는 조금 차이가 납니다.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예술사유는 오히려 프로이트(Freud)가 말한 의미에서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 곧 'unheimlich'한 경험 위에 가장 강한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곧 그것은 아르토의 연극처럼 '제의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신분석적'인 어떤 것이며, '예술적' 연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교육적'인 연극에 더 가깝게 가닿습니다. 그렇다면 이 죽은 교실이 교육하고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니, 그보다 먼저, 과연 '죽은' 교실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는 있는 걸까요?
▷ AA(Antonin Artaud)와 BB(Bertolt Brecht). 나는 언제나 개인적으로 이 둘을 이러한 두 개의 반복적인 알파벳 '애칭'으로 불러왔는데, 이 두 연극적 '거인'에게서 내가 느끼는 어떤 '거리감'은ㅡ다시 한 번 더 통속적으로 말해ㅡ언제나 실로 가깝고도 멀다. 하지만 보다 정확히ㅡ그리고 더욱 통속적으로ㅡ말하자면, 과연 누가 안 그럴 수 있겠는가!
연극과 교육이라는 주제 안에서 우리는 브레히트(Brecht)의 서사극이 과거에나 지금이나 차지하고 있는 어떤 중심적인 지위를 간과할 수 없을 겁니다. 주지하다시피 서사극은 관객과 무대 사이의 일차원적 감정이입을 차단하고 어떤 심미적이고 비판적인 '거리'를 발생시킴으로써 사회적 의식의 교육이라고 하는 연극적 책무에 봉사합니다. 반면에 그 대척점에는 이러한 '거리' 자체를 무화시키고 승화시키려는 연극적 기획 또한 존재합니다. 아르토의 연극적 이상은 바로 이러한 제의적 기획에 적합한 것이었죠. 그러나 브레히트의 서사극과 아르토의 잔혹극은 관객에 대해 어떤 '교사'의 위치에 서게 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두 연극적 기획은 모두 공연과 관객이 지니고 있는 어떤 '타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연극의 '개혁'이란 바로 이러한 연극적 타성의 제거, 혹은 이러한 연극적 환영으로부터의 탈출을 목표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ㅡ자신의 책 『무지한 스승(Le maître ignorant)』의 논의를 연극과 관객의 문제로 확장시키고 있는ㅡ『해방된 관객(Le spectateur émancipé)』을 통해 이 두 연극적 기획 모두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랑시에르의 논의를 칸토르의 <죽은 교실>에 적용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칸토르의 연극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교육'이란 브레히트나 아르토가 염두에 두고 있던 종류의 교육은 아닙니다. '죽은' 교실이 가르쳐주는 '산'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거리두기를 통한 사회적 의식의 고취도 아니고 거리를 제거하는 제의적 합치의 경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르쳐주는 것은 그 자신이 알 수도 없고 예상할 수도 없는 효과, 곧 어떤 '충격'의 효과입니다. 칸토르가 말하는 '형이상학적 충격'이란 곧 이 예측할 수 없는 관극의 경험,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이질성이 가져다주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에 관련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죽은' 교실의 교사인 칸토르는 또한 '무지한' 스승이기도 한 것이죠.
▷ Jacques Rancière, Le spectateur émancipé, Paris: La Fabrique, 2008.
▷ Tadeusz Kantor, A Journey through Other Spaces(ed. & trad. by M. Kobialka),
Berkeley/Los Angeles/Lon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 첫 번째 책은 랑시에르의 최신작(2008) 『해방된 관객』이다. 책의 표제가 된 첫 장 「해방된 관객」의 논의도 그 자체로 흥미롭지만,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사유의 이미지(L'image pensive)」가 가장 큰 개인적인 흥미를 끌었다. 이 글에서 랑시에르는 『밝은 방(La chambre claire)』으로 대변되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사진/이미지론에 대해 흥미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책에 관해서는 조만간 '지극히 개인적인 2008년의 책들'을 정리할 기회에 다시 한 번 언급하도록 하겠다(2009년이 시작된 지 벌써 삼 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음에도, 작년에 읽었던 책들에 관한 짧은 정리도 다 못 쓰고 있는 이 참담한 실상은 내 '정신없는 게으름'의 소산이라고 할 밖에). 두 번째 책은 칸토르가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쓴 글, 연극론, 선언문 등을 담고 있는 요긴한 책이다. 역시나 일독을 권한다.
연극에 대한 일종의 '번역'을 목표로 하는 연극음악 역시 스스로 이러한 '무지한 스승'의 위치에 설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장면 안에서 그에 상응하는 이러저러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음악은 일면적 '번안'의 음악에 그칠 뿐만 아니라 또한 관객을 '열등한' 학생으로만 보는 억압적 설명자의 위치에 머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해방된' 관객은 무엇보다 '평등'의 관객이며, 이러한 평등은 연극적 경험의 영역 안에서 하나의 목표가 아니라 일종의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이러한 '해방된' 관객 앞에서 연극평론가들이 한가하게 매기는 한갓 평점이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연극음악은 이러한 관객들을 위한 어떤 '정치'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음악이 하나의 '프로파간다'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서사극이나 잔혹극에서처럼 미학이 하나의 '윤리'로 파악되지 않고 오히려 감각적 분배를 문제 삼고 재배치하는 하나의 '정치'로 실행되고 경험되어야 함을 뜻할 뿐입니다. 이러한 기획 안에서 연극음악은 관극경험의 집단적 측면과 개인적 측면 사이를 오가는 어떤 비결정성을 극대화하고 무대화하는 '적극적 장치'로 기능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위에서 비로소 미학과 정치를 사유할 수 있으며 또한 사유해야 하는 것이죠. 연극음악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또한 관객에 대해 '무지한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음악의 '가르침'이란 곧ㅡ바타이유(Bataille)가 말한 의미에서ㅡ죽음을 통해 삶을 인식하는, 죽음 속에서조차 삶을 긍정하는, 오히려 죽음을 통해서만 삶의 (불)가능성을 파악하는 역설적 경험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비결정성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익숙함과 생경함 사이에서, 동질적인 것과 이질적인 것 사이에서 동요하는 하나의 '정치성'입니다. 따라서 연극음악은 그 자신의 이질성을 통해 연극과의 동질성을 획득하게 되는 어떤 역설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며, 가르치거나 설명하지 않고 다만 환기함으로써 경험하게 할 뿐입니다. 연극음악은 이러한 복수성/다수성의 경험을 환기함으로써 해방된 관객의 해방된 관극에 봉사합니다.
▷ <죽은 교실>을 연출하는 칸토르: 인형들 사이에 서서, 인형들의 귀에 무언가를ㅡ그리고 또한 어쩌면 '무언가(無言歌)'를ㅡ속삭이고 있는 듯한 저 칸토르의 모습에 주목하라.
아마도 죽은 교실은 그 자체로 '죽어' 있을 겁니다. 그것이 불가능성의 연극이며 또한 죽음의 연극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관객이 그 연극 안에서 보는 것,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죽음만이 아니라는 역설이 가능해집니다. 관객의 맞은편에, 건널 수 없는 건널목을 건너, 가장 친숙하면서도 가장 이질적으로 등장하는 하나의 죽음 속에서, 관객은 예술과 삶이 서로 간섭하고 침투하는 하나의 '미학적' 풍경을 목격하고 번역하게 됩니다. 죽음의 무대는, 마치 조감도(鳥瞰圖)/오감도(烏瞰圖)를 보듯 위에서 내려다본 관객과 배우의 극장 안에서, 하나의 삶을 기억하게 하고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삶이 되는 연극을 상연합니다. 그렇게 다시 환기된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감각, 이전에는 서로 다르게 분할되었던, 하지만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재분할되는, 그러한 한에서의 감각들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관객은 '미학'을 통해 일종의 '정치'를 행하게 됩니다. '정치적인' 연극음악이란 선전도구나 설명자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이러한 해방을 가능케 하는 '미학적인' 음악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칸토르가 말했던 "관객과 배우의 관계가 지닌 본질적 의미"란 이 '무지한' 연극과 '해방된' 관객 사이에 위치한 어떤 (불)가능성의 경험을, 또한 "충격의 원시적 힘"이란 그러한 해방의 힘을 가리키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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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승옥 작가가 스케치해준 초상화. 이번 호 연재분부터 사진 대신 이 그림이 필자의 모습을 대체하게 되었다. 일면식 없는 분이 이렇게 소중한 그림을 그려주신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그림으로 보는 내 자신은 내게 전혀 익숙하거나 친근하지 못하다. 실로 오랜만에 이 '낯선' 감정이 나의 마음을 움직인다. 끈기 있게 무엇을 그려본 지가 참으로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랜만에 그림을 다시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 인생 참, 딱 놀기 좋아하는 한량(閑良)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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