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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의 말들 -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 ㅣ 문장 시리즈
은유 지음 / 유유 / 2016년 8월
평점 :
은유...라는 사람이 쓰기에 대해 천착해오는 동안
명문들을 모아 읽고 또 읽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말하기를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리고 열일고여덟 된 한창 자기 자신의 열기에 흔들리는 청자들과 시간을 보내는 직업인으로서,
쓰기라는 일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리뷰라고 해도 그저 읽은 책을 잊지 않기 위해 몇 자 적는 것이거나,
세상에 분노할 때, 욕을 퍼붓는 공간으로 서재가 필요했을 따름이다.
이런 책을 읽으면서,
내가 쓰기를 하지 않게된 일은 다행이라 싶었다.
인식에 이르는 길 위에서
그렇게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다.(니체, 77)
쓰는 일 역시 그럴 것이다.
인식의 매력은, 스스로를 알게 되는 일이다.
제대로 아는 일은, 부끄러워하는 자격지심을 웃으며 풀어내는 일이다.
세상은 원래 그러하단 것을 아는 일이다.
시는 그것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받아 내는 그릇으로서
의미를 가진다.(이성복, 41)
그래서 이성복의 시구절은 손석희의 브리핑에 자주 인용된다.
삶의 아픔에 대한 사랑을 받아내는 그릇이어서...
작가의 임무는
평범한 사람들을 살아있게 만들고,
우리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골드버그, 89)
센과 치히로가 함축한 말이 그렇다.
누구나 평범하지만 사실은 특별하다.
과학적인 언사로 설명할 수 없지만 신비로운 존재다.
그걸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걸 깨달으면 곧, 부처다.
시간은 수학적 단위가 아니라
감수성의 의미론적 분할(바르트, 85)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 역시 쉽지 않으리라.
말하지 않는 아이처럼, 쓰지 않는 어른도 많으니 말이다.
시간은 10년 단위로 나뉘지 않는다.
저주받을 대통령들의 시대와,
좀 나은 시대로 나뉜다.
그런 게 감수성의 의미론적 분할이라면...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고레에다 히로카즈, 147)
이창동의 '버닝'에 환호하는 것은 어찌 보면 고은의 노벨상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고레에다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를 얼마 전 읽었는데,
삶의 결핍을 불완전한 그대로,
늘어놓은 풍요가 그의 영화임을 알겠다.
나도 그 걸음걸이기 더 좋다.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동'해야만 한다.
무관심과 냉소는 지성의 표시가 아니라
이해력 결핍의 명백한 징후다.(한나 아렌트, 211)
요즘 문대통령을 보면 사람에 대해 감동하게 된다.
병신같은 국회 헛발질을 보면 욕이 나오다가도, 대통령과 청와대의 행보는 믿음직하다.
거기 대해 무관심과 냉소로 일관하는 코멘트를 내뱉는 종자들이 있다.
이해력이 심각하게 결핍된 것들이다.
작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손택, 215)
자유라... 그래.
9.11 광풍 이후에도 그는 자유를 이야기했다.
천안함으로 종북몰이하고,
양승태로 전교조와 멀쩡한 정당 하나를 불법시, 해산하던 나라의 법치기구 앞에서, 자유는 없었다.
언론과 지식인, 작가들은 침묵했다.
글쓰기는 냇물에 징검돌을 놓는 것과 같다.
돌이 너무 촘촘히 놓이면 건너는 재미가 없고,
너무 멀게 놓이면 건널 수가 없다.(이성복, 209)
이 책의 재미도 그렇다.
촘촘하게 읽으면 재미가 없고,
너무 멀다고 느끼기 전에 밑줄치고 싶은 구절을 만나 반갑다.
쓰기의 좋은 말들을 많이 만나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