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듣는다 - 정재찬의 시 에세이
정재찬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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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작 <시를 잊은 그대에게>에 비하면

이 책은 <시보다 인생>편이다.

 

물론 시가 주된 이야기의 본류가 되지만,

아무래도 여기서는 사는 이야기에 뭉클한 유행가를 많이 버무렸다.

왜 한국은 시보다 유행가가 더 감동적인가.

격동적이라고 하면 삶의 뭉그러진 측면이 가려지기에,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같은 비극과,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같은 생이별이 시같은 고상미를 뒤로 했던 것이 현대사였다.

 

꼭 필요하지 않은 것에 내줄 시간이 이제 없다.

나 자신, 내 일, 친구들에게 집중해야 한다.

더는 매일 밤 뉴스아워를 시청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정치나 지구 온난화에 관련된 논쟁에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올리버 색스, 121)

 

인생은 유한하다.

반백을 살아온 나에게 남은 날들이란,

노인으로서 꺾어질 일들을 생각하면, 헛된 곳에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없이 집으로 하나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있느

저 석양은 나를 깨우고 밤이 내 앞에 다시 다가오는데(전인권, 사랑한 후에, 98)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강승원, 서른 즈음에, 76)

 

나이는 서른을 넘고 마흔을 지나 지천명을 훌쩍 뒤로하고 예순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하루는 흐려지고,

날카롭게 벼려진 기억보다는

그날인지 저날인지 구분도 가지않는 하루하루만이 첩첩이 떨어진다.

 

쓸모없이 떨어지는 낙엽이 쌓이는 것 같이...

그렇지만, 그 낙엽들의 아름다운 모습이나,

바스락~ 하는 파열음의 순간적 아름다움을 잡는 것이 시다.

인생은 짧아서 오히려 시가 저릿한 것이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 보았겠지

난분분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고재종, 첫사랑, 15)

 

이런 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런 시를 읽고 마음 한 켠 부푸는 사람은 오늘 하루 흐뭇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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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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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을 열어달라고 왔다.

그렇지만 문지기는 문 안쪽에 있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단지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힘으로 열고 들어오너라."라는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264)

 

앞에는 육중한 문짝이 언제까지나 전망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는 문을 통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을 통과하지 않고 끝날 사람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그 문 아래에 꼼짝달싹 못하고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265)

 

소세키의 <마음>에서도 나오듯,

그는 사랑에 얽힌 애증의 과거에 얽매여 산문으로 도피한다.

그렇지만, 그 '문'은 그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다.

 

소스케는 어느 스키야키 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 병은 정신없이 마셨다.

두 병째는 무리하게 마셨다.

세 병째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취한 소스케는 등을 벽에 기댄 채 상대가 없다는 듯한 눈으로 멍하게 어딘가를 바라보았다.(225)

 

집 문간까지 오니 집 안이 쥐죽은 듯 고요해서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148)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보고 있는 듯 하다.

고통을 잠시 벗어나기 위해서 마시고 마셔도 취하지 않는 날,

집 문간 앞에서 느끼는 적요 앞의 두려움.

 

그들은 큰 수반에 떨어진 두 방울의 기름같았다.

물이 튀어서 두 개가 하나로 모인 게 아니라

물에 튕겨지는 힘으로

동그랗게 하나로 붙어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게 되었다고 평하는 쪽이 적절했다.(172)

 

사건은 겨울의 끝에서 봄이 머리를 쳐들 무렵에 시작하여 벚꽃이 모두 떨어지고 새잎이 돋아날 무렵 끝났다.

모든 게 생사의 싸움이었다.

청죽을 불에 쬐어 기름을 짜내듯 고통스러웠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두 사람을 폭풍이 불시에 휘몰아쳐 쓰러뜨린 것이다.

두 사람이 일어났을 때 이미 천지는 모래투성이였다.(194)

 

그들은 채찍질을 당하면서 죽음을 향하여 가는 이들이었다.

단지 그 채찍질 끝에는 모든 것을 치유해주는 달디단 꿀이 묻어있다는 걸 깨달은 것.(173)

 

비련의 꿀은 달면서도 고통스럽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운명같은 것이 세상에 있다면,

채찍질을 당하면서 죽음을 향하여 가는 길이라도 걸을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아마도... 자신들은 문 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소세키의 <마음>과 함께 격정적인 구절들이 뜨거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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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을 마음대로 부린 선비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나라말) 101
정환국 지음, 리강.이승현 그림 / 나라말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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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훑어 읽고 있는데,

이 책은 좀 그렇다.

 

고전소설이 아니라, 민담류인데,

앞부분의 '폴리페모스'라는 키클롭스의 이야기는

오디세우스에서도 손꼽히는 재미난 장면인데,

양의 배 아래 숨어서 탈출한다는 스토리가 고전읽기에 실릴 것인지...

 

야담 중에서 교훈적이거나 재미난 것들을 뽑든지,

구전 민담을 모은다면 그것도 좀 역사적인 것들을 뽑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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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퍼센트의 희망이라도 - 긴급구호의 최전선에서 써 내려간 감동의 기록
이용주 지음 / 양철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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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근대는 아프리카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유럽의 '식민'은 '흑인 노예'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자원까지 착취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할수록, 자원은 더욱 첨단 투쟁의 재료가 되고,

아프리카는 내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착취당하고 있다.

 

평화롭게 살던 땅은 파헤쳐지고 오염되어버린다.

질병이 만연하고 기아로 죽는 사람은 더 많아진다.

 

거기, 긴급구호의 최전선에서

1%의 희망이라도 파내서 그들에게 물이라는 생명수를 제공하려는 '팀앤팀'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우리는 분쟁과 재난 지역의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실천한다.(62)

 

물이 없다면 우리는 불편을 겪을 것이지만,

재난지역의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잃는 일이다.

그들에게 물은 말 그대로 생명수다.

 

담배는 심장을 총이다.(73)

 

심장이 안 좋은 김정일이 금연을 하면서 했다는 말이다.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나 그 아들 역시, 다이어트부터 해야한다.

담배는 더 안 좋을 것이 당연지사.

북한에도 깨끗한 물을 제공했다 한다. 그 후 다시 단절되고 말았지만.

 

그들이 외치는 구호는

'All in, all out'이란다.

최선을 다해 완수하고, 함께 돌아오자.

그만큼 목숨을 건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아프리카의 후진성은 식민지를 필요로하는 거대국들의 부정부패가 더 심화시킨다.

 

취임 직후 상카라는 '오트볼타'라는 식민지 국명을

'부르키나파소(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로 개명하고,

부패를 척결하고 개혁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 CIA에 매수된 동료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상카라는 39세에 살해된다.

이후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는 최빈국으로 추락하였다.(193)

 

참 추악한 나라다.

자국민들이 무수히 총기 살인으로 피해를 입지만

무기 수출국인 나라로서는 총기 금지를 허용할 수 없다.

아마 숱한 정치가들이 총에 맞아 죽어도 미국이란 나라는 군산복합체로 굴러갈 것이다.

 

긴급구호, 오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아름답고 처절한 이야기를

젊은이들에게 널리 읽히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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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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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의 역설이란 게 있다.

거북이가 훨씬 앞에서 출발한다면 사람이 그자리까지 가는 동안 거북이는 다시 앞설 것이고,

그 양만큼 따라가면 또 앞서서,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옳다.

다만, 거북이와 사람의 달린 거리가 같아지는 순간까지는 옳다.

그러나 어느 순간 거북이는 사람보다 뒤처지게 마련인 것.

 

호모데우스는 인간의 삶을 거시적으로 바라본다면,

지난 수십 년 간 엄청난 과학의 발전으로 수명이 2배로 늘어났으니,

앞으로 인간의 지력은 무지 발전할 것이고, 인간은 신이 될 것이라는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

 

그렇지만, 어떤 이야기에서는 거시적으로 인류를 바라보고

어떤 지점에서는 한 개인의 특성일 수 있는 것을 들먹이면서 근거로 활용한다.

결국 인간의 지력이 아주 발전하게 될 백년, 이백년 뒤를 상상한다면,

그의 논거가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그래프를 좌악~~~ 늘여서

우주의 역사에서 바라본 '인간' 존재의 시점으로 바라본다면,

그의 논거는 티끌도 아닐 수 있다.

 

이 책은 세계사 책도 아니고, 지식 정보사회의 빅데이터를 활용한

가까운 미래상을 상상하는 책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재미난 가정하에 펼치는 과학공상소설도 아니다.

잡학다식을 집적한다고 힘이 되지는 않는다.

 

아랍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의 분쟁 역시

800만 이스라엘 국민과 3억5천만 아랍연맹 국민의 선거로 해결할 수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연히 승복하지 않을 것.(345)

 

이스라엘은 1948년 팔레스타인을 치고들어가 빼앗은 땅에 세운 나라다.

그 배후에는 미국이라는 군산복합체가 자리잡고 있다.

끊임없이 '홀로코스트'를 상품화하여 영화로, 전시로 활용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불편한 나라의 존립 근거로 작용한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박학다식을 자랑하고자 하는 책은 아니겠지만,

자기의 국가가 정당하다는 고집은 내세운다.

그것이 호모사피엔스의 수준이다.

 

국가라는 것은 폭력으로 다가온 오지의 부족민들에게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는 '즐거움'을 극대화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일까?

국가라는 것이 식민지를 만드는 것이었던 세상에서,

노예를 사고 파는 일이 횡행하던 세상에서,

컴퓨터가 조금 발전했다고 인간은 신에 가까워졌다고 발언하는 것은 오만방자이며 시건방이다.

 

역사공부의 목표는 과거라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92)

 

이런 의견도 한편 옳고 다른 방향에서 보면 궤변이다.

매일 전쟁 무기를 팔기 위해 혈안이 된 미국이란 나라에서

약소국이 핵을 개발하면 그것을 저지하려 온갖 난동을 부리는 곳이 인간 세상인데,

아프리카 들판의 자연적인 약육강식만도 못한 온갖 추태를 만든 것이 인간인데,

역사로 미래를 지향하겠다는 것은, 오만이다.

 

그가 바라본 역사는 최첨단 과학의 장밋빛 미래라는

한정된 범위 내에서의 역사일 따름이다.

식민지가 되어 학살된 어메리칸 원주민이나 노예로 부려지던 흑인들,

지금도 지옥도 속에서 살아가는 아프리카 오지의 사람들에게

컴퓨터와 빅데이터는 '남아도는 식량' 만큼이나 허구적인 것이다.

 

그의 역사가 걸어갈 길에 대한 근거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란 벽돌길>이다.

근거치고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여행이 끝날 무렵

그들은 위대한 마법사가 실은 사기꾼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그들이 바라는 모든 것이 이미 그들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감정과 지혜와 용기를 갖고자 한다면

신과 같은 마법사는 필요없다.

그저 노란 벽돌길을 따라 걸으며

도중에 겪는 경험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334)

 

여행이 끝날 무렵을 몇십 년 후라 생각하면 스스로 제논의 거북이에 갇히는 꼴이다.

인류는 살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그 미래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

더 오염이 될 것이고, 교통사고도 많아질 것이고, 밝혀진 많은 질병으로 죽어갈 것이다.

중독이 심해질 것이고, 글로벌하게 빈부격차가 심해질 것이다.

그래서 더 큰 나라는 은밀하게 위대한 나라가 되어갈 것이고,

가끔은 대놓고 폭격을 가하기도 하면서 추하게 살 것이다.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추악함이 크다.

계속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욕해야 한다.

99%가 1%만의 세상을 뒤집으려 <점거하라!>는 구호를 외쳐야 할 것이다.

 

21세기 초, 진보의 열차가 다시 정거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이 열차는 아마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정거장을 떠나는 막차가 될 것이다.(379)

 

비약이 심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덩치가 더 큰 이전 인류를 학살하고 지금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수십만년 전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정거장을 떠나는 막차 뒤에는

호모 데우스가 아니라, 멸망의 버섯구름만이 뭉글거릴지 모른다.

 

이 책의 3부에서는

인본주의의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본주의 근간을 흔들 것이라 주장한다.

덕분에 우리는 근대 계약의 열매를 어떤 대가도 없이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383)

 

그건 이스라엘 너희들 이야기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아마 구토 유발자에 불과하리라.

근대 계약의 열매를 먹은 누군가는 헐크가 되어 이웃을 짓밟았다.

그 열매를 보지도 못한 이웃들은 학살당하고 노예가 되고 추방당했다.

 

경험하는 자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참조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기억을 끄집어 내고 이야기를 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모두 우리 안에 있는 매우 다른 실체인 '이야기하는 자아'의 독단이다.(405)

 

그야말로 독단이다.

역사의 기록은 이야기하는 자아의 역사관을 담고 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복적 전시 효과를 노리는 자들은

이야기하는 자아의 과잉이다.

물론 홀로코스트는 비극이지만, 아프리카의 질병, 전쟁, 내전으로 인한 자아들의 경험은 이야기되지 못한다.

 

아니, 미래 세계는 '이야기하는 자아'들에게서 '경험하는 자아'들의 목소리가

다종다양하게 구성되는 현장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람직한 미래다.

 

'종의 기원'을 펴낸 날 기독교가 사라지지 않았듯,

과학자들이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자유주의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419)

 

'종의 기원'과 '기독교'를 등가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종의 기원'은 하나의 이론이고 '기독교'는 생활 문화 전반이다.

과학자들의 의견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지'조차도 물질의 소산이며 작용이라는 의미에 가깝지

사회사상의 하나인 자유주의와는 등가물이 아니다.

 

이 두꺼운 책은 과연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고 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지금처럼 미국의 실리콘밸리 주도로 더욱 발전할 것이므로,

그 질서의 흐름을 당연시하도록 어두운 이면을 도배지로 덮어버리는

호도가 정작 그가 하려는 말이 아닌가 싶다.

<표기>

 Homo sapiens처럼

'종명'을 표기할 때는 '속명'과 '종소명'을 쓰는데

속명은 대문자로 종소명은 소문자로 표기한다.

그렇게 보면 Homo deus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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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11-21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시원하긴 하네요. 제가 페이스북 동네에서 유발 하라리의 SF소설 같은 시나리오를 비판했다가 ‘개무시’ 당한 적이 있는데요. ㅎㅎ 그분한테 글샘 님의 윗글(http://blog.aladin.co.kr/silkroad/9724082)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한데 유발 하라리의 썰 푸는 솜씨와 논리가 한국인들한테는 엄청 잘 먹혀든다는 거예요. 쟤들의 능력과 논리가 지구촌 사회에서 비판보다는 대부분 찬사와 선망을 불러온다는 겁니다. 쟤들은 자신들의 의도와 논리와 전략을 정교하게 직조해내서, 그것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다작으로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공용어 영어로 책을 써내서 열심히 발표하고, 그게 또 세계적 열풍을 불러일으킨다는 거예요. 쟤들의 역사관·세계관·이데올로기가 편파적이든 어떻든 간에 쟤들 의도대로 관철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호모 데우스 Homo Deus』의 유발 하라리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편파적인 데다가 선민의식까지 뿌리깊지만 머리도 좋고, 고평가받는 저작·영화도 압도적으로 많이 만들어내고, 과학적 발명·발견·혁신도 압도적이고, 자본력도 압도적이라서 저들의 의도와 음모에 세계인들이 포섭당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무비판적으로 혹하는 성향이 강한 한국인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해서 문제는 똑같은 방식과 규모로 저들한테 대항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건 거의 불가능한 것이겠죠. 아무튼 이런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우리 한국으로 시선을 돌리면 정말 대책 없다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된 게 국내에서 출판되는 한국 교수·학자·지식인들의 저작이 일본 저자들 번역서보다 적을 수 있는 것이죠? 한국은 극일은커녕 지식 세계에서도 일본 식민지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봅니다. 영문 아마존 누리집에 들어가 보면, 한국 교수·학자·지식인들이 써낸 읽을 만한 영문 저작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에 비해 일본(계)와 중국(계) 교수·학자·지식인들 저작은 대박 베스트 셀러를 비롯해 꽤 많습니다. 지금 2000년 하고도 17년이 지난 2017년인데요. 한국(인들)은 솔까 구한말이나 21세기 백주대낮이나 거기서 거기라고 보면 정확하다고 봅니다. 스탠퍼드 철학백과사전(SEP)은 철학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인지과학, 신경과학, 인공지능, 예술, 미학, 언어학, 사회과학, 경제학, 생물학, 물리학, 양자역학, 우주론, 등등 모든 학문 분과(의 개념)들을 종합적·개괄적으로 다루고 있거든요. 해서 과거·현재·미래의 각종 연구 상황을 일별할 수 있고 전세계 학자들의 연구 현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데 무척 유용합니다. 또한 SEP의 항목들을 집필한 학자들은 그 분야의 세계 최고 수준 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데 여기에 한국(계) 학자들의 글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물론 실제론 몇몇 있긴 해요. 하지만 가뭄에 콩 수준이라 그닥 의미가 있는 건 아니란 것이죠. 집필자는 물론이거니와 피인용 저자들도 한국(계) 학자들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대체 한국 교수·학자·지식인들은 뭔 일에 그렇게 골몰하고 있는 걸까요? 뭔 사업에 그렇게 열중하느라 SEP 엔트리 하나 못 올리고 인용도 하나 되지 못하는 걸까요? 페이스북에 보면 SKY니 뭐니 스펙을 주렁주렁들 달고 있어요. 근데 이들이 그 스펙을 자랑할 만큼 탁월한 영문 논문과 저작을 써내느냐? 전혀 아니란 것이죠. 국내 교수·학자·지식인들이 세계 공용어 영어로 세계적 저널에 논문 발표하는 건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지푸라기 하나 없을 지경입니다. 영문 저작은 더더욱 없고요. 이래 가지고 뭘 하겠다는 건지 정말 한심스럽다는 생각입니다. 교수·학자·지식인들까지 먹자판·놀자판·권력놀음판 세상인 게 한국의 민낯이라고 보면 거의 정확하다고 봐요. 이런 한국/한국인들이 미래에 멸망하지 않으면 그거야말로 SF 공상과학영화일 거예요. 우린 그저 착각에 빠진 우물 안 개구리라고 보면 정확하다고 봅니다. 풍전등화 구한말보다 더하면 더했지 전혀 나을 것 없는 21세기 백주대낮 극동의 한 구석 한반도의 반쪽+반쪽 남한과 북한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