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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나는 문을 열어달라고 왔다.
그렇지만 문지기는 문 안쪽에 있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단지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힘으로 열고 들어오너라."라는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264)
앞에는 육중한 문짝이 언제까지나 전망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는 문을 통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을 통과하지 않고 끝날 사람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그 문 아래에 꼼짝달싹 못하고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265)
소세키의 <마음>에서도 나오듯,
그는 사랑에 얽힌 애증의 과거에 얽매여 산문으로 도피한다.
그렇지만, 그 '문'은 그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다.
소스케는 어느 스키야키 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 병은 정신없이 마셨다.
두 병째는 무리하게 마셨다.
세 병째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취한 소스케는 등을 벽에 기댄 채 상대가 없다는 듯한 눈으로 멍하게 어딘가를 바라보았다.(225)
집 문간까지 오니 집 안이 쥐죽은 듯 고요해서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148)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보고 있는 듯 하다.
고통을 잠시 벗어나기 위해서 마시고 마셔도 취하지 않는 날,
집 문간 앞에서 느끼는 적요 앞의 두려움.
그들은 큰 수반에 떨어진 두 방울의 기름같았다.
물이 튀어서 두 개가 하나로 모인 게 아니라
물에 튕겨지는 힘으로
동그랗게 하나로 붙어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게 되었다고 평하는 쪽이 적절했다.(172)
사건은 겨울의 끝에서 봄이 머리를 쳐들 무렵에 시작하여 벚꽃이 모두 떨어지고 새잎이 돋아날 무렵 끝났다.
모든 게 생사의 싸움이었다.
청죽을 불에 쬐어 기름을 짜내듯 고통스러웠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두 사람을 폭풍이 불시에 휘몰아쳐 쓰러뜨린 것이다.
두 사람이 일어났을 때 이미 천지는 모래투성이였다.(194)
그들은 채찍질을 당하면서 죽음을 향하여 가는 이들이었다.
단지 그 채찍질 끝에는 모든 것을 치유해주는 달디단 꿀이 묻어있다는 걸 깨달은 것.(173)
비련의 꿀은 달면서도 고통스럽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운명같은 것이 세상에 있다면,
채찍질을 당하면서 죽음을 향하여 가는 길이라도 걸을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아마도... 자신들은 문 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소세키의 <마음>과 함께 격정적인 구절들이 뜨거운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