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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 읽는다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06년 4월
평점 :
연암 박지원의 글에 참 오래도 매달렸다.
정민 선생님이 풀이한 글 이전에도 열하 일기를 읽었고, 고미숙의 잡담도 읽었고, 박지원의 삶에 대한 글도 읽었고, 논문도 몇 편 봤고...
그랬는데, 여전히 박지원은 전체적인 모습을 읽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내가 기다리던 책이 바로 이런 책이다.
인문학이란 바로 이런 책을 쓰는 학문이다. 오랜만에 읽고 나서 사고 싶은 책을 만나다. 역시 가을을 독서라기 보다는 지름신 강림의 계절인 모양이다. 벌써 책을 마구 사고 있다. 박정만 시 전집, 리영희 21세기 아침의 산책... 비싼 책으로만...
내년 봄쯤 다시 읽고 싶어지면 사 두고 싶다.(학교 도서관이 있는 나로서는 좀 배부른 꿈이지만...)
아니, 이 외에 박희병 선생이 쓴 책을 더 사야겠단 생각이 든다.
열하일기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 보면, 그럴 듯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국어 교사인 내 주제에 열하 일기를 읽는 일은 고역이었다. 난 내가 책을 읽어 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쉽게 책을 권해 주지 못한다. 열하 일기 같은 책이 권장 도서 목록에 들어있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책 읽지 않는 어른들이 만든 권장 도서 목록은 쓰레기다.
낱말 풀이가 각주로 가득하게 붙은 열하 일기를 읽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소설도 아니고, 중수필에 가까운 200여년 전의 이야기를 술술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알지도 못하면서 깔보는 들뢰즈... 따위를 들먹이는 고미숙의 열하일기는 슬펐다. 열하일기에 다가가서 박지원을 보기 보다는, 박지원과 연관된 에피소드를 읽은 느낌이어서 목마를 때 달착지근한 음료수 마시고 더 목말라 진 경험처럼 아쉬움을 남긴 책이었다.
정민 선생님 책은 풀이가 있긴 한데, 원문과 풀이가 거의 비슷하다 보니 깊게 읽기는 어렵다. 그런 식으로 읽어서는 연암을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이 책의 장점 1. 한문 원문을 팽개쳤다. 학자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그 한문 원문은 사실 일반 독자에겐 필요없는 것이었다.
장점 2. 짧은 글이라도 문단을 나누어, 문단별로 내용을 주해하고, 평설을 붙인 뒤, 총평을 함으로써 작품의 부분적 이해와 전체적 이해를 아우르게 한다. 필요한 고사도 적절하게 풀이해 준다. 각 문단이 어떻게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기능하고 있는지도 정확하게 집어 준다.
장점 3. 연암의 매력을 끈적거릴 정도로 잘 느껴지게 한다. 연암의 글솜씨, 그 표현력, 호방함, 그리고 연암이 그 시대와 맞물려 가장 뛰어난 글쟁이인 이유를 이 책을 읽으면 연암에 반하지 않을 수 없도록 잘 적고 있다. 산문을 적으면서 운문의 상상력을 집어 넣고, 갖가지 역설, 알레고리, 비유, 해학으로 상징 가득한 연암을 이 책처럼 잘 느끼게 하기도 쉽지 않다. 그의 언에에 대한 쇄신이 사상의 쇄신에 연결된 것임을 깊이있게 드러낸 수작이다.
장점 4. 짧은 글들을 적절한 길이로 설명함으로써 독자를 기죽게 하지 않는다.
대략 생각나는 것만 적어 보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인문학부, 자연학부에 가득해야 그것이 선진국임을 절실하게 느낀다.
돈 잘 버는 의사, 법조인들이 국가에 기여하는 바는 얼마나 될까?
국가의 경쟁력은 바로 이 기초 학문이 아닐까?
말로만 온고이지신을 외친다고 예전 것이 갑자기 돈이 되거나 힘이 되진 않는다.
인풋이 없는 아웃풋은 없다.
박지원 같은 씽크 탱크를 요리조리 요리할 수 있는 학문적 바탕이 그 나라의 힘을 펼치는 데 얼마나 큰 콘텐츠가 될 것인지... 온고지신 하지 못한다면, 맨날 남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녀야 할 것일 뿐인데...
이런 복잡한 생각들이 얽히지만, 박희병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연암을 느끼는 동안은 즐거움과 흥분됨으로 사색적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런 주례사 비평을 자주 쓸 수 있다면 이 가을, 정말 행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