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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서랍 - 이정록 산문집
이정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열아홉의 서랍을 가진 책상,
이정록 시인의 집에는 없다.
이 책상은 '그레이트 하우스'란 소설에 등장하는 소재다.
이정록이란 느직한 충청도 말로 들려주는 이야기 시인의 산문집이다.
무엇보다 절창인 시는,
그와 어머니의 대화이고,
그걸 풀어 놓은 수필이 가장 쫀득거린다.
충청도 사투리는 빠르지 않지만 찰진 말맛이 일품이다.
느린 속에서 느긋하게 생각하지만 깊은 의중이 담긴 언어다.
충청도 양반이란 것도, 다 그 언어의 특징을 살린 표현일 게다.
그의 시 중에 옻나무 젓가락이 그이 시어를 잘 반영한다.
십 년도 더 된 옻나무 젓가락
짝짝이다. 이것저것 집어먹으며 한쪽만 몰래 자랐
나? 아니면
한쪽만 허기의 어금니에 물어뜯겼나?
어머니. 이 젓가락 본래부터 짝짝이였어요? 그럴
리가. 전 그럴 리가가 아니고 전주 이간데요. 저런 싸
가지를 봐. 같은 미루나무라도 짧은 쪽은 네 놈 혓바
닥처럼 물 질질 흐르는 데서 버르장머리 없이 크다가
물컹물컹 제 살 아무 데나 쓸어 박은 것이고, 안 닳은
쪽은 산 중턱 어디쯤에서 나마냥 조신하게 자란 게지.
출신이 모다 이 어미라도 동생들 봐라. 물컹거리는 녀
석 있나? 장남이라고 고깃국 먹여 키웠더니, 뭐? 그
럴 리가가 아니고 전주 이가라고? 배운 놈이 그걸 농
이라고 치냐? 젖은 혓바닥이라고. (옻나무 젓가락, 부분)
이 산문들을 읽으면서, 그의 시를 다시 찾아봐야 겠단 생각이 든다.
세상 모든 말들이 '구라'라는 생각에서 '정말'이란 시집을 썼단 사람을 말이다.
윗방에서 안방 어머니 친구들의 온갖 야담을 다 들어가며 썼던 시들.
그 언어 유희와 삶의 지혜를 만나려면,
이 산문집으로는 모자란다는 생각에서다.
농사를 짓는 어머니께서 '농사는 그늘 농사'라고 하신다.
보통 농사라면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어야 한다는게 일반론이라면,
가로등 불빛 아래서 턱없이 빨리 자라는 토마토나,
그늘진 곳에서 시름시름 열리지 못하는 풋고추의 참맛을 보면서,
삶의 비의를 깨친다.
인생농사도 그늘 농사라고 혔지.
아내 그늘, 자식 그늘,
지 가슴 속 그늘,
그 그늘을 잘 경작혀야 풍성한 가을이 온다고 말이여.
어머니를 관찰하는 시인의 눈 역시 어머닐 닮을 수밖에 없다.
삶이란 게 본시 기름병 주둥이처럼 흘러넘치는 주변머리 없는 것이지만,
어머니는 식구들의 열린 병뚜껑을 닫아주시고 거친 손과 투박한 입술로 병 모가지를 훔치고 핥아주셨다.
하지만 당신 자신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고 부엌에 드시는가.
세 자식을 앞세우고 술로 삶을 지새우시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교무수첩에 받침없는 연애편지를 쓰신다는 낭만적인 어머니.
그래도 매일 밤 잠들라고 하면 막 설레고 가슴이 두근거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설렌다는 어머니의 삶.
세찬 비바람에 웅크리고 있는 나무는 작은 충격에도 문풍지처럼 운다.
남들보다 약하다 느끼는 순간, 주위의 모든 바람이 제 바람의 세기를 그 작은 나무 앞에 와서 툭툭 가눠보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쓸쓸히 우는 산정의 작은 나무들.
나는 춥고 보잘것없는 나무였다.
동그랗고 작은 코스모스 봉오리는 톡 터트리면 맑은 물이 흐른다.
'너는 왜 우니? 날 흉내내는 것이니?'
얄미온 코스모스 봉오리를 훑어 신작로에 흩뿌리다가, 코에 대고 향을 맡는다.
'아, 이리도 서러운 눈물의 향이 있구나.'
시인의 어린 시절은 서러움과 외로움의 기록으로 남는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 그의 삶은 다른 것이었을 수 있다.
그 사람의 삶의 의미를 남이 읽어줄 수 없다. 자기가 쓰는 수밖에...
아버지 지팡이에 새겨진 글자를 보면서...
"한 글자에 오백원씩 오천원 줬다.
느낌표는 보너스여. 그 느낌표가 중요헌 거여.
사람이 한 세상 접을 때에는 느낌표가 있어야 혀."
느릿한 충청도 사투리 속에서 밀려오는 삶에 대한 애정은 깍쟁이처럼 보이는 서울말보다 진해 보인다.
느릿한 말투지만 관찰하는 눈이 느린 것은 아닌 법이어서,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깊은 인간의 사념의 저수지를 거닐 수도 있어 행복한 산책길을 만나게 된다.
언제나 정지된 시간과 사물 속을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다면 사랑의 출발은 순조롭다.
로맨스는 벗어날 때 발동하는 것,
가족이란 굴레에서 빠져나와 가족과 충돌하고,
일상이란 틀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삶의 질서와 휘청휘청 싸우고,
상식에서 벗어나서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궤변과 씨름하고,
밤낮과 밤낮없이 싸우고,
빛과 어둠이 섞여서 하루에도 열두 번 빛과 어둠 중 어느 한 쪽으로 몸과 마음이 기우뚱기우뚱 쏠리는 것이다.
누나의 연애담에 얽힌 연애론은 제법 날카롭다.
시어에 대한 탐구도 재미있다.
부유하는 삶은 흐리다.
정처가 없다.
정처가 없으면 뿌리가 내리질 않는다.
뿌리를 기르지 않는 풍경은 힘이 없다. 바닥이 없다.
오늘 나느 작은 거울에 입김을 불어 넣고 이 말을 쓴다.
'물끄러미!'
아, 저녁 같은 이 말의 촉촉함에 나를 비빈다.
내치는 것도 아니고, 와락 껴안는 것도 아니다.
'물끄러미'라는 말 속에는 적정한 거리가 있다.
대상이 녹아서 나에게 스며들 때까지의 묽은 기다림이 있다.
째려보는 것도 아니고 쏘아보는 것도 아닌, '넌지시'가 있다.
몰아세우고 닦달하는 것이 아니라 안쓰러운 대상에 안쓰러운 나를 보리밥에 열무김치처럼 비비는 것,
비빔밥 옆 찬물 한 그릇의 눈을, 가슴에 들이는 것!
물끄러미, 오래 젖을 것!
풍경에 나를 덧대고, 내 안에 서려온 그늘이나 설움을 오래 문대며 들여다볼 것!
세상을 관조하는 그의 깊은 마음을 한 단어로 찾자면, 이것이 될 것이다.
물끄러미...
마지막 장은 시인들에게 한 강의록인 모양인데,
자신의 문장을 다 읽고 스스로 거른 문장 다섯은 이와 같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구름이 아름다운 건 폐허를 꿈꾸기 때문이다
달은 윙크 한 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내 관으로 쓰일 나무가 어딘에서 하늘을 보고 있다
혈서는 마침표부터 찍는다
근데, 문장은 뭐하려고 낳나?
이 글귀들도 구름처럼 사라지리라.
모든 것은 사라진다.
그렇지만, 시인은 자신의 서랍에서 새로운 것을 꺼내어 보고,
궁글리며 이렇게도 저렇게도 만들어 보다,
또 새로운 것을 주워 서랍에 넣어도 보다,
쉼표와 마침표, 물음표와 느낌표, 여는 괄호와 닫는 괄호 사이를
계속 도돌이표로 뺑뺑이치면서 관조의 쳇바퀴를 힘겨워하는 존재이기도 한 거다.
이 책을 통해서 시인의 뺑뺑이치는 삶의 노고 또한 들여다볼 수 있다.
시인의 서랍을 열어 보면,
그럴듯한 시들의 이면에 무질서하지만 감수성 예민한 그들이 주워들인 많은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