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바위와
바위와
구름과 구름과
바위와

손 씻고
낯 씻고
앉아 있었다

바람에 씻은 불처럼
앉아 있었다

연못은 혼자 
꽃처럼 피었다 지네  

시인이 곧 화자인 모양. 
화자는 연못 가에 앉아 있었다죠.
아무도 없는 연못가에 조용히 앉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겁니다.
연못 가의 한적함에는,
지난날의 추억도
아스라한 기억과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꺼져가는 지난 날들도... 
다 있다는 걸... 

연못 가에 앉아서
연못도 보고,
물 위에서 졸고있는 수련도 보고,
바위도 보고 
바람도 느끼고
시원함도 느끼고... 

자기 자신은 가뿟하게 사라지고
나라는 존재는 조붓하게 가벼워지고
가슴이 시원해 지는... 

운명이라는 면식범이 저지르는
이런저런 잡사따위는 가볍게 날리고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바람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볼을 스치고 옷을 한들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는 거죠. 

낙엽을 태워 보셨나요?
장작을 쌓아 두고 모닥불을 지펴 보셨나요?
바람이 불면 더 세차게 피어오르는 불길을 느껴 보셔야
바람에 씻은 불의 심상을 떠올리실 건데요. 

저는 화단에서 떨어진 낙엽을 까만 봉다리에 담아 두었다가,
알미늄박 도시락 위에 종이를 좀 태우고,
고 위에 낙엽들을 얹어 불장난을 가끔 합니다. 
새 낙엽을 얹고 입으로 호=3=3하고 불어주면 
새빨간 불길의 켜가
파르르 떠는 게 참 이쁘답니다. 

불은 잡다한 것들을 다 살라버리잖아요.
운명이라는 면식범이 저지른 범행들로
마음이 시들해지는 날,
조붓한 알미늄박 도시락에다
낙엽을 태워보세요. 

홧홧한 불길을 맞으면서
마음도 바삭하게 마르는 걸 느낄 수 있답니다.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손으로도
얼굴로도
마음으로도 느끼는 거겠죠. 

바람에 산소가 공급돼서
불길처럼 자신이 살라지는 상상을
잡념과 상념들이 소멸되는 체험을...
눈을 지긋이 감고서 

바람에 씻은 불이 되는 거겠죠.^^ 

그 사이 해가 설핏 지는 저녁이 되고,
연못도 한결 검게 되고,
밤을 맞을 준비를 하는 거죠. 

처음에 연못 가에 앉았을 땐,
이런저런 잡생각으로 고독했지만
연못가에서
멍하니 바보처럼
바람을 맞으면서 

바람에 씻긴 불이 되어보는 저녁 어스름. 

이제 연못과도 이별입니다. ^^


새로 생긴 저녁

보고 싶어도 참는 것
손 내밀고 싶어도
그저 손으로 손가락들을 만지작이고 있는 것
그런게 바위도 되고
바위 밑의 꽃도 되고 도 되고 하는 걸까?
아니면 웅덩이가 되어서
지나는 구름 같은 걸 둘둘 말아
가슴에 넣어두는 걸까? 

빠져나갈 자리 마땅찮은 구름떼 바쁜
새로 생긴 저녁

 

그대를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저녁 무렵,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이면
세상이 천천히 문을 닫아
이런저런 분별의 지혜도 닫혀버리는 시간이면
어둠이 선뜻 다가서
내 시야가 좁아지는 시간이면
그대가 생각납니다. 

새로 생긴 버릇이에요.
그 시간을 가만 느껴봅니다.  

'부베의 연인'이란 영화가 있어요. 

살인죄로 14년을 복역해야하는 부베를 찾아가는 여인 마라
부베는 마라의 오빠와 같이 레지스탕스로 활동했지요.
오빠가 전사하고 전사통지하러 마라네 집에 온 부베.
처음 본 순간 그들은 이끌리고
부베는 낙하산 천으로 옷이나 만들어 입으라는 썰렁한 농담과 함께 페이드 아웃. 

부베는 계속 편지를 하고,
아버지에게 결혼 승락도 얻지만,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곧 체포됩니다.
재판정에서 마라는 마음을 접으려 했으나 부베의 아직도 사랑한다는 고백에 흔들리죠. 

그리고 한 달에 두 번씩,
14년이나 연인을 찾아갑니다.  

마라의 마음이 그랬을까요?
저녁무렵이면 생각나는 부베. 

보고 싶은 마음은 참을 수밖에 없고,
손을 잡고 싶지만,
부베의 손이 닿았던 제 손가락만 매만질 뿐. 

마음은 새록새록 커져만 가고,
바위 밑의 난초처럼 뻗어가고
꽃도 피우고
단단한 바위처럼 굳어버릴 것도 같고,
연못이 되어
구름을 가두고 있지만
영원히 구름에 닿을 수 없는 사랑... 

저녁이 되면 그대가 그렇게 떠오르겠지요. 

그렇지만 일상은 구질구질하게 바쁜 일로 가득해요.
그대를 느끼게 되는 저녁,
그 느낌을 혼자서 가득 채우고 싶은데,
웅덩이에 빠진 구름을 가득 품은 연못처럼,
그대를 가득 품고 싶은데... 

일터에선 빠져나갈 자리가 마땅찮아서
한숨만 곱게 쉴 뿐입니다. 

마음에 한가득 구름을 빠트리고 싶은데
구름처럼 밀려있는 바쁜 일터는 매일 만나는 면식범이죠. 

저녁이면 그대를 떠올리는 습관이 새로 생겼답니다.
부베의 연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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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7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04-27 13:35   좋아요 0 | URL
위로가 되셨나요? 그럼 다행이고요.
저렇게 볼 수도 있겠단 거지, 뭐 시의 특징이 감추어진 얼굴이니 말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4-27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의 매혹적인 면 중 하나는
숨을 쉬게 해주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쁘게 달려나가다가도 잠시 멈춰서
자신의 심장 소리에 귀기울이게 하는 것이, 시 아닐까 하고. 그래서 점점 시가 좋아집니다.

오늘 머리가 많이 무겁습니다. 베란다 화초에 둘러싸여 멍하니 있어야 할 시간이구나 싶습니다.

글샘 2011-04-27 13:3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머리가 무거운 날은,
멍하니 있는 게 최고죠.

오늘 하루는 멍~하니 있어 봅시다. ㅎㅎ

pjy 2011-04-27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시지만 글쌤님의 글이 그대로 다 시입니다~~~

글샘 2011-04-27 18:52   좋아요 0 | URL
아침에 술이 덜 깨서... ㅋㅋ 쪼끔 감상적이었던 모양이에요. ^^

양철나무꾼 2011-04-28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공문서에서 걸어나온 듯한 글은 그닥이고,
꽈배기과의 글은 그럭저럭이고,
이런 술이 덜 깨서 쓰신 감상적인 글은 엄청 좋아요~^^

특별회차까지 만들어 위로하신 이 분 완전 행복하셨겠는걸요.
전 연못을 보면 돌팔매를 하고 싶어지는 삐뚤어진 심성이 있다는~


글샘 2011-04-28 12:15   좋아요 0 | URL
특별회차를 만들어 위로하신...이라 하니 좀 그렇네요. ㅎㅎ
세실님이 시를 적어 두시고,
뭐 어떤 뜻이었을까나...하고 물어보셔서 몇줄 적은 건데요. 뭐.

삐뚤어지셨군요.^^ 그렇다고 돌을 던지실 거 까지야.
님도 좋은 시 하나 뽑아 주세요. 제가 특별회차를 만들어 드립지요.

양철나무꾼 2011-04-30 02:51   좋아요 0 | URL
아웅, 선의와 부러움으로 단 댓글이었는데...삐뚤어짐에 방점이 찍혔네요~ㅠ.ㅠ
전 정중히 사양할래요.
유니크할 때 스페셜하다고 하지, 두번째부턴 스페셜한 거 아니거든요~^^

글샘 2011-04-30 12:20   좋아요 0 | URL
ㅎㅎ 삐뚤어짐에 점을 찍었더니 삐짐 모드가 되실라...
뭐, 이 나이에 새삼 유니크할 거나 스페셜할 게 뭐 있겠습니까?
싶지만,
사실 매일 매일이 스페셜이고,
유니크한 걸로 만나고 살아야 될 나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

(그리고 방점은 옆에 찍는 점을 뜻해요. 윗점같이 써야하는데, 예전에 세로쓰기 습관에서 방점이란 말을 그저 쓰곤 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