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 - 1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쌀쌀해졌다.
따끈한 차 한 잔이나 두툼한 외투로 온기가 데워질 마음은 아니다.
뭐가 부족해서 마음이 쌀쌀한 건 아니다.
그저.
낙엽지고 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때면,
저녁 식사를 하고 교무실로 돌아오는 길이 컴컴해 지고, 아침에 등교하는 고갯머리에서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지 않을 때면,
가슴 속이 슬몃슬몃 시리게 마련이다. 

이럴 때는 두꺼운 책을 뽑아 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만포장 독서 시간이 많은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조각조각난 시간 사이에 이런저런 일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유장한 강물같은 소설이 그리워질 때,
내가 토지를 끝까지 다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토지를 주워섬긴 기억에 20년도 넘은 독서를 다시 시작한다. 

대학생 시절에 읽은 토지와 마흔이 넘어 읽은 토지는 전혀 다른 맛이다.
그 때 읽은 기억이 잘은 나지 않지만,
최명희의 혼불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과는 또다른 맛이 토지에서는 진국처럼 우러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최명희의 혼불은 지나치게 '민속사'적 디테일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어 플롯의 전개가 박진감 없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개성적, 전형적 인물들의 형상화에는 탁월성을 드러내어 성공하고 있지만 시대적 배경이 해방직후의 혼란기여서 보편적인 소설로 보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는 반면,
토지가 가진 힘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공간에서나 존재할 법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빠른 붓놀림으로 슬몃슬몃 그려내고 있는데도
재재거리는 입담이나 박진감 넘치는 사건의 전개, 그리고 장편 소설에서만 가능한 복합적 구성의 엇갈림이
자못 운명의 흐름은 뉘도 알 수 없는 것이며
그야말로 토지에 얽매여 사는 인생들의 파란만장한 한 살이를
섬진강 구비가 슬렁거리며 흘러가듯 풀어내고 있는 데서 옹골차게 매듭져 나오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최치수네 집안 사정이며,
구천이의 인생사와 천한 것들의 사고 방식이며,
구한말의 계급 의식까지 제대로 묘파되고 있는 '토지'가 한국 문학에 놓여 있음을 정말 든든한 일이란 느낌을 가지고 읽게 된다. 

읽다 보면 대략적 줄거리는 떠오르지만,
상세한 부분의 전개와 대화들, 묘사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그렇지만, 박경리가 그려내는 사랑들은 또한 얼마나 운명적으로 비극적인지...
시대와 운명이 그려내는 대하와 장강은 토지와 함께 사람을 먹여 살리기도 하지만 인간을 가르고 흐르게 하기도 하는 법. 

평사리의 평화로운 부부송처럼 말은 없지만 구불구불 세상의 옹이들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누가 언제 읽어도 재미있고 의미있는 독서가 될 것이다. 

쌈박질 사이에서 피나 흘리는 삼국지는 여기 비하지 못할 책이라 감히 이름붙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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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0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0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0-11-10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지 다시 읽기, 나는 10년 주기로 읽어야겠다 다짐했으니~ 2014년 1월 20일에 시작하면 됩니다.
나는 사십대에 읽은 토지와 오십대에 읽은 토지를 비교하면 되겠네요.^^
평사리의 부부송은 어디메쯤 있을까요? 제가 갔던 2001년에는 못 봤는데~

글샘 2010-11-10 15:41   좋아요 0 | URL
아 10년 주기로... 그런 계획까지... 역시 계획적 여사님이시군여. ^^
저는 오늘 일을 몰라요. ㅎㅎ
평사리 부부송은 넓은 악양벌 한복판에 있답니다.

cyrus 2010-11-10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토지> 한 번 제대로 읽어야하는 생각이 드네요.
예전에 1권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거든요.
글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사진이 토지 속 작품 배경인 평사리를 연상케하네요.
사진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오늘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샘 2010-11-11 13:29   좋아요 0 | URL
제대로... ㅋㅋ
저 사진은 평사리입니다. 악양벌이죠.

소나무집 2010-11-1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토지를 다시 읽고 있답니다.
처음에는 한 권 읽을 때마다 서평 좀 써야지 했는데 마음만 그렇고요,지금 6권까지 왔네요.
예전에 읽을 때는 하루에 한 권 이상씩 읽었는데 지금은 평균 한 권 읽는데 2주씩은 걸리네요.
분주한 생활 속에 중간중간 다른 책들도 읽어가며...
선생이 토지를 쓰기 시작한 게 43세라고 하더라구요.
선생의 나이를 생각하며 읽으니까 더 공감되는 부분이 많고,
역사 공부도 다시 하게 되고, 사람 사는 게 예나 지금이나 다른 게 없는 것 같고...
토지는 인생의 맛을 조금은 아는 나이에 읽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싶어요.^^

글샘 2010-11-11 13: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인생의 맛을 조금 아는 나이... ^^ 대학생때 제가 이걸 읽고 뭔 생각을 했을지... 기억도 안 납니다. 하동 악양벌에 자주 가는데, 갈때마다 읽어야지 했거든요.

blanca 2010-11-10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하소설은 <태백산맥>과 <혼불>을 읽었어요. 글샘님 말씀처럼 <혼불> 정말 아름답고 대단한 작품이지만 풍속의 묘사, 불교 접근 대목에서 서사가 멈칫멈칫하더라구요. <토지> 꼭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는데 권수가 많아서 자꾸 망설여저요...페이퍼를 읽으니 꼭 읽어야 겠다고 또 다짐하고 갑니다.

글샘 2010-11-11 13:27   좋아요 0 | URL
권수 많아도 정말 재미있습니다. 삼국지 왜 읽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ㅋㅋ

BRINY 2010-11-11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3 겨울방학때 엄마의 권유로 읽은 토지. 그러고보니 저도 끝까지 안읽었습니다.

글샘 2010-11-11 13:27   좋아요 0 | URL
저는 12권까지 나왔을 때 읽어서... 그 뒷권을 못읽었거든요. ^^
다시 읽으니 참 새롭습니다. 겨울 방학에 한번 도전해 보세요.

페크pek0501 2010-11-15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에 계시네요. 신의 경지입니다.ㅋㅋ
전21권을 읽으실 생각을 하시다니...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저도 내용은 알지요. 참고서로도 읽은 적이 있어요.
아, 열심히 사시는 훌륭한 블로거들입니다. 그 도전은 아름다운 도전이구요.
저도 이 강한 에너지를 받고 지나갑니다.

글샘 2010-11-16 22:28   좋아요 0 | URL
님, 21권이지만 정말 쫀득쫀득하게 읽히는 책입니다.
제가 읽은 여느 장편과는 비교가 안 되는 글입니다.
홍명희의 임꺽정은 스릴이 적구요.
최명희의 혼불은 스토리가 부족하구요.
황석영의 장길산은 스릴과 스토리는 있지만 속도감이 느리구요.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인물은 죽이지만, 일반적 형상화에선 뒤지구요.
역시 조의 아리랑은 시대성은 뛰어나지만 역시 작위적이고, 그의 한강은 더욱 떨어집니다.
그 외 장편 소설 운운... 보다는 역시 박경리의 토지가 가진 힘은 대단합니다.
장편을 읽는 맛은 오래오래 남는 여운이거든요.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페크pek0501 2010-11-18 00:41   좋아요 0 | URL
글샘님의 박학다식에 감탄하며 한 수 배우며 지나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