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날이 갑자기 차가워졌구나.
따뜻하게 입고 다니자. 감기 안 걸리게~
1930년대라면 일본이 제국주의 전쟁을 본격화하던 시기란다.
그 시대엔 독립 운동 같은 것 하기는 정말 어렵던 시대였지.
그래서 우리말을 소중히 여기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모양이야.
김영랑의 시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란다.
한 번 읽어 보자.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무서운 일제 강점기에 쓰여진 시답지 않지?
시는 전체적으로 포근하고 따사로운 분위기란다.
그러면서도 험난한 세상을 극복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싶다는 <시의 가슴>이 다가서지 않니?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발음(ㄹ 같은 소리)을 고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지.
또 순수 우리말을 살려 쓰려고 한자어를 모두 빼버린 노력도 대단해.
에메랄드 같은 외래어가 있지만,
그건 1930년대가 서양 문물이 밀려들면서 그런 언어에 대한 동경도 드러난 시대기 때문일거야.
모더니즘 시라고 해서, 이 시대의 시들에 서양 말들이 많이 튀어 나오기도 한단다.
한 행은 대체적으로 3음보로 끊어 읽을 수 있겠다.
돌담에 /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이렇게 말이야.
같은 시인의 시 중에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음들을 골라 쓴 시가 있단다.
왜 그를 '언어의 세공사' 내지는 '조탁자(갈고 쪼아대는 사람)'라고 하는지 느껴 보렴.
내 마음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뻔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마음 속 어딘가에서 강물이 흐르는 듯한 느낌이 느껴져.
돋아오르는 아침 햇빛이 빤짝, 은빛으로 빛나는 강물이야.

마음은 어디 있을까?
이 평화롭고 잔잔한 마음은...
가슴에, 눈에, 핏줄에...
어디에서도 보이진 않지만,
그 모든 곳에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이겠지.
시인이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 그런 잔잔한 마음이 우리 안에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고,
그런데, 세상은 날마다 힘든 일 투성이라서...
이런 시를 조용히 앉아서 쓴 걸 거야.
이 꽃이 뭔지 알까?
모란이야. 우리 학교 교화.
작약하고 비슷한데, 모란이 더 꽃이 크고 화려해.

김영랑 시인의 유명한 시를 하나 더 보자꾸나.
제목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야.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ㅎ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이 피기까지는)
처음하고 끝이 같게 끝나지.
수미상관, 수미상응... 뭐 이런 거란다.
똑같은 말이지만, 느낌은 달라.
처음엔, 이야깃거리(토픽)를 던져주는 것이고,
중간 부분에서 그 토픽을 왜 이야기하는지를 전개하겠지.
그러다가 같은 구절을 반복하게 되면서 시상이 강조되고,
더 깊은 뜻을 느끼게 되는 거야.
이 시에서 말하는 건 뭘까?
편의상 세 부분으로 나눠서 한번 설명해 볼게.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모란이 필 때까지는 '나의 봄'을 기다린다네.
'봄'이란 '활짝피는 날'이지.
즐겁고 기쁜 일만 일어나는 계절. 희망으로 가득찬 느낌.
실제 봄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봄'은 그런 계절을 <상징>하지.
청춘(靑春).
이 말에 벌써 '봄'이 들어가잖아.
봄이란 계절은 동사 '보다'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어.
겨울은 아무 것도 볼 게 없는 계절이고, 뭔가 자꾸 보게 되는 계절이 봄이지.
보고 싶고, 볼 게 자꾸 생기고... 뜨거운 피.
모란이 필 때까지 희망을 가지고 살던 화자는,
모란이 떨어져 버린 날,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거래.
저 큰 모란이 뚝뚝 떨어진 어느 날.
'봄을 여읜 설움'이 마음에 가득차겠지.
희망이 사라져 버린 느낌.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ㅎ게 무너졌느니,
실제 모란은 5~6월에 피었다 져.
이 시가 쓰여지던 시기만 해도 음력 5월(양력으로 6월) 쯤이었을 거야.
무더워지는 여름인데,
모란이 떨어지고,
천지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그동안 가졌던 희망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마는 <일대 사건>이 일어난 거야.
그동안 모란이 필 것만 기다리면서 살아왔는데,
며칠 피어있던 모란은 금세 지고, 금세 시들어 버리니, 낙망이지.
요즘 9988234란 말이 있더라.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만 앓다 4망하는 게 복이래.
내 주변에 어떤 선생님은
엊그제 월요일까지 멀쩡하다가
몸이 피곤하다고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서 급성 백혈병으로 판정을 받아서 다음 날 돌아가시고 말았대.
아직 아이들도 중,고생인데 말이야.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거란다.
기대를 가지고,
좋은 날을 기다리며 살아 가는 거지만,
어느 날,
뚝뚝 떨어져버린 모란 꽃잎처럼
그렇게 허망하게 가버릴 수도 있는 게 인생이겠지.
그치만, 이런 허망함만 그렸다면 이 시는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지만,
뭔가가 그 다음에 나올 거야.
기대해 보자.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내 희망과 기대의 모두였던 모란이 지면, 1년은 아무 의미가 없대.
그래서 남은 날들을 하냥 섭섭해 울고 있다는구나.
그렇지만,
처음의 이 구절이 다시 반복되면서, 그 울음 속에서 반짝이는 희망을 발견하게 되지 않아?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겠다는 화자의 의지를.
내년에 다시 필 모란을 위해서,
기다림을 간직하고 열심히 살겠다는 화자의 결연한 눈빛이 보이는 것 같구나.
전에 '역설'에서 배웠지?
찬란한 슬픔.
나는 모란이 떨어져서 슬픕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냥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역설이 느껴져.
그냥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닌 까닭은?
다시 필 모란을 기다리는 일은
그냥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야.
다시 기다림의 '찬란한' 기쁨이 담긴 슬픔이겠지.
김영랑의 앞의 두 시와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
앞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나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에서는
정말 깨끗하고 순정하게 살고 싶은 화자의 욕망이 반영되어 나타났지.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살아지지 않더란 거야.
일제 강점기.
우리 말도 제대로 쓰지 못하게 하던 그 암흑의 시기에
화자는 이런 시를 쓰면서 이겨낼 수 있었던 건지도 몰라.
모란을 기다리는 것은,
김영랑만이 알고 있는 어떤 '희망'에 대한 상징인지도 모르고...
아, 오늘은 희망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런 그림이 생각난다.
워터하우스란 작가가 그린 <판도라>의 그림이야.
세상 모든 악덕이 빠져나간 뒤에 급히 닫아버린 판도라의 상자 안에 갇힌 녀석.
그 희망이란 녀석이 눈을 반짝이며 빛내고 있는 것 같지 않냐?
일제 강점기처럼 힘든 시기도 저렇게 꿋꿋하게 버티며 살아줬는데,
우리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야겠지?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