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더할 나위 없는 '절망'을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붓는 언어의 마술사,
역설의 달인 만해 한용운 스님의 시, <님의 침묵>을 보자.
우선 한 번 읽어 보렴.

1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
2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3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4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5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6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7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읍니다
8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9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0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너무 길어서 내가 10행을 번호를 붙였어.
향가 같은 거 배울 때, 4구체, 8구체 이런 말 들어 봤니?
우리나라 노래의 전통 형식이 4줄이야. 한시와 유사하단 말은 전에 했지.
그런 걸 4/4/2로 쓰는 일이 많아. 축구의 442 전법처럼...

우선 수비수로 도입부의 4행까지,
수비수는 뭐 축구에서 얼굴도 잘 안 나오지.
늘 골 넣는 사람만 인정하는 더러운 게임 ㅋㅋ
4행까진, 어려울 거 없어. 그냥, 우리 헤어졌어요~~ 이런 거. 전부 '갔습니다'로 끝나잖아.

그 다음 4줄. 8행까지가 박지성의 미드필더 자리야.
수비도 하고, 공격도 이뤄지는 그야말로 축구의 최강자들이 접전을 벌이는 곳.
5행에서 '역설'이 나온단다.
역설, 기억 나?
두 가지 상황이 서로 모순이 되는, 하나가 일어나면, 다른 하나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 함께 놓인... 모순 관계.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이런 상황 이해가 가니?
그이의 목소리만 들으면 세상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귀먹고 마는 사랑의 경지.
지독한 사랑에 빠진 거야.  

근데, 일상 언어로는 '향기로운 말소리에 귀가 뜨이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런 걸 역설이라고 그래.
(한글 맞춤법에는 '님'이 아니라 '임'인데. 고전이라서 그냥 님으로 적을게.) 

6행에서 이별로 놀란 마음이 나와. 슬픔. 대놓고 슬퍼요~
그치만 7행에서 반전이 돼.  
이별을 쓸데없이 '울음, 슬픔'으로만 만들면 제 스스로 사랑을 깨뜨리는 결과가 됨을 이 화자는 알아.
그래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견디며 희망의 정수를 만들지.
회자정리 거자필반(만난 이는 이별하고, 떠난 이는 돌아온다)...
이런 윤회의 진리를 믿는 거지.   

그리고 마지막 두 줄. 이 부분은 최전방 공격수야.
독일의 클로제나 아르헨의 메시의 자리.
폼도 죽여주지. 앞의 4,4에서 패스해준 볼을 골로 연결시키고,
골을 넣고 세레머니도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축구 선수의 꽃.
이 시에서도 이 부분이 가장 화려한 꽃에 해당하는 부분이야.
두 줄이지만, 짧고 굵게! 강하게! 가는 겁니다.

한국의 시들은 향가, 고려가요, 시조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계속 저 4/4/2 전법을 구사하고 있는데,
마지막 부분의 2행 앞부분에 감탄사를 넣는 경우가 많아.  

여기 또 나오지. 역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안 보냈다...
함께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럴수록 더 간절한 화자의 마음이 느껴지니?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부재, 님이 가서 현실에 없는 상황을 '님의 침묵'이라고 이름붙인 거야.
그렇지만, 님이 현실에 없다고 화자는 "굿바이, 세상에 반은 남자!" 이렇게 쿨하게 변하지 않고,
님이 없지만, 사랑의 노래를 불러.
그 사랑의 노래는 님의 부재를 둘러싼 화자의 마음을 계속 감싸고 있고...
마치 향 연기가 번져서 방 안이 향 냄새로 가득하듯... 

아빠는 저 마지막 구절에 참 애착이 간단다. 
축구로 몰아붙이자면, 완벽한 드리블에 완벽한 슛으로 '골~~~'을 얻은 거 같은 느낌이랄까.
님의 침묵과,
스스로 이기기 힘든 사랑의 노래와,
그리고 님의 부재를 휩싸고 도는 나의 사랑 노래...
어쩌면, 종교적으로 승화된 느낌까지 나지 않니? 
그 사랑은 얼마나 깊고 큰 사랑일는지.

만해 한용운의 일생으로 보아, 님을 조국, 또는 부처 등으로 해석하지만, 그저 사랑하는 님으로 봐도 멋진 시인 거 같아. 

자, <반어, 역설 끝내기> 특강! 대 공개~~ 

우선, 반어부터 연습하자꾸나. 반어는 무조건 반대로 말하면 돼. 

잔칫집에 너무 음식이 먹을 게 없어. 뭐라고 말할까?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터지려 하네요... 이럼 되겠지?
시험을 완전히 망쳤어. 반어로 뭐라고 할까? 완전 잘 쳐서 120점 나오겠다. 잘쳤다고 하면 되겠지.
너무 못생겼으면, 엄청 잘 났다~
지각했으면, 참 일찍 왔다~ 

시험, exercise!! 

현진건의 소설 중에 "인력거꾼" 김첨지가 나오는 소설이 있어.
유난히 영업이 잘 되는 날인데, 날씨가 궂어서 눈도 오고 하지.
집에 아픈 아내가 있는데, 술을 한 잔 하고 집에 설렁탕을 사가지고 들어갔어.
근데 그날 아내가 죽어서  아기만 울고 있는 거야. 이 날을 뭐라고 제목 붙였지? 

>> 접힌 부분 펼치기 >>

이런 게 '반어'야. 

다음은 '역설'을 연습해 볼게. 역설은 모순된 두 가지를 늘어 놓으면 돼. 

민우는 학생이다. (                                   )
(      )에 뭐를 넣으면 역설이 될까? 

>> 접힌 부분 펼치기 >>

근데, 왜 이런 표현을 하지?
강조하기 위해서야.
앞에서는 민우는 그냥 신분이 학생일 뿐이란 이야기고,
뒤의 학생이 아니란 것은 '일반 학생보다 월등히 뛰어난 사람'이거나,
'일반 학생에 훨씬 못 미치는 사람'이란 걸 강조하는 거야.  

이런 거지.
민우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냥 학생이 아니었다. 그는 완전 깡패 두목이었다.
민우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예사 학생이 아니었다. 그는 바둑의 고수로 소문이 났다. 

아빠는 선생님이셨다. (                              )  

여기 들어갈 말은 '보통 직업으로서의 선생님'을 뛰어넘는 훌륭한 점이 있거나,
희한한 점이 있는 경우에 '그러나 아빠는 선생님이 아니셨다.'를 넣으면 되겠지. 

강우식의 '어머니의 물감상자'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단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물감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물감장사를 한 것이 아닙니다.   

딱 보니 알겠지? 역설.
이 뒤에 무슨 말이 나올 거 같아? 어머니가 꼴통이었다? 그건 아니잖아.
어머니는 여느 물감 장수와는 다른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이래야지 강조지.
그 뒤는 이래.

세상의 온갖 색깔이 다 모여있는 물감상자를 앞에 놓고
진달래꽃빛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진달래꽃물을,
연초록 잎새들처럼 가슴에 싱그러운 그리움을 담고 싶은 이들에게는 초록꽃물을,
시집갈 나이의 처녀들에게는 쪽두리 모양의 노란 국화꽃물을 꿈을 나눠주듯이 물감봉지에 싸서 주었습니다.
눈빛처럼 흰 맑고 고운 마음씨도 곁들여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해종일 물감장사를 하다보면 콧물마저도 무지개빛이 되는 많은 날들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색동저고리 입히는 마음으로 나를 키우기 위해 물감장사를 하였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이 지상에 아니 계십니다.
물감상자 속의 물감들이 놓아주는 가장 아름다운 꽃길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운 색깔들만 가슴에 물들이라고 물감상자 하나만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여느 물감 장수는 물감 팔아서 먹고 사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지만,
어머니는 무엇에 관심이 있었을까? 

사람들의 마음이지.
싱그럽고 포근한 사랑의 마음.
그래서 어머니의 물감 상자를 통해 화자가 느끼는 것은,
"아이들에게 가장 아름답고 고운 색깔로 가슴을 물들이라"는 어머니의 정신이지.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화자는 역설을 쓴 거란다. 
평범한 말로 주제를 표현하는 것보다 '역설'을 써서 '강조'하려는 의도지.

이제, 역설법 마무리. 

두 볼에 흐르는 빛이 /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조지훈, 승무) 

'곱다'는 '기쁘다'와 가까운 감정인데, '서럽다'와는 모순되지.
얼굴이 고운데 왜 서럽냐. 그치? 못생겨야 서럽지.
여승이 참 고운 거야. 그러니깐 그걸 본 사람이 맘이 아프대.
야, 너같이 이쁜 애가, 어쩌다 이렇게 비구니(여승)가 된 거냐~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유치환, 깃발) 

 '소리없다'는 '침묵'과 어울리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사랑을 표현하지 못할 때 쓰던 말이었단다.
이미 결혼했던 화자는 과부인 상대에게 '들끓는 마음'을 '소리'로 표현할 수 없었지.
그래서 그 마음을 역설적으로 쓴 구절이야.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 처럼 (윤동주, 십자가)

윤동주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어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까움을 쓴 시야.
'괴로웠던 예수'가 '행복한' 이유는 이해가 가니?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야 하니 괴로웁지만,
예수는 죽어서 인류를 구원했잖아. 그게 '괴로운 행복함'으로 표현된 거지.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은 가지 않습니다. (한용운,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 

시간이 흐르면 남강은 당연히 흘러가지. 근데 왜 가지 않는다고 했을까?
제목에 힌트가 있지.
논개의 '애국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표현이겠지?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 지금은 가야할 때 (이형기, 낙화)

이별을 축복이라고 했어. 헐~ 그럼, 사랑하지 말고 맨날 이별해야 되게~ 그치. 
나무에서 꽃이 떨어져야 씨앗이 영글어 열매를 맺듯이,
사랑하는 사람도 이별을 통하여 '영혼의 성숙'을 이룰 수 있다는 구절이야.

제일 어려운 역설 하나만 하고 오늘 수업 끝!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절정) 

4연으로 된 시는 기승전결!
앞의 두 부분은 '마음의 풍경', 뒤의 두 부분은 '화자의 감정' 선경, 후정. 
강철과 무지개는 반대잖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강철, 실제로 있지도 않은 허상 무지개...
저항시인 이육사의 절정은 '일제 강점기의 절정'에서 느끼는 고통을 나타낸 시란다.
아, 일제 강점기는 제발 좀 끝났으면 좋겠는데... 끝이야 나겠지.
어차피 폭력으로 강점한 것은 망할 수밖에 없으니... 무지개 같은 거야.
그런데, 그 일본 놈들이 얼마나 강한지... 더럽게 강한 거야. 그게 '강철로 된 무지개'란다.  

이육사 나온 김에 절정을 다 한번 보자.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절정)

1연에서, 일제 강점기의 채찍질의 고통으로 북쪽 한계까지 갔어.
2연에서, 높은 고원까지 올라갔는데, 칼날처럼 좁은 곳이야.
3연, 이제 생각한단다. 발 디딜 곳도 없구나.
4연, 좌절하지. 일제는 엄청 센 놈이구나. 망하긴 망하겠지만, 쉽게는 안 망하겠구만~~ 

아빠가 인쇄해 준 걸 매일 2번 정도 읽어 보면 문학에 대해서 좀 가까워 질 거라고 생각해. 

다음 시간에는 1930년대 김영랑의 시로 만나자.    

잘자, 아들, 사랑해~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yrus 2010-11-02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면서 간만에 학창 시절의 국어 수업이 떠올렸습니다.
사실 저도 예전에 장래희망이 국어 선생님인것도 있었고요.
하지만, 글샘님의 수업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중간에 축구 선수들을 언급해서 내용은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인도의 수상 네루가 자신의 딸을 위해서 편지 형식의 <세계사 편력>을 썼다면,
글샘님이 쓰신 글들은 아들분을 위한 <국문학 편력>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샘 2010-11-04 10:40   좋아요 0 | URL
어젠 몸이 피곤해 하루 잤습니다.
역시, 지나친 음주는... 감사합니다.(술집 주인 말씀)예요. ㅎㅎ
오늘 시간날 때 김영랑을 쓰죠.

양철나무꾼 2010-11-03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저런 뜻이란 거 오늘 처음 알았어요.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졸았나 보네.

아빠가,"잘자,아들,사랑해~"라고 한단 말이죠.
저희집에선 엄마가 하는데요~^^

글샘 2010-11-04 10:41   좋아요 0 | URL
새겨보지 않으면 쉬이 넘어가는 게 언어죠. ^^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안 졸았어도, 밑줄 쫙 하느라고 기억에 남지 않았을 듯 싶네요. ^^
이제 사랑해~ 이런 말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아서요. ㅎㅎ

반딧불이 2010-11-0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시들은 향가, 고려가요, 시조의 전통을 이어오면서'를 '신라 향가, 고려가요, 조선시조' 이렇게 각각 불러주면 각 시대와 장르가 더 잘 정리되는 않을까요?

글샘 2010-11-04 15:48   좋아요 0 | URL
그러기 어려운 게요... 향가는 고려시대에도 많이 만들어 졌거든요.
고려가요는... 고려와 조선이 단절된 국가였기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고려때 노래가 급조된 국가 조선의 궁중음악으로 쓰이다가 훈민정음으로 창제되었구요.
시조도 고려말 사대부들이 부르기 시작했던 거여서 이름붙이기 좀 어렵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