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전문>

떠나는 글…저희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2년 전부터 여기저기 몸에서 경계경보가 울렸습니다. 능력에 비해서 너무 많은 일을 하다 보니 배터리가 방전된 거래요. 2년 동안 입원 퇴원을 반복하면서 많이 지쳤습니다.

그래도 감사하고 희망을 붙잡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추석 전주 폐에 물이 찼다는 의사의 선고. 숨쉬기가 힘들어 응급실에 실렸고 또 한 번의 절망적인 선고였어요.

그리고 또다시 이번엔 심장에 이상이 생겼어요. 더 이상 입원에서 링거 주렁주렁 매달고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혼자 떠나려고 해남 땅끝마을 가서 수면제를 먹었는데 남편이 119신고, 추적해서 찾아왔습니다.

저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 견딜 수가 없고 남편은 그런 저를 혼자 보낼수는 없고... 그래서 동반 떠남을 하게 되었습니다.

호텔에는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 또 용서를 구합니다.

너무 착한 남편,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입니다.

그 동안 저를 신뢰해 주고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죄송 또 죄송합니다.

그러나 700가지 통증에 시달려본 분이라면 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2010.10.7

&

인생에, 완전이란 없다.
흔들려본 사람들은 안다.
확고한, 가장 철저한 믿음도, 한 때는 흔들린다.

사람들은, 그가 말한 <행복>의 사전적 의미에 집착하는 모양인가?
그가 말한 <행복>은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세상 살이에서 '행복이나 불행 따위' 생각하며 살지 말아야 한다.
다만, 

자일을 타고 오른다
흔들리는 생애의 중량
확고한
가장 철저한 믿음도
한때는 흔들린다 

암벽을 더듬는다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결코 쉬지 않는
무명(無明)의 벌레처럼 무명을 
더듬는다

함부로 올려다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벼랑에 뜨는 별이나,
피는 꽃이나,
이슬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암벽을 더듬으며 
가까이 접근한다
행복이라든가 불행 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발 붙일 곳을 찾고 풀포기에 매달리면서 
다만
가까이
가까이 갈 뿐이다. <오세영, 등산, 전문>

발 붙일 곳을 찾고 풀포기에 매달리면서
가까이
가까이 갈 뿐인,
그런 것이 등산인 것이다. 

결코 쉬지 않는
빛을 모르는 벌레처럼
더듬으며
조금씩 기어올라가는 등산. 

호텔에서 완전 건강한 남편이 죽음에 이르게 도와 주었고,
그 또한 "나 이제 세상을 버리려네. 그대 없음은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이니..."
이렇게 따라 여행을 떠났음은,
그들이 행복하게 떠났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말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같이 죽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마도, 어쩌면... 그 남편되는 이는,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지...
안도현의, 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 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도현, 겨울 강가에서, 전문>
 

 

그놈의 눈발이
애처롭게도,
자꾸 제 품에 뛰어들어 사라지는 걸 보고,
피해보려고 왜 노력하지 않았겠는가.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큰 용기를 낸다. 

눈을 제 몸으로 받기로 작정하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하는 강물의 포용력, 그 큰 사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을 이렇게 찬양하면, 그것도 죄가 되는 걸까?
그렇지만, 나는 그들의 죽음을 이해하고 싶고,
그들의 마지막 길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면... 하고 기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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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10-08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어요, 글샘님!
우리도 오늘 독서모임 하면서 이 부부 이야기를 많이들 했어요.
남겨진 자녀들은 어떨지 몰라도, 두분은 행복한 마무리를 했을거라고...비난하지 말자고 했죠.
살아서 추레해진 육신의 고통을 감당하는 건 정말 행복하지 않은 일일테니까요.

글샘 2010-10-11 13:17   좋아요 0 | URL
너무 형식에 치우친 '예법'을 강요당한 국가에 살다보니, 별걸로 다 시시비비를 하더라구요.
초상 중에 호상은 없고 마무리에 행복한 건 없겠지만, 본인의 의사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blanca 2010-10-08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시려요. 안도현의 시가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 이 구절이 참. 자살이라는 것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글샘님 말씀처럼 그냥 그렇게 또 아들이 얘기한 것처럼 그 분들이 생전에 했던 얘기들을 있는 그래도 받아들여주었으면 좋겠어요.

글샘 2010-10-11 13:20   좋아요 0 | URL
그래요. 저도 가슴이 시려서 몇 자 남긴 겁니다.
마침 아이들 가르치는데, 이 시가 확 달려들더라구요.
생전에 했던 이야기를 잘은 모르지만,
행복 전도사라는 말에 너무 초점을 맞추진 않았음 좋겠더란 생각입니다.

혜덕화 2010-10-08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00가지의 고통에 시달려보지 않아도,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고통이 느껴져 마음 아픕니다.
가신 분의 명복을 빕니다.
_()()()_

글샘 2010-10-11 13:21   좋아요 0 | URL
700가지 고통이란 말에도 매달릴 거 없겠지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부부의 정이 고통보다 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주말에 명복을 많이 빌었습니다.

gimssim 2010-10-09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분의 강의를 참 좋아했어요.
어렵지 않고 자신감 있고, 무엇보다도 재미있었지요.
그런데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그의 고통을 짐작할 길이 없지만 그래도 안타깝습니다.
고 장영희 교수와의 죽음과 대비되어 보여서...

글샘 2010-10-11 13:22   좋아요 0 | URL
강의야 원래 자신감있고 재밌게 하는 거구요.
코미디언들이 행복할 거라 생각하는 거나, 행복전도사란 사람이 행복할 거라 생각하는 거나...
장영희 교수님의 글을 또 액면대로 믿어서는 안되지 않을까요?
얼마나 속으로 아프고 시린 날들이었을까... 그래서 긍정하는 그이의 글들이 더욱 빛나는 것이니 말입니다.
살수록... 남의 말 함부로 해선 안되겠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