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행복> 

사랑하는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ㅎㅎ 오늘의 시는 <유치환>의 '행복'입니다.  

세실님의 생일 축하 특강을 했더니,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은 영 관심이 없는데, 
하긴 시 같은 데 누가 관심을 갖겠어요, 먹고 사는데만 관심둔 돼지같은 사람들이 지배한 세상에서.
마기님께서 상설 특강을 개설하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셔서, 오늘은 특별 한정판으로 한 편. 

상설 개설은 어렵다구요, 마기님~~ 

시를 보는 방식은 여러 가지인데요.
크게 1) 시 바깥쪽에 관심을 가지고 보는 방식(외적 관점)과,
       2) 시 안쪽에 관심을 가지고 보는 방식(내적 관점)
으로 보구요. 

다시 1)은 작가의 표현적 측면(작가론적)과 
              작품의 시대적,배경적 측면(반영론적)과
              작품을 수용하는 독자적 측면(효용론 내지 수용론)
으로 보구요. 
       2)는 작품의 내부 장치, 그러니깐, 시어들의 유기적 관계, 또 운율이나 시어의 반복, 표현상의 특징 등에 대한 거죠

시대에 따라서 고전시대에는 작가의 경향성에 초점을 맞추기도 했구요.
미소 냉전 시대에는 미의 신비평(내적 관점) 쪽의 경향과 소의 반영론적 관점이 주류였기도 했지만, 반드시 그랬던 건 아니기도 합니다.  

암튼, 소비자의 '돈'이 왕이 되어버린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역시 '수용론' 내지 '효용론'적 입장이겠죠.
노래를 잘 하는 가수보다는 복근이 멋진 비주얼 가수가 '효용'이 있어서 '수용'되니 말입니다. ^^ 

유치환의 이 시는 우선 내적 관점에서 읽어 볼게요. 

내적 관점이라 하면, 우리 고딩때 수업받듯이, 부분 부분을 읽고 분석하는 거라 보시면 되죠. 

오늘도 시를 한번 쫙~ 첨부터 끝까지 읽어 보고 시작합시다. 

자, 이 시를 다 읽고 났다면 가장 큰 특징을 볼게요.
우선 처음과 끝부분에 반복되는 표현이 나오죠? 
물론 똑같지 않지만, 이런 걸 수미상관 내지 수미쌍관 등으로 불렀던 거 아시죠?
똑같은 말을 두 번이나 했다면 왜 그렇겠어요. 
시라는 게 '압축된 언어로 함축적 표현'을 해야하는 건데 말이죠.

처음의 말은 '화두를 툭 던지기'고,
사이에서 화제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전개하고,
마지막 말은 '화두의 이미지를 모으기'의 기능을 해요.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처음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다고 했구요.
마지막에서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다고 했지요. 

어때요.
처음엔 일반론적으로 '나는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 생각한다'...고 하고,
끝에선 화자의 입장에서 '나는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했다'는 경험을 토로하죠.
그 사이에선 당연히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를 외쳤을 거죠.
안 봐도 비디오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표현은 어떤 면에선 '역설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역설'이란 논리적으로 '한 문장에 서로 다른 주장을 드러내고 있을 때'라고 하는데요.
보통 '주고싶은 마음'과 '받고싶은 마음'을 비교하면 받고싶은 마음이 큰 것이 인간의 '욕심 慾'이죠.
근데, 그것보다 '주는 일'이 더 행복하다...고 거꾸로 표현하고 있거든요. 가벼운 역설이죠.
'소리없는 아우성'에서는 '소리낼 수 없는 상황'과 '가슴 속 갈등의 외침'이 공존하는 무거운 역설이구요.
그 역설이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의 가슴에 굵은 각인을 남기는 셈이군요.

그리고 이 시의 시어 중, 화자의 심정을 직접 드러내고 있는 시어를 하나만 찾으라면 어떨까요?
저는 '애틋하다'를 찾겠습니다.
애틋하다의 사전상 의미는 '섭섭하고 안타까워 애가 타는 듯하다. 정답고 알뜰한 맛이 있다.' 이런 뜻이 있네요.
편지를 보내야만 하는 상대니까,
상대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죠.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
그래서 안타깝고 애가 타고, 그러나 그이에 대한 감정은 정답고 알뜰한 감정이 넘치구요. 

작품 내부 구조를 하나만 더 보죠.(끝도 없이 분석할 수 있지만, 휴~~ 오늘은 요기까지.)
이 시는 각 연이 5행으로 가지런하죠.
각 문장의 길이도 거의 일정하구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에는 양아치처럼 입고 가지 않잖아요. 단정하게 하고 가죠.
그런데도 뭔가 미심쩍어서 쇼윈도에 자꾸 자신을 비춰보며 가곤 하잖아요.
화자의 마음 속 사랑이 그런 단정한 걸 원하는 내용의 투영일 수도 있겠네요.  
어, 4,5연은 일정하지 않다구요?
그럼 화자의 마음 속 가지런하고 편안하던 감정이 삐끗, 한거겠죠.
마음속 '소리없는 아우성'을 겉으로 드러낸 거죠.

그럼, 이제 작품 외적 분석으로 가 볼까요. 

이 시의 작가는 어제 세실님을 위한 특강에서 다룬 '깃발'의 작가죠.
'깃발'이 도달할 수 없는 노스탤지어의 사랑을 향한 갈망과 좌절의 개인사를 표출한 서정시라면,
'행복'은 현재 부재한 상황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 표현의 개인적 정리를 표현한 서정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걸 문제집에선 "주제"라고 하죠. ^^

사랑하는 사람은 옆에 없죠. 그래서 화자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편지를 씁니다.
얼마나 사랑하는 마음이냐면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데, 그 에메랄드 빛 하늘까지도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이쁜 마음이 보이는 거 같아요. 

그리고 우리의 사랑, 우리의 연분(인연)은
'한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이다...도 아니고, 인지도 모른다.고 썼네요. 

위에 올린 사진이 꽃양귀비라는 꽃인데요. 얼마나 이쁜가요.
내 사랑은 이렇게 사랑에 불타는 열정적인 것이다... 이런 표현이겠죠.
진홍빛 양귀비꽃을 모른다면 '한방을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의 간절함 이해가 떨어질까봐 사진을 붙였어요.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 지라도'...
연애편지 치곤 좀 멘트가 살벌하죠.
그런 걸로 보면, 아직 화자와 편지를 받을 '그대'는 '함께 할 사랑'에 대한 신념이 없을 수도 있겠네요.
'깃발'의 화자가 혼자서 마음 정리를 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편지를 쓴 거 같지 않나요? 

'편지를 쓰는 행동'과 '편지를 받는 행동' 가운데 화자는 '편지를 쓰는 행동'을 하면서,
'사랑받는 수동적 삶'보다 '사랑하는 능동적 삶'이 더 행복하다고 쓰는데요.
편지를 쓰는 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면서 어떤 글을 쓸지 내용을 구상하는 시간,
그리고 천천히 또박또박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시간,
다 쓰고 제대로 자기 마음이 표현되었는지 다시 읽어 보고 혼자 빙그레 웃는 시간, 

편지를 부치고 나서도
그이가 받아 보았을까?
얼마나 반기실까?
혹시 못마땅해 하지나 않으실까?
내가 실수로 잘못 적은 말이나 없나?
내 글을 읽으시고 답장을 쓰신 걸까?
만일 쓰셨다면 답장은 언제나 올까?
이런 생각들로 그이를 향한 마음씀씀이가 지속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니, 화자는 편지를 받는 일보다 쓰는 일이 행복하였고,
마찬가지로 사랑을 받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행복하다고 강조한 것이죠. 

그렇지만 화자의 마음 속 어딘가에 분명히 결핍이 느껴집니다.
그래. 나는 편지를 쓰면서, 사랑을 주면서 행복한거야! 거야! 거야! 하고 아무리 외쳐봐도,
왠지 쓸쓸해 보여요.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 지라도... 

저는 이 두 행이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화자의 가슴저림이 느껴져요.
뭐 누구나 다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는 거죠. 이런 게 '애틋함'의 정체일 거예요.

시인의 시를 읽을 때는 한 편의 시를 읽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여러 편의 시, '깃발'과 '행복'을 엮어 읽는 편도 좋을 거라는 생각에서,
오늘은 유치환의 시 두 편을 작가의 측면에서 몇 가지 살펴봤습니다.  

허만하 시인이 청마에게 물었다는 얘기를 기억한다.
"선생님,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셨겠습니까?"
청마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아마 천문학자가 되었을끼라." '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으로 별들이 쏟아진다.
별들에는 소인이 찍혀있다. 당신에게 배달되는 오늘의 별을 뜯어보시라.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다. <김선우의 감상 중에서...>
http://myhome.mijumunhak.com/kimheejooh/index.php?docu=view&gmcode=13&gscode=34&id=data1&no=32&page=2&sc=on&sn=off&ss=on 

자, 다음 특강은...
청중의 반응을 보고, 그때 결정할게요. 

이 강의를 읽으신 분들, 모두 행복하고 바삭한(하도 비가오니깐) 일요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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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7-11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유치환의 이 시를 얼마나 좋으하는지 이미 아셨던거?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유치환님이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었다네요.
죽을 때까지.
그래서 유부남이었던 유치환님과 그 여인의 러브스토리는 이렇게 애틋하고 안타까울 수 밖에 없었던거고.
이렇게 오고갔던 편지와 시들을 그 여인이 모두 간직했다가 발표한 거라고 하니...ㅠㅠ

글샘님...
마음에 콱콱 박히는 강의였습니다.
글샘님의 강의를 꼭 글샘님 앞에서 듣고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예요.
아~~비오는 쓸쓸한 일요일이...행복으로 가득찬 일요일이 되었습니다.
감사^^

글샘 2010-07-11 12:17   좋아요 0 | URL
어느 글에선가 유치환이 고백하기를, "나의 생애에 있어서 이 애정의 대상이 몇 번 바뀌었습니다. 이 같은 절도 없는 애정의 방황은 나의 커다란 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스스로 반성하기도 하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연모의 대상이 이영도이다. 시조시인 이호우의 동생이기도 한 이영도는 남편과 사별한 채 딸 하나를 기르는 아름다운 30대 초반이었다.

아마 청마 유치환도 요즘이라면 절대 반성 안할거예요. ^^
사랑은 움직이는 거니까요.

행복한 일요일이 되셨다니... 성공이네요. ㅎㅎ

세실 2010-07-11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 시에 양귀비꽃이 나오는거 생소해요. 건성으로 읽었나 봅니다.
양귀비 참 예쁘죠. 정열적인 사랑이 느껴져서 좋아요. 어쩜 저리도 붉은 빛일수 있는지....
이영도에게 보낸 편지가 500통이라고 들었어요.
아 나도 만날때 마다 원고지 20장에서 50장까지 편지 써서 주던 남자 있었는데...문득 보고싶어 지네요.
그래두 나만 사랑하는거 보다는 서로 똑같이, 아니 남자가 더 날 사랑해주는게 좋을듯.
나만 사랑하면 애틋하고, 슬프잖아요.
글샘님 강의 참 좋아요. 어쩜 이리 서정적이고 섬세한지.
글샘님 연애대장 같아요. =3=3=3=

글샘 2010-07-11 18:16   좋아요 0 | URL
ㅎㅎ 연애대장... 이론상 대장이죠. ㅍㅎㅎ
양귀비꽃의 이미지가 이 시의 핵심 이미지인 것 같아요.
시 읽을 때 시각적 이미지는 엄청 강한 효과를 보여주는데, 사람들은 편지에 가려져서 양귀비꽃을 놓치기 쉽지만요.
경기도 파준가에 저 꽃 피는 계절이 있다는데요, 내년쯤엔 꼭 가보려구요. 저도 저꽃 좋아요. 아마폴라...
그 남자, 엄청나군요. 원고지 50장... 애틋한게, 사랑의 정수 아닐까요? ㅋㅋ

sslmo 2010-07-13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글샘님.

마기님 블로그 트랙백해서 왔습니다.
종종 알라딘 서재 대문에서 봤었는데...
이렇게 뵈니 느낌이 또 다른 걸요~
시 특강도 완전 죽음이구요.

상설은 아니더라도 계속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추천 꾸욱~댓글 남기고 갑니다.^^

글샘 2010-07-13 10:3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느낌이 어떠세요. ㅎㅎㅎ
죽음이라니 감사합니다.
아, 한 분씩... 늘어서... 이거 시작을 잘못했나... 후회 중입니다. ^^
저도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