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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2 ㅣ 오늘의 일본문학 4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평점 :
1권의 성장소설에 비하면 2권의 이리오모테 섬생활이 나는 훨씬 재미있었다.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는 사실적이긴하지만 소설의 재미를 이끌어내긴 힘들다. 인생의 진실성이란 극한 상황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섬에서는 텔레비전도 전기도 없는 생활이 이어지지만, 전교생 다섯 명의 학교와 베니건스를 연상시키는 베니라는 자유인, 그리고 끝도없이 무언가를 가져다주는 이웃들이 있었다. 물론 거기도 땅을 사고 파는 개발업자도 있었고, 자본가의 개 노릇을 하는 경찰들도 있었지만, 초절정 구제불능 운동권 고수 아버지와 덩달아 기둥에 몸을 매다는 어머니도 있어서 섬생활의 어려움들은 행복하게 마무리된다.
이 소설의 통쾌함은 아버지와 어머니, 베니가 잡혀가지 않고 자유롭게 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도시의 서점 순례나 돈많은 외갓집도 조금 좋긴 하지만, 전교생 다섯 명의 수업과 싱싱함이 묻어나는 누나 요코의 모습이 사람사는 맛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사우스에서는 깡패따윈 없었다.
내가 1권을 읽으면서 기대했던 바대로, 남쪽을 사랑하는(南愛子) 미나미 선생님의 편지가 배달되었는데, 정말 미나미 선생님은 멋진 분이셨다. …지로 세대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부디 올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손해보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서로 협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쁜 일에 협력해서는 아무 의미도 없겠지…. 나는 제자에게 이런 멋진 말을 써보지 못한 부끄러운 교사였기 때문에 깊은 반성을 했다.
아버지가 운동권에 대해 내뱉는 일갈은 곱씹어볼 만한 내용이다. “나는 당신 같은 운동꾼들에게는 더 이상 어떤 공감도 느낄 수가 없어. 좌익 운동이 슬슬 힘이 빠지니까 그 활로로서 찾아낸 게 환경이고 인권이지. 즉 운동을 위한 운동이란 거요. 포스트 냉전 이후 미국이 필사적으로 적을 찾는 것과 똑같은 방식이야.” 우리 문학에서 이런 말을 읽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특히 아버지가 개발 반대 투쟁을 앞두고 지로에게 해준 말은 삶의 방향을 이끄는 등대가 되지 않을까 한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오쿠다 씨는 이치로 씨를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 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중 한 사람이다.”
한 사람. 싸우는 사람 중의 한 사람. 개인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어떤 명목으로도 앞장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꿋꿋하게 버티는 것이 운동에서 얼마나 중요하던가. 힘빠질 일이 아니다. 그저 한 사람으로서 운동의 자리에 서야 하는 것이다. 교수대로부터의 리포트란 책에서 ‘해방되기 전, 마지막 전사가 되어도 혁명가가 될 것인가?’하는 대목을 읽고 고민했던 대학 시절이 있었다. 결국 누구나 마지막 전사일 수 있고, 한 사람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버지는 ‘한 개인’으로 당당하게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은 분이다. 경찰 입장에서는 영원한 위험 인물이지만, 이미 아버지도 혁명 같은 건 믿지 않는다. <권력자가 벌레보다 싫고, 국가가 하라는 대로는 죽어도 하기 싫은 한 개인>일 따름이다.
내가 배운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는 <나, 너, 우리, 우리 나라, 대한 민국>으로 시작했고, 어린시절부터 ‘우리’는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항상 내 옆에는 너와 우리의 눈이 가득했고, ‘우리’를 벗어나는 일은 큰 죄악인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이 책을 덮으며, <나>를 생각하게 해주기 위해 남쪽으로 튄 ‘이치로 씨’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