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조그마한 월간지에서 한국심리상담연구소에서 P.E.T(효과적인 부모 역할 훈련) 전문강사로 일하고 있는 이안영님의 글을 읽었다. 발 때문에 스케이트장에 아이들만 들여보내놓고 휴게실에서 읽었는데, 모든 일엔 제대로 된 방법이 있다는 생각이 간절히 드는 글이었다.

P.E.T에서 제안하는 방법들, 반영적 경청, 나 전달, 환경 재구성, 양승 방법에 이어 마지막으로 '가치 대립에 대처하는 기술'에 대한 내용이다. 아이가 커 갈수록 자주 생기는 문제가 가치 대립인데, 서로의 욕구가 달라 갈등할 때는 자신의 행동이 엄마에게 불편을 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아이들도 가치가 대립할 때는 그렇지 못하고 몰이해의 골만 커진다는 이야기이다.

부모가 자녀와 겪는 가치 대립에 대처할 수 있는 기술 4가지는 아래와 같은데 정리하면...

첫째, 모델 되기.

자녀와 엄마 사이가 좋다면 엄마를 보고 그대로 모방할 수 있다. 그러나 자녀의 기질과 엄마의 기질이 아주 다르다면 아무리 엄마가 모델을 보여도 엄마의 행동을 따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녀가 어릴 때부터 서로 존중하는 좋은 관계가 되도록 공을 들여야 한다.

둘째, 의논 상대 되어주기

이 방법도 엄마와 사이가 좋아야 효과를 볼 수 있다. 어릴 때 엄마가 힘을 써서 맘대로 억누르고 휘둘렀다면 자녀가 자라서 힘이 커지면 자녀도 엄마에게 힘을 쓰기가 쉽다. 어렵지만 자녀가 어릴 때부터 서로 힘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세째, 자신의 가치 수정하기

앞서가는 자녀들의 가치를 수용할 필요가 있을 때 부모 자신의 가치를 수정하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몇 년 전 휴대폰이 처음 나왔을 때 자녀가 휴대폰을 갖는 문제로 갈등하는 사례가 많았다. 자녀가 왜 휴대폰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다는 부모가 많았던 것이다. 지금은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부모가 아주 많이 줄었다. 부모가 자신의 가치를 수정한 결과이며, 부모들도 웬만하면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탓이다.

네째, 평온을 비는 기도하기

이 기도는 자신이 믿는 신에게 하는 기도일 수도 있고 스스로 분별을 얻기 위한 일종의 명상일 수도 있다. 즉, 노력하면 변화될 수 있는 일은 어떤 일이고, 노력해도 변화될 수 없는 일은 어떤 일인지 분별할 지혜를 얻으려는 것이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자녀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하는 실천을 더해서 부디 자녀와 행복하게 지내길 기도한다. *

#  이 네가지 위에 있는 전제조건은 아이와 나 사이에 흐르는 우호적인 전선인 것 같다. 이 전선에 먹구름이 끼지 않도록 유심히 살피고 기다리고 때로는 먼저 살며시 다가가 아이를 안아주어야겠다. 나는 좋은 모델이 되고 있는지, 최우선의 의논상대가 되고 있는지, 돌아보고 분별을 얻기 위한 명상의 시간을 짧게라도 수시로 가져야겠다. 가치수정은 그런대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의 행복을 보는 게 나의 행복이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하 아빠, 호호 엄마의 즐거운 책 고르기 - 책의 달인 199명이 말하는 최고의 어린이 책 256
가영아빠 외 198명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에 글이 실린 사람으로서 리뷰를 써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몇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어 리뷰를 쓰기로 합니다. 그동안 좋은 책을 골라주자는 의도로 나온 책이나 리스트들은 무수히 많았지만, 독자들이 쓴 서평을 토대로 책을 고르고 기획한 책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그 점에 있습니다. 독자들이 자신의 자녀와 함께 읽고 느끼며 벅차올랐던 느낌들을 고스란히 풀어놓은 책이기 때문에, 프롤로그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그 '현장성'이 첫번째 미덕입니다. 또 한가지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독자의 입장에서 쓴 글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공정성'에 있습니다.

독자들의 글이기 때문에 전문성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염려되는 부분을 상쇄할 정도로 역량이 보이는 분들의 글이 많습니다. 틀에 매이지 않는 시각으로 뜯어보기도 하고 몸으로 느끼고 쓴 글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전문가들의 예리하기만 한 글보다 감동이 더 한 것은 당연합니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어린이책 분야의 스테디셀러는 거의 모여있다는 것입니다. 신간을 원하는 분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오랜 기간을 두고 꾸준히 독자들에게 읽힌 책을 감히 '고전'이라 부른다면 그런 수준의 보편타당하고 공감대가 형성되는 좋은 책들이 모여있다는 것입니다.

연령대별로 나눈 각 장의 뒷편에는 주제별로 추천하는 책을 모아두었습니다. 마지막 장에서는 3명의 답변자가 자신의 자녀와 그리고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경험했던 사실들을 토대로, 가정에서의 독서지도에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부족한 점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가감없이 솔직하게 평소의 소신과 경험에서 얻은 이야기를 풀어놓았습니다.

독서의 중요성은 새삼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하지만 어딘지 부족하고 뭔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평범한 엄마 아빠에게 이 책은 아주 색다른 길라잡이의 역할과 함께 잔잔한 감동을 줄 것입니다.

책이 꽤 두꺼운 편인데, 영유아편과 초등편을 나누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며, 중학생 이상의 청소년편도 기획해 봄이 어떨지 생각해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6-07-08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6-07-08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그러셨어요? 감사합니다.. 부족한 면도 보였던 책이라 생각해요. 즐거운 휴일 보내세요.~~~ 루루랄라~~
 
별볼일 없는 4학년 창비아동문고 152
주디 블룸 지음, 윤여숙 옮김, 오승민 그림 / 창비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초등 중학년의 어중간한 연령, 동생이 하나쯤 있고 완전 고학년 취급도 못 받고 저학년이 아니라 어리광 부리기도 그렇고, 학습의 부담은 커지고 어른들의 기대치는 점점 오르기 시작하는 시점이 4학년이다.

이 책의 주인공 피터는 아주아주 별난 동생 4살 짜리 퍼지와 평범한 부모님과 함께 산다. 시종일관 퍼지는 피터에게 방해꾼이고 걸림돌이며 애물단지다. 하지만 엄마는 어린 동생 퍼지만을 위하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동생과 형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엄마는 피터에게 동생의 잘못에도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엄마나 아빠가 은근히 믿고 기대하는 대상은 형인 피터이다. 피터는 그런 어른들의 마음에 들고 싶어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예의를 갖추고 상대를 이해하려 든다. 내심 가지는 불만과 아쉬움을 감추고 별로 표현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생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서 언제나 자신을 난처하게 만든다. 피터가 애지중지하는 거북이를 퍼지가 삼켜버린 날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거북이가 죽어없어지고 자신의 마음이 그리 아픈 것 따위는 어른들의 관심 밖이다. 그것을 삼킨 어린 동생만을 생각하는 엄마가 밉기도 하다. 자신의 슬픔은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피터에게 새로운 선물이 안긴다. 아빠가 강아지를 사온 것이다. 피터는 강아지에게 '거북'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이제 동생이 다시는 자신의 애완동물을 삼켜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이 동화의 사건이라면 집안팎에서 동생이 일으키는 사고들의 연속이다. 동생이 있는 아이라면 날마다 그런 동생을 봐주어야하는 형의 입장에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친지들이 모여도 어린 동생이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아 속이 상했던 경험이 있는 맏이들이면, 난 동생보다 관심과 사랑도 못 받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디 블룸이 이런 제목을 지은 건 반어적 표현으로 보인다. 가만히 지켜보면 피터는 별볼일 없는 아이가 아니라, 부모님에겐 소중한 맏이로, 동생에겐 기대고 싶은 형으로, 다른 어른들에겐 예의바르고 마음도 따스한 좋은 아이로, 친구들에겐 그래도 너그러운 아이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아이다. 관심을 못 받고 있는 게 아니라 이제는 어른들이 믿고 바라보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 강아지를 선물하는 아빠를 보면 역시 힘을 좀더 실어주는 대상은 큰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큰아이라는 위치에 선택적으로 있는 게 아니므로, 그에 따른 책임감이 함께 주어지므로, 그 아이에게 힘을 조금더 실어주고 싶은 게 보통의 부모마음이다. 아이들과 부모의 마음을 잘 드러내어주고 있다.

이 동화는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된다. 피터가 화자가 되어 자신의 일기글을 공개하는 것처럼 좌충우돌, 알콩달콩, 생활 속 크고 작은 일들이 피터의 눈높이로 펼쳐진다. 그러니 인물이나 배경면에서도 생활동화의 그것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일상적이다.
가히 엽기적인 퍼지의 말썽은 우리 정서와 다소 다른 것 같아 조마조마하다. 피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이라면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자신의 임무, 책임, 권리 그리고 자신의 소중함과 가치를 깨닫고 뿌듯함으로 책장을 덮을 수 있는 동화이다.

한번도 이런 말을 드러내놓고 하지 않고, 우당탕탕 난리를 치며 하루하루 보내다 어느 순간 의외의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식이다. 책제목을 그렇게 시큰둥하게 꼬아 놓은 것도, 고리타분하게 가르치려들지 않으려는 작가의 숨은 뜻으로 해석된다. 우리 동화는 이런 부분에서 아직 미흡한 것 같다. 어떤 식으로든 드러내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는 것 같다. 이런 감각이 부럽다. 이 동화는 위트있고 아름다운 글이 마음에 남는 <백조의 트럼펫>을 번역한 윤여숙님이 옮겼다. 삽화는 간결하며 동양적인 얼굴로 인물을 그려놓아 우리 아이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 내 마음이 아파요 - 청년사 저학년 동화 01
노경실 지음, 이형진 그림 / 청년사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노경실 작가의 동화라면 내가 읽으 것 중에 <열 살이면 세상을 알 만한 나이>가 생각난다. <엄마 내 마음이 아파요>는 그 책과 아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이런 류를 생활동화라고 굳이 부를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성장동화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주 사소하며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작지만 소중한 깨달음을 얻고 마음의 키가 쑥쑥 자라는 예쁜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 모험이라 부를 만한 것은 없지만, 숙제도 제대로 안 하고 학교에 가야하는 아이의 복잡미묘한 마음 자체가 하나의 모험이 아닐까. 이 책 속의 주인공은 열살이며 남자아이다. 개구쟁이 남동생, 엄마, 아빠와 함께 평범한 가족의 구성원이다.

때로는 평범한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며, 행복한 것인지 모른다.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며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좋았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아빠, 사랑하여 결혼한 남편이면서 불쌍해서 결혼해 줬다고 내숭을 떠는 친구같이 귀여운 느낌이 드는 엄마, 어색한 분위기를 재치있게 넘겨주는 장난꾸러기 동생, 그리고 배부르면 아무 데나 드러누워 잠 자는 바둑이. 사실 주인공아인 이런 바둑이를 부러워하며, 엉뚱하게도 자신은 바둑이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남자아인 자신이 불행한 이유를 100가지도 넘게 적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을 거꾸로 적으니 행복한 이유가 된다는 걸 알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손바닥 뒤집기 처럼 어렵지않은, 생각뒤집기이다. 좋아하는 반친구 연실이에게 고백도 못 하지만 연실이가 결석을 하자 신경이 무척 쓰인다. 연실이가 돌이 되기도 전에 엄마를 잃고 연실이가 엄마랑 찍은 어딘지 어색해 보인 사진은 알고보니, 합성사진이었다. 석주의 새엄마는 아주 좋은 분이지만, 그래도 친엄마가 보고 싶다는 석주의 말에, 의리를 지키기 위해 엄마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이가 우리의 주인공이다.

작가가 의리를 정의하는 건, 유행하는 조폭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 친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아빠의 감동적인, 진실한 친구 얘기를 들으며 주인공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의 마음을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형제간에 그리 하면 우애, 남녀간이면 사랑, 친구간이면 우정이란다. 작가의 마음씀씀이가 참 푸근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리 조근조근 들려주니 말이다.

<엄마 내 마음이 아파요>는 연실이의 합성사진이나 석주의 친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알고 나서 주인공 아이가 느끼는 마음 속 울음이다. 이 아이는 평범한 가족이 있어 너무나 행복한 자신을 발견하고, 친구의 어딘가 비어있는 옆자리에 대해 무한한 연민을 느낀다. 성장이란 이런 것인가 싶다. 타인에 대한 순수한 연민으로 자신을 더욱 깨닫고 가슴을 넓힐 수 있다면 이 아인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장할까.

이 동화는 저학년(2,3학년)을 대상으로 한다. 다소 훈계조 같은 느낌을 피할 수 없지만 천방지축 아이의 눈으로 보는 가족, 선생님, 동네어른, 친구에 대한 표현이 거름망을 통과하지 않고 통통 튀어, 생동감을 잃지 않고 이어간다. 주제는 무엇 한 가지로 말하기 어렵다. 가족, 우정, 행복... 어느 한 가지로 촛점을 맞추어 독후 활동을 하는 것도 좋겠고,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십분 이용하여 그들의 인물소개를 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인물광고나 각 인물의 입장에서 쓰는 그날의 일기도 써 볼만 하겠다.

일상적인 문체와 이형진님의 살아 움직이는 삽화가 보는 재미를 더한다. 굵고 가는 연필선으로 쓱쓱싹싹 그려서 투명 수채화법으로 가볍게 채색한 삽화는 인물의 재미난 표정과 함께 가만 있지 못하고 꿈틀대는 것 같다. <고양이>나 <외삼촌 빨강애인>에서의 삽화도 인상적이었던 화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춘.길
베르나르 포콩 사진, 앙토넹 포토스키 글,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춘의 시기는 지나갔다고 생각하며 사는 내게, 이 사진에세이의 제목은 내 속에 들끓고 있는 무엇을 건드리기에 충분하다. 블라인드 틈새로 내다보는 야경처럼 가려져 있는 듯한 표지 사진의 이미지부터 마음을 설레게 한다. 놀라운 건 이 사진들은 모두 고가의 카메라에 온갖 기교를 부려 렌즈에 담은 풍광이 아니라, 그때그때 구입한 일회용카메라로 담은 풍광이란 점이다.

일회성... 어쩜 그런 것이 청춘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그외에도 이곳의 사진들을 보며 느껴지는 모든 건, 황량함, 무소속, 거친 갈망 같은 것들이었다. 그것은 화장실 벽 옆에서 벌이는 한판 '테크노음악과 먼지의 비현실적인 축제'같은 것이기도 하고 제몸을 가릴 줄 모르는 콘크리트건물 같은 것이기도 하다. 어디서든 담을 수 있는 문명과 질서의 세계가 아니라, 뜨거운 모래바람과 태양의 입맞춤이 있는 외곽과 무질서 속의 편안함의 세계다.

어린시절 즐겼던 꿈과 마법의 유희를 회상하며 즐거워하고, 눈에 튀어 들어온 자몽 알갱이의 신맛을 눈으로 맛보는 청춘의 상큼함이 길 위를 걸으며 '사는 게 그런 거야' 라는 말을 되뇐다. 그래, 여행을 떠나면서 '우리는 어쩌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우리는 출발할 때 이미 알고 있'다. 글을 쓴 청춘, 앙토넹 포토스키처럼 욕망으로 들끓던 청춘은 어느새 몸만 남았다. 무엇에도 그리 감정의 변화가 크게 일렁이지 않는다.

하지만 <청춘. 길>의 사진들은 가지 못하고 지나쳐온 청춘의 시간들에 있었던 또 다른 길을 갈망하게 한다. 사실 낯설다고 하는 느낌은 눈여겨 보지 않았고 마음에 담지 않았다는 얘기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내가주지 않은 눈길로 그것들은 한낱 박제가 되어버렸다. 이곳의 풍경은 살아있다. 검은 밤바다의 파도가 용트림이라도 하는 것 같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때때로 동물들의 가련한 삶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우리의 눈물을 다정한 그 무엇에 고정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누렇고 흐릿한 배경에 가늘게 떨며 걸려있는 백열등은 청춘의 눈빛일까? 다정한 눈빛을 소유한 청년은 어느 노파에게 거금을 제물로 바치고 그 보다 20년 정도를 더 산 사진가는 어느 조촐한 공동묘지를 넓고넓게 담는다. 묘지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아담하고 예쁘장하다. 청춘의 길 위에 묘지가 있음에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청춘. 길>은 사진과 글이 꼭꼭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게 매력이다. 사진은 사진대로 흘러가고 글은 글대로 흘러간다. 책장의 양면 가득 펼쳐지는 사진들은 이전에 내가 내 마음의 렌즈에 담아보려 하지 않았던 풍경들이다. 이런 비주류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풍경을 건너고 있다. 베르나르 포콩은 사실 청춘의 길을 지나온 사람으로 풍경을 보는 눈에 이글거림을 숨기지도 않을 뿐더러 그윽하다. 발자국이 제멋대로 나 있고 가늘고 굵은 돌멩이가 박혀있는 텁텁한 흙바닥에 나란히 꽂혀있는 두 개의 시멘트조각. 모양도 제각각이며 거친 이 조각을 렌즈에 이토록 멋지게 담다니. 길은 달라도 모두 살아 꿈틀거리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커브길을 하나 돌고, 언덕이 바다를 향해 갑작스레 기울어지는 내리막길을 지나고 나면 시작된다.'

청춘의 사내는 어느새 중년의 아름다움을 예감하고 있는 걸까? 청춘은 상대적이다. 언제나 지나온 시절은 아쉬움이 남는 청춘의 길이다. 그 청춘의 아쉬운 한 자락을 부여잡고 오늘도 그보다 더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