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알라딘도서팀 > [알립니다] 청소년으로 새롭게 쓴 <사회계약론>에 서평 써주실 분을 찾습니다

안녕하세요 ^^

아이세움에서 출간한 새 책 <인간을 위한 약속, 사회계약론>에 서평을 써주실 분을 찾습니다. 루소가 쓴 <사회계약론>을 청소년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쓴 책입니다. 언뜻 어렵게만 생각되는 <사회계약론>이지만 이 책이라면 안심하고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초등고학년~중학생 자녀가 있으신 분이나, 또래 아이들을 접할 기회가 많은 분이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29일 목요일 오전 10시까지 댓글을 통해 신청해주시면 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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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29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받은 후 15일 이내에 서평 올릴 것..
 
 전출처 : 가넷 > [진중권의 교양 돋보기|열정과 이해관계]

[진중권의 교양 돋보기|열정과 이해관계]

희로애락 삼킨 차가운 ‘경제적 인간’
외향 인성 근대화 거치며 내성적 인간으로 … 물질 소유의 욕망 다른 모든 정념 희생

베르니니의 ‘다비드’ (1623~24)

한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몸부림치며 울던데요?” 일본에 갔다가 들은 얘기다. 가족이 죽었는데 땅을 치며 곡을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럼 “일본 사람들은 가족이 죽어도 울지 않느냐?”고 물었다. 일본인들도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을 슬퍼하기는 해도, 한국 사람들처럼 격렬하게 감정을 표출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고 한다. 문화가 다르면 감정의 구조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독일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내가 살던 기숙사 옆에 큰 병원이 있었는데, 종종 거기서 커다란 비명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사망한 환자의 가족이 내지르는 절규다. 그러던 어느 날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게 땅을 뒹굴며 울부짖는 이들이 대부분 검은 머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지의 죽음에 격렬한 슬픔을 나타내는 이들은 라틴계나 동양계뿐이고, 금발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요란하게 우는 것은 거의 보지 못했다.

냉정과 열정

한국의 길거리에서 이따금 목격하는 게 있다. 다 자란 성인들이 서로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멱살을 잡는 장면이다. 특히 도로에서 접촉사고가 나면, 두 운전자가 벌컥 문을 열고 튀어나와 다짜고짜 삿대질을 한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에서 독일인들은 다르게 행동한다. 사고가 나면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나와 “구텐 탁!”이라고 인사를 한 뒤 경찰관이 올 때까지 도란도란 얘기하며 기다린다.

물론 이것이 반드시 동서양의 차이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동양에도 일본처럼 비교적 냉정한 문화가 있는가 하면, 서구에도 라틴계처럼 비교적 뜨거운 문화가 있는 것이다. 유학 시절, 주세페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친구랑 길을 걷는데, 갑자기 베를린공대의 못생긴 건물을 보더니 두 팔을 벌리며 외치기를 “오, 수학과 건물이여. 그대를 사랑하노라” 하는 것이다.

이런 감정구조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일본의 경우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 혹은 자본주의화에 성공한 나라다. 반면 서구의 라틴계 나라들은 문화적 보수성 때문인지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근대화에 늦은 축에 속한다. 이것으로 보아 감정을 자제하는 문화는 ‘근대화’의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앨버트 허시먼의 ‘열정과 이해관계’는 중세의 열정이 근대의 냉정으로 변하는 과정을 다룬다. 중세인들은 감정이 풍부했고 그것을 즉각적으로 표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 외향적 인성이 근대화를 거치면서 어느새 제 감정을 억누를 줄 아는 내성적 인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허시먼은 세 철학자의 텍스트를 재료로 하여, 서구인의 내면에서 벌어진 이 변화의 궤적을 추적한다.

   


이성으로 정념을 정복하라

폰 스테판 로흐너의 ‘성 빌립보를 조롱한 사람’(1450~51·왼쪽). 외르크 브로이의 ‘십자가를 진 예수를 조롱한 구경꾼들’(1501년경).

데카르트의 과제는 감정에 치우친 사람들을 이성적 존재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격정에 휘둘려 합리적 판단을 그르치지 않는 존재. 이런 존재가 되려면 이성의 힘으로 희로애락의 정념을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사람들이 격정에 휘둘리는 것은 정념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 따라서 정념의 메커니즘을 인식하기만 하면 정념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정복하기 전에 지도부터 만든 것처럼, 정념이라는 미지의 대륙을 정복하려면 먼저 정념의 지도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정념론’에서 데카르트는 인간이 가진 모든 정념을 일일이 나열한 뒤, 그것들을 비슷한 것끼리 묶어 체계적으로 분류한다. 아울러 육체에서 발생한 정념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지, 당시의 해부학적 지식에 기초한 생리학적 분석을 내놓는다. 가령 사랑이라는 정념에 관한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오성이 자기 앞에 사랑의 대상을 그릴 때, 이 사고가 일으키는 인상은 동물 정기들을 여섯 번째 부분의 신경을 통해 창자와 위의 둘레에 있는 근육들로 이끈다. (생략) 그 정기들은 사랑스런 대상에 대한 첫 생각이 거기에서 일으킨 인상을 강화하면서 정신으로 하여금 이 생각 위에 멈추도록 강요한다. 이로써 사랑이라는 정념이 성립한다.”

이성으로 정념을 극복하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철학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데카르트 철학으로 무장한 고전주의 비평가들은 감정을 즉자적으로 표출하는 바로크 예술을 싫어했다. 가령 이탈리아의 조각가 베르니니의 ‘다비드’는 당시 고전주의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골리앗을 향해 돌을 던지는 다비드의 찡그린 얼굴에 격정이 표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정념으로 정념을 다스리라

하지만 데카르트의 말대로 정말 이성만으로 야생마 같은 정념의 힘을 억누를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그 행위의 후과를 몰라서 하는 짓이라고 말했다. 범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아무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어디 범죄자가 범죄가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라서 범죄를 저지르는가?

똑같은 얘기를 데카르트에 대해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정념의 메커니즘을 아는 것만으로 과연 정념의 광포한 힘을 극복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격정이 왜 일어나며, 그것을 표출하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뻔히 알면서도 격정에 휘말리곤 한다. 따라서 ‘이성으로 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처럼 ‘이성으로 정념을 극복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견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사뭇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정념은 그것과 반대되는 정념, 그것보다 더 강한 정념에 의하지 않고서는 억제될 수도, 제거될 수도 없다.” 한마디로 이성은 무력하기 짝이 없어 광포한 정념의 힘을 극복할 수 없다. 따라서 정념은 오직 그보다 더 강한 다른 정념으로써만 억누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술이라 할 수 있다.

   


차분하면서도 강한 정념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에게 욕을 하는 민중(1480년경·오른쪽).

데이비드 흄은 경험주의 철학자답게 경험에서 출발한다. 현실의 여러 사례들을 관찰해보니 이성은 무력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일 뿐이며, 정념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외에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흔히 ‘이성의 힘으로 정념을 극복했다’고 말하는 경우에도, 잘 살펴보면 실은 이성이 아니라 하나의 정념을, 또 다른 정념을 가지고 극복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는 말은 ‘의식은 무의식의 노예’라는 프로이트의 명제를 연상시킨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가 ‘정신’ 혹은 ‘이성’이라 부르는 의식은 무의식의 명령에 따라 욕망을 실현하는 방도를 찾는 시종의 구실을 할 뿐이다. 때문에 이성이 감히 정념을 정복할 수는 없고, 정념을 극복하려면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다른 정념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흄은 ‘격렬한’ 정념과 ‘강한’ 정념을 구별한다. 대개 격렬한 정념은 냄비와 같아서 순간적으로는 달아올라도 열기가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의 행위를 그르치는 정념은 대부분 이 부류에 속한다. 반면 어떤 정념은 온돌처럼 차분하면서도 오랫동안 지속된다. 정념을 극복하는 흄의 전략은 이 ‘격렬하나 약한 정념’을 ‘차분하나 강한 정념’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탄생

그렇다면 문제는 ‘차분하고 강한 정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격정을 억누르게 해주는 이 강력한 정념. 앨버트 허시먼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이해관계(interest)’, 즉 무한한 물질적 소유의 욕망이라고 한다. 이해관계는 격렬하지는 않으나 어떤 것보다 강하여, 다른 모든 격정을 굴복시킬 수 있다. 이렇게 ‘이해관계’로 모든 격정을 억누르는 존재, 그것이 바로 근대인이라고 한다.

근대인은 그 모든 정념의 풍부함을 단 하나의 정념, 즉 이해관계에 종속시킨다. 이성이란 이 물질적 욕망의 실현에 필요한 노하우를 제공해주는 수단일 뿐이다. ‘이해관계’가 근대인을 움직이는 동력이라면, ‘이성’은 이 욕망의 전차를 조종하는 핸들이다. 이렇게 ‘이해관계’라는 단 하나의 정념에 차가운 계산능력을 가진 근대인이 바로 ‘호모 에코노미쿠스’다.

오늘날 세계의 모든 이들은 이미 ‘경제적 인간’이 되었으나 거기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고객의 요구가 도를 넘어섰다고 느끼면, 한국의 상인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더러워서 안 팔아.”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고객이 항의하면 무조건 “스미마셍”을 연발하며, 절대로 그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순간의 불쾌함을 참고 이익의 영원성을 추구하는 일본인은 한국인보다 더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가깝다.

   


정념의 부활

캥탱 마시스의 ‘화폐교환사와 그의 부인’(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근대인의 무표정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언젠가 어느 체스 챔피언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세계 챔피언이 되었어도 그의 얼굴에는 기쁜 표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상대가 두는 수에 제 감정의 동요를 보여주지 않으려고 극도의 냉정을 유지하는 버릇 때문에 정작 기뻐해야 할 때조차 기쁨을 표출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챔피언의 얘기는 이해관계라는 단 하나의 욕망을 위해 다른 모든 정념의 풍부함을 희생시킨 근대인의 상징이 아닐까?

사실 한국인들은 근대화의 과정이 짧아서 그런지 아직도 쉽게 정념에 휘둘리는 편이다. 격정에 휘둘려 판단을 그르칠 때, 대개의 경우 불필요한 폭력이나 이해관계의 손실로 이어진다. 하지만 정념이 풍부한 게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가령 한국민의 그 격렬한 열정이 없었다면, 제 자신의 이해를 희생시켜서라도 표출해야 했던 그 고귀한 분노가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의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냉정한 태도로 합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맘껏 기뻐하고, 한껏 슬퍼하고, 무섭게 분노하는 것이야말로 생명활동의 본질이 아닐까? 기쁠 때 기뻐하지 못하고, 슬플 때 슬퍼하지 못하며, 분노할 때 분노하지 못하는 것을 어찌 ‘삶’이라 부르겠는가. 이익과 계산만으로 살아가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실은 삶의 대부분을 희생시킨 불행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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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무의 저편

                                                 김 선우

 

웃통 벗고 수박을 먹는데

발가락에 앉았다 젖무덤을 파고드는

파리 한마리

손사래도 귀찮아 노려보는데

 

흡, 부패의 증거인지도 몰라

 

눈치챈 걸까 이제 아무도 못 믿게 된 걸

구겨진 발톱,숱하게 생발을 앓아온 희망에게

내밀 수 있는 건 소화제 몇알

비굴하지 않게 예스, 라고

말할 줄 알게 된 것도 다 들통난 걸까

 

질기고 안전한 아랫배 속에서

냄새를 피우는 영혼의 끌탕

(왜, 노출된 내장만이 추한 것일까)

 

섹스하고 싶어,라는 말 대신

미치도록 사랑해 너얼,

 

그의 내부도 부패중인 걸까

어지러워, 나의 절정에

왕성하게 생식하는 저 황홀한 잡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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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로드 무비' 대신 '여정영화'를 써 주세요


 - 우리말 다듬기 회원님께 -

  안녕하십니까? 국립국어원입니다.

  

  국립국어원(원장 이상규)은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 다듬기(www.malteo.net)’ 사이트를 개설, 일반 국민을 참여시켜 함부로 쓰이고 있는 외래어, 외국어를 대신할 우리말을 매주 하나씩 공모하여 결정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주인공이 여행을 통하여 인간관계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게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를 가리키는 외래어 ‘로드 무비(road movie)’의 다듬은 말로 ‘여정영화’를 최종 선정하였습니다.

 

  ‘로드 무비’가 기본적으로 주인공이 여행하거나 먼 길을 가는 과정에 관한 내용를 담고 있는 영화이므로 ‘여정영화’로 바꿔 쓰더라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회원님께서도 ‘여정영화’가 ‘로드 무비’를 대신하는 우리말로 완전히 정착될 수 있도록 널리 써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난주(2006.6.15.~6.20.) 축구에서 프리킥, 코너킥, 스로인 이후에 일어나는 조직적인 플레이를 가리키는 외래어 ‘세트 피스(set piece)’를 대신할 우리말을 공모했는데 그 결과 총 417건의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국립국어원은 이 가운데 ‘세트 피스’가 축구에서, 공격 전술이나 작전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는 점과 미리 계획한 바에 따라 조직적으로 공격하는 일을 가리킨다는 점을 중시하여 다음 다섯을 투표 후보로 선정하였습니다. 회원님께서는 ‘세트 피스’의 다듬은 말로 다음 다섯 가운데 어느 것이 좋으십니까?


  1. 짬짜미전술(미리 약속을 해 놓고 공격하는 전술이므로. ‘짬짜미’는 ‘남모르게 자기들끼리만 짜고 하는 약속’을 뜻하는 순 우리말임.)

  2. 기획전술(미리 계획한 바에 따라 공격하는 전술이므로)

  3. 맞춤전술(특정한 상황에 미리 맞추어 놓은 대로 공격하는 전술이므로)

  4. 꾸림전술(특정한 상황에 맞추어 미리 꾸려 놓은 대로 공격하는 전술이므로)

  5. 약속전술(미리 약속해 놓고 그 약속에 따라 공격하는 전술이므로)


 

  한편 이번 주 6월 22일(목)부터는 어떤 단체나 조직에서 주가 되는 인물, 즉 핵심 인물, 중요 인물, 중심 인물을 가리키는 외래어  ‘키맨(key man)’을 대신할 우리말을 공모합니다.

 

  부디 회원님께서도 이번 주 중 저희 사이트를 찾아 주셔서 외래어 ‘세트 피스(set piece)’와 ‘키맨(key man)’의 다듬은 말을 결정하는 데에 직접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말 다듬기 사이트’를 방문하실 분은 여기를 눌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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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 동산 어린이 첫번째
캐서린 스콜즈 지음, 로버트 잉펜 그림, 송성희 옮김 / 동산사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처음 만난 건 2년 전 12월이다. 동산사의 '동산 어린이 첫번째' 라는 시리즈 제목을 달고 '세상과 처음 만나는 나, 세상과의 교감을 위한 생각 깊은 책'이라는 간명한 목표를 걸고 나온 책이다. 이번에 4학년 남학생들과 이 책을 다시 보게 되었다. 원제는 이다.

<평화는...>은 우선 글과 그림이 눈길을 잡아끈다. 아이들에게 이 책의 독특함에 대해 물어보니 주인공이 없고 그림이 이상하고 글이 시처럼 적혀있다고 반응했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코드다.

이 책의 주인공은 '평화'다. 평화는 추상적인 단어이지만 여기서 평화는 살아서 움직이고 자라고 널리 퍼져나가고 보살펴주어야 하는 것, 생명이 있는 것으로 구상화된다. 이런 글 옆에 어떤 삽화가 어울릴 거라 생각하는가. 역시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백색 깃털의 비둘기 한 마리가 땅으로 날아내려오는 그림이 클로즈업되어 그려져있다. 평화는 도처에 있지만 찾을 때에만 보이고 지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언제나 나와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그런 성격을 지닌 제법 까다롭고 귀한 친구다.

이 책의 삽화는 시적이며 철학적인 글 못지 않게 강한 흡입력이 있다. 아이들 눈에 그림이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글과 잘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래서 그림만 다시 보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그림인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끌어내 주었다. 예를 들자면 물통을 머리에 이고 걸어가는 아프리카 여인네들의 뒷모습 같은 것이다. 그에 해당하는 글은 "평화란 필요한 것들을 갖는 것입니다" 이다. 물부족 국가가 많고 생명에 필요한 깨끗한 물을 구하기 어려워 고통 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지구의 다른 편에 있다는 사실에 아이들은 놀라는 눈치였다.

아이들의 눈에 낯설어 보인 삽화는 <살아있는 모든 것은>의 일러스트레이터, 로버트 잉펜의 작품이다. 그 그림책에서 전율적으로 전해지던 생명력과 섬세함이 이 책에서는 좀더 부드러운 색조로 전해온다. 사건 중심의 이야기책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추상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글들을 사실적이며 구체적으로 보여주어 평화의 의미를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미덕을 발휘한다. 글과 그림이 똑같은 비중으로, 전하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평화란 긍정적인 조건과 환경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보편적인 생각을 뒤집어주는 글귀도 깊은 감동을 준다.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특별한 평화를 언급하는 부분이다. "어떤 이들은 커다란 고통이나 두려움을 느낄 때, 또는 위험한 순간을 마주했을 때에도 평화를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철학이나 신앙이 필요하고 그것들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 뿐만 아니라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준다고 일러주고 있다.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긴 하지만 개인의 마음속에만 평화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평화는 우선 개인에게, 사람과 사람 간에, 나라와 나라 간에,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있어야하는 것이다. 개인의 평화와 사회의 평화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적이며 공존하여야 하는 필요충분조건같은 것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사람간의 평화 이외에 사람과 자연과의 평화를 이야기한다. 환경을 파괴하는 일들로 사람과 자연 사이에는 평화가 깨어지고 있음을 언급하는 글귀가 퍽 마음에 든다. 우리의 생각을 확장하게하고 눈과 마음을 크고 넓게 만들어주는 글이다. 감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 평화를 실천할 수 있는 방안들을 짚어주는 글귀들은 실천과 행동의 중요함을 알게 해준다.

이 책은 아이들의 사유를 폭넓게 한다. 평소 생각하기를 어려워하고 피하려하는 아이들과 때로는 추상적이며 본질적인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얻는 게 많을 것 같다. 즉물적이고 표피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려드는 아이들에게 진지한 생각을 끌어내려는 이런 책들이 '입에 쓴 약'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실제로 평화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몸 바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끌어내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작은 노력에 대하여도 말해보았다. 작게는 자신의 내면에서의 평화로 시작하여 가족의 평화, 친구간의 평화는 물론 불우이웃돕기나 쓰레기줍기 같은 실천을 하겠다고 말하는 아이들. 개구쟁이들이지만 그들의 착한 눈을 믿는다.

나는 지금 먼저 '나의 평화'를 실천하고 있나.. 마음에 평화가 깨어지며 시비를 걸고 싶어질 때면 이 책을 조용히 펼쳐볼 것이다. 짙은 갈색의 속지와 전체적으로 채도를 낮춘 갈색톤의 삽화가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마치 평화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땅에 있다고, 아니 있어야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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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6-2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있는 리뷰네요!
저랑 비슷한 일을 하시지만 더 매력적인 일을 하시는 것 같네요. 잉, 부러워요!

또또유스또 2006-06-24 0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야말로 즉물적이고 표피적인 것만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지라 이 책은 저를 위하여 읽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요즘 시비가 걸고 싶어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