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건
엘리에트 아베카시스 지음, 이세진 옮김 / 예담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지적이고 매력적인 여성 바르바라가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을 때 아이를 가지려는 계획을 했던 건 아니었다. 아이는 그녀에게 있어서 완전한 타자였다. 어느 날, 그녀의 뱃속에 자리를 잡고부터 그녀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쥐고 흔드는 무법의 이방인이었다. '행복한 사건'은 그녀의 철학논문 주제인 '타자의 문제'와 병행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독백처럼 나아간다. 독백형식이다보니 관념적인 서술이 많은 편이다. 인물의 구체적인 행동이나 아름다운 묘사, 섬세한 감정의 실타래를 풀기보다는 직설적이며 냉소적인 어투로 감정의 최대혼란을 겪고 있는 주인공의 심리를 여과없이 솔직하게 보여준다. 주인공의 심경에 비추면 적절한 문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흥미로운 제목, <행복한 사건>은 타자가 어떻게 내 안에 들어와 나로 인해 신의 존재로 구현되는지를 말하고 싶은 자전적 소설이었다.

나로선,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의 경험을 두 번 겪은 독자로서 여기 바르바라가 겪는 심리전이 구체적으로 와닿았다. 병원에서 첫아기를 안고 퇴원하여 집으로 들어올 때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수술로 낳았기 때문에 일주일 정도의 공백이었는데도 집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들어오자마자 아기침대에 아기가 깨지 않게 조심하여 아기를 눕힌 후 젖병을 준비하고 기저귀를 쌓아두고 목욕 용구도 챙겼다. 이전의 내 생활은 소리없이 잠적하고 아주 새로운,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들이 날마다 반복되었다. 잠깐 미루거나 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 스무장도 넘게 나오는 천기저귀를 빨고 분유를 세네시간에 한 번씩 타서 먹이고 얼러서 재우고 기저귀를 갈고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고, 그런 생활이 나를 미치도록 몰아가던 시기가 있었다. 아이를 돌보는 행복감이나 재미는 솔직히 길지 않고 나머지는 잠이 모자라 거의 빈사상태에 밤에도 울고 보채는 아이를 업고 안고 꾸벅꾸벅 졸던 시기가 있었다.

여기 바르바라가 니콜라에게 느끼는 감정들도 무척 공감된다. 남편은 방관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요즘의 젊은 남편들이야 육아에 많은 부분 동참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로서 감당해야하는 것들은 영역 밖의 고립된 성과 같다. 그 성 안에서 여성 혼자 부대끼며 하루에도 몇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대책없이 울어대기만 할 때 아기는 바르바라가 느끼는 것처럼 에일리언이나 다름없다. 아기가 '부부사이의 파괴자'이거나 '섹스트러블' 메이커처럼 굴던 시기도 분명 있었다. 아이 때문에 다투게 되고 서로 신경을 곤두 세우고 피곤해하며 지쳐선 우리가 언제 사랑이나 했던가, 그저 습관처럼 살던 시기도 분명 있었다. 분명 행복한 사건 중의 '덜 행복한' 사건이었다.

바르바라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은 부분은 모유수유 숭배자라는 점이다. 나같은 경우는 젖이 잘 나오지 않아 모유를 먹이지 못했다. 병원에서 초유 조금 먹인 게 모두다. 그리고는 스스로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아주 건강하게 자랐지만 모유수유의 장점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감이 든다. 이러는 나도 어머니의 젖을 먹지 못하고 자랐다. 어머니의 가슴이 어떤 것인지 안타깝게도 잘 알지 못한다.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

<행복한 사건>에서 모유수유는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몸도 마음도 황폐해져가는 바르바라를 지탱하게 한 정신적 힘이자 거듭 나게 한 계기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모유를 먹이며 어린 딸 레아가 '신'이라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느낀다. 레아로 인해 비로소 절대성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글귀는 모성의 본질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타자를 대하는 순수성을 시사한다. 자신은 레아를 낳았지만 레아는 자신을 낳았고 레아로 인해 그녀는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됨이다. 모성이란 모유수유에서 비롯된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보인다. 작가는 페미니즘적인 시각과 마초적 성향을 다소 균형있게 그리려고 한 점이 눈이 띄는데, 모유수유의 영역은 여성고유의 것이며 현대적인 어떤 문화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점을 간파했다. 작가는 그런 점에서 가장 본능적인 포유류의 특징을 들어 여성이 어머니로 진화하는 위대한(?)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는 복잡한 길이었다.

이 책을 덮으면 가족이란 이름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대개는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아이를 낳으면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분담해야하며 좀더 다른 의미의 사랑으로 엮어가야 한다고 알고는 있다. 하지만 삶의 소소한 부분들이 거슬리고 짐이 된다고 느낄 때 자신의 역할을 성스럽게 수행하기란 쉽지가 않다. 딸과 어머니, 아들과 어머니, 시어머니와 며느리 그리고 자매간의 심리도 사실적으로 그려지는데, 이들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 가장 많은 상처를 주고 가장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여기며 산다. 여기에 아이가 들어가면 조금은 사이가 부드러워지며 각자의 위치가 재정립되기도 한다. 아이와 관련된 것들에 대한 이견으로 서로 마음을 다치기도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 아이로 인해 가족의 틀이 굳건해지고 그속에서 웃음소리가 난다는 사실이다. 니콜라에게서 다시금 예전의 사랑을 떠올리고 '너무 사랑했기에 더 이상 서로 사랑할 수 없게 됐구나, 사랑 없는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구나.' 라고 중얼거리는 바르바라는 이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가족의 구심점이 되었다. 또 다시 임신을 한 것이다.

<행복한 사건>은 모성 신화에 대한 솔직한 불평불만으로 시작하여 결국 모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으로 맺는 듯하다. 모성신화에 끝까지 발칙한 도전을 했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지 궁금해진다. 남성의 입장에서 아이를 갖게 되는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이렇게 육체적이며 심리적인 이야기가 노골적으로 나올 수 없을 테다. 몸으로 심정으로 직접 겪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성은 위대하다느니 성스럽다느니, 모성은 그 모든 희생 위에 있다느니 하는 진부한 이야기로는 모성 신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자의식이 강하며 자기애가 많은 바르바라가 타자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기에 이르는 과정이 여기 '모유수유에서 재임신까지'다. 모르긴 해도 둘째 아기를 낳고 기를 때면 제법 달라져있을 바르바라를, 경험자들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타자에 대한 연민'이 그 해답이다. 이는 그녀의 삶을 통틀어 진정 행복한 사건임에 분명하다.

- 레아가 울면서 보챌 때, 그 애가 내게서 멀어져 가고, 내가 그 애에게서 멀어져 갈 때 나는 레아에게 동정심을 품었다. 동정심은 아름답다. 아니, 동정심이 인류의 첫 번째 단계는 아니다. 본능적이기는 해도 그것은 가장 숭고한 감정이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타인이 느끼는 것을 함께 느끼는 감정이다. 타인의 기대를, 희망을, 고통을 느끼는 감정이다. 어떤 성스러운 이끌림에 따라 우리는 타인에게 몸을 숙이고 손길을 건네며 자신의 품으로 맞아들인다. 그것은 본래적이며 심오하다. 그게 바로 인간적인 것이다. 어머니의 젖과 가슴, 그것이 바로 그러한 관대함이다. (p 227)

 ps : 이 책의 뒤쪽 책날개에는 알라디너 두분의 실명과 멋진 서평이 적혀있어요. 올리지 못해 아쉽네요. 보신 분은 누구일지 알아맞혀 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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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10-03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아프락사스님은 알겠는데 한 분은 또 누구실까나...

씩씩하니 2006-10-03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물만두님 아니에요?????

프레이야 2006-10-03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아니에요. 여섯자랍니다..^^

프레이야 2006-11-28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그래요 정말. 효부상, 열녀상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 굴레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