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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종이수염 ㅣ 한빛문고 16
하근찬 지음, 강우현 그림 / 다림 / 2002년 7월
평점 :
하근찬님의 단편이 셋 실려있는 책이다. 모두 향토적인 색채가 느껴지는 문체가 익살스러우면서도 서글픈 삶을 사는 서민의 모습을 보여준다. 순박한 언어 속에 그들이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냉정한 현실이 느껴져 안타깝다. 작가는 전쟁터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헤맨 경험이 있는, 전쟁을 몸소 겪은 사람으로서 그의 작품에는 전쟁과 그것이 남긴 상처가 자주 등장한다. 작가의 체험이 글에 녹아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지만 작가는 전쟁 자체를 그려내기보다는 그것이 개인에게 입힌 상흔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관념적으로 전쟁의 잔인함을 그린다거나 거창하게 국가와 민족, 이념을 그리기보다는 보잘 것 없어보이는 시골 사람을 등장인물로 하여 소박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에 전쟁이 할퀴간 상처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를 그저 보여주기만 하는 방식이다.
첫번째의 단편, <흰 종이수염>은 동길이라는 초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데 이 아이는 징용 간 아버지 때문에 사친회비도 못 내고 교실에서 쫓겨날 판이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동길이는 이런 현실에 발끈하고 욕설을 내뱉는다. 어느 날 마루에 누워자고 있는 남자는 돌아온 아버지인데 한쪽 팔이 없다. 뎅그러니 흔들리는 오른쪽 옷소매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목수일을 해야하는 아버지로선 한쪽 팔이 없으니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찾아야한다. 술에 취해 헐렁대며 들어온 아버지는 흰 종이수염을 만들고 동길은 다음날 거리에서 흰 종이수염을 단 아주 괴상스러운 사람을 보게 된다. 광대옷을 입고 몸의 앞뒤로 극장광고판을 지고 있는 그 희한한 사람의 눈과 동길의 눈이 마주치는 장면에서 가슴이 덜컥한다. 동길은 흰 종이수염을 건드리며 희롱하는 친구에게 주먹세례를 퍼붓고 모든 상황을 눈치챈 아버지는 그저 "야가 와 이리라노?" 라는 말로 넘기려 허둥대고 있다. 아마도 그 눈에는 눈물이 맺혔을 테다.
작가는 경북 영천이 고향이다. 그래서 여기 작품들의 대사는 모두 경상도 사투리로 나온다. 그 말을 소리내어 읽어보면 참 구수하다. 투박하지만 끈끈한 정이 묻어나는 맛이다. 작가는 묘사를 길게 하지 않는다. 설명이나 자기해석도 자제한다. 간결한 문장과 소박한 단어가 시골무지랭이들의 삶을 잘 보여주면서 그들만이 나눌 수 있는 속깊은 정을 느끼게 해준다. 경상도 말이 그렇듯이 대사 자체도 장황하지 않고 곱살스럽지도 않다. 때로는 그저 침묵(말줄임표)으로 일관하는 부분도 있고 툭툭 내뱉듯이 단어가 끊겨서 나온다. 그래도 그 안에 담긴 속정이 코허리를 시큰하게 한다.
부자간의 속정이 진한 감동을 주는 작품은 <수난이대>다. 태평양전쟁 때 징용 가서 한 쪽 팔을 잃은 아버지와 한국전쟁에 나가 한 쪽 다리를 잃은 아들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장면은 가슴 저리다. 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아들은 지팡이와 고등어를 양손에 나누어 들고 아버지의 목을 꽉 끌어안고 매달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그래도 떨어지지 않고 잘 건너는 그들. 크레파스로 아이가 그린 것처럼 그려놓은 삽화가 기괴한 느낌을 자아낸다. 희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속에 진한 눈물이 숨어있다.
전쟁이 가져온 불행이 이들에게는 단지 불편함일 뿐이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시대를 한스러워하는 대목도 찾아볼 수 없다. 역사의식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는 가방끈 좀 길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짧은 생각이다. 한 쪽 다리로 다니려니 영 불편하다고 말하는 아들과 그래도 살아있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아버지. 나가서 하는 일은 내가 하고 집에 앉아 하는 일은 네가 하면 안 되겠나?, 이렇게, 버겁고 가여운 삶에 빨리도 적응하며 살아갈 방편에 몰두하는 아버지. 장성한 아들을 업고 한 쪽 팔로 업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아버지의 어깨가 상상할수록 묵직하다. 작가는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이들의 대사만으로 전쟁의 아픔을 전해준다.
<전차구경>은 옛날 전차운전수였던 할아버지와 지하철이 개통되는 날을 기대하며 부라보콘을 먹는 손자의 이야기이다. 박물관의 고물 같은 옛날의 전차와 오늘날의 빠르고 깨끗한 지하철을 대비하여 보여주면서 조주사가 느끼는 옛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독자를 끌고간다. 산업화로 발전이 가속화하고 인심은 각박해지는 시대에 살고있으면서 옛 맛에 대한 그리움을 놓지 못하는 조주사를 통해 옛 것의 미덕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하루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전차의 속도와 지하철의 속도가 글 전체에서 대비됨을 느낄 수 있다. 옛 것에 매달려 있는 것은 좋지 않겠지만 수수하고 느리며 인정이 느껴지는 옛 전차의 풍경처럼 옛 것을 돌아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한 것이다.
속도와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의 논리 속에서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지 못하는 조주사의 쓸쓸함이 술기운을 빌어 건들건들 추는 춤 속에 묻어나온다. 골동품이 되어버린 전차는 마치 조주사 자신의 모습인 것 같아 더욱 애절해진다. 요즘 아이들이 이 대목에 공감하기란 어렵겠지만 뭔가 더 소중한 가치가 있다면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 중학 1학년 아이들과 읽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