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혜경과 힘께 읽기 2화
헤세로 가는 길/정여울 글, 이승원 사진

부산의 갈맷길 걷기를 선도하는 순수 단체
갈맷길협동조합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http://gobusan.kr/bbs/board.php?bo_table=withbooks&wr_id=6

정현종 시인은 시 <방문객>에서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가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함께 데리고 오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의 일생이 함께 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오는 것, 그 폭풍우를 감당하는 일은 위대하고 그 일을 감당하는 우리는 작은 영웅입니다. 헤세는 말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정말로 행하면서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영웅이라고.

사람이 오는 것은 우연의 깃털을 어깨에 단 필연입니다. 사람이 가는 것은 어떨까요. 필연의 배낭을 멘 우연 혹은 그 우연이 낳을 예측불허의 기쁨과 예측가능한 충만을 기대하며 걸어가는, 좀더 적극적인 방랑입니다. 삶이 여행이라는 흔한 비유를 전제로 말이지요. 아쉬움이 남는 경우는 준비가 다소 미흡했거나 기대가 너무 자기중심적이었거나 이해의 폭이 좁았을 가능성이 있으니 그 길을 탓하지는 않기로 합니다. 사람이 오는 길과 사람에게 가는 길은 이미 닮아 있으니까요.

사람에게 가는 길은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로 가는 길입니다. 그 사람이 걸었던 길을 한 번 더 걷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을 한 번 더 사는 일, 그 사람을 마음 다해 사랑하는 일에 버금갑니다. 한 사람의 고뇌와 취향, 삶을 사랑하는 방식을 알고 싶으면 그에게로 가는 길밖에 없겠습니다. 

정여울의 마음여행에세이 <헤세로 가는 길>은 오래 흠모해왔던 한 사람을 두 발로 찾아가는 설레는 여정입니다. 저자가 썼듯 누구나 마음 속에 오래 간직한 '그리움의 뿌리'를 더듬어가는 길입니다. 학창시절 한 번쯤은 읽어 보았을 헤르만 헤세의 소설이나 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문호 정도의 피상적인 이름은 잊어도 좋습니다. 헤세의 그림 '정원사'의 노랑색 물감으로 칠한 것 같은 명랑한 띠지와 면지가 책을 드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환하게 해줍니다. 이후는 저자가 찾아간 대로 길을 따라가 볼까요. 그가 남긴 시, 소설, 수필, 서간문, 수채화는 물론 헤세박물관과 산책로, 그의 집 카사 카무치 등 헤세의 흔적들을 찾아 가는 길에 여행자의 시선이 담긴 사진과 더불어 감성과 지성을 함께 길어올린 문장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자신과 가장 닮은 자연의 사물이 구름임을 알았습니다. 초기작 <페터 카멘친트>에서 말합니다. "구름이 땅과 하늘 사이에서 망설이고 동경하고 저항하면서 자랑스레 걸려 있듯이 우리 영혼 또한 시간과 영원 사이에서 망설이고 동경하고 저항하면서 자랑스레 걸려 있다고"요.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정형화되지 않고 머물지 않고 누구의 뜻대로도 조종 당하지 않는 구름이야말로 헤세의 영혼을 가장 닮은 자연의 천사였다"고 씁니다. 그리고 제1장에서 헤세가 태어난 곳, 독일 남부의 작은 온천마을 칼프로 우리를 데려가 구름을 닮은 여정을 시작합니다. 

 

제2장에서는 헤세 자신의 눈부신 분신들을 소개합니다. 길에서 만나는 벗들입니다. 수많은 작품 중, 네 가지(수레바퀴 아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데미안, 싯다르타)를 통과하며 우리를 내면의 여행으로 이끕니다. 사람에게 가는 길의 근본이 되는 길, 즉 '나'에게로 가는 길'입니다. 일찌기 열네 살에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자퇴 후 모든 걸 독학으로 정진했던 헤세, 그의 작중 인물을 칼 융 심리학의 측면에서 사유하는 길입니다. 헤세의 인물들, 결국은 헤세의 분신들에게 가는 길에서 저자가 그랬듯 우리 안의 상처가 치유받는 경험을 할 것입니다. 

 

제3장에서는 두 번의 이혼 후 세 번째 아내 니논과 조용히 말년을 보내고 영원히 잠든 스위스 몬타뇰라로 갑니다. 칼프에서 취리히와 루가노를 거쳐 도착한 몬타뇰라에서 저자는 자신이 살아내지 못한 모든 것과 만나는 경험을 합니다. 저자가 살아내지 못한 모든 것에는 죽음도 포함됩니다. 몬타뇰라는 헤세가 전쟁을 반대한 이유로 조국 독일의 탄압과 상처를 받고 40년을 정착한 마을입니다. 여기서 그는 후기 걸작들을 쓰고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합니다. 그러나 헤세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보다는 이웃집 할아버지, '몬타뇰라의 현자'로 불리길 좋아했습니다.  

 

이 책은 무겁지 않은 여장을 꾸리고 가볍게 쉬엄쉬엄 헤세로 가는 길에 동행하게 합니다. 어느 장을 마음 가는대로 펼쳐 읽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헤세의 수채화와 명문장들 그리고 저자의 사유를 적절히 배치해두어 보기에도 좋습니다. 무엇보다 표지의 그림에서 끌립니다. 노란 작업복을 입고 물뿌리개를 들고 기우뚱하게 서 있는 정원사 헤세의 자화상인데, 풍경에 사람을 그려 넣지 않았던 헤세가 유일하게 사람을 그린 1932년도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볼 때면 어린왕자가 떠오릅니다. 작년 여름,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전시하였던 '헤세와 그림전'에도 이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전시의 부제는 '나에게로 가는 여행'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밝고 행복한 분위기가 넓은 전시실을 압도했는데, 특히 스크린에 재해석한 미디어 아트 앞에 서면 루가노 호숫가를 걷는 헤세와 니논이 살아 움직이고 헤세의 수채화 속 나비와 꽃, 풀들이 바람에 나풀대며 숨을 쉬었습니다. 쉽고 편안하게 사는 방법은 몰랐지만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알았다던 시인이자 화가이며 정원사, 헤세에게 걸맞는 헌사였습니다. 그이의 혜안이 엿보이는 주옥같은 문장들과 함께 그윽한 육성을 직접 귀로 들을 수 있어서 감동이었습니다. 저자는 헤세로 가는 길에 헤세박물관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썼습니다. 

 

 

누구든 제대로 말할 기회를 얻어
진심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책들에 관한 메모」 

(116쪽) 

 

 

헤세가 술을 즐겼다는 사실은 이 책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친구와 와인을 마시며 허물없는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했고 신장을 염려하면서도 와인을 마시며 터키의 고관대작이 된 듯 행복한 착각을 했다니 의외의 귀여운 면이 있습니다. 헤세의 젊은 얼굴은 노년의 얼굴과 사뭇 달랐던 게 기억납니다. 싸늘한 데드마스크에 묻힌 뜨거운 기운도 함께. 그 많은 열정을 다스리며 평생 고독을 사랑했던 사람, 헤세로 가는 길에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불쑥 들어서도 좋을 책입니다. 1877년 세상에 태어난 곳에서부터 1962년 세상을 떠난 곳으로 그 시간과 공간의 여정을 차근차근 밟아가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이 책을 보고 나면 어느 날인가 성큼, 헤세로 가는 길에 나서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헤세로 가는 또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는 저자가 미덥기도 합니다. 저자는 눈이 참 밝습니다. 가령 이런 문장, 개 한 마리를 데리고 골목을 걸어가는 여인의 수수한 뒷모습을 담은 사진 옆에서 빛을 발합니다.

 

세상은 걸어 다니는 각도로 바라볼 때 가장 아름답다. 사람들의 뒷모습 또한 걸어 다니는 각도로 바라보았을 때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 걸어 다니는 각도는 끝없이 변하기에 우리는 걷는 동안 무한육면각체로 꿈틀거리는 대상의 변화무쌍함을 느낄 수 있다. 내 마음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산책을 하는 동안에 가장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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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lly110 2016-02-11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소개된 곳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타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오히려 그는 글감을 얻었을 것 같기도 해요.

프레이야 2016-02-11 08:56   좋아요 0 | URL
동감이예요. 몬타뇰라까지 가보고 싶어요^^